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원인성의 법칙을 믿는 심리학적 기원들에 관한 노트(Note sur les origines psychologiques de notre croyance à la loi de causalité, 1900)」
- 벩송(1859-1941), in Melanges, PUF, 1972, pp. 419-428 (P.1693)
- Bibliothèque du Congrès International de Philosophie, Paris, Colin, I, Philosophie générale et Métaphysique, 1900, pp. 1-15, B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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벩송을 읽으면 읽을수록 흥미로운 점은 개념과 관념으로 철학하는 주지주의 방식과 달리, 마음(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것을 각자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생성론 또는 형이상학을 주제로 삼았다는 점이다. 왜 그는 일반화되어 있고 상식화되어 있는 개념과 관념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밀쳐두고, 영혼이 만들고 있는 이미지들을 어떻게 현실에서 드러낼 수 있는 가를 탐구한다. 그렇다고 마음이 마음대로 만들어내거나 내부에서 자유자재로 끌어내는 공상과 망상과 달리, 내부의 실재성이 신체라는 현실에서 드러나는 이미지(image)를 상상작업(l’immagination)하여 구현하고 체화하는 것이다. 얼핏 구현화와 체화라고 하면 크리스트교의 종교성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나, 그의 구현화는 신체를 통한 행위(도덕적, 미학적)과 행위(대상 실천적, 조작적)를 밖에 있는 사물에다가 실행하기 이전에 자기 몸에 실행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그의 종교성이 불교에 더 가깝다고 느낀다.
박홍규선생님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강의에서 플라톤이 우주의 형상을 만들려고 하는 우주형상론(la cosmologie)이 아니라, 우주의 생성과정을 설명하는 우주발생론(la cosmogonie)라고 강조하였다. 그럼에도 나로서는 플라톤이 우주발생론이라기보다 4개의 원소의 형상들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적 방식과 유사하다고 느꼈다. 후자는 종류가 많고 구체적 원자들을 가지고 우주론을 설명한다면, 전자는 수학적 도형을 통하여 추상적으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고 여겼다. 근세철학에서 전자는 경험론으로 후자는 합리론으로 되듯이. 그럼에도 데모크리토스의 내용이 역사적으로 사라졌지만 그의 형상론은 조립적이라고 느끼며, 플라톤의 형상론은 기하하적 구성(조형)으로 느껴진다. 이 조형에서 조립과는 다른 생성론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박선생님의 벩송 창조적 진화 3장 강독에서, 벩송의 자연의 생성에 대한 설명이 우주발생론이라고 하고, 원인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한다. 벩송의 생명의 생성은 제1장 이론적 인 측면과 제2장 진화론적 사례에서 보듯이 형상론이 아니라 발생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원인론(aitiologie)을 누누이 설명하였는데, 나로서는, 당시에 변화의 원인성(causalité)을 인과론(causalité)로 읽고 있어서인지 와 닿지 않았다. 게다가 원인론과 원인성의 의미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원인론이 아이티올로지(aitiologie, 원인학)가 같은 의미일 것이라고 요즘에서야(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을 읽고) 느낀다. 그리고 박선생님은 티마이오스편에서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를, 마치 철학의 시초에서 아르케처럼, 원인 또는 기원으로 읽으신 것 같다. 게다가 그 원인 수동성이 아니라 능동성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그 능동성을 벩송의 설명에서 발생론으로 옮겨 놓으면, 생명의 발생론이 될 것이며, 그 발생에는 원인의 자발성이 있어야 하기에, 수동성이 아니라 능동성을 강조하였던 것 같다.
자유의지(libre arbitre)로 번역되었던 임의 재량(임의자유)은 주지주의자의 것이거나 원자론적 형성론자들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임이자유의 개념이 개입하지 않으면 원자론이든 관념연합론이든, 형상론에서 다자의 조화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유재량으로 자연과 물질에 개입하고 또는 조작하여 그럴듯한 생명체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신화를 믿는 시대나 할 이야기일 것이다.
