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협력자
| 부사관 직업군인이었던 나는 자신을 늘 변변찮다고 여겼다. 맡겨지는 업무는 제한이 있고, 주변의 시선도 다르지 않았다. 내 의견을 펼칠 기회보다 별일 없이 지나가는 것이 다행이었다. 구조적 한계라고 여겨 한사코 앞으로 나아가기를 꺼렸다. 미사 전례 참여도 차원이 다르다고 여겨 나로서는 꿈꿀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런 어느 날 얼떨결에 미사 전례 독서자로 지명받았다. 괜한 주눅인지도 모르는 그 상태에서 안주(安住)는 누구도 해방해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처음 독서대에 선 나는 주목을 받은 부담감으로 모든 교우가 낯설게 느껴졌다.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이지 읽기 평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읽어 내려가기에 바빴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사심을 버리지 못한 것일까. 마치고 난 뒤 신부님 표정도 나를 나무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늘 반복되는 일이어서 아무도 별 관심이 없었다. 첫 경험자인 나만의 자책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미사 해설을 맡았다. 미사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에 독서보다 어렵다. 주례 사제와 신자의 중간에서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해야 한다. 교우에게 분심(分心)이 드는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나는 가끔 그러고 싶은 적도 있었다. 다음 단계인 듯 군인주일 강론자로 선정되었다. 독서와 미사 해설이 읽기 수준이라면 강론은 글쓰기다. 교우의 공감을 얻기란 언감생심이었다. 나의 능력으로 턱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번에도 순명(順命)했다. 국군의 날(10월 1일) 다음 주일이 통상 군인 주일이다. 열악한 군종교구의 재원을 마련하는 날이다. 일반 성당에서 강론을 허락받으면 군종교구 신부님이 파견을 나간다. 당시에는 앵벌이라는 우스개 표현으로 고단한 심사를 달래기도 했다. 신부님이 부족할 때 몇몇 교우가 대신하는데 뜻밖에 나도 합류하게 되었다. 군대를 ‘전교의 황금어장’이라 한다. 가정을 떠나 낯설고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는 용사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청년들의 먹는 즐거움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괜찮은 메뉴가 거론되면 그 소문을 따라 과감히 배교(?)도 한다. 본래 종교와 상관없이 특별한 간식을 찾아다닌다. 그들의 모습에서 피교육생 시절 나를 떠올린다. 매주 반복되는 그런 선교 비용은 자체적으로 해결이 어렵기에 본당 밖의 도움을 받는다. 일반 성당 교우의 마음이 2차 헌금으로 모여 군종교구 한해 선교 자금으로 쓰인다. 첫 강론은 신림동 성당이었고 그 뒤로 몇 곳을 더 다녔다. 지금은 군종 신부님이 전담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청량리 본당에서의 강론을 잊을 수 없다. 주일 전 토요 저녁 미사를 마치고 주임 신부님께 인사를 드렸다. 군종교구 지도신부를 하셨던 조순창(가시미로) 신부님은 관심이 많았다. 다음 날 아침과 낮 미사를 마친 뒤에 사제관으로 불려 갔다. 나는 그즈음 입·퇴원을 반복하는 아내 병간호와 사무실 업무도 소홀할 수 없어 심신이 지쳐있었다. 신부님은 부사관의 어려움을 알기에 위로 말씀도 해주셨다. 그렇게 고해성사하듯 저간의 심경을 나누게 되었다. 신부님은 술을 꺼내시더니 술잔을 쥐여 주셨다. 아직 저녁 미사가 남아 있는데 술을 마실 수는 없었다. 사양하는 내게 신부님은 “내가 책임질 게 일단 마셔.” 결국 저녁 미사는 보좌 신부님이 대신해 주셨다.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한 죄스러움이 남아 있다. 신부님 나이가 아버지뻘은 아니었지만, 어릴 적 힘에 부치던 때 받아보지 못한 아버지의 위로를 받은 것처럼 따뜻했다. 부사관단 임원으로 봉사도 했다. 처음에는 상급자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거나 시키니까 한다는 단순 논리에 젖어있었다. 많은 일을 맡다 보면 자칫 소홀해질 수도 있다. 나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능력에 벅차 보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무시당하는 것보다는 부담이 되더라도 나를 증명해 내고 싶은 절실함이었다. 봉사는 자기 시간과 수고가 전제된다. 내게는 과분한 봉사를 한 과정씩 적응해 내며 성취감과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다. 배운다는 마음으로 임하는 봉사도 시간이 지나면서 우월감이 끼어들기도 한다. 봉사자에게 많은 기도가 필요한 것은 자만하게 되면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이미 유혹에 빠져든 것이다. 그런 깨달음으로 내연의 힘을 조금씩 확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은 내게는 맞춤 조언이다. 제때 배우지 못한 것에 매달려 있을 때도 이미 지났다. 매 순간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지향하는 작은 갈망은 생존 본능이었다. 더욱 나은 내일을 위해 빈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려나가듯 체험은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선생님이었다. 봉사는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평범한 일이다. 그런 일들이 내게는 도전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버릇 들이고 길들이다 보니 몸에도 조금은 배어들지 않았나 싶다. 삶의 고단함으로 묻혀있던 기억들이 글쓰기로 되살아난다. 내 뜻과는 달리 사목위원이 되고 미사 전례에 참여하는 것은 신앙적 부족함을 채우는 기회이기도 했다. 돌아보면 고비마다 나의 의지를 일깨우며 용기를 건넨 어떤 협력자가 있었다.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깨달음도…. 유소년기부터 병영과 신앙 안에서 또한 정년 퇴역 후 산행과 글쓰기 모임에서도, 어찌 보면 주변에 모든 분이 내 삶의 협력자였다. 고향 무안 해운리, 육군제1부사관학교, 육군사관학교, 국군의무사령부, 군 종교구화랑대성당, 서울대교구꾸르실료사무국, 중랑금요산악회, 중랑평생학습관(망우), 참좋은문학회. 함께 해 주신 분들이다. 그분 모두의 삶 안의 평안을 비는 기도로 감사함을 잊지 않아야 한다. 먼저 가신 분들의 영혼 안식을 위해서도 기도드린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2025. 11.) ▐김영래 2024년 <한국수필>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중랑문입협회, 참좋은문학회 회원. 저서『어떤 협력자』. 2024년 한국수필 신인작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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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영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0 삶의 고단함으로 묻혀있던 기억들이
글쓰기로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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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고비마다
나의 의지를 일깨우며 용기를 건넨 어떤 협력자가 있었다.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깨달음도….
유소년기부터 병영과 신앙 안에서
또한 정년 퇴역 후 산행과 글쓰기 모임에서도,
어찌 보면 주변에 모든 분이
내 삶의 협력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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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무안 해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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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 모두의 삶 안의
평안을 비는 기도로 감사함을 잊지 않아야 한다.
먼저 가신 분들의 영혼 안식을 위해서도 기도드린다.
(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