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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남부군 /영화(1990)

작성자choiyd4|작성시간16.07.03|조회수572 목록 댓글 0



북한군 점령하 전주에서 조선중앙통신사 기자로 활동하던 이태(안성기)는 한미연합군의 공세로 전주가 위험해지자 도당과 함께 엽운산 유격사령부에 합류한다. 전투부대 소대장으로 임명된 그는 김영(최민수) 등의 소대원을 거느리고 빨치산 활동을 벌인다. 1950년 11월 모두 출동 나간 사이에 닥친 토벌군 때문에 간호병 박민자(최진실)와 함께 탈출한 이태는 그녀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고생 끝에 합류한 부대에서 사령부의 명령으로 헤어지게 된다. 이후 도당 유격대 사령부에 배속받은 이태는 정치선전 작업의 임무를 띠고 활동한다. 1951년 6월에는 남부군에 소속되어 남부군의 결합지인 지리산까지 이동 후 이현상 휘하에서 이봉각(독고영재), 김희숙(이혜영) 등과 함께 본격적인 비정규 군사활동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한동안 빛나던 전과를 거두던 남부군은 1951년 말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토벌 작전과 함께 위기에 처하게 되고 고난의 후퇴를 벌인다. 그 과정에서 김영 등과 함께 낙오된 이태는 결국 1952년 3월 토벌군에 체포된다.




  이념 갈등으로 얼룩진 한국인의 한을 담고…

 

1950년 9월 ‘조선중앙통신사’ 종군 기자로 전주에서 일하고 있던 이태(안성기 분)는 조선 노동당 유격대 ‘남부군’에 합류, 빨치산이 된다. 지리산과 소백산 등을 배경으로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 후 까지도 이들은 산속에서 활동했다. 1990년 개봉한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은 종군 기자였던 이태의 눈을 통해 사랑과 이념 그리고 동족간 전쟁의 허무함을 이야기한다. 이 영화는 제 11회 청룡영화상에서 감독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깊은 겨울 이태의 소대는 악담봉 전투에 참여한다. 그곳에서 시인 김영(최민수 분)을 만난 그는 전쟁의 무모함을 토로한다. 계속되는 전투에 쫓긴 남부군은 지리산에 밀려와 이현상 사령관을 만나고, 이태는 김희숙 대원(이혜영 분)의 용감성에 놀란다. 이때부터 이태는 정치부 소속의 정식당원이 된다. 휴전소식이 들리는 가운데 대원들의 분위기는 어수선해지고, 남부군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궁지에 몰린다. 생존을 위한 필사의 투쟁, 쇄진해진 사기로 위기에 놓인 남부군. 급기야 최후의 발악과도 같은 전투가 벌어지고 대열에서 낙오된 이태는 눈속을 헤매고, 그의 기나긴 빨치산 투쟁도 막을 내리게 된다.

6.25 한국전쟁으로

무수히 사라진 중생의 삶

눈덮인 산사에 내려놓고…

영화 ‘남부군’ 마지막 장편.

주인공 이태가 울부짖고 있다.

 

영화 ‘남부군’의 대다수 장면은 산 속이다. 깊고 어두침침한 겨울산은 다름아닌 고창 선운산이다. 선운사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매표소 바로 앞에 영화 ‘남부군’을 찍었다는 내용의 기념비가 서 있다. 일주문을 지나 선운사로 향한다. 계곡과 나무를 하얗게 덮은 설경에 감탄사가 절로 난다.

백제 위덕왕 24년(577) 검단스님이 창건한 선운사는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고 하여 절 이름을 ‘선운(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송창식의 노래로 유명해진 봄에 피는 동백꽃이 있고 9~10월에 피는 꽃무릇 또한 유명하기도 하다. 하지만 눈 내린 겨울 선운사 또한 놓치기 아까운 절경이기도 하다. 겨울산 능선을 바라보면 잎을 잃은 나무들이 마치 속살을 보이듯이 비춰진다.

