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의 한국문학 - 개화기 시
1. 개화시 (애국․독립가류)
개화기 시가의 초기 모습은 '애국가' 혹은 '독립가' 라는 모습을 띠고 있는데 《독닙신문》을 중심으로 하여 발표된 일련의 노래들로 <독립가>, <애국가>,<동심가>, <애민가>, <셩졀숑츄ᄀ가>, <셩묘ᄋ가>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 노래에는 자주독립․애국․충군․단결․교육․문명개화․부국강병․자유․보국애민, 국위선양 등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그 시대 정치․사회를 웅변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애국사상과 개화의욕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 개화시의 형식
개화시의 형식은 4․4조의 율조를 지니며 가창 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닌다. 또한 조선조의 가사의 압축이 아닌 연 구분을 하고 있는 것이 개화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세차게 밀려드는 외래사조와 문물제도 등에 대한 반응을 새로운 형식적 장치를 구비하여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형식적 율조를 통해 보편적인 정서 반응으로 노래하고 있다고 보기도 하고, 단지 개화의지에 의하여 창작된 4․4조의 시가로 한국가사의 전통적인 가락이며, 개화기 문학의 속성의 하나인 작자의 목적의식이 과잉하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2) 최초의 개화시
현존 최초의 개화시를 살펴보면 《독닙신문》 3호, 1896년 4월 11일자에 실린 애국가류의 작품이다.
이 노래의 내용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사용하면서 오랜 기간동안 받아오던 대륙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성취한 기쁨을 노래하면서, 당대 시대현실이 요구하는 '보국안민', '문명개화', '신교육'등의 이념을 고취시키는 데 그 지향을 두고 있다.
(3) 개화시의 주제
①자주독립과 애국사상
②단결과 신교육을 통한 문명개화
③구사상과 구제도를 비판하며 자아각성을 촉구
④부국강병이나 국위선양도 문명개화를 이룩한 연후에야 그것이 가능
이후,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경향신문》등을 통해 많이 발표되었는데, 자주독립과 문명개화를 예찬하기보다는 애국사상, 즉 황실 내지 국가의 무궁한 발전과 변영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기울어져 감.
2. 개화가사
개화가사는 개화기 언론에서 주로 시대상황의 어려움을 알리고, 일본의 세력 팽창과 침략을 경계․비판하기 위해 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가사의 형식을 빌어 변화된 현실에 대한 근대적인 자각을 표현하려는 노력은 이미 19세기말부터 나타나고 있다.
《매일신문》 - 1898년 11월 1일자 논설에는 '슬프다 우리 대한 이천만중 동포들아'로 시작해서 열강에게 위협을 받고 있는 처지를 한탄하면서 백성들의 각성을 촉구
《제국신문》 - 1899년 2월 15일자에는 논설 형식으로 '새롭도다 새롭도다 묵은해가 새롭도다'로 시작해 조선 사람들의 무위도식․허송세월하는 삶을 비판하면서 새 시대를 맞아 하루빨리 잠을 깰 것을 촉구
《제국신문》 - 주로 현실에 대한 비판이고 형식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가사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적절히 연을 나누는 것을 시도한 것이 《대한매일신보》의 <사회등>란을 통하여 본격화되는 개화가사와 유사한 양식을 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 개화가사의 형식
개화가사의 형식은 주로 4 4조 2행의 대구에다 후렴을 붙이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길이가 현저히 짧아진 것이 특징이다. 개화시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시가의 형식인 4․4조의 율조를 가지며 그 분량이 상당히 길고 연이 구분되어 있다. 개화시에 비해 분연의 단위를 장형화하고 있으며, 한 작품 속에서의 분연 단위는 거의 同數의 시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2) <사회등>난에 발표된 작품들
개화가사의 발표의 매체는 대개가 《대한매일신보》의 <사회등>란이었다. 그 개화가사는 강력한 사회비판 의식을 담고 있는데 전문적이지 못하였고, 그 어투도 대개가 직설적이어서 강한 비판의식을 노래에 표출하고 있다. 여기에 발표되고 있는 시가들은 현실참여, 즉 망국적 비애와 구국항일의 정신을 형상화한 것들로, 저항문학의 금자탑을 이루고 있고 할 수 있다.
한계 - 전문작가에 의하여 쓰여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격조가 확보되지 못하였고 근대시의 한 갈래인 채 가사형식을 기계적으로 이용하여 거친 말들로 당시의 우리 주변에서 빚어진 사회상을 반영.
