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들뢰1402내재성
내재성: 생명... (L'immanence: une vie... 1995)
박정태, in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이학사, 2007, 509-517. (P. 606)
서지: “L'immanence: une vie...” Philosophie, n. 47, septembre 1995, pp. 3-7. 이 글은 들뢰즈가 죽기 직전 직접 발표한 글로는 마지막 글이다. 이글의 후편은 “L'actuel et le virtuel”(현실적인 거솩 잠재적인 것)은 Dialogues, (avec Claire Oarnet), Paris, Flammarion, coll. "Champs" 1966년 부록에 발표된다. 이 두 텍스트는 “집단과 다양체”(Ensembles et multiplicités)라는 논제의 계획 아래 작성된 글이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철학(Philosophie)지를 보니 그 때가 언제 인지 모르지만 읽었고 줄도 치고 주도 달아놓았네, 그런데 지금 메모 난을 보니 참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노트 중에서 보면, 원문 3쪽, 첫 문단에 ‘선험적 영역’, 둘째 문단에 ‘선험적 영역과 의식관계’ 셋째 문단에는 ‘선험과 초월’: 선험이란 순수 내재성은 아직 분할되기 이전이다. 원문 4쪽, 첫째문단 순수 내재 생(UNE VIE). 원문 5쪽, 첫째 문단 내재성=특이성, 둘째 문단 무한정한 삶, [다양체로서 일자, 단위]. 원문 6쪽, 삶(une vie)= 잠세력들.
그리고 다른 쪽지로서, 스피노자: 내재 > 실체(속성) > 양태. 플로티누스: 하나 > 누스 > 영혼. 베르그송: 자연 > 두 질서 > 물체와 생명체. 들뢰즈 무한정자 > 일자(실체, 속성) > 양태.
다양체(le multiplicité), 다상체(divers) 다태체(variant) / [이제 보니 다양체는 다질체가 더 나을 것 같다. 다량체(pluralité)가 되고 다양체라는 개념은 다양체(多樣體)이다.
나의 노트(35ULJ): 선험적 영역 = 내재적 도식 = (한) 생명(삶) = 특이성 = 순수사건. 한마디로 의식에 표출되지 않는 상태로 있는 무의식이다. 이 무의식은 잠세적이며 사건을 생산할 수 있으며, 개별성을 드러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의식하고 있는 자아에 내재하지만 자아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무의식은 의식의 선험성이다. 그렇다고 초월하지 않는다. 이 무의식은 의식과 연관에서만 실현화된다(actualiser). / 무의식의 덩어리로서 실례는 6개월 미만의 살덩어리 일 것이다. 이것이 사건들의 덩어리로서 실체화 된 것은 꼬마들이다. 실체는 내재적 도식에 따른 것일 수 있으며, 선험적 영역으로 발생(생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재적 도식은 하나의 도식이 아니다. 산술적 다수로서 다량체(multiplicité)이며 이 다량체중의 하나가 생성과정에서 하나의 삶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 (47MLG)
위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제대로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 내재성이라는 개념을 하나의 삶(생)이라고 한다. 그것은 벩송의 의식, 기억, 생명의 공연성을 다시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데 그가 물질과 기억을 높이 평가한 것에 비하여 이 글은 창조적 진화에 준해서 쓴 것 같다. 즉 내재성의 실질적이고 잠세적인 근거가 심리학적으로 기억이다. 이 논의는 존재론적이라기 보다 심리학적이다. 이것을 발생론적으로 확장하여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으로 풀어가려면 생명에서 다룰 수밖에 없다. 기억은 인간적인 것을 다루는 측면이있는데 비해, 생명은 비인격적이고 보편적이며 실재적이다.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이전, 이것은 내재성이 일자로서 단위이며 또다른 의미에서 자연자체이다. 자연자체서 이 발생론적 근거로서 생명은 모든 생명에게 선험적 영역에 속하며, 불교에서 범아에 속한다. 범아 속에서 자아, 그 자아가 범아의 끈을 놓지 않고, 즉 지속하고 있음을 통각(각성, aperception)이다. 만물에 불성(佛性)이 있기보다 생명있는 곳에 불성이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47MLG)
표면의 외재화와 표면의 내재화 이중적 측면에서 외재성을 잴 수 있고 셀수 있는데 비해 내재성은 그런 것이 아니라 덩어리로 다발로 있다. 어떤이는 외재성처럼 잴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그것의 깊이에는 또한 무한정하기에 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무한정한 내부가 초월성이 아니라, 생명이 오랫동안 경험해온 경험의 총체이다. 이 총체를 다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오성)인식의 무능이 있다. 그러면 다 알 수 있는 이성이 있는가? 직관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치 곤충이 자신의 삶의 총체를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산다는 점에서 본능과 같은 직관이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또는 척추동물은 지성을 사용하기를 좋아하다가 이 직관능력을 뒤로 밀쳐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성의 노력만큼이 해서 복원했더라면 다는 알 수 없을 지리도 그런 점을 이해하여 탁월성을 형성하고 좋은 삶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탁월성이 멋있는 삶을 좋은 관계가 유쾌하게 사는 것을 만든다. 내재성의 탐구는 멋있고 유쾌하게, 그리고 스스로가 즐겁게 사는 것이다. (47NK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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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성: 하나의 생명... (L'immanence: une vie... 1995)
박정태, in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이학사, 2007, 509-517. (P. 606)
[내용]
509선험적인 장(champ transcendantal)이란 무엇인가? 우선 선험적인 장은 그것이 (경험적인 재현의) 대상을 가리키지도 않고, 또 (경험적인 재현의) 주체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험과 분명히 구별된다. 또한 선험적 장은 비-주체적(a-subjectif)인 의식의 순수 흐름으로서 선-반성적이며 비인격적인 의식으로서, [피상]자아가 배제된 의식의 질적 지속으로서 나타난다. 물론 선험적인 것이 이런 식의 직접적인 소여[무매개적 자료](données immédiates)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 묘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509-510, 철학, 원 3) [순수흐름과 질적 지속은 벩송의 DI에서 무매개적 자료이다. (47MLF)]
이러한 선험적 경험론에는 야생적인(sauvage) 어떤 것, 강렬한(puissant) 어떤 것이 있다. (510)
하지만 [초월적인 것과] 반대로 의식이 선험적인 장을 무한하지만 도처에 흩어지는 속도로 가로지르는(transverser) 한, 그곳에서 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1). (510, 철3) - 원주1): Bergson, MM, “마치 우리가 표면 위에서 그 표면으로부터 방사되어 나오는 빛을, 언제나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결코 드러난 적이 없는 빛을 숙고하는 것처럼”(MM 34) [의식이 무한한 속도로 퍼진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선험적인 장에서는 의식으로 드러날 수 있는 무엇인가로서 대상화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47MLF)
따라서 선험적인 장이 자기의 의식에 의해 정의될 수 없다. 이 자기의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적이며, 모든 계시(toute révelation)에서는 빠져있다. (510-511, 원3)[기억은 수학처럼 외연이나 동심원처럼 동연적이 아니라, 흩어져있는 흐름으로 같은 위상에 있다는 점에서 동연적이다. 한 덩어리(mass)이며 한묶음(gerb)이다. 이 동연적의 의미는 의식, 기억, 생명에 속한다. 그런데 밖으로 드러남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중세철학적으로 표현하는 속성도 근대의 양태도 아니다. 실체라기보다 기체(substrat)이다. 그럼에도 이름을 불러야 하니깐 잠세태이다. (47MLF)]
원3선험적인 것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다. 의식이 없다면, 선험적인 장은 내재성의 순수 평면(un pur plan d'immanence)으로 정의 되리라. 왜냐하면 선험적인 장은 객체와 마찬가지로 주체의 초월성도 회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511 원3) - 원주2): 사르트르 참조: Sartre, La transc [의식이 없는 혼돈의 세계는 순수평면으로 가정할 수 있다는 조건문이다. 논리의 극한에서 의식이 없는 세계는 0(무)의 세계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있는 것에 속한다. 이 논의은 무에서 유의 창조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벩송에서는 무(Zero)가 없다(EC 4장). 무는 있는 것이지만 의식에 의해 결정되지도 결정할 수 없는 상태이며, 생명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상태는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상태가 순수흐름, 즉 질적 지속이며, 이것이 생명체는 무매적 자료로서 현존하며, 이 자료와 떨어져 있다는 순간에 한편으로 언어 논리상으로 동일성의 개념이 개입하며, 다른 한편으로 생명론과 영혼(심리)론적으로는 이로부터 드러남, 솟아남, 강도를 가짐으로서 동일성이 아니라 정체성을 가질려는 노력(스피노자의 권능)이 있다. 이 솟아남과 강도를 지니려 노력을 지속하는 한 사물이 생명체가 된다. (47MLF)
예를 들어 스피노자에서, 내재성은 실체로(à la substance) 있지 않고, 실체와 양태들이 내재성 안에(dans) 있다. (원 4) [다른 부분은 잘 썼는데 이 문장이 문제다 실체와 속성들이 내재성 안에 있고 양태는 내재성이 솟아나는 표면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수동적 양태들로거 개별자들은 표면위에 놀이를 하는 것이라고 해야 좋았을 것이다. 스피노자와 플로티누스 까지 결합할 수 있다. (47MLG)] [스피노자의 내재성은 권능인 셈이다. 유동하는 질료자체이며, 즉 운동이라는 점에서 실체라고 하기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작용하는 권능 즉 내재성은 벩송과 스피노자가 공유하는 개념이다. (47NKF) ]
내재성은 모든 사물[만물]보다 우월한 단위(comme unité)로서 하나의 그 어떤 것에 연관되어 있지 않고, 사물들의 종합을 행하는 하나의 주체에도 연관되어 있지 않다. 내재성이 더 이상 자신과 다른 어떤 것에 더 이상 내재하지 않을 때[여집합일 때], 사람들이 내재성의 평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선험적인 장이 의식에 의해 더 이상 정의되지 않듯이 내재성의 평면도 자신을 포함할 수 있는 주체 또는 대상에 의해 정의 되지 않는다. (511-512 원4)
