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 반란인가 혁명인가?
1811년(순조11) 홍경래, 우군칙(禹君則) 등이 중심이 되어 지방차별과 삼정의 문란에 항거하여 약 5개월간에 걸쳐 평안도 지역에서 일으킨 대규모 반란이 홍경래(洪景來)의 난이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조선 봉건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앙법(移秧法)과 이모작(二毛作)으로 대표되는 농업 생산 기술의 변화와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은 농민층의 분화를 가져왔다.
이 결과 지난날의 봉건지주와는 다른 서민 지주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주가 등장 했으며, 이들은 사회, 경제적인 역량이 성장함에 따라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교육의 기회가 늘어난 이들 부농(富農)들이 양반으로 입신(立身)하려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자, 조선 조정에서는 문무 과거의 급제자를 크게 늘렸다.
하지만 종래의 관직체제와 인재 등용 방식으로는 더 이상 포용할 수 없으니 불만 세력은 점점 늘어만 갔고, 입에 풀칠도 못하는 몰락한 양반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더구나 19세기의 세도정치로 인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에게 모든 부(富)가 집중되어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탐관오리(貪官汚吏)의 부정은 극에 달했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갔다.
또한 상업의 발달로 부유한 상인들이 출현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부를 착취해 가는 권력층의 횡포에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삼정(三政)의 문란에 시달린 백성들은 종전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항거, 봉기 등의 적극적인 방법으로 지배층의 부패에 대응했고, 이러한 움직임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당시 조선은 평안도에 대한 지역 차별이 심했다.
북쪽 국경선과 붙어 있다는 지리적인 특성상 전쟁이 자주 발생 하는데다, 북방 출신의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기 때문에 야만인이라고 차별 대우를 받았다.
더욱이 다른 지역에 비해 성리학의 보급이 느려 교육열이 약했던 탓에 과거합격자 배출이 드물었다.
홍경래의 난에 적극 참여한 계층은 몰락한 양반과 부를 축적한 신흥상인들, 그리고 일부 농민들이었는데, 당시 서북 지방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살았는지 <택리지(擇里志)>의 기록을 보자!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300년 이래로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 혹 과거에 합격한 자가 있더라도 벼슬이 현령에 지나지 않았다.서울 사대부는 서북지방 사람과는 혼인하거나 벗하지 않았다.
서북지역은 자원이 많고 수공업 및 광산업이 활발해 조선후기의 경제성장과 함께 그 어느 지역보다도 더 큰 경제적인 부(富)를 쌓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해지는데, 사회적 지위는 낮아 차별대우가 심한 곳, 그곳이 바로 서북지역 즉 평안도였으니 이런 요인들이 홍경래(洪景來)로 하여금 난을 일으키게 만든 원인이었다.
평안도 용강 출신인 홍경래(洪景來)는 몰락한 양반집의 아들로서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계속 낙방했고, 늦게나마 낙방한 원인이 자신의 실력이 모자라 그런 것이 아니라 평안도민에 대한 지역차별임을 알게 되었다.
키가 작았으나 다부졌던 홍경래(洪景來)는 어릴 적부터 웅략이 있고 지혜가 뛰어났으며, 틈만 나면 검술을 배우고 날마다 200리 길을 걸었다.
출입할 때는 늘 장검을 찼고, 밤낮으로 병서와 술서를 공부해 병법에 능통했다.
과거 합격의 꿈에서 깨어난 홍경래(洪景來)는 사회체제의 모순에 분노를 느끼고, 가산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양반의 서자 우군칙(禹君則)과 의기투합하여 10년간에 걸쳐서 봉기를 준비했다.
홍경래는 10년 동안이나 국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인정과 풍속, 산천과 도로 등을 면밀히 살피고 동지들을 규합해 가면서 은밀히 봉기(蜂起)를 준비했다.
홍경래(洪景來)가 가장 먼저 사귄 동지인 우군칙(禹君則)은 사서삼경은 물론이고 천문지리에 능통한 비상한 인물이었으나, 서자인 까닭에 과거도 못 보고 집 안팎에서 괄시를 받자 집을 떠나 방랑하던 인물이었다.
홍경래(洪景來)는 우군칙(禹君則)을 가산군 청룡사에서 만났는데, 당시 경래는 21세, 우군칙은 27세였고 그때가 바로 정조가 승하한 후 순조가 들어선 해였다.
다음으로 홍경래(洪景來)는 역관으로 부를 축적해 도내에서도 갑부로 유명한 이희저(李禧著)를 끌어들여 자금을 준비한 후 천연의 요새인 다복동을 근거지로 삼았다.