수줍게 속살을 비추고 있는 겨울산은 아름답긴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산 속에서 연명했던 빨치산들에게는 상처와 아픔, 절망과 굶주림의 ‘무덤’이었다. 토벌군을 피해 산속 깊은 곳으로 다니는 빨치산, 한 발 한 발 쑥쑥 빠지는 눈을 헤치고 살기 위해 도망자가 된 영화 속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 곳 선운산과 선운사는 한국전쟁 당시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 후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과 빨치산의 본거지였다. 빨치산들이 낮에 선운사 뒷산과 계곡에 은신했다가 밤이면 사찰을 근거로 민가에 침투해서 약탈을 일삼았다. 절을 지키기 위해 절을 떠나지 않았던 당시 선운사 주지 호명스님은 정보를 제공해 줬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한국전쟁동안 남북 총희생자 수는 사망 130만명, 행방불명 111만여 명에 달한다. 선운사에 모셔진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79호)은 지난날 아픈 넋을 기리는듯 지긋한 표정으로 중생들을 보듬고 있다.


 줄거리


1950년, 이태(안성기)는 종군기자로 전주에 파견되어 '조선 노동당 유격대'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전세의 변화로 남부군의 부대가 개편되자 그는 빨치산에 합류해 전투활동을 기록해 나간다. 북으로부터 버림받고 남쪽 토벌대에게 쫓기면서 이태는 부상을 당하고 박민자(최진실)가 그를 간호한다. 두 사람은 사랑을 느끼지만 이태의 본대 복귀 명령으로 이별하게 된다.

한겨울에 악담봉 전투에 참여한 이태는 그곳에서 동족 간의 전쟁을 비난하던 시인 김영(최민수)을 만나게 된다. 또한 계속되는 전투로 남부군은 지리산으로 쫓겨 들어간다. 이태는 정식 당원이 되지만 휴전소식이 들리는 가운데 대원들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고 추위와 굶주림에 쫓기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생존의 고통과 땅에 떨어진 사기로 발악 같은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이태는 대열에서 낙오하고 눈 속을 헤매다가 토벌군의 포로가 된다.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 이후 14연대 반란군의 패잔병들이 이현상의 지휘하에 지리산에 은거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후 국군의 토벌로 거의 전멸하여 정규군 간부급은 남은자가 없었다. 그래도 몇 십명의 남은 병사들은 이후 남부군은 물론 전남도당, 전북도당에서 간부급으로 활약한다.
인천 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전투하던 조선인민군들은 보급로가 끊기게 되어 후퇴하려 했던 병력중 낙오병, 산으로 후퇴한 좌익세력중에 이현상이 북에서 재편성해서 내려보낸 병력을 규합한다. 이현상은 강원도에서 남로당의 실력자 이승엽과 만나 확대된 권한을 부여 받고 1950년 11월 중순 강원도 후평에서 부대를 재편, 스스로를 ‘남반부 인민유격대’라고 불렀다. 이때는 승리사단 4백명, 혁명지대 60명, 인민여단 1백50명, 사령부 직속부대 150명등 도합 800여명에 달했다.
강원도 후평에서 14일부터 남하하기 시작한지 며칠 안된 동년 12월 초순 월악산 언저리에서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이라고 자칭하였다. 이름에서도 알수 있다시피 남한내 빨찌산인 ‘조선인민유격대’ 중에서도 남부 6개도 빨치산을 총괄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51년 1월 3일 문경, 제천 부근으로 이동하여 단양을 경유해 2월에는 속리산에 집결하였다. 그리고 5월 27일을 기해 그 유명한 청주시 공격하고 청주 교도소의 좌익 수감자들을 탈출시키는 사건을 벌인다. 전무후무하게 도청 소재지가 빨찌산에게 공격당한 이 일로 전국이 떠들석 하였다

