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랑을 하려면 (2)
우리가 가장 이웃을 사랑하지 못할 때는 내 자존심이 상했을 때와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될 때입니다.
자존심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자존심은 바로 에덴동산에서
사탄 루시퍼가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유혹하면서“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즉 네가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 없이도 네 인생을 책임질
수 있으며,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며 의롭게 살수 있다고 부추긴 것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자아가 곧 자존심이고. 이제는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된
것입니다. 자존심과 육신의 정욕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이 녹록치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사탄 루시퍼에 의해 세뇌 당한 거짓 진리인
세상적 자아를 가진 채 아직도 육신의 죄성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존심을 버린다는 것은 어느 경우 죽기보다 싫기도 하지만 이 자존심은
사탄 루시퍼가 준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사도바울처럼 매일 같이 나를
쳐 복종시킴으로 죽여야만 합니다. 사탄은 나의 자존심을 부추기지만, 이
자존심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결국은 이 자아, 이 자존심이 나를 무너뜨릴
것입니다.
어느 회사 사장이 회사를 끌어가며 사자와 곰(어려움)도 이겨낸 강인한
성격을 가졌지만 집에 돌아와 자기 속에 있는 뱀(자아, 자존심)에 물려 죽는
(자살) 경우를 보지 않습니까? (암 5:19) 또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보듯이
남을 비방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베드로와 가롯유다의 경우 둘 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슬피 울며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쳤지만 가롯유다는 자기 잘못을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자존심으로
자살을 택했고, 베드로는 조금은 뻔뻔스럽지만 겸손하게 '주님이 아시나이다'
하고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가롯유다가
훨씬 남자답고 멋있는 사나이 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것이 나를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것으로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자존심은 사탄이
준 것으로 우리를 멸망으로 가게 만드는 속임수라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우리는‘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 고 생각할 때 이웃사랑을 잘
못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상대 이웃의 잘못을 지적
해야 되고 비판하게 됩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솔로몬 왕의 '생모 가리기’재판에서 생모의 말이
백 번, 천 번 옳고, 상대 여자가 틀린 것을 압니다, 하지만 상대 여자는 그
아기를 둘로 갈라 죽게 될 찌라도 끝까지 가보자고 합니다. 이런 경우 생모가
어찌해야 합니까? 끝까지 싸워야 합니까? 정말 너무 억울하고 안타까워
가슴이 찢어지고 피 눈물이 나지만 생모는 그 자식을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결국 자기 옳음을 포기하고 맙니다. 이런 희생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이 사건에서 우리는 어느 경우 내 옳음을 주장하기 보다는 차라리 져주고
손해 보는 것이 분열이나 파멸로 가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배웁니다. 진정한
옳음은, 내 옳음이 상대에게 유익을 줄 때에만(이웃사랑) 진정한 가치를 발휘
하게 됩니다. 내 옳음이 이웃의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잠잠 하는 게
좋습니다. 저 자신도 진작에 성경 말씀에서 이 깨우침을 받았다면 내 가정이나
이웃에게 아픈 상처를 훨씬 덜 주었을 것이라는 자책감에 많이 후회하고 반성
하는 기도를 드리며 내 삶에 적용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실생활에서 적용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시 한 번 제 작은 목소리로 외치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 판단으로 볼 때 상식에 어긋나고 도대체 이해해 줄 수가 없는
미운 이웃이 있습니까? 나에게 상처를 준 원수 같은 이웃이 있습니까? 내가
언젠가는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 라며 벼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리 원수 같고 생각만 해도 미워지는 상대라 할지라도 위에서 본 생모처럼
나의 자존심과 옳음을 버리고 무조건 용서해야 합니다. 물론 이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면서 '나도 남들이
나를 볼 때 저 사람하고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거야' 라는 겸손한 자세로 그
이웃을 위해“ 아버지! 저도 저 사람을 더 이상 비판하고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겠습니다. 저의 잘못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니라“(잠 10:12)
“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롬 12:17-18)
“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 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벧전 4:8)
“ 그러므로 너희 선한 일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롬 14:16)
우리가 옳고 선한 길을 간다 할지라도 남들에게 비방을 받는다면 그 길은
선한 길이 되지 못합니다. 상대방이 틀렸다 할지라도 상대 이웃을 포용하며,
인내하며 그 잘못을 권면하고, 중보자로서 기도해주고 사랑의 원리로 대하며
최종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다'로 끝나야지 이에서 더 지나가는 것은 악이 될 수 있습니다.(마 5:37)
예수님은 나만을 위해서 돌아가신 게 아니라 내 맘에 들지 않는 모든 상대
이웃들을 위해서도 돌아 가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자들 간의 분쟁은 한 손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들고, 다른
손에는 나의 옳음을 들고, 내가 옳고 선하기 때문에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계속 밀고 나가다가(유다서 1:19) 하나님께 여쭤보면 대답이 뻔함으로
하나님께 상의도 하지 않고, 세상 법정에 송사해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큰 죄입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용서와 기다림, 자기부인, 자기희생이 부족한 대신 봉사나 구제는
너무 잘 합니다. 반면 싸움을 하는 데도 일등입니다. 교회 싸움은 유치
하기도 하고 화려하기도 해서 “진리를 위하여 공의를 위하여!”기치를 높이
들고 외치지만, 그들 마음 속에는 증오와 복수심이 잔뜩 도사리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성도들은 바보처럼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며 불평
하지 말고 분을 그치고 노를 버려야'(시 37:7-8) 합니다. 그리고 애타는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사탄 마귀의 권세를 물리쳐 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도 속이는구나 저는 너의 형제니라“ (고전 6:6-7)
“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