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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해무(海霧)

작성자김광욱|작성시간26.06.20|조회수52 목록 댓글 0

 

<단편소설>

 

해무(海霧)

 

 

                                                                                                       김 광 욱

 

 

1

톱머리해수욕장 입구엔 많은 노점상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그 대열은 해수욕장 마을 앞까지 길게 뻗혀 있었다성수기에는 그 대열이 여관 대문 앞까지 뻗혀졌다민박집이 아닌 정식 간판이 붙은 여관은 그 집뿐이고 나머지 여관은 식당을 겸한 민박집이었다.

이번 여름은 일찍 무더위가 찾아와서 칠월 초부터 제법 피서객들이 북적거렸다여관 주인은 장사치들이 대문 앞을 가로막는 게 싫지 않은지 장사꾼들(특히 젊은 아낙들)과 해묵은 농담을 지껄이며 지나가는 피서객들에게 쉬어가라고 추파를 던졌다.

피서객들은 비싼 여관으로 오지 않고 민박집으로 가거나 그들이 갖고온 텐트를 사용했다여기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인근에서 온 촌사람들이었고 서울 손님은 가뭄에 콩 나듯 한두 명이나 있을 정도이다.

장사치들도 작년에 왔던 그 사람 그 얼굴이다피서지라기보다는 그냥 동네 해수욕장이라고 하는 표현이 걸맞을 것 같았다물이 깊지 않고 모래가 부드러워서 해수욕장으로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곳이다.

톱머리해수욕장의 특징은 물이 깊지 않다는 것해변에서 깊이 들어가도 물이 배꼽에 찼다물이 따뜻하고 투명하며 파도가 세차지 않았다톱머리해수욕장을 한 번 찾아온 사람은 그 부드럽고 포근한 매력 때문에 다시 또 찾아오곤 했다여름이 되면 다시 생각나는 해수욕장이다.

교통과 숙박 시설은 전라도의 다른 해수욕장들처럼 형편없다고 쓰는 게 무난할 것 같다그게 또 톱머리해수욕장의 매력이기도 하다사람들이 북적대지 않으니까 조용해서 좋고 물이 오염되지 않아서 좋다.

(이곳은 꼭 사랑하는 여자의 가슴처럼 아늑하단 말이야.)

그는 전에 헤어진 여자의 풍만한 젖가슴과 끈끈한 체온을 생각하며 무더위 속에 타오르는 아득한 수평선을 주시했다얼른 보면 날카로운 인상을 주지만 눈빛은 아이처럼 순하고 부드러웠다그 눈빛 속에 그리움이 일렁이고 있었다.

바다에 오면 그리움이나 설움 같은 서글픈 단어들이 박멸될 줄 알았으나 한번 새겨진 기억은 세월이 가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그는 한가하게 그리움을 달래려고 이 바다에 바캉스를 온 것은 아니었다먹고 살기 위해서 온 것이다.

먹고 산다는 것과 사랑은 어떻게 다른가그가 생각할 때 그것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그 두 가지 명제는 어쩌면 동일한 해답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인간이 살기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은 사랑 찾는 먹이사냥과 별다름 없는 일일 거라고.

먹이를 찾는 것은 곧 내 인생을 찾는 것이며 내 사랑을 찾는 사냥이다그는 그 사냥에서 패배했다한 너댓 번 패배했을 것이다그런데 왜 포기하지 않는가인간이기 때문이다언젠가 내 입맛에 맞는 여자를 만날 거라는 희망.

 

 

 

2

헌데 입맛에 맞는 여자는 그리 흔치 않고 과거에 딱 한 명 있었는데 그 여자라면 백년해로할 용의가 있었다운명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는 거대한 선박이었다아니면 비행기일 게다그는 그 운명선에서 추락했다여자가 그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를 싫어한 게 아니고 그의 무미건조한 환경과 멋없는 직업을 싫어했다고 해야겠다그 여자가 떠난 뒤 사람들은 그에게 인간이 변했다고 했다그는 잔인해지고 난폭해졌다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냉혈인간그 자신도 그걸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그 어떤 인간도그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 그에게 남은 건 피도 눈물도 없는 금속 같은 삶뿐이었다상당히 세월이 흐른 다음에 돌아보니사람들이 그를 싫어하고 그를 나쁜 놈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전에는 그런 놈이 아니었는데 말이야.”하고.

전에는 인정도 있고 마음이 넓었는데 지금은 옹졸한 필부로 변해 있었다직업은 그를 독종으로 만들어 버렸다그는 그에게 걸려드는 놈들을 닥치는 대로 때리고 짓밟았다마음에 들지 않은 것을 부수고 박살냈다그에겐 파괴자란 별명이 붙여졌고 모두 그를 두려워서 피했다사실은 더러워서 피한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벼랑 아래 쓰러져 있었다절벽에서 떨어져 죽으려고 자살을 기도했는데 가벼운 골절상만 입고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죽음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다시 자살할 생각은 없었다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신세를 지고 부모형제들에게 걱정을 끼쳤다.

자살한다는 건 더럽게 사는 것보다 더 추한 선택이란 걸 알았다병원 침대에 멀거니 누워 있는 그에게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살아라살아서 복수해라!”

그 목소리는 천상에서 울려오는 것 같았다그때부터 그는 복수를 결심했다절망에서 벗어나 그 여자를 찾는 숨바꼭질그 여자를 찾아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고 그 여자가 사는 곳을 수소문했다그 여자는 교묘하게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 달아났다그녀는 그가 찾아올 줄 알고 미리서 손을 쓰고 미꾸라지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도 그는 그 여자를 찾고 있다톱머리해수욕장에 온 것은 그 여자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고 먹고 살기 위해서이다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잠시 그 여자의 문제를 덮어 두기로 했다미움은 곧 그리움이기도 했다.

