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들뢰즈/가타리(G. Deleuze et F. Guattari), 김재인역, 새물결, 2001(1980). 1000쪽.
목차
역자 서문 - 연애에 관하여
이탈리아어 판 서문
머리말
1. 서론 - 리좀
2. 1914년 -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3.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5.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
6. 1947년 11월 28일 - 기관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7. 0년 - 얼굴성
8. 1874년 -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9. 1933년 - 미시정치와 절편성
10.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11. 1837년 - 리토르넬로에 대해
12.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13. 기원전 7000년 - 포획 장치
14. 1440년 -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5. 결론 : 구체적인 규칙들과 추상적인 기계들
[들뢰즈의 배치는 리좀이 탈영토화를 거쳐서 실질적 활용론으로 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리좀 전쟁기계]
*** 연대순 배치
3.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3. 기원전 7000년 - 포획 장치
5.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 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
7. 0년 – 얼굴성 319-363
12.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14. 1440년 -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0.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11. 1837년 - 리토르넬로에 대해
8. 1874년 –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2. 1914년 -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9. 1933년 - 미시정치와 절편성
6. 1947년 11월 28일 - 기관 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227년 서하(宁夏, 저하) 정벌과 징키스칸 사망]
[‘정화의 대원정’: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시절 1405년부터 1433년까지 환관 정화(鄭和, 1371-1434)가 수백척의 선단을 이끌고 난징을 출발해 동남아, 인도, 중동을 거쳐 동아프리카까지 7차례의 항해를 한 역사. / 정화(鄭和, 1371-1434, 본명: 마삼보馬三寶)는 명(明)조 장군(將軍), 환관, 무관(武官), 제독(提督), 전략가, 탐험가, 외교관, 정치가.(50VKE)].
[왜 서양사 사건에서 제로년 다음으로 1440년(해양 원정)일까? / 한글 창제 1443년인데.. (50SKH)]
제14장 1440년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440년 지리상의 발견시기 - 난 바다로 길을 낸다]
§14.00. 1440: Lelisse et le strié 592-625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들뢰즈/가타리(Deleuze et Guattari), 김재인역, 새물결, 2001(1980). 903-953.
서양 문화사 사건에서 0(zero)년은 다음은 1440년이다. 1227년은 서양사가 아니라 동양사이며 초원의 매끈한 공간이다. 그런데 1440년은 포르투칼인의 개척에 의한 바다의 매끈함이있다. 그럼에도 바다의 노마드 서양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에서 사실상 획을 가른다. 초원과 사막. 그리고 서양이 큰 사발과 같은 지중해를 벗어나 대양으로 나가는 것은 초원과 사막과는 또 다른 노마드의 변양태를 맞이한다(?). 초원의 노마드가 전사로서 전쟁기계였다면 바다의 노마드가 해적으로서 전쟁기계가 아닐까? 파괴와 섬멸전의 전자와 달리 후자는 약탈과 국지전이 아닐까? 영국, 미국, 일본의 약탈의 방식은 바다 노마드에 해당하지 않을까? 이에 저항은 국지전을 치러야 하는 대륙들 러시아, 중국, 인도 등이 아니겠는가? - 트럼프가 (핵)공포의 평화를 강요하면서 약탈하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한다. 평화의 인간 띠를 이루는 인도주의가 답일 것이다. (50UKI)
기술(직물) 모델, 음악 모델, 바다 모델, 수학(다양체) 모델, 물리학 모델, 미학(노마드 예술) 모델 이외에도 모델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중에서 중요 주제로 내세운 것은 바다 모델이다. 서구인들이 지중해라는 큰 대야를 벗어나 난바다로 나가면서, 자신들의 위계적 지식 또는 정도차의 지식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다만이 아니라 사막도 그러했지만, 그들의 영역이 아니었다. 이제 바다로 나서면서 하늘 또한 구획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층위라는 것이 인간이 만든 (인위적) 구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질료의 흐름 위에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며 이동하고 삶을 영위할 것인가? 고정된 선분에서 보는 기하학적 관점이 아니라 다양한 선분들의 거리와 방향 그리고 속도에서 보는 다른 기하학적 관점이 필요할 것이다. 1400년 경에 부딪힌 문제거리가 1859년에 가서야 학문적으로 다른 방향이 주어진다고 하면, 인류의 인식수준은 아직도 낮은 단계이며, 인식발달 과정은 인민의 인식 수준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다중지성이라는 인식 다양체는 인민의 흐름 위에서 이루어지는 추상체(구성체)일 것이다. 이 추상체라는 기계가 활동하는 생활하는 조직화하는 것은 어쩌면 단순할 것이다. 단순하다는 것은 단위들이 경계 없이, 위계 없이, 정도 없이, 수적 다수를 넘어선 다양체로 움직인다는 것을 자각하는데 있을 것이다. 이 움직임의 자각, 자유에 대한 자각이 온영혼이고, 온영혼에 합일하면서도 자기를 유지하는 각 영혼이 개인의 인격성일 것이다. 자기 영혼의 온생성이, 소통에서 자유로운 되기, 이것이 영혼의 욕망일 것이다. (50UMI)
*** 내용
제14장 1440년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 1440: Lelisse et le strié 592-625
* Crazy en bandes, Vermont 1865, in Jonathan Holstein, quilts, Musée des arts décoratifs, Paris, 1972.
- Modèle technologique(textile). - Modèle musical. - Modèle maritime. - Modèle mathématique(les multiplicité). - Modèle physique. - Modèle esthétique(l’art nomade).
§14.00. 그림(592, 905): 조각보 붙이기(Crazy en bandes)로 된 퀼트(quilts), 장식예술 박물관 소장, 파리. 1972. [이 퀼트 사진이 미국 조나단 홀스타인 수집품에서 나온 것으로 그 당시에는 조각붙이기(Crazy en bandes)란 이름이었던 모양이다.]
§14.001 [서설 907-908] [Introduction 592-593]
매끈한 공간과 패인 공간, 유목적 공간과 정주적 공간, 전쟁 기계가 전개되는 공간과 국가 장치에 의해 설정되는 공간 - 이 두 공간의 본성은 전혀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종류의 공간을 단순하게 대립시킬 수도 있다. .. 게다가 이 두 공간은 사실상 서로 혼합된 채로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392, 907)
홈이 패인 공간에서는 사막조차 조직화되며, 매끈한 공간에서는 사막이 퍼지고 확장되어 나간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진행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혼합되어 있다고 해서 권리상의 구분, 두 공간의 추상적 구분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두 공간이 결코 같은 방식으로 교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92, 907)
§14.01. (직물의) 기술모델 908 Modèle technologique (textile). 593.