자연은 자기로서 자기에 의해 생산, 생장, 창조의 길을 간다. 주지주의자가 하듯이 조립과 조작에는 필연성이 있고, 그 필연성에 우연의 개입처럼, 또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임의재량이 자유처럼 보인다. 임의 재량은 식민지 지배의 방식과 같다. 그러면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 자연의 자기 생성과 방향이 여럿이라는 점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다양체이다. 자연은 자기의 여러 길들을 제시하고 있고 그 제시된 길은 필연적이다. 그럼에도 여러 제시된 길들 사이에 다른 길도 여럿있다. 그런 길을 새로이만드로 필연적으로 나가갈 때 자유가 성립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길을 만드는 이가 보살, 신비주의자이다.
자연이 여러 길을 만들고 있는데, 스피노자의 말처럼 수많은 속성들 중에 두 가지 속성만을 안다고 하는 데, 그것은 오성의 현재화 재현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벩송은 현재화와 재현화의 길말고도 다른 길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런 길을 파악하는 것은 주지주의자들의 오성, 지성, 이성의 방식이 아니라, 본능과 직관, 교감과 공명을 통하는 길도 있다고 확신한다. 왜 주지주의자들의 방식으로 개념과 관념의 기능적인 측면에서 인과관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뻵송이 자연 또는 질료에서 생성하는 능력(권능)적인 측면에서 “원인”(cause, aitia)을 다루려고 했는지 하는 이유가 돋보인다. 즉 이유, 원인이 능동적이고, 권능적이라 그 방향과 경향이 거의 무한정(apeiron) 한데, 원인과 결과로서 한정(peras)하는 것이 (경험적, 귀납적) 관념연합론과 원자론의 오류라는 것이다. 원인은 물체의 충돌과 운동에서 다루는 방식도 아니라, 내 속에 무엇인 또는 본질이 있다고 끌어내는 것도 아니다. 이 둘에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형이상학이 원인에서 출발하는 데는 전제된 조건들과 본질과 같은 원본이 없다. 경험적으로 과정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총체적 경험은 지속으로서 기억과 생명이라 할 것이다. 사회공동체에서 이런 기억과 생명을 실현하는 것은 어렵고 드물다. 그런 삶을 산 이는 싯달다, 프란체스코, 브뤼노 같은 이들 일 것이다. 이런 방식의 철학적 이론을 발명한 이는 플로티노스일 것이다. (2:23, 55QMD)
벩송(마흔하나): 1900년
8월 3일 “국제 철학자 대회”, 분과(섹션) 발표: 철학일반과 형이상학: 이 분과는 9시에 열렸는데 벩송이 주재하였다. 발표자들 중에 브링슈비끄, 르 르화가 있었다.
8월 4일 오후 3시, 파리에서 국제 철학자 대회(Congrès international de Philosophie)에서 「우리가 원인성의 법칙을 믿는 심리학적 기원들에 관한 노트(Note sur les origines psychologiques de notre croyance a la loi de causalite)」 발표,
- 이때 사회자는 제네바 대학 교수와 총장을 지낸, 구르(Jean-Jacques Gourd, 1850-1909) 였다.
- 질문자들로서,
아르스(Christian Aars, s.d.), de Christiana [남아공화국 출신]
샤르티에/알랭(Émile-Auguste Chartier, 필명 Alain, 1868-1951) 당시(서른둘) 로리앙 고등학교 철학교수, 알랭은 자기 스승 쥘 라뇨를 환기 시켰다.
그리보(Griveau, s.d.) [생리심리학자] 심장박동의 이상적 중간 제시 [확률론이거나 가우스 곡선의 준안정상태]
바르트(Barth, s.d.) le docteur, de Leipzig. 그는 리엘(Aloysius Riehl/Alois Riehl: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 네오칸트주의)의 사례를 들어 벩송고 유사점을 찾으려 했으나, 벩송 결론은 같을지라도 다루는 과정은 다르다고 한다.
이분과의 다음 발표자는 루이 베버(Louis Weber, s.d.)이며, 사회과학 자유학교 교수
「진화관념, 이 관념의 확실성의 문제 속에서(L'idée d'évolution dans ses rapports avec le problème de la certitude」라는 제목이다.