결론적으로 개화가사는 개화시보다는 그 주제의식에서 훨씬 다양화되어 있고 보다 비판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을 띤다고 하겠다. 그것은 <일진회야>라는 개화가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비판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친일파(일진회)에 한정시키면서 그들의 친일 행적을 직설적으로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가사가 역사적 사명을 담당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고, 동시에 이 시기의 노래가 가사의 형식을 빌렸다는것은 한국 문학사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창가→신체시)
(3) 의병가사
의병가사는 의병투쟁의 대의를 명백히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구체적인 전투장면들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어 귀중한 역사자료가 되기도 한다.
한계 - 국문으로 씌어지는 하였지만 한문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많을 뿐 아니라, 대부분 한시와 마찬가지로 화이론적 세계관과 봉건적인 충군 애민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 의병에 대한 개화기의 반응은 1910년 합방 이전과 그 이후로 크게 구분되는데 그 이전은 아직도 조선왕조라는 국가개념이 존속했다. 그러나 1910년 이후의 의병에 대한 인식은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으로 파악된다. 기존의 가사의 틀에 일병과 맞서 싸우는 의병들의 단호하고 확고한 애국과 구국의 이념이 노래되었다.
3. 창가
(1) 창가의 발생
창가는 개화기 시가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양식으로 개화가사 다음에 나타나고 다음 단계인 신체시의 형성과 전개에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개화 가사와 신체시를 연결하는 구실을 담당했던 신문학기의 시가 형식으로, 노래로 불렸다.
창가는 기독교 찬송가나 신교육 기관을 통해서 보급된 서양 음악과 결합하여 형성된 것으로, 1896년『독립 신문』에서 처음 쓰였으며 전통적 율조(3 4조, 4 4조)에서 벗어나 6 5조, 7 5조, 8 5조 등의 다양한 율조를 취했다.
이는 전통적인 시가 양식을 바탕으로 개항과 더불어 한국사회에 수용된 서구의 악곡, 특히 대중들 사이에서 서서히 세력을 얻어가던 기독교 찬미가의 영향을 결합시킨 양식으로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을 찬미하는 내용과 형식이 왕과 국가를 송축하고 찬양하는 창가의 내용과 형식, 가창 방법에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의 명칭은 일본의 교과목명인 『소학창가집』의 명칭에 서 시작된 것이다.
(2) 창가의 기원
초기의 창가는 애국. 독립가류에서 변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기독교 찬미가의 영향은 아직 제한적이었고, 아직 전통적인 민요나 가사의 율격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창가는 대부분 《독닙신문》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주로 조선의 자주 독립과 이를 위한 문명개화 등 근대적 변혁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지만 외세침략, 봉건제의 모순과 같은 것은 보여주지 못했다.
(3) 창가의 발전
1900년을 전후하여 수많은 학교와 학회들이 설립되어 이들에 의하여 불려진 창가는 주로 새 시대를 맞이하여 청년학도의 분발과 면학을 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학교 설립자가 선교사인 경우는 찬송가의 곡조에 얹혀 불리었고, 학교에서 교과목으로 창가를 가르치게 되어 이후 급속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4) 창가의 변모와 쇠퇴
창가가 항일의지를 담는 모습으로 구체화되고, 생활 전반의 문제를 들추어 내기 시작하자 정부에 의해 압박을 받고 이후 제도적 차원에서 현실에 순응하는 일본식 가요의 이식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창가는 정형성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제한된 범위 내에서 주어진 형식을 다소나마 변화시킴으로서 율격적 자유와 다양성을 보여줌으로서 근대시의 형성에 일정하게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일합방을 전후한 창가들은 점차 자주독립이라는 현실을 포기하고 문명개화라는 과제에 매달리었다. 율격면에서는 일본 창가의 율격의 이식되고 내용면에서는 탈정치적인 성격을 띠다가 마침내 계몽적인 성격을 상실한 채 일본적인 정서를 이식하거나 통속적인 감상을 표현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다.
4. 신체시
우리 나라에서 갑오경장 이후 옛날의 시가 아닌 서구적인 시 창작을 시도한 작품을 가리켜 신체시라 하는데, 그 뜻은 "새로운 체제의 시"란 뜻이다. 육당 최남선에 의해 새로운 무정형의 자유시가 창작되었는데 당대 이르기를 새로운 시가 형태라 하여 <신시(新詩)> 혹은 신체시라 했다. 1908년에 발표된 이 작품에서 최초의 근대시인 주 요한의 「불놀이」가 1919년에 발표될 때까지 약 10년간 많은 신체시가 발표되었다.
