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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삼국사기(三國史記)

작성자choiyd4|작성시간16.07.03|조회수30 목록 댓글 0

 1.『삼국사기』는 왜 고전인가?                

                                                                  정구복(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삼국사기() 』는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다. 고대사를 다룬 단순한 사료집이 아니라 한국 고대사를 설명한 최초의 역사서다. 이는 단순한 사료집이 아니라 김부식이 뚜렷한 역사관을 가지고 기술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한국 고대인의 삶과 국가 발전, 흥망에 관한 기록을 전할 뿐만 아니라 국가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저자의 역사관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를 모르면 정치를 잘 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겨준 역사서인 것이다.
이 책은 11세기경에 우리나라 학자들이 중국의 역사와 경전에 함몰되어 있을 때 자국의 역사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 학사, 대부들이 중국의 오경()·제자()의 책과 중국의 역사서에 대하여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우리나라 역사에 대하여는 망연무지()하다.

이는 고려의 지식인들이 송나라 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때, 자국의 학문과 역사에 대하여도 걸맞게 알아야 한다는 문화적 균형감각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면 그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어떤 점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을까? 그는 군주의 선악, 신하의 충성됨과 사악함, 국가의 안위, 백성에 대한 통치 등을 그 예로 들었다. 즉, 국가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던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은 국가의 통치행위에 대한 군주와 신하의 올바른 역할을 중시하였고, 삼국의 국가가 생겨 발전해오다가 멸망에 이른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개인에 대해서도 국가의 정치와 관련된 것들을 주로 다루었다. 따라서 이 책은 한국 고대인들의 삶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김부식이 해석한 고대사의 발달과정을 담고 있다.

 2. 시대와 김부식의 일생

김부식은 고려시대 문종 29년에 경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대에 과거를 통해 경주의 향리 세력에서 개경 관료로 진출하였는데, 아버지 김근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문명을 떨쳤고 송나라의 학문에도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식들을 송나라의 대문호인 소식(), 소철() 형제처럼 키우려고 그 이름마저도 그들을 본떠서 부식(), 부철()로 지었다.
김부식은 5형제 중 넷째였다. 장남 현담()은 출가하여 대각국사와 교분을 가졌고, 나머지 네 형제는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합격하였다. 김부식의 둘째 형인 부필은 장원급제를 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으나 예종시대 윤관의 여진 정벌에 출정하였다가 사망한 듯하다. 부일, 부식, 부철 등 3형제 모두 당시의 관료들이 선망하는 한림원에 오랫동안 봉직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세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면 그 어머니에게 조정에서 매년 30석의 곡식을 하사하였는데, 김부식의 집에서는 네 아들을 합격시켰다고 하여 매년 40석의 곡식을 받았다. 더욱이 그중 세 아들이 한림원에 봉직한다고 해서 왕이 특별보상을 하려고도 했으나, 그 어머니는 중복하여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고려에서는 예종의 사후 종래의 실록편찬 관례를 개혁하여 송나라 실록편찬 방식을 취했다. 즉, 왕이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나야 실록을 편찬했던 관례를 깨고 곧바로 『예종실록』을 편찬하였으며, 사관원()이 편찬하던 관례에서도 벗어나 다른 문사들도 포함한 편찬팀을 구성하였다. 이에 그는 사관원이 아니었지만 실록편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1123년(인종 원년)에 송나라 사람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김부식을 "박학강식()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의 역사를 잘 알아 학사들의 신복()을 받고 있어 능히 그보다 위에 설 사람이 없다"고 평한 바 있다. 문학으로 이름난 김부식은 당시 유행하던 4·6변려체를 당·송에서 유행하던 고문체로 바꾸기를 주창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4·6변려체는 같은 글자가 중복되는 화려한 수사체의 문장인데 반해, 고문체는 논리적으로 서술하는 간결한 문체여서 역사의 서술에는 보다 더 유용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문인이기보다는 유학자로 자처하였다. 백세의 스승인 공자의 도를 실현하려 한 유학자로서 그는 인종에게 『주역』과 『서경』 등을 강의한 적이 있다. 또한 『삼국사기』의 편찬에서도 그의 유학자적인 풍모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고대사를 유교적 관점에서 비판하고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1123년, 고려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까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겨왔던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운 후 요나라를 멸망시키는 등 강대한 세력으로 급성장하여 송나라를 침공하였고, 송의 휘종과 흠종 황제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자, 고려에 기존의 형제관계에서 벗어나 군신관계를 맺자고 요구해왔던 것이다. 김부식은 이 무렵 송나라 사신으로 가서 폐허가 된 송나라 수도의 비참한 모습을 생생하게 확인하였다. 이를 보고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왕조를 멸망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당시 고려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국제질서의 변화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것을 좀처럼 현실적인 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금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일 경우, 대단한 모욕감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집권자인 이자겸은 모든 신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금나라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국내에서도 큰 사건이 일어났다. 1124년(인종 4),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기도 한 이자겸이 그동안 전횡을 일삼다 마침내 인종을 사저()로 납치하고 국왕의 자리를 찬탈하려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자겸의 난은 곧 실패로 끝났으나 환란은 계속되었다. 개경의 궁궐이 불타고 어수선해지자, 서경천도운동이 일어났고 이듬해 서경에 행차한 인종은 정지상과 김안의 청을 받아들여 유신 교서를 반포하였다.
당시 금나라가 송나라에 패배하였다는 잘못된 전언을 듣고 고려에서는 금나라를 공격하자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그러나 송나라에 간 사신이 돌아와 정확한 정보를 입수한 후에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해 6월,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온 사람이 바로 김부식이었다.

