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장소라는 주제로 설교를 구성했다.
현대인들은 공간에 민감하다.
예쁜 카페, 힙한 핫플레이스를 찾아다닌다.
심지어 어떤 신앙인들은 신앙생활을 "어느 교회가 건물이 예쁜가?", "어느 교회 예배당 분위기가 좋은가?"라는 '공간과 장소'의 기준에 따라 선택을 하기도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도 똑같은 고민을 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했는데,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네요.
도대체 어디서 예배해야 진짜인가요?(20절)"
여인은 예배의 '공간과 장소'를 물었다.
요즘 말로한다면 "어느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요?"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나요?"라는 질문이다.
20절에 사마리아 여인이 말하는 "이 산"이라는 장소는 바로 그리심산을 가리킨다.
그리심산은 북 이스라엘 사마리아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예배 공간이자 장소이다.
해발 881m 높이이며, 북쪽으로는 에발산(해발 940m)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이 두 산 사이에 위치한 골짜기가 바로 수가성 여인이 살던 '수가(Sychar)' 마을이다.
수가성은 세겜에 속한 마을이다. '세겜읍 수가리"
이곳에 유서 깊은 야곱의 우물도 있었다(6)
창세기 33장 18~19절: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와 가나안 땅 세겜 성읍 앞에 천막을 치고, 그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백 크시타(은 일백 개)를 주고 구입했다.
이 장소에 야곱이 정착하면서 판 우물이 바로 야곱의 우물일 것으로 추측한다.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았던 사마리아인에게 야곱의 우물은 단순한 식수 공급원 이상의 역사적, 종교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자신들이 이방인과 섞인 잡족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위대한 족장인 야곱의 공인된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이 우물을 통해 확인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들여왔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공간이자 예배 장소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대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답을 주신다.
"이 산도 말고 예루살렘도 말고...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21, 23절)."
예수님은 왜 장소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으실까요?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백 년 넘게 "어디가 진짜 예배 장소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여왔었다.
지난주에 잠깐 언급했듯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할 때 함께 짓자고 한 사마리아인들의 제안을 거절했었다.
그러자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서 소외된 사마리아인들은 BC 4~5세기경, 자신들만의 성전을 사마리아의 그리심산에 건축했다.
모세오경에 따르면 신명기 27장에서 축복을 선포한 산이 바로 그리심산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예루살렘 성전’ 대 ‘그리심산 성전’의 정통성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장소 논쟁은 사실 '내가 맞고 너는 틀리다'는 종교적 기득권 싸움이었다.
우리도 코로나시절에 이런 류의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였었다.
대면 예배인가? 비대면 예배인가?
더 나아가 이 정통성 논쟁은 말싸움으로 끝나지 않았다.
기원전 110년경에 유대 하스몬 왕조의 대제사장이자 통치자였던 요한 히르카누스(John Hyrcanus)가 군대를 이끌고 올라가, 사마리아인들의 영적 중심지인 그리심산 성전을 완전히 불태워 흔적도 없이 없애버렸다.
그 후에 사마리아인들이 성전을 재건하려 했지만 외부의 압박으로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여전히 그리심산을 거룩하게 여겼고, 무너진 성전터 위에 돌제단을 쌓아 예배를 드렸다.
이에 사마리아인들의 유대인들을 향한 적개심은 극에 달해 예수님 시대까지 상종도 하지 않는 원수 관계로 이어졌다.
사마리아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을 당시에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 돌제단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논쟁 중에 사마리아 여인이 에수님께 예배 장소 문제를 질문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절)"라고 선포하신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거룩한 건물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리심산입니까, 예루살렘입니까?"라며 예배의 '장소(Where)'를 질문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21절에서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셨고, 23절에서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말씀하셨다.
즉, 예수님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수백 년간 싸워온 '지리적 공간의 거룩함'을 무의미하게 만드시고, 예배의 패러다임을 공간에서 '존재와 관계'로 완전히 바꾸셨다.
하나님이 '영'이시기에, 하나님은 인간이 특정짓어 놓은 어떤 장소나 공간에 매여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정한 장소나 공간에 갇힌 하나님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의미이다.
진짜 예배는 우리가 거룩한 장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과 내 영혼이 깊이 연결되는 순간 시작된다.
두 가지 메시지를 전달한다.
1. 참된 예배를 드리려면 제한된 공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종학적으로 예수님은 유대인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했어야 했다.
요즘의 말로 풀어쓰자면, "집사님 우리 교회에서 예배드려야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라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고 말씀하신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특정 건물이나 산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묶어두려 했다.
지금도 이런 유의 말을 하는 성도들이 많다.
어느 특정한 장소를, 어느 특정한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지목한다.
마치 하나님이 그 장소 그 공간에만 계신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이 그 사람과만 사역하는 것처럼 말을 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영(Spirit)’이시기에 어떤 공간이나 장소에도 제한되지 않는 분임을 선언하신다.
하나님이 특정 장소에만 계신다고 믿는 순간, 그곳은 우상이 된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거룩하게, 교회 밖에서는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영적 이중인격자들이 생겨난다.
인간이 아무리 거룩한 장소(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릴 지라도
예배자가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그것은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
참된 예배는 장소라는 외적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내밀한 영적 소통을 통해 이루어진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하나님을 가두었던 모든 인간적인 공간의 울타리를 부수는 것이다.
