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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창조

전성현: 174517(2015), 윤한솔연출

작성자마실가|작성시간15.03.06|조회수189 목록 댓글 0

174517(2015)

전성현 작, 윤한솔 연출, 정보소극장 2015년 1월 23일부터 2월 1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 AYAF 2014 공연예술분야 창작자 부문에 대한 공모

- 연극분야 선정자 공동기획: ARKO가 주목하는 젊은 예술가 시리즈+

- 김명환, 이은서, 임지민, 윤혜숙, 전성현

* 퍼실리테이터: 지영관 오준석.

* 프로그래머: 전강희

* 그래픽디자인; 박재현

* 기획: 나희경

* 예매처: 대학로티켓닷컴

** 개똥벌레, 반야삼촌, 타이니슈퍼맨션, 작은문공장, 174517 중에서


*** *** * 관람

174517(2015)

전성현 작, 윤한솔 연출, 정보소극장, 2015, 01, 30(금) (2015년 1월 23일부터 2월 1일)

- 작 : 전성현(1984-)

- 연 출 : 윤한솔(1972-) 단국대 공연영화학부 교수, 그린피그 대표 역임

- 조연출 박현지,

- 음악 민경현 / 조명 최보윤 / 사진 박정근 / 오퍼레이터 김미현 / 인턴 최엄지

- 출 연 : 김호준, 김효영, 류세린, 박근영, 박하진, 이동영,

임정희, 조찬희, 정대용, 최경훈, 최지연, 황미영

우선 이 연극이 아우슈비츠와 프리모 레비와 전혀 상관없이 볼 필요가 있다. 댐을 두고 저쪽 바다와 물에 잠기는 이곳의 설정은 어디선가 본 듯한 설정인 듯 했다. 같은 것은 아니지만, 무대를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든다. 환경에 관한 영화로 알려진 제틀린(Benh Zeitlin, 1982-)감독의 󰡔남쪽 야생지의 짐승들(Beasts of the Southern Wild, 2012; Les Betes du sud sauvage)󰡕(드라마, 판타지, 미국 93분 2013 개봉)과 닮았다 영화는 삶의 터전에 대한 애정과 끈기있는 삶을 그릴려 했다. 그러나 이 연극은 열악하고 점점 나빠져 가는 삶의 영역인 이곳 수렁에서, 생명있는 자들로서 생존과 잔존에 관한 것이다. 그 영역에서 인간들 각각은 가식, 허구, 기만 속에서만 있을까? 나로서는 그 가운데에서도 가늘디가는 생명줄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끈을 연극에서 찾으려 했던 것은 왜일까? 다른 한편, 한 소설도 생각난다. 과학적 픽션으로 설정된 두 세계에 관한 소설로서 박민규(1968-)의 󰡔로드 킬(2012?)󰡕에서 설정도 두 대립 세계였다. 소설에서는 과학적 미래 세계가 있기는 한가? 그럼에도 그 세계를 추구하고 누리는 자들은 있다면, 그 인간들은 진솔한 인간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소설의 이 세상을, 탈출해야 할 세상으로 보았다. 연극은 경계 안에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는가, 즉 이 세상을 자폭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관람자에게 던지는가. 아니면 암흑에서도 빛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가.

이 세상에는 경계선이 분명한 대립 항으로 되어 있을까? 그 대립항의 다른 부분을 미지로 두고 한 부분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절망의 세상,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자들의 세상이라고. 현실에서 사는 자들이 이런 측면이 있지 않는가라고 말하고 싶은 작가는 연극이라기보다 생활한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 세상의 생활에서 구원의 대상을 갈망하면서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할까?

우리에게 대립 또는 모순의 이항대립으로 설정하는 것은 실재하는 현실의 삶의 어떤 한 부분의 반영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경계를 두는 것은 쉬운 설정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익숙하게 병들어 있는 장면일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북녘을 마구 재단하여 말씨로서 표현하면 그게 스크린의 영상처럼 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세상의 장면에서 익수한 것 같다. 저 뒤쪽을 비하하여 악마로서 설정하는 만큼이나, 연극대로 이쪽을 디스토피아로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설명하면 할수록, 저 앞 쪽에 어디엔가는 악마와 반대로 천사가 노는 꿈의 낙원이 있기나 한가라는 점이다. 현실은 우울하고 병들고 강박으로 편집증에 사로잡히게 한다. 이로부터 저 먼 다른 곳에 대한 막연한 기대, 그것으로부터 조작되는 환영, 기대로서 가져보는 환타지를 불러오게 하는 것이다. 의도 했을까? 아니면 이항 대립의 구조가 낳은 생산물일까?