그가 그 여자를 찾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고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그 여자를 만나서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그 답을 모른다답이 없다그냥 한번 만나보고 싶은 것이다그녀를 만나 정말 찢어 죽일 만큼 잔혹하지도 못했고 진정 그럴 마음도 없었다.

복수는 핑계이고 그리움이 본질이었다그녀를 만나 긴 방황을 청산해야겠다한 번만 만나보는 게 소원이다그녀가 잘 사는 모습을 보고 미련없이 잊으리라그녀가 행복하게 산다면 죽어도 눈을 감을 것 같다그걸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3

해변 송림 아래서 튀밥장수가 연탄불 위에 시커먼 튀밥기계를 올려놓고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가열시키고 있었다튀밥 냄새가 고소하게 풍겨 나오며 튀밥기계가 부지런히 회전했다눈으로 보기에도 튀밥기계가 한껏 가열되어 곧 터질 것 같았다.

튀밥장수는 시계를 들여다보고 나서 튀밥을 터뜨릴 준비를 했다둘러서서 구경하던 조무래기들이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았다이번 튀밥은 옥수수였다.

!”

하고 튀밥기계가 진동하며 하얀 튀밥들이 망태기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튀밥장수 청년의 기술이 서툴러서 절반은 튀겨지지 않고 망태기 밖으로 흩어졌다그래도 청년은 싱글벙글이었다.

꼬마들은 땅바닥에 흩어진 튀밥들을 주워 먹으며 히히대고청년은 망태기에 든 튀밥을 비닐자루에 쏟아붓고 다른 자루에 든 옥수수를 퍼서 기계에 넣고 또 튀길 준비를 했다청년은 꼬마들에게 작은 비닐봉지를 주며,

아까운 것인깨 다 주워 먹어라 잉.”

하고 당부했다그는 꼬마들을 위해 일부러 튀밥을 땅바닥에 흘린 것 같았다그래야 꼬마들이 구경한 보람이 있고 재미도 있다돈 몇푼이 문제가 아니고 이 장사는 낭만적으로 해야 지루하지 않는 것이다엿장수가 공짜로 우수거리를 주듯이.

꼬마들이 튀밥을 먹어 보고 딱딱하다고 투덜댔다.

튀밥이 안 튀겨졌어요!”

고소하라고 일부러 절반만 튀긴 것이여 임마!”

그는 슬쩍 변명하고 나서 이번엔 온도와 타임을 잘 맞춰서 기계를 열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그는 이 장사를 하려고 해서 한 게 아니고 다른 이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다튀밥기계를 돌리면서 하염없이 수평선의 흰구름을 주시하고혹시 피서객들 속에 그 여자가 없는지 찾아보았다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그 여자를 이곳에서 만난나는 건 기적이었다그래도 기적을 바라는 남자의 마음.

수평선의 흰구름은 점점 늘어나서 양떼구름이 되었다바닷물이 가열되어 수증기를 공중으로 뿜어 올리기 때문이다바다의 구름은 왜 그렇게 아름다운지꼭 정애의 귀여운 자태 같다어떤 부분은 유방 같고 어떤 부분은 히프 같다어떤 부분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그의 품에 안겨 인규 씨인규 씨!”하고 부르짖던 그 열띤 모습이었다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몸부림치던 정애의 나신이 떠오르자 미칠 것 같았다다른 여자와 사겨 봤지만 정애보다는 못했다정애는 인규의 넋을 앗아가 버릴 만큼 황홀한 여자였던 것이다이슬 먹은 달리아꽃같이.

(잊어야제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여.)

그는 수평선에서 시선을 거두고 열심히 튀밥기계를 돌렸다정오가 되면서 피서객의 인파가 늘어나서 백사장은 제법 시끌벅적했다튀밥을 사러 오는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공짜 좋아하는 조무래기들만 주위에 모여서서 빙글빙글 도는 튀밥기계를 구경하고 있었다.

첫손님으로 젊은 아가씨 두 명이 튀밥을 사러 왔다.

천원어치만 주세요.”

예예.”

많이 주세요.”

예예많이 드립니다다른 데서는 이삼천원어치 될 거요.”

청년은 튀밥자루에서 옥수수 튀밥을 퍼서 비닐봉지에 듬뿍 담아 주었다.

쌀튀밥도 좀 주세요.”

쌀튀밥은 쪼깐 비싼디에라첫마수인깨 인심을 팍팍 써불드라고.”

아가씨들이 돌아간 뒤 튀밥장수 청년은 모처럼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면서 튀밥기계를 돌렸다.

곧 터진다귀 막자!”

꼬마들이 소리쳤다.

아직 더 있어야 돼 임마아까도 너희들이 재촉해서 불발했단 말이여.”

청년이 꼬마들에게 눈을 흘겼다.

일부러 살짝 튀겼단 말은 거짓말이었구나.”

튀밥장사를 이제 시작했는갑다초년병이여 초년병.”

꼬마들이 놀렸다.

그 말은 사실이다너희들이 잘 본 것이여.”

청년은 자신의 기술이 서툰 것을 시인했다느긋하게 담배연기를 날리며 해변에 늘어서 있는 장사꾼들을 훑어보는 청년의 표정이 고질병에 걸린 황달 환자처럼 일그러졌다그는 가까운 곳에서 액세서리를 팔고 있는 밀짚모자 여자의 땀에 젖은 등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자의 꼬락서니를 보면 괜히 울화통이 터졌다그 여자도 그 자리에서 며칠째 공치고 있었다공친다는 말은 장사가 안 된다는 뜻이었다말 그대로 파리 날리는 장사다액세서리를 사러 오는 손님은 거의 없고가끔 아가씨들이 사러 왔다가 값만 물어 보고 허탕치기 일쑤다.

