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벩송

쟝겔레비치: 앙리 벩송(1959), 제1장 유기적 총체성

작성자마실가|작성시간16.02.03|조회수177 목록 댓글 0

책쟝켈레1959앙리베16L02

 

앙리 벩송(Henri Bergson, 1959)

쟝겔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 PUF, 증보판 1959(초 1931), P. 300.

 

 

서문 Avant-Propre 1

제1장 유기적[생체적] 총체성 Totalités organiques 5

“기운 내, 만일 너가 나를 찾았더라면,

너는 나를 탐구하지 않았을 거니.”

- 파스칼(Pacal), 「예수의 불가사의」

벩송주의는 탐구의 이론들이 탐구 자체와 뒤섞여있는 매우 드문 철학들 중의 한 철학이다. 탐구자체에서는 인식형이상학들, 예비교육들, 방법들을 생성하는 이런 종류의 반사적 이중화작업[이원론]을 배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벩송의 사유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스피노자주의에 대해 말해졌던 것을 반복할 수 있다. 벩송 사유에서 스피노자주의는 실체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사물들에 관한 성찰과 구별되는 방법이 아니라는 점이고, 그 방법은 오히려 성찰에 내재해 있다는 점이다. 그 방법은 어떤 정도로는 성찰에 대한 일반적 진행방식을 묘사하고 있다. 벩송은 많은 검토를 거쳐서 이데올로기적인 환영들(les fantômes 유령들)의 무상함(vanité)에 관해 이전부터 강조했다. 이 환영들이 사유와 사실들 사이에 영속적으로 끼어들고 있다고, 또 인식을 매개로 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초월적 방법(la méthode transcendante)이 조밀한 결합을 풀어헤치려 오지 않더라도, 이 생명 철학은 구불구불한 곡선과 결합했으리라. 더 좋게 말하자면, 그의 “방법”은 사유를 사물들의 두께 속으로 이끄는 운동의 선(線) 자체가 되었으리라. 슐레겔(Friedrich von Schlegel, fr. Frédéric Schlegel, 1772-1829)이 심도 있게 말했듯이, 생명의 사상은[삶의 사유는] 전혀 예비교육 없이도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생명은 단지 생명만을 가정하기 때문이고, 생명의 리듬을 채택하는 생명의 사유는 방법론적 세심함에 당황하지 않고서 실재적인 것에 똑바로 달려가기 때문이다. 학술계의 소심한 추상화작업과 구체적 철학의 관대함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 영원히 예비적(서설적) 작업인데, 또는 같은 말이지만, 차후에 서설의 적용[응용]이 될 것이거나 또는 서설로부터 연역될 것이거나 [하는] 절대적으로 장차[다음]의 어떤 것에 상대적 작업이다. 반면에 후자는 매 순간에 그 자체로서 현재 있게 된다. 전자의 작업들은, 그 작업들이 크게 벌어진 빈틈에 의해 분리된 채 남아있는 그 어떤 미래에 귀착한다. 반대로 후자는 현실적으로 증명하게, 또 시각적으로 명증하게 전개된다. 이 후자는 어떠한 초월적 심판권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후자]은 자체 속에 자기 법칙과 자기 상벌제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방법이 이미 진실한 앎이다. 그리고 개념적인 학설의 연역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정신적 진보가 전개됨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에 의해 생겨나게 된다. 이것은 결국에는 정신적 진보의 풍모(la physionimie)와 내적 리듬 일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벩송주의의 출발점을(회프딩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인식의 비판에서 또는 중심이 직관의 관념인 인식형이상학(認識形而上學 la gnoséologie)에서 찾지 말자. 이러한 표현 양식은, 벩송 사유로부터 단지 정식화된 체계만을 즉 어떤 이즘(isme)(이런 종류로서 “직관주의”)만을 간직하면서, 해석자로 하여금 완성된 벩송주의(le bergsonisme accompli) 앞에 스스로 자리 잡도록 강제하는 것인데, 그 사유의 생성과정에 참여하고 또 그것의 의미에 침투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벩송이 회프딩(Harald Høffding, 1843-1931)에게 보낸 답신에서, 게다가 벩송은 아주 분명하게 그리고 아마도 그의 모든 이유들을 말함이 없이도, 또한 회고적 표현(une exposition rétrospective)에 대해 항의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기를, 자기 학설의 생생한 중심은 직관보다 오히려 지속(la Durée)이라고 한다. 직관의 형이상학으로서, 벩송주의는 단지 여러 체계들 중의 한 체계일 뿐이다. 그러나 지속의 경험은 그것의 진실하고 내재적인 스타일을 규정한다. 그 경험 속에서 우리는 “무한히 단순한” 이미지를 재발견한다. 그 이이미지에 대하여 「철학적 직관(l'intuition philosophique, 1911)」(PM)에서 문제 삼고 있으며, 그 이미지는 진실로 벩송 명상의 생생한 근원이다. 예지적 노력, 자유, 목적성, 영웅주의라는 네 가지 전형적인 문제들을 통하여 이 이미지의 연속적인 구현작업을 따르기에 앞서서, 우리는, 영혼의 사정들 속에서 온전히 벩송의 수행(l'ascétique, 고행, 금욕주의)을 주문했던 “원시적 사실(le fait primitif)” 재발견해 보자.

 

제1절 전체와 요소들 Le tout et les éléments 6

이 수행론(cette ascétique)은 물질적 실재성들의 유일한 도식 위에서 성공했던 방법에 대해(우리는 메카니즘(les mécanismes, 기계주의)이라 말할 것이다), 표현의 남용일지 모르지만 정신적(spirituelles) - 심적이면서도 생명적인(우리는 이것들을 요약하여 유기체주의(les organismes, 생체주의)이라 부른다) - 실재성들(les réalité)에 필연적으로 귀착된다. 생명의 질서에서처럼 정신의 질서에서도 근본적이고 진실한 사실, 그것은 “지속한다(durer)”는 사실이다. 또는 같은 말이지만, 기억 같은(mnémique, [mnémonique]) 성질은, 독일 진화생물학자인 제몬(Richard Semon, 1859-1918)에서처럼 대규모 생명의 기억전체에서 고려된다면, 생명의 매 순간에 오직 우리 경험들의 영속성(la perpétuité)을 보증한다. 사람들이 말하듯이, 기억은 파생적이고 지체된 기능이 아니다. 독립적 기관이나 분류와 분배의 방법적 능력이 생성되기에 앞서, 기억은 자체적인 내적 지속의 정신적 모습(le visage, 얼굴)과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영혼의 비망록 또는 달력처럼 다루고자 고집하는데, 이 때에 기억은 단순히 다음 것을 표현한다: 우리의 인격은 아무것도 상실되지 않는 세계이며, 무한히 자존심강한 영역(un milieu)인데, 여기에서 최소한의 진동이 스며들면서도 이어지는 [고유한] 음색들(des sonorités, 공명성)을 각성시킨다. 기억은 경험들 자체로 잔존하는 나의 경험들의 아주 원시적인 완강한 고집(cette obstination)일 뿐이다. 기억은 수많은 내용들을 서로가 서로를 가로질러 연속하게 하는 어떤 것[그 무엇]이다. 그것의 집합[일체]은 매 순간마다 우리의 내적 인격의 현실적 상태를 형성한다. 그러나 연속성이란 무한성을 의미하며, 전체에서 전체로의 내재성은 이런 방식으로 정신의 법칙이 된다. 그렇다고 기억은 추억들을 글자 그대로 쌓아두는 것이나 측적하는 것이 아니다. 음악학자인 포레-프레미에(Philippe Fauré-Frémiet, 1889-1954)가 그것을 명철하게 제시했듯이, 기억은 소유(un avoir)의 증가이라기보다 오히려 능력(un pouvoir)의 훈련이며, 과거의 등록이라기보다 오히려 과거의 능동적 “재창조”(recréation) 또는 실현화이다. 벩송 자신도, [기억을] 공간으로 변신하는 것을 매우 적대시 하여, 두뇌를 이미지의 저장고(un réceptacle, 물탱크)라고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또 이미지들을 용기(容器, un contenant) 속에 내용물들로 생각하기조차 거부하였다. 확실히 이것은 시간자체를 가지고 추억들의 저장고(un récipient, 그릇)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 그런데 “보존”(conservation)은 양어장(un réservoir)처럼 공간적 이미지이다. 그래도 진실한 것은, 과거는 우리의 현실적 존재를 감촉할 수 없는 것으로 성질을 부여하고, 그리고 과거는 매순간에 환기할 수 있는데, 심지어는 보존[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 되부름(rappel, 불러옴)으로 나올 수 있는 무매개적 자료로써 단순히 결론짓거나, 또 심지어는 과거가 우리자체에서(en nous) 문자 그대로 잔존하고 있지도 않고, 또 생성의 무의식 속에서(dans l'inconscient) 잠들어있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벩송의 시간은 자체로 있음(inesse)도 안에-존재(être-dans)도 아니고, 잠재적인 보존도 저장도 없는 역설적 잠복(cette latence paradoxale)이지 아닐까? 벩송의 시간은, 아무것도 잔존하지 않고 또 잔존하는 과거가 잔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재현될 수 없는 잔존이 아닌가? 그 시간은 창조적 보존 즉 저장고 없는 보존이 아닌가? 이런 신중함을 수단으로 해서, 사람들은 󰡔시론󰡕과 더불어 지속을 눈사태에서 커가는 눈덩이(la boule de naige)에 비교할 권리를 갖는다. 상기의 불연속이란 것이 우리에게 생성의 연속성을 시간에 암시하고자하는 것을 얼마나 가로막았던가!

