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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답사

효종의 북벌정책

작성자오비|작성시간20.02.22|조회수568 목록 댓글 0

♡ 효종(孝宗)의 북벌정책 ♡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은 종통(宗统, 맏아들의 혈통)상의 약점을 안은채 1645년 9월27일 27세의 나이로, 적장손인 소현세자의 아들을 제치고 세자의 자리에 올랐다.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왕세자의 자리에 오르자 소현세자의 부인과 그 집안은 철저하게 몰락했고 강빈(姜嬪)의 억울한 죽음은 항상 효종(孝宗)을 괴롭혔다.

당시 황해감사였던 김홍욱이 강빈(姜嬪)의 신원과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의 석방을 탄원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역모죄로 죽임을 당한 강빈(姜嬪)의 억울함이 밝혀지면 왕위는 조카에게 되돌아갈지도 모를 형국이 되었다

상소를 읽은 효종은"'나도 모르는 사이 모골(毛骨)이 송연해진다."고 고백했다.효종(孝宗)은 곧장 김홍욱의 체포 명령을 내렸고, 김홍욱은 국문을 당하다가 맞아 죽었다.강빈(姜嬪)의 신원(伸寃)을 주장하던 김홍욱이 맞아 죽자 민심은 요동을 쳤다

효종은 김홍욱 사건을 무마하면서 민심을 수습하는 여러가지 정책을 시행했으니, 그 중 하나가 북벌이다.

" 내 반드시 삼전도의 수모(受侮)를 갚으리라."

그는 조석윤을 동지중추 부사로 등용하고 송시열(宋時烈)을 이조참의로 등용하는 등 북벌(北伐)을 대의로 내세우면서 여러가지 개혁을 시도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북벌(北伐)에 대한 효종의 의지는 확고했다.

효종(孝宗)은 1659년 3월11일 송시열과 독대하여 북벌(北伐)에 대한 자신의 전략을 피력했다
'저 오랑캐(청)는 반드시 망하게 될 형편에 처해 있소.
경(송시열)이 지난번 주자의 말씀을 들어 오랑캐가 중원(中原)의 인재를 얻어 중국의 제도를 배우면 점점 쇠약해진다는 것이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오.

지금의 한(汗, 청 군주)이 비록 영웅이라고는 하나, 주색에 깊이 빠져있어 그 형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오. 오랑캐의 일은 내 익히 알고 있소. 신하들은 모두 내가 군대를 다스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있소. 그 이유는 청(淸)을 물리칠 좋은 기회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정예화된 포명 10만을 길러 두었다가 기회를 봐서 저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쳐들어갈 계획이오."
- 송서습유 <악대설화>중에서 -

효종(孝宗)의 바람과 달리 송시열은 북벌론을 실현에 옮길 인물은 아니었다. 결의에 찬 효종의 북벌정책에 맞장구는 커녕 격물(格物)과 치지(治知)를 이야기하며 치국(治國) 이전에 수신(修身)이 먼저라고 했다

마음 수양과 민생안정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북벌론은 명에 대한 사대(事大)에서 나온 것이었다. 군신관계였던 명을 파멸시킨 청(淸)에 대해 복수심은 있어도 현실적으로 복수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북벌론(北伐論)은 목표는 같았지만 목적이 달랐다.

두 사람의 북벌론은 동상이몽(同床異夢)에 불과했다

효종(孝宗)은 송시열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사림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이들 세력들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효종(孝宗)은 과연 왕권강화만을 위해 북벌(北伐)을 이용한 인물 이었을까?

왕권강화를 위해서는 반청적(反淸的) 사림세력의 지원이 필요했고, 반청적 사림세력 역시 재기를 위해서는 효종의 지원이 있어야 했으니, 그들의 정치적 의도는 북벌론(北伐論)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되었던 것이었다.그러나 인질시절 청나라 전쟁터를 누빈 효종(孝宗)에게 북벌은 청에 대한 실질적인 불안감이었는지 모른다.