 

 

 

4

복희는 비치파라솔도 없이 불볕 아래 밀짚모자를 쓰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그래도 여성미를 가꾸려는 본능에서 볕에 그을리지 않게 큰 타월로 얼굴과 어깨를 감싸고 상어처럼 눈만 빠끔히 내놓고 있었다그 눈이 감겨져 있었다.

손님이 아예 오지 않으니까 잠이나 자자는 속셈일까바로 옆의 순대집과 그 옆의 튀김집에선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정오가 되니 배가 고프다하는 일도 없는데 배는 왜 그리 빨리 고픈지식욕이 왕성한 것도 이럴 땐 귀찮기만 하다밥 달라고 꾸루룩거리는 배가 밉다.

그녀는 꿈속에서 맛있는 순대를 실컷 먹는 꿈을 꾸다가 누군가 등을 두드리는 촉감에 눈을 떴다여인과 그의 딸인 듯한 소녀가 좌판의 보석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살 뜻은 없고 구경만 하는 것 같아서복희는 좌판을 보지 않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해수욕하는 피서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살 테면 사고 말 테면 마라는 태도였다.

목걸이는 물론 가짜 보석이었다박스로 만든 좌판에는 목걸이 몇 개머리핀 몇 개귀걸이 몇 개팔찌 몇 개반지 몇 개가 햇빛 아래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치 보석상에서 샘플로 몇 개 내놓고 행인들에게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전재산이고 상품의 전부였다하루 종일 장사해서 밥값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그렇게 장사해서는.

그래도 복희의 표정은 평화롭기만 하다평화로울 뿐만 아니라 다른 매력이 행인들의 시선을 끌었는데그녀는 거의 밑이 보일 듯한 팬티바지를 입고 배꼽을 드러낸 채 관능적인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장사와는 관계없이 그녀의 타고난 몸매를 아낌없이 불볕 속에 과시하고 있다허벅지는 볕에 타서 벌겋게 익어 있었다허벅지를 감출 타월이 없기 때문이었다사내들은 그녀의 육체를 흘끔거리며 침을 삼켰다그녀의 배꼽은 진시황의 요새처럼 명품이었다.

바지의 지퍼가 약간 열린 채 더운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지퍼의 윗부분이 고장나 있었다지퍼를 고치려면 읍내까지 가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그녀는 바쁘지 않으면서 바쁜 것이다장사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까.

이거 얼마요?”

목걸이를 한참 주무럭거리던 여자 손님이 복희에게 물었다.

만원만 주이시오원래 만오천원짜리인디 오천원은 띠어부께라우.”

기왕 띤 김에 오천원 더 띠면 쓰것소.”

이 목걸이는 변질되지 않고 진짜 보석과 똑같아라우만원이면 원가로 드리는 거예요.”

장사꾼들 말이 다 그라제오천원에 주이시오.”

그렇게는 못 팔겠구만요.”

복희는 잘라서 말했다여자는 그냥 가려고 했다딸이 엄마에게 사 달라고 졸라댔다그 목걸이는 시중에서 이삼만원 받는 상품 액세서리였다언변이 없는 복희는 과장을 할 줄 몰라서 손님을 놓치기 일쑤였다결국 팔천원에 그 목걸이를 팔았다이천원 적자였다.

송림에서 튀밥 튀는 소리가 !” 들렸다옥수수 냄새가 복희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복희는 청년을 보고 빙긋 미소를 던졌다청년은 싱글벙글 웃지 않고 오늘따라 찌부드등한 얼굴로 먼 수평선만 주시하고 있었다거기에 그가 꿈꾸는 낙원이 있기라도 한 듯이……

청년은 복희의 의미 있는 미소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그녀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왜 저렇게 진드기에게 뜯기는 인상일까또 그 병이 되살아났을까?)

복희는 송림 쪽으로 몸을 돌리고 튀밥장수 청년을 줄곧 지켜보았다손님은 없고 조무래기들뿐이었다아이들에 가려 청년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복희는 공연히 서글퍼졌다서글픔을 감추려고 바보처럼 혼자 히죽히죽 웃었다.

잠시 후에 또 돌아보니 꼬마들은 흩어지고 청년 혼자 튀밥기계를 돌리고 있었다팔리지도 않는데 자꾸 튀기기만 한다청년의 옆엔 세 개의 자루에 각각 쌀튀밥보리튀밥옥수수튀밥이 가득히 쌓여 있었다그것이 그를 더 무더워 보이게 했다.

그가 찌푸린 얼굴로 버릇처럼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복희와 시선이 마주쳤다.

하나 팔았다고 복희가 청년에게 손가락을 쳐들어 보였다그러나 복희의 표정은 울상이었다보나마나 적자에 팔았을 거라고튀밥장수 청년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거리고자기도 천원어치 팔았다고 검지손가락을 쳐들어 보였다.

그들은 서로 통하는 사이 같았다한 곳에서 여러 날 장사하다 보면 정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제가끔 노력하면서도 어떤 의미에선 생존경쟁의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전우라고 할 수 있다그래서 통하는 것이다.

 

 

 

5

이층 여관 앞으로 택시가 한 대 달려와서 멎었다검은 선글라스를 낀 멋쟁이 여자가 한 명 내리더니 여관 대문으로 들어갔다대문 앞에서 여자 장사꾼들과 해롱거리던 여관 주인의 표정이 변하며 쌀쌀맞게 여자 손님을 훑어보았다.

