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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맥주 시음기

세계의 맥주 스타일- 런던 포터와 아일랜드 스타우트- 1(9월호)

작성자형아|작성시간07.01.12|조회수308 목록 댓글 0

Drinks Korea라고 97년부터 발간된 주류 전문 잡지에 매달 한종류씩 소개되는 맥주이야기입니다. 혼자 읽기 아까워 올려봅니다. 혹 불필요한 내용이다 생각하시면 댓글 달아주십시오...

 

   오늘날 포터 혹은 스타우트는 풍미가 강한 고급 맥주로 통하지만 1세기 전만 해도 노동자들이 즐겨 마시는 값싼 술이었다. 포터는 태생부터 노동자 계층의 맥주였다. 자본의 힘에 의한 도시 노동자 계층의 탄생과 성장은 그대로 포터의 탄생과 발전을 의미했다.
   노동자 계층의 빠른 성장과 함께 포터는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최초의 맥주가 되었다. 그리고 포터 생산을 계기로 비로소 영국의 양조업은 산업혁명을 시작했다. 폭발적인 수요는 당시 유럽의 양조업자들을 포터 생산에 몰두하도록 했는데, 그 가운데엔 아일랜드의 기네스(Guinness)도 있었다.

 

섞어 마시던 술, 포터

   포터의 기원은 18세기로 넘어가던 시기 런던에 있다. 사람들은 당시 쓰리 쓰레즈(Three threads)라는 맥주를 즐겨 마셨다. 그것은 페일 에일(Pale), 브라운 에일(Brown), 스테일 에일(Stale)을 혼합한 것으로 인기가 좋았다. 페일 에일과 스테일 에일은 모두 컨트리 브루어(Country Brewers)가 독점적으로 런던 상업부(London Trade)에 납품하고 있었다. 그것은 상당한 비용과 이익이 오고 가는 거래였다.

   런던 양조업자 대신 그들이 런던내의 페일 에일과 스테일 에일을 독점하게 된 데에는 법적인 규제와 경제적인 이유가 작용했다. 런던은 당시 시내에서의 석탄 사용을 규제하고 있었다. 페일 몰트는 석탄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런던시의 관할권 밖에 있었던 컨트리 브루어들은 페일 몰트를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런던 양조업자들한테서 신선한 브라운 에일을 사다가 대형 오크통에 1년 또는 그 이상을 저장해서 스테일 에일을 얻었다. 장기간 숙성된 에일은 야생 이스트와 미생물의 영향으로 신맛의 젖산 특성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맛을 당시 사람들은 잘 숙성된 맥주의 좋은 성질로 평가했다. 하지만 런던의 양조업자들은 대부분 조그만 펍이나 선술집에 기반을 하고 있어서 대형 오크통을 마련할 공간이 없었다.

   페일 에일과 스테일 에일의 공급으로 컨트리 부루어들은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런던의 양조업자들이 이러한 불공정한(?) 상태를 깨뜨리고 싶어했음은 물론이다. 첫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쓰리 쓰레즈의 대체품으로 내놓은, 아무것도 섞지 않은 브라운 에일은 거친 맛 때문에 애주가들에게 외면당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것에 컨트리 브루어가 만든 페일 에일을 구해다가 섞어 마셨다.

   런던 양조업자들을 위한 전환점은 1722년에 찾아왔다. 랄프 하우드(Ralph Harwood)라는 상업적인 양조업자가 엔타이어 버트(Entire Butt)라는 술을 만들었는데, 맛이 진짜(쓰리 쓰레즈)와 흡사했다. 그는 맥주를 캐스크 1통(butt) 단위로 이스트 런던의 퍼브에 공급했다. 당시 퍼브의 주인들은 쓰리 쓰레즈를 만드느라 고역을 치뤄야 했다. 지하저장고에서 세가지 맥주를 섞는 것만 해도 중노동이었다. 하지만 엔타이어는 이러한 수고를 덜어주었다. 캐스크 단위로 포장돼서 편리했다. 섞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엔타이어는 값이 훨씬 쌌다. 맛과 가격과 편리함에서 엔타이어는 쓰리 쓰레즈의 훌륭한 대체품이었다. 런던 선술집 주인들의 반응은 물론 말할 필요도 없었다.

   특히 싼 값은 새로운 맥주의 대중적인 확산에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랄프 하우드가 처음을 엔타이어를 만든지 4년 후 런던을 방문한 한 프랑스인은 고국으로 부치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726년 11월 26일 : ...이 나라에선 맥주 밖에 마시지 않는다. 그리고 맥주는 여러 가지 품질로 나뉘어 진다. ... (중략)... 또 다른 종류는 포터로 불린다. ...(중략)... 이 맥주의 대부분을 노동자 계층이 마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하고 독한 맥주로 지나치게 마시면 효과가 와인과 맞먹는다. 포터는 1포트에 3펜스이다. 런던에 있는 많은 에일 하우스들이 이 맥주 외에는 아무것도 팔지 않는다. ...(중략)... 페일 에일은 1병에 1실링에서 1실링 6펜스이다." 페일 에일은 빈곤한 노동자 계층이 즐기기에는 너무 버거운 사치였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최초의 맥주

   포터는 런던의 새로운 맥주에 주어진 별명이었다. (랄프의 엔타이어 버트는 물론 그 이후 등장한, 유사한 섞은 맥주를 통칭한다.) 포터의 주 고객은 당시 급속히 성장하는 산업과 함께 증가하고 있던 노동자 계층이었다. 빠르게 증가하는 노동자 계층의 맥주에 대한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1730년대에 이르면 이미 런던의 작은 선술집이나 랄프 하우드와 같은 작은 상업적 양조업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산업의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산업이 양조업에도 필요했던 것이다.