청나라는 반드시 멸망해야 하는 오랑캐였지만, 과연 멸망한 청나라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그곳은 요동이었다

중국을 차지했던 청(淸)이 멸망하여 요동지역으로 돌아온다면 조선은 다시금 위기에 빠지게 될 것이고, 조선은 북벌을 주장함으로써 계속 청(淸)의 동향을 살필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효종(孝宗)의 숭무정책 ♡

효종(孝宗)은 무기력한 성리학만 추종하는, 나태하기 짝이 없는 선비들이 그득한 나라에 무풍을 진작시켜 활력을 불어 넣으려 애썼다. 무풍을 진작시켜야 나라가 활력을 되찾을 것이고, 그래야 북벌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끝나고 조선이 청(淸)에게 항복할 때, 항복조건에는 조선에서 성을 수리하거나 축조하지 못하게 하는 조항이 있었다.

물론 군사를 증강해도 안 되고 군사훈련도 금지되어 있었다. 청(淸)은 자주 보내는 사신을 통해 조선을 감시하고 있었고, 많은 청의 첩자들이 조선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효종(孝宗)은 가끔 능을 참배할 때 몰래 군사훈련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무풍을 가로막는 더 큰 문제는 나라 안에 있었다.

수백년간 문신이 우위를 지켜오면서 숭문천무
(崇文賤武)의 전통이 굳어진 나라에서 그 아래위를 바꾸려는 시도는 모든 대신들의 반대를 불러왔다
모두 문관(文官)인 대신들은 무관들이 자신들과 동렬에 서는 것을 꺼리고 반대했다.

그러니 숭무의 기풍이 일기 전에 정예군을 양성한다는 것은 꿈에 지나지 않았다
조일전쟁 때도 그랬지만 사실 조선군은 군율도 제대로 안 잡혀 있고, 훈련도 제대로 안 된, 말하자면 양 떼나 놀이패들 같은 존재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지휘관들이 모조리 문관(文官)이었기 때문 이었다.

허구한 날 유교 경전만 읽어 대던 사람들이 사령관이라고 버티고 앉았으니, 훈련이며 전쟁이며 병법을 어떻게 알겠는가? 이런 거지 발싸개 같은 전통 때문에 조선은 조일전쟁 때 깨지고, 병자호란 때도 깨지고, 그냥 내리 깨지면서도 멍청한 임금들은 이를 바꾸지 않았다

이런 오합지졸들을 정예병으로 탈바꿈 시키기 위해 효종(孝宗)은 이완(李浣)을 어영대장에 임명해 군기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여기 이완(李浣)을 등용시킨 에피소드를 잠깐 살펴보자

'청나라를 치려면 믿을 만한 장수가 필요하다.' 고 생각한 효종은 어느 날 밤, "모든 무신들을 궁으로 불러들여라!" 고 명령을 내렸다. 이어 궁궐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따로 불러 "너희들은 화살의 촉을 뺀 다음 무신들이 들어오는 대로 활을 쏘도록 해라."

잠시후 무신들이 하나 둘 궁으로 들어왔고 병사들은 그 무신들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무신들은 깜짝 놀라며 몸을 피했으나 한 사람만은 화살을
피하지 않고 날아오는 화살을 모두 맞았다

그는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포도대장 등을 지낸 이완(李浣)이었다.

"날아오는 화살을 용감하게 맞다니, 참으로 대단하오." 효종(孝宗)은 이완을 굳게 믿고 붓 한자루를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지금부터 충성으로 나를 도우라!"

집으로 돌아온 이완(李浣)은 붓을 놓고 고개를 갸웃 거렸다.'어째서 무관인 나에게 칼이 아닌 붓을 내리신걸까?'

한참을 고민하던 이완(李浣)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갔다. 이완은 붓을 손으로 내리쳤고, 쪼개진 붓대 속에서 흰 종이가 나왔다. 그것은 자신을 어영대장으로 임명(任命)한다는 임명장이었던 것이다

'북벌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라는 뜻이로구나!'
이완은 임명장을 보며 효종(孝宗)이 얼마나 청나라를 치고 싶어하는지 다시 한 번 깨닫고 군사를 다루었던 경험을 살려 강한 군대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효종(孝宗)은 문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대
(輪對)무신제도'를 만들어 조선 개국 이후 최초로 무신을 문신보다 우대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무신 우대는 이후 정조와 대원군 시절 두 번에 걸쳐 더 있게 되는데 이런 철학을 가진 왕들은 다 괜찮은 통치자들이었다.

