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첨(1560년 ~ 1623년)
1615년 신경희, 양시우, 김정익, 소문진 등은 정원군의 차남 능창군 이전(李佺)을 왕위에 옹립하려고 한다는 고변이 올라왔다.
그러자 능창군 이전은 강화도로 유배되고 위리안치 되었는데 의문을 남긴채 죽었다.
1617년 3월 9일 이이첨은 유희분과 함께 장원서(掌苑署 : 궁궐의 조경을 담당하던 관청)에서 대북파에 속한 언관과 유생들을 동원해서 선조의 제1계비인 인목대비 김씨를 폐모 하기로 논의를 시작했다.
그해 12월 17일 인목대비를 폐비 시키는 것을 반대하던 기자헌과 이항복을 유배를 보냈다.
1618년 1월 28일 인목대비의 직함을 회수하고 서궁(西宮 : 경운궁 현 덕수궁)에 유폐시키자 서인들이 대북파를 공격하는 데 좋은 빌미를 제공했다.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고 이이첨이 정권을 장악하고 부터 정원군(定遠君 : 선조와 인빈 김씨의 아들로 선조의 5남이며 후일 인조의 아버지)의 집에 왕기가 서린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였다.
그해 이이첨은 판의금부사를 지내고 이어서 예조판서와 약방제조를 지내고 1619년 대제학을 거쳐서 1620년 다시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해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가 되고 이어서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0년 신경진은 광해군이 서모인 인목대비를 폐서인 시킨 불효를 저지른 것을 빌미로 광해군을 폐출시키기로 하고는 광해군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장단부사 겸 경기방어사 이서(李曙)와 함께 반정을 일으키기로 하고는 구굉(具宏)과 구굉의 조카 구인후(具仁垕)를 끌어들이고 그들과 함께 구체적으로 반정계혁을 세우기 시작했다.
신경진, 이서, 구굉, 구인후 등은 서인의 이귀, 김류, 김자점, 이괄, 최명길, 심기원, 김자점 등을 포섭하고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 이부의 큰 아들인 능양군(綾陽君) 이종(李倧)을 왕으로 옹립하기로 하였다.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한 반정세력은 1623년 3월 12일 반정을 일으키고 3월 13일 새벽에 궁궐을 장악하자 광해군은 상복을 입고 담을 넘어서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어있다가 관군에게 잡혀서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3월 13일 반정이 성공하자 반정 세력들은 서궁에 위폐된 인목대비를 복위시키자 인목대비는 경운궁으로 나가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 이종에게 옥새(玉璽)를 내리고 국문장으로 향했다.
국문장에 도착한 인목대비는 상복을 입고 있는 광해군을 나무라면서 죄를 논하는데 그 죄목이 32가지나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어머니를 폐서인 시킨 죄, 형제를 죽인죄, 명나라를 배신한 죄, 나라를 도탄에 빠트린 죄, 궁궐을 짖는다고 왜란에 피폐된 백성을 동원한 죄 등등을 거론하면서 광해군을 죽여야 마땅하나 애미된 도리로 자식을 죽일 수는 없으니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라고 하였다.
이이첨은 3월 13일 새벽에 반정 소식을 듣자 가족들을 이끌고 성벽을 넘어서 피신해 있다가 반정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셋째 아들 이대엽의 아내 신씨의 오빠인 신경진과 동생 신경유도 반정에 개입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이첨은 며느리 평산 신씨 신립의 딸을 도성안으로 들여보내서 동생 신경유에게 구원을 요청했는데 뜻대로 되지않자 가족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이이첨은 식솔들과 함께 경기도 이천의 한 농가에 숨어있다가 뒤따라온 관군들에게 붇잡혀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한양으로 압송된 이이첨은 형을 받기위해서 국문장으로 가던 도중에 반정에 가담한 평산부사 이귀를 만났는데 이귀에게 말하기를 “대감은 나의 마음을 알 것이 이니요? 대전(大殿 :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께서 목숨을 보전하신것은 다 나의 공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하자 이귀가 이이첨을 야유하듯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네가 이전에 모든 일을 스스로 하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게 했던 것을 오늘 내가 그대에게 이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오. 그대의 말이 다 옳다고 해도 대전께서 유폐의 화를 겪으신 것은 다 그대가 한 짓이 이니오?" 라고 히자 이이첨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국문장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이첨은 의금부에서 참수형이 내려지자
울부짖으면서 소리 치기를 "하늘은 내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실것이고 나는 충신이고 효자라는 것도 알고계실것이다" 라고 하자 이이첨의 사주로 경운궁에 유폐된 인목대비를 시해하려다가 실패한 예조참의 이위경(李偉卿)이 이이첨을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게 된 것은 모두 그대가 나에게 악한짓을 시켰기 때문인데 네가 어떻게 충신이고 효자란 말이냐?" 라고 하면서 한탄하였다.
그날 이이첨은 예조참의 이위경, 형조판서 한찬남, 황해감사 백대형, 동지의금부사 정조(鄭造), 대사헌 윤인, 순천부사 이원엽, 이이첨의 스승 정인홍, 이이첨의 큰 아들 이원엽(李元燁) 둘째 아들 이홍엽 (李弘燁) 셋째 아들 이대엽(李大燁) 네째 아들 이익엽(李益燁) 등과 함께 참형되었다.
이이첨이 처형되자 몰려있던 백성들은 이이첨의 시신을 난도질하여 시체가 온전한 데가 없고 자손들도 참수되거나 유배형에 처해지면서 이이첨의 시신은 거두는 사람이 없었다. 몇일 후에 이이첨의 심복 16명은 능지처참되고 대북파 64명은 참형되고 다음해에 남은 대북파들 마져도 사사되면서 대북파는 몰락했다.
명문가였던 광주 이씨 이이첨의 가문은 이이첨의 8대조 둔촌 이집 이후로 이이첨의 아들 대까지 많은 후손들이 대과에 급제를 한 명문 가문이었는 데 이이첨으로 인해서 이이첨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이이첨이 죽은지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이첨은 간신의 대명사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