기술모델 Modèle technologique
직물은 원칙적으로 홈이 패인 공간으로 규정될 수 있는 몇 가지 성격을 갖고 있다. 우선 직물은 두 종류의 평행한 요소로 구성된다. 가장 단순한 경우 한쪽은 수직, 다른 한쪽은 수평으로 이루어져 이 두요소가 교직되고 수직으로 교차한다. 둘째로 이 두 종류의 요소는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다. 한쪽은 고정되고 유동적인 다른 한쪽은 고정된 쪽의 위아래를 통과한다. 르루아-구랑은 이 “고정된 것과 유연한 것”이 엮여지는 독특한 형태를 바구니 짜기뿐만 아니라 편물 세공 등 대바늘과 뜨게실, 씨실과 날실을 이용한 짜기[베틀짜기]에까지 적용해 분석한다. ... 셋째로 이렇게 해서 홈이 패인 공간은 필연적으로 제한되며 적어도 한쪽에서 닫힌다. 직물의 길이는 무한하더라도 폭은 날실의 틀에 의해 한정되기 때문이다. 왕복운동을 하려면 당연히 공간이 닫혀야 하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이러한 공간은 필연적으로 앞면과 뒷면을 갖고 있다. (593, 908)
그러나 고정된 것과 유연한 것의 조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 중에서도 펠트는 이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데, 이것은 마치 “반-직물(anti-tissu)”처럼 보인다. 펠트에서는 개별적인 실이나 교차를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압축에 의해(예컨대 섬유블록을 앞뒤로 교대로 굴리는 방식으로) 얻어지는 섬유의 얽힘만이 있을 뿐이다. 아주 작은 섬유 조각들이 서로 얽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서로 뒤엉켜놓은 집합체는 동질적이지 않다. .. 유목민의 기술혁신력에 대해 가장 회의적인 공계가들 조차 적어도 펠트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594, 908-909)
정주민에게서는 의복-직물과 태피스트리-직물이 신체나 외부 공간을 고정된 집에 병합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직물은 신체나 바깥을 닫힌 공간 속에 통합시킨다. 하지만 이와 달리 유목민이 직물을 짤 때는 의복이나 집조차도 바깥 공간에, 즉 신체가 움직이고 있는 열린 매끈한 공간에 맞춘다. (594, 909)
물론 펠트와 직물 사이의 수많은 교착 형태나 혼합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양자의 대립을 좀 더 어긋나게 하는 것은 없을까? 가령 뜨개질(les aiguilles)에서 바늘은 홈이 패인 공간을 떠나가며, 한쪽 바늘은 날실의 역할을 다른 한쪽 바늘은 씨실의 역할을 담당하나 바늘 간에 이러한 역할을 상호 교차한다. (594 909)
이에 반해 코바늘 뜨개질(le crochet)은 짜나가는 공간이 중심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방향으로 열린 공간을, 즉 모든 방향으로 늘어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그린다. 그러나 이보다 한 층 더 중요한 것은 중심테마나 모티프를 갖고 있는 자수와 천 조각을 무한히 하나하나 연속적으로 이어가는 패치워크(patchwork) 간의 구별일 것이다. 분명히 자수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고정된 것과 유동저긴 것을 갖고 놀라울 정도로 복잡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패치워크 또한 나름대로 자수에 가까운 테마나 대칭성, 공명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간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594, 909-910)
“그녀는 벌써 15년째 그 일에 매달리고 있다. 어디를 가건 가지각색의 자투리 천 조각들을 너덜너덜하고 땟자국이 선명한 찌그러진 가방에 넣고 다닌다. ... 그래서 마치 퍼즐 조각들처럼 천 조각들을 옮기고 다시 맞춰보고, 다시 가만히 살펴본 다음 떼었다가 붙이기를 반복하면서 인내심을 시험하기라도 하듯 가위를 사용하지 않고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천 조각들을 잡아 당겨 배치를 바꿔나갔다. .. ” (595, 910)
패치워크(patchwork)는 말 그대로 하나의 리만 공간이며 아니 오히려 리만 공간이 바로 패치워크라고 할 수 있다. 패치워크를 만들기 위해 아주 특수한 작업모임이 만들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미국에서 퀼팅 파티quilting party의 중요성과 함께 여성의 집단성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모임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를 생각해 보라). 패치워크의 공간은 이 “매끈하다는 것”이 등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무형의(amorph), 무정형의 공간으로서 옵 아트(op’art)를 예시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해준다. (595, 910-911)
이와 관련해 특히 흥미로운 것은 <퀼트(Quilt)>의 역사이다. 퀼트란 작은 천 조각을 이어 붙인 두 개의 보를 하나로 꿰맨 것으로 때로는 사이에 심을 넣기도 한다. 그래서 앞면과 뒷면이 있을 수 없다. [미국의] 짧은 이민의 역사(신세계를 찾아 유럽을 떠난 이주만들) 속에서 퀼트의 역사를 살펴보면, ... (595, 911)
패치워크는 이주의 진행과정에 따라 또 유목과의 친화성의 정도에 따라 이민이 걸어온 궤적의 이름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궤적을 “대표하게” 되고 열린 공간에서의 속도나 운동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게 되었다. (595-596, 911)
*참조***
1. 퀼트(Quilt)란? : 조각 작업(Patchwork)후 솜과 뒷감을 대고 도안대로 누빔작업(Quilting)을 하는 것을 말한다.
2. 퀼트의 종류
1) 샘플러퀼트(Sample Quilt) : 각기 다른 여러 가지 형태의 퀼트 패턴들을 모아 만드는 작업으로써, 각 패턴들마다 다양한 도안과 체계적인 패치워크, 특히 색상 배합의 중요성을 배울수 있는 퀼트 교육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기법입니다.
2) 크래이지 퀼트(Crazy Quilt) : 패치워크 종류 중 가장 오래된 스타일입니다. 빅토리언 시대의 경향이 확실히 돋보이는 낭만적인 퀼트 형태이며 패더 스트치(Feather Stitch) 하나만으로도 조각의 이음선을 따라 마음껏 스티치를 즐길 수 있습니다. 광목이나 어떤 밑감 위에 비대칭적이고도 불규칙한 형태로, 머리에 즉흥적으로 떠오른 모양의 본을 이용할 수 있으며, 다양한 종류의 재료와 자수, 울, 실크, 새틴, 벨벳 등을 썩어 쓸수 있는 자유로움이 특징입니다.
3) 화이트 퀼트(White Quilt) : 백색 또는 아이보리 색상으로 패치워크 없이 천 위에 도안을 디자인하여 퀼팅하는 기법. 퀼팅라인이 전면에 배치되어 노력이 많이 요구되는 매우 아름답고 섬세한 작업입니다. 트라푼타(도안의 뒷면을 찢어 솜을 넣어 주고 줄기나 가장 자리 부분의 가는 선은 면실이나 울사를 넣어 주는 방법)을 이용해 입체감을 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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퀼트는 라틴어의 culcita(속을 채운 봉투)에서 유래되었다. / 의미는 깃털이나 양모 등을 넣은 덮개를 씌우기 위해 사용되는 「침대보」등을 뜻하며 불어의 고어인 뀔트(quilte)에서 영어로 옮겨왔고 BC 이후부터 퀼트(quilt)란 말이 사용된다. / 기원전 6천년 경 고대 이집트시대 때 이미 섬세하고 정교한 퀼팅을 엿볼 수 있다. / 이후 유럽으로 전해져 귀족부인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장식성을 겸한 퀼트가 발전을 하게 되었다. / 이 유럽 퀼트가 신대륙으로 건너가 오늘 날 퀼트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아메리칸 패치워크 퀼트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 1620년부터 영국인들은 새로운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주를 하면서 이주민들이 퀼트를 갖고 갔는데 이는 비록 몸은 모국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들이 영국적 취향을 그대로 지닌 채 유럽과의 정신적, 심리적 유대를 맺고 있었음을 뜻하며 초기의 퀼트는 유럽적 전통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 미국에 전해진 퀼트는 서부개척시대를 거치며 본격적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궁핍했던 시절, 오랜 세월동안 사용하여 낡아지기 시작한 헌옷의 조각들을 이용하여 방한을 위한 침대커버나 커텐 이불 등의 덮을 것과 입을 것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곧 미국 퀼트의 기원이 되었다. / 이러한 실생활에 입각한 실용주의로 인해 17-18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퀼트의 대부분은 폐품을 이용하는 주부들의 사랑과 지혜가 배어 있으며 이로 인해 실용퀼트는 크게 발전되었다./ 미국의 퀼트는 대다수의 하층 여성에 의해 주로 지방을 중심으로 번창했으며 여성들에게 바느질손을 놀리면서 이웃과 따뜻한 대화를 나누며 사귈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는 퀼팅비[quilting bee]와 패치워크 파티[patch work party]라는 두 개의 모임으로 구분된다. / 이처럼 여성들의 모임은 아플리케나 평범한 자수로 조각조각의 바느질 작업을 통하여 커다란 전체의 퀼트를 만들었고 또한 자치적 모임에서의 퀼팅은 협동심을 발휘하게 하였다. / 한편 19세기에 들어와서 미국의 퀼트는 매우 발전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미국의 모든 가정이 퀼트에 참여 할 정도로 퀼트 붐이 일었다. 