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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창조

정진새: 브레인 컨트롤(Brain Control), 2014

작성자마실가|작성시간14.08.06|조회수176 목록 댓글 0

 

극정진새1408브레인

 

***

<브레인 컨트롤 Brain Control>

창작극, 50분, 선돌극장. 2014 08 03 8시,

극본 연출: 정진새 / 출연: 김민하, 이지선, 강희제, / 일요일 8시 연극을 보다

 

이 연극은 두 개의 자아가 있는 셈이다. 하나는 이성적으로 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소자아가 있고 실재상으로 현실에서 움직이는 온자아가 있다. 한편으로는 소자아의 권력이 온자아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여긴다. 연극에서 무대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은 이 권력의 조작이다. 조작의 실행 방식을 보면서 거꾸로 온자아의 통제와 억압된 삶을 추론하게 한다. 그 소자아는 연극 무대에서 ‘나’이다. 다른 한편으로 온자아는 일차적으로는 통제의 지휘아래서 겉보기에 현실적으로 살아가지만 부차적으로 온자아는 통제하는 뇌의 조작과 관계없이도 세상이라는 현실을 느끼고 감정과 정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것을 스크린을 통해서 보여주기도 하지만 소자아의 전령을 통해 가상적 화면을 확장하여 관객에 말씀으로서 전달하는 잠세적 작동 환경(millieu d'acte virtuel)이 있다. 내가 이렇게 설정한 것은 심층과 표면의 대비로 상정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뇌를 통제하는 소자아의 상부가 따로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들뢰즈 식으로 상층이라 부르는 부분이다. 소자아는 깨어있는 이성은 항상 과거의 여럿 중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을 골라서 옆에 두는 추억이라는 것이 있다. 이 연극에서는 기억이라 부른다. 학문적으로 보면 마음부에 질적 다양성의 역동적 기억이 있다. 이 마음부의 기억은 어떤 어떻게 어떤 때에 등장할지 소자아도 잘 모른다. 그래서 무의식이라 한다. 이 무의식은 이성이 보아서 찾겨지지 않아서 없는 것 같지만 항상 현존에 기대어 있는 실재성들이다. 신체와 마음으로 구별하는 영미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연극은 무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 무대에는 온자아를 통제하는 뇌 안에 이성(김민하), 기억(이지선)이 있다. 그리고 전신전화국 더하기 기지국과 같은 전령(강희제)이라는 통로가 있다. 이 안에서 이성을 절대적이며 명령하는 현존이다. 이성은 전달하면 모든 것이 기계적 또는 실험적으로 조합과 분해가 실행된다고 믿는다. 실재로 그렇게 살아온 것이 이성이기도 하다. 그 많은 자료는 이성적이라는 현존이 다른 관계들 속에서 만들어진 것을 [여러 다른 현존들이 만들었던 것을] 설랍속에 있는 것처럼 꺼내서 쓰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여긴다. 그 자료는 프로그램이란 이름으로 마음부와 신체부를 조작하려 한다. 이 극에서 잠세적 작동 환경에 있는 온자아는 취직이 안되는 젊은이로서 매번 온자아에서 솟아나는 감정 정서 감동을 제거하며(이성의 지시를 통해) 열심히 죽이며 그 환경에 살아보려고 하지만 결국은 안되는 환경이라 자기 스스로 돌이되어 이세상이 아닌 물 속에 영원히 쉬는 것으로 끝난다.

극작가이며 연출가는 이 각본을 처음 쓰려 할 때, 가까운 사람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겪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로서는 허탈(멘붕)과 실의일 것이다. 그때 이제까지의 나와 다른 나가 내 속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진정한 나는 누구이지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 때 유행하는 정신 훈련 같은 방식도 생각해보았고, 자아와 두뇌에 관한 여러 책들을 참조하면서, 지시 하는 자아가 아닌 나의 진정한 주체로서 자아를 찾으려 했다. 이 동기의 발상으로부터 20 중반의 정규직 자리를 찾는 젊은 이들이들 보았다. 이들은 한 취직이 안 되면, 자아의 일부를 걷어내고, 매번 안될 때 마다 자아의 여러 부분들을 매몰시키고 현사회에 맞는 자아를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데, 점점 자아를 잃게되고 갈수록 자신은 없고 줄어줄어 들어 무화(無化)되는 비극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 무화를 죽음으로 연결시키다 보니, 이 연출에서 물속에 뛰어들어 가라 않는 것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 연극 설정에서 소자아와 온자아의 매개체로서 전령과 스크린 그리고 가상공간을 설정한 것은 흥미롭다. 이 관계를 관객들이 흥미 있어할 정도로 재미있게 내용을 풀어간 것은 극작가의 장점일 것이다.

