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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뛰세르(Althusser, 1918-1990): 과학적 맑스주의를 위하여

작성자마실가|작성시간17.02.06|조회수381 목록 댓글 0


루이 알뛰세르: 과학적 맑스주의를 위하여

문성원(부산대 교수), pp. 297-329 .

- 알뛰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오월의 봄, 2013, P. 560.

알뛰세르와 그 동지들이 시대의 한계를 읽은 것은 큰 장점일 것이다. 전쟁을 끝내고 프랑스 지성인의 반성은 크게 두 가지였을 것이다. 하나는 통일과학 만능주의에 숨은 주지주의(본질주의와 환원주의)의 사고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편안과 향유를 누리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근원으로서 아버지 신앙에 잠복해 있는 폭력적이고 불연속적인 변증법적 사고 대한 반성에 있을 것이다. 알뛰세르는 이런 문제를 맑스 안에서 풀려고 했다는 점이 아쉽다. / 그의 착오 또는 과오는 68혁명의 다음날에 쟝 귀똥을 만나러 갔다는 설이 있는데, 그 귀똥이 카톨릭주의자가 아니던가? 새로운 사유의 물결이 프랑스라는 배를 흔들어 놓을 때 더 세게 흔들어야 하지 않았을까? / 두 달이 넘게 일제잔제 세력을 전복하려는 우리나라의 물결도 같은 운명일까? 인민이 더 세게 이데올로기 폭압의 세력을 뒤집어 엎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과정에 있으니 ... 인민이 승리하는 모습은 미친개를 두둘겨 패라는 루신의 이야기를 잘 새길 필요가 있을 것이다. (50LKE)


# 루이 알뛰세르: 과학적 맑스주의를 위하여

문성원(부산대 교수), pp. 297-329 .


제1장 알뛰세르의 생애 299

루이 알뛰세르는 1918년 10월 알제리의 비르망드레이스에서 태어났다. ... 1939(스물하나)년 파리 고등사범학교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전쟁으로 입학이 연기되었다. .. 1945(스물일곱)년 고등사범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가스통 바슐라르 밑에서 학위를 취득했고, 교수자격 시험에 합격하였다. 학위논문 제목은 󰡔헤겔 철학에서 내용의 개념󰡕이었다. 1948년 고등사범학교 철학과 지도교사로 임명되었으며, 그 후 조교를 거쳐 강사로 승진하였다. 그가 가르친 학생들 중에는 미셸 푸꼬, 미셸 베레, 피에르 부르디외, 미셸 세레, 자크 데리다, 알랭 바디우 등이 있다. .. 1948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여 계속 당원으로 있었다. (299) [미셸 베레는 고등사범 출신인지 찾을 수 없고, 미셸 세레[세르]는 알뛰세 계보에 드는 인물이 아닌데... 확인이 필요하다.]

1959(마흔하나)년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 출간했고, 1960(마흔둘) ... 포이에르바하의 󰡔철학선언󰡕을 번역하고 해설을 붙여 내놓았다. 1960년부터 1965년까지 논문을 모은 󰡔맑스를 위하여󰡕를 1965(마흔일곱)년에 펴냈다. 같은 해 자크 랑시에르, 피에르 마슈레, 에티엔 발리바르, 로제 에스타블레 등과 함께 󰡔자본론을 읽는다󰡕를 펴냈다. (299-300)

1968년경부터 알뛰세르는 정치와 계급투쟁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969(쉰하나)에 펴낸 󰡔레닌과 철학󰡕에서 ... 그는 철학을 ‘이론에서 정치’로 재정의 한다. .. 1970(쉰둘)에 ...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1973(쉰다섯)년에는 영국 공산당원 존 루이스와 벌인 논쟁의 내용을 담은 󰡔존 루이스에 대한 답변󰡕을 내놓았다. 1974(쉰여섯)년에는 󰡔자기 비판의 요소들󰡕 출판했고, 1975(쉰일곱)년에는 이제까지의 업적으로 피카르디 대학에서 국가박사학위를 획득했다. 1976년 논문집인 󰡔입장󰡕을 출간했다. 같은해 30여 년간 사귀고 같이 지내오던 엘렌느 리트망과 결혼했다. (300-301)

