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희문까지 밟아봤습니다.
오간수문.이간수문이 궁금했지요
숙종때 처음 쌓은 세검정쪽의 홍지문(弘智門).
水門이 5개라 오간수문이라 하지요.
2003년 청계천 복원 당시 발굴 조사를 통해서 오간수문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도성안의 산에서 발원한 여러 물길들은 시내서 가장 지대가 낮은 이곳 흥인지문 옆의 청계천으로 모였다가 흥인지문 옆의 오간수문을 통해서 중랑천으로 흘러 한강과 합류한다.
물길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청계천의 물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한양도성의 축성 시 성벽과 함께 축조된 이후 몇차례 증축을 거쳐 5칸 수문이 되었다.
수문 앞에는 다리 기능을 하는 긴 돌을 놓아 성벽을 지키거나 수문을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
오간수문은 원래 다리가 아니라 성벽 아래에 설치된 水門이였다. 성벽을 지키거나 수문을 관리하기 위하여 수문앞에 긴 다리를 놓아 건너 다니게 했다. 성벽인 동시에 청계천의 수문,
방어와 배수의 기능을 동시에 담당한 수문.
성벽 위로 총안 구멍만 남은 훼손된 여장이 보이고 긴 돌다리도 보인다.
발굴 과정에서 수습된 수문의 철책.
철책은 流水에 흘러 내려가는 불순물을 걸러내고, 수문을 통해 성 내외를 함부로 드나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 되었는데
명종때 의적 임꺽정이 도성에서 탈출할 때
이곳으로 빠져 나갔다고 한다.
수문 바닥석 틈에서 상평통보를 포함하여 조선시대 동전 600 여개가 꾸러미로 출토되었다. 발굴자 말에 따르면 상평통보는 쇠철책 아래 흙더미에서 한 꾸러미에 묶인것 처럼 나왔는데 출토 상태를 볼 때 물에 쓸려온것 같지는 않고 누군가 오간수문의 개구멍으로 도성을 드나들다가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고 .
문화재 관계자들의 고증을 거쳐서 이렇게 복원 하기로 했었는데 이 청계천 물이 통과하는 오간수문인데 한쪽 벽에다가 왜 저리했을까요?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임금(영조)이 친히 청계천 준설 공사를 보고 있는 그림.왼쪽 위가 흥인지문, 다섯개의 수문은 철책으로 막혀있고, 삼각형의 물가름돌 양쪽에는 거북 모양의 석수 하나씩 보이고,
소를 이용해서 바닥을 파내고, 가래질 하는 인부들의 모습도 보이고, 청계천 양쪽에는 버드나무 모습도 보이고,사실적인 재미있는 그림이다.
🍒 치성(雉城)
영조임금때 기록을 보면 흥인지문에서 광희문 까지의 구간은 지대가 낮아서 방어에 취약하므로 치성 5개를 만들도록 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지적도에는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 4개의 치성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서 일제 강점기 사이의 어느땐가 치성1개가 멸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신희권 교수)
치성(雉城>의 흔적이 발견 됩니다만..
이걸 치성이라고 복원?
♦️이간수문(二間水門)
남산 일원에서 남소문동천으로 모여든 물을 한양도성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2칸의 수문을
만듭니다.
⬆️ 치성(雉城)
복원 안하고 요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는 방법도 좋지 않았을까? 있는 그대로 옛날의 자취를 보는것도 새로운 감흥이 생길듯 한데~~~~
홍예 안쪽의 홈 구멍은 목재 철책을 설치했던 흔적들
🍒 바로 옆에 광희문(光熙門)으로 갑니다.
광(光ㆍ빛 광)
희(熙ㆍ빛날 희)
문(門ㆍ문 문)
이름은 화창하고 영광이었으나
역할은 죽은이를 뒤따르는 곡소리만 들리었고 음습하고 그늘만 있었으니~
광희문 옆에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의 통로인 水口가 있어 水口門으로 불렸고,도성 안의 시체가 나오는 門이라해서 시구문(屍驅門) 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때ㆍ천주교 순교자들ㆍ임오군란때
역병으로 등등 죽은 사람들이 이 문으로 나갔기에 시구문이라고 한다.
이 문 바깎쪽에 신당동 왕십리 금호동쪽의 공동묘지에 묻었다.
지금은 신당동 떡볶기로 유명한 新堂洞이
예전엔 죽은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神堂(굿당)이 많아서 神堂洞으로 불리웠는데
갑오개혁때 부터 新堂洞으로~~~
수구문(水口門).
시구문(屍驅門)으로도 불렸지요.
병자호란때 인조임금이 허겁지겁 남한산성으로 탈출한 門(광희문).
숭례문(도성의 正門)으로 나와 강화도로 가려고 했으나 오랑캐가 벌써 녹번동까지 왔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임금의 권위나 체면은 팽개쳐지고 시체가 나가는 시구문을 나가서 남한산성 으로 갔습니다
홍예문 천장에는 쌍룡이 놀고있어요
조선시대 시골에서 누가 한양간다 하면
'시구문 돌가루를 긁어오라' 고 부탁 한다고 한다.
중병에 걸리거나 고난을 겪다 시구문에서 죽은 사람들 때문에 성돌이 면역이 돼서 그 돌가루를 만병통치약으로 믿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