면직물의 자체 생산으로 다양한 색상과 패턴의 값싼 직물이 대량 생산 됨으로써 퀼트가 더더욱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다시 유행하고 있는 앤팈퀼트는 바로 이 시기의 작품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1960년대의 여성운동으로 예술가들이 퀼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퀼트는 일일이 한땀 한땀 손바느질로 완성하던 것이었지만 재봉틀이 생산되면서부터는 단시간에 해결할 수 있는 머신퀼트라는 새로운 영역이 생겨나게 되었다. / 이제 퀼트는 전통적인 생활 퀼트의 영역을 벗어나 예술적인 감각과 기교를 더한 아트[art]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2006.03.16
§14.02. 음악 모델 912 Modèle technologique (textile). 596
음악모델 (912) Modèle musical. 596
매끈한 공간과 홈패인 공간 간의 단순한 대립과 복잡한 차이들, 더욱이 비대칭적인 상관관계를 처음으로 전개해 나간 사람은 불레즈(Pierre Boulez, 1925-2016)였다. .. 우선 단순한 차원에서 블레즈의 이론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즉 매끈한 시간-공간은 헤아리지 않고 차지할 수 있지만 홈이 패인 시간 공간을 차지하려면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또 비계량적 다양체와 계량적 다양체, 방향적 공간과 차원적 공간의 차이를 감각하고 지각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블레즈는 이러한 차이가 음(音, sonores)적이고 음악적인(musicaux) 것이 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당연히 그의 개인적인 작품은 음악적으로 창조, 재창조된 이런 관계들로 만들어 진다. (596, 912)
둘째 차원에서 보자면, 공간을 절단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기준에 따라 정해지는 반면 다른 하나는 불규칙적이고 비규정적인 것으로 임의대로 절단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다른 차원에서 보자면 주파수가 음정들에, 즉 절단된 사이에 분배되는 경우와 절단 없이 통계적으로 분대되는 경우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596, 912)
홈이 패인 것은 항상 하나의 로고스를, 예를 들어 옥타브 같은 것을 갖는데 반해 매끈한 것은 하나의 노모스이다. 불레즈는 이 두 가지 공간의 교통(la communisation), 즉 [두 공간의] 교체(alternances)와 중첩(superpositions)에 관심을 갖고 있다. (597, 913) [인류의 공시적 추억과 개인의 통시적 추억은 소통, 즉 교체하고 또 중첩한다. 이런 능력은 추억을 활용하는 기억의 권능이다. ]
왜 옥타브는 나선 원리에 따라 재생산되는 “비-옥타브 형식의 음계”로 교체될 수 있는가? 어떻게 [음의] “짜임”에 영향을 미쳐 고정된 등질적 가치를 잃게 만들어 옵 아트(op’art)의 변형에 비견할 만한 사운드 아트(son’art: 음 예술)의 변형을 지지하면서 시간 한 가운데서의 변동과 음정에서의 이동의 버팀목이 될 수 있도옥 만들 수 있을까? (597, 913)
다시 처음의 단순한 대립으로 되돌아가 보기로 하자. 홈이 패인 것이란 고정된 것과 가변적인 것을 교차시켜 서로 구별되는 형식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연속적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 수평적 선율의 선들과 수직적 화음의 판들을 조직하는 것이다. 매끈한 것이란 연속적 변주, 형식의 연속적 전개, 리듬에 본래적인 독자적 가치를 이끌어 내기 위한 화음과 선율의 융합, 수직선과 수평선을 가로지르는 사선의 순수한 줄(le pur tracé d’une diagonale) 을 가리킨다. (597, 913)
§14.03. 바다 모델 914 Modèle maritime. 596
바다모델 914 Modèle maritime
물론 매끈한 공간뿐만 아니라 홈이 패인 공간에도 점, 선, 면은 존재한다(입체도 존재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당분간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홈이 패인 공간에서 선이나 궤적은 점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 즉 한 점에서 또 다른 점으로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매끈한 공간에서는 정반대로 된다. 즉 점이 궤적에 종속된다. 유목민에게서 의복-텐트-바깥 공간이라는 벡터가 이미 그러했다. 주거는 이동에 종속되고 안쪽 공간은 텐트, 이글루, 배 등 바깥 공간에 순응한다. 물론 매끈한 것이나 홈이 패인 것에서도 모두 정지와 궤적은 존재한다. 그러나 매끈한 공간에서는 궤적이 정지를 유도하며, 여기서도 여전히 간격이 모든 것을 포괄하며 간격이 실체이다(리듬적 가치는 이것에서 생겨난다). (597, 914) [90도 또는 180도를 회전하는 공간의 궤적은 정지의 공간과 다른 좌표설정이 필요하다.]
매끈한 공간에서 선은 차원이나 계량적 결정인(une détermination métrique)이 아니라 벡터, 방향이다. 이것은 방향의 변화를 수반하는 국지적 조작을 통해 구성된 공간인 것이다. (597-598, 914)
매끈한 공간은 형식화되고 지각된 것보다는 사건들이나 <이것임들(heccéités)>에 의해 점유된다. 그것은 소유(de propriétés)의 공간이 아니라 변용태(d’affets)의 공간이다. 그것은 광학적(optique) 지각이라기보다 촉지적(haptique) 지각이다. 홈이 패인 공간에서는 형식들(les formes 형상들)이 하나의 질료(une matière)를 조직하는데 반해, 매끈한 공간에서는 재료들(des matériaux)이 힘들을 지시하든가 아니면 힘들의 징후노릇을 한다. 이것은 외연적(extensif) 공간이 아니라 강렬한(intesif) 공간, 측량(de mesures)의 공간이 아니라 거리(de distance)의 공간이다. 외연(Extensio)이 아니라 강렬한 내포적 공간(spatium, intense)인 것이다. 유기체 조직이 아니라 기관없는 몸체인 것이다. 여기서 지각은 측정이나 소유보다는 징후나 평가에 의해 행해진다. 사막, 스텝, 빙원에서처럼 매끈한 공간을 강렬함들, 바람과 소음, 힘이나 촉각적ㆍ음향적 질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얼음이 깨지는 소리나 모래알의 노래. (598, 914-915)
여기서 바로 바다라는 아주 특수한 문제가 제기된다. 왜냐하면 바다야말로 특히 빼어난 매끈한 공간이지만 점점 엄격해져만 가는 홈 패임의 요구에 가장 먼저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육지와 가까운 곳에서는 제기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바다에 홈이 패인 것은 원양항해 때문이었다. 해양 공간은 천문하과 지리학이라는 두가 성과에 기초해 홈이 패였다. 별과 태양의 정확한 관찰을 통해 성립하는 일련의 계산에 의해 얻어낸 점(le point). 그리고 경선과 위선, 경도와 위도를 교차시켜 이미 알려져 있는 지역이나 미지의 지역을 (멘델레예프 주기율표에서처럼) 격자 모양으로 표시해 놓은 지도(la carte)가 그것이다. 포르투갈인들의 주장대로 1440년경을 최초의 결정적 홈 패임이 일어난 시점이자 대발견이 가능하게 된 전환점으로 봐야 할까? 우리로서는 쇼뉘(Chaunu, 1923-2009)의 주장에 따라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이 바다위에서 대립하면서 점진적으로 홈 패임이 장기간에 걸쳐 성립되는 것으로 보고 싶다. (598, 915)
왜냐하면 경도에 의한 위치 파악은 아주 늦게 등장한 것으로, 이전에는 우선 바다의 바람, 소음, 색깔과 음향 등 경험에 기초한 복잡한 유목적 항해술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방향성을 갖지만 전(前)천문학적인 아니면 이미 천문학적인 항해술이 출현하였는데, 조직적 기하학에 의지하고 있던 그것은 위도의 조작에만 의지했기 때문에 “배의 위치를 측정할” 수 없었고, “번역 가능한 일반화”를 결여했기에 진정한 지도라고 하기는 힘든 항해도만을 사용했다. 이후 이 원시적 천문 항해술은 인도양의 위도라는 아주 특수한 조건을 배경으로 또 다음에는 대서양의 타원형 항로를 매개로 진보한다(직선공간과 곡선공간). 이리하여 마치 바다는 단순히 모든 매끈한 공간의 원형일 뿐만 아니라 최초로 홈 패임을 경험하는 공간처럼 보인다.(598-599, 916) - [지중해 시대에는 위도가 필요 없었고, 경도만이 필요했다.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적도를 넘어서면(1440년경), 위도뿐만이 아니라 천문학에서 다른 별자리(남극성)가 필요하다.]