원4우리는 이같은 순수 내재성을 온생명(UNE VIE)이라 말할 것이며, 다른 것이 전혀 아니다. (원4) [들뢰즈가 인격성이 전에 온생명을 기체로서 인정한 것이다. 사실은 무규정자일 것이다. (47MLG)]
피히테의 학문의 학설(Docrtine de la science) .. 스피노자주의 ... 멘드비랑 만년의 철학(Dernière philosophie)(전집, 제10권, 브룅판) ... 선험적 장은 내재성의 평면에 의해 정의 되고, 내재성의 평면은 생명에 의해 정의 된다. (512-513, 원 4-5) [학문의 학설이란 피히테의 작품 지식학(Wissenschaftslehre, La Théorie de la science, 1794, 1801, 1804)을 말할 것이다(47NKF)]
원5내재성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생명... [디킨즈의 소설] 모든 사람이 경멸하는 한 못된 주체, 한 불량배(canaille 천민)가 다 죽어가는 채로 실려 온다. .. 모든 사람이 그를 구하기 위해 매달리고 이 비천한자는 가장 깊은 혼수 상태 속에서 포근한 그 무엇이 자신에게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그의 생명과 그의 죽음 사이에는, 한 순간(un moment)이, 즉 죽음과 함께 노는[유희하는] 한 생명의 계기(un moment)이 있다. (513, 원4) - [Charles Dickins, 1812-1870) 서로 친구(Our Mutual Friend, Ami commun(1864-1865에 쓴 미완성 수고) ] [들뢰즈가 설명의 한계에 부딪히면 자주 소설과 같은 문학 예술 작품을 자주 인용하는 이유가 있다. 나의 경험, 너의 경험, 그의 경험이 아니지만, 경험들 각각이 있다. 설명상 어찌 배치를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 경험을 묘사하는 이가 소설가 예술가이다. 그것은 새로운 개념의 창조이다. 새로운 사건으로서 인간의 탄생과 마찬가지이다. (47NKF) ]
그 개인[그 천민]의 생명은 내적 외적 생명의 우발성들(des accidents)들로부터 해방된, 즉 그 어떤 것이 발생한다고 할 때 그 발생의 주관성과 객관성으로부터 해방된 순수사건을 이끌어내는 바로 그 비인격적이지만 특이한 하나의 생명에게 자리를 마련하게 했다. [순수사건으로서]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이 관대하게 대하고, 그리고 일종의 지복에 도달한 “지고한 인간”(Homo tantum)이다. 이것은 [스콜라철학의] 이것임(hecceité)[이뭣꼬]이며, 이것임은 은 개별화로부터가 더 이상 아니고 특이화로부터이다. 즉 순수 내재성의 생명, 중성, 선과악을 저넘어 이다. 왜냐하면 사물들 한 가운데에서 이것임을 육화하는 유일한 주체가 이것임을 좋게 하거나 또는 나쁘게 해왔다. ... 개별성의 생명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특이성의 본질 즉 하나의 생명... (513-514, 원5) [모든 생명성들의 근원으로서 온생명은 순수사건이며 특이성이다. 혼수상태의 비천한 자의 것이라고 그를 살리려는 사람들은 공감하는 순수사건, 다양체로서 내재성은 공연성으로 있는 것이다. 공자는 인(仁)이라고 할 거고, 부처는 진여(眞如)라고 할 것이다. 왜 기원전 6세기에 이런 생각을 했을까, 그 이전에는 전쟁과 더불어 싸워서 이겨야 하는 용기, 지배가 중요한데, 왜 이 시기에 생명의 내재성을 끌어내려 했을까? 연민, 공감, 공명, 다이몬의 물음... 그럼에도 21세기에도 패권과 정복의 자본은 전쟁과 공포를 조장하여 착취와 피를 빨아먹는 것을 공공연히 하는 이유는 뭐일까? 군대와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을 꼭두각시로 전쟁기계로 만드는 것을 어찌 돌파할 수 있을까? 광인? 출가? 저항 항거, 봉기, 혁명? 노무현의 죽음은 공안검찰의 야만이었다. 이석기도 오늘 공안의 야만성을 드러낸 것이다.(47MLG)] ,
원5-2따라서 우리는 개별적인 생명이 보편적 죽음과 대치하게 되는 그런 단순한 순간[계기] 속에 하나의 생명을 포함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하나의 생명(Une vie)은 도처에 있다. (원5)
레르네트-홀레니아의 소설은 군대를 전체 삼켜버릴 수 있는 사이-시간(un entre-temps) 속에 사건을 들여 놓는다. (514, 원5)
[알렉산더 레르네트-홀레니아(Alexander Lernet-Holenia, 본명 Alexander Marie Norbert Lernet, 1897-1976) 오스트리아 작가. 1923년 로만카톨릭으로 개종. 1939년 군대에 들어갔다가 부상으로 영화제작에 참여한다. Mars im Widder, 1941, fr. Mars en bélier, 두 시실리안(Beide Sizilien, fr. Le régiment des deux Siciles, 1942) ]
예를 들어 아주 어린애들은 그들 모두 서로가 서로를 닮음으로써 개별성이라는 것을 거의 지니지 않지만, 반면에 그들은 특이성을 지닌다. (515, 원6)
일자(l'Un)는 내재성 자체를 포함할 수 있는 초월이 아니다. 일자는 오히려 선험적인 장 속에서 포함되는 내재적인 것이다. 그리고 일자는 언제나 곱셈[단위체]의 지수(l'indice)[xn 다양체란 n승을 지칭한다. 생명체는 2의 n승의 무한 급수의 총합] 이다. 하나의 사건, 하나의 특이성, 하나의 생명... [다양체로서 하나라는 의미 이다. n의 거의 무한 자승이다. 인간의 몸은 20조의 세포가 거의 무한자승으로 조직화한 방식으로 되어 있기에 현재 70억 인구도 지금까지 인간들도 모두 동일한 생산물일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지성으로 알 수 없는 불가사의이지만, 실재이고 구체이며, 그래서 신비라고 한다. 한 인간이 인격성을 나름으로 가장 열심히 노력하여 만든 자를 영우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가 신비의 일부를 드러낸 것이기 때문일 뿐이다. 그런데 그 신비를 누구나 다 드러낼 수 있는데, 그 노력을 덜 했기에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뿐이다. (47MLH)] (515-516)
초월성은 항상 내재성의 생산물이다. (516, 원6) [언어로서의 초월은 내재성의 반영물이다. 즉 초월성은 내재성의 작은 티끌, 먼지같은 것인데,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전체 또는 완전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단위를 확장한 것이다. (47MLG)]
원주) 후설(Husserl)... 사르트르..
원6하나의 생명은 오로지 잠재적인 것들(des virtuels)만을 포함한다. 즉 생명은 잠재성들, 사건들, 특이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생명은 인격의 생애이다. (47MLG)]
사건은 (무한정한, indéfini) 비-현실화(non-actualité)로서 생각되었기에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실재성, 내재성은 결함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건을 자신의 동반수반물 연관 속에 시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수반물들이란, 선험적 장, 내재성의 평면, 생명, 특이성들[다양체들]이다. 상처는 분명 사물들의 상태와 체험 속에서 육화되거나 현실화된다. 허지만 상처는 그 자체로 놓고 볼 때, 우리를 생명 속으로 이끄는 내재성의 평면위에 놓인 하나의 순수한 잠재적인 것이다. 나의 상처는 나 이전에 현존하고 있었다. (517, 원7) [다양체의 분화는 당연히 상처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상처는 영혼(심리)적으로 분열증이며 사건의 균열이다. 세상을 그렇게 표면이 등장하는 것이다. (47MLG)]
[부스께(Joë Bousquet, 1897-1950) 프랑스 시인 작가,]
선험적인 장의 내재성을 정의하는 잠재적인 것들과, 잠재적인 것들을 현실화하며 선험적인 장을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변형시키는 가능한 형식들 사이에는 이와 같이 커다란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517 원 7: 마지작 문장)
(47MLG)
<이 노트가 사라지기 전에 여기 끼워 두자>
{들뢰0407철학}
들뢰즈의『철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hilosophie, 1991)』
서문:
그는 철학사를 특이하게 규정합니다. 철학자가 지혜를 지니고자 대상으로 삼는 것은 소크라테스에서 드러나는 것은 친구(Ami)입니다. 이를 지식을 구복적 신앙으로 만들어 버린 중세에서는 철학의 대상인 개념의 사랑(Amour)가 된다. 그리고 자아의 각성으로 세계에 대해 발언권을 가지는 근세는 구혼자들(주장자, Pretendants)이 된다. 이 의식의 분열은 이원론이 아니라 다원론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헬레나의 구혼자가 20명이었다던가? 그리고 구혼자가 많은데 어느 하나가 최고 미인을 차지하고 독점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슬픔이다. 그러면 구혼자들은 정당한 경쟁자들(Rivals 차이자, 특이자)로서 서로 경쟁하며 놀이로서 즐기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놀이(jeu, en, game)를 바꾸어가면, 특이자의 특성에 따라 승리자도 다양할 것이다. 경쟁자들이 돌아가면서 월계관을 쓰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상상이 과했나? 들뢰즈가 개념에 대한 암시로서 친구, 사랑의 대상(약혼녀, 유태의 전설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솔로몬의 아가를 생각하면 된다. 향연만을 주장하면 호모라는 소리를 듣게돌지도 모르니까), 구혼자, 경쟁자의 네 가지 메타퍼는 소설보다 더 재미있게 전개한 이야기이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Difference et repetition, 1969)』을 새로운 철학사라고 하면서 기존의 역사서술과도 다르고, 그리고 그렇다고 넌픽션도 아니라고 한 것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들뢰즈는 재미있는 철학사를 간단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것을 통시적으로가 아니라, 공시적으로, 즉 물론 들뢰즈도 이 네 가지를 평면으로 좌표상에 놓고자 했으나, 우리가 보기에, 이 네 가지가 실재성의 네 가지 의미와 닮았다는 것이며, 『의미의 논리(1969)』에서 지칭, 표출, 의미화, 그리고 의미라는 네 가지를 말하는 것과 닮았다.
제1장 철학
제1절 개념이란 무엇인가를 읽었습니다.
들뢰즈가 정의하는 개념은 개념에 복합적 요소(composantes)들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개념은 그 자체로 역사를 지니고 있고, 그리고 생성이며 이 생성에서 복합물이 들어있으며(그래서 개념자체가 다양체)이며, 이 개념은 [사유의 대상인 한] 비형체적이며, [앵글로색슨 철학이 분석해봐도 알 수 없는 말, 형용모순적으로 보이는] 개념은 상대적이자 동시에 절대적이고, 다섯째로 개념은 운동성이며 건너뛰기로 연결된다(베르그송의 도약을 생각하면 된다.)
제2절 내재성의 덩어리(Le plan d'immanence)
내재성의 덩어리(평면) 이 내재성의 덩어리는 들뢰즈의 질료개념이다. 질료란 번역어로 물질이다. 베르그송에 이어 들뢰즈는 이 질료를 좀더 심도 있게 다룬다. 여기서 질료 개념은 플라톤의 플라노메네(아이티아)에서 따왔다고 마실은 보고 있습니다. 그 방황하는(원인) 것 자체가 내재성을 지닌 개념입니다. [이 덩어리 개념이 『의미의 논리』에서 미친 생성(devenir-fou)이며, 『차이와 반복』에서 왕관을 쓴 무정부주의(356)이자 노마드의 분배(356)이며, 존재의 함성(une seule clameur de l'Etre, 389)이며, 『천개의 고원』에서 항상적 덩어리(고른 평면, plan consistant)이다. 우리가 보기기 형상주의자 알랑 바디우가 질료형이상학을 곡해했다. 인간이 모방할 신이란 원본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온전하게 정지한 지지점은 어디에도 없다. 지지점 없는 철학, 원본 없는 철학은 가능한가? 라는 문제제기는 오래 전에 제기되었다.]
