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등청정 덕분에 崇禮門이 국보 1호가 되고
소서행장 덕분에 興仁之門 보물 1호가 된사연
仁 = 동 흥인지문
義 = 서 돈의문
禮 = 남 숭례문
智 = 북 숙정문
숭례문의 현판이 세로인 이유는 불의 형상인 崇자와 禮자를 세로로 세워 관악산의 화기에 맞서게 했다
동대문의 현판이 4글자인 이유라는 것 중의 하나는 서남북 모두 地의 기운이 있으나 유독 동쪽만이 약하여 음이 같은 之자를 한번 더 써 地의 기운을 보충하였다.
풍수지리에 입문하면 배운다.
• 1905년
을사조약으로 통감부가 개설되자 서울 거주 일본인들의 모임인 일본거류민회는 대대적인 ‘도시개조’를 계획했다. 핵심은 용산을 포함한 지역에 40~50만명을 수용할 신시가지를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당시 조선군 사령관이 “낡아빠진 남대문은 빨리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심지어는 “포격으로 파괴하자”는 극단론까지 제기되었다.
하지만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는 이에 극력반대하였다. 그는 고종황제도 알현한 바 있는, 일본거류민 가운데 최고유력자였고 하세가와 사령관과 하야시 곤스케 (林權助) 일본공사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나카이의 반대논리는 “남대문은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 빠져나간 문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건축물은 남대문 이외의 두 세가지 밖에 없습니다. 파괴하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까.”
동대문도 마찬가지 이유로 소서행장이 입성한 문이어서 파괴되지 않았고한다.
(출처: 오타 히데하루의 논문. 근대 한일 양국의 역사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지 정책)
•1907년 요시히토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일본은
"대일본 제국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리고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었습니다.
1927년 여담입니다만 경성에서 간행된 일본인 여행자를 위한 가이드 북 ‘취미의 조선여행(趣味の朝鮮の旅)’에서 남대문을 소개하는 글을 보면 “그 옛날 풍신수길의 조선정벌 때 가등청정이 남대문에서, 소서행장이 동대문에서 경성으로 쳐들어갔다고 하는데, 그 남대문이 이 남대문이다.” 이렇게 씌여 있으니 당시 일본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경성입성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소서행장은 큰 저항없이 여주에 도착했으나 연일 쏟아진 장맛비로 강물이 불어난 데다 나룻배를 구할 수 없어서 인가를 허물어 뗏목을 만들어 도강하다 왜군은 적지않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소서행장은 다른 도하점을 찾아 양평을 지나 북한강의 하폭이 좁은 곳에서 가까스로 강을 건넜습니다.
가등청정은 죽산에서 용인으로 진출하던 중 약간의 저항을 받았으나 그대로 지체하지 않고 행군하여 척후병들이 서빙고 건너편 한강에 진출했습니다.
왜군이 도착한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군민들은 상관의 질타와 독전에 아랑곳하지 않고 산지사방으로 도망쳤습니다.
먼저 도착한 것은 소서행장이었습니다.
동대문은 열려있었고 군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유인책인 줄 의심하였으나 곧이어 성안이 텅텅 빈 것을 확인하고 왜군은 대오를 추슬러 입성했습니다.
대부분의 보병은 다리를 절고 발에 물집이 생기고 다리 통이 부어 제대로 걷지를 못하였습니다.
전쟁이 터진 지 20일 만에 경성이 함락된 것이었습니다. 5월 2일 저녘 무렵이었습니다.
가등청정은 배를 모으느라 지체되어 그 다음날 새볔 남대문으로 입성하였고 선진다툼에서 진 가등청정은 이를 갈며 분통해 했고 숙소가 정해 지기도 전에 본국에 풍신수길에게 보고의 서신을 보넸습니다.
「급히 아뢰옵니다.도성에서 10리쯤 되는 곳에 가리천(한강)이란 큰 강이 있사온데 물을 건너 지체없이 진격하였으나 국왕은 2~3일 전에 이미 퇴거했다고 합니다. 곧 국왕의 뒤를 쫓아 갈 것입니다. 다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5월 2일 술시」시각 까지 적어 놯습니다.
1934년.소화 9년 8월27일 월요일 조선총독부 관보 제2290호. 조선총독부 고시 제30호. 조선총독부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 제1조에 따라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는
보물 1호 경성 남대문
보물 2호 경성 동대문을 지정하였습니다.
그들은 국보는 본토(일본)이외에 있을 수 없다며 조선의 문화재를 보물로만 지정하였습니다.
해방후 우리가 우리의 보물을 국보라 부를 수 있게 되어, 우리의 문화재를 국보와 보물로 나누게 되었음에도 총독부가 정한 순서는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조선총독부가 고시한 보물들은 현재 다음과 같이 지정되어 있습니다.
보물
1호 남대문 → 국보1호
2호 동대문 → 보물1호
3호 보신각 종 → 보물2호
4호 원각사지 10층석탑 → 국보2호
5호 원각사 비→ 보물 3호
6호 중초사 당간 지주 → 보물4호
7호 중초사 3층 석탑 → 보물5호
8호 북한산진흥왕순수비 →국보3호
※중초사 3층 석탑은 보물5호에서 경기도 유형 문화재 164호로 강등 되었습니다.
윗 글에서 모든 내용은 교차검증이 되나 특히 가장 중요한 1905년도의 사연은 일본인 유학생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가 2003년에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에 제출한 석사학위논문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고적조사와 성곽정책>에 수록된 내용임을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