1977년 알뛰세르는 맑스주의의 위기를 거론하기 시작했고, 1978(예순)에는 󰡔르 몽드󰡕지에 「당내에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이라는 글을 연재했다. 1980(예순둘)년 젊은 시절부터 그를 괴롭혀온 우울증 증세가 악화되어 그해 11월 16일 아내 엘렌느를 교살(絞殺)하는 사태에 까지 이르렀다. ... 1990(일흔둘) 10월 22일 심장 쇠약으로 사망했다. (301)

제2장 시대 배경과 알뛰세르의 문제의식 301

맑스주의 역사에서 보면 알뛰세르는 상당히 이색적인 주장을 펼친 인물이다. .. 그는 아직 스탈린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소련 중심의 ‘정통 맑스-레닌 주의’를 비판하는 한편 여기에 대한 반발로 서구에서 생겨난 이른바 ‘인간주의적 맑스주의’를 거부했다. .. 그는 ‘교조주의’에 반대하는 동시에 교조주의에 대한 ‘우익적 비판’에도 반대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러한 비판은 내용상으로 ‘경제주의’와 그 부속물인 ‘인간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02) [전쟁이 경제주의와 서구 중심의 인간주의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전후 프랑스 지식인 이었다. 철학에서 자연주의가 새로이 등장하는 것은 스피노자를 다시 읽으면서이고, 19세기의 안으로 또는 깊이로 가는 방식은 후기 구조주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50LKE)]

“우리의 철학적 기억 속에서 그 시기는 모든 숨겨진 오류를 사냥하는 무장한 지식인의 시대, 우리 자신의 글을 쓰지 않고 모든 저작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계급이라는 가차 없는 하나의 칼날로 예술, 문학, 철학, 과학 등 세계 전체를 재단하던 시대 - ‘부르주아 과학, 프롤레타리아 과학’이라는 허공에서 높이 펄럭이는 깃발에 – 그 특징을 한마디로 집약해 놓은 시대로 남아 있다.” (󰡔맑스를 위하여, 1965󰡕, 12쪽) (303)

알뛰세르의 우선적인 목표는 맑스를 재건함으로써 당시의 혼란된 이론적 상황을 바로 잡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재건되는 맑스주의는 경제주의적 맑스나 인간주의적 맑스가 아닌 ‘과학적’ 맑스여야 했다. (304)

제3장 구조주의적 맑스주의 305

1) 헤겔주의의 문제 305

알뛰세르는 경제주의나 인간주의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했다. ... 세계를 정신이라는 단일한 주체의 전개과정으로 본 헤겔의 사고 방식은 맑스주의를 오염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05) [정신의 역할이 최고의 국가권력처럼 실행한다는 것은 인간주의 오만이다. 아마도 김기춘은 이런 생각을 했으리라. 국가는 인민의 의사의 반영일 뿐이다. 반영의 흐름 즉 가상성의 흐름에서 형상적 실체를 만들어낸 이데올로기가 인민을 사로 잡는 것은 종교가 아편으로 인민의 욕망을 완화시키는 것과 같다. 이데올로기 타파가 아니라 가상성을 실재성으로 착각하는 동일성(동질성)의 원리를 타파해야 한다. 자연내재주의의 등장은 이질성 또는 다양체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흐름(리비도)의 전개과정이다. (50LKE)

우선 해겔의 사고는 세계의 복합적인 모습을 하나의 단순한 원리나 본질을 통해 설명하려는 본질주의 내지 환원주의의 경향을 갖고 있다고 알뛰세르는 보았다. (305)

경제주의와 이것이 함축하는 결정론을 피하기 위해 주체의 자리에 정신이나 경제가 아닌 ‘인간’을 도입해 보아도 결과는 신통치 않다. (306)

