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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식-모자를 벗고 보는 그림 Painting of Appreciation with Respect

작성자미관彌款|작성시간19.05.29|조회수67 목록 댓글 0

박성식이 보여주는 고밀도 고집적 색면의 화사한 잔치에서 우리는 20세기 미술의 방황과 그 방황의 끝에 성취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케 된다.

 

20세기의 백년 동안 세계의 미술은 미술에서의 형식이 내면의 정신을 어떻게 극대화할 수 있는가 하는 논제에 매달려 왔다. 사실 그것은 19세기가 고민했던 과제였다. 박성식의 잘 정비된 형식과 소통의 언어와 표상의 방식을 보면 과연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백년이 필요했던가 하고 차탄하게 된다.

 

20세기의 미술은 인간 확인의 길고도 긴 우회의 길이었다. 인간이라는 말 한마디거나 또는 인간의 손때가 묻은 하나의 노리개에서도 우리는 인간을 느낄 수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도 새 운동화에 일부러 흙먼지를 묻히고서 편안했던 어린 시절처럼 우리는 억지로 인간을 만들어 인간의 굴레 위에 덧씌웠던 것이다.

 

박성식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무게, 손때와 땀의 흔적은 그러므로 다시 인간으로 환원하는 인간에 의한 인간선언에서 시작한다 할 수 있다. 20세기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던가.

 

미술에 있어서의 20세기는 기계복제의 완벽성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한다. 숙련과 기능이라는 이름으로 대처할 것인가. 실존적 인간의 숙명적 한계를 방패로 내세울 것인가. 금세기 초의 예술가들은 이렇게 기계복제와 인간의 기량에 대한 원천적인 번뇌에서 그들의 방황을 시작했었다.

 

20세기를 넷으로 나누어 그 첫 번째 즉 일사분기를 지나는 동안 인간은 기계와 달리 두뇌와 정신과 감정을 가졌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구조화된 체계를 만들 수 있는 두뇌와 정신을 표출할 수 있는 물질적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유기적 집합체로서의 생체가 만들어내는 외부적인 것과의 감정적 교류 등이 바로 기계를 몰아낸 캔버스 위에서 미술가들이 벌인 사투였다.

 

예술가들로서 피를 말리고, 뼈를 깎는 인고의 세월로 비칠 수도 있는 이 시기에 20세기 미술의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인상, 표현, 입체, 구조, 초현실, 다다에 이르는 4반세기의 미술은 향후 미술의 나침반이자 북극성 그 자체였다. 결국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미술의 영원한 고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금세기의 마지막 무렵이었다. 결국 루오가 말했던 것처럼그 앞에서 모자를 벗을 수 있는 그림이 그들의 목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사분기에서 미술은 인간에서 벗어나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인간은 인간의 적으로, 기계문명은 대량학살의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인간을 지우고 기계문명을 조롱하는 것이 마치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처럼 숭배되었다. 반 미술과 반미학과 자조적 행위가 화면대신 미술현상을 지배했다.

 

삼사분기의 미술은 그림에서 인간의 냄새를 지우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카우보이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양차 대전에서 축적된 부를 업고 미국은 세계경찰국가를 자처하고 나섰고 야생마를 타고 로프를 휘둘러 소를 잡던 손이 붓을 잡았다. 그것이 제 2의 암흑시대였다. 소비미덕의 일회용문화가 세계를 휩쓸었다.

 

전통 없는 나라의 손재주 없는 민족-창의력 없는 예술가들과 미학 없는 예술에 세계는 대책없이 휩쓸렸다. 삼사분기동안 미국주도의 세계미술은 팝아트, 오프 아트, 키네틱, 미니멀 등 20세기 전반의 예술을 노루 친 막대 삼년 울거 먹기로 재탕 삼탕하다가 개념미술 이후 손을 들었다. 개념은 증류수와 같다. 이상적인 물일 수 있지만 사람이 먹으면 설사를 한다.

 

박성식은 제 2의 암흑시대에 작가적 감수성을 은밀히 성숙시켰다. 그것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윌리암 윌슨이 꼬집었듯 보이 스카웃 도끼로 찍어낸 듯한카우보이 문화가 판치는 시대였다.