한때 남부군은 남한의 남부 6개도당을 총지휘하는 사령부격이 되는등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한국 산악지형의 특성상 얼마가지 않아 쇠잔하게 되어가는데,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된 것은 1953년 휴전협정 이후였다. 긴 휴전협정이 종료될 때까지, 북한은 남한의 남부군 유격대를 군인으로 인정해 북송해달라는 말을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남한 측이 빨치산을 귀찮게 생각해 북한에다가 '데려가달라!'고 제안했는데, 북한측은 일절 응대하지 않았다. 대신 북한은 빨치산 유격대에게 하산해 도시로 들어가 지하활동을 계속하라는 무전 지시만을 보내왔다.

당시 남부군 유격대원들 대부분이 하나같이 거지꼴이어서 하산이 어려운데다 경찰이 잔존 대원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있어서 무사히 산을 벗어난다 해도 갈 곳이 없었다. 산을 내려가라는 지시에는 인맥이 넓은 일부 간부들 이외에 유격대원들에게는 '하루빨리 죽으라!'는 거나 '그냥 투항하라' 는 소리와 다름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으니 결국 대부분이 투항하게 된다.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이뤄진 뒤에도 남부군은 여전히 활동을 이어갔지만 국군과 경찰 역시 지리산에서 적극적인 토벌전을 수행했으며, 여기서 국군에는 백선엽, 경찰에는 차일혁이 중심 인물이다. 그 결과 1953년 9월말, 남부군 지휘관 이현상이 전사했다. 이후에도 잔존 유격대원들의 산발적인 활동이 있긴 했었으나 그 활동은 아주 미미한 수준으로 1960년대까지 이어졌으나 대부분은 산을 내려와 '망실공비' 라는 명칭을 받고 군대가 아닌 경찰. 그것도 형사들의 감시 대상이 되어 살아가게 되고 이들 중 상당수는 이후 비전향 장기수가 되어 다시 교도소로 보내졌다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풀려났다. 1963년 마지막 빨치산이라는 정순덕이 생포되었고 그 이후 더 이상은 잡히지 않고 있다.

물론 재건시도는 몇 차례 있었는데 북한 측에서 1960년대 말 남한 후방 지역에 제2전선을 형성할 목적으로 울진, 삼척 등지에 무장 병력을 침투시킨 사건이 그것이다. 물론 실패했으며 이후에는 무장 빨치산 정책을 사실상 포기.




   시기적 명칭 변화

통칭 남부군으로 결성되었지만 명칭은 여러번 바뀌었으며 토벌대 쪽에서는 그냥 이현상 부대라고 불렀다. 당시 빨찌산은 각 도별로 도당체계로 움직였는데 남부군은 남부 6개도(충남북, 경남북, 전남북)를 총괄할려고 하는 원래의 의도를 갖고 있었지만, 도당과의 갈등으로 독립적으로 행동하는등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이현상에게 빨치산을 총괄하는 권한은 남로당계 박헌영·이승엽이 부여 한것이지만, 각 도당은 남로당 소속이 아닌 북한정권이 3개월간 인공시절에 임명한 것이며 북한에서는 이현상의 권한을 무시하는 명령을 자주 내렸다. 시기별로 명칭 변화는 다음과 같다.

1. 제2병단
한국전쟁 전 빨치산 총 사령관인 남로당계 리승엽의 지휘 아래 지리산 일대 빨치산인 2병단이 설치 되었다. 산하 4개 연대 체제였고(6,7,8,9 연대) 2병단 사령관을 이현상이 맡았다. 주로 여순사건의 14연대 반란군 출신들과, 이들을 따라 입산한 좌익세력들로 구성 되었다. 한국전쟁이전 거의 토벌되었는데 이후 이들이 남부군이 되었다.