경제주의와 인간주의를 내몰기 위해 .. 두 가지 .. 첫째, 맑스 사상과 헤겔의 철학이 사실상 무관하다는 점을 밝히는 일. 둘째, 헤겔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맑스주의 과학과 철학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일. 첫째로는 ‘인식론적 단절’ ... 둘째로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유물론에 대한 알뛰세르의 새로운 규정들로 나타난다. (306) [인식론적 단절은 수학과 논리를 통한 엄밀성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생물학과 심리학에서 다루는 구체적 전개과정의 정확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변증법이 불연속인지 연속성인지에 대해 심층에서 생성의 연속성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전에는 전자의 엄밀과학과 후자의 강요적 변증법의 사고를 하는 것에서 벗어나, 이후에는 전자의 정확성의 과학과 후자의 내재적 연속성의 사유가 다시 결합해야 한다. 이런 후기 구조주의 방식들은 여러 갈래들로, 최소한 여섯 부분들에서 다루어졌다. 철학에서 언어학에서 정치경제학에서, 문학담론에서, 예술(조형)에서, 종교에서 다루어진 것으로 아마도 푸꼬가 선두로 󰡔말과 사물󰡕에서 터뜨린 것 같다. (50LKE)]

2) 인식론적 단절 307

맑스의 변증법적 방법은 헤겔 변증법의 관념론적 측면을 뒤집음으로써 성립한 것, .. 맑스주의 내의 인간주의적 사조는 맑스의 초기 저작들을 근거로 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소외이론의 주된 전거로 사용된 󰡔경제학-철학 수고, 1844󰡕에 헤겔과 포이에르바흐의 강한 영향이 담겨 있다는 것... (307)

그는 맑스의 저작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맑스를 위하여󰡕, 27쪽) 1840-1844: 청년기 저작(󰡔헤겔법철학 비판󰡕, 󰡔신성가족󰡕, 󰡔경재하기철학 수고󰡕 등), 1845: 단절기 저작(󰡔독일 이데올로기󰡕, 「포이에르바흐 테제」), 1845-1857: 성숙기 저작(󰡔공산당 선언󰡕, 󰡔철학의 빈곤󰡕, 󰡔임금, 가격 그리고 이윤󰡕 등), 1857-1883: 완숙기 󰡔자본론󰡕, 󰡔고타강령비판󰡕 등)

단절은 전과학적 문제틀 내지 이데올로기적인 문제틀에서 과학적인 문제틀로 전환하는 것을 뜻하는데, 알뛰세르는 이것을 자신의 스승이었던 프랑스 과학철학자 바슐라르(Gaston Bachlard)의 용오를 빌려서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불렀다. (308)

맑스의 경우에도 1845년 이전에는 역사 유물론의 기본 개념들, 예를 들어 생산력, 생산관계, 잉여가치와 같은 개념들이 그의 저작에 등장하지 않았다. (308) [맑스에서 유물론의 개념은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중요하다.]

알뛰세르는 과학 활동도 하나의 ‘생산’ 활동으로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실천’ 곧 ‘이론적 실천’으로 취급하는데, 이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309) [문화 활동, 공동체 생활 활동도 실천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푸꼬의 네 가지 에피스테메의 변천에 덧붙여야 할 것이다. (49LKE)]

3) ‘이론적 실천’과 과학 309

알뛰세르에 따르면, ‘실천’이란 “주어진 원료를 일정한 ‘생산물’로 ‘변형’하는 과정, 즉 특정한 ‘생산’ 수단을 사용해서 인간의 노동을 통해 실행되는 ‘변형’ 과정을 뜻한다.” (󰡔맑스를 위하여󰡕, 167쪽) (309)

“경제적 생산과정이 비록 자연 및 다른 구조(정치적-법적, 이데올로기적 구조)와 ... 필연적인 관계를 맺지만 그 과정 자체는 전적으로 경제 속에서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론적 실천에 특유한 지식의 생산도 전적으로 사유 속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이룬다고 얘기하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 (󰡔자본론을 읽는다, 1965󰡕, 48쪽) (310)

알뛰세르는 지식과 실재 대상 사이의 관계를 전유(專有, appropriation)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론적 실천에 의해 생산된 과학적 지식은 현실의 대상에 대한 지식으로서 지위를 차지하며, 실재의 대상은 계속적으로 생산을 이루어내는 지식 과정에 대해 ‘절대적 준거점’으로 남아있다. (311-312)

[경험주의, 환원주의, 인간주의 등의 위협으로부터] ... 알뛰세르는 ‘구조적 인과성’, ‘지배구조’, ‘중층 결정’ 등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자신이 주장하는 맑스주의 과학의 문제틀을 명료하게 드러내 보려고 노력했다. (313)