 

마치 미술을 떠나야만 미술이 가능하다는 궤변아래 자행되는 문화의 파괴(Vandalism)가 미술의 본령인 것처럼 생각되는 시대에서 그는 고지식하리만큼 화면의 형식을 구축했다. 박성식에게는 시류를 따르면서도 자신의 형식이 구축될 수 있다는 류의 절충주의는 통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 암흑시대 이후 세계의 미술은 혼미에 빠져들었다. 미술관은 개점휴업상태로 미술이라 부르는 다원적 양상들을 시험하다가 다시 시장논리와 인간척(人間尺) 으로 환원한다. 시장논리란 미술관에 걸 수 있고 입장료를 받을 수 있으며 판매차익을 남길 수 있는 유형의 작품을 취급한다는 말이다.

 

인간척이란 만물은 인간의 척도라는 말에서 비롯한다. 동굴벽화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구미술, 특히 금세기에 이르러 결정적으로 세계미술을 이끌어나갔던 서구미술의 논리는 결국 인간의-인간에 의한-인간에 의한 작품으로 개념을 굳힌다.

 

박성식은 세계미술이 그 진로와 궤도를 수정하여 다시 인간에로 환원하기 훨씬 이전부터 화면의 인간적 형식을 고집해왔다. 그 안에 인간의 시간과 역사가 담겨있다. 그것은 화면에서 시간과 역사의 연속성으로 나타난다.

 

시간의 징표를 우리는 만질 수 있다. 이를테면 화석이 그러하다. 또 시간은 연속적이다. 상징화하거나 물질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빛과 색의 연속성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화면은 그래서 시간과 역사를 담을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박성식이 화면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시간의 연속성이되 그것을 시각화하는 그림문자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조형의 요소이다. 조형언어이다. 그는 20세기가 종국에는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최후의 보루로 인간을 재발견했듯이 인간에서 시작한다. 그 인간의 시간과 역사에서 그의 언어를 재창조한다.

 

그가 만들어나가는 언어는 상형문자를 닮고 있다. 상형문자는 글이지만 그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상형문자에서 글을 보되 상상을 하고 그림으로 그려진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의미와 실체를 떠올린다. 그것이 상형문자이다. 그리고 그것을 담는 그릇이 비석이다.

 

비석은 시간을 담은 역사이다. 이름 그대로 기념비이다. 묻혀진 시간을 파낼 수 있는 정지된 역사인 것이다. 이를테면 광개토대왕의 비석은 우리의 큰 역사와 꿈과 이상을 담고 있다.

 

비석에는 고구려 인들이 영원히 보존하고자 했던 것들이 타임 캡슐에서 처럼 내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아 남의 땅에 속할지언정 우리의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이 시간의 연속성일 것이다.

 

박성식의 그림에서 우리는 비석의 이미지를 본다. 그러나 실제로 느껴지는 것은 기념비성(Monumentality)이다. 그것이 상형문자의 의미이다.

 

또한 연속되는 시간은 박성식에게 때로 하나의 문이 두개의 형태로 나타나는 류의 그림에서 그 모습을 들어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각의 문과 다른 우주의 둥글게 휜 문이 하나의 공간에 잇대어 그려져 있다. 삶과 죽음, 개념의 시간과 염원의 시간이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만질 수 있는 질료와 시간 및 세계와 반하여 인간이 함부로 만질 수 없는 물질과 조작할 수 없는 시간과 들어갈 없는 세계를 잇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어진 세계를 파 들어가는 것은 당연히 이들 상반되는 세계를 하나로 관통하는 작업이 된다.

 

박성식은 화면을 시간의 역사처럼 구축한다. 화면에서는 종이 흙이나 돌가루 톱밥 등의 충진재와 색료 및 안료를 섞은 질료를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작업에 해당된다. 대개 여덟 층을 쌓은 후 그것을 그는 파낸다. 마치 퇴적층을 한 켜 한 켜 들어내고 그 안에 있는 화석이나 유물을 발굴하듯이 박성식은 화면에 구축된 질료의 층을 잘라나간다. 묻혀진 시간의 밀도 높은 단층이 집적된 시간을 드러낸다.

 

그것은 박성식이 세계미술의 암흑기를 숨죽이며 형성시킨 자신만의 어법이기도 하다. 그가 들어내어 보이고자 하는 것이 암울했던 과거의 감추어진 역사라는 관점은 이렇게 겹겹이 쌓아올린 시간과 역사의 층을 파고 원형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데서 손쉽게 느낄 수 있다. 사실 느낌이란 설명 이전의 정서이자 감성의 문제이다.

