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속의 인간, 인간 속의 뇌
유전윤리학 너머의 신경윤리학
| 저자 | 아디나 L. 로스키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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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전 | Roskies, Adina L. (2007년) “Neuroethics beyond genethics” EMBO reports VOL. 8, s52-s56 |
저자 / 옮긴이 소개
저자: 아디나 L. 로스키스
철학과 신경과학 두 분야에서 모두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다트머스 대학교의 부교수이다. 주로 신경과학의 철학, 마음(mind)에 관한 철학, 신경윤리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으며, 신경과학 분야부터 과학철학 분야에 이르기까지 유수의 저널에 논문을 발표해왔다. 또한, ‘법과 신경과학에 관한 맥아더 프로젝트(the MacArthur Project in Law and Neuroscience)’에서 프로젝트 펠로우로 일하고 있다.
옮긴이: 조연수
서울 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경상 대학교 의과대학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현재 용인정신병원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인문학과 과학, 의학을 통섭하는 새로운 인간관과 세계관 형성에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유전윤리학 너머의 신경윤리학
신경윤리학이 생명윤리학(bioethics)의 한 하위분야로서 인식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저기서 상당한 회의론이 존재해 왔다. 신경윤리학을 공식적으로 별개의 분야로 생각해야 할 실용주의적인 이유들 말고도, 우리가 신경윤리학을 하나의 새로운 영역으로 간주해야 할 우선적인 이유는 그것이 새로운 물음들과 마주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주요 쟁점이 되는 것은, 생명윤리학의 다른 분야들이 제기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윤리적 물음들을 과연 신경윤리학이 제기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유전윤리학(genethics)―유전학에 대한 윤리학―은 이미 신경윤리학보다 수십 년 앞서 있고 매우 유사한 윤리적 물음들을 제기하고 있는 듯이 보이므로, 필자는 본 논문에서 이 두 하위분야들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들인지에 대해 역점을 두어 다룰 것이다.
신경윤리학은 점유하는 영역들이 대체로 겹쳐 있다는 이유 때문에 유전윤리학의 이전 작업들에 의지하여 그 지침과 통찰력을 빌려 와야만 한다. 신경윤리학자의 입장에서 유전윤리학이 이뤄낸 풍요로운 작업들을 단지 뇌가 아닌 한갓 유전자를 취급한다는 것 때문에 깎아내리고 무시하는 것은 실수를 하는 것이다.
유전윤리학과 신경윤리학이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쟁점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한 개인의 유전체(genome)나 뇌에 관한 정보를 누가 획득할 수 있고 어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지 등과 같은 접근(access)과 동의(consent)의 윤리학, 그런 정보가 오용될 때의 사회적 함축들, 분배정의의 문제, 미래의 건강에 관한 확률론적 또는 통계학적 정보들을 어떻게 다루는지의 문제, 정상성(normality)과 병리(pathology)를 어떻게 개념화하고 증명할 것인지와 같은 성가신 문제 등이 그것이다.