지금도 일부 성도들이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진짜인가?"라는 2026년판 장소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거실 모니터 앞이든 웅장한 대예배당이든, 그 공간의 형태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앞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내 삶의 특정 공간에만 가두어두고
일주일에 한 번 찾아가는 '종교적 거래'를 멈추어야 한다.
참된 예배를 드리고자한다면 제한된 장소 특정한 장소를 고집해서는 안된다.
2. 우리가 참된 예배를 드리려면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 바로 일상의 공간을 바로 세워야 한다.
25절-26을 보라.
처음에는 그 여인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했었다(19)
이제는 그 여인이 예수님이 메시야인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깨달은 여인이 어디로 달려갔나?
그리심산으로 달려갔는가? 아니면 예루살렘으로 달려갔는가?
그녀는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어느 특정 장소나 특정공간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어느 특정인을 만나기 위해 달려가지도 않았다.
사마리아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이 살던 삶의 공간(사마리아 동네)으로 뛰어 들어가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외쳤다(28-29)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일상의 공간으로 뛰어들어간다.
왜? 참된 예배는 일상의 공간을 성서적으로 바로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인이 서 있던 사마리아 마을 즉 그녀가 매일마다 일상의 시간을 보냈던 그 일상의 장소가 바로 곧 성전이 되었다.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순간 바로 그 장소가 예배의 장소가 된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매일 발로 디디는 일상의 공간을 바로 세워야 한다.
참된 예배자는 주일마다 거룩한 공간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서 있는 세속적인 공간을 거룩한 공간으로 바꾸어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성도 자신이 바로 '걸어 다니는 성전(움직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일요일의 예배당만 거룩한 장소가 아니다.
월요일 아침 출근하는 사무실 책상, 아이를 돌보는 거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켜는 스마트폰 화면 앞도 모두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예배의 공간'이다.
때로는 지하철 전동차 내부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자동차 내부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 싱크대 앞이, 맛집을 방문한 후 영수증 리뷰를 하는 휴대폰이 바로 우리가 바로 세워야 할 일상의 공간들 즉 예배의 장소이다.
우리는 예배자의 몸가짐으로 직장 동료들을 만나야하고 동창과 지인을 만나야한다.
부부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도 일상의 예배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 거룩한 장소를 찾아다니지 말고, 여러분이 밟는 그 척박한 일터와 가정의 공간과 자신의 휴대폰을
영과 진리의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성소'로 개간해야 한다.
예배는 거룩한 ‘공간’에 들어가는 행위가 아니라, 거룩한 ‘성전’이 된 내가 세상의 모든 곳을 하나님의 공간으로 바꾸어 가는 여정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거룩한 장소(Space)'를 찾아다니던 인류에게,
성령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는 '거룩한 관계(Relationship)'가 곧 예배의 본질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한 남자가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에게 매일 밤 진심을 담아 눈물로 사랑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동네 어귀에 있는 낡은 빨간 우체통에 그 편지를 정성스럽게 넣었다.
이 우체통 덕분에 두 사람의 사랑은 이어질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해 한집에 살게 되었다.
이제 남자는 연인의 얼굴을 마주 보며 직접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남자가 아내의 얼굴은 보지 않고, 매일 동네 우체통으로 달려가 그 우체통을 붙잡고 "우체통님, 제 사랑을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우체통만 숭배하기 시작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우체통은 편지를 전하기 위한 '수단'일뿐, 진짜 본질은 '연인과의 만남'이다.
그리심산과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통로이자 '우체통' 같은 공간일 뿐이다.
하지만 이제 '진리'이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직접 찾아오셨다.
이제 우리는 우체통이라는 장소에 매일 필요가 없다.
영이신 하나님과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그분과 사랑의 관계를 누리는 것이 바로 영과 진리의 예배이다.
어느 젊은 부부가 수억 원을 들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호텔 결혼식장을 빌려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들의 찬사가 쏟아졌고, 부부는 그 멋진 공간에서 영원한 사랑을 서약했다.
하지만 결혼 후 몇 년이 지나 두 사람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대화는 끊겼고, 서로를 향한 불신과 상처만 남았다.
이제 이 부부에게 "우리가 최고로 거룩하고 멋진 식장에서 결혼했다"는 사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식장의 화려함이 그들의 깨진 관계를 치료해 주지 못한다.
반면에 비록 단칸방에서 소박하게 시작했더라도 매일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깊이 신뢰하고 사랑을 나누는 부부가 있다.
이들에게는 화려한 결혼식장이라는 '장소'보다, 지금 서로를 마주하는 '사랑의 관계'가 진짜 결혼의 본질이 아닌가요.
사마리아 여인은 '그리심산'이라는 화려했던 과거의 예배당 터를 자랑했고, 유대인들은 '예수살렘 성전'이라는 웅장한 건물을 자랑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참된 예배를 드리려면 자신이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특정공간이나 장소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배는 우리가 거룩한 공간으로 들어가는 행위가 아니라, 거룩한 성도가 자신의 일상의 공간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배의 핵심은 장소나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소통에 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친밀함이 없다면, 그것은 마치 사랑이 식어버린 부부가 화려한 결혼식장 사진만 붙들고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최고의 예배당'이 아니라, '하나님과 소통하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여러분들이 드리는 6일간의 예배가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모이는 주일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길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