4) ‘복합적 전체’로서 사회

[국가 또는 사회에 대해 ‘복합적 전체’라고 하는 것은 들뢰즈의 다양체와 같은 의미이다. 기상학에서 복잡계라고 하는 것도 견주어 볼 필요가 있다. 생명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맑스의 문제틀을 이해하는 알뛰세르의 기본 방침은 이미 언급한 대로 ‘생산’으로서 ‘실천’이라는 관점을 경제 영역만이 아닌 사회 모든 주요 영역에 적용하는 것이다. 정치, 과학, 이데올로기 등 .. 알뛰세르는 이 각각의 실천 영역을 심급(審級, l’instance)이라고 부른다. (313) [실천의 영역들은 위상들일 것이고 미래와 연관에서는 가상성이 중첩되어야 할 것이다.]

알뛰세르에 따르면 사회는 여러 심급들이 서로 얽혀 있는 복합체이지만, 어떤 심급도 다른 심급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어떤 심급도 아는 심급의 ‘본질’일 수 없다. 모든 심급드은 각기 ‘구조’이며 사회적 전체는 이 구조들로 이루어진 구조, ‘구조들의 구조’이다. ‘구조적 인과성’이란 이런 복합적인 구조 내에서 성립하는 인과성이다. (314) [“구조들의 구조”에서 앞의 구조는 구체적 개별 기계 그리고 뒤의 구조는 추상 기계일 것이다. 이 후자의 구조는 ‘구조 없는 구조’일 것이며, 플로티누스의 세계 영혼(nous)와 닮았다.(50LLB) ]

반면에 알뛰에서는 맑스주의가 파악하는 복합성은 환원이나 본질-현상 관계가 아니라 ‘접합(接合, l’articulation)’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접합’이란 요소들 사이에 일방적인 규정 관계가 아니라 전체 안에서 일종의 분절화이며, 각 요소들의 상대적인 독자성을 전제한다. (314) [신체적 접합은 이중 분절이지만, 신경계에서 시냅스의 접합은 다중 분절인 셈이다. 신경계의 회로이외에도 분자들의 독립적 분절로슨 흰피톨을 들 수 있을 것이고 등등 생명체의 다양체는 접합을 넘어서 배치에 대해 논의를 필요로 하다.]

이 요소들 중에는 서로 어긋나게, 서로 불균등하게 발전한다. 그래서 이 요소들 중에는 다른 요소들보다 상대적으로 영향력과 침투력이 우원한 요소, 즉 지배적인 요소가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지배적인 요소가 존재하는 불균등한 접합의 구조가 ‘지배구조(structure à dominante)’이다. 지배적 요소가 무인간는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지배적 요소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도 물론 단선적인 인과관계가 아니다. 복합적인 전체 속에서 각 요소들은 서로 불균등하게 대립한다는 의미에서 모순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한 모순적 관계는 다름 모순적 관계와 관련 속에서 언제나 ‘중층 결정’(surdétermination)된다. (315)

알뛰세르가 주목했던 사태는 공산주의 혁명이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가 아니라 소련을 비롯한 자본주의권의 변방에서 일어났다는 진부한 사실 외에도 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혁명적 분위를 주도해온 것은 중국, 쿠바, 베트남, 알제리 등 제3세계의 민족해방 운동과 혁명운동이었다는 사실이었다. (316-317)

특히 생산력의 발전에 의하여 이미 예정된 어떤 필연적인 과정을 좇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우 불균등하고 복합적인 과정을 거치는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이 불균등성과 복합성은 물론 여러 국가나 사회들 사이에도 나타나지만, 한 사회 내부의 각 영역들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임이 틀립없어 보였다. (317)

