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 역사의 거울에서 통치의 근본을 구하다
저자 :사마광, 박종혁
발행사항 : 서울: 서해문집, 2008
형태사항 : 439p.: 삽도; 22cm
□ 방대한 분량의 ‘요약서’
중국에는 세 편의 위대한 역사서가 있다. 공자가 편찬한 [춘추春秋]와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 그리고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이 그것이다. 이렇게 손꼽히는 고전 중의 고전인 [자치통감]이 클래식 시리즈로 재탄생했다. [자치통감]은 워낙에 그 방대한 분량으로 독자를 압도하는 작품이라, ‘고전의 정수를 가려 뽑아 현대적인 감각으로 읽기 편하고 보기 즐겁게 재편집하는’ 클래식 시리즈에 아주 걸맞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자치통감]이 얼마나 방대한 분량인가 하면, 전체 294권에 280만여 자에 달한다. 그 밖에 연·월·일에 따라 각국의 사건을 기록한 목록 30권과, 다른 책을 참고하여 한 사건의 같고 다름을 살피도록 한 고이古異 30권을 합하면 모두 354권이 된다. 그런데 북송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사마광이 이 책의 집필에 매달린 까닭 역시 “온갖 나랏일을 처리하는 군주도 읽을 수 있도록 기존의 방대한 역사서들을 요약 정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 [사기]와 무엇이 다른가?
“군주도 읽을 수 있도록”이라고 한 사마광의 집필 의도는, 사실 [자치통감]의 형식과 내용을 결정하는 중요한 단서다. 사마광은 군주란 모름지기 역사를 알아야 통치를 잘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군주의 처지에서 경계로 삼을 만한 내용을 중심으로, 일목요연하게 내용을 선별해 볼 수 있도록 연월年月에 따라 차례대로 기술하는 편년체編年體 책을 편찬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전에 나온 중국사의 또 다른 고전인 사마천의 [사기]와는 어떤 점이 다를까?
중국 최초의 기전체紀傳體 통사로 알려진 [사기]는<본기本紀> 12권,<세가世家> 30권,<표表> 10권,<서書> 8권,<열전列傳> 70권 등 총 130권 52만여 자로, 마찬가지로 방대하긴 하나 [자치통감]보다는 ‘가벼운’ 분량이라 할 수 있다. [사기]와[자치통감]의 결정적인 차이는 집필 형식에 있다.
[자치통감]은 지적한 대로 시간 순서대로 사건을 기술하는 편년체 형식인 반면, [사기]의 기전체 형식은 역사적 인물의 개인 전기傳記를 이어 가는 방식으로 한 시대의 역사를 구성한다. 사실 [사기]는 기전체 역사서의 효시로서, 이후 역사서의 향배를 결정지었다. 그런데 사마천의 후예로 알려진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역사를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기전체를 버리고,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자” 편년체를 택한 것이다.
□ [자치통감]은 왜 춘추시대를 다루지 않았나?
[자치통감]과 [사기]의 서술 범위는 상당 부분 겹치지만, 앞뒤로 서로 전혀 다른 시기를 담았다. [사기]는 고대 전설상의 황제黃帝 시대부터 전한의 무제武帝 때(기원전 100년)까지 3,000년의 역사를 다룬 반면, [자치통감]은 전국시대 초기인 403년부터 송나라가 건국되기 직전인 서기 959년까지 1360여 년간의 역사를 다루었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는 1,000여 년의 시간적 격차가 존재한다. 사마천은 기원전 사람이고, 사마광은 서기 11세기 사람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다룬 춘추시대를 사마광은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역사가로서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를 읽어낼 수 있다. 바로 공자로 대표되는 전통에 대한 태도다.
사마천은 공자가 [춘추]에서 사용한 편년체 형식을 기전체로 바꾸고, 공자가 이미 기록한 춘추시대를 다시 다룸으로써 역사가로서 공자에 필적하려는 의도를 감추지 않았다. 반면에 사마광은 공자의 형식을 다시 가져와, 공자가 기록한 시대 이후인 전국시대부터 기록하여 [춘추]와 시기가 중복되지 않도록 했다.