이희저(李禧著)는 돈을 지르고 무과에 급제한 후 향안에도 든 인물인데, 진짜 양반들은 이희저(李禧著)를 양반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이꼴저꼴 더럽게 여기던 이희저는 홍경래(洪景來)와 우군칙의 회유에 넘어가 뒷돈을 대기로 하고 봉기에 가담했다.
다음 홍경래는 선비 김창시(金昌始)를 꼬셨는데, 김창시는 곽산 김진사로 통하는 인물로서 문장이 뛰어나 당시 평안도 선비 중에서는 제일로 쳤다.
그는 친구를 좋아하고 술을 좋아해서 있던 재산 다 없애고 빚이 적지않았으나, 전혀 걱정하지 않고 평안도의 '이태백'으로 자처해 술만 취하면 소동파의 <적벽부>를 읊은 것을 낙으로 삼았던 인물로 홍경래(洪景來)의 재주에 반하여 봉기군에 몸을 담게 되었다.
홍경래(洪景來)는 다시 머슴 출신으로 장사인 홍총각을 회유했고, 재상출신으로 당시의 세도정권에 불만이 많았던 김재천을 비롯하여 평안도의 실력자들과 지방 관리들, 그리고 유랑농민들과 상인계층까지 광범위하게 지지세력을 끌어들였다.
이렇게 유능한 인물들을 여럿 포섭한 홍경래(洪景來)는 다복동에서 금점을 한다는 소문을 내서 대량으로 장정을 모집했다.
그때 농촌에서는 3년 내리 흉년이 들어 길바닥에 나 앉거나 빚에 쪼들려 야반도주하는 집들이 무수했는데, 금점 인부를 모집한다고 광고하자 힘깨나 쓴다는 장정들이 떼거리로 다복동에 다 모여들었다.
그들이 내세운 봉기의 명분은 다음과 같았다.
신인 정씨가 출현했으니 그를 왕으로 세우겠다.
안동 김씨 세도정권을 타도하겠다.
평안도에 대한 지역차별을 타파하겠다.
홍경래(洪景來)는 봉기에 앞서 부서를 정했다. 자신은 평서대원수가 되고 부원수로 김사용을 임명했으며, 총참모는 우군칙, 부참모는 김창시(金昌始)가 맡게 되었다.
선봉장은 홍총각과 이제초, 후군장은 윤후겸, 군량과 군수품 총책인 도총관은 이희저(李禧著)가 각각 맡았으나, 홍경래군은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다.
선봉장인 홍총각, 이제초의 급진파와 참모인 우군칙, 김창시의 신중파의 의견 대립이 문제가 되어 원수인 홍경래(洪景來)가 난처한 입장에 빠진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군 내부의 화합에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이었다.
드디어 봉기한 홍경래군(洪景來)은 10일만에 가산, 정주, 곽산 등 10여 개 지역을 휩쓸었다. 맨 처음 쳐들어간 곳은 정시가 군수로 있는 가산이었다.
정시(鄭蓍)는 대표적인 탐관오리로서, 이희저(李禧著)에게 애매한 죄를 씌워 많은 돈을 울궈먹고, 이희저의 첩인 기생 연홍을 차지한 인물이었다.
이희저(李禧著)가 홍경래군에 가담한 이유도 홍경래의 재주에 반한 것도 있지만, 실제로는 정시(鄭蓍)에게 원수를 갚고 싶어서였다.
홍경래군의 봉기 소식을 접한 정시(鄭蓍)는 이미 도망가기에는 너무 늦은 것을 알고, 반란군이 들이닥치면 버틸 만큼 버티다가 적당할 때 항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가산을 점령한 성질급한 선봉 홍총각은 정시(鄭蓍)가 버티자 눈치도 없이 그와 그 아비까지 모조리 한 칼로 죽여버리고, 정시의 첩이 된 기생 연홍은 이희저의 얼굴을 봐서 살려주었다.
웃기는 것이 나중에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평정된 후 조정에서 논공행상을 할 때, 돈만 밝히던 탐관오리 정시(鄭蓍)는 순절했다 하여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그의 첩 기생 연홍은 피하지 않고 뒷수습을 잘하였다 하여 계월향과 같이 제사를 지내게 되어, 둘 다 충신 열녀로 둔갑해 버렸다.
어쨌든 홍경래군이 가산을 점령한 후 다음 작전계획을 검토하는데, 안주의 내응자인 김대린이 정주, 박천, 의주를 점령하기 전에 안주부터 공략하자고 작전 변경을 요청해왔다.
평안도에서 가장 큰 안주 병영으로 바로 쳐들어가면 내응 세력이 많이 있으니 쉽게 점령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참모장인 우군칙(禹君則)과 김창시가 김대린의 작전이 너무 무모하고 뒤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반대하자 홍경래(洪景來)도 이들의 의견을 따라 김대린의 안주 공략안은 묵살되고 말았다.