그의 첫 번째 송나라 사신행차는 1116년(예종 11) 7월에 있었다. 이때 그는 송나라 사마광()이 편찬한 『자치통감()』이란 역사서를 얻어 왔는데, 간행한 지 50년이 채 안 된 것이었다. 이 책은 『삼국사기』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역사란 단순히 과거 자료의 편찬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정치적 교훈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역사관을 얻었던 것이다. 이 정치적 교훈이란, 곧 왕조를 지키는 방책이었다. 어진 사람을 군주가 발탁해 임용하고 군주는 충성스런 신하의 간언을 허심탄회하게 들어야 하며, 국민의 세금을 경감하여 원성을 사지 않아야 하고 또한 반란을 음모하는 자는 빨리 제거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웃나라와의 친선관계를 수립함도 중요한 국가유지책임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국가 중심적이고 역사의 교훈을 중요시하는 역사관은, 건국시조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고대적인 역사관에 비하여 참신한 것이었고 지리적 도참설에 의해 국가를 유지하려 했던 당시의 풍조에 비해서도 합리적이었다. 이자겸의 난으로 그 일족이 재상직에서 물러남에 따라 기회를 타서 김부식 3형제가 모두 재상직에 올랐다.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자 그의 무리인 무인 척준경을 포섭하여 이자겸을 제거하였다. 척준경은 이로 인하여 공신책봉을 받았다. 그러나 정지상에 의하여 이자겸을 제거한 공로는 일시의 공이요, 반역을 함께 저지른 것은 만세의 죄라고 탄핵되어 척준경은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에 정지상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해졌다. 그의 주장에 따라 서경, 즉 평양으로 천도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히 일어나 인종 7년 12월에 서경에 궁궐을 축조하였으며 왕 또한 서경으로 자주 행차하였다. 그러다가 이 운동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정지상 등이 왕의 행차를 따라 평양에 온 고려의 중신들에게 "묘청은 성인()이고 백수한은 아성()이니 모든 정치를 이들에게 자문을 통하여 행하자"면서 동의를 구할 때 개경의 관료들이 심하게 반발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정지상 등의 서경파는 평양의 길지설()을 입증하기 위해, 왕이 서경에 행차하였을 때 떡시루에 기름을 부어 대동강에 집어넣고 기름이 뜨는 것을 용이 침을 토한다고 말했다가 그것이 인위적 조작임이 밝혀져서 신뢰성이 크게 떨어졌다. 더구나 인종의 서경행차 시점에 일기가 불순해 '서경길지설'까지도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에 김부식 등이 주청을 하여 인종 12년에 왕의 서경 행차는 중단되었던 것이다.
 묘청 등은 서경 천도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인종 13년 1월, 금국정벌과 칭제건원의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판병부사로 있던 김부식이 반란군 진압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출정하였다. 중앙정부에서는 김부식에게 급속히 공격하라는 요구를 했지만 그는 관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완공()을 택했다. 반란군 두목인 묘청의 목이 내부 반란자에 의하여 베어져 김부식에게 바쳐졌다. 김부식은 반란군 중에서 선회한 윤첨()을 중앙정부에 보내면서 우선 후대하라고 건의했지만, 중앙의 고위관료들은 그를 처벌하였다. 이렇게 되자 반란군은 다시 저항을 시작하였고, 다음해 2월에 이르러서야 반란을 완전히 진압할 수 있었다.
묘청의 난이 칭제건원과 금국정벌론을 든 점에서 자주성의 기치를 내걸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반란의 명분으로서 제기한 것으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신흥 금나라를 고려가 정벌한다는 것은 당시 정세로 보아 전혀 승산 없는 아주 무모한 정책이었던 것이다. 구한말의 역사학자이자 독립사상가였던 신채호는 이를 두고 자주파 대 사대파의 대립이라는 견해를 밝혔지만, 이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피상적인 주장이다. 자주파란 명분으로 나라의 안위를 전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당시에 적절하지 않았다. 오늘날 재야의 역사학자들이나 일반 사람들이 이런 칭제건원을 신선하게 이해함은 전쟁의 피해를 자기가 직접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빠져들 수 있는 공허한 판단이다.