신체시의 기점 -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최초의 신체시로 평가됨)로 잡는 것이 통설이며, 몇 가지 이설들이 제기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보편적으로 인정되지는 않고 있다. (신체시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되었던 갈래인데, 일본 유학을 다녀온 최남선은 일본에서 사용하던 용어인 <신시>를 그대로 사용했다.)
대표적인 이설들로는 우선 조지훈의 경우에, <구작삼편>이 실린 《소년》의 '후기'에 <구작삼편>이 1907년의 작품이라는 내용을 근거로 하여 최초의 신체시는 <구작삼편>을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소년》지 창간호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시가 권두에 실려 있는데 최남선 스스로가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자신의 창시라고 자처한 적도 없으며 '신체시'나 '신시'라고 명명한 적도 없고 다만 권두시로 제시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바이런의 (1812)의 끝부분 소위 <대양>(The Ocean)의 번안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형태적인 면 - 정형적인 율문성에서 일탈하여 산문성으로 이해되는 과도기적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자율화한 산문성이다. 즉, 신체시 이전까지의 고시가 애국가 유형, 창가 등이 가창을 전제로 한 율조라면, 신체시는 산문화한 자유시에로 이행되는 과도기적인 시가형태인 것이다. (창가와 자유시의 중간 단계로, 완전한 자유시형은 아니고, 다소 정형시로서의 성격(율문적 요소)을 많이 내포하고 있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개화기 시가에 포함시키는 이유를 보면 의성어의 사용으로 경쾌한 기분을 형성하고 있으나 7․5조 또는 4․4조가 부분적으로 들어 있어서 개화가사와 창가의 율조에 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는 것과 창가적 정형성을 계승하거나 답습하고 있으며 주제도 찬양조이고 개화기시가의 특성인 계몽성을 그대로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개화시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 보기 >
해에게서 소년에게-최남선('소년'창간호 1908.11)
처……ᄅ썩, 처……ᄅ썩, 척, 쏴……아.
때린다, 부슨다, 무너버린다.
태산(泰山) 같은 높은 뫼에 짚채같은 바위돌이나
요것이 무어냐,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처……ᄅ썩, 처……ᄅ썩, 척, 튜르릉, 콱.
처……ᄅ썩, 처……ᄅ썩, 척, 쏴……아.
내게는, 아모것, 두려움 없어,
육상(陸上)에서 아모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者)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디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ᄅ썩, 텨……ᄅ썩, 텩, 튜르릉,콱.
처……ᄅ썩,텨……ᄅ썩,텩, 쏴……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 나파륜,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의 역시(亦是) 내게는 굽히도다,
나하고 겨를 이 있건 오너랴
쳐……ᄅ썩, 처……ᄅ썩, 척, 튜르릉, 콱.
쳐……ᄅ썩, 텨……ᄅ썩, 척, 쏴……아.
조그만 산모를 의지하거나
좁쌀 같은 작은 섬, 손뼉만한 땅을 가지고,
고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
이리 좀 오너라, 나를 보아라
쳐……ᄅ썩, 처……ᄅ썩, 척, 튜르릉, 콱.
처……ᄅ썩, 처……ᄅ썩, 척, 쏴……아.
나의 짝 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길고 넓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저것은 우리와 틀림이 없어.
작은 시비, 작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조 따위 세상에 조 사람처럼
처……ᄅ썩, 처……ᄅ썩, 척, 튜르릉, 콱.
처……ᄅ썩, 처……ᄅ썩, 척, 쏴……아.
저 세상(世上) 저 사람 모다 미우나,
그 중(中)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膽) 크고 순정(純情)한 소년배(少年輩)들이
재롱(才弄)처럼, 귀(貴)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나라, 소년배(少年輩), 입맞춰 주마
처……ᄅ썩, 처……ᄅ썩, 척, 튜르릉, 콱.
* 나팔륜 : 나폴레옹
▶ 작품 통석
(제1연)
때린다, 부순다, 무너뜨려 버린다. 태산같은 높은 산, 집채 같은 바위라 할지라도, 요것이 무어냐 요게 무어냐(하면서) 나의 큰 힘을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뜨려 버린다.