벩송의 지적에 대한 발표자 베버의 응답을 기록한 것이 있다. 아마도 다른 이들의 질문은 이 잡문집에는 수록하지 않고, 벩송과 베버의 응답만을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43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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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원인성(인과성)의 법칙을 믿는 심리학적 기원들에 관한 노트(Note sur les origines psychologiques de notre croyance à la loi de causalité, 1900)」
우리가 원인성이란 법칙을 믿는 기원은 어떤 것인가? 이런 종류의 문제가 철학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였던 이후에, 심리학자들에 의해서도 인식이론가들에 의해서 마찬가지로 점점 더 내팽겨 쳐졌다. (419)
심리학은 실험적 길에 단호하게 함여하고 실험작업이 파악한 현상들 속에서 지적활동성만을 연구한다. .. 인식이론은 칸트의 예를 모방하면서 시간 속에서 원리의 기원보다 오히려 권리들의 의미와 가치에 전념하고 있다. (419) [전자는 관념연합으로 후자는 범주의 형식으로 원인의 문제를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서 필연적 또는 타당성의 근거만을 보려고 한다.]
사람들은 선천적(a priori) 인식이 개인에게 단번에 주어진 것인지를, 그 인식이 그에게 점진적으로 구성되는지를 전혀 결정하지 못한다. 후천적(a posteriori) 과 선천적(a priori)은 여기서 본성과 가치의 차이를 지칭하는 것이지, 시간적으로 앞섬(antériorité) 또는 뒤짐(postériorité)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419)
[이 논문에서] 우리의 의도는 .. 어떻게 원인성(la loi de causalité)의 법칙이 구성되며, 어떻게 공통지성에게 소개되는가? 이다. (420)
첫째 해결은 현상들의 외적 관찰로부터원인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생겨나게 하는데 있다. .. 계속들의 규칙성은 끝내는 인간 정신에게 습관을 창조하게 한다. .. 또는 사람들이 내적 관계를 말할 것이다. .. 나로서는 한 순간, 유전이 관념들과 원리들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 420) [이러한 것은 습관에 속한다.]
내가 말하건데, 이론적 모든 반대들에 앞서서, 사실상 단순한 의문이 제기된다. 의문이란 순수 경험론이 임의적으로 해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420)
의문은, 우리의 시각적 경험이 우리에게 진심으로 현상들의 규칙적인 계속들을 제공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예로서 눈에 보이는 당구공의 두 개의 부딪힘의 귀결 ... 불로서 냄비의 물이 끓는다는 귀결.. (420-421) [물리학적, 열역학적 관계의 원인 귀결]
우리는 [앞뒤]현상들이 규칙적으로 계속되는 것을 본다(voyons)는 것이다. 거의 항상, 시각적인 우리 경험 속에서, 원인성과 연관은 보여진(vu) 현상을 가정된(supposé) 현상에 연결하는 것이다. .. 우리는 말하기를, 동물은 자기 운동들의 원인이며, 돌의 무게는 돌의 낙하의 원인이라고 등등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원인은 결과에 앞서있다고 생각하는가? 원인은 또한 결과 동시적일 것이다. (421) [고대인들이 운동을 다루면서 앞과 뒤의 관계가 아니라 성질로 다룬 것은 동시적으로 성질상 차이로 판단한 것이고, 근세인들은 상대적으로 차이를 규정한 것이다.]