김부식이 서경반군을 진압하자, 그가 개경에 돌아오기도 전에 인종은 그 공을 포상하여 '수충정란정국공신()'에 책봉하였다. 또 관직을 중서문하시랑에서 '검교태보수태위 문하시중판이부사 감수국사겸태자태보'로 특별 승진시키고 집 한 채를 내려주었다. 문하시중은 수상의 관직이었다. 그러나 개경에 돌아온 김부식은 그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를 세 번이나 올리면서 자기 휘하에서 출정했던 윤언이와 재상인 한유충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한유충은 중추원 부사로서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군사를 쓰는 중요한 기회마다 번번이 방해를 하였다는 죄목이었고 윤언이는 정지상과 결탁했다는 죄목이었다.
윤언이는 예종 때의 중신 윤관의 아들로 김부식 다음의 서열에 올라 있었고, 인종의 장인이기도 한 임원애의 처조카였다. 김부식의 처벌요구를 인종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을 좌천시켰다. 윤언이는 당시 칭제건원론을 지지하였는데 이는 금국을 치겠다는 정책과 연관됨으로서 전쟁을 일으키자는 주장에 동조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그 후 몇 년이 지난 인종 18년에는 김부식에 대한 인종의 태도가 변했다. 인종은 김부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국에 사면령을 반포하여 윤언이 등이 중앙정계에 복귀할 길을 열어 놓았다. 김부식은 이에 정년퇴임을 1년 8개월가량 남겨두고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리에 연연하여 후배들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물고기가 낚시밥을 탐내다가 낚시에 걸려들 것이라는 비유를 들었다. 비록 사직하였지만, 그의 마음이 불편하였음을 인종은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왕은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그의 요구대로 '삼국사편찬청'이란 임시도감을 설치하고 8명의 젊은 관료로 하여금 『삼국사기』의 편찬을 돕게 하였다. 김부식은 약 3년에 걸쳐 『삼국사기』 50권을 편찬하여 1145년 인종에게 바쳤다.
김부식은 고려시대 초기인 광종 때에 편찬된 『삼국사기』를 『자치통감』의 정신을 이어받아 새롭게 편찬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과정이 서술되지 않은 것을 보충하였다. 『구삼국사』의 소략한 부분을 새롭게 보완했던 것이다. 정치의 일선에서 은퇴한 그가 역사를 쓰려고 한 것은 마치 사마광이 왕안석에 의해 정치적 실권을 빼앗긴 후 법제의 개혁보다는 정치의 운용을 통해서 현실을 구해야 한다는 자기 견해를 역사를 통해 입증하려 한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구삼국사』가 편찬된 고려시대 초기에는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이 정치적으로 표방되었었다. 그와는 달리 김부식 당대에는 고려의 신라문화 계승이 확고해져 가고 있었다. 현종 때에 비로소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에게 시호가 내려져 두 현인이 문묘에 배향되었고, 신라의 고승 원효와 의상에게도 존호가 더해졌다. 유교계와 불교계에 있어서 이러한 신라의 영향은 자연스럽게 삼국의 역사에서도 신라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고려가 영토와 인구 등에서 신라 왕조를 계승하였다는 현실을 역사책으로 서술하였다. 그는 특히 김유신을 가장 유명한 인물로 기록하여 신라의 통일을 새롭게 강조하였다. 이것은 고려의 건국과정에서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것을 삼국통일로 인식했던 기존의 역사인식을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게다가 궁예와 견훤을 신라 왕실의 반역자로 설명하였다.