관람자로서, 대본을 보지 못한 채, 무대 위의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 삶의 한 부분은 감옥, 수용소, 정신병동 등에서 일어날 듯 한 행동들을 보여주는데, 관객들은 조용하다. 가끔은 관객 속에 선동꾼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어 아쉬웠다. 관객들이 너무 조용하여 느낌이 가슴 속에 와 닿았다기 보다는, 저런 세상이 있기는 한가라는 작품의 낌새를 알아차리려고 숨소리조차 없는 노력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보다. 현 세상에서 공유하는 영역의 일부라는 느낌이 있기는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연출은 작은 조각배를 난바다에 계속 다시 띄우듯이, 에피소드들의 연쇄로 이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작가가 할 말이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좀 더 밀도 있는 방식, 단편 소설에서 한 부분의 심도 있는 묘사가 그 소설의 주제를 이끌고 변주들을 다양하게 하듯이, 이 극은 에피소드들의 변주곡처럼 다양한 모습의 나열만은 아닐 것이다. (48LNA)

극본은 무대에 올려지기 위한 글이다. 작가가 극본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자하는 생각으로 겹쳐지고 길어진 것 같은 글이 되었다. 극본이 아니라도 내용은 함축성도 필요하고 구조라는 틀도 필요할 것 같다. 일반 사람들은 에피소트들이라도, 여러 나열이 나름으로 다섯가지 이상으로 펼쳐지면 피곤하다. 두 가지로 하는 것은 대립 또는 반대로만 읽힐 수 있고 세 가지의 경우는 둘과 전혀 다른 하나를 세우는 데 좋은 방식이며, 여섯일 경우에는 셋의 중복을 다른 차원에서 펼쳐서 실제로는 셋의 이중화 또는 중첩화를 이루는 이다. 네가지로 하는 경우에서 시간상의 배열이라는 측면이 들어갈 수 있고, 다섯이라는 경우는 다양체로서 연대와 조화를 다룰 수 있는 방식이라 여겨진다. 작가는 짧은 시간동안의 무대위에서 무엇을 중점으로 어떤 틀로서 관객에게 인상을 남길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좀더 밀도 있게 다룬다면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48NKE)

*** 참조

작가는 이 제목이 프리모 레비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수형번호 174517이라 한다. 이 숫자 어디서(소수의 나열) 본 것 같아서 찾아보니 내가 착각한 것이다. 174517를 인수분해하면 7 x 107 x 233 이며, 약수로는 8개: 1, 7, 107, 233, 749, 1631, 24931, 174517가 있다. 이 수 이전의 소수는 174491이고 이후의 소수 174527이다. 이 후자의 소수에 관한 이야기가 어디에 있었던 것 같은데 우선 찾을 수 없다. 소수 174527은 이 숫자 174517과 매우 유사하다. 한 자리가 틀리니깐. 내가 숫자와 수에 관한 책들을 보고 있어서 과잉인 것 같다. (48LMJ)

- 프리모 레비(Primo Michele Levi, 1919-1987) 유태계 이탈리아인, 이탈리아 작가, 쇼하에서 생존한 가장유명인 중의 한 사람이다. 44년 2월에 아우슈비츠에서 유형되었다가, 1945년 붉은 군대에 의해 자유를 얻었다. 같이 끌려간 650명의 이탈리아 유태인 중 20여명만 살아 돌아왔다고 한다. 아우슈비츠에서 그의 강제수용소 번호가 174517이란 설이 있다. 그는 이탈리아 토리노(튀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처럼 토라를 알고 있으나, 유대교 종교인도 신앙자도 아니다. 1986년에 아우슈비츠 40년을 쓴 󰡔난파와 구조된 자들(I sommersi e i salvati, 1986; Les naufrages et les rescapes)󰡕을 출판했다. 출소 42년의 해 68세로, 전기 작가들이 말하기를, 그가 우울증(depression)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나로서는 69세의 라파르그와 그 부인(맑스의 딸)의 자살처럼 존엄사를 떠올렸다.] - 아우슈비츠 그의 증언록으로 󰡔한 사람이 있다면(Se questo e un uomo 1947: Si c'est un homme; If This Is a Man (1947) U.S.: Survival in Auschwitz)󰡕(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2007), 회상록으로 󰡔휴전(La tregua, 1963; La Treve)󰡕(휴전, 돌베개, 2010), 소설로는 󰡔지금 또는 언젠가(Se non ora, quando? 1984: Maintenant ou jamais)󰡕(지금이 아니면 언제?, 노마드북스, 2010), 짧은 이야기들로는 󰡔(Il sistema periodico, 1975; Le Systeme periodique󰡕(주기율표, 돌베개, 2007)가 있다.

- * 블렌(David Blaine: David Blaine White, 1973-) 미국 마술사. 그는 푸에르토리코 이탈리아 후손의 아버지와 러시아 유태계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아들이다. 그의 팔뚝에는 174517이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문신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Jews With Tattoos(문신을 지닌 유태인들)", Boston Globe, 15 August 2004>

(48LNA)


첨부파일 극전성현2015174517.hwp

첨부파일 름제틀린1404짐승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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