이제 이런 경험론에 반대하여 과학에서 응용되는 원인관계와 정신에게 자발적으로 소개되는 관계 사이에 구별을 확립하는 것이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당연히 일어나지] .. 그러면 경험론의 잘못은 – 우리의 단언이 역설적으로 나타난고 하더라도 – 인과성의 법칙의 일반적 믿음을 너무 과도하게 지적 작업화하는(intellectualiser) 것은 아닐까? 또한 그것을 생명과 연관속에서가 아니라 과학과 연관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421)
둘째 이론은 내적인삶에서, 즉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동하는 힘을 다루는 인식론에서, 원인이란 용어의 기원을 찾으려 하는데 있다. .. 이런 주제는 멘느 드 비랑(Maine de Biran, 1766-1824)의 주제이다. (421)
[그에게서] 잘못이든 이유이든 간에, 우리는 우리의식으로부터 우리의 임의자유의 긍정을 유지한다고 믿고 있다. 또한 잘못이든 이유이든 간에, 우리는 우리의지 속에서 그리고 우리운동들 안에서 적어도 어느 정도로는 우연적이고 비결정적인 결과들을 본다. (422) [내적 의식에는 필연적 인과관계가 없는 것이 더 많다. 원인관계가 전혀 아님에도 일어나는 슬픔, 그 감정의 감화작용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자신의 단순하고 순수한 관찰 속에서 길어올린 것은 결정적인[규정적인] 원인성의 용어가 아니라 자유로운 원인성 용어이다. 우리가 이 용어를 외적 세계에 적용할 때, 이런 용어가 감당하는 변신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리고 만일 용어가 세계에서 변형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용어를 세계로[변신으로] 옮겨놓는데 도입되는가? (422)
우리에게 마지막 길이 열려있는 것 같다. 우리는 오성의 구성작업 속에서 외적 또는 내적인 전체 경험의 밖에서 원인성(인과성)의 법칙의 기원과 토대를 찾을 것이다. 경험에 앞서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 있다. 다양한 현상들 그 위에 정신의 종합적 노력이 있다. (422)
그러나 심리학이 우리에게 설명해야할 것은 정확하게 이런 특별한 형식이 아닌가? .. 통일성의 근본적 요청이 부여해야 하는 것은 그[경험의] 일체 속에서 우주에게 이다. 오성의 구성적 통일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오성의 중심을 이동시키는 데로 귀착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어떠한 철학도 이런 종류의 결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결론이 원인성(인과성)의 법칙의 심리학적 기원의 질문을 전혀 해결하지 못하다고 예상해야만 한다. 그 결론이 과학이지 공통 경험이 아니다. 그 결론이, 왜 우리가 자연을 깊이 탐구함에 따라 우리가 보다 가지적인 이런 본성을 발견하는지를, 이해하게 해준다. (422-423)
결국, 경험을 통일화하는 모든 가능한 방식들 가운데서, 우리가 원인의 어떤 표상작용으로부터 행한 자연적 선택(le choix naturel)을 설명하는 것만이 남는다. 또한 우리가 원인성(인과성)의 법칙을 가지고 만드는 자연적 응용을 설명하는 것만이 남는다. (423)
우리가 다양한 가설들을 재빨리 나열하는 것은 무용하지 않을 것이다. ... 그러한 열거는 과정의 유일하고 특별한 특성을 우리에게 예감하게 한다. 그 과정에 의해, 원인성(인과성)의 법칙을 믿는 실천적 믿음이 구성된다. (423)
우선사람들은 이 과정이 경험적이라고, 그럼에도 다른 경험들과 전혀 공통적이지 않은 하나의 경험이 여기서 중요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매 순간들 마다로부터 경험이어야 하고, 생명에 즉 본질적으로 생명에 공연적이어야만 한다. 습관 일반은 간헐적으로 행사된다. .. 그것은 숨쉬기와 같은 연속적으로 활동하는 습관이다. (423) [경험에서 인과로서 내적 습관화 된 것, 숨쉬기]
둘째로원인적 관계는 밖의 현상들을 그것들 사이에 결합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원인적 관계를 확립하는 한에서, 우리는 인과성이 다시 묶어놓은 사실들의 외부에그대로 있는 것 같지 않다. .. 우리는 원인성을 내부적으로 느낀 이행[경과], 즉 결심에서 행동으로 이행과 비교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 원인과 결과 사이에 개입되는 것이며, 원인에게 우리 노력의 어떤 것(적어도 자유와 우연)을 부여한다. (423-424)
따라서 원인적 관계는 일상적 경험의 대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경험의 원초적 형식 하에서 그 관계는 원인이라 선언된 사실과 결과로서 간주된 사실사이에서 그러한 본성(자연)적 사실들에게 적용된다. 어떻게 이런 이중적 조건이 채워지게 될 것인가?
내가 즉시 주제를 정식화 하건데, 주제는 다양한 난점들을 제거하는 것 같다. :원인성(인과성)법칙의 우리 믿음에 대한 획득[습득]은 단지 우리 시각적 인상들의 진행적[점진적] 배열(좌표화)와 하나를 이룬다.