 3.『삼국사기』의 구성체재와 서술방식

『삼국사기』의 서술방식은 『신당서()』를 모방하였다. 기()·전()·표()·지()로 편성하여, 28권의 본기, 3권의 연표, 9권의 지, 10권의 열전으로 되어 있다. 본기는 '신라본기' 12권, '고구려본기' 10권, '백제본기' 6권으로 구성되었다.
본기에서는 서두에 왕과 왕비의 인적 사항을 기록한 후 1년 단위의 정치 업적, 자연재해, 자연현상, 중요 관리의 임면 기사, 전쟁기사, 외국과의 사신파견 등을 기록하였다. 이 가운데 자연변이는 인간의 활동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실었던 듯하다. 그리고 1년 단위의 기술에서는 춘하추동의 사계절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중국식 역사 서술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삼국의 본기에서는 삼국간에 그칠 줄 모르는 전쟁의 참혹함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 과연 국가의 목적으로 자행될 때 일반 백성에게 주는 피해는 얼마나 될 것인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부실하다.
연표에서는 삼국의 연표를 중국의 연표와 대비하여 만들었는데, 삼국의 본기가 모두 각 왕의 재위년도로 기술되었기 때문에 연표가 없이는 절대연대의 파악이 불가능하다. 지는 통치제도 등을 분야별로 기술한 것이다. 지를 잡지()라 명명한 것은 지에 서술할 자료가 많지 않으므로 한 권의 지에 여러 분야를 합쳐서 기술했기 때문이다. 제사, 음악, 복식, 수레, 집에 대한 지 2권, 지리지 4권, 직관지 3권으로 되어 있다. 잡지에서는 삼국의 내용을 서술하려고 하였으나 고구려와 백제측의 자료는 본기 외에는 별도로 전하는 자료가 없어 중국측의 자료를 인용하는 수준을 넘지 못했다.
열전은 왕의 통치를 보필한 신하에 대한 전기로서 삼국의 신하들을 분야별로 합쳐 기술하였다. 열전에는 명확한 구분은 없었지만 내용을 분석해보면 분류별로 기술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충신, 유학자, 화랑, 효자, 예술가, 반역 등의 열전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김부식이 직접 쓴 사론 31편이 실려 있는데, 이는 일반 기록과는 달리 자신의 견해를 표현한 것이다. 이 사론은 그의 역사관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그는 삼국을 각각 아국()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어 삼국 모두를 고려의 전신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은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 강역 태반을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만약 고구려를 본기로 다룬 『삼국사기』가 없었더라면 고구려 역사가 현재 한국사라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근거가 없게 되었을 것이다.

