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지 몇 칠이 지났다.
잠도 오지 않고 밤도 길어 홍장을 생각하며 이리 뒤척 저리디척하고 누워 있는데 강릉부사 윤흘이 찾아왔다.
"달도 밝고 고요하니.
우리 소풍이나 같이 하십시다.
우리 강릉에는 유명한 경포대가 있고 그 경포대의 경승은 별유천지의 선경인고로 달이 밝고 바람이 맑은 밤에는 옥퉁소(玉筒箫) 소리와 아울러 선학(仙鹤)의 소리가 들려오며 천상에 선녀들이 놀러 오기도 하는데 홍장으로 말하더라도 살아서 절대 가인이었으니까, 죽은 뒤에도 혹은 선녀가 되어, 허비경의 사자연이나 서왕모의 동쌍성 같은 선녀들과 한짝이 되어 이러한 선경에 몰려올지도 알 수 없으니, 만일에 사또가 세상 연분이 다 하지 아니하였다면,
옛날의 유완(劉玩) 같은 이가 천태산에서 선녀를 만난 것과 같은 기연(奇缘)이 있을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하고 능청스럽고 그럴싸하게 줏어 넘기니 홍장을 오매불망 고대하던 순찰사는 고독과 무료를 이길 수 없어 드디어 경포대행을 쾌락하였다.
일엽 편주에 몸을 싣고 두 사람은 경포대 위에 떴다.
때 마침 칠월 보름이었다.
하엽없이 흰달이 만리창공에 빛나고 거울처럼 맑은 물이 문자 그대로 경포대의 절경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득찬 그릇에 금파와 음파가 출렁거리며 가을 숲에는 희고 맑은 이슬이 새로이 내려 점점이 옥을 이루었다.
이곳은 바로 인간 세계가 아니요 선경이었다.
순찰사와 부사는 점점 호수중심으로 배를 저었다.
물은 더욱 고요하고 달빛은 더욱 밝고 노는 자들의 흥은 절정에 도달한 것 같았다.
밤은 깊고 물은차고 고기는 물지않을제
빈배 달빛만 싣고 홀로 돌아 오는구나.
두 사람이 이런 시를 읊으면서 호수의 중앙을 왔다갔다 하고 있는데 홀연히 어디선가 운무가 자욱하더니 코를 찌르는 향내가 진동하였다.
은은한 옥통소 소리가 혹은 가까이 ,멀리 ,가늘게 ,크게 높게 아스라이 떨리는 듯 조은는 듯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느 곳에서 들려 오는 소리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순찰사는 아까 부사에게 들은 말도 있고 하여 황홀한 정신으로 의관을 정제하고 부사한테 물었다. "이 고요한 밤 중에 옥통소 소리가 웬일이요?"
아까 말씀드린 선녀들이 놀러 온 모양인데 아마 사또와 선녀들 사이에 기연이 있나 봅니다.
순찰사는 그 말을 듣고 더욱 반가워하며 혼자 생각에 잠겼다.
'오늘 밤이야말로 선녀를 만나는구나!' 하고 무릎을 꿇고 향을 피워 단정히 뱃전에 앉았다.
한참 있다가 바라본 즉 한조각 작은 편엽선이 순풍에 돛을 달고 호수가로 흘러 내려오는데 그 위에는 큰 붓으로 쓴 글자가 뚜렷이 달빛 달에 나타났다.
신라 성대 안상이
천년을 지나도 풍류를 잊지 못하네
들으매 사신이 경포에 논다하니
홍장을 배에 싣고 차마 아니 못가겠다.
싯귀가 씌여 있는 돛대 아래에서 한 백발 노옹이 신선간을 쓰고 날개옷을 입고는 단정히 앉아있고, 그 옆에는 호로병(胡簏瓶)을 찬 청의동자 둘이 옥통소를 불고 있었다.
그 곁에는 절세 가인 한사람이 오패(玉佩)를 은은하게 울리며 꽃모자를 쓰고 짙푸른 소매 붉은 단장에 옥잔을 들고 서 있었다.
그 맑고 고운 모습은 양귀비와 서시도 매혹될만 하였고, 월궁선녀 항아(姮娥)와 선녀같이 아름다운 여자 낙포선녀(洛浦仙女)도 무색할 만 하였다.
순찰사가 그윽하게 바라보며 감격하여 어찌할 지를 모르고 생시인지 꿈속에서 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한참 바라보던 중에 그 미인이 다름 아닌 전일에 자기가 사랑하던 홍장과 비슷함을 느끼었다.
그러다가 거의 틀림없는 홍장이었으므로 순찰사는 반가움과 고마움과 감격이 한꺼번에 용솟음 쳐서 뱃머리로 선뜻 나서며 절하며 사례하고 말했다.
"하계의 속인이 예를 알지 못하여 천상의 선관이 강림하옵시는데 멀리 영접치 못하였사오니 그 죄를 널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 백발의 노인은 속이 상한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그대는 무탈히 잘 지냈는가?
