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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6/17(수) "우리도 집착의 고삐를 놓아야한다"(창 22:1-19)

작성자유승민|작성시간26.06.13|조회수49 목록 댓글 0

심리학에서 집착(Obsession)은 "특정 대상이나 생각에 과도하게 몰입하여,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그것에 매이는 상태"를 뜻한다. 예) "건강집착증(건강염려증)"은 심리학적으로 "질병불안장애"

집착이 좀 더 발전하면 중독에 이른다. 

 

심리학에서는 집착은 두 가지 핵심 감정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한다.

통제 욕구 (Desire for Control): 내 삶의 안전과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특정 대상을 완벽하게 통제하려는 심리다.

상실 공포 (Fear of Loss): "이것이 없으면 내 인생은 끝난다" 혹은 "내 존재 가치가 사라진다"는 극심한 불안감이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자.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다. "한 참 늦둥이"

증손자가 같은 아들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단순한 자녀 이상의 의미, 즉 삶의 의미이자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래서 세상 어느 자녀보다도 제대로 양육하고픈 생각이 굉장히 강렬했을 것이다. 

그만큼 이삭을 완벽하게 통제하려 했을 것이다.

"숟가락은 이렇게 쥐어야 해" "공부할 때는 이렇게 해야 하고" "학원은 이런 학원에 다녀야 하고"라며 매사에 통제하려들었을 것이다. 

 

또한 상실 공포도 엄청났을 것이다. 

"우리 아들 다치면 어떡하나" "아프면 큰일인데"

가령 이삭이 친구들과 어울려 수영장에 가거나 축구경기를 한다고 하면 불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집착을 영적 관점에서는 '우상숭배'로 표현된다.

성경에서 우상숭배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며, 내 삶의 안전과 행복을 맡기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운동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건강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집착'하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아셨다.

하나님은 눈치 100단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험이라는 도구를 집어 들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할 때 사용된 히브리어 원어는 ‘나사’(נָסָה, nasah)이다.

또 다른 시험이라는 단어가 있다.

사탄의 시험(페이라조, Temptation)? 야고보서 1장 13절 등 신약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 인간을 죄에 빠뜨려 망가뜨리려는 ‘악한 유혹’을 뜻한다. 

 

본문의 시험은? 죄에 빠뜨리거나 파멸시키려는 ‘유혹(Temptation)’이 아니라, 대상을 단련하여 진짜 가치를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삭을 향한 집착의 고삐를 하나님께 넘겨드리고 참된 자유와 믿음의 성숙을 누리게 하시려고 '시험'이라는 수단을 꺼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집착을 수시로 확인하신다. (창 22:1-3)

하나님은 집착이 확인되면 우리가 집착하는 그 대상을 소환한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집착 대상을 소환하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나는 아니야 내가 돈에 집착하고 있다고 절대 아니야"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 다음으로 나는 돈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도 돈도 둘 다 사랑하지만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신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의 집착을 눈치채셨다. 

 

이에 아브라함은 즉시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3)

3일간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3일간의 여정은 내 안의 집착을 끊어내야 하는 치열한 내적 갈등의 시간이었다. 

동시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집착에 대한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결단의 시간이었다.

 

3일간의 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아브라함은 자신 속에 집착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리고 그 집착을 끊어냈다.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이같이 선포했다(5) "우리가 돌아오리라"

히브리서 11:17-19의 말씀처럼, 아브라함은 설령 이삭을 바쳐도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

 

그런 후아주 인상 깊고 영적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 구절이 소개되었다(9)

"이삭을 결박하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묶었다고 한다.

2. 아브라함은 제단앞에서 집착의 대상을 묶었던 것이다.

이 행위는 내 힘으로 쥐고 있던 통제권을 하나님께 온전히 올려드리는 영적 결단을 가리킨다. 

우리도 제단 앞에서 집착의 대상을 묶어야 한다.

예배는 자신이 통제하던 집착의 대상을 결박하는 시간이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묶어야한다.

자녀, 자기 자신, 과거의 상처, 미래에 대한 두려움등..

우리가 집착하는 집착의 대상들을 묶어야 한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는 장면을 목격하신 후 아브라함의 손을 멈추게 하신다(12)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진심을 확인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진짜 원하신 것은 이삭의 생명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진심'이었던 것이다.

 

그제야 아브라함이 숫양을 발견하게 되었다(12)

숫양이 언제 나타났는가?라는 문제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기전부터 숫양이 있었는지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기 전부터 숫양이 그 곳에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라고 현재형이나 단순 과거형처럼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에서 '걸려 있다'에 사용된 단어는 '네에 하즈'이다.

이 단어는  분사(Participle) 형태로 쓰였다.

히브리어에서 분사형은 '상태의 지속(Continuous State)'을 나타낸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기 전부터 이미 그 곳에 숫양이 수풀이 걸린채로 있었다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눈을 들기 바로 직전에 숫양이 덤불에 쾅 하고 걸린 것이 아니라, "이미 전부터 뿔이 수풀에 걸린 채 꼼짝 못 하고 묶여 있던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음을 뜻한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묶어 칼을 드는 그 긴박한 시간 동안, 산 모퉁이 뒤편 수풀에는 이미 숫양 한 마리가 뿔이 걸린 채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왜 아브라함은 그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이삭에게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어느 특정대상이나 생각에 집착할때에는 여호와이레를 발견치 못하다가

우리가 집착하는 대상을 묶어두게될때 우리 눈에 여호와이레가 보인다. 

3. 내 손에서 집착의 고삐를 놓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준비하신 은혜(여호와 이레)를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여호와이레를 경험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우리가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이삭을 내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집착의 대상을 손에 쥐고 있다. 

그래야 안전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면 여호와이레를 경험하지 못한다. 

늘 불안하고 초조하고 근심하고 염려하며 살게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집착을 묶어야한다. 이삭을 묶어야한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나만의 '이삭'이 있을 수 있다.

물질, 자녀, 성공, 혹은 건강일 수 있다.

이런 것을 묶어야 여호와이레를 발견할수 있다. 

 

하나님은 수시로 우리의 집착을 확인하신다.

그리고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시험이라는 카드로 우리의 집착을 내려놓게 만드신다. 

그런후 여호와이레의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험의 목적은 우리로 잃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채우시기 위함임을 기억하라.

내 인생의 집착의 고삐를 성령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내어드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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