유전윤리학과 신경윤리학 양자 모두와 관련된 윤리적 물음들은 꽤나 많지만, 나는 신경윤리학에서만 독특하게 제기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물음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리고 독자들이 ‘그러니까 유전윤리학이 신경윤리학에 포함되는 하나의 부분집합이라는 말이구나’라고 잘못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유전윤리학 또한 자기만이 가지는 고유의 쟁점들이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즉, 배선(胚線, germ line)상에서 유전자 변형을 시키는 것이 그 유전체의 주인인 당사자 개인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는 미래 세대들, 그리고 있음직하지는 않지만 전 인류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유전윤리학만의 고유영역이라 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 나는 신경윤리학에서는 문제 삼고 있지만 유전학에서의 것과는 흡사하지 않은 물음들이 다뤄지는 세 가지 영역들을 주로 이야기 할 것이다. 그것은 의식(consciousness), 의사결정, 제어(control), 그리고 자유의지, 마지막으로 도덕적 인지(moral cognition)의 이해이다. 물론 다른 영역들도 있겠지만, 여기서 나의 목표는 신경윤리학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거나 어느 특정 관점을 옹호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새로운 신경윤리학적 사유를 촉발시킬 수 있는 미래의 작업이 어떤 영역들에서 출현할 것인지에 대해 예증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의식이란 것은 아마도 과학에서 최대의 미스터리일 것이다: 3파운드짜리 조직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 어떻게 우리가 의식, 자각(awareness), 또는 주관적 경험이라 부르는 것을 발생시킬 수 있는가? 어떻게 상대적으로 단순한―물론 고도로 조직화되어 있기는 하지만―물리적 성분들의 집적물이 통증이나 빨강이라는 특정 색조, 버건디 포도주의 섬세한 순간적 내음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일까? 과학과 철학이 모두 여태껏 이 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아왔는데, 신경과학이 바야흐로 이 문제에 해답을 주려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바보짓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미스터리를 이해하는 것은 수많은 신경과학자들의 염원으로 남아있으며, 만일 어떤 과학적 기획이 의식의 문제에 빛을 던지게 된다면 아마도 그것은 뇌과학의 몫이 될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의식과 같은 것이 어떻게 뇌의 활동으로부터 기원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개념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유물론(물질주의)에 반대하는 논증으로서 제시되어 왔다. 이와는 달리 또 다른 철학자들은 그러한 추론이 그릇된 것이라 하면서, 의식이 한갓 물질에서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지를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은 뇌의 기능에 대해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이해가 빈약함을 반영하는 것일 뿐임을 제안하고 있다. 의식의 문제는 일차적으로는 철학의 문제였었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지만, 이제 그것이 또한 피할 수 없이 과학의 문제가 된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신경과학은 점차 ‘의식이란 무엇인가’와 ‘의식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들을 다루어야 할 입장이 되었다. 의식의 특징을 일일이 규정하고, 어떤 경우에 의식을 다른 존재에 귀속시킬 수 있으며, 그것이 수반하는 권리와 고려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다루는 것은 여전히 철학적인 노력의 일환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유기체를 발견했을 때, 그 물리적 기반을 조사하려 할 것이고, 점점 더 많은 과학자들은 의식의 신경상관자(neural correlate)를 찾아보려고 애를 쓸 것이다. 의식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의식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철학과 신경과학의 공동 기획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수많은 윤리적 문제들이 과학적 문제들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의식을 탈신비화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를 생각하는 방식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고 종교적 믿음에도 틀림없이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며, 또한 자연계에서 우리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다른 유기체들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방식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이와 같은 시나리오는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아주 먼 미래에나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의식이란 이슈가 중단기적으로는 윤리학과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의식이라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기 훨씬 전이라 할지라도 윤리학에서 의식과 관련해 제기되는 문제들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각한 뇌의 외상(brain trauma)은 최소한의 의식상태(minimally conscious state, MCS) 또는 지속식물상태(persistent vegetative state, PVS)와 같은 손상된 의식상태를 낳는다. 미국에서만도 11만 2000~28만 명의 MCS 환자들과 1만 4000~3만 5000명의 PVS 환자들이 존재한다. 그 손상 정도에서 미미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두 그룹은 모두 다양한 자극에 반응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와 환경에 대한 인식을 결여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들에 있어 수면/각성 주기(sleep/wake cycles)와 호흡 등과 같은 기본적인 기능은 살아 있지만 보다 고차적인 인지기능은 명백하지 않다. 식물상태에 있는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드는 경제적, 감정적 비용은 상당하고, 만약 이런 사람들이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시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면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해도 좋다는 훌륭한 논증이 존재하기도 한다. 만일 그와 같은 사람이 각성상태(aware)에 있다면 상식적인 도덕성은 생명유지장치의 제거를 반대할 것이지만, 만일 그가 각성상태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편이 확연히 갈라질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양쪽의 시각은 뿌리 깊은 신념에 기반한 것으로 강렬한 종교적 울림을 가지는 것이다.
