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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의 풍금

[스크랩] 또 기다리는 편지외...정호승

작성자인디컴(신승태)|작성시간14.10.08|조회수94 목록 댓글 0
  

 

 

 

 

눈사람 한 사람이 찾아왔었다

눈은 그치고 보름달은 환히 떠올랐는데

눈사람 한 사람이 대문을 두드리며 자꾸 나를 불렀다

나는 마당에 불을 켜고 맨발로 달려나가 대문을 열었다

부끄러운 듯 양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눈사람 한 사람이

편지 한 장을 내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밤새도록 어디에서 걸어온 것일까

천안 삼거리에서 걸어온 것일까

편지 겉봉을 뜯자 달빛이 나보다 먼저 편지를 읽는다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습니다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습니다

 

 

-꿈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나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수선화에게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꽃지는 저녁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새벽편지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물이다
사랑의 용서도 용서함도 구하지 말고
청춘도 청춘의 무덤도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길이다
흐느끼는 푸른 댓잎 하나
날카로운 붉은 난초잎 하나
강의 중심을 향해 흘러가면 그뿐

 
그동안 강물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었다 절망이었다

 

그동안 나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강물이 아니었다 희망이었다
 

 

-강물

  

 

 

 

룸바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였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산산조각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해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또 기다리는 편지

 

 

 

 

 

사람들은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사랑을 모른다

사랑이 다 끝난 뒤에는 끝난 줄을 모른다

 

창밖에 내리던 누더기 눈도

내리다 지치면 숨을 죽이고

새들도 지치면 돌아갈 줄 아는데

 

사람들은 누더기가 되어서도 돌아갈 줄 모른다

 

 

-모른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내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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