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倾国)절색(絶色) 정향(丁香)
(1)세종(世宗)과 양녕대군(讓寕大君)
양녕대군은 실로 큰 그릇이었다.
큰 그릇이었기 때문에 더 큰 그릇이 될 수 있었던 그 아우의 인간됨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성인이라야 능히 성인을 알아본다라는(聖人能知聖人) 옛말은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양녕대군의 망나니질을 성광이라고도 칭하는 사람이 있거니와 가히 성광이라고도 할 만한 것이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밤 양녕은 그 부왕인 태종과 그 모후의 대화를 엿들었던 것이다.
"첫째 양녕보다는 훨씬 그 애가 낫지. 그 애가 첫째로 동궁이 되었다면 이 나라가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을!"
그 애라는 것은 후일의 세종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리하여 양녕대군은 거짓 미친체하여 스스로 동궁의 자리를 그 아우인 세종에게 양보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군신의 모든 참소와 형제 이간 책동도 세종대왕의 너무나 넓은 가슴속과 그 말할 수 없는 형제 간에 우애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모든 신하들도 그들 두 사람의 이간(離间) 책이 자신에게 무익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는 이간 붙일 생각도 하지 아니하였다.
실로 우애 있는 아우요, 임금이요 형이요 신하였다.
이조사상 이만큼 왕실의 권력들이 화목해 본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조는 초기에 방번 방석의 난에서 시작하여 그 후 수많은 골육 상쟁을 되풀이하였거니와 세종과 그 형인 양녕과 같은 우애가 있었던 들 그러한 비극은 통히 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애가 자별한 형과 아우는 항상 며칠만 만나지 못하여도 궁금해 하고 그리워 하였다.
시로 희한한 일이었다.
양녕은 한 동안 만나지 못한 동생이요 왕인 세종을 만나서 이번에 평소에 품고 있던 서경 유람의 윤허를 얻고자 하였다.
풍류를 즐기는 양녕은 서경의 맛있는 술과 아름다운 미희를 만나는 것이 유일한 생애의 소망이었다. 편전에서 왕을 보고 양녕은 입을 떼었다.
"전하께 소청이 있사오니 평생의 품은 소망이 온대 삼 사 삭의 수유를 허락하시면 평생의 원을 이룰가 하옵는데 전하의 성의가 어떠 하오 신지요?"
세종은 양녕만 입궐하면 크게 음식을 차리고 잔치를 베푸는 것이 일과였다.
다소 취기를 이용한 양녕의 말에 세종은 말했다.
"형님의 큰 소망이 무엇이 온지, 동생이 왕위에 있어서 가능한 노릇이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드리리라." 세종대왕은 그윽히 웃으면서 형님을 바라보았다.
"다름 아니오라 신이 서경(西京)을 한번 보고 오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 옵니다.
꽃도 이제 불원 피었고 춘삼월의 대동강, 을밀대 부벽루, 영명사 등을 한번 보고 왔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사옵니다."
세종은 또 한 번 웃으면서 형님께서는 서경의 아름다운 여색과 좋은 술 감홍로 이야기를 많이 들으신 모양이구려."
양녕은 허리를 굽혀 말했다.
"전하 그렇지 않소 오이다."
양녕의 얼굴은 붉어지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형님이 정히 가시고 싶다면 한 가지 조건이 있사옵니다.
그것은 술과 미색을 멀리하시기를 맹세하신다면 가셔도 좋겠습니다."
"그것이야 쉬운 노릇이지요."
"그러면 삼사 삭 동안 형님 잘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성은이 하해 같사 옵니다."
양녕은 이리하여 평생의 뜻하던 바 서경 유람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양녕은 퇴궐하는길로 행차를 준비하여 왕께 하직을 고하고 서경을 향하여 길을 재촉하였다.
양녕의 가슴은 훤하게 트이었다.
한양은 좁고, 음해 잘하고 음모에 능한 무리들이 득실거리어서 싫더니 이렇게 한 번 밖을 나오니 얼마나 시원한 것인가.
그는 산천의 춘색을 바라보면서 말 위에 높이 앉아 앞으로 갔다.
왕은 형님의 신변을 염려하여 궁액들을 놓아 두루 조사했으나, 양녕은 이르는 곳마다 술과 색을 임금하고 약속한대로 몸을 단정히 가졌다.
세종이 분부한 궁액들이 각기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양녕은 어느 고을에 들어가 가든지 미리 하인을 시켜 술과 계집을 멀리하게 하였으며 객사에서는 일찍이 불 끄고 잠자고 다시 이튼날 길을 떠나는 그런 쓸쓸한 여행이 계속된다고 했다.