이러한 홈파기는 점진적으로 확대되면서 모든 장소, 모든 면을 바둑판처럼 나눠 나간다. 상업도시들이 이러한 홈파기에 참여해 종종 이를 혁신시키기도 했지만 오직 국가만이 이를 끝까지 밀고 나가 완성시킬 수 있었으며, “과학 정치(politique de la science)”라는 세계적 층위로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차원적인 것(un dimensionel)이 조금씩 확립되어 가면서 방향적인 것(le directionnel)을 종속시키고 그것에 중첩된 것이다. (599, 916)
바다가, 즉 매끈한 공간의 원형인 바다가 동시에 매끈한 공간의 모든 홈 파기의 원형이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막의 홈 패임, 하늘의 홈 패임, 성층권의 홈 패임(이 때문에 비릴리오는 방향 전환으로서 “수직적 연안”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매끈한 공간이 최초로 순치된 것은 바다에서인데, 홈이 패인 것을 정비하고 강요하는 모델이 여기서 발견되었으며, 나중에 그대로 사용된다. (599, 916)
즉 바다는 결국 홈파기의 끝에서(a l’issue de son striage) 일종의 매끈한 공간을 재부여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먼저 현존 함대가 다음으로는 전략 잠수함의 항상적 운동이 이 공간을 차지하는 데, 이것은 모든 바둑판 배열을 피해나가며, 홈 파기의 극한에서 전쟁기계를 재구성하는 국가보다도 한층 더 불길한 전쟁기계에 봉사하는 새로운 유목을 발명해낸다. 이리하여 바다가, 그리고 다음에는 하늘(l’air)과 성층권(la stratosphère)이 다시 매끈한 공간이 되는데, 이것은 실로 기묘한 전도에 의해 홈이 패인 육지를 좀 더 잘 통제하기 위해서이다. (599, 917)
매끈한 것은 홈 패인 것보다 항상 더 높은 탈영토화 역량을 갖고 있다. 새로운 직업, 심지어는 새로운 계급을 검토해보면 반드시 군사 기술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스크린을 감시하고 현재건 앞으로건 전략 잠수함이나 위성에서 장기적으로 지속하여 살게 되며, 나아가 이미 하나의 물리적 현상과 메뚜기의 비행과 어느 지점에서라도 올 수 있는 “적”의 공격을 거의 구별할 수 없는 이들의 귀와 눈은 어떤 종말론적인 상황을 살아갈 것인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매끈한 것은 [그] 자체가 악마적 조직화의 역량들(des puissances d’organisation diabolique)에 끌려가고 점유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이다. (599-600, 917)
아직 구체적이고 비대칭적인 혼합 형태들을 고려할 수 있는 단계까지는 다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일단 다시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의 단순한 대립으로 되돌아가기로 하자.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은 우선 점과 선의 관계가 서로 정반대라는 점에서 구별된다(홈이 패인 것에서는 두 점 사이에 선이 있지만 매끈한 것에서는 두 선 사이에 점이 있다). 둘째로 선의 본성이 구별된다(매끈한 선은 방향적이기 때문에 간격이 열려있으나 홈이 패인 선은 차원적이기 때문에 간격이 닫혀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 차이는 곡면 또는 공간과 관련되어 있다. 홈이 패인 공간에서 곡면은 닫혀 있으며, 지정된 절단에 따라, 규정된 간격에 따라 “배분(partage)”이 일어나지만, 매끈한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열린 공간 위에서 빈도와 경로의 장단에 따라 “분배(distribution)”가 일어난다(로고스와 노모스).
고대 그리스인은 노모스라는 열린 공간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제한되지도 분배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한계도 또 분할도 모르는 도시 이전의 전원, 산록, 고원, 스텝이다. 이들은 열린 공간을 경작에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이것은 열린 공간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오히려 폴리스, 도시, 마을에 대립시켰다. 이븐 할둔(Ibn Khaldoun, 1332-1406)이 말하는 바디야(badyia), 즉 베두인적 삶에도 유목적 목축민과 더불어 경작민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히려 그는 이것을 하다라(Hadara), 즉 “도시의 시민의 삶”과 대립시켰다. 이러한 구별은 분명 아주 중요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것은 못된다. 왜냐하면 태고적부터, 즉 신석기시대나 더 나아가서 구석기 시대에서조차 농업을 발명한 것은 바로 도시이기 때문이다. (600-601, 918-919)
그러나 바다가 근본적으로 홈 파기에 열려 있는 매끈한 공간인 것과 마찬가지로, 도시는 홈을 파는 힘으로서 매끈한 공간의 도처에서, 즉 대지와 그밖의 다른 요소들에서 또 도시의 안팎에서 매끈한 공간을 다시 부여하고 이를 실현시킨다. 따라서 지금 매끈한 공간은 도시를 벗어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세계적 조직화의 매끈한 공간일 뿐만 아니라 매끈한 것과 구명 뚫린 것들을 조합시켜 도시를 향해 반격을 해오는 매끈한 공간이기도 하다. 즉 움직이는 거대 빈민가, 임시 거주자, 유목민과 혈거민, 금속과 천 찌꺼기, 패치워크 등. 이것들은 화폐, 노동 또는 주거의 홈파기와는 전혀 무관하다. 폭발적인 빈곤, 이것은 도시가 분비하는 것이며 “소급적인 매끈하게 하기(lissage rétroactif)”라는 톰(Thom, 1923-2002)의 수학공식에 꼭 들어맞는 것이다. 응축된 힘, 역습의 잠재력(potentialité d’une riposte)? (601, 919-920)
이리하여 매번 “매끈한 것-홈 패인 것”이라는 단순한 대립은 훨씬 더 어려운 온갖 복합, 교대, 중첩과 같은 것을 불러온다. 그러나 이러한 복합은 우선 양자간의 구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 지금으로서는 우선 단지 점, 선, 공간의 각각의 역할에 의해 구별되는 두 가지 종류의 여행이 있다는 것을 말해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괴테(Goethe 1749-1832) 식 여행과 클라이스트(Kleist, 1777-1811) 식 여행? 또는 프랑스식 여행과 영국식(또는 미국식 여행)? 나무형 여행과 리좀형 여행? 그러나 이들 어떤 대립항도 완전하게 맞아 떨어지지는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혼합되거나 서로 이동한다. (601, 920) 사막이나 스텝, 바다에서도 얼마든지 홈을 파고 살 수 있다. 도시에서조차 매끄럽게 된 채로 살 수 있고, 도시의 유목민이 될 수 있다(예를 들면 클리시에서나 브룩클린에서 헨리 밀러의 산책은 매끄러운 공간에서의 유목민적인 이동이다. 밀러는 도시가 하나의 패치워크, 속도의 미분, 지체와 가속, 방향 전환, 연속적 변주를 토해내도록 부추기고 있다고 말한다. .. 비트족들은 밀러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지만 그들 나름대로 다시 방향을 바꿔 도시 외부 공간의 새로운 사용법을 만들어 냈다). (601-602, 920).
이이 오래전에 피츠제럴드(Fitzgerald, 1896-1940)는 이렇게 말했다. 남쪽 바다를 향해 떠나는 것이 다는 아니라고. 여행을 결정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도시 한가운데서도 낯선 여행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자리에서의 여행도 있다고. 이물론 여기서 우리는 마약 사용자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경험은 너무나 애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히려 진정한 유목민을 생각하고 있다. 토인비(Toynbee, 1889–1975)가 시사하는 대로 이들 유목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동하지 않는다고. 전혀 이동하지 않음으로써, 이주하지 않음으로써, 또 하나의 매끈한 공간을 보유한 채 떠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또 정복하거나 죽을 때야 비로소 그곳을 떠나기 때문에 유목민인 것이다. 제자리에서의 여행, 이것이 모든 강렬함들의 이름이다. 설령 이러한 강렬함들이 오직 외연적으로만 전개되더라도 말이다. 사유하는 것, 그것은 여행하는 것이다(Penser. c’est voyager). (602, 920-921)
영화 시간의 흐름에서(Im Lauf der Zeit, fr. Au fil du temps, en. Kings of the Road, 1976)에서 독일 감독 벤더스(Wim Wenders, 1945)는 두 명의 등장인물의 행로를 교차, 중첩시키는데, 이중 한 명은 모든 점에서 홈이 패인 괴테식의 교양적, 기억적, “교육적” 여행을 하는데 반해, 다른 한 명은 이미 매끈한 공간을 정복한 채 오직 실험만을 하고 독일 “사막”에서 기억 상실 증세를 보이고 있다. .. 매끈한 것 속에서 여행하는 것, 그것은 하나의 생성이며, 그것도 아주 어렵고 불확실한 생성이다. .. 오늘날에도 극히 다양한 방향에서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의 충돌, 이행, 교대, 중첩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602, 921) [이 마지막 문장은 꿈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설명하는 것과 유사하다.]