과거의 몇몇 사례에서 보자면, 2005년에 미국 플로리다 주의 PVS 환자였던 테리 샤이보(Terri Schiavo)의 생명유지장치를 떼어낼 때 벌어졌던 고도로 공론화된 결정과 같은 사례는 과학적이거나 의학적인 사실이 아닌 사적인 견해와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기댄 것이었다. 의식에 대해 신경과학적 이해가 점차 깊어질수록, 앞으로 이런 일이 있을 때에는 보다 많은 정보를 동원하여 의사결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언어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무 반응을 할 수 없는 뇌손상 환자의 의식상태에 대해서 신경과학이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환자들의 의식상태를 규정함에 있어 최근에 이런 저런 논의들이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한결같이 논란을 야기하고 있으며 대중적 오해를 유발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2005년에 코넬 대학교의 니콜라스 쉬프(Nicholas Schiff)와 그의 동료들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의 2명의 MCS 환자들의 뇌 영상을 fMRI로 촬영한 바 있다.1) 이들 환자들은 정상 대조군에 비해서 휴지기의 뇌 대사 수준은 꽤 감소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으로 중립적인 말에 반응할 때 사적인 이야기에 대해서는 뇌 활동이 증가함을 보였다. 그러나 시간보류적인(time-reserved) 의미 없는 자극들에 대한 반응은 대조군과 비해 감소되어 있었다. 연구자들은 이들 환자들에게서 말과 의미를 처리하는 기능적 신경망들은 보존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이것이 각성(awareness)과 연관될 수 있다고 추측하였다.
이 연구는 샤이보 논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발표되어 많은 매체의 주목을 받았다. 몇몇 사람들은 샤이보가 MCS 상태가 아니라 PVS 상태이고 단 하나의 사례연구를 전체에 일반화시키는 것이 정당화되기는 어렵지만, 이 연구를 증거로 삼아 그가 사실상 의식이 있는 것이므로 살려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샤이보의 생명유지를 위해 로비활동을 벌이던 사람들은 이 연구를 자신들의 관점을 옹호해 주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 연구의 함축들은 명확하지 않았고,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거나 또는 그와 같은 연구에서의 관련 요인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연구결과들이 잘못 이해되거나 오용되기도 하였다.
저자들이 보여 준 것은, 2명의 MCS 환자들에 있어 광범위한 신경조직 영역들이 여전히 살아 있고 정상적인 자극입력기능들(input faculties)에 연결되어 있으며 정상인들과 대체적으로 유사한 정보처리패턴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발견은 이 MCS 환자들이 때때로 주위 환경을 인지하고 언어자극에 반응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실제로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경조직의 몇몇 부위들의 통합성(integrity)을 보여 주는 것은 복잡한 인지기능들을 유지할 수 있는 하나의 신경체계의 통합성을 보여 주는 것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더 나아가, 이들이 보여 준 실험결과들은, 뇌 영역들의 신경망(networks)들이 생리학적으로 손상되지 않았으며, 특히 MCS 환자들이 정상인과는 다르게 거꾸로 된 말(reversed speech)에 대한 반응이 감소해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 이상으로 해석하기에 어렵게 만드는 수많은 요인들이 존재한다. 또한 언어적 자극들에 대한 뇌 영역들의 반응이 이해나 의식이 있음을 나타낸다는 함축은 그릇된 인상을 주기 쉽다.