[경험에서 시각의 역할과 재인식: 시각에서 신체의 감각운동으로]
어린이의 눈이 빛에서 눈 뜰(열려질) 때, 눈은 서로 이어지는 혼재된 또는 서로 변신되는 색깔들과 형태들을 지각한다. 조금씩 시각작용은 촉각을 동반한다. .. 시각작용은 접촉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그에게 형태와 색깔은 저항 상으로(en résistance)외적으로 서로 이어지는 것 같다. (424)
그러나 여기서 수동적 기대[기다림]도, 다른 습관들에 비교할 수 있는 하나의 습관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연합한 현상들은 우리가 외부에 두는 현상들이 더 이상 아니다. 예를 들어 두 개의 색깔이 시각(la vison)의 장에서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일어난다. (424)
이런 계속이 빈번하다고 할지라도, 게속은 우리에게서, 필연적 관계보다 아직 덜한, 역동적 관계(une relation dynamique)의 형태를 취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연합된 현상들은 마치 첫째현상이 둘째현상을 이끌기 위하여, 한 작용이 –나는 우리의행동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 개입되는 것과 같은, 현상들이다. (424)
그러나 한 시각적 인상에서 촉각적 인상으로 항상적 이어짐은 [신체의] 운동 습관의 창조 없이 가지 않는다. 우리의 신경체계는 운동 메카니즘을 - 중추를 매개로해서 지각작용의 기관들을 연결하는 메카니즘을 - 구축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한번 장착된 이런 메카니즘들은 행동으로 들어가는 경향성을 갖는다. (425) [신체의 습관기억은 이미 잘 구축되고 갖추어진 메카니즘이다.]
우리가 앞선 작업에서 제시했는데, 시각적 형태의 실천적 재인식은 운동경향성에 의해서 특히 이루어 졌다. 그리고 운동 경향성의 습득은 감각기관의 교육의 중요한 대상이다. (425)
그러면, 시각적 인상이 우리가 원인이라고 부른 것이라면, 신체의 감각-운동 활동성은 결과를 원인에 연결하는 것인데, 그 결과 원인에서 결과로 역동적 관계가, 또한 원인에 의한 결과의 필연적 결정론이, 심지어 사유되기에 앞서서, 여기서 우리에 의해 느껴지고 체험된다. (425-426) [재인식의 과정은 재현의 과정보다 먼저이다: 사유되기 앞서서 체험된 것, 경험된 것, 생명의 과정 속에 이미 만들어진 것이다.]
[신체의 활동에서 원인과 결과: ...]
그러나 대상의 시각적 형식과 우리 신체와 그것의 우발적 접촉 사이에 안정된 관계가 일단 확립되면, 어떻게 우리는 시각적 형태와 물체들 일반과 그것의 가능한 접촉 사이에 동일한 관계를 보존할 것인가? (426)
대상은 우리 신체를 접촉했고, 그리고 대상은 우리의 운동하는 활동성을 자극했고 일단 장착된 메카니즘을 매개로 해서 기대되고 필연적인 반작용을 불러왔다. 원인성(인과성)의 법칙은, 그것의 단순성과 그것의 기원적 순진성에서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 법칙은 말하기를 대상(tout objet) 전체가 원인(une cause)이다. (426)
이리하여 대상들 또는 외적 현상들 사이에 인과성의 모든 명백한 성격들이 설명된다. 한편으로 원인은 결과에 앞서고, 다른 한편으로 작용하는 힘은 그것이 생산하는 결과에 앞선다. .. 한편으로 원인과 결과의 연관이, 우리자아와 그것이 집행하는 운동들의 연관에, 참여한다. .. 다른한편 우리의 [신체]운동의 활동성이, 촉각적 인상에서 시각적 인상으로 규칙적 상응에 의해서, 규칙적으로 기능하는 메가니즘 구축, 즉 작업화 방식으로 향하는 전체 방향을 잡는다. 이것이 규칙성이며 예견불가능이 아니다. 이것이 필연이며 자유가 아니다. .. 이런 가설은 왜 우리가 외적 인과성에게 상반된 특성들을 부여하는 가이며, 어떻게 공통지성 속에서 대립적 입장들이 서로 화해하는가를 설명한다. (426)
나는 여기서 문제 해결을 소묘하는데 그친다. 이제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해결의 주의를 다양한 점들에 근거해야만 할 것이다. 내가 거기에 대해 두 가지 원리만을 알릴 것이다. (427) [아래, 하나는 감관, 다른 하나는 주의에 관해서 이다.]