들뢰즈가 그려놓은 도표의 설명은 흥미롭다. 자아는 네 가지 끈으로 내재성의 덩어리 위에 도식이라는 바퀴를 굴리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아의 형성은 내재성의 덩어리라는 자양분(또는 난바다)으로부터 맛있는 덩어리(해인, 바다도장)의 절편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질료덩어리 자체는 절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절편은 자아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칸트의 오성의 작용에 더 많은 힘을 부여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질료의 덩어리는 그냥 질료로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오면서 추억과 경험으로부터 새로이 만들고자 하는 욕망과 희망 그리고 다음이라는 미래의 관심도 함께 들어 있다. 이 이 덩어리를 베르그송 같으면 기억(지속)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 덩어리에 생산하는 능력을 부여한 스피노자에게 무한 찬사를 보낸다.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평하여, 세속적으로는 철학들 중의 군주(Prince)라고 하고 종교적으로 철학자들 중의 크리스트(Christ)라고 하고 다른 철학자들은 사도라고 하며 찬사를 보낸다, 베르그송은 스피노자 탄생300주년 기념에 보낸 편지에서 "세상에는 두 가지 철학이 있다. 하나는 스피노자의 철학이고 나머지는 철학자 각각의 철학이 있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제3절 개념적 주인공
철학의 개념은, 그 극에 맞는 연극의 주인공이 있듯이, 그 개념에 맞는 인물이 있다. 그 인물은 평면적이거나 단일적이기보다 두께를 가지고 또한 너비를 지닌다. 다시 말하면 지정학적 공시태와 통시태를 지닌다. 그 개념 인물에 대한 경험과 이해의 폭만큼 그 개념을 이해한다. .... [그리고 그 시대라는 무대 위의 주인공이 개념을 창안한다. 개념의 창안자 즉 그 시대의 아젠다의 설정, 즉 시대 정황의 보고서를 쓰는 것이 철학 하는 자의 임무 인지 모른다.(ms37O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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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자아는, 데카르트에서 사유하는 주체가 물체와 별개이듯이, 내재성의 덩어리(plan d'immanence)와는 별개이다. 주체와 내재성의 덩어리와 분열은 인간에게 온갖 문제를 제기한다, 말하자면 자아는 여전히 외적으로 존속하는 다루기 힘든 물질이나 또 다른 자아로서 타인과 관계하면서 문제가 형성한다. 문제의 제기는 철학의 과제이다. 베르그송은 올바른 문제제기가 이 해답을 말하고 있다고 하면서, 올바른 문제 제기를 강조하였다.
* 사유하는 주체로서 자아는 물체(물질)와 연관이 없이, 데카르트의 말대로, 사유하는 이미지를 형성한다. 그 형상을 관념이라 부른다. 이 관념은 물체없이 영원하다는 의미에서 자아로부터 분열된 사유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는 플라톤 이래로 믿어왔던 바대로 하나의 동질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비해 들뢰즈의 개념이란 시대와 철학자에 따라서 평면적(공시적)으로 또는 수직적(통시적)으로 다양체로 결합된 이질성의 덩어리로 되어있다. 그래서 이 이질적 덩어리에는 3-4개 이상의 구성체(복합체, composant)들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개념이란 관념의 순수성과 달리 자신 속에 차이성을 지니고 있고 결합된 복합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개념은 이전과 다음, 좌우의 이웃과 아래위의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러나 이 관계와 연관은 현실적이거나 구체적이라기보다, 규정적이고 정의적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개념은 시대와 철학자의 한계 안에 머물게 된다.
이 개념이 시대와 철학자의 한계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관념들처럼 독립적으로 공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며, 사유 주체가 한계를 임의로 정한다고 하더라도 이질적이고 이웃하는 개념들과 연관을 지니며 너비와 부피를 지닌 자아와 함께 공연적으로 영속한다. 관념은 주체의 머리 위에 허공에 있다면, 개념은 지상에 발을 딛고 있는 자아의 형성체와 연관을 지닌다. 자아의 형성체가 개념적 인물이 될 수 있고, 또는 한 자아의 개념에 머물 수도 있다.
관념은 사유하는 주체의 대상(객관)이자 상징이고, 개념도 인식하는 능력들이 있는 주체(자아)의 대상이자 형성물(구축)이다. 관념도 개념도 이미지라고 하면, 전자는 내용이 빈 선(線)으로 된 모습(도형, 사유 이미지)이고, 후자에는 선 안에 무엇인가를 채운 모습(물체, 신체 이미지)이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사유주체와 신체는 송과선에서 대응하여 마주치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의 경우에 인식하는 능력들이 있는 주체(자아)가 자신의 신체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개념은 관념과 다른 차원에 있다. 개념이 인식자아와 물체의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개념은 실재성의 이미지이다. 여기서 실재성의 이미지는 내재성의 덩어리를 일부를 표현하는 수레바퀴와 같다. 즉 바다 위에 찍혀있을 동안에 그려져 있는 자국과 같다. 그 자국이 개념의 운동, 즉 수레바퀴의 회전이다.
문제 제기로서, 관념을 사유하는 실체와 달리, 사유의 형식(인식능력)을 지니고 질료의 성질을 갖춘 자아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타협적 자아(베르그송의 타협안)를 다루기 전에 질료에 대한 논의를 해야만 타협물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질료덩어리를 먼저 다룬다.
** 질료덩어리는 사유의 그물과 즉 자아 주시선과 관계없이 존속하며, 어떤 연관 없이는 자아와 관계를 맺지 못하는 덩어리 즉 자아가 들어가지 못하는 어떤 장력있는 평면이다. 그 평면의 내부는 필연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전체이다. 이 전체를 어떻게 아느냐고? 사실, 주체는 전혀 모른다 즉 칸트의 물 자체처럼. 그런데 우선 그 덩어리의 일부분인 (우리의) 신체를 다룰 수 있다. 신체는 움직이고 살아있는 덩어리이다. 이 덩어리가 표현하는 외적 모습은 전체 덩어리의 일부이다. 이상하게도 유비 추리 같아 보이지만, 자연이라는 전체 덩어리의 표현의 일부분이 생명 있는 신체 즉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이 자연 덩어리 위에 표현된 물체로서 신체는 개념의 형성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이 전부의 덩어리 속에 무엇이라고 꼭 꼬집어서 말할 수 없지만, 신체의 덩어리 속에 기억의 총량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체가 신체와 더불어 작용하는 경우에 총량의 영향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총량을 선험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총체의 덩어리는 변화하면서 총량이 변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기억의 예로서 총량은 지속아여 증가하고 있다. 마치 눈덩이처럼. 이 덩어리의 일부 위에서 개념은 굴러가고 있는 바퀴와 같다. 이 바퀴가 밭을 갈 듯이, 긁은 부분이 현실이며 구체적 사실이다. 이 긁힌 부분이 어쩌면 생명체의 겉모습이다. 개념은 일부분의 덩어리와 주체의 사유와 결합에서 생긴 하나의 임시적이고 한계적이며 규정적 산물이다. 이 생산물을 산출하는 것은 철학자이기도 하고 과학자 예술가이이도 하다.
*** 그리고 이 굴러가는 바퀴가 한시적으로 한정적 공간에서 살아 움직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 개념적 (등장)인물이다. 이 개념적 인물은 구체적 신체를 지닌 개체의 인물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시대와 지정학적 위상 위에 있다는 점에서 시대의 주인공 인물일 수 있다. 마치 연극 무대에 연출되는 인물이 실재 인물일 필요 없듯이, 배우가 그 인물의 가면(persona)을 쓰고 그 인물의 내용과 외모를 행사하는 놀이를 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즉 개념적 인물은 한 시대와 지정학적 위상에서 만들어지는 가공적이면서, 현실에서 실행 가능한 인물이다.
이런 가능적 인물이 연극의 무대 위의 연출하는 인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개념적 인물이 취향과 노력을 기울이는 만큼의 효과가 현실 속에 구현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내재성의 덩어리를 현실로 끌러낼 수 있는 방식과 권능의 한정으로 항상 일부만을 표현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등장인물은 한정적이다. 그렇다고 헤겔이 말하는 이성의 간계에 따르다가 버려지는 어떤 작용의 인물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이 인물의 가능적 행위의 실행이 시대의 공연성을 확보하고, 한 시대와 지정학적 위상의 두께를 만들고, 이 두께의 토대 위에 새로이 생성될 주인공이 탄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토대로서 다음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 탄생의 인물은 과거 넓이와 두께를 사용하고 적용하는 그만큼 새로운 지평의 인물로 구축되는 것이다. 이 구축은 칸트의 구성과 다르다.
무대의 배우가 한 인물을 연출하는 것은 그 상연으로 족하지만, 개념적 인물은 질료 덩어리를 수용하면서 여러 가지 개념을 창안하듯이 여러 인물들로 표현되어 등장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인물들은 내재성의 덩어리에 매개로써 머물기 때문에, 많은 상식적 이야기(doxa)를 만든다. 그러나 인물은 질료덩이를 자신의 것으로 온전하게 만들지(승화하지) 못하는 회한과 무기력을 맛보는 것이다. 이 무기력한 모습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세상의 운행에 대해 우울하게 한다. (사유)주체는 (인식과 행위의) 자아의 무기력에 우울증에 빠진다. 이 울증의 치료로서 주체는 자아의 범위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상상한다. 이 상상이 사유의 형식을 빌어서 대자아(영혼의 신체에 대한 독립적 지위), 대자연(인간의 인식의 행위 밖에도 존속), 신의 관념(미래의 이상의 실현을 위한 욕망의 대상)을 만든다. 사람들은 이들을 상징으로 만들기는 하나, 이것을 존재로서 여기는 것은 초월적 착각이라 하며, 이 존재의 공리적이고 실용적인 실행한다고 믿는 것은 미신에 속한다.
사유 주체가 만든 상상의 형상들인 세 가지 상징은 자아가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이미 분열된 주체의 다른 한쪽에 있다는 것을 선가정한 조건들이었다. 그럼에도 이 선가정을 요구(요청)하는 것은 주체의 자기 분열증적 현상을 견딜 수 없어서, 가정이라고 하더라도 실재의 존재로서 만들고 그 것을 향하여 어떤 노력을 하는 것이 주체로서는 분열을 막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파스칼의 신에 대한 도박은 이런 의미에서 의의가 있다. 타자와 타인에 대한 승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정신의 권위를 세우고, 또한 인물에게 새로운 역할과 권능을 발현을 처방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승리의 약속이 아니라,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처럼 개체의 자아에게 권능을 깨우쳐, 모든 횟수 중에서 한번이라 할지라도 권능의 실행이 해결책으로 제기할 수 있다.
**** 다른 한편으로 주체의 분열증적 현상에 대한 해결의 방식을 요구도 있다. 양식으로써 방향을 취한 자아의 문제 해결보다, 상식으로써 여러 방향으로 나타나는 인민들에게 구체적 문제 제기로부터 해결이 필요하다. 지리적으로 넓이를 지니고 시대적 과정을 지나가고 있는 어떤 지역을 살아가는 사람들, 즉 인민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 해결책은 주체의 노력에 의한 수직적으로 상부에서 하부로 명령하는 식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될 수 없다는 경험적 사실을 주목한다.
그리고 명령과 서열의 방식으로 초월(상부)의 방향으로 밀고 올라가는 것은 언제나 하나만의 구원이나 하나만의 행복에 머문다. 이제 이웃하는 수평의 관계에서 인민들, 다양한 사람들의 연관적 행복과 삶의 건강성이 더 소중한 문제로 제기된다. 여기서 자아는 상하의 계급적 지위에서가 아니고, 수평적 타협을 필요로 한다. 이 타협은 영혼과 신체의 타협으로서 자아(moi)와 달리 사회공동체의 협약(루소 표현으로 계약)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humanit , Soi)를 필요로 하다.
