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플라1403고르기
고르기아스(Gorgias ou Sur la rhetorique) Gorgias ē Peri rhētorikēs
Michel Narcy, in Les Oeuvres I, Dictionnaire, PUF, 1992, pp. 261-262. (P.2190.)
- 나르시(Michel Narcy 1942-) 프랑스 철학사가, 특히 고대철학. 국립과학연구소(CNRS: Le 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 소장이다.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ès 427-347; 80살)
# 등장인물
소크라테스(Socrate, Σωκράτης, 469-399; 70살)
고르기아스(Gorgias, Γοργίας) 수사학으로 살아가는 소피스트, 소크라테스 이전에 태어나 소크라테스 죽은 후에도 살았다. 108살을 살았다고들 한다. [때 맞는 시간(Kairos, καιρός)개념에 주목하였다고 한다].
폴로스(Polos, Πῶλος) 시실리아 출신 수사학자. 연설가. 리킴니오스(Licymnios de Chios)의 제자이며, 고르기아스의 신도(sectateur)이다.
카이레폰(Chéréphon, Χαιρεφῶν)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친구.
칼리클레스(Calliclès Καλλικλῆς) 고르기아스의 맞이한 주인. 그는 소피스트의 고객일 구성하는데 공공연하게 전형적 인물이다. 플라톤이 발명한 소피스트로서 보증할 만한 인물이며, 현존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소크라테스에 이의를 제기하는 그는 힘과 연약함을 대립시키는 귀족정 옹호자의 인물로 설정되었다.
# 내용
앞선 것보다 더 폭넓은 각각의 연속적인 세편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수사학의 본성에 관한 질문을 던지면서, 그는 다른 변론(Apologie)에서처럼, 자신의 변증법적 개념작업과 동시에 자신의 현존 선택을 옹호한다. 그의 요구에 따라서 고르기아스는 수사학의 찬사를 풀어 놓는다. 정의와 불의에 관한 담론들만의 수단으로 하는 그 기술은 기술의 보유자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큰 재산인 자유와 권력을 제공한다. 소크라테스는 설득하는 기술의 우두머리 하에서 이 찬사를 모은다. 그가 가치있게 만드는 모든 교육은 그러한 기술로부터 유래한다. 그 당시 고르기아스는 간단히 말한다. 그것은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믿게 하는 기술이라고, 여러 통속인들 앞에서 모든 지식보다 더 강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한다. 그는 덧붙여서 정당하게 사용할 줄 알게 하는데 필수적인 역능으로서 기술이며, 그것을 남용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부정하는데 있다. 이러한 것은 선량한 연설가는 무엇이 정의인지를 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고르기아스는 자기 제자의 과오를 위해서 혐의 없는 것으로 변호하면서, 그 대상을 인식하는데 정의와 불의의 상대적인 설득으로 면피하게 하는 만큼이나 모순되게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고르기아스의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제자 폴로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수사학을 정의해 줄 것을 독촉한다. 그가 습관적으로 공언하는 무지에 대해 주목하는 것을 젖혀두고, 소크라테스는 설명한다. 그로서는 수사학이란 요리술, 화장술, 궤변술과 더불어 아첨의 기술들과 같은 편이라 한다. 비례배분(la proportionnalité)으로 사용한 언어가 분할(la division)을 유비로(en analogie) 변형시킨다. 즉 궤변술은 입법과 관계는 화장술이 체육과 관계와 같고, 수사학과 정의 관계는 요리술과 의학과 관계와 같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제기하여 폴로스에 반대하는 이 주제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폴로스가 아첨하는 자의 비열함에 대하여 연설가의 역능을 대립시킨다. 연설가는 참주같은 이처럼, 도시국가에서 그와 닮은 선한 것을 벌받지 않고 행한다. 소크라테스가 대답하기를 정의에 반대로 행하는 것은 최악의 무능이라 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는 폴로스의 사법적인 논증에 대해 변증법적 논증을 대립시킨다. 전자는 증인들의 축적에 의해 진행하는데 비해, 후자는 한 대담자의 동의를 증거로서 삼는다. 일단 폴로스가 엄격한 변증법적 대화의 규칙에 굴복당하고 난 뒤에, 소크라테스는 이중 역설을 증명한다. 불의를 범하기보다 불의에 당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고, 불의를 범했다면 그 벌을 피하기보다 벌을 당하는 것이 더 낫다 것이다. 불의에 가까이 하지 않는 대부분의 선한 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따라서 수사학이 무용하다. 그것의 유용성은 마땅히 받아야 될 벌은 받는 것이거나 또는 그의 적은 그 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당연하고 후자는 무용하다]
그러한 삶의 인간적 방식을 소크라테스는 멀리하고, 이에 고르기아스의 주인인 칼리클레스가 놀라게 된다. 따라서 그는, 그에게 도시국가에서 권력의 추구와 철학 사이에서 선택을 담판으로 결정하기를 제안하면서, 논쟁을 다시 시작한다. 칼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 속에 있는 자연과 법 사이에 궤변적인 혼동을 거부하면서, 자연적인 정의가 무엇인지를 진술한다. 가장 강한 자는 가장 약한 자를 명령한다는 것이며, 강한 것은 수많은 욕망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만족 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칼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를 불러서 설득을 위하여 변증법적 반박을 하게 하며, 소크라테스는 상징들의 도움으로 무절제한 자의 끊임없는 가난을 저 넘어서 지혜의 만족을 고양시킨다. 그러나 칼리클레스는 이 그림에 무감각하게 남아 있다.
소크라테스는 변증법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는 쾌락과 선의 동일성을 반박하면서, 그는 새로이 영혼을 위해서 처벌받지 않기보다 벌 받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확립한다. [벩송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베1장 앞부분도 이와 같은 논의가 있다, 양심의 가책 문제에서] 칼리클레스는 고르기아스의 동의에서만 토론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그는 이때 계속해서 나가기를 거부한다. 소크라테스도 고르기아스도 미완성으로 논증을 남겨두기를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가상적 대화로 만족하게 될 것이다. 그자신이 질문들을 하고서 참석자의 조절 하에서 대답을 한다.
이리하여 그는 하나의 체계적인 일체를 묶어서 자기 주제를 매듭지을 수 있다. 선과 행복의 동일성으로부터, 불의 범할 처지에 놓인 권력보다 정의를 선호해야 한다고 하고 심지어는 정의가 권력의 목적이라고 이어간다. 도시국가에 봉사하는 것은 그 도시의 욕망들을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에게 정의를 욕망하게 하는 것이라 한다. 이러한 정치적 기술에 즉 유일한 진솔한 기술에, 오직 그 기술 만에 소크라테스가 열중한 것이다. 그 진실한 위험은 죽음이 아니라 불의를 범했던 자들이 저 세상에서 예약된 처벌들이다. 또한 가장 설득력있는 마지막 논증은 소크라테스의 반박되지 않았던 주제들과 일치하는 영혼의 심판의 신화이다. 제일 첫째 선은 정의롭게 되는 것이고, 둘째 선은, 마땅한 수고를 감당하면서 정의를 생성하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 수사학의 유일한 유용성이 있다. (47OK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