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크리스트(Der Antichrist: Fluch auf das Christentum. 1888)(출판 1906) 해제
P. Champromis, Les Oeuvres I, Dictionnaire, PUF, 1992, p. 2008. (P.2190.)
샹프로미(Pierre Champromis, s.d.) 프랑스인으로 니체 탐구자. 독일 본에서(1952-1953) 그리고 하이델베르크에서(1954-) 가르쳤다..
-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쉰여섯)
‘예수의 심리학’이라는 표현은 19세기 말이 심리학의 시대라는 점을 상기하게 한다. 그런데 한 인격에 대한 심리학은 그 사람의 일생에 대한 평가가 아닐까? 그런데 그 사람을 바라보는 자들에 대한 심리학, “투사 심리학”이 아닐까 한다. 투사 심리학은 페티시즘을 닮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52NLH)
** 19세기 독일에서는 인민의 의사에 의해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것이 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지식인들이 자유와 평등을 인간(인격)에 적용하려는 쪽이 좌파라면, 국민이 국가(민족) 속에서 자유와 편안을 찾으려는 쪽이 우파일 것 같다. 이러한 나의 견해는 프랑스에서와 같은 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은 상층의 국가 권력과 이를 보좌하는 성직자를 단두대의 이슬로 보내본 경험이 있는데 비해, 독일은 그런 경험이 없으니 농노와 노예제를 합리화하고 관습화하며 길들이는 크리스트교에 대해 반대하는 쪽이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좌파이다. 그렇다고 프랑스 빨강이처럼 자꼬방과 같은 빨강이가 나오기 어렵다. 그래도 일차대전을 거치면서 빨강이가 나올 수 있었는데, 정권은 로자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 등 공산당원을 제거하였고, 이차 대전중에서 더욱 심하게 빨강이를 제거하여, 독일에서 자생적 공산당이 성립할 기반을 잃어버렸다. 니체는 19세기 후반의 사정에서 크리스트교를 비판하는 것으로 좌파의 성격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52NLH)
* 들뢰즈의 “안티외디푸스”는 자본주의 비판이다. 니체의 “안티크리스트”는 크리스트교 비판이다. 크리스트교가 삼각형의 상층에서 작동하는 것과 자본주의가 삼각형의 상층에서 작동하는 방식이 마찬가지이고, 비판과 공격의 방식을 달라야 할 것이다. 전자에는 도덕과 종교에 대한 비판을 해야 할 것이고, 후자에는 제국의 권력과 이를 옹호하는 언어학과 정신분석학을 비판해할 것이다. 삶의 터전에 대한 비판의 방식은 “천개의 고원”에서 전개될 것이다. (52NL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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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티크리스트(Der Antichrist: Fluch auf das Christentum. 1888)(출판 1906) 해제
이 작품은 크리스트교에 대한 극단적인 폭력의 공격이다. 이 공격에서 니체는 앞선 자기의 비판 모두들 모았다. 새로운 것, 그것은 예수의 심리학이다.
예수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사람들은, 니체는] 복음서들의 구절들을 따로 떼어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 복음서들 속에, 예수는 마치 공격적인 것처럼 나타난다. 또 복음서들은 크리스트교의 선전의 첨가물들이다. 사람들은 이때에 두 가지 반작용[반동]이 그를 특징화하고 있다는 것을 본다. 한편으로 어떠한 접촉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과도한 감성(une hypersensibilité)의 귀결이 있다. 즉 그것은 순수히 내적 세계 속에 발견된 은신처(le refuge)이다. 다른 한편으로 거기(과도한 감성)에서는 모든 저항적 노력이 지탱할 수 없다는 과도한 감성(une hypersensibilité)의 귀결이 있다. 그것은 사랑 속에서 발견된 지복(la béatitude)이다. 거기에서부터 사람들은 복음서를 이해한다. 그러면 이 “좋은 소식(bonne nouvelle)”[복음]은 무엇인가? 진실한 삶, 영원한 삶이 발견되었다. - 그 삶은 약속되지 않고, 그 삶은 저기에(là 여기에) 있고, 그 삶은 우리 안에 있는데, 이것이야 말로 사랑 속에서 삶이다. 거기에 들어가기 위하여, [누구나] 복음의 실천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한 측면에서] 구세주(le Sauver)는 자기의 삶과 죽음에 의하여 그 실천의 실례(實例)로 주어진다. “신앙에 의한 구원”도 “원죄”도 더 이상 없다: [이로써] 유대교 전체가 제거되었다. 다른 한 측면에서, 크리스트교의 “생경함들(les crudités)” 이외에 아무것도 예수에게 더 이상 낯설지(이상하지) 않다. 이런 생경함들이란, 마치 신은 온인격(une Personne, 위격)이 될 것이고, 하늘나라들의 온왕국(un Royaume)에는 사람들이 죽음 후에 들어가리라.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les mots, 말들)은 내적 실재성들을 지칭하기 위한 기호들일 뿐이다. 하늘나라들의 온왕국은 심장[신정]의 국가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상징주의자는 이해되지 못했고, 크리스트교의 역사는 이러한 몰이해의 역사이다. 니체는 어떻게 마치 시간 속에서 사건처럼 신의 왕국의 관념이, 영혼 불멸과 영혼의 심판의 관념이, 결국에는 대중들을 인도하는 신 앞에서 영혼들의 평등성의 관념이, 계속해서 나타났는지를 특별하게 제시한다.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 니체는 신에 대한 크리스트교의 개념을 비판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는대로, 신의 가장 높은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낮은 개념이며, 가장 도착적(perverti)인 개념이다. 삶의 변형(transfiguration)을 표상[재현]하는 대신에, 신은 삶(생)과 자연의 부정을 표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년 이래로, 사람들은 다른 신을 발명하지 못했고, 이 비천한 “단조로운 유일신”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 책의 마지막에, 니체는 크리스트교에 반대하여 진실한 논고(un réquisitoire, 비난)을 펼친다. 이 생명의 부정에 대해, 그는 생명을 그것의 완전으로 데려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마누의 법전을 대립시킨다. 계급들(les castes)의 분리는 자연적으로 여러 다른 인간 전형들을 완성되게 하도록 해준다. 크리스트교는 비슷한 조직화를 파괴시켰다; 고대의 직접적인 유산을 이렇게 우리에게 박탈한 것은 로마제국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혐오(l’aversion, 반감)를 인간 자신에게 주고, 또 신체와 정신의 성공작이었던 모든 것을 소모하는, 크리스트교는 인류성의 파괴(la corruption, 망가짐)이었다. (P. Champromis)
(2:26, 52NL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