알뛰세르는 우선 구조주의는 구조를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조합(combinatoire)으로 보는 데 반해, 자신은 실재의 구조를 유기적인 결합(combinaison)으로 파악한다는 점, 자신은 구조주의와 달리 ‘구조에 대한 과정의 우위’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구조주의적 사고 방식은 그가 내세우는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이나 ‘지배구조’, ‘생산과정’ 따위의 범주를 소화할 수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317-318) [김대중은 정치를 생물과 같다고 한 적이 있는데, 인관과 관련된 제도, 사회, 정치, 경제, 예술, 종교 등은 영혼(psyche)의 기호화(signification)로 생성과 소비의 일체 관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은 크게 보아 이중분절처럼 보이지만 다양체 또는 복잡계라는 점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50LLB)]

이러한 문제는 1960년대[68 파리 학생봉기] 말경부터 알뛰세르는 자기 견해를 스스로 비판하고 수정해나가는 이유와도 연결된다. (318) [68이후 세계에는 혁명이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맑스주의와 관계 없는 새로운 사회 건설에는 이란혁명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21세기에 반도 남쪽에서 박근혜와 사법권력 김기춘, 정보권력에 원세훈, 재벌권력에 이재용 등을 감옥에 보내고 그 인민이 직접민주정치를 실현한다면, 촛불혁명을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50LLB)

제4장 알뛰세르의 자기비판과 맑스주의 위기론 318

1) 계급투쟁과 역사 318

알뛰세르는 이론적 실천영역이 경제적 생산과 같은 물질적 실천 영역과 동일한 구조를 지닌 것으로 생각했다. 그럼으로써 알뛰세르는 이론 영역을 자립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이론과 실천의 영관이라는 문제를 ‘이론적 실천’의 영역 내로 해소해 버렸다. 이 점 때문에 알뛰세르는 맑스주의 진영 내부로부터 ‘이론주의’라거나 ‘엘리트주의’, 나아가 보다 일반적으로는 ‘관념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319) [이론적 실천의 4중 분절(구조)로 재해석하려고 한 것이 푸꼬이라면, 이중 분절의 다양한 영역(위상)를 좀 더 큰 그물(리좀)으로 바꾸려 한 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였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위상이 현 사회(국가)에 균열을 내고 주도권을 가질지는 – 전쟁 중이 아닐 경우에(휴전 중이긴 하지만) - 아직도 생성과정 중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0LLB)]

이제 알뛰세르는 계급투생이 역사의 동력이라고 선언한다. ...“노동자 계급은 자본가 계급의 부정, 즉 자본과 권력을 박탈당한, 음의 부호가 달린 자본가계급이 아니며, 자본가 계급은 부와 권력을 가진, 음의 부호가 달린 노동자계급이 아니다. 두 계급은 동일한 역사를 갖지 않으며, 동일한 세계를 공유하지 않고, 동일한 수단을 갖지 않으며, 동일한 계급투쟁을 전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대립하는데, 이 대립이 참으로 모순이다. 그들의 대립관계는 헤겔적인 아름다운 고양과 화해를 통해 대립의 조건들을 초월하는 대신, 그 대립의 조건들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아미앵에서 주장」 프랑스어판 162쪽, 한국어판 솔출판사, 1991, 154쪽) (320) [대립의 해소는 새로운 방향의 돌파구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즉 계급은 일종의 생산물이며, 역사과정을 자신의 의도대로 끌고 나가는 주체가 아니다. 알뛰세르에 따르면 그러한 주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를 변화시키는 것은 계급투쟁이지만 이것은 하나의 과정이지 주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주체 없는 과정이며, 미리 정해진 도달점인 목적(fin)도 없는 과정, 곧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이 된다. (321)

사실 알뛰세르가 계급투쟁을 전면에 내세운 배경에는, 그가 스탈린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의 실례로 여겼던 중국 문화혁명의 영향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문화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상이 극복되지 않은 채 특히 우력 각국의 공산주의 운동이 난관에 봉착하게 되자, 알뛰세르의 ‘계급투쟁 역사 동력론’은 이제 맑스주의의 위기선언으로 바뀌게 된다. (321-322)

2) 맑스주의의 위기와 알뛰세르의 맑스주의 323

알뛰세르가 맑스주의의 위기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다. 이미 10여년 대 후반이었다. 이미 10여년 이상 지속된 중소의 분열, 서구의 보수화 분위기와 좌파 운동의 침체, 유로-코뮤니즘으로의 방향 전환에도 불구하고 계속 하락하는 공산당의 비중, 소련과 동구권의 경직된 정책과 경제 정체, 프랑스 공산당의 비민주성, 칠레 아옌데 정권의 붕괴, 이런 것들이 알뛰세르가 맑스주의 위기론을 들고 나오게 된 배경이었다.