§14.03. 수학 모델 921 Modèle mathématique(les multiplicité). 602
수학모델 Modèle mathématique 921
수학자인 리만(Riemann, 1826-1866)이 다양한 것(le multiple)을 술어 상태에서 떼어내 “다양체(multiplicité)”라는 실사로 만든 것은 정말 하나의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것은 변증법이 종언을 고하고 다양체의 유형학(typologie)과 위상학(topologie)이 시작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각각의 다양체는 n개의 결정인들(déterminations)에 의해 정의된다. 이들 결정인들은 어떤 때는 상황으로부터 자유롭기도 하지만 상황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두 점 간의 수직선의 크기와 다른 두 점 간의 수평선의 크기를 비교해 보기로 하자. 이 경우 다양체는 홈이 파여지고 이 다양체의 결정인들은 크기이므로 계량될 수 있다. 반대로 높이는 같지만 강도가 다른 두 음의 차이와 강도가 같지만 높이가 다른 두 음의 차이를 비교할 수는 없다. 이 경우 두 결정인은 오직 “한쪽이 다른 한쪽의 일부이며 어느 정도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어느 쪽이 다른 한쪽보다 작다는 판단으로 만족할 때만” 비교될 수 있다. 이 둘째 종류의 다양체들은 계량적이지 않으며, 간접적 방법에 의해서만 홈이 파지고 측정될 수 있는데, 다른 때는 이러한 방법에 항상 저항한다. 이 다양체는 비정확 하지만 엄밀하다. 마이농(Meinong, 1853–1920)과 러셀(Russell, 1872-1970)은 거리(distance)라는 개념을 채용해 이것을 크기(grandeur)(magnitude[등급])라는 개념과 대립시켰다. 거리란 정확히 말해 분할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나의 결정인이 또 다른 결정인의 일부가 되는 경우 거리는 분할된다. 그러나 크기와는 반대로 거리는 분할될 때마다 반드시 본성이 바뀐다. (602-603, 921-922)
가령 운동은 구보, 잰걸음[경보], 느린 걸음으로 나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분할된 것은 분할의 각 계기마다 본성을 바꾸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계기들 중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합성하는 요소가 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거리”의 다양체들은 연속적 변주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는데, 반해, “크기(grandeur)”의 다양체들은 상수와 변수를 배분한다. (603, 923) [벩송은 거북이의 걸음과 아킬레스 걸음이 크기[등급, 정도]가 다른 것이 아니라 거리(본성)이 다르다. 둘 사이를 환원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점에서 다양체 이론의 발달에서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은 (후설(Husserl, 1859-1938)보다도 훨씬 더, 심지어는 마이농이나 러셀보다 훨씬 더)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의식의 무매개적 자료에 관한 시론(DI, 1889) 이래 그는 변함없이 지속을 다양체의 한 유형, 계량적 다양체 또는 크기의 다양체와 대립하는 것으로 제시해왔기 때문이다. 즉 지속이란 결코 분할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리려 분할할 때마다 분할되는 것은 반드시 본성을 바꾸는 것이다. (아킬레스의 달리기는 걸음들을 나누어지지만 크기를 더해 가는 형태로 이들 걸음들을 합치더라도 달리기 자체를 얻어낼 수 없다). (603-604, 923)
...이런 식으로 베르그송은 “전혀 다른 두 종류의 다양체”, 즉 질적으로 융합가능하며 연속적인 다양체와 수적으로 등질적이고 불연속적인 다양체를 추출해냈다. 물질(la matière)은 이 두 다양체 사이를 왔다갔다한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어떤 때는 질적 다양체 속에 이미 감싸여 있거나 아니면 거기서 물질을 추출해 내는 계량적 “도식(un schème)”[물체] 속에 이미 펼쳐져 있다. <상대성>의 관점에서 베르그송이 아인슈타인(Einstein)과 대립한 것 또한 이러한 대립을 리만적 다양체의 기본 이론(베르그송은 이 이론을 변형시킨다)이라는 맥락 속에 넣지 않는 한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604, 924)
우리는 이미 수차례에 걸쳐 이 두 가지 유형의 다양체 간의 온갖 종류의 차이들(differences)에 부딪혀왔다. 계량적 다양체와 비계량적 다양체, 외연적 다양체와 질적 다양체. 중앙집중적 다양체와 탈 중심적 다양체, 나무형 다양체와 리좀형 다양체, 셀 수 있는(numériques) 다양체와 판판한(plates) 다양체, 차원의 다양체와 방향의 다양체, 군중의(de masse) 다양체와 무리의(de meute) 다양체, 크기의(de grandeur) 다양체와 거리의(de distance) 다양체, 절단의(de coupure) 다양체와 빈도의(de fréquence) 다양체, 홈이 패인 다양체와 매끈한 다양체 등. 단순히 분할되면 본성(de nature)을 바꾸는 [질적, 노마드]다양체(가령 사막의 부족이 그렇다: 즉 끊임없이 변화하는 거리, 항상 변신을 거듭하는 무리들)만이 매끈한 공간에 서식하는 것이 아니라 매끈한 공간 자체(사막, 스텝, 바다 또는 빙원)가 바로 이러한 유형의 다양체로서 비계량적이고 중심이 없는 방향적인 것이다. 그런데 <수(le Nombre)>는 오직 다른 쪽 다양체들에만 속하며, 게다가 비계량적인 다양체들에게는 결여되어 있는 과학적 지위를 부여해 준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다. (604, 924) [수학(기하학이든 산술학이든) 이 질적인 것은 측정하는 것은 부분적일 뿐이다.]
따라서 계량적 다양체[수적 다양체]들((les multiplicités métriques) 내부에서는 기하학과 산술학, 기하학과 대수학 사이에서 다수자 과학을 성립시키는 하나의 상관관계가 성립된다(이러한 측면에서 좀 더 깊은 통찰을 보여준 저자들은 수는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조차 기수적인 성격밖에는 갖지 못하며 단위란 본질적으로 분할 가능한 성격을 가졌다는 것을 간과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비계량적 다양체[질적 다양체]들(les multiplicités non métriques)또는 매끈한 공간의 다양체들은 소수가 기하학이라고 하는 순수하게 조작적이고 질적인 것에만 관여하며, 계산은 필연적으로 매우 한정되기 때문에 여기서 이루어지는 국지적 조작은 일반적인 번역 가능성이나 위치 결정을 위한 등질적인 체계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열등성”은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처럼 거의 문맹이라고 할 수 있는 비계랴억 기하학의 자율성이 이미 더 이상 홈이 패인(또는 홈을 파야 할) 공간에서 크기를 측정하는 기능을 하지 않는 수의 자율성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605, 925)
.. 이처럼 분절된 유목적 방향성의 서수적인 수, 헤아려진 수가 홈이 패인 공간에 관여한다면, 헤아리는 수는 매끈한 공간과 관련된다. 따라서 모든 다양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즉 다양체는 이미 수인 동시에 아직까지는 단위(unité)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소수자 과학은 직관(son intuition), 발자취(son cheminement), 여정(son itinérance), 나아가 물질(de la matière), 특이성(de la singularité), 변주(de la variation), 직관주의 기하학, 헤아리는 수에 관한 감각과 취향을 다수자 과학[공식과학]에 전달해 주어 이 과학을 끊임없이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605, 925-926)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고찰해온 것은 매끈한 또는 비계량적 다양체와 계량적 다양체의 대립에서 나타나는 첫째 측면에 불과하다. 정확한 크기도, 공통의 단위도, 특정 상황으로부터 독립성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의 결정인(determination)이 다른 결정인의 일부가 되는 상태에 접어들 수 있을까? 이것은 매끈한 공간의 감싸는 동시에 감싸이는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을 둘째 측면이다. 즉 두 결정인의 상황 자체가 양자간의 비교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리만 공간 또는 오히려 공간의 리만적 단편들의 경우가 그러하다. (605-606, 926)
“리만 공간은 전혀 등질성을 갖고 있지 않다. 각각의 리만 공간은 무한히 근방에 있는 두 점간의 거리의 제곱이라는 표현의 형식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 즉 각각의 근방에서 유클리드 공간의 작은 조각과 비슷해 보이지만 하나의 근방에서 다음 근방으로의 연결은 규정되지 않으며, 무한한 방식으로 행해질 수 있다. 이리하여 가장 일반적인 리만 공간은 서로 나란히 놓여있기는 하지만 서로 관계는 맺지 않는 조각들의 무정형의 모임으로 나타나게 된다.” .. 이 조건들은 계량적 공간과 이 공간들의 절단을 규정하는 조건들과는 전혀 다르다(설령 이로 인해 이 두 종류의 공간 간에 어쩔 수 없이 상관관계가 나타나더라도 말이다). 다시 말해 로트만(Lautman, 1908-1944))의 이처럼 멋짓 묘사에 따르면 리만 공간은 순수한 패치워크이다. 그것은 연결접속들(des connexions)이나 수많은 촉각적인 관계(des rapports tactiles 연관)를 유지한다. (606, 926) [[우리는 이런 다양체의 형성을 딱지 연결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설명은.... “패치워크는 말 그대로 하나의 리만 공간이며 아니 오히려 리만 공간이 바로 패치워크라고 할 수 있다(595, 910)”]]
