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고: F를 위한 이야기 (Das Urteil, 1913) [Le Verdict],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권혁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
in 카프카 단편집, pp. 1-26.
# 내용*****************
아주 화창한 어느 봄날 일요일 오전이었다. 젊은 상인인 게오르크 벤데만은 조잡하게 건축한 나지막한 집들 중의 하나인 이층집에 있는 자기 방에 앉아 있었는데 강을 따라 죽 늘어서 있는 집들은 높이와 색깔이 조금씩 다를 뿐 거의 같은 모양이었다. 방금 그는 외국에 있는 어릴 적 친구에게 보낼 편지를 다 쓰고 나서, 그것을 장난치듯 천천히 봉투에 넣어 봉했다. 강과 다리가 보였고, 연한 녹색을 띠고 있는 건너편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 게오르크는 이 친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친구는 고향 땅에서 이룬 성취에 만족하지 못하고 벌써 여러해 전에 러시아로 도망치듯 단호하게 가버렸다. (시작부분 3)
그리고 실제로 그는 이날 일요일 오전에 쓴 문장의 편지에서 친구에게 다음의 말로 자신의 약혼 사실을 알렸다.
가장 좋은 소식은 마지막에 알리려고 남겨 두었네. 사실 난 유복한 집안의 처녀인 프리다 브란덴펠트 양과 약혼을 했어. 처녀의 집안은 자네가 이곳을 떠나고 한참 후에야 이곳에 정착했으니 자네는 그 집안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할 걸세. 약혼녀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를 자네에게 할 기회가 또 있을 거야. 오늘은 다만 내가 꽤나 행복하다는 소식, 그리고 우리 둘의 관계에서 뭔가 변한 것이 있다면 자네는 이제 아주 평범한 친구 대신에 행복한 친구를 가지게 되었다는 소식으로 만족해 주게나. 그것 말고도 자네에게 진심으로 안부를 전하며, 다음 번에 직접 자네에게 편지를 쓰려고 하는 나의 약혼녀도 자네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 둘 걸세. 이는 자네 같은 독신자에게는 전혀 의미 없는 일은 아니겠지. 나는 자네가 여러 일 때문에 우리를 방문하기 힘들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네. 하지만 바로 내 결혼식이 자네에게 온갖 장애물을 일거에 허물어뜨릴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어찌 됐건 간에 이런 저런 배려는 그만두고 다만 자네가 생각하기에 좋을 대로 행하게. (9-10)
“네가 오늘 나를 찾아와서 네 친구에게 약혼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써 보내야 할지 물을 때, 내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를 거야. 하지만 그는 다 알고 있어, 이 멍청한 녀석아. 그 친구는 다 알고 있단 말이야! 네 녀석이 내게서 필기구를 앗아 가는 것을 잊는 바람에 난 그에게 편지를 썼단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벌써 몇 년째 오지 않고 있지.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너 자신보다 수백 배는 더 잘 알고 있어. 그는 내 편지는 오른 손에 든 채 눈앞에 대고 읽는 반면에 네 녀석의 편지는 왼손에 쥐고 읽지도 않고 버리고 있지!” (23-24) “그러니까 아버지는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었군요!” (25)
“그러니까 넌 이제야 너 말고도 또 무엇이 있는지를 알겠지. 지금까지는 넌 너 자신밖에 몰랐어! 너는 본래 순진무구한 아이였으나, 더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넌 악마 같은 인간이었던 거야! 그러니까 잘 알아들어라. 이제 내가 너에게 익사형을 선고하노라!” (25)
“맙소사!” / 하녀는 이렇게 소리치면서 앞치마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는 벌써 사지고 없었다. 그는 대문을 뛰쳐나와 차도에 나섰는데, 무엇인가에 의해 물가로 내몰렸다. 그는 마치 굶주린 사람이 양식을 움켜잡듯이 벌써 난간을 꽉 붙잡고 있었다. 소년 시절에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했던 탁월한 체조 선수였던 그는 몸을 흔들어 난간을 훌쩍 뛰어 넘었다. 그는 점점 힘이 빠져가는 손으로 여전히 난간을 꽉 잡고서 자신이 물에 떨어지는 소리를 손쉽게 덮어 줄 버스가 난간 기둥들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엿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 “사랑하는 부모님, 전 언제나 당신들을 사랑했습니다.” / 그러고는 아래로 몸을 떨어뜨렸다. / 그 순간 다리 위에서는 차량의 왕래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25-26, 마지막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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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간에 갈등. 아버지가 아들을 믿지 못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속여 왔고, 그리고 아버지의 최후를 보기 전에, 아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선고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단편에서 반전의 극화를 강하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순진무구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권력이 무섭게 느끼도록, 단편 속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잘 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저녁 식사도 따로 할 정도로..
