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발의 봉조하(奉朝賀), 홍국영
봉조하(奉朝賀)는 조선시대에 전직 고급관원을 예우하여 퇴직한 뒤에 특별히 내린 벼슬을 말한다.
즉 종신토록 신분에 맞는 녹봉(祿俸)을 받으나, 실무는 보지않는 명예직으로 주로 원로 대신에게 내려준 벼슬이었다.
정조 즉위 초기에 3~4년간 조정을 좌지우지했던 풍운아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이 백발도 아닌 흑발의 봉조하(奉朝賀)였다.
그가 왜 32세의 젊은 나이에 정계 원로가 되어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그의 생애를 재구성해보자!
홍국영(洪國榮)에 대한 기록은 <정조실록> <한중록> <정종기사> <명의록>과 심낙수(沈樂洙)의 <은파산고(恩坡散稿)>에서 볼 수 있다.
홍국영(洪國榮)은 풍산 홍씨로 영조 24년(1748)에 한양에서 츨생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과 심낙수의 <은파산고(恩坡散稿)>에 따르면,
그는 용모가 준수하고 눈치가 매우 빠르며 수완이 좋아 임기응변에 능했다고 한다.
홍국영(洪國榮)은 자신이 글을 잘한다고 자부했으며, 실제로도 글에 재치가 있고 예리하면서도 자연스럽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성격이 방종하여 술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모여 놀기를 즐기고, 장기와 같은 잡기를 좋아해 명문가에서는 홍국영(洪國榮)과 교유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인물에 대한 평가는 크게 윤색되거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평가들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홍국영(洪國榮)이 학문에 전념하고 행실도 착실한 모범생 사대부가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항상 주위의 같은 연배들에게 "천하 모든 일이 내 손아귀에 있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 호언장담을 하고 다녔다는데, 이를 통해 그가 일찍부터 정치적인 포부를 갖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홍국영(洪國榮)이 그렇게 자신감이 넘칠 수 있었던 요인에는 가문적인 배경이 있었다.
본관이 풍산(豊山)인 홍국영(洪國榮) 가문은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으며 한양에 깊이 뿌리를 내린 쟁쟁한 노론 가문이었다. 홍국영의 6대조 홍주원(洪柱元)은 선조의 딸 정명공주의 남편, 즉 부마 영안위(永安尉) 였다.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은 홍국영에게 10촌 형제의 할아버지가 되며, 정조와는 멀기는 하지만 12촌 관계, 정순왕후 김씨와도 인척관계였다.
홍국영(洪國榮)이 1772년(영조 48) 25세 때 과거에 급제한 뒤 왕 가까이서 일하는 예문관원이 되고 동궁을 보좌하는 춘방사서가 된 것에는 이러한 가문의 영향도 있었다.
영조가 홍국영(洪國榮)을 아끼며 '내 손자다'라고 까지 했다는 것도 이런 배경에 힘입은 일이었다.
그러나 홍국영(洪國榮)은 출세하기 전까지는 어떤 정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기 주변에 사람들을 모아 세력을 키우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로지 정조밖에 없었다. 정조(正祖)의 뜻이 곧 자신의 뜻이며, 반드시 관철시켜야 할 뜻이었다.
정조가 홍국영(洪國榮)을 신임하게 된 까닭은 빠르고 정확한 정세판단과 정치적 감각외에 당쟁에 물들지 않고 파벌을 만들지 않았다는 점도 있었다.
또한 홍국영(洪國榮)은 궁궐 바깥 세상의 실상을 정조에게 알려주는 역할에도 충실했다.
정조(正祖)가 시중의 여론과 상황을 가감없이 접할 수 있는 소통 창구가 바로 홍국영이었다.
홍국영(洪國榮)이 세손을 처음 만났을 때 세손 이산은 스무 살, 홍국영은 스물 네살로 홍국영이 정조(正祖)보다 네 살이 더 많았다.
정조(正祖)가 세손으로 있으면서 외척인 홍씨가문과 정순왕후의 연합공격으로 왕위 계승이 위태로울 때 마지막까지 정조편에 서서 외척들의 모함에 좌절하지 말고 대항하도록 조언하면서 보좌한 사람은 홍국영(洪國榮) 한 사람뿐이었다고 말할 만큼 홍국영은 정조(正祖)에게 충성을 다했다.
홍국영(洪國榮)은 정조의 기대와 신임에 부응하여 외척인 홍인한과 정후겸 세력에 맞서 정조의 대리청정을 성사시켰고, 즉위 뒤 정조(正祖)는 자신을 충직하게 보호한 '의리주인(義理主人)' 으로 홍국영을 일컬으며 '경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겠는가'라고 말하곤 했다.
홍국영(洪國榮)은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승정원 동부승지(정3품)에 임명되었으나, 이 직책은 그가 은퇴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후 도승지로 승진하고 금위대장 겸 훈련대장을 겸임한 홍국영(洪國榮)은 홍인한 세력과 홍봉한 집안, 정순왕후의 친동생인 김귀주 등 외척과 소론 세력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이는 외척의 정치 간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정조의 생각과 잘 맞아 쉽게 성사될 수 있었다.
드디어 새파랗게 젊은 흑발의 홍국영(洪國榮)이 30세에 노론의 최고 실세로 떠올랐다.
궁 안에 머물면서 왕의 경호부대를 지휘하고 훈련대장으로 군권까지 장악했으니, 국정의 주요사안은 홍국영(洪國榮)을 거치지 않으면 정조에게 보고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정조는 즉위 직후 '국영(國榮)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에 대한 두터운 신임을 거리낌 없이 밝혔다.