효종(孝宗)은 개명(開明) 군주였다
한 번 믿은 신하들을 끝까지 믿고 간언을 듣는 현군
(賢君)이었으며, 언제나 인재에 목말라했다
북벌은 둘째 치고 참으로 안타깝게 요절한 쓸 만한 왕이었다.효종(孝宗)은 겨우 재위 10년을 채우고 죽고 말았는데, 그가 10년만 더 재위했어도 아마 조선은 나태와 무기력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좌우간 조선이 뭐가 안 되려니까 쓸 만한 인물은 꼭 일찍 죽는다.


♡ 의문스러운 효종(孝宗)의 죽음 ♡

<효종실록>에 효종의 병세가 처음 기록된 날은 효종 10년 4월27일이다. 북벌(北伐)이라는 원대한 꿈을 가졌던 효종은 1659년 5월, 재위 10년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따르면, 효종의 귀 밑에 종기가 심각했고 이에 어의 신가귀
(申可貴)가 침을 놓아 처음에는 고름을 조금 짜내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몇 말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피를 쏟고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아침에 침을 맞은 효종이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에 승하하였다고 하니 침을 맞자마자 운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궐 뜰에 있던 송시열과 정태화가 비보를 듣고 뛰어들어 갔지만, 효종의 싸늘한 주검만을 응시할 뿐이었다.효종(孝宗)은 한마디 유언도 없이 승하했다.

효종(孝宗)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 했을까?
그해 4월2일에 그는 가마를 타고 비원(秘苑)에 행차하여 생의 마지막이 되어 버린 시를 읊었다.
'비 개인 뒤 맑은 빛에 온갖 초목이 새롭고/
한자리에 모인 늙은이와 젊은이는 임금과 신하로다/
꽃과 버드나무 속의 누대와 정자는 마치 그림 같은데/때때로 들리는 꾀꼬리 소리는 주인을 부르는구나'
- 연려실기술 <효묘대점> -

효종(孝宗)은 신하들에게 "9월 늦가을 단풍이 들면 그때 다시 부르겠다."고 약속했으나 곧바로 슬픈 기색으로 "후에 만날 것을 어찌 약속할 수 있겠는가?" 하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한 말을 남겼다.
딱 한달 뒤인 5월 4일 효종(孝宗)은 승하하였다.
효종(孝宗)의 갑작스런 죽음은 '타살설'에 무게를 두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효종의 종기를 터트려 죽게 만든 신가귀(申可貴)는 수전증이 심한 의원이었다.

종기를 터트리도록 명을 내린 사람은 효종 자신이었다. 이전에 효종(孝宗)이 말에서 떨어져 낙상으로 볼기에 종기를 앓았는데 신가귀
(申可貴)가 침을 놓아 고쳤고, 이를 신뢰한 효종이 이번에도 그에게 침을 놓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전증이 있었던 신가귀는 혈맥을 범하였다

일설에는 신가귀(申可貴)가 혈맥을 잘못 범한 것이 아니라 종독(腫毒, 종기의 독)이 심하여 이것이 흉부에 까지 퍼졌고, 혈도(血道)가 종기에 집중되었는데, 함부로 침을 놓아 터뜨렸다고도 한다
또는 효종의 병이 조선 왕실 대대로 유전되던 농가진이라는 약성 피부병 이라는 설도 있다.
농가진의 균이 혈액을 타고 들어가 패혈증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결국 효종(孝宗)을 죽게 만든 신가귀는 교형(絞刑)에 처해졌다.북벌을 효시로 내세운 효종
(孝宗)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한 군왕이었다.
인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뒤부터는 좋아하던 술도 일체 끊고 심기일전(心機一轉), 복수설치
(復讎雪恥)의 의지를 다져나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효종은 서인과 남인은 물론 재야사림의 지지를 상실해 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재야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을 중용하였지만, 왕권과 신권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조선시대 왕위에서 쫓겨나거나 혹은 타살설이 도는 군왕의 공통점은 전제왕권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왕권과 신권의 충돌에서 신권은 항상 승전가를 불렀다.누가 조선을 왕이 절대적으로 군림하던 시대라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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