노회한 현자는 재치있는 사기꾼에게 당하는 것 같지만, 그가 당한 만큼의 사기꾼의 기만을 되돌려 줄줄 안다는 투의 이야기가 데카메론 속에서 읽었던 것 같다.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1375)은 늙어서 힘없는 현자를 괴롭히면 한 방에 당하는 수가 있다는 것을 교훈으로 쓰려고 했을 것이다. 여기 부자 관계는 현자와 사기꾼이 아니지만, 작자는 노회한 아버지와 순진한 아들 사이를 마치 그런 투인 것처럼 그려 놓은 것 같다. 그런데 들뢰즈는 여기에도 외디푸스적인 것이 있다고 한다.
참조: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이진경, 동문선) 제4장 「표현의 구성요소」에서 카프카에게 있어서 이러한 문학적 기계, 글쓰기 기계 또는 표현 기계의 구성요소는 무엇인가? I. 편지들, II. 단편소설, III. 장편소설을 든다. I. 편지들에서, ../ 첫째, <편지는 리좀이고 망(網)이며 거미줄이다. 편지의 흡혈성, 편지에 고유한 흡혈성이 있다.>(76). .. “그리고 편지라는 주제를 맴돌고 있는 「선고」에서는 아버지의 상점에 남아 있는 언표행위의 주체와, 수신자지만 편지 밖에서는 아마도 존재하지 않는 잠재적 언표 주체로서 러이사의 친구가 등장한다.”(78) / 둘째, <소수적 장르로서 편지, 욕망으로서 편지, 편지의 욕망은 둘째 특징이다.>(78). .. / 셋째, <반면 셋째 특징은, 편지의 이러한 용법 내기 기능이 죄의식이 귀환하는 것을 즉각 막아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족 내지 부부의 오이디푸스적인 죄의식의 귀환. 나는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결혼할 수 있을까? 나는 괴물인가? “모든 결백성 속에 있는 악마적인 것.” 우리는 심지어 악마적인 경우에도 결백할 수 있을까? - 이것이 「선고」의 주제고, 카프카가 사랑하던 여인들과 관계에서 언제나 가지고 있던 감정이다.>(79-80) ..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는 이미 카프카에게는 봉쇄된 소송이고, 펠리체에게 보내는 편지는 모든 법정, 가족, 친구, 변호, 기소 등과 더불어 “호텔레서의 ‘소송’으로 되돌아 온다. 카프카는 이제 처름부터 이런 예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펠리체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선고」를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고」는 편지 기계가 글쓰는 이를 함정에 빠뜨릴 것이라는 거대한 공포를 담고 있다. 거기서 아버지는 러시아 친구라는 수령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음에 그는 그 친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이는 그 친구가 자신에게, 아버지 자신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썼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그리고 아들이 그를 배신했다는 것을 비난하기 위해서다. (편지의 흐름은 방향을 바꾸고, 반대로 되돌아 온다... ...) ”너의 야비한 작은 편지들......) (81-82) // <II 단편소설(nouvelle): 모든 단편 소설에 동물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카프카의] 단편 소설은 본질적으로 동물적이다. 카프카에 따르면 동물은 무엇보다도 단편 소설의 대상과 부합한다. 출구를 찾는 것. 탈주선을 그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편지는 이러한 대상[목적]에 충분치 못한데, 왜냐하면 악마, 악마와의 계약은 탈주선을 제공하지 못하고, 그와 반대로 스스로 함정으로 돌진하거나 우리를 함정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펠리체와의 서신 교환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선고」나 「변신」 같은 소설을 썼다. 그게 위험을 상상하기 위해서든, 위험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던 간에 말이다. 아니 차라리 단편 소설은 편지의 무한한 흐름보다도 더 닫혀 있고 치명적인 것이다. 편지는 아마도 그것이 실어나르는 피를 통해서 모든 기계를 가종시키는 발동기라고 할 것이다.>(85) .. 요컨대 동물 소설들은 표현기계의 일부로서 편지와는 다른 데, 이는 이것이 외견상의 운동 속에서 작동하는 것도, 두 가지 주제의 구별 속에서 작동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을 포착하고 현실 그 자체 속에서 쓰여지는 한, 동물 소설은 표현 기계의 일부로서 편지와는 다른 데, 이른 그것이 외견상의 운동 속에서 작동하는 것도, 두 가지 주체의 구별 속에서 작동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을 포착하고 현실 그 자체 속에서 쓰여지는 한, 동물 소설은 두 가지 극 내지 두 가지 대립적 현실의 긴장 속에 사로잡힌다. 동물-되기는 출구를 유효하게 보여주고 탈주선을 유효하게 그려 주지만 그것을 따라가거나 이용할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선고」는 오이디푸스적 이야기로 남아 있는데, 거기서 카프카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즉 {물에 빠져 죽으라는 아버지의 선고에 따라} 아들은 동물-되기조차 시도하지 않고 죽으러 가며, ‘친구가 있는’ 러시아를 향해 열린 자신{의 삶}을 전개할 능력도 없다.) (89-90)
(50Q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