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에 즉위한 어린 임금, 헌종(憲宗)
어린 임금과 풍양조씨(豊壤趙氏)세도정치
1834년 순조가 45세에 죽자 8세의 어린 원손 이환(李烉)이 왕위에 올랐다.
헌종(憲宗)은 요절한 효명세자의 외아들로, 그의 나이 4살 때 아버지가 22세로 세상을 뜨고 할아버지마저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자, 서둘러 왕세손으로 책봉된 후 불과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그는 조선의 왕 중에서 최연소로 즉위한 왕이 되었으며, 그의 재위기간은 약 15년, 승하한 나이는 23세, 결국 그 역시 아버지 효명세자처럼 요절했다.
헌종(憲宗)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관례에 따라 왕실의 가장 어른이었던 할머니인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 안동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다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神貞王后)는 효명세자가 익종(翼宗)으로 추승되자, 조대비가 되어 훗날 고종을 왕으로 지명한 풍양조씨
(豊壤趙氏)가문의 사람이었다
순조 때 처가였던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력이 강했다면 헌종 때는 외척이었던 풍양조씨(豊壤趙氏)가문의 권세가 높았다
헌종(憲宗) 역시 순조와 마찬가지로 세도가들의 방해로 제대로 된 정책을 실시하지 못했다.
15년간의 치세 내내 수재가 발생하고, 이양선들이 출몰하기 시작한 내우외환
(內憂外患)의 급박한 시기였다.
이럴 때 모두 정신차려서 나라의 위기에 대비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은 쥐뿔도 아니하고,
왕(王)은 그저 여색을 탐해 궁녀들 방이나 부지런히 드나들고, 세도가들은 '어디 좀 더 뜯어낼 데 없나?'하는 궁리들만 하고 자빠졌으니 나라 꼴이 아무나 집어먹게끔 잘 썰어놓은 생선회 꼴이었다
경빈김씨(慶嬪金氏)를 향한 헌종의 사랑, 낙선재(樂善齋)
8세에 왕위에 오른 헌종(憲宗)의 외모는 지금 태어나도 훈남으로 극찬을 받을 만큼 헌칠한 키에다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수려해 뭇 여성들의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궁녀치고 헌종의 성은(聖恩)을 입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로 헌종(憲宗)은 여성편력이 많고 자유분방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헌종(憲宗)은 재위 1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헌종(憲宗)에게는 두 명의 왕후가 있었다.
정비 효현왕후 김씨가 헌종(憲宗)과 혼례를 올린지 2년만에 세상을 달리하자, 곧 계비 효정왕후(명헌왕후)홍씨를 간택하여 왕후로 들였지만 헌종(憲宗)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따로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순화궁 경빈 김씨(慶嬪金氏)였다
헌종은 경빈 김씨(慶嬪金氏)를 지극히 사랑하였는데,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잘 알 수 있는 흔적이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헌종은 사랑하는 경빈 김씨(慶嬪金氏)를 위해 궁궐 한 모퉁이에 낙선재를 짓고 그녀의 처소인 석복헌(錫福軒)을 지어 선물을 하였다.
창덕궁의 동남쪽에 위치한 낙선재(樂善齋)는 '선한 일을 즐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석복헌(錫福軒)은 '복을 준다'는 뜻으로 후사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명문대가인 김재청의 여식으로 태어나 자란 순화궁 경빈김씨(慶嬪金氏)는 조선왕조에서 그 어느 여인보다 임금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헌종(憲宗)이 승하하자 궁궐의 법도대로 사가로 내쫓기게 되니, 그녀의 운명은 행복과 화려함속에서 순식간에 불행과 처절함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파란만장한 생(生)이었다.
그녀는 낙선재(樂善齋)에서 쫓겨나 인사동 사가에서 지내다가 나이 77세에 세상을 등졌다
서로를 감시하는 사회,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조선 정부는 순조대부터 천주교 신자들을 엄하게 벌하고, 대대적인 숙청과 귀양을 단행했다. 헌종(憲宗)시기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오가작통법
(五家作統法)'의 시행이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은 말 그대로 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통(統)으로 보았던 제도로, 다섯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한 명이라도 나타나면 나머지 네 집도 엄하게 벌을 받았다.
원래 오가작통(五家作統)은 춘추전국시대의 법가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이웃을 서로 감시하게 함으로써 국가가 백성을 쉽게 통솔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도 치안 유지와 행정적 편의 등의 이유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실시했었다.하지만 헌종(憲宗) 때는 이러한 오가작통(五家作統)의 의도가 변질되었다.
오가작통법의 정보가 천주교 신자를 색출하고 체포하는데 사용된 것이었다. 더욱이 조선후기에는 막대한 세금이나 부역을 피하고자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오가작통법
(五家作統法)을 통해 이웃에 연대책임을 물어 사회를 통제하고자 한 것이었고, 이렇게 오가작통을 이용해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으니, 그게 바로 1839년의 '기해박해
(己亥迫害)'이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시파(時派)인 안동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벽파(僻派) 풍양조씨가 일으킨 것이다.
1834년 헌종이 8세에 즉위하자 순조의 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왕대비를 적극 보필한 사람은 그녀의 오빠 김유근이었다.1836년부터 병으로 말조차 못하던 그는 1839년 유진길(劉進吉)의 권유를 받고 세례까지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동김씨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관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유근의 은퇴로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변하였다.
형조판서 조병현(趙秉鉉)으로부터 그동안의 천주교 전파 상황을 보고 받은 그는 1839년 3월 입궐하여 천주교인은 무부무군(無父無君)으로 역적이니 근절하여야 한다는 천주교에 대한 대책을 상소하였다.
그리하여 서울과 지방에 다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세워 빠져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하였고, 사헌부의 정기화(鄭琦和)는 원흉을 잡지 못하면 천주교의 근절을 기할 수 없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따라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인은 43명이었으며, 그 중 대부분이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나 남명혁, 박희순 등 9명은 끝내 불복, 사형되었다.
5월25일에는 대왕대비의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내려졌으며, 천주교 박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사건으로 세도가문은 안동김씨에서 풍양조씨(豊壤趙氏)가문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