우리는 언어적 자극들을 의식적으로 처리하는 동안 이용되는 동일한 뇌 영역들 중 많은 부분들에서, 의식이 없을 때에는 언어적 자극들이 아주 작은 신경 정보처리 영역들(neural processing)만을 촉발시킨다는 점을 알고 있다. 많은 유망한 연구들이 주체가 지각하지 못하는 자극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고차적인 과정들은 가장 중요한 것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일차 처리과정은 역설적이게도 무의식적이지만, 일차 처리되는 자극들은 주체가 지각하는 자극들을 촉발하는 동일한 영역들 중의 많은 부분들을 활성화시키기 때문에, 대조군에서 유사한 자극을 주었던 동일한 뇌 영역에서 신경활동을 단지 기록만 하는 것이 그 주체의 인지적 상태 특유의 것을 나타낼 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연구로부터 우리가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은, 어떤 MCS 환자들은 기능성 자기공명영상 스캔(fMRI scan)상에서 활성화되고 있음을 보여 주기에 충분할 만큼의 살아 있는 신경조직들을 광범위한 신경망 속에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이들은 연결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기 때문에 거시적 차원에서는 겉보기에 정상적인 활성화 패턴을 보여 주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방법들로는 그와 같은 뇌 영역들에서 국소적 신경망의 건강성이나 정상성에 관한 어떤 특별한 정보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경과학이 이 이슈에 대해 기여한 바가 너무도 제한적이어서 시시하다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이는 너무 성급한 결론이다. 적절한 창조성과 주의력을 발휘한다면 이같이 어려운 문제에도 돌파구가 생길 수 있다. 몇몇 연구들은 전두엽(frontal lobe)과 두정엽(parietal lobe)의 활성화가 의식적 지각(conscious perception)과 상호 연관되어 있음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에 덧붙여,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의 애드리언 오언(Adrian Owen)은 최근 발표한 짤막한 논문에서 심각한 뇌손상을 입은 한 환자가 보여 준 바 있는 각성상태에 대한 보다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였다.2) 쉬프와 그 동료들의 연구에서처럼, 오언은 5개월 동안 PVS 상태에 있었던 한 환자에 대한 기능성 뇌 영상을 활용하였다.
그들은 또한 보고하기를, 언어적 명령에는 전적으로 반응이 없었던 그 환자가 언어적 자극에 대해 반응함에 있어 뇌 영역들의 한 신경망에서는 정상적인 활동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와 같은 데이터로부터 그 환자의 의식적 상태에 관한 결론을 도출하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단지 주목했던 점은 의식이 없을 때에도 언어적 자극들에 반응해서 광범위하게 신경적 처리과정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두 번째 실험에 돌입했는데, 여기서 예의 그 환자는 특정 시나리오 상에 있는 스스로를 상상하도록 언어적 지시를 받게 하였다. 다소 뜻밖의 결과는, 그 환자에게 테니스 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고 했을 때에는 운동심상(motor imagery)과 관련된 뇌영역들에서 일련의 활성화를 보였고, 그녀의 집을 관통해서 걸어보는 상상을 해보라고 했을 때에는 운행과 관련된 다른 영역들에서 활성화를 보였다는 점이다. 여기서 활성화된 영역들은 동일한 과제수행을 지시받은 대조군에서 활성화되었던 부분들과 겹쳐 있었다.
이 실험은 신경 활동의 요소들과 각성상태를 구분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훌륭한 실험이다. 오언과 동료들은 그 환자에게 인지적인 노력을 요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과제―하지만 두 과제는 모두 운동 반응을 요구하지는 않으며, 각각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신경적 표지자(neural signature)를 가진다―를 그 환자에게 요구함으로써, 육체적으로 반응을 전혀 못하는 환자라 할지라도 언어적 지시들을 이해하여 지시에 따라 서로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는 훌륭한 증거를 제시하였다. 이들의 연구는 그 환자가 실제로는 의식이 있으며 의지(volition)와 의도(intention)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시사해 주었다. 이 사례에서는 환자가 명령의 의미를 알고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정당하게 여겨진다.