그 여자는 손님이 아니고 여관 주인의 조카였다그녀는 작은아버지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여관 안으로 바쁘게 걸어갔다여관 안으로 들어가서 핸드백을 내던지고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왔냐?”

뒤따라 들어온 작은아버지가 물었다조카가 대답하지 않고 모래 씹은 얼굴로 숨만 씨근거리자 작은아버지는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다방은 잘 되냐?”

……

또 빚쟁이들한테 쫓겨왔지나한테 돈 주란 소리 하지 마라돈 주라고 왔으면 어서 돌아가나도 이제 그 다방에다 그만 투자할란다.”

다른 일 때문에 왔어요.”

무슨 일?”

정애는 화장지를 떼어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그 선글라스나 좀 벗어라.”

정애는 선글라스를 벗었다훤한 미모가 드러났다약간 허영스런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자유분방한 인상이었다.

다른 일이란 뭐여?”

그 사람이 탈옥했어요.”

그건 신문에 나서 나도 알고 있다그놈을 여기에 숨겨 주라고 부탁하러 온 것은 아니것제알다시피 여기는 사람이 많은 곳이라 숨겨 주고 싶어도 숨겨 줄 수 없다죄가 더 무거워지기 전에 어서 자수하라고 해.”

무거워질래야 더 무거워질 것도 없어요살인범이니까요저도 자수하라고 했어요그러나 그 사람이 말을 듣지 않아요경찰에 밀고하면 죽여 버리겠대요.”

너를?”

그 누구라도요.”

그놈은 인간이 아니여.”

작은아버지가 중매한 사람이에요작은아버지가 맺어 준 내 웬수라구요아유못 살아!”

으음.”

작은아버지는 화가 난 듯 애꿎게 담배만 빨았다침묵이 흘렀다파도소리가 귀시럽게 그 침묵을 메워 주었다.

젊은 나이에 마누라와 사별하고 조카딸 하나를 내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웠다너는 돌아가신 형님의 유일한 혈육이었다내게도 혈육이라곤 너 하나뿐이다나는 너의 어머니가 버린 널 내 딸처럼 키웠던 거여니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자식인지 너도 알지그런 널 양경열이와 맺어 준 것은 내 불찰이었다그 집 가문만 보고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던 거여내 눈이 멀었제.”

지난 얘기를 하면 뭘 해요작은아버지 은혜는 잊지 않고 있어요울화통이 터져서 작은아버지에게 투정부린 것인깨 이해하이시오.”

정애는 무더운 듯 윗옷을 훌훌 벗어 버리고 부엌에 들어가서 모터 수돗물을 틀어 꿀꺽꿀꺽 마셨다.

인규 씨한테서 편지 안 왔어요?”

정에가 부엌에서 물었다.

삼 년 전에 오고 끊어졌어새삼스럽게 인규는 왜 찾아니가 싫어서 걷어찬 사람을.”

생각나서 한번 물어 봤어요그래요내가 미쳤제오 년 전에 헤어진 사람을 들먹거리니 내 정신이 아닌갑소.”

작은아버지는 책상서랍에서 작년 크리스마스 때 온 연하장을 꺼내어 복희 앞에 던져 주며,

내가 뜯어 봐서 미안하다니 마음이 흔들릴깨미 없애불라다가 놔뒀다.”

정애는 반가이 연하장의 봉투를 열고 읽어 보았다. <행복을 빈다>라는 짤막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인규의 필체였다그 문장 속에 내포된 다른 의미를 캐내기라도 하듯정애는 그 연하장을 가슴에 안고 눈을 지긋이 감았다그 눈에서 이술방울이 도르르 굴러내렸다.

쯧쯧못난 것한번 버린 사람을 생각하면 뭣한다고……

작은아버지는 혀를 채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정애는 또 다른 편지가 없나 하고 책상서랍을 뒤져 보았으나 서랍 안엔 아무 것도 없었다그녀는 방안에 큰댓자로 벌렁 드러누워 흥건한 눈으로 천장을 쳐다보았다파도소리가 간장을 에일 듯 가슴속으로 아프게 부서져 왔다.

내가 미쳤제내가 돌았어그 사람 가슴에 큰 대못을 박아 놓고 그 사람의 편지를 기다리다니내가 미친년이여.”

 

 

6

핸드백 안에서 핸드폰이 노래했다전화를 건 사람은 경열이었다그는 살인범에 탈옥수였다그는 돈많은 갑부의 아들이었으나 건달이었다여기저기 수배 현상 포스터가 붙어 있어서 경열은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었다그의 마지막 비상구는 정애뿐이었다.

옆에 누구 있냐?”

경열은 주위에 제삼자가 있는가부터 확인했다.

없어요나 혼자 있응깨 마음놓고 얘기하이시요.”

경열은 마음이 놓인 듯 그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털어놓았다.

그동안 산속 바위 틈에서 숨어 살았다등산객들 눈에 띌까미 부스럭 소리만 나도 가슴이 콩당콩당 했어식사는 어떻게 해결했냐고농가의 부엌에 들어가서 훔쳐 먹었제훔쳐 먹는 것도 한계가 있더라요즘 농촌의 부엌이 현대식으로 개조돼서 재래식 가옥만 찾아 도둑질을 하다 본깨 다리가 아프더라 그 말이여.”

……

정애는 입술을 깨물며 묵묵히 듣고 있었다.