양녕은 본시 주색을 좋아하였다. 호협한 양녕인지라 술과 계집을 싫어할 리가 만무하였다.
그러므로 천리 춘색에 서경 유람 뜻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이래서는 진정 형님에게 미안한 노릇이다.'
이렇게 생각한 세종은 평양 감사에게 밀지(密旨)를 내리었다.
"무슨 수단을 쓰든지 형님에게 기생 하나를 수청들게 하여 성공하기만 하면 곧 치솔 하여 한양으로 보내라" 하였다.
평양 감사는 당황하였다.
2)서경(西京) 춘색(春色)
양녕은 비록 천리 춘색 속에 서로 서로 걸었지만 술과 여색을 금엄히 하면서 평양으로 향하였다.
적적하고 답답한 여로였다.
무르익어 가는 춘색인데 술 한잔도 없이 여행을 하자니 양녕의 마음은 고독하였다.
싱거웠다.
양녕은 그러나 세종 치하에 백성들의삶을 굽어보며 "이만하면 아우의 치세가 요순시대에 버금가, 됐어! 됐단 말이야!
저 농부들을 보지 모두 흥겨워 논밭에서 일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양보하길 잘했지."
기름진 논과 밭, 울창한 살림, 풍요로운 창들, 파발 마다 기다려지는 살찐 말들.....
어디를 보나 모두 왕의 치세가 태평성세라는 것을 알리는 증거였다.
"내가 만일 끝끝내 동궁을 버티고 내놓지 않았던들 아우도 지금은 한갓 왕의 아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을....."
"과연 나의 양보는 현명한 것이었다."
"내가 왕위에 올랐더라면 과연 동생만큼 한 치적이 있었을 것인가?"
양녕은 비록 미주 미색이 없으나 적적한 대로 서관대로를 가는 것이 그다지 싫증 나는 여행은 아니었다.
아우되는 현군에게 맹세까지 하고는 무슨 면목으로 주색을 가까이 할 수 있으랴.
각읍 수령 방백들은 본시 풍류를 즐기는 어른이라, 또 고귀한 분인지라 다루기에 전전 긍긍하였다.
그러나 술과 계집이 없는 바에야 무엇을 꺼릴 것이라 한 번 행차가 지나가 후는 각급 수령들은 이외의 얼굴들을 하였다.
그 고귀한 풍채와 좋은 언변과 부드러운 품성은, 모두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게만 하였다.
평범한 인품이 아니다라는 인상이 간절하였다.
서경의 봄이 한창 무르익을 때 양녕이 행차는 평양에 당도하였다. 역사와 명승과 기생과 술과 대동강과 능라도의 평양, 그것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그곳에 양녕이 도달한 것이었다. 양녕이 평생 소원이 평양을 보는 것이었다.
나루까지 나와서 영접하는 감사의 환영에 양녕의 답사는 여전히 술과 계집의 엄금이었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밀지가 있는지라 감사는 속으로 미소하였다.
저녁에 술과 기생없는 싱거운 한영연이 끝난 다음 양녕은 객사로 돌아왔다.
춘삼월은 꽃의 계절 흩날려 떨어지는 낙하를 응시하는 양녕의 마음은 한층 더 야릇하였다.
단군 왕검의 옛 도성에 봄이 짙으니 낙화마져 머음을 어지럽히는 구나 반만년의 역사의 도시 이 아름다운 도시에 와서 염문 하나 없이 그냥 가다니.....
여행의 근심이 무겁게 가슴을 메웠다.
어느덧 황혼이 고요히 잠겨 오는 고도의 평양, 그런데 어디서인지 고요한 음률이 흘러 나온다.
거문고 소리였다.
애조를 띠고 흘러오는 거문고 소리는 애곡이였다.
그렇지 않아도 애수의 잠 못 이루는 양녕이었다.
그쳤다 이어졌다 하는 거문고 소리는 바로 이웃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닌가?
양녕의 마음은 깊은 우수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봄달이 떠 올랐다.
보오얀 달이 한층 여행객의 마음을 비창하게 하였다.
천년 역사의 고도.....
밤달빛 아래 애련히 들르 오는 애곡의 거문고 소리 슬프고 아름다운 저 거문고 소리!
젊은 양녕의 가슴은 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달빛 아래 수많은 지붕이 엿보였다.
그 많은 지붕 아래는 미색으로 유명한 서경인지라 아름다운 여인도 많으련만 "어명이 엄하시니 그럴 수가 있어야지.
어명만 아니면야!"
"그러나 한 번쯤!"