(제2연)
내게는 아무 것도 두려울 것 없다. 육상에서 아무리 힘과 권세를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한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서는
(제3연)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없었거늘 (만약 있었다면) 기별하고 나와 보아라. 진시황, 나폴레옹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희 역시 내게는 굽히는도다. 나하고 겨룰 이가 있거든 나와 보아라.
(제4연)
조그만 산모퉁이를 의지하거나 좁쌀 같은 작은 섬, 손바닥만한 땅을 가지고 그 속에 있으면서 영악한 태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고 하는 자들아, 이리 좀 오너라 나를 보아라.
(제5연)
나의 짝이 될 것은 하나 있도다. 크고 길고 넓게 뒤덮은 저 푸른 하늘. 저것은 우리와 틀림이 없어 작은 시비, 작은 싸움,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저 따위 세상의 사람들처럼.
(제6연)
저 세상 저 사람들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꼭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 크고 순진한 소년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기는 일이다. 오너라 소년들아 입맞춰 주마.
▶ 이해와 감상
근대 잡지의 효시인 {소년} 창간호 권두시로 발표된 이 작품은 서구 자유시의 영향을 받아 창작된 최초의 신체시(新體詩)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전대(前代)의 고전시가 형식인 3․4조 내지 4․4조의 엄격한 율격을 깨뜨렸지만, 각 연의 대응되는 행의 자수(字數)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창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 연씩 떼어놓고 볼 때는 정형적 자수율을 전혀 갖지 않은 자유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아울러 독자에게 바다의 웅대함을 느끼게 하는 '처……ᄅ썩, 처……ᄅ썩, 척, 쏴……아'와 같은 의성음(擬聲音)까지 사용하는 파격적 (破格的) 리듬을 창조한 점에서는 근대적 성격을 어느 정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소년}지 창간 당시, 불과 17세이던 육당은 잡지명을 의도적으로 {소년}으로 택하여, 전통 문화와 고유 사상이 몰락해 가는 파산(破産) 직전의 국운(國運)의 현실에서, 조국의 희망과 새 시대의 상징으로서 소년이 나아가야 할 지표를 설정하였다. 그리하여 이 작품에서도 전래의 사고 관습에서 거의 제외되었던 소년과 바다를 함께 내세우고 대조시켜 망망대해에 도전하는 젊은이의 씩씩한 기상을 고무하는 내용을 역설함으로써 힘과 용기를 잃은 소년들에게 애국적 포부와 미래에 대한 강한 믿음을 심어 주었다.
바다는 새로운 세계와 문명 개화, 무한한 힘과 새로움의 창조 능력을 상징하고 있으나, 소년과 바다가 지극히 화해 관계로만 놓여 있어 육당이 의도하고 있는 힘과 순결성이 방향을 잃고 있다. 또한 계몽주의적 낙관론이 너무 짙게 깔림으로써 시적 긴장감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지적과 함께 최초의 신체시가 아니라는 비판, 그리고 '바이런'의 시, <차일드 헤롤드의 순례>의 모방작이라는 비난도 받고 있지만, 이 시가 당시 국민적 계몽시로 등장하여 우리 현대시에 끼친 공로만큼은 높게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김태형, 정희성 엮음 [현대시의 이해와 감상]-문원각>
▶ 작품 의의
이 시는 신체시의 효시라 일컬어진다. 신체시는 '근대 이전의 전통적인 시가-개화가사-창가-신체시-근대적 자유시의 흐름을 밑바탕에 깔고 이해해야만 근대적 자유시의 전 단계로서 문학사적 의의가 돋보인다. 그런데 과연 이 시를 비롯한 신체시가 전통적인 정형적 율격을 탈피하고, 자연스런 호흡으로 새로운 형식을 갖추었는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이 시도 한 연만을 함께 살펴보면 특정한 형식을 공통적으로 지니는 일종의 정형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가 비록 자유시로서의 한계를 지녔다 하더라도, 전통적인 율격에서 벗어나 형식적 실험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한편 이 시에서 주장하는 '계몽'이나 '근대화'는 자기가 서 있는 토대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어 문제가 된다. 계몽이나 근대화는 자신이나 자기가 속한 사회 혹은 민족을 발전시킨다는 의도로 출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는 '조따위 세상'같은 표현으로 현실 사회를 비아냥거리며, 오직 바다와 하늘과 같은 순수한 미래를 예찬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세상을 절대 선과 절대 악으로 파악하는 이분법적인 것으로, 현실 세계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 극단적이고 과잉된 의식의 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