- 따라서 이제 첫째 대립으로써 생체주의들의 생명과 기계주의들의 현존 사이에 대립이 있다. 물질적 체계[물질계]란, 사람들이 그것을 생각하는 매 순간에 있는 그 무엇[사물]의 전체이며, 또 그 체계는 그 무엇(cela, 그것)일 뿐이다. 지속하고 있지 않는 물질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히 순수하다(pur). 왜냐하면 물질계는 자기 현재에게 색깔을 입히고 현상태로 유지하게 하는 어떠한 과거도 소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벩송은 그의 주제에 맞게 라이프니츠의 표현을, 즉 순간적 정신(mens momentanea)을 상기한다. 이것은 플라톤이 󰡔필레보스(Philèbe)󰡕에서 굴(les huitres)과 메두사(les méduses)에게 부여한 순간적인 의식이 아닌가? 조약돌은 겉보기에 “낡아서(vieiller)” 변형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 조약돌의 계속적인 상태들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외적으로 남아있을 것인데, 그 상태의 이전(transtion)이 느껴지지 않을 지라도, 그 어떤 이전[조약돌 상태의 변이]도 지난 상태를 새로운 상태 속에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유명한 두 시구를 환언하여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데, 즉 지속없는 사물들은 사물들이 [현재] 있는 그 무엇 그대로만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항상 그리고 총체적으로 그 자체들로 있는 물질적 사물들의 경우이다. 반대로 정신적 실재성은 감촉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한 전통들을 운반[전달]하면서, 영속적으로 암시들[암묵적 내용들]을 짐지고 있다. 이 내용들의 각각은, 각각이 가정하는 은연중의 암시들과 축적된 경험들로 된 그 모든 것에 의해, 말하자면 거룩하고 심오하다. 가장 미미한 인간적 감동도 보물이다. 사람들은 이 보물을 셀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다. 왜냐하면 이 감동은 수많은 인격의 경험들이 조요하게 침전시켰던, 마치 퇴적층들처럼, 연속적인 과거를 증거 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글자그대로 [분할된] 선분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위치화[자리매김]은 지역 속임수(leurre, 미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들은 저장고 속에 식료품들을 쌓아 놓는 것처럼 축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명철함(조명)에는 풍부하게 영속적인 변모가 있다.

이 첫째 대립은, 이 대립을 완전하게 할 이것과는 다른 대립을 만든다. 이런 이유로, 정신의 지속을 구성하기 위하여 보존적인 기억에는 보조물이 필요하다. 이 유일한 시간적 “내재성”(immanence)은 생체주의과 기계주의를 환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화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현재 속에 과거의 진실한 함축은 아닐지라도, 사람들이 과거의 어떤 현전(출현, 출석)을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거대한 계속에다가 어떤 공현존(coexsitence, 공연성)과 같은 내재성이 무매개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정신적인 것은 여러 가지 수많은 고려의 차원에서 늘어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 훨씬 더 “탄성적(élastiqeue)”이다. 다시 말하면, 만일 그 정신적인 것이 자기(정신)의 극장의 면모들을 등록하고 영속적으로 반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또한 매순간에 자기의 고유한 총체성을 재구성하는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외래적 경험들(les expérience “adventices” 우연히 얻은)을 보존했고,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균열의 흔적이나 깊은 다수성의 흔적도 지니지 않는 것처럼, 그것은 이 경험들을 동화시키고 소화시키고 총체화 하였다. 그리고 이 경험들은, 마치 정신적인 것이 경험들을 변모시키듯이, 정신적인 것을 변모시켰다. 이렇게 모든 정신적 실재성은 자연적으로 어떤 총체화하는 탁월성[덕성]을 갖는다. 이 총체화의 덕성은 정신적 실재성에 수입된 모든 변양들을 삼켜버리게 하고, 그리고 매 발자국마다 자기의 총체적 생체주의[유기주의]를, 그러나 연속적으로 변형된 생체주의를, 재구성한다. 그리고 이 총체화작업이 매순간에 정신적 유기체주의의 모든 요소들에 근거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생명의 내용물들만이 시간 속에서 그것들 자체로 잔존될 뿐만 아니라, 이 내용들이 말하자면 그것들 자체로 다시 살아가는데, 즉 부분적으로는 같은 시기의 내용물들 각각 속에서,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이것들이 표현하는 정신적 인격 속에서 이다. 이 상호 내재성에 대해 우리 오성은 공포를 갖는데, 반대로 우리 예술들은 그것을 모방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어떠한 예술도 음악만큼 성공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틀림없이 음악은 다성음악(la polyphonie) 덕분에, 영혼의 상태들을 내밀한 이해를 표현하는 어떤 다른 예술보다 더 좋은 수단을 가지고 있다. 다성음악은 중첩된 여러 목소리들을 평행하게 인도해줄 수 있지 않는가? 이 여러 목소리는 동시에 표현되고 있으며, 또 이것들 사이에 분명한 구별들을 지우기도 하고 심지어는 대립 됨에도 불구하고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펠레아스와 멜리장드(Pelléas et Mélisande 1902)󰡕의 불가사의한 서곡을 상기하는데, 이 곡에서 18박자를 시작 하자마자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는 골로(Golaud 아버지가 다른 펠레아스 형)의 주제음과 멜리장드(Mélisande)의 주제음을 대결시키고 있는데, 따라서 두 인물의 숙명들 사이에 메여있는 비극적 결합(통합)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가 󰡔파우스트 교향곡(La Faust-Symphonie, 1857)󰡕에서 가장 대립된 감동들을 서로 양조하듯이 혼합하는 그 경탄할 말한 미묘함을 어떻게 찬탄하지 않겠는가? 즉 대립이란, 첫 악장에서 파우스트의 사랑과 파우스트의 사색적 불안, 둘째 악장에서 파우스트의 사랑과 마가레테(Margarete, fr. Marguerite)의 사랑 사이에서. 주제음들은 대치되고, 뒤섞이고, 상호 전염되기도 하며, 이 주제음들의 각각이 다른 모든 주제음들의 순서표시(la signature)를 지닌다. 매순간에 내적 생명은 이렇게 만들어 진다. 이 내적생명은 우리에게는 연결없이 보이는 경험들의 역설적인 대위법들(en contrepoints)로 연합한다. 따라서 경험들의 각각은 전체 인격에 근거하여 증거한다. 스토아학자들이 파라독스처럼 제안했던 “총체적 혼합”(mélange total, κράσις δι' όλων)은 연속적으로 살아온 실재성이 아닌가?