 

그래서 그것은 다른 여느 작가들의 두터운 질감의 화면에서 비켜선다. 그리고 비슷한 중층구조를 표방하는 다른 작가들의 투박한 언어에서 분리되어 그는 첨예한 미학의 상형문자를 성숙시킨다. 그것은 세계미술이 방황하던 시기에 예정되어 있던 방향이기도 했다. 모든 작가들에게는 그 암흑기를 빠져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로 방황이었다.

 

박성식은 드물게 자신의 일관된 어법을 고집한 작가이다. 기실 어릴 때부터 닦아왔던 화업은 그 자체가 예정 지워진 방향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무리가 없다. 무리가 있어야 하는 작업에 무리가 없는 것이 그의 작업인 것이다.

 

공예적 기법과 디자인적 구성, 그리고 서술적 어법으로 완성한 작품에서 공예와 디자인, 그리고 설화성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수월하고 시원한 작업으로 언뜻 보이는 작품에는 철저한 자신의 통제와 화면논리의 중성화를 통해 초월적 정신의 세계를 신장하려는 그의 의지가 담겨있다.

 

박성식의 작품에서 공예적인 기법은 입체라 부를 만큼 두꺼운 중층구조를 파 들어가는 손놀림에서 엿보인다. 그러나 공예가 기법의 과시라면 박성식의 화면에서 기법은 오히려 억제 당한다.

 

그것은 마치 화석이나 유물을 땅에서 발굴하는 붓질을 닮았다. 그가 이렇게 공예적으로 보일 수 있는 기법을 도입하는 것은 공예에서가 아니라 건축과 민화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신뢰에서 비롯한다.

 

건축은 정갈하고 깔끔한 맛에서, 민화는 특히 책거리 등의 그림에서 날렵하고 매끈하게 마무리되는 선과 면에서 선비의 절도를 느꼈다. 그러기에 그의 화면에는 화면 밖의 시간이 느껴진다. 공예가 시간과 공간을 조형의 안에 가둔다면 건축과 민화는 바깥의 시간과 문화사적인 시간에서 화면 위에 시간을 조명하는 것이라는 뜻이 박성식의 화면에서 강하게 내비친다.

 

그러므로 화면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유정신의 충일을 위해 그의 손길은 어눌하고 칼끝은 무디어진다. 그것이 자기통제의 날렵한 표상이다. 그래서 그의 중충화면, 정신의 가능성을 위해 조심스레 통제된 기능이 발굴한 화면은 보석처럼 빛난다. 보석은 공예적 엄정성으로 연마되어 사람에게 치장되어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디자인적인 구성은 그의 작품에서 대담한 색면으로 나타난다. 때로는 기하적으로, 때로는 유기적으로 그의 화면은 거대한 기념비적인 색면이 거침없이 화면을 가로지른다. 그것이 비석의 의미일 것이다. 비석은 문자나 역사를 담는 그릇이다.

 

비석은 형식이다. 그 형식의 위에 정신이 응축된 시간이 서려 있다. 그것이 대상이기에 박성식의 화면은 디자인적인 구성에도 불구하고 회화적 질서를 극대화한다. 아니 오히려 기념비적 구성으로 회화적 정신을 첨예화한다.

 

서술성, 혹은 설화성(Narratives)은 의미단위를 나열하는 진술방식을 말한다. 우주와 자연과 인공물, 동과 서의 문화적 상징, 문자와 회화의 구성요소들이 그의 화면에는 논리적 연관없이 깔려있다.

 

때로 그것은 민화에서, 서구의 문화에서,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건축물과 창살 등 주거공간에서, 종교도상에서, 역사와 그 현장에서, 우주의 운행질서에서, 민족혼의 사적에서, 전래의 미감을 담은 전통문양에서 거침없이 화면에 도입된다.

 

그래서 그의 화면은 마치 문화인류사의 도설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박성식의 뛰어난 감수성은 이들 설화단위들을 화면의 구성요소가 아니라 화면의 질서를 장악하는 조형요소로 환원한다. 그것은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단위정보로서 화면에 펼쳐진다.