여기서 계약하는 자아들이 있을 것이다. 타협물로서 자아는 사유하는 능력으로서 주체와 물체와의 타협의 산물이며, 동시에 자아와 타인들 사이에 계약의 산물이다. 이는 자아의 생활 양태이기도 하다. 이 양태로서 자아는 지역(지리)과 시대의 한계 내에 머물고 있다. 사유의 상징이 시대를 초월하여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라면, 양태의 자아는 시대와 지리상으로 한정된 삶의 양식을 살아가며 구체적 경험에서 문제 제기하는 것이다. 이 경험의 영역에서 양태의 자아는 앞선 위상에서 탈영토화하였으며, 새로운 영토에서 재영토화하는 과정으로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인간도 태어날 경우에 이미 이전 위상에 대해 탈영토화되어 노마드로 태어났으며, 그리고 그 태어난 지정학적 위상에서 재영토화의 작업을 수행한다. 예로서 어느 누구도 인간은 자신의 조국의 언어를 지니고 태어나지 않는다. 즉 양태로서 자아는 조국의 언어로부터 탈영토화이다. 그러나 태어나서 자라는 곳의 언어를 익히고 살아간다. 즉 재영토화다. [극한 예로 외국으로 입양된 사람의 경우처럼] 그는 그 자라나는 곳의 언어를 익히면서 그 곳을 재영토화하는 노마드이다. 정치 경제학적 여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은 금 숟갈을 물고 나오지 않고 발가벗고 나온다. 그러나, 영토화 된 영역에서 자라는 동안에 그는 재영토화의 과정을 겪는다. 그 영토의 권능을 양태로서 그 지리 위에서 실행한다. 미국 병사와 사이에 태어난 한국인이라도 한국인으로서 언어와 삶의 양식에서 이미 이 영토의 두께와 너비 위에서 한 타협물로서 재영토화의 길을 걷는다.(ms37PKD)
제1장 4절 지리 철학
들뢰즈의 지리철학의 발언에서 중요한 것은 아마도 이러할 것이다: 사유한다는 것은 사유의 영역(영토)과 지구상의 위상(지정학적 환경)과 관련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사유에 도식적으로 두 가지 사유 형성이 있다. 하나는 제국적 공간 형성(Spatium imp rial)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확장(extensio politique) 이다. 역사적으로보다 지정학적으로 보아 전자 의 경우는 중국, 인도, 유태, 이슬람의 경우이고, 후자의 경우는 그리스이다. 전자의 경우는 위계적 질서와 지시적이며, 후자의 경우는 이웃관계이며 항상적 관계이다. 역사는 지리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으나 철학에는 지리 철학이 있다. 우리는 이 지리철학을 지정학적 철학이라고 하고 싶다.
지리철학에는 어떤 생성(devenir)이 있다. 이것은 역사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철학에서 생성은 단한번(une fois pour toutes)만에 이루어지고 기념으로 남는 어떤 생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매번(pour toutes les fois) 생성의 두께와 부피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내재성의 덩어리도 부풀어 가는 것이다. 어쩌면 이 내재성의 두께는 프락탈한 구조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들뢰즈가 개념의 생성이라고 하는 것도 확장되는 경험의 생성과정일 것이다.
이 생성은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투쟁이 일어나고 있는 실재이다. 이것은 유토피아라는 미래적 형성이나 지금여기에 없는 장소와 관련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환경과 철학 또는 개념과 결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념의 형성 위에서 재영토화가 이루어지듯이, 현재의 환경의 새로운 형성에서 철학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환경 위에서 철학이 지리 철학이다. 환경과 전지구의 빠른 변화에는 혁명이 있다. 투쟁에 의한 혁명에는 환경의 탈영화가 이루어진다. 탈영토화는 기존의 공시태에 결속된 방식으로 영토를 규정하는 구성원의 관계를 이탈시킨다. 재영토화는 이탈하는 구성원들이 새로운 조직화를 의미하여, 그 새로운 조직화 작업은 외부와 연관된 변화와 더불어 구성원의 관계도 변화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관계가 상하로 위계질서를 갖는 영토화가 되는 방식도 있으나, 합의 관계로 다시 조직화되는 경우에 재영토화는 민주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자본주의 발달 단계에서 탈영토와 재영토화가 물체적 교환으로 이루어지는 지시적 관계이라면, 새로운 조직화의 한 단계로서 탈영토화는 전지구와 새로운 인민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때 재영토화는 인민들 자신의 환경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꿈과 같은 논의가 가능한가? 들뢰즈는 아마도 천의 고원에서 지적한 미국의 서부 캘리포니아를 대상으로 했을 것이다. 우리는 남북관계에서 이런 가능성을 예상해 본다. 제국적 방식이 아니라, 이웃하는 확장적 연관의 가능성을... 재영토화가 자본의 제국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 정치적 확장으로 합의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재영토화의 철학은 현재의 상황에서 발생한다. 현재의... 재영토화가 영토 위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자본의 교환의 방식과 다른 점이 있다. 이점에서 지리의 철학이다. 철학은 민족적 국가나 인민의 정신을 재영토화에 연관하여, 민족적 성격과 인민의 정신을 규정하게 된다. 이웃하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연관 속에서 발생하는 재영토화는 공유적 형성체 또는 공시태의 형성체를 다시 형성한다. 이 형성은 항상 새롭게 한다는 점에서 공시태의 지속적 발전이며, 내재성의 덩어리의 자기에 의한 자기 발전의 과정과 같은 길을 간다. 어쩌면 이웃하는 두(여럿) 경험의 총체적 확장의 길일 것이다. 이를 니체의 견해로 설명하는 들뢰즈는 매번마다(pour toutes les fois)라고 한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디오니소스의 생성처럼, 매번마다 새롭게 형성한다.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의 과정에서 지리철학은 지구상에서 이웃과 외적관계를 접하면서 자기 환경을 새로운 토대로 만들고, 그 위에 창조적(발명적) 협약을 세우고, 그 자리에 거주하는 인민이 현재로 형성하는 것이다. 이런 영토화 작업을 철학적으로 보면, 독일철학이 기초를 세우고, 프랑스 철학이 계약을 맺고, 그리고 영국 철학이 협약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들뢰즈의 발상에 의문이 있지만, 스피노자의 자연 개념을 재영토화 작업이란 개념전환의 과정을 거쳐서, 토대를 마련하고, 관계 맺고, 형성하는 인성적이고 생명적인 사유로 전환하여 해석하는 것으로 본다.
역사적 과정에서 역사는 실험이 아니다. 역사는 실험의 대상이 아니며, 실험으로 역사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묘사하면서 실험하고 경험하는 것은 철학적 작업이다. 경험하는 것은 철학을 새롭게 형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관념에 맞추어서 질서를 부여하는 형성이 아니다. 새로운 재영토화 작업을 한다는 것은 이제 철학이 언제 어디서나(보편적) 지시적 방식으로(일반적)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역사의 사실처럼 여러 번 중에 단 한번(une fois pour toutes) 만들고 지나가는 것도 아니다.
철학은 단한번이 아니라 매번마다 형성을 한다. 이 형성은 현재에 과거를 포함하며 미래를 현재에 예상 참여시키며 작업(실험)을 한다. 페기(Peguy)가 Internel, 니체(Nietzsche)가 Intempestif 또는 Inactuel, 푸꼬(Foucault)가 Actuel 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현재의 실재성만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새로운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베르그송 식으로 표현하면, 현재에는 이미 과거의 총체적 경험(기억)이 별똥별의 꼬리처럼 달고 있고, 미래에 예상 참여하는 가능적 행위(행동이 그리는 이미지)로서 총체적 덩어리가 다음을 측정하듯이 작업을 확장하여 하고 있다.
이 현재의 작업이 현재의 고착적 저항에 대한 저항, 즉 봉기, 혁명, 발명, 도약, 창조로서 매번 새롭게 등장하는 새로운 형성이다. 개념상으로 개념의 자기 생성이다. 새로운 발명의 철학에서 현재는 과거와 단절도, 미래의 먼 투사(종말론)도 아니고, 현재의 지속적 확장의 노력은 과거의 경험을 포함하여 다음의 문제 상황을 변형하며 발명과 창조를 하는 것이다. 이런 경험 총체는 이 시대에 전지구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으면서, 한 영토에서 대한 재영토화작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 작업은 환경 속에 사는 인민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 인민들의 삶에서 새로운 모습 즉 예상참여의 모습은 베르그송의 용어를 빌어 도덕가(인성론자)이거나 새로운 종교성의 창시자(새로운 지정학적 위상의 창시자)로서 종교가 일 수 있다.
들뢰즈의 지리 철학은 단지 지리 정치 위상을 밝히는 것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철학이 선구자의 모델로서 이미 위의 세 사람을 말했다. 이들에게서 경험의 실험과 실행을 강조하기도 한다. 인류의 경험 속에는 위계적 제국주의를 건설하는 영토화 작업도 있었고, 이웃과 연관하여 제국의 탈영토화를 거치면서 새로운 영토화 작업도 경험하고 있다. 이때 제국의 길에서는 자본의 교환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면, 인민의 연대에서 인민이 주체가 되는 방식으로 합의에 의한 공화적 방식으로 또다시 재영토화을 실행하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어느 길이 인류의 방식으로 새롭게 나타날 것인지 전지구적 관계에서 인민의 작업이 중요하다. (37QKE)
제 2장
제5절 함수체와 개념
과학의 대상은 개념도 아니라 추론 체계 내에서 명제로 제시되는 함수들이다. 함수들의 각각에 속하는 기본(요소)들 함수체(fonctifs)라고 부른다(111쪽)고 들뢰즈는 시작한다. 그는 개염과 함수 사이에 본성상의 차이를 보았다. 카오스에 대하는 태오에 관련하여 과학과 철학사이에 첫 번째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카오스에서 어떤 형상도 없다는 것은 빈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빈 것은 무(néant)가 아니고, 잠재적(virtuel)이다. 철학은 잠재적인 것에 평균(consistance, [평준화, nivellation])을 부여하는 데 비하여, 과학은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지시표(좌표, 표)를 얻으려 한다.
이 첫 번째 차이에서 본성상으로 전재하는 것이 다르다. 철학은 내재성의 평면(덩어리)와 더불어 진행하며 과학은 좌표의 평면(도식)과 더불어 진행한다. 이에 대한 설명을 위하여, 우리는 물체의 낙하 운동을 좌표로 보여 주는 이차원의 포물 곡선을 우선 생각해보자. 이 좌표로서는 열의 이동, 전자기에서 전자의 활동, 양자역학과 미립자의 미시물리학에서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잘알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함수와 좌표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사물의 상태와 사물의 속도와 변화에 대해 인식 가능하게 설명하는 함수체는 각각의 경우에 다르다. 이런 함수들의 미분으로 또는 미분의 미분으로 설명하는 함수체에 따라서 사물의 상태를 인식 가능한 것으로 여긴다. 이런 과학자는 함수체에 의한 설명 방식에서 좌표 평면으로 도표(paradigme)를 좌표상에 세우는데 비하여 철학자는 내재성의 평면에서 [분절들의 표출] 연사(syntagme)를 조직한다.
과학과 철학사이에 두 번째 차이로서, 철학에서 변화 양태(variation)는 분리할 수 없다는 성질을 지니고 있으며,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점에 비하여, 과학에서 변수는 독립적이지만, 조건 지울 수 있는 [주체 또는 실험적 도구] 관계 속에서 함수로 나타난다. 전자의 경우에 불가분적 변화양태의 집합은 우연을 근거로 개념으로 형성되는 데 비하여, 독립변수들의 집합은 필연을 근거로 변수의 함수를 구성한다.