□ 군왕과 관료의 정치 지침서
이런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사마광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전통 보수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래서 당대의 급진파로서 정치적 라이벌이던 왕안석이 재상이 되자 벼슬을 그만두려고까지 했다. 이런 성향이 [자치통감]의 체제와 내용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리하여 [자치통감]에는 국가의 흥망성쇠와 백성들의 애환 외에, 군왕에게 귀감 혹은 경계가 될 만한 내용이 많이 실렸다. 그래서 [자치통감]을 편역한 이 책에서도 오늘날 우리가 거울로 삼을 만한 내용을 위주로, 군주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의의가 있는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225개의 에피소드로 내용을 구성했다. 더하여 [자치통감]의 역사적 가치와, [자치통감]에 등장하는 무수한 이민족의 실체를 정리하여 별면으로 덧붙였다.
■ 목차
사마광의 생애와 시대
제1부―주나라
1 예양의 한마음/2 임좌의 직언/3 나라가 어지러우면 훌륭한 재상이 있기를 바란다/4 부하의 종기를 빨아 준 오기/5 군주와 목수의 공통점/6 자사가 위문후의 독선을 지적하다/7 즉묵대부와 아대부의 진실과 위선/8 나무 한 그루를 옮기면 50금을 주겠다/9 제나라의 보물/10 한나라 소후가 신불해의 사사로운 요청을 거절하다/11 맹자의 인의와 자사의 이로움/12 맹상군이 간언을 수용하다/13 소왕이 곽외를 먼저 초청한 뜻/14 두 왕을 섬기지 못한 왕촉/15 악의를 의심한 연왕, 소꼬리에 불을 붙인 전단/16 린상여가 화씨벽을 완전하게 보전하여 조나라로 돌아오다/17 염파가 가시나무를 짊어지고 사죄를 청하다/18 조사의 공평 조세/19 조태후를 설득한 촉룡의 화술/20 조괄의 탁상 병법과 무안군의 45만 명 대학살/21 자신을 천거한 모수
제2부―진나라
22 차라리 가난하게 살며 뜻을 펴고 살겠다/23 진시황의 천하 통일/24 진시황을 저격한 형가/25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파묻다/26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다
제3부―한나라
27 장량의 의리로 위기를 벗어난 패공/28 한신의 계책을 받아들인 한왕/29 행실이 아닌 능력을 추천하다/30 포로의 계책을 이용한 한신/31 유방이 천하를 쟁취한 까닭/32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하다/33 장량의 명철보신/34 한신의 토사구팽/35 소하, 장량, 진평에 대한 논공행상/36 장량의 기지에 찬 간언/37 초패왕 항우의 최후/38 개는 주인이 아니면 짖는다/39 가식과 탐욕으로 멸족을 자초한 팽월/40 사람 돼지의 거울/41 석지의 공평한 두 가지 판결/42 한문제가 계포를 돌려보내 이유/43 비천한 사람은 꺼릴 줄 모른다/44 신도가가 왕의 총신 등통을 죽이려 하다/45 주아부가 군율로 황제를 통제하다/46 전무후무한 문제의 치적과 유언/47 마음속으로 불평해도 사형을 당하는 죄/48 아관의 관대한 정치/49 궁형을 당한 사마천/50 한무제의 용서 없는 법 집행/51 하후승과 황패의 옥중 정진/52 법령을 줄이고 형벌을 관대하게 하라/53 왜 불을 끈 사람만 대접하는가?