정신적 사물들[영혼자체, 자연자체]의 분명하고도 실로 모방할 수 없는 특성은 - 생체주의, 즉 예술작품 또는 영혼 상태 - 따라서 항상 충만(complètes)되어 있는 것이고, 항상 완전하게 자기 자체에 충분하게 되어 있다[자족이다]. 부분과 전체의 구별은 무기물적인(타성적) 물체의 세계에서만 의미 있을 뿐이다. 이 타성적 물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바깥으로만 존속하면서, 항상 보다 광대한 일체 집합의 부분들로써 항상 고려될 수 있고, 이 일체 집합과 더불어서 외적 관계를, 즉 지형상의 관계를 유지한다. 반대로 생명의 우주는 개별자들의 우주이며, “섬과 같은” 총체성들의 우주이며, 단어의 고유한 의미에서 걸작들(chefs-d'oeuvre)의 우주이다. 이 걸작들은, 플로티노스의 가지성들(les intelligibles)[예지성 intellection, Logos]처럼, 총체성의 부분들이며, 다시 말하면, 개별자들이 부분이 될 것 같은 세계의 완전한 총체를 각각이 표현한다. 이처럼 전체는 셸링이 말하듯이 디오니소스(Dionysos, Διώνυσος)일 뿐이다. 그리고 플로티노스: 판타 파사이(πάντα πᾶσαι), 모든 영혼들은 모든 사물들이다! 이것은 본능의 연구가 처음으로 우리에게 증명할 무엇일 것이다. 사람들이 절반의 감정 또는 감각의 조각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듯이, 절단된 또는 분수화된 본능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본능은 단순히 질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주제는 본능이 옷 입고 있는 변이들 중의 각각의 변이에서 전적으로 현재이다. 이 변이 각각에서[각 생물종에서] 독창적인 주제는 둥글둥글하게 되고, 사적 영역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어 있다[개체성을 이루게 된다]. 원시적 물체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전체와 부분 사이에 점진적인 이전들을 인정한다. 그리고 과학의 역할들 중의 하나는,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전이들이 교묘하게 스스로 준비되는 것이고 또 그것들을 가지고 개별자들의 독창성은 사라지는 아름다운 계통들(belles généalogies, 계보들)을 만든다는 것이다. 생물학자인 비알르똥(Louis Marius Vialleton, 1859-1929)은, 자신의 불연속들의 첨예한 의미가 변형론(transformisme)의 부정으로 끌어가는데, 이 점에 관해서 벩송의 직관들을 확정한다. 모든 종은 이 원리로부터 마땅히 살아갈 수 있게 태어났음에 틀림없다. 상호관계들은 유기체에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단번에 충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거기에는 기관들의 초안들도 기능들의 골격들도 없다. 이로써 그것은 우리의 계통들을 완전하게 할 숙명을 지닌 허구적 매개들이다. 실제로 모든 형상[형식]은 필연적으로 규정된다. 왜냐하면 이 형상은 존속하기 때문이며, 기능은 단번에 기관을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곳에서, 비알르똥은 최소한의 단세포 유기체가 이미 완전하다고, 그리고 엄격히 말하면 “기본적인”인 개체는 없다고 제시하였다. 유기체는 완전히 전체이거나, 또는 유기체는 완전한 전체가 아니다. 이것은 순수하고 정신적인 추억과 운동하는 추억의 구별이 훨씬 더 분명하게 제시될 것이라는 것이다. 순수 추억은 즉시로 완전하다. 습관은 반복의 효과에 의해 조금씩 구성되는 반면에, 진실한 추억은, 미네르바(Minerve, gr. Ἀθηνᾶ)처럼 성인을 태어나게 한다. 반복은 그 진실한 추억을 장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추억은 매 순간마다 규정되고 자치적이기 때문이다. 추억의 본질은 의식에 의해 현실적으로 경험되고 살아왔던 것이다. 따라서 추억은 순간적으로 모든 정신을 채우고 있고, 또 추억은 단번에 유기체화 되고 독립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결과로 순수과거는, 비아르똥의 이론 속에서 돌발적인 폭발들과 경험의 단절들에 의해 생물학적 종들이 솟아나는 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우리 속에서 가끔 솟아난다.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처럼, 침공과 솟아남이, 즉 돌발적 난입, 갑작스런 변환이 있다. 따라서 정신적 사물들은 항한 전부이다. 이제 이런 이유가 있다: 틀림없이 물질적 파편들에는 생명의 파편들이 전혀 대응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단 구절의 조각들에게는 관념들의 조각들에 전혀 대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아주 닮지 않은 두 개의 텍스트들 사이에서 예견해보자. 하나는 정신적 텍스트인데, 이들의 모든 파편들은 총체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물질적 텍스트인데, 이것들의 모든 파편은 파편적이다.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어떠한 평행론이라도, 병치하는 선들의 어떠한 치환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시는 항상 시 자체의 고유한 텍스트 저넘어에 있다.

영혼의 사물들의 이런 특별성(particularité)[특이성(singularité)]은 우리들로부터 완전히 역설절인 방법을 요청하러 갈 것이다. 사람들은, 충만의 철학인 벨송주의가 ‘전부아니면무’의 절대적이고 총체적인 법칙을 인정한다고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이 법칙은 스토아주의에 따르면, 유용한 법칙으로써, 미덕과 악덕의, 지혜와 광기의, ... 대안(l'alternative, 진퇴양난)이다. 벩송은 햄릿(Hamlet)의 최후통첩, 즉 사느냐 죽느냐!(être ou être pas!)라는 이 급한 최후통첩(l'ultimatum abrupt)을 더 이상 가슴에 품지 않았다. 진실이라는 것, 그것은 갑작스런 변이[돌연변이]는 단지 질적인 새로움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새로움에, 경험론(le génétisme)[l'empirisme과 같은 뜻]의 단계적 증가 또는 감소들이 미래에도 결코 이르지 못한다. 라브뤼에르(Jean de La Bruyère, 1645-1696)가 말하기를, 사랑은 사랑에 의해서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정신은 정신에 의해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환원할 수 없는 감정의 특수성과 독창성 속에서, 우리가 처음부터 그 감정을 완전히 우리에 의해 주어지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연역의 길 위에서 그 감정을 만날 어떤 기회(chance 운)도 잡지 못한다. “환원주의”에 대립하여, 즉 환원하는 방식에 또는 연역하는 방식에 대립하여, 벩송은 각 경험과 각 문제는 따로 그리고 그것들 자체로, 다시 말하면 그것들[경험과 문제]이 독자적인 것처럼 사유되기를 바랐다. 따라서 사람들은 살아있는 실재성들이 다른 어떤 실재성들로부터 이런 실재성들을 생겨나게 할, 즉 지성으로부터 본능을, 습관으로부터 추억을, 동물로부터 인간을, 배아적 감동으로부터 완전한 감동을 생겨나게 할,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 결과로 우리가 곧 보게 될 것이지만, 이해한다는 작동(l'acte)은 단어들로부터 의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의미로부터 의미로 가며, 부분으로부터 전체로가 아니라 전체로부터 전체로 간다. 정신은 정신만을 가정한다. 왜냐하면 정신은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의미 그 자체가 아니라면, 의미에 앞서서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의미는 전체이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의 표현(l'Expression‎)에 대한 분석적 학설은 아마도 이점에 관해서 사람들이 벩송의 내재주의에 대해 그렇게 믿는 것과 매우 다르지 않으며, 라이프니츠는 정신적인 것의 이 특수성을 심도있게 표현했다. 그가 실체에 있어서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 할지라도 기계(une machine)와 생명 있는 것(le vivant)에 차이가 있다는 것, 그것은 기계의 부분은 진실로 그리고 순수하게 부분(une partie)이라는 것이며, 반면에 유기체의 부분도 또한 유기체이며, 마찬가지로 이 부분의 부분도 또한 유기체이며 무한히 계속하여도 마찬가지이다. 무한대 크기는 무한소 크기만큼이나 이런 점에서 동일성의 원리와 보존의 원리에 대하여 거짓으로 기록된다. 왜냐하면 모나드는 대우주의 소우주 표현인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주의는 그것의 최소한의 소우주적 요소들에까지도 또한 유기적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자석(磁石)은 무한히 자기력을 띠고 있어서 이런 경우에 .. [그처럼] 될 것 같다. 그러나 유기체주의는 특별나게 힘든 생명을 갖도다! 유기체주의는 그 최소한의 부분들 속에서 총체적으로 남아있는데[기여하는데] 비해, 기계는 그것에 속한 요소들의 합력(une résultante)일 경우에만 총체적이다. 그러한 것은 정신에게도 동일하게 가치를 지닌다. 물질적 체계들에서 따로 떨어진 조각은 그 자체로 이미 내재적이고 자치적인 모든 의미가 박탈되었다. 그 조각(la pièce)은 진실로 단순한 부품인(partielle) 것이다. 왜냐하면 전체 모두는 보조적인 다른 조각들에 상대적이기 때문이고, 그리고 이 관계가 정확하게 자기 존재근거를 다 써버린다. 그러나 생명의 재질로부터 잘려나간 감동, 추억, 의욕은 순간적으로 정신적 영역[환경]을 재생하려고 하고, 완전한 우주로 배치된다. 어떤 허구도 어떤 분석도 이것들의 의미 충만함과 일종의 정신적 무거움[중후함]을 이것들에게서 상실하게 할 수 없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생명의 작품 속에서 충만과 중후함을 예감한다. 왜냐하면, 내적 세계의 총체성은, 말하자면 정신성의 후광으로 우리의 보다 소박한 몸짓들을 감싸고 있으면서, 바로 여기 현재하고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적 사물들의 내재성은 이중 얼굴을 제공하는데, 그러나 사람들은 근원은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의 현실적 모든 경험들이 가정의 분위기를 갖는다면, 각각의 경험은 우리 자아 전체를 표현할 수 있고 재현할 수 있다면, 이 경험들은 기억에 의해 공통의 배아에 묶여 있게 된다. 경험들이 이 배아의 에너지들과 경향들을 자유롭게 했다. 우리의 지속은 다수성으로 개화되어서[확 펼쳐지면서] 두께가 두꺼워 진다. 말하자면 다성음이 된다. 깊은 친족성[심층의 연관]이 분리된 경험들을 다시 묶는다. 정신적 실재성들은 그 자체들에서 이중적으로 내재한다. 왜냐하면, 실재성은 영속되기 때문이며 또한 경험들은 총체화되기 때문이다. 기계주의들은 이것들 자체의 바깥에 남아있다. 하나의 기계주의도 그 넘어서 어떤 것을 포함하지 못한다. 이 부분들의 열거는[나열한다는 것은] 기계주의의 실재성 전체를 문자 그대로 다 써버린다. 엄격히 말하자면 완전한 기계와 더불어 기만이라는 것은 결코 없으며, 놀라움도 결코 없다. 감퇴(쇠약)들 중의 어떠한 것도, 또한 어느 정도에서는 생명의 표시[서명]인 기적들 중의 어떠한 것도 결코 없다. 완전한 기계는, 지성없는 본능처럼, 기계가 허용하는 모든 것을, 그러나 기계가 허용하는 것만을 제공한다. 기계의 시각적 실재성은 우리 지성이 권리상 도달 하는 어떤 것의 모두를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게 더 이상 요구한다는 것이 헛되다는 것을 안다. 기계주의는 알아맞히고 예견할 어떠한 것도, 탐구할 어떠한 것도, 내버려 두지 않는다. 기계주의는 새로운 해결책들을 창조하지 않는다. 그것은 문제들 보다 앞서 가지 않는다. 그것은 발명적이지 않다. 기계주의가 만들어졌던 상황들이 있고, 기계주의가 만들어지지 않았던 다른 상황들도 있다. 이게 전부다. 반대로 생명의 유창함(l'éloquence)은 특히 묵설법들(réticences, 망설임들)로 이루어진다. 생명이 약간의 작은 부분일 때, 우리는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어수선하게 느낀다. 생체주의들은 깊이[심층]들이 있다. 이것들은 말하자면 그것들 자체보다 저넘어 있다. 또는 더 좋게 말하자면 그것들은 자신들이 [현재] 있는 무엇이 아니라 자신들이 [현재] 있지 않은 무엇이다. 그것은 그것들 자체와는 다른 무엇이며, 그것들 자체보다 더 많은 무엇이다. 연속적으로 비존재(non-être)인 생성은 존재로서 제시됨이 없이 지낼 것이며, 변질이 생성, 다시 말하면 동일자가 다른 것이 되는 생성은 따라서 이 심층의 자연적 차원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위대한 영혼들의 불가사의는 이 영혼들이 우리를 슬쩍 가로채는 짓을 전혀 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가? 또한 우리가 주의깊게 또 신중하게 이 영혼들에게 질문할 수 있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들이 우리에게 말한 것에 관해 우리는 확신한다. 심층에서 따라서 이런 유기체화 작업은, 즉 지속이라는 특징을 지닌 거대한 무한성은, 모든 논리를 회피하는 생명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데, 왜냐하면 무모순이 그 자체적으로 지적 순수성과 단순성의 요청를 대변하기 때문이고, 또한 이 요청은, 시간의 제거에 따라, 혼재된 존재들의 분리에 따라, 현존들의 증류(la distillation, 추출)에 맞게 자연적으로 정신을 초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혼의 사정에 맞는 밀도에 의해 필연적이 된 방법이 전적으로 “비합리적”(irrationnelle) 일 수 있다는 것을 이미 막연하게 예감하고 있다. 그래서 철학이란 플라톤에서처럼 대우주의 요약적인 광경(파노라마)이 더 이상 아니고, 오히려 지하로[내부로] 파고드는 것이고, 특별한 실재성들에 대해 강도있는 깊은 탐구이다. (49LLD)

