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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답사

태조 이성계와 아들

작성자오비이락|작성시간19.10.22|조회수1,597 목록 댓글 0

청계천의 광통교에 거꾸로 쳐박힌 정릉석물

이성계(李成桂)에게는 비(妃)가 둘이 있었는데 한씨(신의왕후)와 강씨 (신덕왕후)였다.

한씨 소생으로는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등 6남과 경신, 경선공주 등 두 딸이 있었고, 강씨 소생으로는 경순공주와 방번, 방석(芳碩) 의안대군이 있었다.

한씨는 건국 직전에 죽었으며, 장남 방우(芳雨)는 제 아버지의 역성혁명을 찬성하지 않아 술을 폭음하다 요절했다고 한다.

2남 방과(芳果)는 1차 왕자의 난으로 왕으로 등극한 이방원(李成桂)의 허수아비 정종(定宗)이다.

3남인 방의(芳毅)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4남 방간(芳幹)은 1차 왕자의 난때 방원과 함께 난을 주도하여 1등공신이 되었으나, 애가 좀 무식하고 사리에 어두운데다 욕심이 많아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이방원에게 유배되었다.

5남 방원(芳遠)은 이성계의 아들 중 과거에 합격해 가장 똑똑했으나 야심이 큰 인물이었다.

결국 방원(芳遠)은 1차 왕자의 난에서 숙적 정도전(鄭道傳)과 이복동생 방번(芳蕃), 방석을 죽이고 2차 왕자의 난을 승리로 이끌어 아버지 이성계를 찬밥으로 만들었다.

강씨 소생인 방번(芳蕃)은 개국당시 12살, 방석(芳碩)은 11살 꼬마였다. 이성계(李成桂)는 왕위에 오른지 한달만에 귀여워하던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사랑하는 강비가 매일 울며 짜며 졸랐고, 정도전(鄭道傳)이 강력히 민 결과였지만 개국에 가장 공이 컸던 방원(芳遠)은 이때부터 모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성계의 팔자는 기구했다.
이성계(李成桂)는 두명의 비와 8명의 아들, 그리고 3명의 딸을 두었으나,두 아내와는 생전에 사별했고 8명의 아들중 6명이 제 명을 못살고 죽었다.

자신도 개국후 6년여 동안 왕 노릇을 하다가 왕자의 난 이후 쫒겨나 함흥차사(咸興差使)의 유래를 만들었다.이성계(李成桂)는 귀여워하던 두 어린 자식과 사위가 아들에게 죽는 험한 꼴을 보면서 태종8년 풍병으로 73세에 죽었다.

이성계(李成桂)가 그때 죽었기에 망정이지 좀 더 살았더라면 더 더러운 꼴을 볼 뻔했다.

태종 이방원(李芳遠)은 이성계가 그처럼 사랑했던 계모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을 파헤쳐 한양성 밖으로 보내 버리고,그 묘석을 파내어 광교를 만들도록 하여 뭇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게 했다.

이장된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은 묘로 격하되었으며, 그것이 바로 지금의 정릉이다.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健元陵)의 봉분에는 지금도 잔디 대신 억새풀이 자라고 있다.
강씨와 함께 묻히고자 했던 아버지의 바램을 무시한 아들 이방원(李芳遠)이 이성계의 고향인 함흥에서 억새풀을 가져와 심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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