이 연구는 의식과 관련한 것들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 뇌손상 환자들의 치료시 의사결정을 하는 데 있어 대단히 놀라운 함축을 가진다. 뇌 영상은 외견상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환자의 의식상태에 대한 하나의 창을 제공해 준다. 우리가 이 연구를 확장시킨다면, 어떤 환자들이 자신의 주위환경에 대해 약간의 자각을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약간의 의식과 의지를 가지지만 언어적으로 표현하거나 몸의 움직임을 나타낼 수는 없는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식물상태에 있는 환자들이 정신적으로는 깨어 있고 이해 나 인지가 가능하다고 한다면, 여러 가지 다른 유형의 심상들을 ‘예’와 ‘아니오’ 반응과 연결시키도록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의 욕구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질문에 대한 반응시의 뇌활동을 모니터링 하는 뇌 영상을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환자들의 삶의 질을 의미 있게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며,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는 그들이 스스로의 삶을 과연 종결시킬지, 종결시킨다면 그 시점이 언제여야 하는지에 관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그들에게 부여함으로써 환자들의 자율성을 존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유전윤리학이 자유와 결정론이라는 이슈를 다룰 때에는 유전자 결정론(genetic determinism)을 마주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유의지에 대한 유전학의 도전을 절름발이로 만드는 두 가지 요인들이 존재한다. 첫째로, 유전자 결정론은 심각하게 오해되고 있다는 점이고, 두 번째로는 우리의 유전자들은 우리의 행동들에서 인과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유전윤리학은 자유의지에 관한 논의에 문제제기하는 것 이상의 큰 통찰을 주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뇌는 자유의지에 관해 보다 강력한 도전을 하고 있는데, 이는 유전학에서와는 달리 뇌와 행동의 관계가 위의 두 방해요인들 중 어느 것의 대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뇌는 우리의 육체적 움직임과 의도적 행위, 느낌, 반응 등등에 대한 접근 원인이다. 우리는 우리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에 따라 손에 잡힐 듯이 확실한 의미로 행위할 때처럼 행동하며, 신경활동과 우리의 행동 사이에는 끼어드는 변수가 거의 없다. 사람의 행동에 대한 ‘유일한(the)’ 원인을 묻는 것은 철학적으로 혼란을 일으킬 수는 있겠지만, 뇌의 활동은 우리의 행동의 ‘한(a)’ 원인에 대한 고전적인 철학적 테스트를 충족시키고 있으며 그것도 가장 직접적인 원인들 중 하나를 구성하고 있다.
자유의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보통 자유롭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말하게 된다. 원숭이에 대한 연구는, 지각 과제에 있어 결정을 내리는 동안에 나타나는 신경 활동은 대안적 가정들을 표상하는 신경 집적물이 증거를 축적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신경데이터들은 의사결정의 일시적 통합모델에 의해 훌륭하게 수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동물의 의사결정은 관찰되는 신경적 표지자를 보면 예측이 가능하다. 이 연구는 의사결정이 순전히 기계론적 규칙들을 따라 결과를 결정한다는 관점과 일치하고 있으며 이는 뇌가 단순히 복잡한 기계일 뿐이라는 일반적인 과학적 관점과도 합치하는 것이다. 인간의 뇌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리라 생각할 이유가 없다. 만일 우리의 뇌가 단지 기계에 불과하다고 할 때, 우리가 과연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을지를 걱정하는 상식적인 근심을 사서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자유의 문제가 어려운 것이기는 하지만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신경과학의 역할이 아니다. 세계에 관한 물리주의(physicalism)나 유물론적 관점을 취할 때 자유에 관한 한 다음과 같은 역설이 초래되는 것은 사실이다: 세계는 모든 사건들이 자연법칙에 기인하고 따라서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정론적인 것일까, 아니면 사건들이 무작위로 일어나서 의지에 귀속될 것이 없다는 비결정론(indeterminism)적인 것일까? 이 중에 어느 것을 취해도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라 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딜레마에서 자유의지를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의지라는 모종의 초물리적인 힘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관점은 현금의 우세한 물리학설에 반하게 된다. 더욱이 신경과학은 물리주의의의 물음을 다룰 수도 없고, 결정론과 비결정론이라는 외견상 문제가 많은 대안지들 중에 하나를 고를 수도 없다.
신경과학이 자유의지를 다루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행동에 대해 예측적 가치를 가지는 신경 메커니즘을 밝힘으로써 필경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의 현존을 의심하게 만들 것이며 이로 인해 그들의 행동이나 윤리적 견해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다. 잠재적인 윤리적 쟁점들은 신경과학이 실제로 드러낼 수 있는 것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신경과학적 이해가 가지는 수사학적 힘에 의해 제기될 것이다. 예를 들면, 자유가 도덕적 책임에 필수적인 것이라 생각되곤 하기 때문에, 만약 사람들이 자유가 존재함을 믿지 못한다면 도덕적 책임이라는 것은 마치 환상에 불과한 것이 되어 허무주의가 도래할 것이라 걱정이 되기도 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경과학이 도덕성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개념들을 파헤쳐서 정의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재고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조슈아 그린(Joshua Green)과 조나단 코헨(Jonathan Cohen)은 우리의 인과응보적 관념(retributivist notion)은 상식적인 자유의지 개념을 버리기 되면 더 이상 옹호할 수 없는 것이 되며, 그 결과 순전히 공리주의적 타산에 따라서만 벌을 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3) 몇몇 학자들이 이런 류의 결론을 옹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의 개념에 있어서의 상당한 변화와 이에 상응하는 법체계의 변경이란 문제는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도덕적 견해의 많은 부분들을 재고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 것임이 분명하다.
