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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메타포라 12기

[2차시 과제] 양감 없는 인생_복복

작성자복복|작성시간25.01.07|조회수74 목록 댓글 1

 

 

그간의 인생을 요약해 보면 어릴 땐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학교에 다닐 땐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 가장 큰 일탈은 남자친구와 싸우고 홧김에 휴학을 한 건데, 돌이켜보면 그 공백기동안 불안해하며 영어 점수를 따고 교환학생도 다녀왔으니 오히려 잘 풀렸다고 볼 수 있다. 말 잘 듣던 아이는 졸업 후 나쁘지 않은 회사에 들어갔다. 좋은 학교, 좋은 회사만 나오면 인생의 큰 숙제는 해결해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명함 속 회사 이름과 직책을 뺀 나는 알맹이가 없다는 걸 알아챈 후 길을 잃었다. 지난 10년 동안 9시부터 6시까지 시간을 내주고, 따박따박 적지 않은 돈을 받는 회사원으로 살며 나는 황태처럼 누렇게 말라갔다. 

 

그래서인지 퇴근 후 곧장 집으로 가는 날이 없었다. 헛헛한 하루를 무엇으로든 보상받아야 했다. 입사 초엔 술자리를 전전하다 회사에서 변기를 부여잡고 위액까지 토해보기도, (한 여름에 술냄새 풀풀 풍기며) 감기 기운이 있어 수액 좀 맞고 오겠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보기도 했다. 

 

술에 지고 나서는 남자를 찾았다. 평일과 주말 가리지 않고 소개팅을 하고 다녔다. 가볍고 무거운 만남을 반복하며 열 번째 소개팅 남자를 끝으로 ‘인위적인 만남’은 은퇴했지만, 한 연예인이 ‘몸이 좋은 남자를 만나려면 헬스장에 가세요’라고 하는 말을 보고 헬스장, 수영장, 스쿼시장에서 ‘자연스러운 만남’을 시도했다. 

 

몸 좋은 남자와의 대화에서도 아쉬움을 느낀 나는 마지막으로 독서모임에 나가보았다. 한동안 책을 끊고 살던 내게 비로소 내 삶의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었다. 모임에 괜찮은 남자는 없었지만 괜찮은 대화가 있어서 계속 다니다 우연히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을 읽게 되었다.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 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을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그동안 바쁘지만 공허했던 이유를, 책에서 바로 찾아냈다. 그 후 책의 매력에 빠져 2주에 한 번 정해진 책을 읽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한 해에 100권이 넘는 책을 먹어치웠다. 소화가 되든 되지 않든 나중 문제였다. 활자중독자처럼 온갖 책을 읽다 보니 내 이야기도 남기고 싶다는 욕망이 자랐다. 형편없는 에세이를 보며 이런 사람도 책을 쓰는데 ’왜 나는 발견되지 않느냐며 ‘ 억울해하기도 했고, 아무리 따라 써도 결코 가닿을 수 없는 황홀한 문장을 보며 ’감히 내가 뭐라고’라며 겸손해지기도 했다. 팔딱팔딱 살아 숨 쉬는 생선 같은 작가들을 보며 로망을 키웠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 ‘쓰는 행위‘보다는 ’ 작가‘라는 사회적 명함이 탐났다. 제주도 혹은 강원도에서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노트북 하나만 덜렁 들고  이야기를 쓰고 또 돈을 버는 팔자 좋은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컨설팅만 받으면 100% 출판까지 연결해 준다는 브로커의 강의도 들어보고, 오십 개 넘는 출판사에 투고도 해 보았지만 역시 알맹이가 없는 건 금방 탄로 나게 되어 있었다. 수십 개의 거절과 무응답, 그리고 다섯 개 정도의 조건부 긍정. 출판 시장이 어려우니 출간 비용을 내가 약간 부담해서 같이 내자는 그럴듯한 말이었는데, 돈이 아깝다기보다는 첫 책은 온전히 나를 위해 위험 부담을 껴앉는 곳과 하고 싶어 포기했다.

 

그 후 에세이를 끊었다. (사실은 글의 문제인데) ’ 글 자체보다는 얼마나 많은 팔로워를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한 이 업계랑은 일 못해 ‘ 라며 여우가 신포도를 거들떠보지도 않듯 마냥 혼자 토라져있었다. 그럴 시간에 한 문장이라도 써보는 게 나음을 알고 있지만,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미뤄왔었다. 

 

(가장 최근의 핑계는 아니 에르노의 책을 읽으며 ‘내가 경험하지 않는 것은 쓰지 않는다’를 보고, 아 역시 경험을 쌓는 게 먼저다 라며 과제를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안다. 임신 후 평소의 20%의 컨디션으로 사느라 온갖 활동을 중단한 내가 ‘굳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수업을 듣는 걸 보면. 결국 내가 질투하는 사람도, 잘하고 싶은 것도 쓰기와 맞닿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양감 없는 인생, 직접 파내려다가 보면 깊이가 생길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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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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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폴 클루니 | 작성시간 25.02.04 복복님^^

    날씨가 많이 추워졌는데 몸은 괜찮은지 안부가 궁금하네요~ 힘들겠지만 기운내세요~ 제가 요즘 아침에 나올때 복복님 아기들을 위해서 기도를 조금씩 하고 있어요.

    처음 나오는 일탈이 흥미롭고 재밌네요. 그 덕분에 어학 연수도 다녀오고 전화위복이 된거네요. 글을 읽으면서 조금 복복님을 알게 된것 같아 반갑고 좋았습니다. 남은 수업도 꼭 함께 하길 바래봅니다. 그리고 원하시는 깊이 있는 글 꼭 쓰시길 응원할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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