그러나 알뛰세르가 도입하는 구조와 그 구조들의 ‘접합’[분절] 관계는 이 극복의 필연성을 전혀 보장해 주지 못한다. 생산력과 생간관계의 모순이 설사 알뛰세르의 지적대로 그 극복을 전제하는 목적론적인 색채를 가진 것이라 할지라도 이 모순의 설정을 떠나서 맑스주의로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자못 의심스럽다. 이런 점에서 보면 맑스주의 내의 목적론적이고 결정론적인 경향을 극복해 보려한 알뛰세르의 시도는 결국 맑스주의의 한계와 맞닿은 극한적인 것이었던 셈이다. (326)

* 참고문헌

* 더 읽어볼 책들

(50LLB)

** * 인명록

알뛰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 프랑스 철학자. 알사스 카톨릭 가계 출신, 부인 이트만(Hélène Rytmann, 1910-1980)

바슐라르(Gaston Bachlard, 1884-1962) 합리적 과학정신의 정립과 정신분석학에 대립하는 정신종합학의 이중 방식을 인식론적으로 전개한 프랑스 철학자이다. 그는 과학의 발달이 시대의 장애물을 넘어서 앞 시대와 불연속이 있다고 보았다.

발리바르(Etienne Balibar, 1942-) 프랑스 아발롱(욘느)에서 출생. 고등사범학교, 현재 파리 10대학(낭테르) 명예교수.

바디우(Alain Badiou, 1937-) 프랑스 철학자. 마오주의자.

미셸 베레(Michele Barrett, ?-?) Fr.Wiki에 나오지 않지만 En.Wiki에 나오는 인물 여성인 것 같다. 문학비평 쪽으로 간 인물 같다. 알뛰세의 영향을 입은 맑스-여성주의자. Ideology and the Cultural Production of Gender」 in 󰡔Women’s Oppression Today: The Marxist Feminist Encounter, 1988)󰡕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 학력 : 파리대학 예술학부 경력 : 2000년 신자유주의에 맞설 사회운동의 세계적 연대(solidarité) 제안, 1981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 1975년 사회과학연구지 창간, 1968년 유럽사회학연구센터 창설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유태인출신의 프랑스 인으로 미국에서 활동한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으로부터 출발하여 존재의 계시가 어떤 것으로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이미 지워진 어떤 것으로 바꾸어서 설명한다. 이 대존재의 지워진 흔적에서 이제 대존재를 밝힐 것이 중요하다기보다 그 생산작용에 대한 관심이리라.

에스따블레(Roger Establet, 1938), 프랑스 사회학자, 교육문제 전공

포이에르바흐(Ludwig Feuerbach, 1804-1872) 독일 철학자이다.

푸꼬(Michel Foucault, 1926-1984) 인간의 인식의 고정된 틀에 의해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연관에서 보면 생산양식의 변화처럼 한 틀에서 다른 틀로 옮아가는 것이고 이들 사이에는 인식론적 단절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한 시대는 공시적 인식 틀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틀도 유동적이며 변화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프랑스 혁명에서 인민의 자유를 너머 멀리서 바라보면서 인간의 정신이 신의 인격에 이를 것으로 만든 또 하나의 토마스 주의자로 철학을 하였다. 그는 프러시아 통일의 영광을 만들기 위하여 루터파 교리에 맞추어 신의 절대성을 강조한 근대판 교부 철학자이다.

루이스(John Lewis, 1889–1976) 영국 감리교파, 맑스주의자. 철학, 인류학, 종교에 대한 저술을 남겼다.