다리만 아프것냐맴도 아프고 머리심장 다 아프다니 사타구니가 그리워 죽것다너를 보고 싶어 탈출했는디 말이여너를 못 본께 세상 살 맛이 나야제왜 탈옥했는지 후회된다고교도소에서 십 오 년만 살고 나오면 될 것인디이제 붙잡히면 이십 년삼십 년 될 것 같아그때는 내가 할아버지 되것제너는 할머니 되고.”

……

니 좋은 그것을 못 보고 늙을 걸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아니가 마음 변해서 다른 놈과 놀아날지도 모르고니가 바람을 피우지 않고 날 기다린다고 해도 사내놈들이 널 그대로 놔두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여그 생각을 하면 더 미칠 것 같당깨.”

자수해요살 길은 그 길뿐이에요.”

자수자수하기엔 이미 늦었다말했지 않냐자수해 봤자 내 형기가 감축될 리도 없고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어지금 널 만나고 싶다.”

사방에 현상 포스터가 붙어서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어요경찰에 붙잡힐라면 만나도 좋아요난 지금 작은아버지 댁에 와 있어요당신 명령대로 안전한 곳에 와 있으니오든지 알아서 해요.”

니가 너무 순순히 나온깨 어째 좀 껄쩍지근하다.”

경열은 죄인이어서 의심이 많았다그가 교도소에서 탈옥하고 나서도 선뜻 아내를 찾아오지 못한 것은 경찰이 아내의 주변을 배회할지 몰라서였다정애는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경열은 그런 낌새를 맡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녀의 친정인 톱머리해수욕장엔 경찰의 그림자가 보어지 않았다그래서 정애더러 친정에 가 있으라고 한 건데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경열도 정애도 불안한 마음은 똑같았다.

그들이 만난다는 건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경열은 정애의 품이 그리워 대모험을 하려고 한다정애는 아내 된 입장에서 그를 도와 줘야 했다.

혹시 경찰에 밀고할 속셈은 아니겠지?”

난 당신의 아내예요절대로 밀고하진 않겠어요.”

그럼 그럼그래서 내가 널 좋아한 게 아니냐내가 죽으면 넌 많은 재산을 상속받게 될 거다내 범행과는 상관없이 넌 부잣집 며느리라 그런단 말이여우리 아버지가 자식 있는 며느리에게 재산 한톨 안 념겨주것냐아버지 재산은 내 재산이고 내 것이 니것이제.”

왜 죽는다고 그래요?”

내가 죽는다는 가정 하에서 하는 말이다사람은 느닷없이 황천행 배를 탈 수도 있으니깨넌 호적상 양씨 가문의 장손 며느리다그 프라이드를 잊지 마라.”

그렇게 날 생각하는 사람이 왜 살인을 해살인을……

정애가 울먹거리자 경열도 울먹거렸다.

정애야난 죽을 준비가 돼 있다죽더라도 니 품에 안겨 죽고 싶어.”

싫어죽으면 안 돼.”

니가 보고 싶어 죽것다정말 보고 싶어니 향기로운 육체가 날 미치게 하는구나그 끝없는 오아시스낙원너는 항상 날 미치게 했지내가 너같이 멋진 아내를 두고 왜 사람을 죽였는지 나도 모르것다.”

그러니깨 자수해요지금도 늦지 않아요.”

난 자수하지 않는다다시는 내게 자수하라고 하지 마라그건 날 화나게 할 뿐이여.”

바보당신은 바보야.”

공중전화의 동전이 떨어졌는지 전화가 끊어졌다정애는 경열이 톱머리해수욕장에 찾아올 거라고 믿었다그를 위해서 경찰에 신고하는 건 정애의 의무였다사랑의 의무이다그를 밀고하는 게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인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다.

그것은 남편에 대한 배신 행위이다그를 배신해서 설사 그의 형기가 단축된다고 해도 차마 그런 짓을 할 수 없었다남편을 만나서 어떻게 한다는 계획도 없이 정애는 그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와 만나면 잘 설득해서 자수를 권유할 생각이었다두 사람이 살 길은 그 길뿐이었다죄를 지은 만큼 법의 심판을 받고 법대로 사는 것이 경열이 사는 길이었다.

 

 

 

7

복희는 일곱 시에 좌판을 치우고 텐트로 들어가서 식은밥을 먹었다반찬은 단무지에 풋고추와 된장 세 가지어디서 그렇게 식욕이 땡기는지 물도 마시지 않고 밥통에 절반쯤 든 밥을(실히 세 공기는 될 게다순식간에 다 먹어 치웠다.

밥을 급히 먹어서 배가 아팠다딸꾹질을 하면서 수도대로 가서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밥을 짓거나 그릇을 씻던 남녀 피서객들이 복희를 흘끔거렸다고장난 지퍼가 자꾸 내려갔다바지춤을 여미면서 사내들의 앞을 태연히 지나갔다.

터질 듯 흔들거리는 복희의 히프와 젖가슴을 보고 사내들이 군침을 삼켰다참으로 잘 빠진 육체였다그런 작품은 인근에서 좀처럼 구경하기 어려울 거라고 사내들이 수근거렸다.

야채를 씻던 남자가 복희의 쭉 뻗은 다리를 보고 홀린 듯 엉금엉금 따라 기어갔다벌름거리는 팬티바지 밑으로 속팬티가 훤히 보였다.

뭘 봐욧여자 육체 처음 봤어?”

부인이 남편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소리쳤다수도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복희는 텐트로 돌아와서 두 개의 오핀으로 고장난 지퍼를 꿰맸다바지가 단벌이었다텐트 안에는 속옷과 상의만 있고 수영 팬티도 없었다.