이런 구별은 베르그송의 경우에 지속(durée)이라 불리는 혼융(또는 침투)의 다양성(mulitiplicité de fusion)과 수적 다양성의 차이로 구별하는 것과 닮았다(DI 제2장). 들뢰즈는 과학적 추론적 다양성과 철학적 직관적 다양성이라고 구별한다(121).
세 번째 차이는 우리에게 매우 흥미롭다. 첫 번째 차이의 전제의 차이와 두 번째 차이의 기본적(요소적)차이와 다른 세 번째 차이는 매우 큰 차이이다. 들뢰즈는 그것을 진술 양식(le mode d'énonciation)의 차이라 한다. 과학과 철학사이에 간격을 메울 수 없는 이 차이이다. 과학이 수행하는 여러 함수들 각각은 매우 분기되어 왔다. 말하자면, 과학의 분야에서 역학, 열역학, 전자기학, 양자역학, 미시물리학 등을 다루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함수와 좌표를 만들었다. 그런데 과학과 철학은 이것을 다루는 주재자(고유명사)에 대해 말할 때 차이가 있다. 철학은 나도 모를(je ne sais pas) 사람이라고 한다면, 과학은 누군가도 모를 그 무엇(ce qu‘on ne sait pas, [그러나 어떤 도구를 사용하는 누군가 있다 것])으로 사물과 사물의 상태를 다룬다는 것이다. 간단히 과학은 부분적 관찰자들라고 하고 철학은 철학적 인물들(친구 주창자 경쟁자 우직한자, 초인)이라고 한다. 과학에서 그 무엇을 이론상으로 말하자면 라플라스(Laplace, 1749-1827)처럼 총체적 관찰자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각 영역에서 부분적 관찰자들(observateurs partiels)이다. 이 부분적 관찰자들을 막스웰(Maxwell, 1831-1879), 아인슈타인(Einstein, 1879-1955), 하이젠베르그(Heisenverg, 1901-1976) 등이 서로 차이를 가지고 사용한 것이며, 이들 사이에는 본성상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전자기학의 함수, 양자학의 함수가 다르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이해하도록 보여 주는 함수의 내용(함수체)를 표현하는 수식(좌표계)도 다르며, 또한 이것을 검증하는 기술로서 전문 기술적 도구도 다르다. (소위 말하는 열메타기, 전자 메타기, 광양자 측정기, 소립자 측정기 등은 다르다)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과학자들은 우리 자신은 아니지만, 관찰할 수 있는 부분적 관찰자의 도움으로 실증적으로 설명을 한다. 즉 [우리는 설명할 수 없더라도] 부분적 관찰자는 지각하고 체험한다(124). 이 부분적 관찰자들은 무색 무취 무상 무력이 아니라, 힘(forces)이며, 그렇다고 그것이 사물의 상태에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지각하고 체험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관찰자이다. 말하자면, 전자의 위치를 관찰하는 어떤 전파의 선은 전자를 작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상태를 인식하기 위해 느끼고 체험하는 어떤 힘을 지닌 관찰자이라는 의미이다. 이 부분적 관찰자는 (인간의 지각과 감각 능력을 능가하는 것으로 인간에 속한다고 할 수 없는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 민감도(sensibilia)를 드러낸다(125). 러셀(Russell, 1872-1970)이 이 민감도를, 주관성이 배제된 성질, 모든 [신체적] 감각과 구별된 감성자료, 사물 상태 속에 자리(site), 사물자체에 속하는 빈 전망(perspectives), 시공의 축약된 조각 등으로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 민감도는 사물의 상태에 성질을 부여하고, 결정된 사물이나 물체를 제시한다. 철학은 이런 도구적 민감도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 자신의 몸으로 느끼는 혼융과 공감으로 환경과 삶의 위상을 정립한다. 베르그송은 과학적 관찰자를 기호(symbole)이라 하고, 철학적 인물을 지속하는 존재로서 철학자의 특권(privilège)라 한다. 그리고 전자(과학적 관찰자)는 뉴튼 물리학에서든지(DI 3장) 아인슈타인 물리학(DS)에서든지 후자를 전제로 한다고 들뢰즈는 주를 달았다(126 주 14)
들뢰즈는 과학과 철학사이에 또는 함수체와 개념 사이에, 이런 주요한 차이를 간단히 정리한다. 좌표체계와 내재성의 체계, 독립변수들과 불가분적 변화양태, 부분적 관찰자와 개념적 인물이다. 그래도 문제가 남는다. 과학과 철학이 의문에 대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규정 작업 속에서 각각에게 해당하는 (함수체와 개념의)요소들은 인식 가능하다 라기보다, 보다 높은 취향(goût supérieur)에 적응시키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남은 문제는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이에 적극적인 연관의 총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ms37RKH)
제6장 조망상(조망망)과 개념
개념은 복잡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개념을 암호(chiffre)라고 한다(21쪽) 또한 문장들 또는 대등한 것(equivalent)으로부터, 철학은 개념(concept)들을, 과학은 조망상(prospect, 조망망, 미래를 전망하는 그물망)를, 예술은 지각관심(percept)과 애정관심(affect)을 제시한다. 요소의 각각은 다른 두 요소에 응답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고려되어야 한다. (29쪽).
철학이 그리려(흔적을 남기는 tracer)하는 것은 선철학적(pre-philosopjique)덩어리[평면 plan] (내재성 immanence)에서 이고, 철학이 발명하여 살게 하는 [체험하는] 철학옹호적[pro-philosophique] 인물 또는 인물들(개입성 insistence)이 있고, 철학이 창조해야 하는 철학적 개념(일관성 또는 통용성 consistence)도 있다. 흔적 남기기[기억 총량], 발명하기[현재와 그 다음을 살아가기], 창조하기[일정한 한계 내에 일관성을 지닌 소통 가능한 통용성], 이 세 가지는 철학의 3원성이다. 각각은 다이아그램으로, 인격화[인간에 맞게]로, 그리고 강도화[내용성의 부피를 지니고 그 내용의 밀도가 있다는 점에서] 라는 특징을 갖는다. (74 쪽)
우리가 위의 두 설명에서 부연하고 있는 것은 들뢰즈가 제2부「II. 철학, 논리과학, 예술」에서 다루는 방식을 다시 검토하기 위해서 이다. 제 2부, 첫 번째(5장) 함수체와 개념, 두 번째(6장) 전망상(전망망, 조망상)과 개념, 세 번째(7장) 지각과 애정과 개념을 다루면서, 들뢰즈는 철학과 과학 사이에 경계를 구분하는 것이라기보다, 철학과 논리과학을 중요시 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5장은 철학과 과학이 사물을 다루더라도 철학은 내재성의 덩이 위에 그려진 어떤 사건을 다루고, 과학은 그 덩이를 관찰하는 도구, 방식, 그리고 일반용어로서 함수체를 형성한다. 함수체는 일상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변형된 방식이며, 일반성에 머문다. 일반성은 철학의 개념이 아니라, 과학과 상식과 언어의 공통성이다.
6장에서, 철학은 과학의 뒤치닥거리를 하는 과학 추종자나 추수자가 아니다. 과학이 해석하고 설명하는 함수체가 어떤 좌표상(좌표계의 모습)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통합하는 공리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구체적 특이성의 한 존재는 아니다. 즉 일반명사 정도이다. 그리고 그 일반명사의 연쇄과 위상들을 종합하는 체계가 하나의 공리계 안에서 성립한다고 주장하는 한(논리학과 수학에서), 그 주장은 한 체계로 환원한 것일 뿐이다. 이 통일 과학의 열망은 사실상 다음(장래, 미래, 조망, 전망)에 대한 욕망의 산물이다. 그러나 먼 미래가 아니더라도 가까운 미래에 대한 전망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예를 들어 기상예보, 주식의 변동, 게다가 생물 종의 개체수의 변화, 나아가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인데, 한인간의 인생의 전망도 예측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 혼돈이론이 개입할 것이고, 그 중의 하나로서 프락탈과 같은 이야기도 덧붙여질 수 있다. 예측 또는 전망은 단선형의 함수인고 양화가능한 것으로 표현한 것인데(바디우는 여기에 속한다), 예측불가능한 위의 예들은 비선형이며, 나아가 위상적 변형이다. 들뢰즈 실타래 굵어 가는 모습으로 비유나, 베르그송의 눈덩이 불어가는 비유도 이에 해당한다.
괴델의 설명에 비추어서, 하나의 공리계가 완전하다고 증명되지도, 우리가 결심한다고 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전망을 위하여 환원주의자들이 만든 그 공리로부터 출발한 이론의 타당성을 증명할 수도 없다. 첫 번째의 것은 인간이 지닌 이성의 한계일 것이다. 이 능력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어떻게 증명할 수도 없고, 또한 그렇다고 어떤 능력자체를 부정하기도 그렇다. 그럼에도 어떤 방식으로 한계를 지운다면, 한계라는 것을 논의하는 것도 부정된다. 그러한 생각을 한 것은 칸트였다. 이에 반박한 것은 베르그송으로 인간의 인식은 이성만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고, 기억 또는 미세지각까지를 포함한다. 이점에서 이런 다양한 성질의 인식능력을 포함하고 그리고 그 능력들이 하나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그 능력이 존재(실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능력의 총체를 구성하여 공리로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베르그송의 표현을 빌면 어렵지만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의 것은 이런 능력적 존재(잠세력으로 번역하고 한다)가 지닌 구체적 내용 또는 사물 또는 물체(notre corps)가 있다가 있다는 것이다. 이 물체로부터 우주를 설명하고 또 나아가 우주의 형성과 물체의 형성을 동등하게 증명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즉 우주의 질료 덩어리와 신체의 질료 덩어리가 같은 공리계 속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검증할 수도 없다. 그래도 환원주의자들이 하나의 공리로서 우주로부터 다른 하나의 공리로서 물체를 연역적으로 설명하며, 나아가 전망적으로 또는 예측 가능한 선형의 함수로 설명한다는 것은 순환논법의 오류에 빠진다. 결론을 원인으로, 그 결과를 시초로, 종말을 창세기로 만드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유대-기독교의 제국주의적 발상에 나온 것이다. 성경이라 불리는 유태인들의 설화에 따르면, 신은 혼돈에서 또는 비결정에서 어느 날, 마법의 막대기를 들지 않았을 뿐, 탁 치니 하루는 하늘을, 다음은 바다를, 그 다음은 육지를... 인간을...이르기까지 이렇게 마법사의 놀이(환원주의 논리학자에서는 논리 또는 로고스가 되지만)를 하였다는 것이다.