( 당시 안주에는 내응 세력이 제법 있어서 성을 함락시키는것은 무모한 계획이 아니었다. 김대린의 제안이 그때 당시는 최선이었고, 홍경래(洪景來)는 김대린의 말에 따랐어야 했다)
그날 밤이었다.
안주성 공략안을 내세웠던 김대린은 홍경래군의 수뇌들이 그의 작전을 반대하자, 홍경래(洪景來)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갈 것을 예감하고, 측근 3명과 함께 홍경래를 죽여 그 수급을 가지고 관군에게 항복해 상을 받기로 작정했다.
설잠을 자고 있던 홍경래(洪景來)는 수상한 소리에 잠을 깨었고, 괴한 4명은 홍경래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몸이 빠른 홍경래는 손으로 칼을 막으며 비호(飛虎)처럼 밖으로 뛰쳐나갔다.
홍경래(洪景來)의 고함소리에 몰려든 위병들이 괴한들을 처치하였으나, 홍경래는 머리와 손에 중상을 입고 그때부터 출입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홍경래(洪景來)가 큰 부상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수뇌부들은 병사들의 사기를 참작하여 부상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예정대로 안주를 향해 진군해 나가 여러개의 소읍들을 장악했다.
선봉인 홍총각은 정예부대원 100명과 함께 안주를 기습 점령하겠다고 청원했으나, 참모인 우군칙의 반대로 시일만 끌다가 기습안은 불발되고 말았다.
이렇게 홍경래군(洪景來軍)이 평안도의 소읍들을 점령해 나가는 동안 한양에서는 이요원이 이끈 진압군 2,000명을 평안도로 파병했다.
안주 병사 이해우의 안주군과 합류한 진압군은 홍경래군과의 송립전투에서 대승하여 반란군을 쫓게 되었고, 부상으로 사인교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전황을 살피고 있던 홍경래는 패잔병을 거느리고 봉기한 지 한 달도 안되어 지리멸렬(支離滅裂)한 채 정주로 들어가 농성하기 시작했다.
관군은 그간 홍경래(洪景來)가 점령했던 가산과 박천, 곽산을 수복하고, 홍경래의 근거지인 다복동을 점령하여 불질러버린 다음 홍경래군이 농성중인 정주성 포위에 들어갔다.
관군은 운제와 방신거 등 공성무기들을 제작하여 공성을 계속 했으나 성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홍경래(洪景來)의 반란군과 농민들의 사투로 성은 지킬 수 있었으나, 식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식량이 떨어지자 말을 잡아 먹었고, 무기도 부족해 솥을 부수어 탄환을 만들고 집을 부순 나무로 밤을 밝혔다.
정주성 공략이 지지부진하자 관군은 광부들을 시켜 밤에 몰래 성 밑을 파서 1,700근의 화약을 매설한 후 성벽을 폭파시킴으로써 성 안으로 대거 진입했다.
홍경래, 홍총각, 김사용, 우군칙, 이희저 등은 모두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2,983명이 포로로 잡혔다.
관군은 이 가운데 10세 이하의 남아와 여자 1,000여 명을 제외한 장정 1,917명을 모두 처형했다.
이로써 4개월 여에 걸친 홍경래(洪景來)의 난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백성들에게 홍경래는 죽은 인물이 아니었다.
"홍경래(洪景來)가 살아 있다." "정주성에서 죽은 홍경래는 가짜다." "홍경래(洪景來)가 우리를 도우러 온다." 등의 이야기가 이후 10년이 넘게 떠돌아다녔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꿈을 대신 실현하려다 좌절한 한 영웅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꿈은 죽지 않은 홍경래(洪景來)의 환영 속에 영원히 살아 있었을 것이다.
홍경래(洪景來)의 난은 반란일까, 혁명일까?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그 전까지의 모든 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체제와 비전을 제시하는 혁명 공약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홍경래(洪景來)의 난에는 광범위한 계층이 참여하기는 했으나, 체제부정이 왕조체제 타도가 아닌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타파였고, 혁명 후의 구체적인 사회개혁안과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혁명이 아닌 '난(亂)'으로 그치고 말았다.
결국 홍경래(洪景來)의 난은 수뇌부의 내부 분열과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다.
어쨌든 아깝다.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성공했으면 조선은 어찌되었을까?
홍경래(洪景來)의 난은 조선 말기의 신분제도를 허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후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나는 기폭제가 되었다.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진압된지 3년 후 1815년 서북지방 백성들을 달래기 위한 특별과거가 실시되었으며, 합격자에게는 낮은 벼슬이 주어졌다.
홍경래(洪景來)의 난으로 얻어진 것은 이게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