수영은 어떻게 하는가사람들이 잠든 새벽에 살짝 벌거벗고 씻었다짐이 많은 건 딱질색이었다텐트도 큰 짐이다그녀는 원래 게으름뱅이가 아니지만 밥을 짓기가 싫어서 아침에 저녁밥까지 다 지어 놓았다솥단지는 마을에서 빌린 것이었다.

불을 켤 전등도 없어서 깜깜 암흑 속에 누워 잠을 청했다배가 불러서 잠이 오지 않았다낭만도 멋도 없는 해변 생활이었다하루 수입은 일이만원밥도 먹기 아까운 돈이었다그런데 그녀는 이 해변을 떠나지 않고 있다그럴 이유가 있는 것이다.

돈보다 중요한 그 무엇이 복희를 이 백사장에 꽁꽁 묶어 놓았다먹고 사는 문제는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녀를 즐겁게 해 주는 남자와 무더운 여름밤을 녹일 수 있는 흡족한 섹스만 있다면 이만원이건 삼만원이건 그 수입에 만족하며 살 수 있었다그런 남자만 있다면그 남자가 누구일까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텐트 앞은 탁 트인 바다였다고기잡이 뱃불들이 수평선을 가득 수놓고 별빛처럼 깜박거렸다콩클대회가 열린 듯 노래소리가 귀따갑게 들려왔다텐트에서는 공연무대가 보이지 않았고 소리만 들렸다사람들은 그쪽으로 몰려 있었다.

(튀밥장수는 뭘 할까콩클대회에나 나가제.)

복희는 튀밥장수의 듬직한 체격을 생각하고 빙긋 웃었다어둠이 그녀의 미소를 훔쳤다찰싹찰싹 조약파도가 백사장을 씻는 소리해수욕장의 불빛 속에 인광이 파랗게 불을 밝히고 텐트 앞까지 밀려왔다.

그녀는 겁없게도 물 가녘에다 텐트를 쳤다튀밥장수의 텐트는 송림 근처에 있었다거기에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가까운 텐트에서 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초저녁인데 그들은 육체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복희는 소화가 되지 않아서 두 손으로 배를 문지르며 앉았다 누웠다를 반복했다트림이 걸찍하게 몇 번 나오고 밥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콩클대회에 가서 아마추어 가수들이 노래하는 걸 구경하고 싶었으나 혼자 누워 생각하는 게 좋아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복희는 튀밥장수의 우람한 체격에서 뿜어져나오는 엄청난 에너지를 상상하며 히죽히죽 웃곤 했다튀밥장수는 대단한 사내 같았다그런 사내라면 평생을 함께 해도 싫증이 안 날 게다.

그는 괜찮은 남자였다용모로 보나 마음씨로 보나 그 정도라면 좋은 점수를 줄 수 있는 남자다이 해변에서 낭만을 찾는다면 !”하는 그 천둥소리와 그의 옆에 눈처럼 쌓인 하얀 튀밥일 게다복희는 그의 모든 점이 마음에 들었다.

돈벌이는 시원치 않지만 그 천둥소리 속에 욕정을 배설할 수 있는 문이 있었다다른 의무적인 사항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상황이 닥쳐왔을 때 노력하면 된다복희는 구질구질한 걱정 따위를 기피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성격이 좋은지 모른다남자들은 적당히 성실하고 적당히 인생을 엔조이할 줄 아는 여자를 선호한다복희는 모든 남자들이 좋아할 수 있는 여자였다그렇다고 해서 모든 남자를 다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귀엽고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보통여자인 것이다.

그녀는 이 멋없는 해변에서(그녀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멋진 추억을 창조할까 궁리하고 있었다멋진 추억은 후회 없는 시간모든 시간을 남김없이 자기 체표에 각인시킬 수 있는 진실의 결집체이다그녀는 그런 결집체이기를 원한다.

추억의 장미’(외국 영화 제목)처럼 그녀의 체표에 아로새겨질 수 있는 추억을 심어 줄 남자는 누구일까그녀는 그 얼굴을 생각하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8

뜨거운 인간의 감촉에 눈을 떴다그녀의 체표 위에 한 사나이가 엎드려 씨근거리고 있었다복희는 놀라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스스럼없이 그 사나이를 받아들였다사나이는 인규였다그의 몸에서 튀밥냄새가 풍겼다담배냄새도 섞여 있었다싫지 않은 냄새였다.

흐흐흥!”

복희는 신음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몸속으로 전진했다사내도 전진했다파도처럼 퍼덕이며 세차게 솟구치고 부딪쳤다.

팔십 킬로그램과 오십 칠 킬로그램이 합질 때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의 철썩거림그 광적인 열기여자도 남자도 본능 앞에선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고 순수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가식 없는 행위인간 본연의 쾌락거기에 삶의 목표가 내재되어 있대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복희의 남자였다며칠 사이에 그들은 놀랍도록 가까워져서 밤이면 이 텐트에서 은밀한 사랑을 즐겼다.

사람들은 튀밥장수와 액세서리장수가 밤이면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소문이 나면 여러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니까 아주 은밀하게 만나 사랑을 즐겼다사랑의 행위가 끝나면 사내는 서둘러 텐트에서 떠나갔다그 다음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추파도 던지지 않고 자기 생업에 몰두했다.

생업에 몰두하는 건지 남 모르게 사랑의 신호를 주고받는 건지 알 수 없었다분명한 것은 그들이 밤이면 어김없이 한 개체로 묶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오늘 밤도 그는 그 일을 끝내고 나서 돌아가려고 바삐 옷을 주워입었다텐트에서 나가려고 하는 그를 복희가 잡아당겼다.

더 있다 가.”

사람들이 보면 소문난깨 얼렁 꺼질란다.”