과학이 전망의 불투명을 인정한다면, 과학의 명제에 대한 진리치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것은 여론(doxa)에 머문다. 이 독사(여론) 중에서 그럴듯하다고 여기는 것은 인민의 여론이다. 그리고 좀더 잘 놀이를 하는 경우에, 독사는 여럿이다. 혼돈(chaos)에서 걸러낼 공리들은 그들의 방식에 따라 여러 질(양이 아니라)이듯이, 그 변양의 양상들도 다양하다. 독사의 다양성이 곧 파라독사의 여럿이다. 여러 파라독사를 지니는 것이 다양체이다. 이 들중에 한 독사가 현실에서 실현된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에 내재성의 덩어리에서 사건이다. 사건은 철학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이 독사의 이야기[역사(histoire)든지 신화(mythe)든지] 전망에 대한 현실화의 문제이게 된다. 과학이 현실화의 한 부분을 함수체로 만들거나 또는 논리학자가 그 현실화에서 진리치를 구하는 것은 한 좌표계 또는 한공리계의 결심가능성(decidabilite)의 한 규정이다. 독사와 파라독사들 중에서 어느 것을 선정하는가 라는 결심가능성은 주식의 변동을 가져다 줄 것과 닮았다. 또한 마치 일기 예보에서 어떤 변수를 조금 개입한 것이 전혀 다른(예측 불가능한)결과를 생산할 수 있듯이. 우리는 이런 점에서 혁명에 미세한 변수는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런 의미에 혁명의 논의는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며, 들뢰즈는 이런 혁명의 우발성과 잠재성과 그리고 사건성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일 것이며, 우리는 인민의 의지의 소산(하나의 독사이기도 하고 파라독사이기도 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의 기운(힘, 실재성)은 내재성의 덩어리에 잠재적으로 혼재되어 있다. 그 잠재적인 능력이 그 시대의 철학적 인물이 개념의 형성, 즉 여론의 형성과 파라독사의 형성으로 현실로 등장하고 있다. 그 현실화에서 함수체나 전망상을 결심하는 잠재성을 지닌 개념이 그를 가로막고 있다. 이 두 요소는 어쩌면 관습과 관례라는 이름으로 보수주의와 협약주의에 협력하고 있다. 철학이 현실화에서 과학과 다른 것은 잠세력을 발휘하여 잠재성의 착각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점에서 잠세력의 현실화는 새로운 발명이며 창조의 길이다. 이 발명과 창조의 힘이 내재한 것은 잠재성을 추구하거나 관념과 개념을 추구하는 자에 있지 않고, 오히려 혼재된 덩어리(카오스)에 몸담고 있으면서 파라독사를 생산하는 자들에게 있다. 이 덩어리야말로 미친듯한 생성으로 왕관을 쓴 괴물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사람이 들뢰즈일까, 나일까?
** 철학은 새로운 소설인가? 신소설(nouveau roman)의 길과 같은 길인가? 들뢰즈가 철학에서 철학적 인물의 등장과 개념의 창조를 말하는 점에서, 철학은 이야기이며 신화의 발명이다.
철학은 인간이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사실을 타관찰자(기구나 도구)에 의하여 표현되는 함수체를 개념으로 삼아 작업하는 과학과 다르며, 이 함수를 하나로 엮어서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진리치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체계로 환원할 수 있다고 여기고, 그 체계의 정합성을 믿는(croyance=doxa) 논리학과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과학과도 논리학과도 뗄 수 없다는 점에서 철학은 자신의 개념과 과학의 함수체와 논리의 전망상과 삼신성(trinité)을 이루고 있다. 뗄 수 없다고 해서 이들이 서로 섞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각각은 각각의 고유성이 있다. 그래서 각 학문은 학문의 방향과 방식이 있다. 삼신의 신앙은 가위 바위 보처럼 서로 물고 물리면서 어느 하나가 승리와 가치의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이 셋 중에서 어느 한 요소로서 주장할 수 없다고 하는 점에서 이번에는 철학은 혼합체이다. 이 혼합체에서 철학의 고유성으로 개념을 창조하는 것은 그 시대의 공시태(들뢰즈의 내재성의 덩어리) 위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이 흔적은 이전의 흔적과 다르다. 왜냐하면, 한 공시태는 이전의 공시태와 차이가 있다. 이점은 기억의 자기 생성과 확장 그리고 생명의 자기 생성과 자기확장에 비유될 것이다. 화엄 사상에서 바다 위에 불쑥 솟아오르는 또는 바다 위에 도장을 찍는 모습은 흔적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흔적은 다시 난바다로 사라진다. 이 난바다는 동일 난바다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흔적은 사라지지만, 공시태가 이미 있었던 공시태가 아니라고 새로운 공시태이다. 욕망은 이 새로운 공시태에서 작동하는 한 양식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욕망의 대상은 이미 있었던 사실(이미 보았던 공시태)에서 조립적으로 만들어지는 공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시태에서 생성하려 자신의 모습과 전망상이다 - 이점에서 미래는 비결정이며 욕망의 대상이다. 욕망은 이 모습을 실현하려는 노력이며, 이 모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한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아직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습에는 현재로 보아 모자람(manque)이 있고, 거기에 투여해야할 것이 아직도 거의 무한히 남아 있다는 점에서 빈상자이다.
인간이 우주의 모습을 알려고 노력하거나 깨달으려하는 것 보다,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철학이다. 이점에서 그린다는 것은 새로운 생성이며, 새로운 형성이며, 미래에 형상을 주물럭거리는 것이다. 우주의 생성의 발견도, 과학의 발명도, 새로운 학설의 형성도, 예술의 작품도, 음악의 작곡도 새로운 시의 작업도 그리고 자기 생성으로서 인성의 실현도, 각각은 독사이면서 철학적 작업이다. 몇몇 인간이 공시태 위에서 그리는 것은 하나의 견해일 뿐만 아니라 여러 견해도 등장한다. 이점에서 각 견해는 사건들이다. 철학이 교육과 연관을 가지는 것은 이 공시태의 존속과 확장을 다음세대(새세대)에게 이전하는 것이다. 이 이전하는 공시태는 다음 세대의 순수 사건이다. 이 순수 사건의 구체적 실현태가 철학사, 철학 이야기에서 개념이다. 그래서 개념의 교육이 중요하다. (37RMH)
제7장 지각, 감화, 개념(percept, affect et concept)
철학은 과학과 예술에 무차별적으로 자유롭게 관여하는가? 일상적으로 철학이 만학의 왕으로써 생각하거나, 또는 모든 학문의 기초로 생각하는 자들에게 이 답은 그렇다 일 것이다. 이 그렇다는 생각을 지니는 사람에게는 철학이 무슨 도깨비 방망이나 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베르그송의 용어로 “우화적 기능(fonction fabulatrice)”과 같이 여긴다. 베르그송의 이 용어는 정태적 종교의 발생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단어일 뿐이다. 그렇다고 정태적 종교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정태적 종교에서 종교적 심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일 뿐이다. 이 정태적 종교가 인간의 삶에 대한 애착, 삶의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계기,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공고히 함으로써 개인의 허약함과 자연의 위협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기대심리가 있다. 이런 심성이 개인의 이기심을 조장하고 자신만의 이익과 안녕을 우선하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런 점에서 우화적 기능은 구복적 신앙과 닮았고, 자기 자식만의 안전과 편안을 기대하는 어머니의 정한수의 기도에 닮았다. 이런 종교적 기대를 철학이라는 학문에 기대하는 것은 철학이 체계와 통일성이 있다는 전제를 믿고 있는 견해(doxa)와 닮았다. 견해를 신념으로, 그 넘어서(초월하여) 신앙으로, 삼은 점에서 통일성과 체계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학문은 종교에 닮았다. 이런 종교심은 정치 권력에 대한 맹목적 추종자(빠순이)에서 드러난다. 이런 빠돌이의 담론들은 담론의 새로운 생산보다, 신앙고백의 담론(진술)을 뱉아낸다. 철학을 신앙고백의 담론으로 만드는 곳에는 항상 초월적 통일과 체계가 있다는 것은 모든 시대에 있었다. 들뢰즈의 철학이 이 담론을 순박한 여론(doxa)의 차원으로 보고, 빠돌이 아니면서 현실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담론(진술)을 제기하는 것을 파라독스(paradoxe)라고 한다. 이 파라독스의 견해들이 소수이거나 다수이거나 간에, 신앙으로서 철학의 체계와 다르다는 의미에서 계열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계열들은 여러 차이 있는 선들로 되어 있다. 이 선들의 수가 너무나 많아서 그중에서 별난 계열의 선들도 많다. 수학적으로 표현하여 여러 곡선들이 있고 그중에서 현실적으로 공감하는 곡선들도 있고, 그리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듯이 보이는 직선도 있다. 이 직선은 여러 선들 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별난 선이다. 지구상에 그어질 수 있는 여러 곡선과 달리 지구상에 그려 질 수 없다는 점에서 지구상을 넘어서, 사유의 선이다. 이 선이 체계와 통일의 선으로 간주하는 것도 독단(dogma)이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하나의 직선의 기준으로 다른 것을 곡선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들 한다. 생명현상의 관점에서 직선은 어느 생명존재에게도 불가능하다. 그들의 신체의 자라남을 시간 순으로 직선으로 표현하기도 하나 그것은 시간을 공간화하여 직선으로 도표화 한 것이다. 이것을 함수체라고 부를 수 있는 데, 이런 함수체에 함수들을 만들어 보는 것은 과학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인간이 살아온 과정에서 곧게 살아온 자의 경우는 직선으로 표시하는 경우가 있으나 곧게 살아온 자국도 어떤 직선으로 표현될 수 없고, 또는 그가 걸었던 모든 흔적을 선으로 연속적이지만 어떤 연속도 단일선이라고 할 수 있을 지라도 직선은 없다. 단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온갖 궤적을 직선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환원론자의 생각이다. 이 생각이 직선적 삶을 조망할 뿐이다. 그래야 다음이라는 것을 예측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곡선에서 다음이란 예측 불가능하다. 이는 이미 결정론자를 비판하는 베르그송이 DI에서 잘 설명한 적이 있다.
철학은, 데카르트의 신의 무차별적 자유처럼, 과학과 예술에 무차별적으로 관여하거나 주도권과 같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철학, 과학, 예술은 자연적 실재성인 질료 덩어리에 각각이 관여하는 방식이 다르다. 서로는 혼동되어서 안되고 어느 하나로 통합되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모든 철학적 논리가 과학의 체계의 논리의 극한으로서 보편논리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고, 과학의 설명의 다양한 담화가 철학의 체계 속에 통일 성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며, 과학에서 현실화(구축화) 단면이 예술의 취향에 속하는 것도 아니며, 철학의 새로운 생성작용의 사물로서 사건이 소위 말하는 예술처럼 미적 취향을 지녔으면 좋으련만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 셋은 마치 공상의 이야기 속에, 또는 정신분석학의 환상(fantasme) 속에, 함께 움직이는 중요한 자료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총체적 질료와 관계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동일한 방식으로 작용, 구축, 작성[구성]하는 것도 아니다. 각각은 질료 덩어리에 행사하는 잠재적 능력도 다르다. 그러나 그 능력이 서로 섞이는 것은 아니나, 각각이 서로 의존하듯이 함께 붙어있는 계열들과 같다. 죽비를 연상하면, 여럿으로 갈라진 가는 대나무 줄기들이 하나의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이, 각각의 계열은 서로 섞여 혼합되지 않으나, 서로 기대어 보다 분명하게 질료덩어리를 드러낸다. 물론 각각의 영역에서 한 계열을 잘 습득하고 깊이 있게 그리고 전체적 조망(위에서 내려봄)을 하는 사람은 한 영역에 있다하더라도 다른 영역을 공감과 공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영역을 단번에 담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영역은 오랜 과정 즉 계열의 과정을 겪은 사람이 구체적으로 그려내어 보여 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술에서는 신체화 된 예술가가 그래내 보여준 것이 예술 작품이다. 과학에서는 논리의 순서를 잘 따라서 단위 체계를 설명할 수 있고, 철학에서 개념을 구성체(composantes)를 형성하여 새롭게 만든 사상 즉 생성을 창조 할 수 있다. 생성의 창조란 여기서는 구체적 현실화의 사건들을 형성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37TKD)
“사유를 정의하는 것, 즉 예술, 과학, 철학이라는 사유의 3가지 커다란 형식은 여전히 카오스(chaos)에 대치하는 것, [질료적] 평면(plan)에 그리는 것, 카오스 위에 평면을 끌어내는 것이다. (QP 186)”
우리가 보기에 예술, 과학, 철학에 대한 설명에는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들뢰즈의 이 세 가지 구분에 대한 기초적 설명은 이미 이 책의 앞부분에서 나왔다.