 

제2절, 회고적 시각과 전미래의 신기루 L'optique rétrospective et le mirage du futur antérieur

이제 우리는 지적 시각의, 다시 말하면 진행방식의, 구성적 착각을 정의해야 한다. 여기서 진행방식이란 기계적 현존들을 위하여 방법들의 내부에 응용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문제들이 나타나는 그 앞에서 지성의 자연적 반작용(la réaction, 반동)은 이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지성의 대상들을 열거하는 데 있다. 또는 데카르트가 말하듯이 의문점들을 분할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런 자세(l'attitude)는 발견의 원초적인 계기에 상응한다. 그리고 그런 것이 가능한 도처에서 발견적 수법의 사유는 교훈적인 사유로 전환하는데 있다. 만일 말할 수 있다면, 도처에서 그[교훈적] 사유가 스스로 학설이 되는 데 있다. 그리고 난점들의 분석(l'analyse)은 탐구되어야 할 지식에 상대적인 것처럼, 이렇게 존재들의 재구성은 발견되었던 과학에 상대적이다. 구성된 과학을 소유하는 정신은 가장 잘 재구성하는 자세들 만을 본능적으로 채택하고, 그리고 많은 것에서 적은 것으로 가는 전시의 순서에 따라 획득된 운동의 고갈(épuisement)에까지 이완된다. 그런데 설명(l'explication)의 고민은 교훈적인 사상[사유]을 겉으로는 적은 것에서 많은 것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진행하는 데로 이끌려는 것이다. 그러나 학설적 종합은 완성된 과학을 조종하는 경제적 메카니즘들에 착각적 반증(un démenti illusoire)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체계가 출발하는 그리고 체계가 재구성하는 요소들은, 체계가 회복하려는 체 하는 전체와 관련하여 진실한 빼기(minus)를 심리학적으로 재현하지 못한다. 전체의 부분들(les parties)이 진실로 부분들이 되기 위하여, 부분들이 몫들(partielle, 할당)로서 생각되기 위하여, 그 귀결로서 부분들의 전체화가 진실한 심리학적 확대를 표상할 수 있기 위하여, 사유의 부풀기(la dilatation), 즉 종합의 운동에서 부분들의 선행성(l'antériorité)은 이상적이 될 뿐만 아니라 연대기적[시대순, 시간순]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선행성은 혼합물(le composé, 구성된 것)을 절대적으로 앞서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분화된 부분들은 당연히 전체보다 더 추상적이며, 이 부분들은 완성된 과학의 내부에서 앞선 분석으로부터 그 부분 자체들이 결과로 나온다. 오히려, 이것은 구체적 “부분들”이라기보다 문제제기의 방식의 과정에서 반성적으로 원초적 총체성의 추출된, 정교화 된, 도출된, “요소들”(des éléments)이다. 사람들은 총체성들의 공간적 분할(une division)에 의해 부분들을 얻는다. 이 부분들은 합산하는데 복잡화 과정을 재생산한다. 그러나 요소들은 지적이고 정화하는 분석의, 즉 사물들의 논리적 접속들을 따르는 분석의, 용어이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학생에게 말하기를 “살아있는 어떤 것을 인식하고 묘사하고자 원하는 자는 정신을 추방하면서 시작한다. 그러면, 정신은 그에게 한움큼의 손바닥 안에 조작들로 남는다. 애석하게도 정신 연결만 부족할 뿐이다.” 이리하여 가장 많은 가능적인 우리 사유는 단순하고 순수하고 동질적인 요소들로 주어지는 데, 이는 요소들에 관해 전적으로 고요하게 작업하기 위해서 이다. 왜냐하면 요소들의 형식적인 순수성에도 불구하고, 요소들은 앞선 긴 노력을 재현한다. 그리고 이런 것 자체는 조합하는 기술의 외연적이고 관성적[타성적] 특징을 설명한다. 이 기술의 방식으로 사유는 이 요소들을 모은다. 요소들의 무리짓기[떼거리]에 앞서 인도하는 종합의 운동은 환원적 분석을 완성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알져진 총체성을 회복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지성은 지성이 요소들로부터 출발하는(part des éléments, ἀπό στοιχεῖων) 점에서 요소들의 사고(la pensée des éléments)이며, 또한 지성은 자기 편한대로 거기에 있을 뿐이고, 거기에서 사물들을 요소적인 부분들로, 개념들로 또는 불가분의 원자들로 쪼가리를 내기에 성공했을 때, 지성은 요소들에게 수를 부풀리는 것 이상의 것을 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스펜서의 진화론 또는 관념연합론은 이렇게 진행해 나간다. 이 진화론은 전체를 뒤늦게 나온 인위적 요소들을 가지고 재구성하는 것이며, 구체적 사물들 대신에 「형이상학 입문」에서 실재성의 “지적 등가물”이라 불렸던 것을 대체 한다. 이것이 걱정거리(ce souci, 고민)인데, “원자론적” 심리학들이, 즉 꽁디악(Étienne Condillac, 1714-1780)의 심리학 또는 뗀(Hippolyte Taine, 1828-1893)의 심리학이, 아직까지도 드러낸 걱정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체계들도 그러하다. 그 체계들의 도안은 총체성을 단순한 요소들로, 즉 변형된 감각들 또는 신경 충격들로, 재구성한 것이다. 또한 이상이란 것(l'idéal)도 그러하다. 그 이상은 구체적 자연학에 대립하며, 또한 성질들과 개별자들을 존중하는 자연학에도 대립한다. 이 자연학에 따르면, 사물들의 분절들(les syllables, 음절들)은 동질적 요소들(στοιχεῖα)로 환원된다. 그래서 전 자연은 거창한 “범씨앗상점”(une panspermie)일 것이며, 다시 말하면 모든 면에서 닮은 씨앗들(les semences)의 상점일 것이다. 여기에는 물체들을 재구성하기 위하여 다 써버려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과학은 정신을 위한 휴식하는 놀이가 되어버릴 것이다. 철학에 관해서 말하자면, 철학은 자기 차례가 되어서, 조합기술(Arts combinatoria), 즉 이미 알려진 요소들의 재미있는 배열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요소들는 전체보다 더 단순(simple)하다고, 그리고 이 단순함은 권리상으로도 사실상으로도 복잡함 보다 앞서 있다고, 응답할 것이다. 이 편견에 대해 벩송은, 다른 문제를 끌어내면서, 단순성의 두 가지 종류의 구별을 대립시킨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이 두 종류의 단순성을 논리적 단순성과 시간 순서의 단순성이라 부를 것이다. 첫째 의미에서 조건화 작업은 분명히 조건 지워진 것보다 더 단순하며, 원리는 귀결들 보다, 이유는 결과들보다 단순하다. 우리는 요소는 전체보다 더 단순하다는 것을 덧붙일 것이다. 따라서 단순에서 복잡으로 가는 관계는 본래 이상적 관계이다. 그러나 둘째의 의미에서 단순성의 유일한 기준은 체험된 경험들의 역사적 순서에서 우선성이라는 것이며,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체험된 내재적 자족(autarkie, αὐτάρκεια)이지, 논리적 또는 초월적 자족이 아니라고 것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의미에서 타성[관성]의 관념은 자발성의 관념보다 더 단순하다고, 마치 스펜서의 기계주의에서 동질성이 이질성보다 더 “오랜(ancien)” 것이고, 또 추상은 구체보다 더 “오랜” 것이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역동주의와 더불어서 둘째 의미에서 말하자면, 자발성은 보다 더 단순한데, 왜냐하면 내부에서(du dedans)