 

그가 한국의 오늘에 살고 있기에 그의 화면에는 한국인과 교감할 수 있는 한국적인 사실들이 펼쳐질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자 은유일 것이다. 그것 자체로서 화면에 이야기를 제공하고 완결되는 단위가 아니라 대체가능한 조형의 요소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그의 화면을 장악하는 역사의 현장과 인물, 이를테면 명성황후는 시해현장이나 구성적 색면보다 객관화함으로써 역사성과 비극성을 중화한다.

 

여기서 객관화란 주관적인 해석이 배제되면서 화면에 시선이 닿는 강도 즉 착목성 (着目性-Readability)을 분산시킨다는 말이다. 당시의 시간은 오늘의 시간 속에 잠재되어 있다. 시간 속의 시간인 것이다. 그런 각도에서 사건과 역사를 조명했기에 명성황후의 사진은 자기주장이 빠진 추상도안처럼 그려져 있다. 다른 예도 있다.

 

첨탑이 잘려나가기 훨씬 이전에 박성식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했다. 마치 거대한 역사의 암울한 배경 속에 실루엣처럼 처리됨으로써 그것은 객관적 조형 요소화 한다.

 

일본인이 만들었지만 우리의 역사가 되어 있었던 우리의 시간처럼 알아볼 수 있는 한국의 소재가 많이 등장하더라도 박성식에게 한국이란 세계 중의 하나이고, 한국의 역사란 세계사 중의 한국사이다. 객관적 표상이라는 뜻이다.

 

때로 그 한국적인 것은 동양적인 것과 직접 연관을 지어 나타난다. 북두칠성을 소재로 하는 작품이 있다. 거기에는 하늘에 띄운 북두칠성이 고구려 벽화의 투팔천정을 배경으로 그려진다.

 

고구려인의 우주관과 생활상이 이렇게 성수도(星宿圖)와 연관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실 동이족의 우주관이 고구려로 전승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이다. 그러나 중국 상고시대를 지배했던 위대한 동이족의 신화와 우주관이라 하여 그의 세계에서 감상적 영탄이나 이론의 도해서로 나타날 수 없다.

 

역시 국수주의적인 편집을 떨친 자유정신의 세계, 꿈과 이상의 세계를 그가 갈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 역시 그에게 있어서 인간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해석된다.

 

불상은 살아있는 모든 중생들이 그들의 삶과 행위와 고락과 애환을 싣는 배처럼 처리된다. 번뇌스런 모든 인간의 형태들이 꼬물꼬물 실루엣의 불상 위를 파고 들어가는 것은 석가라는 선각자의 고뇌를 표상한다.

 

시간과 공간, 끝과 시작, 태초를 요해했다고 하는 석가가 본 인간이란 어떤 것이며 어떤 시간과 공간이 대상이 되었던 것일까. 불상은 단순한 색면으로 환원함으로써 표상성이 제거된다. 그리하여 설화적이고 설명적일 수 있는 화면을 보다 웅숭깊은 심미적 정신의 세계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딱딱한 소재와 자의적 기법 및 미술외적인 해석 가능성 위에서 박성식의 화면은

기념비적인 현재의 시간을 보는 사람의 시간으로 옮겨놓는다. 화면상에 개념공간은 보는 사람에게 심정적, 감성적, 심미적 세계로 옮겨진다.

 

역사와 시간의 연속성은 철저한 자기통제와 중성화의 오랜 숙련에 의해 부드러워진다. 화면 위의 조형요소들의 정신을 빌려와 화면에 심는 그의 날렵한 손길은 산보하듯 편안하게 거닐 수 있는 화면을 만든다.

 

박성식이 만들어낸 형식은 바로 인간이 인간에 얼마만큼 성실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의 실증적 표상이었다. 단지 인간이기 위해, 인류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연속체로서의 인간이기를 위해 그가 그토록 투쟁했던 기록이 담긴 화면을 보면서 우리는 그 앞에서 모자를 벗을 수 있는 그림이라는 루오의 말을 되 뇌이게 된다.

 

#박성식

 

이미지01

김영재 불교미술을 보는 눈 사계절 2001에서 부분전사

 

이미지02

-2012년 전시작 사진 빌림-

서양화가 박성식 화백 | 내 취향의 그림

http://blog.daum.net/fineartclub/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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