/54 위상의 전쟁 반대/55 소광과 소수의 명예로운 퇴직/56 영천태수 황패의 치적/57 자식의 최후를 예감한 엄연년의 어머니/58 반첩여의 반듯함과 조비연의 음탕함/59 유보가 조비연의 황후 책봉에 반대하다/60 조비연의 광적인 아들 집착/61 성공할 때까지 근신한 왕망/62 난간을 끊은 주운의 충정/63 왕망이 순우장의 비리를 고발하다/64 바른말 하다가 파면당한 손보/65 왕망이 평제를 독살하다/66 자식 셋을 죽인 왕망/67 자간장군 제준의 군기/68 송홍의 마음을 떠본 광무제/ 69 범과 같은 두 장수, 가복과 구순/70 황제를 질타한 성문지기 질운/71 ‘목이 뻣뻣한 현령’ 동선/72 마원이 용백고를 본받으라고 한 뜻/73 광무제 유수가 제사를 허락하지 않다/74 도참서를 비판한 환담/75 불교의 중국 유입/76 초왕 유영의 역모 사건/77 무제를 비판한 공희의 변론/78 양진이 한밤중에 금을 받지 아니하다/79 우후가 도적 떼의 옷을 색실로 꿰매게 하다/80 주거가 좌웅을 탄핵한 뜻/81 기주자사 소장의 공명심/82 이운의 공개 상서/83 서치를 위한 의자/84 당쟁의 발단/85 가표의 성을 따라 이름을 짓다/86 석방을 도와준 사람에게 사례하지 않는다/87 단경이 강족을 멸살시키다/88 범방의 죽음과 모친의 의연함/89 신도반의 명철보신/90 충신과 효자를 함께 하기가 어렵다
○ 《자치통감》의 구성과 역사적 가치
제4부―황건적의 난과 삼국시대의 서막
91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조조/92 동탁의 배꼽에 불을 붙이다/93 여범이 군기를 잡다/94 유비를 살려 준 여포와 조조/95 여포는 매와 같다/96 주인을 찾아가는 자는 쫓지 말라/97 오직 재능으로 천거하라고 한 조맹덕/98 더 이상 오현의 여몽이 아니구나/99 호랑이를 불러들여 먹힐 짓/100 두습이 조조를 설득하다/101 손권의 장수 사랑
제5부―위-삼국시대
102 신비가 위문제의 옷자락을 당기다/103 장비가 부하에게 목이 잘리다/104 제갈공명은 직언을 의심하지 않았다/105 상하가 직무상 할 일은 따로 있다/106 제갈량의 칠종칠금/107 손권이 여범을 중히 여기다/108 제갈량이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베다/109 제갈량의 죽음을 예언한 사마의/110 왕창의 자식 훈계/111 장완의 아량/112 여대와 서원의 사귐/113 재주는 많고 식견은 짧은 혜강
제6부―진나라
114 양호가 적장에게 약을 지어 주다/115 주처의 개과천선/116 궁녀들이 다투어 양을 끌어들이다/117 사마염이 한환제보다 나은 까닭/118 왕제가 굴복하지 않다/119 바보 황제 혜제/120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른다/121 석륵이 평민 시절의 한을 기억하지 않다/122 도간이 형주에 있었다/123 안함의 두 가지 일/124 자식의 교만과 사치에 화를 낸 을일/125 왕맹의 거리낌 없는 법 집행/126 범영의 도가 비판/127 백성을 죽여 무기를 날카롭게 하다
○ 중국 역사의 또 다른 주인공, 북방 이민족
제7부―남북조
128 아시가 아들들에게 화살을 꺾게 하다/129 위나라의 쇠퇴는 전쟁 탓/130 백성의 피땀으로 지은 상궁사/131 판결의 심사숙고/132 부처가 없다고 공언한 범진/133 검소한 외양이 사치한 마음을 가리지 못한다/134 서민에게만 각박한 양무제의 법 집행/135 양무제 동생 소굉의 재물 욕심/136 우문태가 소작을 등용하다/137 유행본이 홀을 땅에 내려놓다/138 경박한 문체를 배격함/139 사치와 향연으로 허송한 진나랑 왕/140 왕기가 서린다던 진나라의 멸망
제8부―수나라
141 조작이 한마음으로 법을 집행하다/142 장무왕과 죄수들의 약속/143 위운기가 거침없이 직언하다/144 중용으로 문중자 시호를 얻은 용문왕/145 고조 황제에 대한 평가/146 수양제의 끝없는 호화/147 수나라의 전성기와 고구려 침공 실패/148 재차 논의한 고구려 정벌
제9부―당나라