이것은 매끈한 공간의 노모스가 나타내는 두 가지 측면이기도 하다. (606 927)
따라서 우리는 항상 매끈한 것에서 홈이 패인 것으로, 또 홈이 패인 것에서 매끈한 것으로 이동해야 할 비대칭적인 필요성에 직면하게 된다. 매끈한 공간의 순회적인 기하학과 유목적인 수가 홈이 패인 공간의 왕립과학에 끊임없이 영감을 제공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반대로 홈이 패인 공간들의 계량(la métrique des espaces stries: 메트론metron)은 매끈한 다양체의 수많은 기묘한 여건들을 번역하는데 필수 불가결하게 될 것이다. (606, 927) 그러나 번역은 결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즉 주파한[지나간 흔적의] 공간으로 운동을 대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일련의 풍부하고 복잡한 조작이 필요한 것이다(이것을 처음으로 말한 사람은 베르그송이었다).(927)
이러한 번역의 풍부함과 필요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를 두 가지만 들어보기로 하자. 우선 강도를 외연적 양으로, 좀 더 일반적으로는 거리의 다양체들을 이러한 다양체를 계량하고 홈을 파는 크기의 체계들로 번역하는 방법들의 복잡성(이와 관련해 다수의 역할을 생각해보라). 둘째(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특히 매끈한 공간의 리만적 조각들이 유클리드적 접합접속을 받아들이는 방법들의 정밀함과 복잡성(미분적 홈파기에서 벡터의 평형성의 역할). 당연히 리만 공간의 조각들에 고유한 연결접속 방법(“축적”)과 리만 공간을 유클리드 공간에 접합접속시키는 이러한 방법(“평행성”)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607, 928)
매끈한 공간에 대한 아주 일반적인 수학적 정의는 가능할까? 만델브로트(Benoît Mandelbrot, 1924-2010)의 프락탈 대상(les objets fractals) 적합한 것처럼 보인다. 프락탈은 차원수가 분수 또는 비정수인 집합 또는 차원수가 정수이면서 방향이 연속적으로 변주(variation continue)되는 집합을 가리킨다. 가령 선분을 3등분하여 중앙부를 그 길이를 한 변으로 하는 정삼각형의 두 변으로 바꾼다. 다음에는 이렇게 해서 생긴 4개의 선분에 대해 똑같이 조작을 반복한다. 이와 비숫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를 무한히 반복한다. (607, 928) [그림: 608, 929]
브느와 만델브로트의 “프락탈”
폰 코흐의 곡선(la Courbe de von Koch): 직선 이상이며 평면 이하[의 차원]
시에르펜스키(L’eponge de Sierpinski): 평면 이상이며 입체 이하[의 차원]
이 그림은 Leonard Mascot Blumenthal & Karl Menger, Studies in Geometry, Freeman and Company, 1970에 들어있다. (608, 930)
이와 다른 형태를 가진 경우도 있는데, 브라운 운동, 난류, 천개(天蓋)도 이러한 “프락탈”이다. 아마 이를 통해 퍼지 집합(les ensembles flous)을 정의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매끈한 공간은 바로 이를 통해 홈이 패인 공간과의 차이와 관계를 동시에 고려한 일반적 규정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1) 차원수가 정수로서 일정한 방향을 가진 집합은 모두 홈이 패인 또는 계량적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2) 비계량적인 매끈한 공간은 1 이상의 분수 차원을 가진 선과 2 이상의 분수 차원을 갖는 평면의 구성에 의해 성립된다. 3) 차원수가 분수인 것은 본래 방향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지표이다(접선을 결정할 수 없으며 방향이 연속적으로 변한다). 4) 따라서 매끈한 공간은 이 공간 속을 주파하는 것[궤적의 흔적] 또는 이 공간 안에 새겨지는 것을 보충하는 차원을 갖지 않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 공간은 판판한 다양체, 가령 선인 채로 있으면서 면을 충족시키는 선이라고 할 수 있다. 5) 헤아리는 수 또는 비정수라는 비정확하면서도 엄밀한 형태 속에서 공간 자체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서로 일치하며 동일한 역량을 갖는 경향을 보여준다(헤아리지 않고 차지하는 것). 6) 이러한 부정형의 매끈한 공간은 근방들의 축적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이때 각각의 축적이 “생성”에 고유한 식별 불가능성의 지대를 결정한다(선이상 평면이하, 평면이상 입체이하). (608-609, 930)
§14.04. 물리학 모델 931 Modèle physique. 609 .
물리학 모델(Modèle physique) 931
지금까지 살펴본 다양한 모델을 종합해보면 홈 파기에 대해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수직으로 교차하는 두 계열의 평행선 중 수직선 계열은 오히려 고정점 또는 상수의 역할(le rôle de constantes)을 맡는 반면, 다른 방향의 수평선 계열은 변수의 역할(le rôle de variables)을 담당하고 있다. 대략적으로 보자면 씨실과 날실, 화음과 선율, 경도와 위도의 경우가 그렇다. 이 둘의 교차가 규칙적일수록 홈파기는 엄밀하게 이루어지며 공간은 점점 더 등질화되는 경향을 띤다. 등질성이 처음부터 매끈한 공간의 성격이 아니라 정반대로 홈파기의 극단적 결과 또는 모든 부분과 모든 방향에서 홈이 패인 공간의 극한 형태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609, 931)
이처럼 등질적인 것과 홈 패인 것의 결합은 상상적인 기초 물리학 용어를 비러 이렇게 표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우선 서로 평행한 중력의 수직선으로 공간에 홈을 파며 시작하자. 2) 이 평행선들 또는 힘들은 공간을 차지하는 물체의 한 점, 즉 무게 중심에 적용되는 합력이다. 3) 이 평행한 힘들의 방향을 바꿔도, 최초의 방향에 대해 수직이 될 때도 이 점의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4) 이처럼 중력은 만유인력의 특별한 경우의 하나로서 임의 직선 또는 두 물체간의 일대일 대응관계에 따른다. 5) 일반적으로 일의 개념은 한 방향으로의 힘-이동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6) 이처럼 수직과 평형으로서 뿐만 아니라 모든 방향에서 점과 종속되어 있으며 점점 완벽하게 홈이 패인 공간의 물리학적 토대를 얻을 수 있다. ... 따라서 이들에게서는[그리스인은] 두 개의 국가 장치 모델, 즉 제국이라는 수직적 장치와 도시라는 등방성(等方性) 장치가 있었던 것이다. 기하학은 물리학의 문제와 국가의 일이 만나는 곳에 있었다. (609-610, 931)
그런데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홈파기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무한대나 무한소를 개입시킬 때뿐만 아니라 두 개 이상의 물체를 고찰할 때도 마찬가지다(“세 개의 물체의 문제”). 공간이 어떻게 홈파기의 극한을 피해나가는지를 아주 단순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한편에는 편위(déclinaison)에 의해 즉 최소의 간격, 중력의 수직선과 이 수직선이 접선을 이루는 원호(圓弧)사이에 있는 무한히 작은 간격에 의해 벗어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선 또는 소용돌이(la spiral ou le tourbillon), 즉 공간의 모든 점을 빈도 또는 축적, 분배의 법칙에 따라 동시에 장악하는 형성을 통해 벗어난다. (610, 932)
매끈한 공간은 수직선에서 벗어난 최소각과 홈 파기를 초과하는 소용돌이에 의해 구성된다. 미셀 세르의 저작이 지닌 힘은 발생적인 미분적 요소로서의 클리나멘(clinamen)과 생산된 매끈한 공간을 차지하는 것으로서의 소용돌이(des tourbillons) 또는 난류(亂流, des turbulences)의 형성 간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실제로 데모크리토스로부터 류크레티우스에까지 이르는 고대 원자론은 언제나 수력학[유체역학] 또는 유출이나 흐름에 대한 일반화된 이론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고대의 원자설은 흐름(couler)과 흐르는(fluer)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전혀 이해 할 수 없게 된다. 바로 이론의 수준에서, 유클리드의 등질적이고 홈이 패인 공간과는 전혀 다른 아르키메데스 기하학과 고체 물질(la matière solide)이나 박층구조(lamellaire)의 물질과는 전혀 다른 데모크리토스의 물리학 사이의 엄밀한 상관관계가 나타난다. 이러한 일치는 집합이 결코 국가 장치가 아니라 전쟁기계에 결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610-611, 932-933) .. [들뢰즈 논문 1961년 참조, 의미의 논리 부록에 있음] / [고대 원자론은 단위가 흐르고 있고 따라서 주변에 약간의 흐릿함을 지닌 단위들의 결합 방식일 수 있다. 물이 흐르면 소용돌이도 있고 소용돌이 같은 것(물고기가 지나가면 뒤에 소용돌이도 있듯이)을 만들면서도 계속 흐른다. 그런데 원자는 등질적이다. 이 둘 관계는 마치 아르키메데스 기하학과 데모크리토스 물리학이 겹치는 장면이 아닌가? 플라톤은 데모크리토스처럼 물리학을 다루지 않고 유클리트적인 공간에서 물리학을 다루려고 하니, 상층의 추상으로 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50UMH)]