(그리고 벩송에게서는 이것보다 더 상위의 심급(une instance)은 없다) 우리는 자유로서 무매개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인식한다. 따라서 우리가 주석을 달것인데, 재능적 단순성이자 학문적 단순성인 구체적 단순성, 말하자면 계보학적 단순성은 체험된 삶의 단순성이다. 추상적 단순성은 사람들이 실증적 사실들과 멀어지면서 얻어지는 단순성이다. 추상적 단순성은 실재적인 것이 빈약하며, 벌거벗겨져서, 제복만 입은 것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아주 자연적이고 거의 무의미한 운동의 통일성 아래에서 복잡성과 다수성에 대해 무한한 약속들을 감추고 있다. 이것은 추상적 단순성처럼 따분하지도 않고, 색깔 없지도 않으며, 향기 없지도 않다. 추상적 단순성은, 현상적으로 또 눈으로 보기에 달리 말하면 표면만을 장악하는 지성의 시각적 부분에서 우리 자신에서(πρὸς ἡμᾶς)보다 먼저 일뿐이다. 이것은 바로 눈으로 보는 데에서 철자들이 단어들보다 먼저이다. 왜냐하면 진실로는 어떤 사람도, 철자들을 가지고 단어들로 모으기 위하여, 철자들을 가지고 말하기 시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눈으로 보는 데에서 단어들이 문구[문장]들을 앞선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을 보는가, 문구들이 적확하지도 않고, 또 맞지도 않는 데도, 단어들을 문구로 조직화하기 앞서서 단어들을 다루는 그런 사람을 도대체 보기는 보는가? 완성된 과학을 우리에게 학설적으로 제시하는 문법학들은 우선 알파벳을 가르치고, 그러고 나서 [언어] 형태론(la morphologie)을, 그리고 구문론(la syntaxe)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 교훈적인 순서는 그 자체가 앞선 긴 작업을 가정하는 [문장의] 제작 작업의 순서이다. 이 정교한 발명적 작업에서 “요소적인” 것처럼 나타나는 것, 그것은 알파벳 같은 아톰이 아니라, 추상화 작업의 부차적 결실이며, 이미 말해진 총체성들(des totalités parlées)이다. 그것들의 증거는, 바로 “지도적” 방법들의 목표가 살아있는[생생한] 언어들의 도제[도제 습득] 방식을 가속화한 것으로, 지도적 방법이 살아있는 질서를 모방하기를 애쓴 것이고, 또한 문법적인 존재들로부터 - 실사들, 동사들, 접속사들로부터 - 자극받은 조정[조절 방식] 덕분에 가능한 한 가장 빠르게 이미 말해진 총체성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말하기륵 시작하기에 앞서 문법을 읽어내기를 끝내야 했던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단지 형용사들만을 가지고도, 단지 전치사들만 가지고도, 대명사들만을 가지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 방법들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문장의 총체성을 제공하고자 원하고, 그리고 이어서 이 총체성을 증가하는 정확성을 가지고 전개한다. 게다가 철자들과 음절들은 실제적으로는 글자 표시법(graphique)만을 갖는다. 발음상으로, 다시 말하면 언어의 생명에서는 철자들도 음절들도 없으며, 표현되고자 작업 하는 관계들 즉 지적운동들이 있을 뿐이다. 간신히 단어들 그 자체들만이 쓰여진 또는 시각적 실재성보다 약간 더 많이 갖고 있을 정도이다. 왜냐하면 말해진 말씀[구어체]에서, 따로 떨어져 사용된 단어들은 그자체로 거의 항ㅅ아 함축된 명제들이며 또는 언어적 “짓거리들”(des gestes)이며, 또 다시 말하면 총체성들인데, 그 총체성들에서는 주어, 계사, 술어의 심적(mental) 구별이 담론에서 분절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벩송 그 자신은 단어들 속에서 “구절들로 접합되어야 할 자연적 경향”을 알리지 않았는가? 들라크르와(Henri Delacroix, 1873-1937)가 이를 관찰했듯이, 명제로부터 발체된 언어의 진실한 단위 즉 단어들은 무차별적이고 비규정적인 원자들이 된다. 그러나 이 모든 일반성들은 문법적 연관들에 의한 놀이(le jeu)에 의해 서로 짜여지고, 정확학고 특수한(particulier, 사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그런 이유로 지적 노력은 의미에서 기호들로 가는 것이지 기호에서 의미로 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관념들은 이것들에게 방향을 정해주는 정신적 맥락의 내부에서 사유할 수 있을 뿐이다. 낯선 단어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때(그리고 여기서 낯선이란 특히 고립되어 말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 단어를 위해서 어느 정도 가능한 맥락을, [또는] 단어가 의도하고 의미 있게 될 수 있는 환경을 (제멋대로) 꾸며낸다. 이것은 무한히 전체화하는 과정인데, 음악에서 이 전체화는 각 음표의 주위에 있는 전체와 더불어 멜로디를 재구성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온전한 전체의 곡선은 그 곡선의 선분들의 각각 속에 잠들어 있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쌍곡선(l'hyperbole)의 무한소 조각은 이미 쌍곡선을 포함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 각각의 단어는 전체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과 같으며, 만일 우리가 그것을 깊이 파고들어간다면 그 의미를 표현하는 문구를 회복할 것이다. 이리하여 계사의 중요성은 설명된다. 계사는 태어나고 있는 문구이다. 그것은 주어와 술어에 덧붙여지는 문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문구에서 미리 공제한[추출한] 주어와 술어이다. 거기에는 르화(Édouard Le Roy, 1870-1954)가 세포분열에 비교한 내적 분극화(polarisation)의 현상이 있다.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 1864-1936)가 말하듯이, 서설은 작은 이야기(꽁트)의 후기 아닌가?

