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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맥주 시음기

세계의 맥주 스타일- 런던 포터와 아일랜드 스타우트- 2(9월호)

작성자형아|작성시간07.01.12|조회수268 목록 댓글 0

다음이 저를 또 울리는군요.. 그림 올리고 왔더니 다 날아갔습니다... 여기서부터 다시 T.T

 

아일랜드 포터 산업의 성장

   런던에서 생산된 포터는 유럽 각국으로 수출되었고 포터의 폭발적인 수요는 유럽의 양조업자들을 포터 생산에 몰두하도록 했다. 특히 아일랜드의 양조업자들은 런던에서 홍수처럼 밀려드는 포터에 심각한 타격을 입으면서 자구책을 모색하는데, 결론은 '이에는 이, 포터에는 포터'로 맞서는 것이었다. 그 결과 아일랜드의 포터 산업은 아주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아서 기네스는 1756년 킬데어 카운티에 있는 작은 양조장을 사들였다. 3년 후 그는 더블린으로 가서 버려진 양조장을 임대해서 썼다. 1787년 당시 기네스는 에일과 포터를 모두 생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1799년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에일 생산을 중단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포터 생산에 집중하기 위한 조치였다.

   코크(Cork)에는 벨파스트 출신의 윌리엄 비미쉬와 윌리엄 크로포드가 있었다. 그들은 쇠고기와 버터를 팔기 위해 코크에 들렀다가 우연히 매년 60,000 배럴에 이르는 영국 포터가 코크항을 통해 수입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양조를 하기로 결심했고 1792년 부지를 사들였다. 비미쉬- 크로포드와 기네스의 사업은 모두 대성공이었다. 19세기 경에는 두 회사는 대영제국과 아일랜드 내에서 가장 큰 회사였다. : 비미쉬는 연간 100,000 배럴을 생산했고 기네스는 66,000 배럴을 생산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과 아일랜드 대기근(1845~ 9)에 이은 경기 후퇴는 유럽 경제를 파탄에 몰아 넣었다. 비미쉬와 기네스 역시 거래의 반을 잃어 버렸다. 이때 이후 비미쉬는 과거의 지배적인 위치를 되찾지 못했다. 하지만 기네스는 사업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수로(Canal)와 새로 놓인 철도를 이용한 내수 시장 개척과 영국 본토와 식민지로의 공격적인 수출정책을 능란하게 이용함으로써 가능했다.

   아일랜드가 산업화의 길고 고통스런 과정을 시작했을 때 기네스는 도시의 새로운 노동자 계층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국에 걸쳐 대리점과 병입 가게(Local bottling stores)를 세움으로써 도시 이외의 시장(Rural market)을 개척했다. 갓 양조된 포터는 캐스크에 담겨 바지선에 실렸고 수로를 따라 운송되면서 숙성되었다. 회사의 대리점에 도착하면 드래프트 또는 병의 형태로 바로 마실 수 있었다.

   기네스의 두 개의 주요 맥주는 캐스크에 표시된 엑스(X)로 구분되었다. 엑스 1개(X)는 보통 플레인(Plain)으로 부르는 포터였다. 아일랜드에서 주로 마시고 리버풀의 아일랜드인 공동체엥서 마셨다. 엑스 2개(XX)는 스타우트 포터 또는 더블 스타우트를 의미했다. 수출을 위한 것이었다.

 

아일랜드 스타우트의 탄생

   아서 기네스의 아들, 아서 2세는 아버지의 사업을 확장했고 맥주 레시피를 약간 바꾸었다. 아일랜드인들은 당시 런던 정부에 세금을 내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 그건 아서 2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몰트로 만들지 않은 곡식과 볶은 보리를 섞기 시작했다. 19세기 초에는 세금이 알코올 강도가 아니라 몰트에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워서 검게 만든 보리의 강한 쓴맛은 맥주에 독특한 볶은 맛과 쓴 과일 맛을 더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스타우트로 불리는, 아일랜드의 드라이 스타우트가 탄생한 것이다. 아서 2세는 또 한 영국 양조업자들의 텃밭이었던 인도 시장을 겨냥해 강하고 호프를 잔뜩 집어넣은 맥주를 개발했는데, 바로 포린 엑스트라 포터 스타우트였다. 후에는 포린 엑스트라 스타우트로 불렸다.