사람들은 우선주목해야 할 것이다. 모든 감관 교육은 우리 속에서 인과성의 믿음을 심ㄹ을 것이라는 것이다. .. 맹인도 노력의 점진적 배열화에 의해 인과성의 법칙에 도달할 것이다. .. 습관 덕분에 그는 한 대상을 만지면서 연이어 대상을 재인식한다. (427)
우리는 동일한 두 계열을 재발견할 것이다. 1) [신체를 통해서 들어오는] 수동적 감각 인상들, 2) [신체의] 습관에서 나온 운동경향성. .. 이 두 계열은 서로 서로 배열화[좌표화]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결과 인과성의 법칙을 믿는 실천적 믿음이 나온다. (427)
둘째 주의를 고정시켜야만 한다.우리가 여기서 발생을 행하기를 시도했던 실천적 믿음은 인간과 고등동물에게 공통적 믿음이며, 사유된 믿음이라기보다 살아온[체험된]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을 반성하는 것은 인간에, 즉 인간 만에게 속한다. (427)
조금씩 과학은 원인성에 갇혀있었던 역동적 요소들의 인과성을 비우게 할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연관은,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원리와 귀결의 연관에, 더 좋게 말하면, 두 변항들이 서로 서로 기능할 때 두 변 항을 연결하는 연관에, 이렇게 가까워질 것이다. 그리고 인과성은 점점더 엄격한 필연성을 함축할 것이고, 더욱더 수학적 필연성을 함축할 것이다. ]
화할 (427-428)
이리하여 사람들은, 감각적으로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신체에 의한 살아온 필연성으로부터 정신에 의한 사유의 필연성으로 이행한다.경험론의 잘못(자주 또한 반대자들도)은 두 필연성 사이에 자리잡는 것이고, 생명과 과학 사이에 중간참(mi-chemin)에 위치하는 것이다. (428)
이로부터 사유의 필연성과 살아온 필연성이라는 필연성의 두 형식들을 서로 고려하는 경험론의 무능이 나온다. 주지주의자는 너무나 과도하여 둘째 필연성(살아온 필연성)을 설명할 수 없다. 주지주의자는 첫째(사유 필연성)을 기초로 하기에는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우리는 추정하기를, 주지주의자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시작해야 하고, 사람들이 이어서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428)
(7:14, 55Q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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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6 비랑(Pierre Maine de Biran, Marie François Pierre Gontier de Biran, 1766-1824) 철학자, 수학자, 심리학의 선구자. 여기서도 멘드비랑의 반
성적 방법은 벩송의 심층적 방법이 아니다.
1844 리엘(Aloysius Riehl/Alois Riehl, 1844-1924), 오스트리아 출신 네오칸트주의자. 그라쯔, 프라이부르크, 베를린에서 교수. 그는 철학이 ‘세계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각 비판을 가르치는’ 것이라 한다.
1850 구르(Jean-Jacques Gourd, 1850-1909) 스위스 목사이며 철학자. 제네바 대학 신학부 학생을 거쳐서, 그리고 라이프찌히, 베를린, 튀빙겐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부목사를 지냈다가, 제네바대학 철학과 교수, 제네바 대학 총장을 지냈다(1896 à 1898).
1851 라뇨(Jules Lagneau, 1851-1894) 프랑스 철학자. 지각작용과 인식의 조건들을 탐문으며, 심리학적으로 반성적 방식을 발전시켰다.
?-? 베버(Louis Weber, s.d.), 1900년 파리 세계철학자대회 발표자. 발표문 「L'idée d'évolution dans ses rapports avec le problème de la certitude」 - Bibliothèque du Congrès International de Philosophie 1:435-457. 1900. 저술로서 Le Rythme du progrès. Etude sociologique, 1913.
(7:31, 55QM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