미래의 모든 것들이 다 바뀌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신경과학은 상처에 소금만 뿌리는 것이 아니라 연고 역할도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님을 믿게 될 공산이 크지만, 그들의 도덕적 판단에 변화가 있을 성 싶지는 않다. 이에 대한 증거는, 도덕적 책임 개념이 결정론의 도전에 직면해서도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 주었던 대중적 직관의 본성에 대한 몇몇 실험들뿐 아니라, 도덕적 인지에 있어 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신경학적 기반에서도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도덕적 추론과 판단의 신경학적 기반 등을 넘어서 뇌에 대해 보다 심층적인 이해가 가능해지면, 우리의 자유에 대한 관념과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여타 개념들에 대해 개선할 수 있게 됨으로써, 결정론과 비결정론이라는 일견 양립할 수 없는 입장들이 초래했던 고전적 역설을 우회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유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개념에 일관성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면, 뇌와 그 작동방식에 대해 축적된 과학적 관점에 닻을 내린 튼튼한 개념을 개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자유에 대한 양립 가능한 관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중 하나는 에이어(A. J. Ayer)가 제시했듯이 자유와 강제(coercion)를 대비시키는 관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통제(control)에 대한 긍정적 그림을 그리고 있는 관점이다. 도덕적 책임에 요구되는 자유의 유형은, 한 유기체가 타자와의 복잡한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적절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그림 속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때 적절한 기능을 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메카니즘이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도 수반되어야 한다. 특히, 자기규제(self-regulation)나 내재적 통제(intrinsic control) 개념이 신경과학적 정보에 의해 이해된다면, 자유와 관련해 가장 열렬하게 주장되었던 관념들의 기초를 세울 수 있을 것이며, 우리가 가진 도덕적, 사회적 실천들 중의 많은 부분을 완전히 허물지 않고도 최소한만 변형시켜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도덕적 견해를 왜, 또 어떤 방식으로 가지는지에 대해 이해하면 메타 레벨의 도덕적 통찰력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까지도 도덕적 인지를 연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의 행위를 관찰하거나 도덕적 판단이 요구되는 상황들에 대해 사람들이 내놓는 대답들에 주목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서 도덕적 인지를 행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뇌 영상학이 보급되어 추상적인 인지영역에도 점차 적용이 되면서 도덕적 인지를 규명하는 새로운 방식이 출현하게 되었다.
우리는 도덕적 추론에 공헌하는 뇌의 신경망에 대해 처음으로 일별할 수 있게 되었으며 매우 계발적인 결과가 드러나고 있다. 도덕적 인지의 신경학적 기반에 대해서는 몇몇 다른 학자들이 검토해왔기 때문에 여기서는 따로 다루지는 않겠다. 대신 나는 이 같은 연구에서 알려진 바가 가지는 윤리적 함축들을 주로 다루고자 한다.
수많은 뇌 영상 연구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바는, 도덕적 판단들―조슈아 그린의 용어로 “사적인(personal)” 도덕적 딜레마에 반응할 때의 판단들―이 감정과 관련된 영역을 자연스럽게 흥분시키며, 따라서 도덕적 판단의 정서주의(sentimentalism)적 관점을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상황에서의 도덕적 추론은 보다 분석적이고 인지적이어서, 숙고(deliberation)나 이성적 사고와 전형적으로 연관되는 영역들을 사용하게 된다. 위의 두 가지 도덕적 인지 양태의 존재는 의무론자와 공리주의자 간에 벌어졌던 해묵은 철학적 논쟁들과도 부합한다.