149 장진주는 친인척을 용납하지 않았다/150 당태종 이세민의 골육상잔/151 빼앗고자 하면 먼저 주어라/152 당태종의 논공행상/153 법망에 사람을 빠뜨릴 수는 없다/154 뇌물 받은 신하에게 상품을 내리다/155 활과 화살의 이치도 모른다/156 왕의 속임수와 신하의 아첨/157 몸을 갈라 진주를 숨기는 짓/158 현명한 신하를 목 베고 후회한 당태종/159 태종의 품 안에서 죽은 새/160 저 시골 영감쟁이를 반드시 죽일 것이다/161 울지경덕에게 경고한 태종/162 난세와 치세의 인사 기준/163 사형수를 놓아주다/164 등용의 기준/165 황보덕삼의 상서/166 황제를 면전에서 질책한 유범/167 창업과 수성의 어려움/168 고구려, 백제, 신라 학생들의 당나라 유학/169 무슨 죄를 지었기에 황제는 꾸짖고 신하는 사죄하는가?/170 태종의 세 가지 거울/171 당나라에 손짓한 신라/172 고구려가 당나라를 격파한 안시성 전투/173 공양할 부모가 없으니 한스럽다/174 이름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이군선/175 태자를 위한 당태종의 계략적 유언/176 농사철을 빼앗지 마십시오/177 억지 대답은 하지 않는 것이다/178 배행검의 넓은 도량/179 무측천이 심전교에게 벌을 내리지 않다/180 손님을 초청할 때에는 사람을 가리라/181 적인걸을 추천한 루사덕/182 청탁하면 기용하지 말아야 한다/183 역사서를 고치지 않은 오긍/184 바른말은 왕의 잠자리를 편하게 한다/185 혜비의 계략에 걸려든 태자/186 백지만 붙들고 있는 장원 급제자/187 며느리 양귀비를 아내로 맞이한 현종/188 겉은 우직하고 속은 교활한 안록산/189 안록산을 사흘간 목욕시킨 양귀비/190 양귀비를 목 졸라 죽이다/191 짚인형으로 수십만 개의 화살을 얻다/192 사람을 잡아먹고 성을 지킨 장순/193 단수실이 부원수의 아들을 꾸짖다/194 곽난과 승평공주의 부부 싸움/195 재정과 이재의 달인 유준/196 황제는 간언을 자청해야 한다/199 눈먼 재상이라면 자네를 추천하겠지/ 200 이강의 포용 정책과 인사 정책/201 유종원의 명문/202 유공작이 신책군의 장수를 장형으로 죽이다/203 멀리 내다보는 사람은 가까운 곳을 돌아보지 않는다/204 불교의 흥성과 한유의 배불론/205 유공권이 서법으로 당헌종을 간하다/206 뇌물죄는 용서해도 법 적용을 농단한 자는 처벌한다/207 붕당을 방치한 문종/208 환관과 대신들의 권력투쟁/209 세 번씩 세탁한 옷을 입은 당문종/210 귀순자 실달모를 사지로 돌려보내다/211 귀순자 곽의의 죽음/212 재상께서는 권력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213 당선종이 만수공주를 꾸짖다/214 나무꾼에게 물어 이행언을 등용하다/215 환관과 대신 사이는 불과 물/216 위오가 법을 집행하자 왕이 사정하다/217 손을 씻고 상소문을 읽은 선종/218 ‘작은 태종’으로 불린 선종/219 당계가 몰래 바친 선물을 받지 않다/220 가문이 좋으면 두려울 일이다/221 환관의 떼죽음
제10부―5대
222 전류의 공정과 근면이 나라를 보전하다/223 화살 100개의 유물/224 후당 황제와 풍도가 작황에 관해 담소하다/225 아들을 처형한 유인섬
옮긴이의 말
□ 저자 소개
○ 사마광
사마광(司馬光, 1019년 ~ 1086년)은 중국 북송의 유학자, 역사가, 정치가이다. 자는 군실(君實)이고 섬주 하현(陝州 夏縣, 지금의 산시 성) 출신이다. 호는 우수(迂叟)이며 또는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 불렸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온국공(溫國公)의 작위를 하사받아 사마온공(司馬溫公)이라고도 한다. 선조는 사마의의 동생 사마부라고 한다. 자치통감의 저자로서 유명하다. 신법(新法)과 구법(舊法)의 다툼에서 구법파의 영수로서 왕안석과 논쟁을 벌였다.
