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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답사

조선조말 개화파

작성자오비최이락|작성시간20.05.24|조회수429 목록 댓글 0

개화파의 인물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개화파는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나뉘었다.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의 온건개화파(穩健開化派)는 개혁 정책을 실시하되, 유교사상을 기본으로 청나라와의 관계를 지속하면서 점차로 개혁을 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의 급진개화파(急進開化派)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떠 기술, 사상, 제도 등 전면적으로 개혁을 하면서 청나라와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오군란 당시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던 개화파의 청년 지도자 김옥균(金玉均)은 일본 공사 하나부사가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군함과 병력을 이끌고 배상을 요청하러 조선으로 오는 길에 동행하여 조선으로 돌아왔다.

당시 정세에 대한 김옥균(金玉均)의 생각은 이러했다.대원군이 비록 개방에는 반대했으나, 내정개혁에는 큰 공적을 세웠고, 반대로 민씨 일족들은 개방을 지지하기는 했으나, 개방 속도가 너무 느린 데다 모조리 재생불가능할 만큼 부패해서 쓸어버려야 할 쓰레기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대원군(大院君)의 실각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당시 개화파를 이끌어 나가던 정신적 지도자는 오경석(吳慶錫)과, 그의 친구로 뛰어난 학문과 정치적 식견을 가지고 있던 중인 출신의 유홍기(劉鴻基)였다.

그 밑에서 자주 모였던 청년들이 바로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배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유길준 등이었다.

박규수(朴珪壽)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서 영, 정조 시대의 실학을 계승하여 19세기 시대적 격량에 대처하고자 다방면에 걸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다.

그는 흥선대원군에게 천주교의 박해를 반대하고 문호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의 사랑방에서 젊은 양반 자제를 대상으로 실학적 학풍을 전하고 중국에서의 견문과 국제정세를 가르치며 개화파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875년 최익현 등의 척화 주장을 물리치고, 일본과의 수교를 주장, 오경석과 함께강화도 조약을 맺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박규수(朴珪壽)와 함께 개국을 주장, 강화도 조약을 체결케 한 오경석(吳慶錫)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오세창(吳世昌)의 아버지로 중인출신이다.

그는 역관이 되어 청나라를 오가며 신학문에 눈을 뜨기 시작, <해국도지>와 <영환지략> 등의 책을 들여와 친구인 유홍기(劉鴻基)에게 읽히고,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에게 개화사상을 북돋은 인물이다.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이 중국의 천진으로 끌려가고 고종이 다시 친정(親政)을 시작하자, 개화파는 고종을 설득해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부활 시켰다.

독관으로는 영의정 홍순목을 비롯해 민태호, 민영위, 김병국 등이 맡았고, 협판으로는 김홍집, 김윤식, 홍영식, 어윤중, 신기선 등이 임명되었다.

이렇게 개화파(開化派)가 부상하게 되자 전국에서 개방을 요구하는 상소가 줄을 이었다.
개화를 지지하는 계층은 확산되어 자본가와 상인, 지식인들과 일반 시민, 청년장교와 벼슬아치, 거기다 양반들과 유생들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개화 성향은 서구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국가를 부강케 하고 열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자주독립국을 지향한 것이지, 군주제를 통째로 엎어버리거나 하는 프랑스 혁명과 같은 과격한 개혁은 아니었다.

1884년 9월, 김옥균(金玉均)은 승지로 임명되어 드디어 임금곁에 있으면서 조정의 개화정책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같은 급진개화파인 박영효(朴泳孝)는 한성부 판윤이 되어 내정개혁의 선봉에 나섰으며, 서광범, 유길준, 서재필 등도 김옥균과 박영효를 도왔다.

개화파(開化派)의 내정개혁 초점은 국가재정의 낭비를 줄이고 근검절약을 모토로 하는 감생청(減省廳)의 설치였다. 감생청(기구축소와 감원을 관장하던 관상감 소속의 임시관서)은 쓸데없는 기구들을 통폐한 후, 별 볼일 없이 돈만 타가던 종실들과 민씨 척족들을 자불대상에서 빼버렸다.

또한 벼슬아치간의 차별을 없애고, 잡부금 징수를 엄히 금했다. 이렇게 한참 뭔가가 되어가고 있는데 민씨 척족들이 수입이 끊기자 감생청(減省廳)의 실무자인 어윤중을 모함하여 변두리로 좌천시켜 버렸다. 그 바람에 감생청의 개혁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렸고, 이러한 내정개혁의 실패가 갑신정변을 불러오게 되었다.

이런 네가지 없는 짓들을 후원한 것이 바로 명성황후였고, 그옆에서 고종은 담배나 축내고 계셨다. 거기에다 민영목, 민영익 등이 싸고 도는 조정의 재정고문인 묄렌도르프는 사사건건 개화파의 일을 방해했다. 묄렌도르프는 청의 이익을 위해 일했고, 민씨 일족은 청에 기울어져 있었으니 자연히 개화파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어려운 국가재정을 충당하기 위해서 민씨 일족은 묄렌도르프의 건의에 따라 전환국(화폐의 주조를 맡아보던 관아)을 설치하고 당오전과 당십전을 발행하여 통용시켰다.

민씨 일족이 모조리 주조에 뛰어들어 악화를 발행하여 통용시키므로써 물가가 폭등하고 경제는 엉망이 되었으나, 민씨 일족들은 막대한 재산을 끌어 모았다.

돈의 필요성을 인지한 개화파는 박영효(朴泳孝)가 일본에 수신사로 갈 때 김옥균(金玉均)이 동행하여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를 만나 차관(借款)을 부탁했다.

이노우에는 차관을 주선한답시고 겨우 12만 원을 만들어 주었고, 이 돈은 수신사의 경비와 유학생들의 보조금으로 그냥 없어져 버렸다.

나중에 조선주재 일본 공사가 되는 이노우에는 겉으로는 김옥균(金玉均)을 돕는 척했으나, 실제로는 돌아가는 정세를 살펴보고 그 틈새에서 이익을 얻을 궁리나 했지, 조선의 형편이 죽을 쑤든 밥을 하든 관심이 없어서 차관(借款)교섭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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