나는 본시 상계의 선관으로 죄를 지어 인간세상에 귀양 온지가 어언사십년이 넘는데, 그 동안 피차에 소식이 없다가
오늘 밤 경포대상에서 우연히 만나니 대단한 기쁨일 뿐 아니라, 저기 미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본시 옥황상제의 향을 관리하던 시녀로 상제께 죄를 범하여 잠시 인간세상에 귀양 왔다가 죄 풀릴 날이 멀지 않아 천상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아직 그대와 연분이 있어 오늘 밤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오." 하고 말했다.
순찰사는 너무나 반가워서 그 미인을 자세히 바라보니 과연 전일의 사랑하던 홍장이 분명하였다.
달빛에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마음 속에 젖어드는 고운 아미는 무한한 정과 한을 머금고 있는 듯 하였다.
제 아무리 철벽의 장부라 할지라도 녹아들지 않을 수 있으랴 비록 석가모니와 노자 같은 사람이라도 녹지 아니하고는 못 배길 것이거든 하물며 순찰사야!
순찰사는 홍장의 희고 부드러운 손을 덥석 부여잡고 뜨거운 눈물을 한없이 흘리면서, "너는 진정 나를 버리고 어디에 갔었느냐?" 하니 홍장도 또한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소첩은 속세와 인연이 다하여 아무리 사랑하는 순찰사라 할지라도 이제 다시 어찌할 수 없사오나, 순찰사께서 소첩을 그리워하시는 정성과 소문이 하늘에까지 사모치어 옥황상제께서 특히 허락 하시어 오늘 밤에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사옵니다." 하였다.
순찰사는 공손히 그 백발에 노옹 앞에 나아가 다시 두 번 절하고 아뢰었다.
"이미 옥황상제께서 명령이 계시다 하오니 홍장과 하룻밤 묵을 인연을 회복케 하여 주시옵소서."
그 노인은 혼쾌히 대답하되 이미 상제의 명령이 계신 터인즉 그대가 홍장과 다시 하룻밤 같이 하는 것이 좋기는 하겠으나 나는 본시 인간의 속세와 인연을 끓은 지라 같이 갈 수가 없으매 둘이서만 가시오." 하고 또 이어서 홍장을 보고는 "이렇게 천생의 연분이니 이 손님과 같이 가되 반드시 날이 밝기 전으로 되돌아 올 지니라." 하였다.
그리하여 순찰사와 홍장은 손에 손을 잡고 경포대를 나와 객사로 돌아오니, 그날 밤에 연연한 두 사람이 정경은 칠월 칠석날 밤에 견우와 직녀의 만남과도 같았다.
젊은 남녀의 정염이 무르녹을대로 무르 녹은 짧고 짧은 밤이었다.
두 사람이 단 꿈이 채 깨기도 전에 밤은 어느 듯 새벽을 알리고 밝아왔다.
밤새 사랑으로 피로에지친 순찰사는 혼연히 놀라 홍장이 떠나간 줄만 알고 눈을 비빌 사이도 없이 옆자리를 더듬어 보았다.
뭇 새가 한 나무 가지에서 자다가 날이 밝으면 각각 동서로 날아가듯이 허무하게 가버리고 없으려니 생각하면서.....
홍장은 없었다.
순찰사는 얼른 등 뒤를 돌아보았다.
홍장은 등 뒤에서 새벽 화장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얼굴은 더욱 아름다웠다.
순찰사는 너무나 의아해 하면서. "어찌 된 연고인고?" 하고 물었다.
홍장은 다만 방그레 웃을 뿐이었다.
바로 이 때 강릉부사 윤흘이 큰 소리를 내면서 방으로 들어 닥쳤다. "홍장을 하늘로도 보낼 수 있고, 선계로도 보낼 수 있고,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고, 중신까지도 하였으니, 사또 한 턱 단단히 내야겠소, 하하하!"
순찰사는 비로소 속은 줄 알았으나 마음은 흥분에 들떠 있었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체로 흥분된 마음으로 그는 큰 잔치를 베풀었다.
이번엔 홍장이 옆에 있고 부사가 옆에 있고 술과 안주가 갖추어져 있으니, 순찰사 박충신숙의 마음은 학을 타고 구름위를 나르는 것만 같았다.
그 이후로 순찰사와 홍장의 연정은 두터울대로 두터워지고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어 갔다.
여러해가 흘러서 순찰사는 한양에서 강릉부사에게 이러한 시 한편을 지어 보냈다.
"지난날 소년 때 강릉 땅에 놀았더니
경포대 맑은 물이 꿈속에 와연하다.
그 곳에 배를 띄워 또 한번 놀려 하니
홍장이 다 늙은 나를 비웃을까 걱정이 된다."
경포대 한 복판에 큰 바위가 있으니 그것이 순찰사 박충숙신과 강릉 명기 홍장과의 애틋한 이야기가 숨어있는 이른 바 홍장암(红粧嚴)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