   자본을 갖고 있는 기업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포터를 위한 양조장을 새로 지었다. 새로운 양조장은 산업혁명의 신기술과 과학적 진보로 무장했다. 최초의 기업가는 사무엘 휘트브레드(Samuel Whitbread)였다. 그는 1742년 올드 스트리트에 소규모의 양조장을 세운 이후 3년 이내에 바비칸(Barbican)에 대규모의 새로운 부지를 마련했다.

   1812년경 생산량을 보면 당시 포터가 만들어 낸 산업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휘트브레드 2세는 년간 122,000 배럴을 생산하고 있었다. 바클레이 퍼킨스는 270,000 배럴, 뮤 레이드는 180,000 배럴, 트루만 핸버리는 150,000 배럴을 생산한 것과 비교하면 혁명적이라 할만 했다.

   더 이상 포토는 작은 선술집에서 만든 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상품이었고 자본에 의해 도시에 수용된 노동자 계층이라는 산업 시대의 새로운 계급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검은 색 포터의 등장

   18세기의 포터는 오늘날의 포터와는 달리 색의 짙은 정도가 다양했는데, 여러 맥주를 섞어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몰트의 단맛이 강해 호프가 많이 들어갔다. 알코올 강도는 측정된 것이 없지만 대략 부피로 6%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보다 더 강한 버전은 '스타우트 포터'로 알려졌다. 스타우트라는 표현은 18세기 당시 양조장에서 만든 가장 독한 술을 일컫는 말로 색깔과는 무관했다. 오늘날 쓰는 스타우트라는 이름은 스타우트 포터에서 유래했다.

   검은 색의 포터가 등장한 것은 19세기 였다. 19세기로 들어서면서 양조업자들은 브라운 몰트보다 페일 몰트를 이전보다 많이 사용했다. 발효성 당이 나무로 건조한 브라운 몰트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일 몰트는 색이 옅기 때문에 짙은 색을 연출하기 위해 다른 첨가물이 필요했다.

   이러저러한 첨가물들을 쓰던 중 해결방법이 나왔다. 1817년 다니엘 휠러(Daniel Wheeler)가 만든 몰트 건조기였다. 그의 새로운 건조기는 커피 볶는 기계의 원리를 이용했다. 덕분에 약 210도의 고열로 몰트를 건조할 수 있었다.

   새로운 방법으로 만든 몰트는 짙은 갈색 또는 검은색을 띠었는데, 발효성 당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소량만 첨가해도 맥주를 신비하게 변화시켰다. 항상 일정하게 검은 색깔을 내는 것은 물론 전혀 새로운 맛이 추가되었다. 약간의 훈제한 듯한 맛과 함께 쓴 초컬릿과 커피를 떠올리게 하는 맛이었다. 바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터나 스타우트를 마실 때 기대하는 맛이었다.

   특허 몰트로 불린 새로운 몰트는 포터 양조 산업 역시 완전히 바꿔놓았다. 휘트브레드는 휠러의 건조기가 발명되자마자 그 잠재력을 간파했다. 1817년 그 해 전문 몰트 제조사인 프렌치 & 주프사는 바비칸 양조장 바로 옆에 특허 몰트 공장을 건설했다. 바클레이 퍼킨스는 1820년부터 색을 내는 첨가물 대신 다크 몰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 포터는 오늘날의 모습을 완성한다. 여러 가지 맥주를 섞어 만들어서 색과 맛이 다양했던 포터는 이제 하나의 매쉬(Mash)에서 만든 검은 맥주가 되었다. 또한 섞을 때와는 달리 잘 숙성된 맛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볶은 곡식과 많은 양의 호프를 사용해서 쓴맛과 함께 호프와 다크 몰트의 맛을 띠었다.

   포터 양조는 런던 안에 머물러 있기엔 너무나 큰 사업이었다. 런던에서 만들어진 포터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로 수출되었고 그 지역에서의 포터 생산을 자극했다. 런던 양조업자들의 진출은 인근 지역에 국한되지 않았다.

   드레일(Thrale) 양조장을 선두로 많은 양조업자들은 발트해 연안국들과 러시아에 수출용으로 만든 강한 포터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런던에서 폴란드의 단찌히(Danzig)까지 그리고 거기서 발트해를 경유해서 러시아에 이르는 긴 여정을 거쳐야만 했다. 수출용 포터는 인기가 좋아 짜르(Tsars)의 궁정에서도 즐기는 맥주가 되었다. 그리고 크림전쟁(1853~6) 당시에는 러시아 군대에도 공급되어서 전쟁으로 지친 병사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 가운데 바클레이 퍼킨스의 스타우트는 러시아 왕가의 공식적인 품질 승인을 받았는데, 이때 상표를 '러시안 임페리얼'로 지었다. 그의 포터는 매우 인기가 좋아서 에스토니아에 발트해 지역을 위한 별도 양조장을 세워야 할 정도였다. 바클레이의 맥주는 오늘날 커리지(Courage) 임페리얼 스타우트로 생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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