그러므로 분해의 문법적 질서가 우리의 지적시각을 위해 가지는 만족하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유기체주의는 실재적으로 그 요소들보다 훨씬 더 (ancien)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실이다. 즉 단어의 고유한 의미에서 프레스뷔테론(πρεσβυτέρων, 장로 長老), 다시 말하면 보다 원초적이고 동시에 보다 존경할 만하다는 뜻이다. 기계주의의 유사-요소들(les pseudo-éléments)은, 󰡔시론󰡕이 우리에게 말하듯이, 일반적으로 “다수의 풍부한 용어들의 융합”에 앞서 나간다. “이 용어들은 유사용어로부터 도출된 것 같기도 하고, 또 이 용어들은 마치 두 빛의 간섭으로부터 어둠의 현상이 생겨나듯이, 융합자체 속에서 서로서로 중화되기도 한다.” 고블로(Edmond Goblot, 1858-1935)도 좀 전에 이유들을 제시했을 때, 달리 말하지 않았다. 이 이유들을 위하여, - “잠재적” 판단과 같은 - 개념의 연구는 그에게는 판단의 연구를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따라가야만 하는 것처럼, 마치 전통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시대에 지성이 작업을 한 순수하게 이상적인 요소들은, 이것들(순수요소들)보다 앞서 현존하는 운동의 침전물들(les dépôts)이다. 그리고 이것들보다 늦은 기원 부인하면서, 논리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은 순수화하는 노력을 향해[노력에 비추어서] 순수화된 결과물의 중력중심을 이전하는 것과 다른 것을 행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자체 속에서 완성되고 죽어버리는 단순화하는 동력학(le dynamique 원동력)을 향해[에 비추어] 단순화된 생산물의 중력중심을 이전하는 것과 다른 것을 행하지 않는다. 브룅슈비크(Brunschvicg, 1869—1944)가 말하듯이, 판단에 앞서있는 단순 개념들(항들)은 없다. 왜냐하면 항이란 이미 그자체가 관계이기 때문이다. 개념들, 즉 지적 교환들의 위조화폐는 심적 관계들에서, 허구의 권리에 의해서만 그리고 그 권리를 위해서만 먼저 현존한다. 관계들의 역사로부터 우회하여 나오는 허구의 권리는 일종의 비시간적 수동성 안에서[뉴턴과 칸트의 절대적 등질적 공간 안에서] 이 심적 관계들을 조작한다(manipuler). 따라서 속성자격부여는 속성들 보다는 훨씬 더 오래다. 그리고 논리적 단순성은 항상 종착역(un terminus)이다.

원초적인 것(le primitif)과 요소적인 것(l'élémentaire)의 혼합은 우리에게 이중적 측면으로 제공된다. 1. 요소들로(ἀπό στοιχεῖων) 구축, 또는 벩송 자신이 말하듯이, 제작작업(la fabrication)은, 이것들(구축과 제작)이 기계주의에 흥미를 가지는 한에서, 절대적으로 합법적(légitime)이다. 이 기계들은 많은 단순한 “부속들”(des pièces)로 구성되고, 그리고 이들을 달리 “조립할”(monter) 수단이 없다. 이런 이유로 마치 물질적 체계의 형태적 총체성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모여진 부분들의 유한한 합계에서도 더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망라하여, 말하자면 남김없이(sans reste, restlos), 열거함으로써 이 총체성을 재구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종합이 순수하게 증명적이고 교육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생성적인 가치를 전혀 갖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안다. 우리는 구축하는 척 하고 있으며, 그리고 항상 잠재적인 분석에 의해 암암리에 지적된 질서에 다라 재구축한다. 자신의 기관총을 설치하는 병사는, 만일 그가 기계를 구축함에서 또 이 부품들의 상호 조절작업에서 이미 선 형성된 기계적 관계들에 부드럽게 준수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기관총을 제작했다고 착각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러한 것은 유기체(un organisme)의 부분들과 기계체(un mécanisme)의 요소들 사이에 내면적인 대립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들(예를 들어 감각)은 진실로 소우주적인 것들이며, 라이프니츠가 말했던 대로, 이것들이 “내재적으로”(immanément) 전 우주를 반영하는 것과 같은 자치적 본질들이다. 그런데 반대로 후자들[레고들, 또는 아톰들]은 단순하고 순수할지라도 절대적으로 서로가 서로에 보충적이다. 이것이, 마치 고블로의 개념과 같은, 제작 작업들이다. 그리고 개념들의 연대성 자체는 개념들의 실재적 가공작업(l'élaboration)을 배반한다. 달리 말하면, 재구성은 놀이와 기계적 효과가 아니라 경이로운 기회(une chance merveilleuse)놀라운 행운) 또는 연속적 기적(un miracle continué)일 것이다. - 생명과 생명의 사물들에게 응용된 인위적인 것은 더 이상 검증의 관심조차 갖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서로 서로 외적인 부분들이 없기 때문이고, 또 왜냐하면 유기체 성질은 어느 정도에서 도처에 현재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의 모든 분석은 무한으로 끌려짐을 감당하며, 마치 반대로 정신에서 모든 요소들의 종합은 조각들에 의해 정신적 실재성을 구성하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영혼의 상태는 수학적으로 그것의 요소들의 합계와 동등하지 않다. 그것은 다수(pluriel)가 아니라, 독청적이고 구체적인 단위(l'unite, 통일성), 즉 “개별자”(un individu)이다.

2. 제작작업(la fabrication)의 본질은 사람들이 시인하지 않은 어떤 것을 선가정한 것이며, 종합의 희극을 연기한 것이며, 능동적 현재의 원리에 근거해서가 결코 아니라 수동적 과거 원리에 근거하여 작업하는 것이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 제작작업은 항상 소급적(rétroactive) 조작작업이며, 마치 종합을 모방하는 전시의 질서[순서]가 전적으로 발명작업 다음에 나오는 회고적(rétrospective) 질서인 것과 같다. 이 질서를 생성[생장]의 질서와 혼동하면서 지성은 속고 있다. 르누비에(Charles Renouvier, 1815-1903)의 표현을 받아들이자면, 탁월하게 주지주의자의 원죄로서 간주하기에 아주 가까운 이데올로기에 속고 있다. 벩송은 자기편에서 보면, 생명의 모든 문제들에서 우상(cette idole)을 다소 은연중에 끊임없이 고발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회고성의 착각(l'illusion de rétrospectivité)이라 부르기를 제안한다. 벩송이 어느 곳에서 말하기를 지성은 영원히 뒤로 쳐다본다. 우리차례가 되어 우리가 말하듯이, 지체(le retard)는 자연적인 쇠약(infirmité, 기형)이다. 지체된 지성은 완성된 사물들에서만 능란하고, 그리고 그 지성이 작업하는 상징(기호)들은 항상 사건 뒤에 온다. 이 방법은, 그것이 지속없는 또 기억없은 존재들에게 또 물질의 왕국을 형성하는 존재들에게 적용될 때, 장점을 제공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동안에(pendant)와 다음에(après) 사이에 심층적 차이가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지속없이 사물을 이해하는데 너무 늦었다는 것이 결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생성하는 존재들은 미래도 과거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사건이 “한 동안에” 또는 “이 다음에” 일어나는 것도, 이 안에서 또는 이 밖에서 있는 것도, 더하여 명백성(une flagrance) 이란 측면에서, 즉 생체 내에서(in vivo) 또 사실들에 관해서 현재 순간을 간파하는(surprendre) 것도 동일한 사정이 전혀 아니다. 훨씬 더 좋게 말하자면, 알맞은 때(ὁ καιρός)가 있고, 즉 모든 사건들처럼 되불러올 수 없는 유일한 사건(un événement)이 있다. 이 새로운 환경은 우리에게 물질이 모르는 알맞은 책무(une obligation d'opportunité)를 부여한다. 조금 지나면, 그것[사건]은 너무 늦을 것이고, 잃어버린 기회는 결코 재현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사건들의 동시대가 됨에 따라, 그리고 내가 사건들 이후가 됨에 따라, 나는 진실하거나 또는 착각하는 인식을 얻으리라. 사실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사건들은 나에게 특별하며 현재적이고 효과적인 경험으로 아주 생생하게 또 아주 신선하게 나타난다. 반대로 한 순간 이후에 그리고 과거로 쳐다보는 순간에, 사건들은 무차별적이고 비현실적인 일반성이 된다. 따라서 지성은 영속적으로 생생한 지속을 늦춘다[지체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은, 전미래(au futur antérieur)라는 방식으로, 사물들이 부동성의 고유한 도식에 부합되기 위하여 일어나야만 했던 방식을 재현하려고 시도 할 것이다. 전미래라는 것은 예상참여에 의해 허구적으로 과거가 된 미래가 아닐까? 회고적 착각은 허구(cette fiction)[소설]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앞으로(antérieur) 그리고 곧 올 미래와 동시적으로써, 전미래는 시대착오적 사건들(des anachronismes)의 전형 그 자체이다. 이 시대착오적 사건들은 우리에게 현재의 통시적인(synchrone) 관점을 금지한다. 시간변경(le décalage)을 되잡을 수 없는 사후(死後)의 의식은 동시대성의 기적적인 기회들을 언제까지나(à jamais) 지나가게 내버려 둔다. 생명을 향한 우리의 영속적 지체에서, 우리의 재구성의 서투름에서, 󰡔웃음󰡕이란 책은 웃음거리의 중요한 근원을 발견한다. 거의 모든 유사-문제들은 이런 시의 적절하지 않은(intempestive) 진행방식에 기인한다. 우리가 진화의 동시대인이기를 그만두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의 지적 유한성을 믿게 하는 목적론적 우상들이 생겨난다. 우리가 스스로를 완성된 지각 이후에다가 위치시키기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 추억은 감소되는 메아리처럼 그 지각에 계속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자유, 운동성, 합목적성 등은 계절의 밖에서 또한 회고적으로만 기적과 같은 불합리일 뿐이다. 만일 우리가 일찍이 우리 뒤로 쳐다보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추억이 독창적 실재성으로써의 지각을 매순간에 동반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생명이 유기체화된 물체들에다가 발산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유기화된 물체들이란 자유와 운동성 등이 생명을 표현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이 축소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지성에게 확고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버클리(George Berkely 1685-1753)가 말했듯이, “우리가 먼지를 일으키고 그리고 나서 보지 못한다고 불평한다.” 제작 작업의 설명서를 가지고 발명의 심리학을 만들려고 하자마자, - 기계가 중요한 것은 바로 거기에서라고 할지라도 - 회고적 착각이 나타난다. 이것이 착각이다. 이 착각 덕분에 “단순한” 항들에 도달하기에 이르는, 일단 와해의 운동이 완성되면, 우리도 잘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생명의 운동방향을 뒤집어엎고(전복하고), 종착점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성에게는 가장 좋은 지식이 될 수 있는 것이기에, 종착점은 또한 실재적인 가계계통의 원리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회고적 착각은, 사람들이 보듯이, 이루어지고 있음(le se-faisant)을 떠났다는 것이고, 이루어진 것 다음에(après le fait) 자리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고, 정당화하는 작은 재구축을 후천적으로(a posteriori)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재구축의 덕택으로 지체된 추상들이 오직 원초적(primitifs)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추상들이 단순하고 빈약하기 때문이다. 이 지적인 감추기에서, 이 마술(속임수)에서, 파스칼(B. Pascal, 1623-1662) 이후로 리보(Th. Ribot 1839-1916)가 그의 󰡔감각들의 논리(La Logique des sentiments, 1904)󰡕에서 연구한 애정적인 추론의 형식들에 유사한 어떤 것이 있다. 정당화(justification)와 변호(plaidoyer)는 이 둘의 공통 특성으로써 신념 위에 기초되지 않는가? 정당화하는 추론의 본질은 이미 완전히 제기된 그 무엇을 얻는 체 하는 데 있고, 즉 초보적이고 현실적인 발견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차적이고 회고적인 복고이라는 점에서 자발적인 변증법적 정복을 모의 실험하는 데 있다. 진실한 증명은 그 자체 증명으로써 인정[시인]되고 인식되는 데, 왜냐하면 증명이 명시적으로 앞선 주제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당화는 부끄러운 증명이며, 증거들을 공언하기보다는 증거들을 불법적으로 밀어 넣는다. 예를 들어 변호사의 기술은 허구에 근거한다. 변호하는 것은, 논증들의 내적 덕목에 의해 밀어부친 그러한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이때에는 그 결론 자체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결론에 맞추어 논증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리보와 더불어 사람들은 정념에 사로잡힌 신학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벩송이 왜 이렇게 이해된 목성성을 거부했는지를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될 것이다.