○ 생애 초반
1038년에 진사(進士)가 된다. 부친도, 조부도 진사였다.
○ 신법당과의 갈등
1067년에 신종이 즉위하고 왕안석을 기용하여 신법을 단행했다. 당시 한림학사(翰林学士)였던 사마광은 당초 개혁에는 찬성이었다. 그러나 왕안석이 관료의 기득권을 침범하고 정치의 일신을 도모하자, 곧 반대 입장으로 바꾸고 추밀원을 근거지로 한 왕안석 반대파(이른바 구법파)와 연계하여 강행하는 신법 반대를 주장했다. 사마광은 왕안석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신법의 철회를 요구했기 때문에, 마침내 조정에서 퇴출되어 부도(副都)인 낙양에서 사실상의 은거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그 이후 사마광은 구법파 동조자와 함께 신법의 반대를 끝까지 주장하게 된다.
이렇게 조정의 의향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던 사마광이었지만 선대 영종 이후 신종에게도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특히 <자치통감>의 편찬을 생각한 후에는 영종에게서 특별히 편의를 제공받으면서 그 완성을 기대하게 되었다. 또 신종의 신법에 반대하여 수도에서 쫓겨난 사마광이었지만 역으로 신종에게서 <자치통감>을 완성하라는 명을 받았다. 즉 이 책은 사마광의 낙양 은거때 완성되었다.
○ 재집권
1085년에 신종이 붕어하고 철종이 10살의 나이로 즉위하고, 섭정 선인태후(宣仁太后) 고씨(高氏)의 명령으로 재상으로 중앙에 복귀했다. 이때 사마광은 신법을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모두 신법실시이전의 법으로 되돌려 정권을 운영했으나, 매우 극단적이기에 같은 신법의 폐지를 주장하던 친구, 부하들에게도 반대받을 정도였다. 더해서 사마광의 명성은 천하에 울려퍼질 정도로 영향력이 있어 많은 관료가 사마광의 발언에 영합해 거꾸로 신법 여러 정책 중에 근간 중 하나였던 역법(役法)을 변경할 정도였기에 그 폐해는 이후 10년 가까이 영향을 끼쳤다. 바라던 신법 폐지에 전력을 기울이던 사마광이었지만 재임 8개월 만에 병으로 죽었다.
평가와 비판
오래전부터 사마광의 평판은 매우 높았다. 그것은 그가 속한 구법파의 흐름을 따르던 주자학이 학계에 군림하였고 사마광을 격찬한 것도 원인이 되었다. 그 입장에서 본다면 사마광은 군자 중에 군자로, 또 시시비비가 없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근대이후 발전한 경제사학적인 입장으로 본다면 사마광은 오랜 대지주, 대상인을 옹호하고 이들의 정권세습 타파를 노리던 신법을 배제하는 반동적 정치가 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왕안석과 상대 당을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는 비판도 공존한다. 그에 의하면 사마광은 왕안석의 신법의 의의를 모두 이해하지 않았고 단지 수구파의 영수 이외의 어떤 것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면 사마광이 재임한 지 겨우 8개월 만에 서거했기 때문에 왕안석의 신법을 대신할 방책을 고려했지만 이것을 바꿀 때까지의 시간을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