 4. 고대 사유와 중세 사유가 혼합된 역사서

『삼국사기』는 12세기 중엽, 유교사상가들인 김부식과 보조원 8명이 쓴 역사서다. 비록 고대 문헌을 기초로 했다 해도, 서술에 있어서는 중세 보편주의적인 사유 형태가 상당 부분 가미되어 있다. 이 점을 특히 유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삼국사기』의 기록을 모두 고대인의 사유 형태로 착각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신라의 경우 초기부터 성씨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을 들 수 있다. 신라에서 성을 사용한 예는 중국 측의 사서에, 신라 진평왕 시대의 조항에서 김진평이라는 표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진평왕 때부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금석문, 즉 5세기 말의 영일 냉수리 비문, 법흥왕 때의 비문으로 추정되는 울진 봉평 비문, 진흥왕 14년경의 단양 적성비, 진흥왕 말년경의 진흥왕 순수비 등에는 신하들의 성씨를 칭한 예를 하나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금석문들에 나오는 인명은 출신부()의 명칭, 관등급, 이름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왕족을 낸 탁부() 출신도 예외가 아니다.
이에 비해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초기부터 성을 사용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성명은 네 글자로 된 것이 많다. 이때 특히 많았던 복성()은 한국의 고유한 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복성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고구려의 경우 외자의 성도 물론 있었다. 해씨, 고씨가 그 예이다.
왕명의 경우도 『삼국사기』에는 삼국의 왕호가 왕의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진흥왕 때까지는 왕호가 왕의 생시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금석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백제의 경우도 왕의 이름을 왕호로 사용했던 관례가 아주 후대까지 지속되었다. 즉, 무령왕을 사마왕, 위덕왕을 창왕이라 불렀던 것이다. 고구려의 경우도 초기에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신라의 경우, 이름을 기록하고 있지 않은 왕은 대부분 생시의 이름과 왕호가 같은 경우이다. 이것은 『삼국사기』가 고대의 기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을 반증한다.
『삼국사기』에는 당시의 기록을 김부식이 자신의 문장으로 고쳐 쓴 곳이 있는데, 이를 구분할 줄 아는 지혜가 요구된다. 삼국시대 초기에 "환고고독()을 위한 시책을 베풀었다"는 표현과, 신라 초기 유리왕 때에 6부의 이름을 바꾸고 그에 따라 성을 내려 주었다거나 또 관을 설치하였는데 17등급이 있었다는 내용 등은 후대의 자료를 소급해 기록한 결과의 소치이다. 최초의 관등급이 보이는 기사에 후대에 정립된 17관등급의 자료를 붙여 기술하였다. 이러한 예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김부식이 자신의 견해를 가미한 서술을 많이 했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고대적인 사유의 독특한 모습은 많이 흐려졌다고 할 수 있다.

 5. 전통문화의 시원으로서의 『삼국사기』

한국의 전통문화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화를 지칭한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고려왕조를 거쳐 내려온 전통문화도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 고대의 전통문화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특수성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삼국사기』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이다. 물론 그 시원은 삼국시대 이전의 성읍국가 단계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에 관한 기록은 중국인이 쓴 역사서에 단편적으로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그에 비하면 『삼국사기』는 우리의 전통 문화의 원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자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고대 전통문화의 특징, 그리고 그 특징이 조선시대 후기까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라는 문제의식으로 『삼국사기』를 읽어야 이 책의 참된 가치를 알 수 있다.
『삼국사기』는 국가의 발달사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이외에도 고대의 신화와 전설, 제사에 대한 관념, 신앙, 종교, 생활 관습, 언어와 문자생활, 예술,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 등에 관한 다양한 기록을 담고 있어 고대 문화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열전 등에 기사의 서술을 대화체로 서술하여 지루한 감을 덜어주고 서술을 박진감 넘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대화 중에 언급된 표현이 중국 고전으로부터 인용된 경우 좀 더 권위를 갖추기 위해서 유사한 내용을 김부식이 대치했을 가능성도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6.『삼국사기』는 『삼국유사』와 어떤 점이 다를까?