   기네스사는 빠르게 성장했다. 1885년에서 1906년까지, 생산량은 116,425 배럴에서 778,597 배럴로 증가했다. 양조장은 1870년대에 다시 지어야만 했다.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기 말 경에는 기네스는 유럽에서 가장 큰 양조장이 되었다.

 

런던 포터의 몰락

   런던 포터의 몰락은 전쟁과 함께 찾아온다. 1차 대전 동안 영국 정부는 맥주 양조를 엄격히 규제했다. 알코올 강도는 낮게 해야 했고 양조업자들은 많이 건조한 다크 몰트를 사용할 수 없었다. 코크스와 가스가 군수산업에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인디아 페일 에일의 등장으로 이미 쇠퇴하고 있었던 포터는 자유 낙하 상태의 공처럼 곤두박질 쳤다.

   하지만 자치 운동 (Home Rule)이 본격화하기 직전의 아일랜드에 영국인들은 그러한 가혹한 규제를 부과할 수 없었다. 알코올 강도는 낮아졌지만 영국에서만큼은 아니었다. 그리고 보리와 몰트는 계속해서 페일 몰트와 다크 몰트로 사용되었다. 런던 포터의 몰락과 함께 포터라는 이름은 잊혀지기 시작했다. 대신 사람들은 아일랜드의 스타우트를 하나의 뚜렷한 스타일로 바라보게 되었고 독립국가 아일랜드의 강력한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기네스 포린 엑스트라 스타우트

   현재 기네스 스타우트는 전세계에 19종 이상이 있다. 본토의 맥주가 가장 진하고 독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기대와는 달리 기네스의 맥주들은 생산지가 본토에서 멀수록 맛과 알코올이 강하다. 그 중에서 포린 엑스트라 스타우트는 가장 매력적인 스타우트이다. 또한 초기의 포터 양조 방식과 분명한 연관이 있다.

   포린 엑스트라 스타우트는 19세기 아서 기네스 2세에 의해 개발된 맥주로 영국 식민지에 판매하기 위한 맥주였다. 특히 가장 강력한 상대였던 영국 버튼(Burton) 양조업자들의 인디아 페일 에일을 겨냥한 제품이었다. 처음에는 '포린 엑스트라 포터 스타우트'로 소개되었지만 포터라는 용어는 결국 라벨에서 사라졌다.

   넓고 현대적인 스텐리스 스틸로 지은 더블린 양조장의 한 귀퉁이에는 두 개의 낡은 참나무 통이 있다. 아서 기네스가 처음으로 양조를 시작한 18세기 중엽부터 사용했던 것들이다. 지금도 포린 엑스트라 스타우트의 제조에 이 통들을 사용하고 있다. 스타우트는 통에서 1개월에서 3개월까지 저장된다. 그 안에서 야생 브레타노마이세스(Wild Brettanomyces) 효모의 활동으로 젖산의 신맛을 띠게 되는데 시중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다.

   이것은 역사적인 의미에서 초기 포터에 쓰이던 스테일 비어와 동일하다. 신맛의 숙성된 스타우트는 갓 만든 스타우트와 혼합되고 병에 담겨진 후 공장에서 출하되기 전에 한 달 더 저장된다.

   포린 엑스트라 스타우트는 알코올 함량이 부피로 7.5%이다. 그리고 페일 몰트, 얇은 조각으로 만든 보리, 볶은 보리(Unmalted roasted barley)를 10% 사용한다. 호프는 갈레나(Gallena), 너겟(Nugett), 타겟(Target)을 혼합해서 쓴다. 쓴맛은 60 IBU이다.

   스타우트의 아로마는 볶은 듯한 다크 몰트의 특징과 함께 와인과 나무 냄새가 난다. 맛은 상당한 호프와 함께 쓴 초컬릿이 풍부하게 느껴진다. 끝맛은 신 과일 맛과 함께 달지 않으며서 쓰다. 그리고 코에서는 양조업자들이 호스 블랑킷(Horse Blanket)이라고 부르는 뚜렷한 아로마를 맡을 수 있다. 이는 야생 이스트의 활동으로 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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