소문나는 게 그렇게 두려워?”

두렵지는 않지만 우리 생업에 지장이 있을지 모르니깨 조심하는 것이제.”

그래도 복희는 그를 놔주지 않았다.

한 가지만 물어 보드라고자기 나 좋아해?”

새삼스럽게 그런 질문을 왜 하냐?”

어서 대답해 봐대답 안하면 안 놓아 줄 테여.”

쪼끔 좋아한다.”

쪼끔?”

복희는 어둠속에서 눈을 깜박거리며 그의 말을 되씹었다그 눈빛은 바다의 인광처럼 어둠을 사르고 그의 마음을 찔렀다불길처럼 타오르는 눈빛이었다.

정애가 그렇게 좋아나와 잠자면서도 정애를 생각하지정애정애하고 부르면서 말이여나 다른 것은 다 참아도 내 앞에서 정애 이름을 부르는 것은 못 참아.”

내가 실수 좀 한 걸 가지고 뭘 그러냐난 그 여자 잊은 지 오래다.”

그 말 진정이지?”

믿어도 좋아.”

복희는 사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훌쩍거렸다두 손으로 그의 몸을 으스러지게 붙잡고 피가 나게 힘을 주었다그녀의 손톱이 인규의 살을 뚫고 내장 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은 아픔그 아픔은 그녀의 진실이 부르짖는 절규였다그녀는 인규를 알기 전까지 숫처녀였던 것이다.

그는 복희의 처녀성을 강탈한 책임을 져야 했다사실은 그녀가 좋아해서 그를 함정으로 끌어들인 거지만복희는 그에게 처녀성을 바친 게 아깝지 않았다처녀성은 언젠가 무너지게 돼 있고 가장 주고픈 사람에게 바치는 사랑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후회 없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인규가 정애에게로 돌아간다고 해도 슬퍼하거나 울지 않기로 했다그녀는 인규를 사슬에서 풀어 주었다인규는 무거운 모습으로 그녀의 텐트에서 떠나갔다모래를 밟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의 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파도소리만 귓결에 남게 되었을 때도 그녀는 두 손을 귀에 모으고 파도 속에서 그의 발소리를 찾고 있었다그 소리는 그의 한숨과 몸의 세포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였다그녀는 그와 잠시동안 가식 없이 타올랐던 게 너무나 허무해서 소리내어 엉엉 울고 말았다.

 

 

 

9

복희가 톱머리해수욕장에서 장사를 시작한 지 일 주일째 되는 날이었다바다엔 아침부터 짙은 안개가 끼어 가까이 있는 물체도 분간할 수 없었다이런 날은 좌판을 펼쳐 봐야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는다안개가 걷힐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해가 떠도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날씨는 바람 한점 없이 푹푹 찌는 찜통 무더위해풍도 불지 않으니까 사람들의 표정은 무덥고 힘없어 보였다썰물 때여서 바다엔 해수욕객도 드문드문했다백사장도 한산했다.

복희는 장사를 덮어두고 따분하게 텐트 주위를 어슬렁거렸다송림 쪽을 보니 인규는 텐트 안에서 자고 있는지 튀밥기계가 보이지 않았다어제 팔지 않은 튀밥이 많으니까 튀밥기계를 돌리지 않아도 될 게다튀밥이 팔리지 않고 산더미처럼 쌓여 갔다.

팔리지 않은 튀밥 자루가 나날이 늘어가는데도 아침이 되어 눈을 떠 보면 그는 튀밥기계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팔리지 않는 재고는 조무래기들에게 공짜로 퍼 주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나눠주었다인심이 좋아서라기보다 재고를 처치하기 위해서였다.

하마 일어나서 튀밥기계를 열심히 돌릴 텐데 아직까지 자고 있었다짙은 안개 때문이었다안개는 튀밥장수에게도 피해를 주었다덕분에 그는 푹 쉬고 있었다복희는 혼자 아침밥을 먹으면서 인규를 깨워 함께 먹을까 하다가 남들이 우리 사이를 알면 안 된다고 어젯밤에 당부한 그의 말이 생각나서 인규의 텐트에 가지 않았다.

혼자만 밥을 먹으려니 쓸쓸하고 울적했다그에게 몸을 주고 난 뒤부터 쓸쓸함이란 걸 알았다그리움이란 걸 배웠다그리움이란 사치스런 유행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유행에 물드는 자신이 불쌍했다.

좀더 편안하고 자유로운 상황에서 남자와 오붓한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아기자기한 사랑을 하고 싶었다그것은 여자의 본능이었다사랑받고 싶은 본능그녀는 그 본능을 삶이란 의무 때문에 삭제해야 했다.

본능대로 흘러갈 수 없는 어떤 제약이 그녀를 냉정한 주관 속에 가두고 있었다본능과 이성의 갈림길에서 고민할 때가 많았다일 주일 동안 많은 고민을 했다남자와 살을 섞는 순간은 미친 듯 재미있지만 그 일이 끝나면 죽음처럼 찾아오는 고독의 공포.

인규를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자신이 인규가 좋아하는 여자가 아니라는 자괴감인규가 좋아할 수 없는 여자란 절망감이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혔다백사장을 어슬렁거리면서도 복희의 눈은 송림에서 떠나지 않았다.