내로서는 이 작품을 여러 방식으로 바꾸어서 연작 시리즈로 해볼만 한 작품으로 보았다. 일단 기억과 추억을 구분한다. 추억(souvenir)은 이성의 지시를 받는 쪽으로 기억(mémoire)은 가슴(마음이라기보다 가슴이 더 맞을 것 같다) 이 둘 사이의 교감을 보내는 방식도 설정해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성과 몸은 대립관계가 더 분명해지고... 이러한 것은 자아와 세상의 형태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성격의 구분이 되는 것과 같다. 이성이 너무 과도하게 움직이는 자들은 가슴이 죽고, 몸은 마치 끈달일 인형처럼 움직이는 마리오네뜨 신세일 것이다. 온자아가 잘 움직이며 이성의 지시를 받으려 하지 않으면 예술가 특히 목가적 시인은 그러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작품의 토대설정에서 이론적으로 대타자(Soi)와 소타자(soi)와 이에 대응하는 소자아(moi) 온자아(Moi)라는 사자관계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는 벩송과 들뢰즈가 보는 방식과 유사하다. 이런 방식으로 들뢰즈가 영화를 분석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상층에 대타자, 표면의 이중성에 소타자아 소자아 그리고 소자아를 가끔 놀라게 할 정도로 새로운 상황들을 만들게 하는 온자아.

연극으로 돌아가 이성은 온자아의 몸전체에 명령한다. 기억(추억)은 마음(가슴, 기억)교감하지만 추억은 언제나 이성의 통제아래 있다. 추억은 사진의 나열과 같다. 추억과 기억 사이의 이 연결은 가끔 일어난다. 가슴아픈 일이든 충격적인 일들이든 문득 떠오르듯이 말이다. 프로이트가 트라우마라고 불렀지만. 연결의 동기는 이성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이 움직이며 마주치는 구체적 현실로부터 촉발된다. 즉 심층에서 올라온다는 점이다. 그 올라오는 현실을 이 연극 무대에서는 ‘잠세적 작동 환경’으로 보여 준다. 소자아는 실재상으로 이 환경에서 활동한다. 무대는 두뇌를 통해 지시하는 놀이, 지성의 게임을 보여 준다. 삶은 조작적 놀이만이 아니기에, 돌이 되기보다 떠돌이가 되어 이성이 지시하는 범위를 벗어나려 할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가 탈영토화가 일어난다고 한다. 또는 돌처럼 그냥 가라앉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셀 뚜르니에처럼 발생적 과정의 초기로 되돌아가는, 모태로 되돌아가는 행동을 보여주는 것도 한 설정 방법일 것이다.

극작가가 말하듯이 이 글을 쓰는 시기에 힐링(치유)이라는 말이 대 유행이었다. 나도 그 시기에 힐링이라는 말을 듣고 살았지만, 프로이트는 분열 환자를 고쳤다고 하는 것 만큼이나 힐링으로 고쳤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작가가 치유라는 방식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썼다고 한다.

치유나 정신분석가의 치료가 현사회에 되돌아가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미친사회에 돌아가는 것이 어떻게 치료와 치유이겠는가? 거꾸로 저항하고 별종이고 인성자유주의자(le libertaire)로 가는 것이다. 기억의 진정한 활동이 자유이다. 이것은 치료 치유가 아니라 진정한 삶의 추구이다. 멋있고 즐겁고 상쾌하게 “빨강이 되는 것”이다. (47SKF)

 

 

*** ** *팜플렛

<브레인 컨트롤 Brain Control>

2014년 8월 2일(토) - 8월 5일(화) /

토요일 오후 7시 / 일요일 오후 3시, 7시 / 월,화 오후 8시

출연: 김민하, 이지선, 강희제,

극본 연출: 정진새

드라마티그 전강희,

조연출 김라영,

영상제작 강희주

조명 김종석

기획 한지선 극단 문

작품 소개: <브레인 콘트롤>은 인간의 “뇌”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탕으로 구성한 연극이다. 두뇌부에 속하는 이(성), 기(억), 전(령)은 ‘나의 사유와 활동을 관리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마음부와 신체부도 두뇌부의 간섭을 벗어나고자 한다. ’나‘에게 닥친 사건 사고를 시시각각 두뇌의 입장에서 어떻게 대처하는 지 이 연극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팜플렛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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