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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답사

숙종과 여인들

작성자오비이락|작성시간20.02.13|조회수1,148 목록 댓글 0

숙종과 그의 여인들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이야기는 조선 최고의 스캔들이자 사극의 단골소재이기 때문에 숙종(肅宗)은 아마도 우리나라 사극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왕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친근한 숙종(肅宗)이 조선 최고의 금수저 라는것은 알고 있나요?

'왕이니까 당연히 금수저겠지 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같은 왕이라도 엄마가 흙수저인 경우도 있고, 세자 출신이 아닌 경우도 있는데 숙종은 조선의 왕 중에서도 '순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임금이었다.

조선 27명의 임금중에서 적장자(嫡長子)가 왕위에 오른 이는 7명뿐이었는데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숙종(肅宗)처럼 대를 거쳐 모두 외아들인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왕들은 연산군을 제외하고 대부분 재위기간도 짧고, 단명했기 때문에 약 46년 동안 재위한 숙종(肅宗)의 입지는 어마어마 하다고 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는 세자빈-왕후-왕대비라는 3관왕 코스를 밟은 유일한 왕비(王妃)였다. (고종의 비(妃)로 유명한 명성왕후(明成王后)와는 다른 인물)

조선시대 여러 왕비 중에는 세자빈을 지냈으나 왕후에 오르지 못한 경우, 왕후에 올랐으나 왕대비가 되지 못한 경우, 왕대비는 되었으나 세자빈은 아니었던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장자 프리미엄 끝판왕 숙종(肅宗)은 1674년 14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왕에 대한 자의식(自意識)이 대단해 20세 이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잔뼈가 굵은 고단수의 신하들을 자기 뜻대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 불같은 성격의 왕 - 아버지와는 다르게

숙종(肅宗) 이순(李淳)은 어렸을 때부터 영민했으나 병약했다. 이순(李淳)이 성장하여 10세가 되자, 서인의 골수분자이자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인 참의 김만기의 열 살난 딸과 혼인했으니, 그녀가 인경왕후 김씨다.숙종의 장인인 김만기의 친동생이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쓴 김만중(金萬重)이다.

인조반정 후 정권을 장악한 서인들에게는 하나의 묵계(默契)가 있었다.
바로 왕비와 세자빈은 무조건 서인(西人) 집안에서 나와야 된다는 것이었으며, 이는 만세토록 권력을 장악하려는 서인들의 음모였다.

이러한 서인들의 권력욕 때문에 신료들뿐만 아니라 왕과 왕비, 그리고 대비까지도 당쟁(黨爭)에 휩쓸리게 되는 한심한 시대가 온다.

금수저로 태어난 숙종 이순(李淳)은 불같은 성격을 지녔다.
아마도 성품이 부드러워 이도 저도 못한 아버지를 보며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포부가 합해진 탓이었을 것이다.

온 몸에 화증(火證)이 가득했고 성격도 아주 괴팍해 어머니인 명성왕후 조차 이렇게 한탄할 정도였다.
"내가 낳은 아들이지만, 성질이 아침, 점심, 저녁 모두 다르니 어미인 나도 감당이 안 되는구나."

숙종(肅宗) 역시 자기 몸에 열이 많다는 걸 알고 있어 한겨울에도 손에 부채를 들고 있어야 할 정도 였다.
"나의 화증(火證)이 뿌린 내린 지 이미 오래고 나이도 쇠해 날로 더욱 깊은 고질이 되어간다. 무릇 사람의 일시적 질환은 고치기 쉽지만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것은 화증이다.화열이 위로 올라 비록 한 겨울 이라도 손에서 부채를 놓을 수가 없다"
- 숙종실록 30년 12월 11일-


🌹 정치 고수 - 환국의 대가

변덕이 죽 끓듯 했던 숙종(肅宗)은 그의 치세동안 당쟁은 극과 극을 달려 수많은 모함과 중상모략, 고변이 판을 쳤다.숙종은 여러 번의 판쓸이를 통해 노론과 소론 그리고 남인을 번갈아 등용하는 정치를 하면서 왕권을 굳혀 나갔다.

그러나 정권을 뒤엎는 환국(換局)이 있을 때마다 몰락하는 파당의 인물들은 어제의 충신에서 오늘의 역적으로 몰렸고, 매번 수십 명씩 처형당했다.
이런 사태를 초래한 숙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숙종대에도 작은 사건들은 줄을 이었으나, 대규모 반란이나 역모 사건은 없어 그의 치세가 겨우 중간은 갔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숙종(肅宗)은 왕실 관계자들의 복권(復權)에 나서서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죽은 방번과 방석을 복권시켜 무안대군, 의안대군으로 추증하고 국가 제사를 받도록 했다.

또 이방원에 의하여 허수아비 왕 노릇을 잠깐 했지만 묘효(廟號)도 없던 공정대왕에게 '정종'이라는 묘호를 올렸고, 노산군의 묘효를 '단종'으로 정했다.

또 <노산군일기>를 <단종실록>으로 승격시켜 단종(端宗)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이에 따라 자연히 사육신(死六臣)도 복권되었으며,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게 했다.
덕분에 사육신이 복권되면서부터 전까지는 괜찮은 재상으로 평가되었던 신숙주(申叔舟)가 찬밥이 되기 시작했다.

한심한 인간들!
죽일 때는 모조리 역적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역적이 아니라 하고 제사도 드려야 된다고 신원(伸寃)을 시키곤 했으니,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조선에서 억울하게 죽었겠는가?

숙종(肅宗)은 광해군대에 시행되기 시작한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했고, 숙종 38년에는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에 50개의 돈대(墩臺) 를 쌓아 방비를 강화했다.

숙종의 치적을 하나 꼽으라면 '상평통보(常平通寶)' 를 널리 퍼뜨려 화폐경제를 정착시켰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숙종(肅宗)은 쉰 살이 넘으면서부터 자주 병에 시달렸다. 특히 안질이 심해 거의 시력을 잃었고 늘 두통에 시달렸다. 그런데다 전국에 자연재해가 몰아치고 역질이 돌아 숱한 사람이 죽었다.

병에 지친 숙종은 이이명(李頥命)을 불러 독대한 후 후사를 부탁하고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도록 명했다. 그리고는 세자에게 아들이 없으니 뒷날 연잉군(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삼아 왕위를 계승케 하라고 이이명(李頥命)에게 비밀히 당부했다.
병약한 데다 노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가 왕위를 이었을 때 뒷감당 못할 것을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숙종은 일단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다음 실정을 꼬투리 잡아 폐세자시키고, 연잉군(延㭁君)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면 자신이 평생 추구해 온 강한 왕실도 유지되고, 또 세자와 연잉군 모두의 목숨도 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자의 대리청정은 아무 문제가 없어 노론의 극심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세자는 무난히 경종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숙종(肅宗)은 장희빈의 아들 경종(景宗)보다 나중에 총애하기 시작한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귀여워했다.

원래 왕자나 공주가 혼인을 하면 궐 밖에 나가 살게 마련인데, 연잉군(延㭁君)은 혼인한 후에도 8년이나 곁에 데리고 있었다.
이러한 연잉군(延㭁君)에 대한 숙종의 사랑이 연잉군으로 하여금 왕위에 대한 야심을 키우게 했다.

나중에 경종에 대한 역모사건에 연잉군(延㭁君)의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어 위험한 지경에 이르자, 연잉군이 경종(景宗)의 독살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연잉군(延㭁君)은 마마를 앓아 얼굴이 살짝 곰보였다.

아들인 영조 다음으로 재위기간이 길었던 숙종(肅宗)은 재위 46년째인 1720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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