“명제의 구절들로부터 또는 등가물로부터 철학은 개념을 끌어내는 것(개념을 일반관념이나 추상관념과 혼동해서 안 된다)이다. 반면에 과학은 전망체(prospect)를 (여기서 [의미있는] 명제를 판단과 혼동하지 말자), 예술은 지각체(percept)와 감화체(affect)를 (이것을 지각작용과 감정과 혼동하지 말자) 끌어내는 것이다. (QP 29)” 철학, 과학+논리, 예술이란 구분이 들뢰즈의 주 관심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5장에서 과학을 설명하면서 과학은 함수체(fonctif)를 형성하는 것이고, 제 6장에서 논리과학은 전망체(prospect)를 구축하는 것이라 한다. 이 점에서 보면 들뢰즈는 과학과 논리를 (QP 29)에서 같은 열에 세워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위의 (QP 186)에 이어서 “그러나 철학은 무한에 항상성(상수)을 부여하면서 무한을 구출하고자 한다. 철학은 내재성의 평면을 그린다. 이 내재성의 평면은 개념적 인물들 행위 하에서 사건들 또는 항상적 개념을 무한에 나르고 있다. 반대로 과학은 지시체를 얻기 위하여 무한을 거부한다. 그래서 과학은 단지 무한정한 배열좌표들의 평면을 그린다. 이 좌표 평면은 부분적 관찰자들[관찰도구들]의 실행에서 사물의 상태, 함수 또는 지시좌표, 명제를 매번마다 정의한다. 예술은 다시 얻은 유한으로부터 무한을 창조한다. 예술은 [교향악곡적인] 작품구성의 평면을 그린다. 이 작곡적 구성 평면은 미적 형체들의 행위 아래서 이번에는 기념물들 또는 구성된(composée) 감각들을 나른다.(QP 186)” 이를 참조하건데 사유의 세 형식이 그리는(tracer) 사태가 서로 다르다. 내재평면(plan d'immanence), 배열평면(plan de coordonnée), 작성 평면(plan de composition)이다.
첫 번째는 아직 생성하고 움직이고 있는 덩어리이다. 이 덩어리가 언어학적으로 비유하여 공시태와 닮았다. 시대에 따라 다른 공시태와 비슷한 변화덩이를 그래도 어떤 상태로서 개념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개념의 형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진위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는다. 이 개념 형성의 현실화는 현실의 표면에서 생성되는 사건들이다. 이 사건은 의미를 생산한다. 그 점에서 철학에 논리가 있다면, 과학의 논리와 달리 의미 논리이다. 들뢰즈는 이미 이 논리학의 책을 썼다(1969).
두 번째는 이 덩어리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각각의 사물의 상태에 맞게 여러 함수를 만드는 것, 즉 그물망의 던져서 한 순간 잡을 수 있는 함수체를 만드는 것은 좌표 평면이다. 이 좌표 평면을 하나의 의미체로 바꾸어 환원하여 구성된 사실에 진위를 구별하여 문장들을 연결하는 것이 논리학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움직이는 덩어리를 어떤 그물로 건질 수 있는 그물망이 아니라, 한 면(plan)이나 그 속의 조각(pan)으로 “홀로 세울 수 있는 것(tenir debout tout seul, QP 155)”은 매우 어렵지만 예술가의 행위이다. 예술은 홀로 세워서 유지하는 것이며, 이 유지는 행위자체이다. 이 행위자체에 의해 - 덩어리를 사물의 과정과 지속의 일정한 덩어리를 구축하는(composantes) 개념과 달리 - 창조된 감각에 의해 구성된 것(composées)이 자기 속에 스스로 보존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개념은 질료 덩어리의 사건을 위에서 조망한 것인데 비하여, 지각과 감화로 구축된 것으로 감각의 덩어리는 기념물이다. 이 기념물은 사건과 달리 선의 특성과 연결의 특성을 지닌다. 사건은 계열들을 지니며, 계열들 사이의 관계를 연접, 선접, 역접으로든지 관계를 묶는 항상적 덩어리 위에서 성립한다. 사건은 그래서 표면에서 그 효과가 나타나며, 그 표면은 언젠가는 사라질 운명에 있다. 예술도 기념물로서 지워지는 것이지만, 사건보다 견고하다. 기념물이 시각적 또는 청각적 효과만을 산출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기념물이 지닌 감각의 지속은 사건에서 개념의 지속이나 표면효과 보다 지속적이다. 예술에서 미의 취향이 개념의 이상보다 더 매력적이고 견인적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형이상학적 이념(이상)이, 또는 신앙적 희망(영광)이, 미적 이상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저 먼 세상에서(au-delà) 이상과 영광에는 항상 선보다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의미라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 사유는 서로 엮이고(se croiser) 서로 짜여져(s'entrelacer) 있지만, 종합도 아니고, 동일화 작용도 없다. 철학은 개념과 더불어 사건을 솟아오르게 하고, 예술은 감각과 더불어 기념물을 세운다. 과학은 함수와 함께 사물의 상태를 구축한다. 이 풍부한 천[직물]의 그물망은 각각의 정점을 갖는다. 각 정점에서, 감각은 개념과 함수의 감각이 되고, 개념은 함수와 감각의 개념이 되고, 함수는 감각과 개념의 함수가 된다.(QP 187-8)” 이렇게 들뢰즈는 각각이 다른 것 없이 성립할 수 없지만, 혼동되어서도 안되고, 또한 다른 이질적 요소들에 호소하여 각각의 평면(plan)을 생성한다. 사유는 세 가지가 서로 이질적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위험한 다른 요소들을 허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들뢰즈의 철학은 이런 구별 속에서 철학을 구출하기도 하지만, 상호 관계가 보충적이기도 하고 배제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단지 변증법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양의 변화가 또는 다른 두 영역이 변질하여 한 새로운 영역으로 전환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37TKE).
**** 참고***
들뢰즈에서 사건이란 개념에 대한 일부 인용.
(QP: 『철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hilosophie?, 1991)』)
(LS :『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 1969』
(DR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 1969』)
아래 약어 표기 다음에 나오는 숫자는 원문의 쪽 수이다.
“ 개념은 분명히 인식이지만 자기 인식이다. 개념이 인식하는 것은 순수사건이다. 이 순수사건은 자신이 그 속에 구현되는 사물의 상태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QP 36)”
“ 진솔한 역사(Histoire)가 사건으로부터 파악하는 것은 사물의 상태나 체험자 속에 이루어진 사건의 효과[결과]이다. 그러나 사건의 자기 생성, 자기 고유한 항상성, 개념과 같은 자기 입장에서 사건 등은 진솔한 역사를 회피한다. 심리-사회적 전형은 역사이지만, 개념적 인물들은 사건들이다. 때로는 우리[제4자, 4인칭(l'on)]은 역사를 따라서 또는 그 역사와 더불어 늙어 간다. 때로는 우리[제4자(l'on)]는 매우 은밀한(discrèt) 사건 속에서 늙은이가 된다. (아마도 똑같은 사건이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 제기를 한다.) (QP 106)” 들뢰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이 문제를 글 서두 첫구절에서 시작한다. 늙어서, 늦어서야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이 “철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hilosophie?)”이라고 한다.(QP 7) .
“잠재적인 것은 더 이상 혼돈적 잠재성이 아니고 항상적이 된 잠재성 즉 혼돈(카오스)을 자른 내재성 덩이(plan) 위에 형성된 본질(entité)이다. 이것을 [본래]사건(Evénement)이라 부르기도 하고, 자기 실현을 회피하는 그 무엇[본성 자연]으로부터 생겨나는 모든 것에서 할당된 몫[것]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사건은 혼돈의 상태가 전혀 아니다. 그 사건은 사물의 상태에서, 물체에서, 체험자에서, 현실화되지만, 끊임없이 자기 현실화에서 제거되기도 하고 보태지기도 하는 겁많은 비밀스런 부분이다. 이 사물의 상태와 반대로 사건은 시작도 끝도 없고. ... 사건은 현실적인 것과 구별되는 잠재적인 것이며, 혼돈되지 않는 잠재적인 것이며. .... 이 사건은 비물질적, 비물체적, 비생명적이며, 그래서 순수 예약적(pure réservé)이다. (QP 147)”
“의미(sens)는 명제의 4번째 차원이다. [첫번째는 지칭(désignation), 둘째는 표출(manifestation), 셋째는 의미화(signification)이다] 스토아학파들은 이것을 사건과 더불어 발견한다.. 의미는 명제의 표현, 사물의 표면에 속하는 비형체적인 것, 환원할 수 없는 복잡한 본질(entité), 명제 속에 본질로 위치하는(insister) 또는 하부로 존재하는(subsister) 순수 사건이다.(LS 30)” .... “스토아 학파는 이 의미를 단어도, 물체도, 감각적 표상도, 합리적 표상도 아니라고 말할 줄 알았다. 게다가 의미는 아마도 ‘중성(neutre)’일 것이고, 일반적인 것에서처럼 개별적인 것에서도 무차별적이고, 보편적인 것에서처럼 특이적인 것에서도 무차별적이고, 인격적이거나 비인격적인 것에도 완전히 무차별적이다. 이것은 아주 다른 본성(nature)일 것이다.(LS 31)”
“왜냐하면 아이러니(ironie)가 존재와 개체의 공연성(coextensivité), 또는 주어(Je)와 표상의 공연성이라면, 유머(humour)는 의미와 무의미의 공연성이기 때문이다. 유머는 표면(surfaces)와 안감(doublures)의 기술[예술]이며, 노마드의 특이성과 여전히 이전된 요행점의 기술이며, 정태적 발생의 기술이며, 순수 사건 즉 단수 4인칭의 지식 만들기(le savoir-faire)이다. 이 경우에 지칭 표출 의미와는 중단되고, 깊이와 높이도 폐기된다(LS 166). [의미는 지칭, 표출, 의미화와 다른 4번째 차원이고 순수사건에 연관한다(LS 30)]”
“이 우리(le on)는 일상적인 평범한 우리들과 매우 다르다. 이것은 인격적이고 선개체적인 특이성의 우리이며, 순수 사건의 우리이다. 이 순수사건에서 비가 오다(il pleut)와 마찬가지로 그가 죽는다(il meurt). [전자의 비인칭과 후자의 인칭은 순수 사건에서는 모두 우리이다. 비를 오게하는 주체로서 자연(신, il)도 죽는 사람인 그(il)도 우리라는 중성으로 대체해 쓸 수 있는 곳은 순수 사건 속에서이다.] 그 우리의 탁월함은 사건 자체의 탁월함이며, 4인칭의 탁월함이다. 따라서 사적 사건도 집단적 사건도 없다. (LS 178)” 여기서 우리가 정한 것으로, “우리”라는 개념과 ‘우리들’이라는 개념을 구분하였다. 전자는 제 4인칭의 의미를 지니고, 우리들은 1인칭 복수의 지칭이다.