마슈레이(Pierre Macherey, 1938-) 프랑스 철학자. 스피노자 전공, 문학사상의 전공,

맑스(Karl Marx, 1818-1883) 유태인 출신 독일 철학자. 인간의 자의식이 자유 절대성이라 믿기보다, 사회라는 공시태가 발전하면서 역사적으로 자유를 점점 더 실현한다고 보았다. 이 공시태의 변화를 노동과 생산을 중심으로 한 생산양식의 변화라 하며, 최종 양식이 공산주의이다. 인민이 이런 변화를 감당할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 루소 다음으로 낙관적이다. 그의 철학은 신과 관념에 의존하지 않는 자연주의 전통에 선 생성 철학이다.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 프랑스의 사상가, 모랄리스트. 프랑스의 르네상스기(期)를 대표하는 철학자, 문학자이며 󰡔수상록󰡕의 저자이다.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1940-) 1968년 프랑스 학생운동을 기점으로 루이 알튀세와 결별했다. 결별의 이유는 맑시즘의 엄격한 과학성과 결정론적 사상에 충실했던 알튀세와 실천 중심의 마오이즘(Maoism)에 경도되어 있던 랑시에르의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미셀 페쇠(Michel Pêcheux, 1938-1983) 프랑스 철학자. 언어철학자 담론 분석가. 알뛰세의 영향을 받음. ]

세르(Michel Serres 1930-) 아장(Agen, Lot-et-Garonne주)에서 태어났다. 1949 조선학교(Ecole navale), 1952년에 울름가에 왔다. 1955년에 철학 교수 자격시험을 통과. 그의 책들은 지혜의 땅의 지리를 그린다. 1990년 프랑스 학술원 회원. (인명사전에...)

# 알뛰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 년표

1918 10월 알제리의 비르망드레이스에서 태어났다. 알사스 카톨릭 출신, 아버지는 은행원이었다.

1939(스물하나) 파리 고등사범학교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전쟁으로 입학이 연기되었다.

1945(스물일곱) 고등사범학교 철학과에서 공부하다.

가스통 바슐라르 지도로 학위를 취득 교수자격 시험에 합격하였다.

헤겔 철학에서 내용의 개념

___ 엘렌느 리트망(Hélène Rytman, 1910-1980)을 만나다. [En.Wiki에는 유대계 루터파 교인이며 혁명적 여성이라 한다.] 1980년 남편에게 교살 당했다.

1948(서른) 교수자격 2등(이해 들뢰즈 8등). 고등사범학교 철학과 지도교사로 임명되었다. -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여 계속 당원으로 있었다.

1959(마흔하나)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 출간

1960(마흔둘) 포이에르바하의 󰡔철학선언󰡕을 번역하고 해설을 붙여 내놓았다.

1965(마흔일곱) 󰡔맑스를 위하여󰡕를 내었다. 자크 랑시에르, 피에르 마슈레, 에티엔 발리바르, 로제 에스타블레 등과 함께 󰡔자본론을 읽는다󰡕를 펴냈다.

1967, 그는 고등사범학교에 스피노자 그룹(« le groupe Spinoza »)을 만들었다. , « calqué, pseudonymes compris, sur le modèle des organisations plus ou moins clandestines assez nombreuses à l’époque » (A. Matheron)

1969(쉰하나) 󰡔레닌과 철학󰡕

1970(쉰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1973(쉰다섯) 영국 공산당원 존 루이스와 벌인 논쟁의 내용을 담은 󰡔존 루이스에 대한 답변󰡕

1974(쉰여섯) 󰡔자기 비판의 요소들󰡕 출판

1975(쉰일곱) 피카르디 대학에서 국가박사학위, 발표문인 입장」은 다음해 출간되었다.

1976(쉰여덟) 입장」 출간

____ 30여년을 사귄 엘렌느 리트망과 결혼하다.

1978(예순) 󰡔르 몽드󰡕지에 「당내에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이라는 글을 연재했다.

1980(예순둘) 11월 16일 젊은 시절부터 그를 괴롭혀온 우울증 증세가 악화되어 아내 엘렌느를 교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1985(예순일곱) 르몽드 지에서 인육을 먹은 사가와(Issei Sagawa)에 대한 샤로뜨(Claude Sarraute) 기사를 읽었다. Dans le journal Le Monde du 14 mars 1985, Althusser lit un article de Claude Sarraute au sujet du succès du livre du Japonais Issei Sagawa,

1990(일흔둘) 10월 22일 심장 쇠약으로 사망했다. (50LLB)


첨부파일 논문성원2013알뛰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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