2. 남반부 인민유격대
50년 11월 중순 강원도 후평에서 붙인 최초의 명칭.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3.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50년 12월 초순 월악산 언저리에서 붙인 명칭. 가장 유명하며 남부지역 빨치산을 통솔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실제로 1951년 7월 덕유산 6개도당위원장회의에서 각 도당을 사단 체제로 개편하고 남부군 산하로 들어간다는 결정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때 남부군 산하의 부대는 81사단, 92사단, 602사단(비전투 보급부대)으로 개편된다. 다른 도당내의 무장세력 역시 각기 사단체제로 변경된다.

4. 독립 4지대
1951년 4월 북한의 결정에 따라 기존 도당을 해체하고 ‘지대’로 개편하라는 명령서가 산넘고 물건너 51년 10월 도착하였다. 이바람에 지난 7월 결정은 모두 나가리되고, 1951년 11월 14일 자로 남조선 남쪽 지역 빨치산의 최고사령부였던 남부군은 다른 도당과 동일한 위치인 일개 지대로 격하된다. 즉 남로당계가 부여한 빨치산 총사령부의 권한을 북한 정권의 주류에서 부정한 것이다. 다만 연락수단이 없어서 빨치산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현상이 6개 도당을 장악하고 있는지 같은걸 북한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단체제 역시 지리멸멸하게 되어 남부군 직속이였던 81사단은 김지회 부대로 92사단은 박종하 부대

5. 제5지구당
1951년 8월 31일자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미해방지구에 있어 우리당 사업과 조직에 대하여>라는 결정 제 94호가 채택에 의하면 기존의 지대화 개편 방안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어 지대개편 명령을 보류하고 몇 개 도당씩 묶어서 지구당으로 개편하게 하였다. 이때 남부군(4지대), 전남(7지대), 전북(6지대), 경남 낙동강 서쪽(8지대), 제주도등 5개 지엮을 묶어서 제5지구당이였다. 남한 빨치산의 지휘부는 인민군 최고사령부 유격지도처에서 신설하는 당 중앙 연락부로 변경 되었다.
이 명령은 인편에 의해 릴레이식으로 전달 되느라 그해 겨울 국군의 1차대공세로 빨치산이 개작살 난 이후 1952년 초가을경에나 도착 하였다. 이를 실철하기 위한 1952년 10월 제5지구당 창설을 위한 6개도당위원장회의가 지리산 뱀사골에서 열렸는데, 문제는 다들 자신의 도당을 해체하기 싫어 했다. 결국 당의 지시에 꼼수를 부려 기존의 ‘지대’를 다시 도당으로 부활 시키고 이들 몇 개의 도당 상위에 지구당을 설치하기로 한다. 5지구당 위원장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맡기로 하고 부위원장을 전남·북 도당 위원장들이 맡았다.
이명령의 결정적인 문제는 이현상에게 가장 충성하는 충·남북 도당(3지구당)과 경북 도당(4지구당)이 제외 되었다. 당의 명령이니 따르기는 하지만 이현상의 힘은 대폭 줄어들었다. 6개도당 총사령부에서 2.5개 도당 사령부로 축소된셈.

6. 5지구당 및 남부군 해산
1952년 12월 북한 노동당은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를 통해 박헌영·이승엽등 남로당 숙청당하고 빨치산은 1953년 봄에서야 중앙통신을 통해 이 소식을 듣는다. 이에 53년 9월 6일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 확대회의가 지리산 토끼봉 아래 목동골에서 열었다. 이 자리에서 당의 지도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이현상등 남로당계를 빨치산 지도부에서 숙청 시키기 위해) 5지구당을 해체한다. 이현상은 모든 당적을 박탈 당하고 평대원으로 내려 앉았으며 이현상의 남부군의 전투 부대인 김지회부대도 전남도당 구례군당의 산하로 들어가고 이름도 995부대로 바뀌는 등 남부군도 사실상 해산 당한다.
또한 5지구당내의 다른 세력들은 과거처럼 도당 체제로 완전히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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