아주 폭넓은 그의 견해를 고려하면, 사람들이 허구의 중요성과 고집스런 폐해를 과장할 것이지만, 회고적 착각은 허구(une fiction)이다. 그것은 진실로 탁월한 “우상”(l'idole)이다. 이것은 제작과정에 유기체화 과정의 덕목을 갖다 놓는 것이며, 우리를 논리화하도록 강요하여 우리가 우리자신을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롯(Lot)의 부인이 뒤로 돌아보면서, 소금 덩어리로 변하게 되며, 다시 말하면 생명없고 불모의 조작상이 되었다. 오르페우스(Orphée, Ὀρφεύς)는 자기 뒤를 돌아보면서, 영원히 그가 사랑하는 여인[아내 에우뤼디케(Eurydice Εὐρυδίκη)]을 잃어버린다. 만일 우리가 회고적 편견들의 떼거리를 쫒아내고자 원한다면, 우리가 완전히 역설적인 운동을 채택해야 한다. 비판의 덕목으로서 이 운동의 강조는, 지성에게서는 허구의 부차적 생산물인 총체성들의 정복자체에 집중된다. 이 운동은 총성 인체 하는(faindre, 가장하는) 것과 거리가 먼 총체성을 발견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기체들의 요소들로부터 유기체들을 구축하는 대신에, 운동은 유기체들을 우선 “통털어서”(globalement), 플로티노스 용어로 아트로오스(ἀθρόως, 모아서)로 파악할 것이다. 그러나 무한한 실재성의 순간적이고 무매개적인 현실적 파악은 그 실재성의 풍부성과 깊이 때문에, 논리 바깥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첨예한 모순을 함축하고 있다. 직관의 작동(l'acte)은 갑자기 솟아나는 역설을 해체할 것이고 위기에 종말을 고할 것이다.

철학은 총체성 자체를 출발점으로써 선별하면서, 중심이 다시 될 것이고, 또는 원심력적이 다시 될 것이다. 벩송이 그렇게 말하듯이 분리(la dissociation, 분열)가 연합(l'assocoation)보다 더 오래되었으며, 분석이 종합보다 더 오래되었다. 철학의 진행방식의 모든 덕목은 직접적으로 경험된 발아적(發芽, germinative) 직관 속에서 중심으로 끌어 모으는 것일 것이다. 지관 속에서는 직관이 표현하는 기호들 속에서보다 무한히 더 많은 것이 있다. 그리고 역동적 도식 속에는 완성된 작품 속에서보다, 사유 속에는 두뇌 속에서보다, 생명적 도약 속에서는 모든 생명있는 것의 형태학 속에서보다, 무한히 더 많은 것이 있다. 이런 중심적 총체성은 다써버릴 수 없는 가능성들이, 아직 현실화하지 못한 가능성들이 가두어져 있다. 따라서 중심에서 주변으로 가기 위하여 덧 붙여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뺄것을 빼야하는 데(retrancher) 있다. 비록 방사형으로 방향을 잡은(irradiant 퍼져나가는) 운동에 따라서 이루어진 해석일 지라도, 해석 작업은 임의성 안에서(자유재량으로) 더듬기 보다는 확신이 되고 오류 없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자는 가장 적은 것도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상황에 살았던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와 버클리는 우리가 아는 주제들과는 다른 주제들을 정식화하여 틀림없이 다른 작품들을 썼다. 그러나 우리는 스피노자주의와 버클리주의가 아주 동일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우리의 경향들은, 이 경향들을 흡수하는 우발적 요인들에 따라 여러 가지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 그것은 모든 확신에 앞서 설득당한 정신이며, 모든 정념에 앞서 정념에 사로잡힌 정신이며, 모든 정당화에 앞서 결심이 선 정신이다.