“명제의 분신(double)은 우리가 보기에 명제자체로부터도, 명제를 정식화하는 자(celui)로부터도, 명제가 담지하는 대상으로부터도 동시에 구별된 듯이 보인다. 이 분신은 주체와 대항으로부터 구별된다. 왜냐하면 이 분신을 표현하는 명제 밖에는 분신이 존재하지 못하지 때문이다. 이 분신은 명제자체로부터 구별된다. 왜냐하면 이 분신은 논리적 속성 즉 ‘언술할 수 있는’ 또는 ‘표현할 수 있는’ [속성]것처럼 대상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제의 “복잡한 주제(thème complex)”이며 따라서 인식의 제일 항목이다. 이 분신을 대상으로부터(예를들어 Dieu, le ciel)도, 명제로부터(Dieu est, le ciel est bleu)도 동시에 구별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동사의] 부정법형 또는 분사형으로 언표할 것이다. 즉 (Dieu-être Dieu-étant l'étant-bleu du ciel)으로 언표할 수 있다. 이 복잡성이 이념적 사건(événement idéel)이다. 이것은 객관적 본질(entité)이다. 그러나 이 본질에 대해, 이 본질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 이것은 짝퉁존재(quasi-être), 의외존재(extra-être), 실재적이고 가능적이며 심지어는 불가능하기까지 한 대상에 공통하는 최소 존재(le minimum d'être)이면서 본질로 위치하며(insister) 또는 하부로 존재한다(subsister). (DR 202)" [37TKE]
결론(Conclusisn: Du chaos au cerveau)
당연히 결론은 이 책의 요약과 관점을 제시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순서는 바뀌어 예술에 대한 간략한 요약, 그리고 과학, 그 다음으로 철학을 설명하고, 이 셋은 하나의 통일이 아니라, 세 개의 다발이며, 이것이 두뇌라고 한다. 이 두뇌가 세 가지 역량을 지녔다. 혼돈(chaos)상태를 한 순간(지체하게 만들면서) 우리 앞에 어떤 질서 (그러나 완전한 질서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분신질서(chaosmos, 짝퉁질서)를 세우는 작업을 행한다. 그래서 그 작업이 영역에 따라, 형상주체(sujet, 또는 superjet)로서 짝퉁의 형식을 내세우거나, 상태 속에서 즐기는 내재주체(injet)이거나, 또는 대상을 향하여 인식하려는 노력의 가능주체(éjet)가 있다.
들뢰즈에게 형용모순인 용어 혼돈질서(chaosmos)라는 용어는 흥미 있다. 인간은 세가지 사유형태로 작업을 한다. 철학 과학(논리), 예술(기술)은 혼돈인 것으로 겉으로 보이나, 사실 혼돈자체 즉 질료적 내재성을 잘(전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해하려고 들여다보는 순간에 그 혼돈은 질서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혼돈질서는 인간이 바라는 바를 가능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잠재성이다. 이 잠재성에서 철학은 혼돈질서 자체의 생성과정을 탐색하고, 과학은 혼돈을 질료로 밀치고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질서적 측면을 뽑아내고 논리 또는 정의(규정)를 한다. 그리고 예술을 과학의 한 방식과 유사한 듯하지 하지만, 과학과 달리 그 만들어질 수 있는 모습 그대로 세워 두려고 한다. 언제 없어질지라도 그 모습을 한번 세워보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은 혼돈질서의 내부를 끊임없이 염탐하여 현재의 혼돈질서가 새로운 혼돈질서와 차이가 있음을 드러낸다. 그 차이는 혼돈질서의 반복이지만, 차이가 있는 것은 예술이, 인쇄의 동일한 판을 찍는 것과 달리, 항상 새로운 다른 판을 세워야 나간다는 것이다. 이새로운 앞선 판과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거의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혼돈질서의 차이를 지닌 반복 위에서 작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이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은 혼돈질서의 내재적 덩이를 끊임없이 염탐하고, 그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틈(균열)을 만들면서 나아가기 때문이다.
*** 덧글
들뢰즈은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그런데 그 뒤에 하나가 숨겨져 있다. 그의 세 가지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그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고 또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만든 발판일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나는 대로 세[삼]판에 대한 것을 몇 가지를 제시해 보자.
『차이와 반복, 1968』에서 con-sist, sub-sist, in-sist: ex-plication com-plication, per-plication. 도 세 차원으로 되어 있다.
『의미의 논리, 1969』에서 기존의 지시화(designation), 표출화(manifestation), 의미화(signification)에 대하여 기존의 세판이 있고, 또 하나를 덧 붙여서 의미(sens)논리를 만들었다. 의미 논리는 질료적 측면이라기보다 사유의 이완(또는 희박화)에 대한 논의일 것이다. 기관없는 몸체로서, 발없는 발이 수만리를 날아다니듯이, 인간의 사유가 닿은 어느 곳에서든지 생겨나는 논리이다. 이 논리는 진위나 선악이나 미추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에 지각과 감화에 대한 어떤 영향을 미친다. 감화의 영향이 적극적이면 온몸이 희열을 느끼거나 아프거나 한다. 그래서 그 몸없는 어떤 움직임으로서 의미는 여론이 의미화하는 것과는 다르다. 여론의 의미화는 이데올로기적 이이며,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데 비하여, 의미의 파라독스는 지각하고 감화하는 자들이 기뻐하고 슬퍼하고 몸이 날아갈 것 같거나 생리적 결함없이도 몸 구석구석 바람이 드는 듯이 시리고 아프다는 것이다. 이 이런 이야기는 자식 많이 키운 어머니한테서 들을 수 있는 소리이다. 안 그런 감. 이런 문제는 (사유 상상의) 이미지의 결합 방식에 있을 것인데, 이 결합의 방식은 또 세 가지 이다. 순접, 선접, 역접 등이다.
이 책 『철학이란 무엇인가. 1991』에서 세판은 여러 곳에 나온다. 시작에서 개념을 가까이 하는 방식에서 친구(연인), 구혼자, 경쟁자, 관계로 세판으로 볼 수 있고, 제1부에서 내재성의덩이(plan d'immanance), 개념적 인물(personnages conceptuels), 지리철학 등으로 세판을 만든 것, 제 2부에서 철학, 과학, 예술로 설명하는 것도 이러하다.
그래도 인칭에서 나(je), 너(tu), 그(il, elle)도 세 가지인데, 들뢰즈는 또 하나 붙이기도 한다. 제4인칭으로 ‘on’이 있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가 뭔가 딴소리를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책의 전편에서 구성방식에서 과학에는(composée), 철학에는(composant) 예술에는(Composition)을; 64쪽에선 철학(개념, concept), 과학(전망체, prospect), 예술(지각과 감화, percept et affect) 그런데 제 2부(111-118)에서는 철학(개념), 수학(fonctif)와 논리(prospect), 예술(지각과 감화)로 약간 바꾸었다. 116쪽에서는 카오스는 아니지만 그런 상태 속에 어떤 생성의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 즉 잠세성(variablité)을 상정하고, 잠세성의 드러나는 또는 표시할 수 있는 방식을 각각, 철학(variation), 예술(varieté), 과학(variable)으로 세판을 나눈다.
예술의 작가들의 작품 구성(composition)과 작품들에 관해서 설명하면서, 들뢰즈는 세 사람씩 짝을 짓기를 좋아한다. QP의 7쪽에서 티티앙(Titien), 터너(Turner), 모네(Monet), 171쪽에서 고흐(Gogh), 고갱(Gauguin), 바꽁(Bacon), 172쪽에서 몬드리앙(Mondrien), 칸딘스키(Kandinsky), 쿱카(Kupka) 등도 마찬가지이다.
“철학은 세 가지 요소를 내보인다. 각각은 다른 두 가지에 응답한다. 그래도 각각은 각자로서 고려되어야 한다. 철학이 그려야할 선철학적 평면(immanence), 철학이 발명하고 살아가야할 철학적 편들기 인물(insistance), 철학이 창조해야할 철학적 개념들(consistance), 즉 철학의 세판은 그리기 발명하기 창조하기이다(QP 70)”이라 한다.
또 이 책(QP 187-188)에서는 들뢰즈는 세 가지 사유가 서로 엮여있고 짜여져 있다고 한다. 철학은 개념과 더불어 사건을 솟아나게 하고, 예술은 감각(작용)과 더불어 기념비를 세우고, 과학은 사물의 상태를 함수로 구축한다고 한다. (QP 187-188)
카오스에 마주하는 세 가지 사유형식이 있다. 철학은 내재성의 덩이를, 과학은 무한정한 좌표배열을, 예술은 구성면을 그린다고 한다. (QP 186)
감각의 구성 작용에 대해 설명하면서 첫 번째 요소는 살(chair)이고 둘째 요소는 골격 즉 집(maison, 은유적 표현도 된다)이고, 세 번째는 우주(univers) 즉 질서(cosmos)라 한다. (QP 168-170)
[삼]세판의 통일(unite)이 아니라, 형식의 다발(joction)이 두뇌(cerveau)이다(QP 196); 우리는 이에 대해 우리 나름으로 해석을 덧붙여 보자. 그 들뢰즈 말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 // 두뇌(cerveau)가 정신(esprit)이면, [신체와 관계없다는 측면에서, 순수사유라는 의미에서], 이것이 만든 어떤 형상은 원리나 진리나 실재가 아니라, 그 시대의 인민이 만든 근본여론(Urdoxa)과 같다. 근본여론을 인민으로부터 장악한 사제이자 왕들이 정치를 해왔다. 이 근본신앙(Urdoxa)은 인류가 자연에 대한 보복을 막으려는 심정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자연의 일부로서 사라지는 몸에 대해 걱정하는 정신은 타자(몸)에 관여하는 방식을 갈망한다. 여기서 행위주체는 타자없는 또는 기관없는 형상주체(sujet 또는 superjet, 짝퉁주체)이다. 이 주체가 몸에 형상을 부여하여 형상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몸 속에서도 운동과 속도가 있고, 이에 관여 주체도 함께 운동과 속도를 지닌다. 이 때의 주체를 두뇌주체라고 한다. 이 두뇌주체는 힘 또는 에너지인데,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영혼이 내재성의 덩어리 - 우리가 보기에 몸 - 에 들어가 즐기는 것은 몸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스피노자의 즐김(juissance)와 같다. 이 즐김은 생명의 도약에서 생명체가 끊임없이 변전하여 온 과정과 같다. 여기서 내재주체(injet, 연결주체)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내재주체가 타인과 타자와 관계에서 함께 살아가며 생각하며 느끼는 것을 만들 수 있다. 이 공동체는 자연에 대한 위험을 방어하는 힘을 어느 정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새로운 방식으로 나아간다. 이 새로운 방식은 여론으로서가 아니라 파라독스가 그 길을 연다. 이 길이 타인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낯선 것일지라도 인민이 지각과 감화로서 따른다. 이런 의미에서 타인과 관계로 나아가는 주체를 발산주체(éjet, 소통주체)라 부를 수 있고, 다른 한편 이런 주체의 시각은 자신의 위치에 서서 또는 위에서 총합하는 것이라기보다, 공동체에 서서 또는 그 위에서 총합하는 것이다.(37UK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