전쟁의, 전쟁기술의, 전쟁기계의 기하학을 위하여, 무리들(des meutes)의, 난류들(des turbulences)의, “파국들(des catastophes)”의, 전염병들(des épidémies)의 물리학이 있다. 세르는 루크레티우스에게서 가장 중요한 목적처럼 보이는 것을 표현해주었다. 즉 마르스(Mars, Ἄρης)에서 비너스(Venus, Ἀφροδίτη)로 이행하고, 전쟁기계가 평화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작은 국가 장치를 통과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것은 전쟁기계의 궁극적인 변신을 표현하며, 매끈 공간 속에서 행해진다. (611, 933)
우리는 앞에서 이미 매끈한 공간에서 “자유로운 행동(l’action libre)”과 홈이 패인 공간에서의 “일(le travail)”을 구별한 바 있다. 실제로 19세기에 이 개념들은 이중적으로 엄밀화 되었다. “일” 개념의 물리적-과학적 정밀화(무게-높이, 힘-이동)와 노동-력 또는 추상적 노동이라는 사회-경제적 개념의 정밀화(배가나 분화를 통해 모든 노동에 적용될 수 있는 추상적이고 동질적인 양). 이 과정에서 물리학과 사회학 사이에 긴밀한 결합이 이루어졌다. 사회학은 노동 경제학적인 측정을 제공하고 물리학은 일에 대한 “역학적 화폐(monnaie mécanique)”를 제공했다. 힘들의 역학은 임금체계의 상관물이었다. 물리학이 이때 만큼 사회적인 성격을 띄었던 적도 없었다. (611, 934)
모든 활동에 “일”-모델(le modèle-Travail)을 강요하는 것, 모든 활동을 가능한 또는 잠재적인 노동으로 번역하는 것, 자유로운 행동을 규율하는 것, 또는 (결국은 같은 것이지만) 자유로운 행동을 노동과 관련해서만 존재하는 “여가(le loisir)”로서 간주하는 것, 이리하여 우리는 물리학과 사회학이라는 두 측면에서 “일”-모델이 근본적으로 국가 장치의 일부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표준적인 인간은 우선 공공토목공사(les travaux publics)를 위한 인간이었다. 추상적인 노동, 이러한 노동의 효과의 증가, 작업의 분화와 같은 문제는 핀 공장(la fabrique épingle)과 관련해 최초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공공사업 현장(les chantiers publics)과 군대 조직(인간의 훈육뿐만 아니라 무기의 공업적 생산에서도) 등에서 나타났다. 이 보다 더 정상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물론 전쟁기계 자체가 이러한 정상화를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611-612, 934)
물리적- 사회적 <일>모델은 두 가지 이유에서 국가 장치의 발명품으로서 이 장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일은 잉여의 성립에 의해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저장으로서 일밖에 존재할 수 없다. 실제로 노동이란(엄밀한 의미에서) 잉여 노동이라고 불리는 것과 더불어서만 시작된다. 다른 한편 노동은 시간-공간의 홈파기라는 일반화된 조작, 자유로운 행동의 예속, 매끈한 공간들의 소멸 등을 수행하는데, 바로 국가의 핵심적인 기획 즉 전쟁기계를 정복하려는 기획은 노동의 기원과 수단도 되기 때문이다. (612, 935)
역증명(Contre-épreuve): 국가 장치와 잉여 노동(surtravail)이 없는 곳에는 노동-모델도 없다. 그러한 곳에는 오히려 말에서 행동으로 이러한 행동에서 저런 행동으로, 행동에서 노래로, 노래에서 말로(du chant à la parole), 말에서 계획으로, 이런 식으로 이상한 반음계에 따라(dans un étrange chromatisme) 이동하는 자유로운 행동의 연속적 변주가 있다. 거기에는 첨점의 또는 노력의 계기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강렬하고 드물게 솟아나긴 하지만 외부의 관찰자는 노동이라는 관점에서 “번역”할 뿐이다. (612, 935)
실제로 흑인들을 두고는 [관찰자들이, 백인들이] “그들은 일하지 않으며, 일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어왔다. 그래서인지 흑인들은 추상적인 양에 따르자면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하도록[잉여노동을] 강요받아 왔다. 또한 인디언들도 노동조직에 대해, 심지어는 노예적인 노동조직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몰랐으며, 또 여기에 적응할 수 없었다는 것 또한 사실인 것 같다. 미국인들이 그토록 많은 흑인을 끌고 온 것은 차라리 죽는 쪽을 선택했을 인디언들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몇몇 뛰어난 민속학자들이 핵심적인 질문을 제기해 왔다. 이들은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전환시켜버렸다. 즉 소위 원시 사회들은 노동의 부재로 인해 결핍된 사회 또는 생존의 사회가 아니라 반대로 저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노동이라는 요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유로운 행동과 매끈한 공간의 사회라는 것이다. 비록 노동과의 치이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un droit à la paresse)”라는 형태로 표현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사회들은 결코 태만한(de paresse) 사회들이 아니다. 또 법과 차이가 “무정부 상태(une anarchie)”라는 모습으로 표현될 수도 있지만, 이들 사회는 무법(sans lois) 사회가 아니다. (612-613, 935-936)
그런데 노동이 국가 장치에 대응하는 홈이 패인 시간-공간을 만드는 것은 오히려 전-고대 또는 고대적 형태들에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잉여 노동이 공물(de tribut)이나 부역(de corvée) 형태로 고립되고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형태들 속에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로 여기서 노동개념은 가장 명확한 형태로, 가령 {고대} 제국의 대토목공사, 도시나 농촌의 급수 공사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여기서는 평행한 단편을 통해(par tranches supposées parallèles)물이 “박편 모양(laminaire, 얇은 층)”으로 흘러간다(홈파기 striage). 하지만 자본주의 체계에서는 이와 반대로 잉여 노동은 점점 노동 “자체”와 구별할 수 없게 되어 완전히 노동 속으로 용해되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613, 936)
현대의 공공 공사는 {고대} 제국의 대토목공사와 같은 지위를 갖고 있지 않다.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시간과 “착취된” 시간이 시간 속에서 분리되지 않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 두 가지가 구별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결코 맑스의 잉여가치론에 위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맑스야 말로 자본주의 체계에서는 이러한 잉여가치(cette plus-value)의 위치를 더 이상 결정할 수 없다(cesse d’être localisable)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맑스의 결정적인 기여였다. 이 때문에 맑스는 기계 자체가 잉여가치를 생산하게 되고, 자본의 유통은 가변 자본과 불변자본의 구분을 의문시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물론 이처럼 새로운 조건에서도 모든 노동은 잉여 노동이라는 점은 전혀 변함이 없다. .. 오히려 잉여 노동 속에서 인간 소외 자체가 일반화된 “기계적 예속”으로 대체되어 가며, 이리하여 전혀 노동하지 않고도 잉여가치를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인다(아이, 퇴직자, 실업자, TV 시청자 등). (613, 936-937))
이리하여 사용자 자체가 피고용인이 되는 경향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는 노동량에 작용하기보다는 교통수단, 도시적 모델들, 미디어, 여가 산업, 지각하고 느끼는 방법 등 온갖 기호계를 동원하는 복잡한 질적 과정에 작용하게 되었다. 자본주의가 전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밀고 나간 홈파기의 결과[자본의 빨대는 홈파기이다], 유통되는 자본은 인간의 운명(le destin des hommes)을 좌우하게 되는 일종의 매끈한 공간을 필연적으로 재창조하고 재국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홈파기는 가장 완벽하고 엄격한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다(이것은 단지 수직적일 뿐만 아니라 모든 방향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홈파기는 주로 자본주의 국가라는 극, 자본의 조직화에서 현대의 국가 장치가 수행하는 역할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 반대로 통합된(또는 오히려 통합하는) 세계 자본주의(un capitalisme mondial intégré)의 보완적이고 지배적인 층위에서는 자본이 이미 노동이라는 인간적 성분이 아니라 기계적 성분들에 기초해 “절대” 속도에 도달하도록 해주는 새로운 매끈한 공간이 산출된다. (614, 937-938)
본질적인 것은 오히려 홈이 패인 자본과 매끈한 자본 간의 구별이며, 더 나아가 영토와 국가, 심지어 상이한 국가 유형을 조감하는 복합체들을 가로질러 홈이 패인 자본이 매끈한 자본을 생겨나게 하는 방법이다. (614, 938) [두 가지 자본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뒤에 가서 또는 어디엔가 무슨 이야기가 있겠지... ]
§14.05. 미학적 모델 938-952 Modèle esthétique(l’art nomade) 614-624.