거꾸로 기능하는, 다시 말하면 주변으로부터 시작하는, 사유는 반대로 영원히 열등한 상태로 자리를 차지한다. 전적으로 안전하게 나아가는 대신에, 원심적 사유와 구별되는 솔직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써 이 사유는 󰡔정신적 에너지󰡕가 말하듯이 항상 당황하게 되고 연속적으로 방황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단어에 의해서 의미를 설명하는 어느 누구에게나 일어난 것이다. 마치 24개 철자를 가지고 있는 하찮은 동일한 알파벳이 철학의 가장 깊은 사유를 설명한데 그리고 감정들의 가장 경이로운 활용에 쓰이는 것처럼 사람들은 어떻게 그 만큼의 빈약함이 그 만큼의 풍부함을 끌어낼 수 있는가를 헛되이 찾으려 애쓸 것이다. 그런데 어떤 법칙에 따르면 빈약한 소리들(de pauvres sons)은 항상 동일한 소리들 같을 지라도 우리의 기억에서 많은 미묘한 추억들과 많은 정교한 사유를 선택하러 갈 것이다. 각 발자국마다 우리의 제작하는 사고는 새로운 우연(un hasrd nouveau)에 대해 마주칠 것이다. 이 사고(思考)는 기적들을 불러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라이프니쯔가 말하듯이, “마셔야 할 바다(la mer à boire)”가 아닌가? 이에 대해서 그만큼이나 관념연합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 관념연합은 정신을 무기력하고 무차별적이고 모호한 추억들을 가지고 재구성한다. 닮음(유사관계) 또는 접근(인접관계)은 지각에 의한 추억의 환기에서는 본질적으로 선택적(électif)이라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왜 그러한 다른 추억이 아니라 이런 추억인가? 왜 규정된 몇몇 추억들이 규정된 몇몇 지각들과 친화성이 있는가? 여기서 벩송은, 목적론자인 라이프니츠가 기계론자인 데카르트를 반대했듯이, 관념연합론를 비난한다. 라이프니츠는 데가르트가 그러한 기계주의가 왜 “다른 것들(기계주의들)보다 더 선호될 정도”이라는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설명되기를 바라는 것은 보다 오히려(le potius-quam [le plutôt que])이다. 왜 이 집성체(cet agrégat)이며 다른 집성체는 아닌가? 왜 선택작업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기계체[기계주의]는 우연적인(fortuites) 만남들 중에서 수만 번 거쳐 다시 이루어진 행운을 환기하는 것으로만 대답할 수 있다. 관념연합론의 재구성은 이처럼 우연(hasard)의 변덕스런 일들에 맡겨진다. 우리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인데, 즉 행동을 위한 추억을 연합할 지각의 경향은 단지 “총족 이유(la raison suffisante)” 또는 선택적 끌림들의 “정합 이유(de convenance)”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관념연합주의처럼, 비연장적 감각들을 가지고 연장을 재구성하는 원자론자의 심리학은 “보다 오히려”(le plutôt que)의 설명에 부딪혀 실패한다. 결국 생물학적 기계주의는, 특히 신다윈주의의 형식 하에서 자기에게 생명도약과 중심도약의 관념을 제공하는 “방향의 내재적 원리”에서 제거되면서, 일말의 우연적 변이들에 따라 생명을 회복하는데[소생시키는데] 소진한다. 유기체주의의 미로에서, 우리의 모든 도식들에 맞서는 유기체주의 교묘함의 미로에서, 길을 잃은 그 기계주의는 번거러운 복잡성들로 방황하게 된다. 이 복잡성들 속에서 자유재량(l'arbitraire)은 기계주의를 우연에서 태어낸다. 그리고 기계주의는 도약(l'élan)이 정당하게 아주 단순한 원리라는 것, 경제적이고 순간적인 원리라는 것을 보고자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힘들여 만든 근사치[통계적 계산값]들이 이 원리를 매우 잘못 모방하고 있다. 상대주의자들의 시간-공간의 토론이 우리에게 특히 증명할 것이다. 제작하는 사유는, 항상 잘 규정되고 유일한 생성인 실재적인 생성작업(génération)의 바깥에 위치하기 때문에 따라서 무한한 다른 진행과정들을 인정한다. 이 다른 과정들에 의해 그 사유의 허구들이 또한 이미 잘 구축되어 있었다. 밑바탕에서 작업한다는 것은 만들어야 하는 것보다 오히려 해체하는데 훨씬 더 알맞다. 그런데 “어떤 질서 속에서 만 구축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해체될 수 있는 것이다” 유기화의 중심운동을 따르는 것은, 자동인형이 만들어진 가능한 수천가지 조작[제작]작업을 넘어서, 생명체가 나오는 유일한 효과적 작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 여기에 의심할 바 없이 우리의 지성이 “그 어떤 사람”(le "quelconque")이라도 매우 열성적으로 편애하는 체 하는 이유가 있다. 지성은 필연적으로 덕목을 만든다. 효과적인 실재성에 도달할 수 없는 지성은 그것[덕목]을 자랑거리고 삼고, 그리고 지성은 실재적인 것에 과한 자신의 무관심이 자기 수완의 지평을 무한히 부풀게 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착각이다. 수천 가지 비현존의 가능성들이 견고하고 효과적인 유일한 현존을 가져다주는 지를 누구에게 사람들은 믿게 할 것인가?

사실상 제작하는 사유는 드물게 발견을 무모하게(감히) 실행한다. 만일 그 사유가 요소들로부터(ἀπό στοιχεῖων), 영혼, 생명, 자유, 그리고 모든 값진 사물들을 - 사람들이 사물들에 의해서 시작하는 조건에서만 발견하는 그 사물들을 - 재발견한다고 주장할지라도, 어느 사람들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 우리를 착각하게 하기 위하여, 경험의 계보학적 질서를 뒤집어엎는 자는 곧 뒤따라갈 것을 향해 매 발자국 마다 좋건 싫건 예참해(anticiper)야 한다. 이런 은밀한 예상참여는 기계론자의 진실로 탁월한(κατ'εξοχήν) 속임수(l'escatomage)이다. 모든 설명이 내려가는 것으로써, 하물며(a fortiori) 또는 더군다나(à plus forte raison) 진행하면서 사물들을 설명하고, 그리고 많은 것에서 적은 것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메카니스트들의 반대방향으로 가는 철학은, 설명이 얻어내었던 그 설명자체에 영양가 있는 무엇을 상위 실재성들에게서 빌려오면서 만이 기능하다는 것이다! 설명이 정신[지성]을 포로로 삼기 위하여 정신에게 호소하고(말을 걸고), 그리고 설명은 정신에게서 그것의 고유한 실체를 슬그머니 빠져나게 한다. 따라서 이 악순환(le cercle vicieux, 선결문제 미해결의 오류)은 정신의 근본적 원죄이다. - 그리고 사람들은 기계주의가 설명할 총체성의 항구적인 선전제이라고 보다 잘 말할 수 있다. 벩송은 이 기계주의의 밀수입을 모든 경우에서 고발한다. 단어들을 가지고 의미를 구성하는 자들은 이미 의미화한 단어들을 얻는다. 부피(l'etendue)를 얻기 위하여 감각들을 병치시키는 자들은 자기들에게 외연적 감각들을 몰래(슬쩍) 받아들인다. 정신을 선가정하지 않고서 정신을 생성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리는 나중에 보게 될 것이지만 회의주의 그 자체는, 자기가 파괴했다고 주장하는 사상을 사용해야 하는 필연성에 짓눌린다. 자유에 관하여 르끼에(Jules Lequier, 1814-1862)가 강조해서 말했듯이, “사람들은 질문에 받아서만이 대답할 수 있다.” 이처럼 유물론도 “말하는 것과 말하도록 강요된 것 사이에 치명적 충돌 속에서 사라진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이 정신의 운동을 완성된 운동 다음에 재구축한 것이기 때문에, 논리학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만일 이들이 겉으로는 모든 것을 구성하기 위해 요소들로부터 출발한다면, 그것은 단지 교수의 인위성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요소들로부터 제시하는” 추상화의 작동(l'acte)은 우리의 정신 속에 전체의 용어[개념]을 예참하는 것이고, 이 정신은 전체 개념에 대해 긍정과정이기도 하고 동시에 부정과정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음표들로부터 멜로디를 구성할 때, 그것은 사람들이 이미 멜로디를 알고 있기 때문이며, 각 음표 안에는 멜로디가 보이지는 않지만 잠재적으로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들은 수천 번에 걸쳐 새롭게 된 놀라운 우연에 의해서만 그 노래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것은 창조의 발자국으로 진행하는 이해에 대한 속임수(la tricherie)이다. 그러나 뒤로 물러나서, 방향이 바뀐 유기조직화인 제작에 대한 속임수이며, 거꾸로 된 원심력의 밀물(influx 밀려듬)인 구심력의 썰물(reflux, 물러남)에 대한 속임수이다. 이 대칭들의 수사학이 바로 파괴의 신화이다.

따라서 내적 경험의 주목할 만한 우회를 통해서 벩송은 유물론이 표적으로 삼은 고전적 비판들을 재확립하였다. 유물론의 우주에서는 가능한 질서는 없다. 단지 듣도못한 우연이나 경이로운 운수가 정해놓은 방향의 합의[화해]들 만이 있다. 불가사의(le mystère)를 두텁게하지[끌어모으지] 않은 유일한 철학은 이 불가사의에 의해서 시작하는 철학이며, 그 불가사의 자체와는 다른 것에 의해서 그 불가사의를 설명함이 없이 우선은 그것을[불가사의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철학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쉽고, 직접적이고, 안전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발견에서 발견으로 새로움에서 새로움으로 갈 것이다. 선가정하거나 또는 예상참여 할 어떤 것도 강요되지 않아서, 우리는 가능태와 현실태 사이에서, 배아와 유기체 사이에서, 의도와 탐구나 창조의 불안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몸짓 사이에서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웃기 위한 종합일 뿐인 기술주의자의 허구들은 지적인 모험들 보다 구축하는 놀이들의 조용한 쾌락을 선호한다.

따라서 벩송의 방법은 항구적으로 생명적 진보와 동시대적(contemporaine)이다. 이제부터 이 진보는 우리에게 운동으로서 나타나고, 이 운동은 예상 참여하는 것 전혀 없이 그럼에도 어떤 정신적 선현존을 가정하는 운동이다. “기운 내, 너가 나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너는 나를 찾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자유작동(l'Acte libre)의 의미 자체이다. (49LMG)

 

 

첨부파일 책쟝켈레1959앙리베16L0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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