『삼국사기』는 정치사를 중심으로 서술된 총체적인 역사서다. 또 김부식은 문헌존중주의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에 비해 일연『삼국유사』는 『삼국사기』를 전제하고 쓰여졌기 때문에, 『삼국사기』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것들을 기록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가 삼국의 흥망에 관한 역사서라면, 『삼국유사』는 고조선시대로부터 삼국시대 말까지의 국가를 다뤘다는 점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김부식의 합리적인 역사관과, 일연의 연기설 중심의 불교사관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연은 설화를 자료로 취했기 때문에 역사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김부식이 다루지 않았던 불교적 신앙과 고승의 이야기, 사찰, 불상, 석탑에 대한 기록을 남김으로써, 유교적 관점에서는 배제되었던 당시의 불교적 전통을 생생하게 기술하였다.
김부식은 인간의 노력으로 역사를 새롭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일연은 역사에 작용하는 보이지 않은 힘을 강조하였다. 이를 신이사관()으로 칭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김부식의 합리사관에 반발하여 인연설에 기초한 불교사관을 적용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옳다고 본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고대의 일화를 그대로 전해줌으로써, 한국의 고대를 보다 원형에 가깝게 전하고 있다. 또 『삼국유사』는 불교의 신앙사라는 점에서 『삼국사기』와 크게 다르다. 그러나 단순한 신앙사가 아니라 『삼국사기』에서 제외된 신라의 각 왕들에 대한 설화를 많이 전하고 있어 『삼국사기』를 보충하는 역사서다.
『삼국유사』를 민족지()의 성격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삼국시대 향가에 대한 기록 등 아주 소중한 자료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빼놓고 『삼국유사』만으로는 한국의 역사를 복원할 수 없다.
한국의 고대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사서를 함께 읽어야 한다. 두 역사서는 우리 민족의 문화적 성격을 전해주는 고전이라 할 수 있다. 두 고전의 이러한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새롭게 해석할 때에야 앞으로 우리의 새로운 문화의 창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7.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라고 하는데 그 점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
당시는 유교가 중국만의 학문이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도 실천하여야 할 학문이라고 본 보편주의 사상이 유행하였고, 불교도 이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사대정책이 국가를 지키는 수단이라고 본 것은 아닐까? 송나라가 고려로 하여금 여진과 통교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달라고 하였을 때 김부식은 국가 안위를 위해서 거절하기도 하였다. 사대정책은 당시 동양의 외교적 관행은 아니었을까? 시대사상을 제대로 이해한 후에야 옳게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자주적인 성격에 대해서도 겸하여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고려와 조선의 문화적 성격에서 사대정책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이는 조공과 책봉을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국제적 관행과 연계하여 생각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2.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날조된 것이 많다고 하는 설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삼국사기』에는 왕위의 연대, 왕의 혈연관계 등이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점을 들어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에 전해졌던 자료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김부식이 역사적 기록을 날조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지를 생각해보자!

3. 김부식의 역사관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일까?


『삼국사기』는 당시의 자료를 전해주면서도 역사를 통해서 정치적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은 『자치통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자치통감』은 당시 동양에서 최선진의 역사이론이었고, 역사의 서술방식도 당시 중국인이 도달한 최선진의 방식을 취한 것이다. 이를 『삼국사기』에서 수용한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 것인가? 그리고 『삼국사기』에 반영된 김부식의 역사관은 조선조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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