우리가 어떻게 추론하는지에 대한 기술적 사실들(descriptive facts)이 우리가 어떻게 추론해야만 하는지와 같은 당위의 문제에 근거를 부여한다고는 할 수 없다 해도, 이런 추론방식에 대한 기술적 이해는 우리의 도덕적 견해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린이 적절하게 말하고 있듯이, “······나는 과학을 인간의 도덕성에 대해 ‘막후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인간의 도덕적 본성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바꾸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4)
더 나아가, 서로 다른 도덕적 시나리오에 따라 반응하는 뇌에 대해 규명하다 보면, 이때 뇌가 과연 어떤 것에 반응하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도덕적 진리와 마주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진리를 반영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자동적이고 믿을만한 반응을 취하고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그린은,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의 보편주의―언뜻 보면 문제가 많은 입장이다―가 어떤 객관적인 도덕적 진리의 지각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신경구조와 그 기능들을 보여 주는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도록 뇌과학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이것이 진짜로 그런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이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는 신경윤리학이 제기하는 하나의 물음이다.
폭넓게 말하자면, 신경과학은 우리가 왜 특수한 도덕적 직관을 가지는지에 대한 통찰을 줄 수 있다. 이때 도덕적 직관과 관련된 신경적 사실과 진화적 사실이 고려되고 있는가? 우리의 감성적 뇌(emotional brain)는 얼마나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것일까? 만일 우리의 도덕적 직관이 실제로 거의 감정적 반응에 의해 좌우된다면, 생명윤리학에서 우세한 견해인 원칙주의(principlism)가 과연 이와 같은 직관들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견해를 거부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생물학의 변덕에 종속되지 않은 채로 풍요로운 양질의 규범적 틀로서 그 견해를 껴안아야만 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는 방식은 신경과학에 의해 영향을 받겠지만, 이런 물음들은 궁극적으로는 철학적인 것이며 응용윤리학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유전윤리학이 제기하는 물음들과 신경과학이 제기하는 물음들에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많다고는 하지만 양자의 윤리적 쟁점들이 갈라지는 영역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본 논문에서 나는 신경과학이 의식, 의사결정, 자유의지, 도덕적 인지와 관련한 쟁점들을 다룰 수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는 거의 대부분 문제제기하는 선에서 머물렀으며, 현재와 미래의 연구들이 여기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서 맛보기만을 보여 준 감이 없지 않다. 나머지는 미래의 신경윤리학자들의 몫일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설사 신경윤리학과 유전윤리학의 문제들이 서로 뚜렷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신경윤리학의 필요성이 없다고 결론짓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다양한 생명윤리학적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당면한 철학적 질문들에 대한 일반적 이해에 기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제시되고 있는 생물학적 기관이나 메커니즘, 데이터를 형성하는 방법론이나 기술, 적합한 데이터의 선택방법과 과학적 결과를 적절하게 해석하는 방식에 대한 지식, 그리고 현재 또는 앞으로 사용가능한 치료방법에 대한 세심한 평가 등에 대한 세부적인 이해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적절한 생명윤리학적 분석이 철학 뿐 아니라 과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유전윤리학의 쟁점들을 다루기 위해 유전학과 철학 모두에 정통한 사람이 필요한 것처럼, 신경과학과 철학 양 분야에서 수련 받은 사람들이 신경윤리학적 문제들과 씨름해야 할 것이다. 신경윤리학의 시대가 바야흐로 열리고 있다.
참고문헌
- Greene J, Cohen J. (2004년) “For the law, neuroscience changes nothing and everything,”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B: Biological Sciences 359.
- Greene J. (2003년) “From neural “is” to moral “ought”: what are the moral implications of neuroscientific moral psychology?,” Nature Reviews Neuroscience 4.
- Owen AM, Coleman MR, Boly M, Davis MH, Laureys S, Pickard JD. (2006년) “Detecting awareness in the vegetative state,” Science 313.
- Schiff ND, Rodriguez-Moreno D, Kamal A, Kim KH, Giacino JT, Plum F, Hirsch J. (2005년) “fMRI reveals large-scale network activation in minimally conscious patients,” Neurology 64.
[네이버 지식백과] 유전윤리학 너머의 신경윤리학 (뇌 속의 인간 인간 속의 뇌, 2010. 3. 26., 바다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