안개가 이슬비처럼 얼굴로 날아왔다복희의 엷은 셔츠는 비 맞은 암닭처럼 젖어 있었다호흡기가 간지러웠다그녀는 콜록콜록 기침하며 백사장 끝까지 걸었다백사장이 끝나는 곳에 그 여관이 보였다여관엔 사람의 그림자가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녀가 돌아서서 텐트 쪽으로 걸어갈 때 여관 이층에서 한 남자가 내려왔다복희는 눈을 반짝거리며 남자의 인상을 바라보았다안개 때문에 남자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남자가 여관에서 나와 백사장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복희는 텐트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가 발을 옮길 때마다 바지의 지퍼가 터질 듯 탱탱히 늘어났다그녀는 물이 썬 모래밭으로 들어가서 조개껍질과 조약돌을 주웠다해변엔 해초와 스티로폼 같은 쓰레기들이 널려 있었다그것을 발로 툭툭 차며 남자 쪽을 주시했다.

사각사각 모래를 밟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남자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복희는 맨발이었다그녀는 조개껍질을 주우면서 가랑이 밑으로 남자의 치렁한 바지와 번쩍거리는 구두를 보았다남자가 오 미터쯤 접근했을 때복희는 허리를 펴고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주시했다.

오뚝한 코와 부리부리한 눈목까지 덮은 장발귀공자처럼 거만한 인상이었다그 장발은 가발이었다그 장발만 제외하곤 현상수배 전단에서 본 양경열과 흡사한 얼굴이었다.

 

 

 

10

남자는 복희의 앞을 지나 상점 쪽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그 순간 복희는 남자의 구두를 질끈 밟았다남자는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복희는 재빨리 셔츠 속에서 수갑을 꺼내어 경열의 왼손에 채웠다무릎으로 경열의 엉덩이를 누르고 오른손에도 채우려고 했으나 경열의 동작이 더 빨랐다.

경열은 벌떡 일어나서 복희의 가슴을 걷어찼다경열의 일격에 복희는 숨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경열은 한 손에 수갑이 채인 채 여관 쪽으로 달아났다물찬 제비같이 날렵한 동작이었다복희는 단거리 선수였다뒤질세라 경열의 뒤를 쫓아가서 다리를 붙잡고 함께 넘어졌다.

모래밭에서 치고받는 격투가 벌어졌다경열의 주먹 실력은 복희를 압도했다복희는 얻어맞으면서도 경열을 놓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달라붙었다복희의 분홍색 셔츠는 그녀가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여졌다.

어느새 인규가 달려와서 복휘와 합세했고 싸움은 두 남자의 불꽃 격투로 번했다인규도 경열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인규는 경열의 무차별 가격에 짐짝처럼 얻어맞고 흐느적거렸다그렇게 계속 얻어맞으면 죽을 것 같았다.

복희는 전신이 무너진 것 같아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인규가 경열에게 개처럼 얻어맞는 걸 구경만 하고 있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텐트를 향해 기어갔다간신히 텐트로 기어가서 권총을 꺼내 들고 두 남자가 싸우는 곳으로 기어갔다두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안개 속이라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피가 시야를 덮어서 방향 감각을 잃어 버렸다그녀는 반대 방향으로 기어갔던 것이다인규의 비명소리에 돌아보니 이십여 미터 전방에서 경열이 인규의 목을 조르고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복희는 그쪽으로 기어갔다.

구경꾼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복희는 구경꾼들의 다리 사이를 끼어 경열의 등뒤로 접근했다권총을 겨누고 조준했다경열의 등줄기가 그네처럼 흔들거렸다그녀는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조준했다구경꾼들이 시야를 방해했다.

비켜요!”

복희가 소리쳤다구경꾼들이 권총을 보고 놀라서 흩어졌다경열이 돌아보았다모래밭에 엎드려 권총을 겨누고 있는 복희를 보고 벌떡 일어서서 복희에게로 덤벼들었다.

!” 총성이 울렸다첫발은 빗나가고 두 번째 탄환이 경열의 가슴에 명중했다경열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모래 위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순경들이 달려오고잠시 후에 구급차가 달려왔다경열은 죽었는지 차에 실어도 무감각했다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말했다구급차가 떠나고 인규와 복희가 경찰차에 오를 때 정애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정애는 경찰차에 앉아 있는 인규와 복희를 보고 고개를 힘없이 떨어뜨렸다인규는 정애를 보지 않으려고 외면했고복희는 뚫어질 듯 정애를 노려보고 있었다저 여자가 인규의 마음을 앗아간 여자였구나복희는 차갑게 웃었다.

법이 복희에게 어떤 심판을 내릴지 모르지만(설사 그녀에게 불리한 죄가 적용된다 해도정애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정애는 경열의 아내이고 복희는 처녀이기 때문이다미모학벌가문어느 것 하나 정애에게 꿀릴 게 없었다복희의 웃음은 승리의 미소였다후회 없는 사랑을 획득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미소였다.

복희는 보란 듯이 인규를 꼭 끌어안았다피투성이 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정애에게 손을 흔들었다.

차문이 닫히고 경찰차가 해변에서 떠나갔다구경꾼들도 흩어졌다정애는 목석처럼 그 자리에 서서 길모퉁이로 멀어지는 경찰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바다엔 밀물이 들어오고 있었다톱머리해수욕장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갈매기가 한가롭게 날고 구름 없는 하늘에 태양이 뜨겁게 작열하고 있었다그리고 두 남녀가 버리고 간 튀밥기계와 액세서리가 햇빛 아래 쓸쓸히 뒹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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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사람들

 

 

김복희(29)……여자 경찰관,

액세서리장수로 가장하여 범인이 나타나길 기다린다

황인규(33)……복희의 파트너 형사튀밥장수로 가장

손정애(31)……인규의 엣날 애인

양경열(35)……현상 수배범정애의 남편

작은아버지(여관 주인)

장사 소님들

피서객들

장사꾼들

아이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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