홍국영(洪國榮)은 노론의 지도자로 위상을 강화하는 한편 동시에 소론을 심하게 압박했다. 그는 송시열(宋時烈)의 정적이었던 소론 윤선거, 윤증 부자의 관직을 박탈했으며, 송시열의 후손인 송덕상과 김종후를 조정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정권을 뒷받침했다.
또한 영조가 폐지한 이조전랑의 당하관 천거제도를 부활시켰다.
이 모든 것이 거칠 것이 전혀 없는 행보 였다.
홍국영(洪國榮)이 정조 정권의 실세로 뜨자, 모든 대신들이 홍국영 앞에서 굽실거리게 되었고,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홍국영(洪國榮)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정조에게 소생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정조와 외척이 되어 자신의 조카로 왕위를 이어나갈 속내였던 것이다. 홍국영(洪國榮)이 미남자였으니, 여동생도 아마 생긴 것은 멀쩡했을 것이다.
그러나 홍국영의 누이동생 원빈(元嬪) 홍씨는 자식을 낳지 못하고, 이듬해 5월 세상을 떠났다. 후계 계획이 무산되었어도 홍국영의 야심은 그칠 줄 몰랐다.
홍국영(洪國榮)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아들인 이담(李湛)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으로 봉하여, 왕통을 잇게 하려는 무리수를 두게 되었다.
홍국영이 정조의 신임을 믿고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이자, 정조는 1779년(정조 3년) 9월 26일 홍국영에게 입조(入朝)를 명했다. 이 날은 7년 전 정조와 홍국영이 처음 만난 날이었다. 정조를 만나고 돌아온 홍국영(洪國榮)은 곧바로 은퇴의 뜻을 밝히는 사직상소를 올렸다.
'저는 7년 간 국가의 일을 맡았는데, 그간 조정의 명령 대부분이 제 손에서 나왔습니다. 신이 한 번 궐문을 나가 다시 세상에 뜻을 둔다면 하늘이 신에게 반드시 죄를 줄 것입니다."
자진은퇴 형식이었지만, 실은 정조(正祖) 의 명에 따른 추방이었다.정조는 홍국영(洪國榮)의 사직상소를 즉시 허락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전과 이후 천 년 동안 군주와 신하의 이러한 만남이 언제 있었던가, 그리고 또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흑발의 재상은 있었으나 흑발의 봉조하는 없었는데, 이제 흑발의 봉조하(奉朝賀)가 있게 되었다."
봉조하(奉朝賀)는 은퇴하는 원로대신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직함이었다.죄를 물어 벌주지 않고 자진 은퇴 형식을 취하게 한 것은 정조가 홍국영(洪國榮) 에게 내린 마지막 은혜였다면 은혜였을까?
외척세력을 철저히 배격하고자 했던 정조(正祖) 로서는, 그러한 원칙에서 벗어나 왕위계승에까지 개입하려는 홍국영을 용납할 수 없었다.
홍국영(洪國榮)은 후궁이 쓸 수 없는 '원(元)'자를 써서 왕위계승에 대한 욕심을 내비쳤고, 원빈의 양자 이담을 완풍군(完豊君)이라 했는데, 이 작호 역시 정조의 후계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매우 불온한 시도였다.
'완(完)'은 전주 이씨, '풍(豊)'은 풍산 홍씨의 본관을 뜻한다.왕실 작호에 어머니 쪽 본관을 쓴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외척세력을 이용한 홍국영(洪國榮)의 야심이 엿보였던 것이다.
더구나 홍국영(洪國榮)의 행태는 탕평노선을 추구하는 정조(正祖)의 정치방향과도 맞지 않아서 그는 정조의 정치구상과 행보에서 치워내야 할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홍국영(洪國榮)은 차기 왕위를 자기 조카로 앉히려는 무리수를 두다가 팽당했다.
그러나 은퇴의 직접적인 원인은 누이동생 원빈(元嬪) 이 사망한 후, 정조비인 효의왕후를 의심하여, 내전의 나인 여럿을 잡아다 칼을 빼들고 혹형을 가하면서 원빈이 독살당한 증거를 찾아낸다고 멋대로 국문을 한 데에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왕대비, 혜경궁, 왕비를 포함한 궁궐 내의 모든 세력이 홍국영(洪國榮)을 적대시하게 되었고, 정조(正祖)도 매우 입맛이 썼던 것이다.
이후 정치무대에서 사라진 홍국영(洪國榮) 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홍국영(洪國榮)이 몰락하자 조정의 신료들이 홍국영을 탄핵하기 위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결국 은퇴한 홍국영(洪國榮)에게는 역모를 기도했다는 죄명이 씌워졌으나, 처형되지는 않고 도성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는 벌을 받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도성에서 쫓겨난 홍국영(洪國榮)은 강릉 근처 바닷가에 거처를 마련해 술 마시는 것으로 소일하며, 때로는 바다를 바라보며 통곡하면서 울분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1781년 4월, 홍국영은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병을 얻어 앓다가 죽었다고 하는데, 울화병이었으리란 추측이 많다.
29살때부터 32살 때까지 약 3년 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권력을 누린 홍국영(洪國榮)의 최후는 이렇게 쓸쓸하고 허무했다.
홍국영(洪國榮)의 삶은 정치와 권력의 무상함, 권력자의 처신과 행보, 왕과 신하의 관계 등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삶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