"아니. 아우님 만날 면목이 무어람."
"예라 어명이고 무엇이고!"
양녕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심부름하는 하인을 부른 것이다. "이 오너라!"
"네 이!"
통인이 등대하였다.
"저기 저 들리는 노래가 기생의 노래냐?"
"그렇다고 생각되옵니다."
양녕대군에게 있어서는 괴로운 밤이었다.
계집이 없으면 술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고 술이 없으면 계집이라도 있어야 할 밤이었다.
그러나 지금 두 가지가 다 없는 것이다.
있기는 있으나 없으나 매일반이었다.
양녕대군은 객사 마루에서 떠 오르는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희디 흰 큰 달이 무슨 큰 동이 모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 때 흰 달빛 아래로 웬 흰 그림자가 얼씬하였다.
바라보니 한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하얗게 소복을 하고 객사 앞뜰로 후다닥 뛰어왔다.
양녕대군이 그리로 주의하였을 때는 벌써 뜰 아래에서 양녕 보호 임무를 하고있던 나졸들도 보았던 모양으로 그리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그 여자를 붙잡아 오랏줄로 칭칭 묶어서 뜰아래에 꿇려놓았다.
" 어떤 요망한 계집이건데 어느 안전이라고 언감생심 내정에 침입하였느냐?"
"잘못되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아와요."
이번에는 양녕대군이 나졸 대신 물었다.
"너는 어떠한 계집이 건데 함부로 이곳에 뛰어들었느냐?"
"소녀는 이웃에 사는 계집으로 지난해에 지 아비를 여이고 홀로 지내는 몸이 옵니다.
도둑 고양이가 상식에 놓으려던 반찬거리를 물고 가기에 쫓아온다는 것이 여기까지 따라 왔습니다.
존전인 줄 모르고 뛰어왔습니다. 관후하신 처분을 바라옵니다."
실로 옥을 굴리는 듯한 아름다운 음성이었다.
평양에 미색이 많다 하지만 이만큼 한 여인을 구하려면 적지 않은 힘들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디로 해서 들어왔느냐?"
"이 객사와 사이에 담 하나가 있사온데, 겨울눈에 담이 무너져서 사람 하나가 드나들 만한 곳이 생겼사옵니다."
객고에 고뇌하던 양녕은 그 말에 속으로 저윽히 미소를 지었다.
"객사의 담장을 수리하지 않은 것은 이쪽의 실수이니 여자는 돌려보내 주어라."
양녕대군은 자비 가득한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았으나 실상은 정열에 타오르는 마음으로 여인을 전송하였던 것이다.
그날 밤을 양녕대군은 무사히 넘길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여자 그리고 주인은 이미 없어지고 홀로 있다는 여인!
양녕은 번민과 고뇌를 한아름 안고 드러누웠으나 잠이 울리 만무하였다.
아름다운 그의 음성이 귓가에 아슴푸레하게 울러왔다.
늦은 봄 밤은 낙하를 재촉하는 듯 더욱 번뇌를 더해준다.
양녕은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리고 있었다.
하인배와 수직 군사들까지 잠이 들어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양녕은 드디어 그 한 사람밖에 넘지 못한다는 담을 넘고야 말았다.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어 놓은 양녕 가슴은 방망이질 했고, 정열은 솟아올랐다.
아직도 불은 꺼지지 않았으며 반쯤 열어 제친 방 안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이 바느질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양녕은 성큼 댓돌로 올라 서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여인은 소스라쳐 놀란다.
"누구요?"
양녕은 말이 막혔다.
"낼세, 내야."
"누구신지요?"
여자의 말씨가 고와졌다.
이웃에 묵는 양녕대군일세."
"아닌 밤 중에 나리행차가 웬 일이 오니까?"
"어, 조용하게."
양녕대군은 생전 처음으로 과부방에 출입하는 만큼 가슴이 두근거렸다.
계집도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밤중 나으리 행차가!
누추한 방에....."
"하도 달이 밝고 해서....."
양녕은 권세가 다운 힘이 어디로 갔는지, 이렇듯 말이 기어 들어가는 것이 었다.
그날 밤 양녕은 그 여인의 방에서 밤을 밝히며 운우속에 빠져들었다.
아름다운 여인, 무한히 부끄럼을 타는 여인이었다.
숫색시 모양으로 부끄럼을 타는 여인이었다.
양녕의 날이 밝기 전에 객사로 돌아왔으나 차마 발끝이 돌아서지 않는 것이었다.
여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오늘 밤에 또 오시겠지요?"
"이름은 뭐라 하는가?"
"정향(丁香)이라 하옵니다."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