미학모델: 유목민 예술(Modèle esthétique: l’art nomade) (938-)
유목민 예술과 이 예술의 (야만적, 고딕적, 현대적) 계승자를 정의하기 위해 많은 실천적, 이론적 개념들이 고안되어 왔다. 우선 원리 파악과는 구별되는 “근거리 파악(la vision rapprochée)”이 있다. 둘째로 광학적 공간과 구별되는 “촉각적 공간” 또는 오히려 “촉지적 공간(l’espace haptique)”이라는 개념이 있다. ... 리글(Riegl)은 정말 경이로운 몇몇 문장을 통해 근거리파악-촉지적 공간(Vision rapprochée-Espace haptique)이라는 쌍에 근본적인 미학적 지위를 부여해 주었다. 하지만 일단 여기서는 리글(그리고 다음으로는 보링거, 그리고 최근에는 앙리 말디네)이 제안한 기준은 일단 무시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러한 개념들을 자유롭게 사용해 보기로 하자. 우리에게는 <매끈한 것>이야말로 근거리 파악의 특권적인 대상인 동시에(촉각적일 뿐만 아니라 시각적이고 청각적일 수 있는) 촉지적 공간의 요소처럼 여겨진다. 이와 반대로 <홈이 패인 것>은 오히려 원격 지각, 좀 더 공학적인 공간과 관련되어 있다. 눈만이 이러한 능력을 가진 유일한 기관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 (614-615, 938-939)
사물에서 뒤로 물러설 수는 있지만,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림에서 뒤로 물러서는 사람은 훌륭한 화가가 아니다. “사물”도 마찬가지다. 세잔은 밀밭을 보지 말고 밀밭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 아무런 좌표 없이 매끈한 공간 속에서 길을 잃으라고 말한다. 홈 파기는 그런 다음에야 탄생할 수 있다. 데생, 지층, 대지, “기하학적이라는 완고함”, “세계의 척도”, “지질학적 토대”, “모든 것이 수직으로 곧바로 떨어진다” ... ... 그러면 이제 홈이 패인 것이 “파국”으로 사라져 새로운 매끈한 공간이 생기고 또 다른 홈이 패인 공간이 펼쳐진다.... (615, 939)
떨어져서 보더라도 그림(un tabeau)은 가까이에서 그려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작곡가도 듣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멀리서 듣는 반면 작곡가는 가까이에서 듣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독자는 긴 기억을 갖는 반면 작가 자신은 짧은 기억(une mémoire courte)을 갖고 쓴다. 촉지적이고 근거리 파악적인 매끈한 공간의 첫째 측면은 방향, 좌표, 접속의 연속적 변주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점점 더 가까이에서 작동한다. 예컨대 사막, 스텝, 빙원 또는 바다 등 순수한 연결접속의 국지적인 공간이 그렇다. (615, 939)
좌표들(les repères, 기준점들, 표식들)은 시각적 모델(modèle visuel)을 갖지 않는데, 이 모델은 기준점들을 서로 교환할 수도 있고, 이것들을 외부의 부동의 관찰자에게 속할 수 있는 비활성의 부류와 통합시켜 줄 수도 있다. 이 기준점들은 이와 반대로 “단자들(monades)”로 부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상호 촉각적인 관계를 가진 유목민들(nomades)이라 할 수 있는 수많은 관찰자들과 연결된다. 접속들(les raccordements)은 다양체를 흡수하고 거리에 불변성을 부여하는 주변 공간을 내포하지 않으며, 반대로 동일한 거리가 분할되면서 본질적으로 변화되는 질서 잡힌 차이에 따라 구성된다. 이러한 방향, 좌표, 접속과 같은 물음들은 가장 유명한 유목민 예술 작품들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몸이 비틀린 동물들은 더 이상 대지(terre)에 붙어 있지 않다. 공중곡예(une acrobatie aérienne)에서처럼 땅(le sol)은 끊임없이 방향을 바꾼다. (616, 940)
홈이 패인 것과 매끈한 것은 단순히 포괄적인 것(le global)과 국지적인 것(le local)으로만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홈이 패인 것에서 포괄적인 것은 아직 상대적인 것인 반면, 매끈한 것에서 국지적인 것은 이미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616, 941)
눈 자체가 광학적인 것이 아니라 촉지적인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대지와 하늘은 어떠한 선에 의해서도 나뉘어지지 않는데, 이 둘이 동일한 실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수평선도, 배경도, 원근법도, 한계도, 윤곽이나 형태도, 중심도 없다. 중개적인 거리는 없으며, 오히려 모든 거리가 중개적이다. 에스키모의 공간처럼 말이다. 그런데 아랍 건축은 이와는 전혀 다른 방법, 전혀 다른 맥락 속에서 아주 가깝고 아주 낮은 곳에서 시작되는 공간을 그려나간다. 가벼운 것과 대기적인 것이 아래에 놓이고 반대로 단단한 것이거나 무거운 것이 위쪽에 놓인다. 이처럼 중력 법칙이 전도되어 방향과 결여(le manque de direction)나 입체감의 부정은 구성적인 힘들이 된다. (616-617, 941)
사막 또는 하늘 또는 바다, ‘대양’, ‘무제한한 것’은 우선 포괄하는 것의 역할을 담당하며 수평선이 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대지는 우선 둘러싸이고 포괄적인 것이 되며, 대지(la terre)가 부동의 평형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고 하나의 ‘형태(une Forme)’를 가능하게 해주는 요소들에 의해 “정초(fondée)”된다. 따라서 포괄하는 것 자체가 대지의 중심에 나타나는 경우 이것은 이차적인 역할을, 즉 아직 매끈하고 계량되지 않은 채 존속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불쾌하기 짝이 없는 심연 속으로, 사자(死者)들의 나라로 밀어 넣는 역할을 수행한다. 대지에 홈을 파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처럼 매끈한 것의 이중적인 처리를, 즉 한편으로 포괄하는 수평선이라는 절대적 상태에까지 도달하거나 환원되는 것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포괄된 것에서 배체되는 것을 자신의 조건으로서 내포한다. 따라서 제국적인 위대한 종교들은 (예를 들어 사막의) 매끈한 공간을 필요로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단지 매끈한 공간에 하나의 법을, 즉 모든 점에서 노모스(nomos)에 대립하는 하나의 법을, 절대적인 것을 전환시키는 하나의 법을 부여하기 위해서 일 뿐이다. (617-618, 942-943)
리글, 보링거, 말디네의 뛰어난 분석이 애매하게 보이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촉지적 공간을 제국적인 조건에서 가능했던 이집트 예술을 바탕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이 공간은 배경-수평선의 현존, 공간의 면으로의 환원(수직과 수평, 높이와 폭), 개체성을 가두어 변화를 제거해버리는 직선적 윤곽에 의해 규정된다. 예를 들어 부동의 사막을 배경으로 어디서 보더라도 평평한 면을 나타내는 피라미드의 형태가 바로 그렇다. [/] 이들은 이와 반대로 그리스 예술과 함께(이후에는 비잔틴 예술, 그리고 르네상에서 계속된다) 배경을 형태에 합류시키고, 다양한 면들을 간섭하게 만들고, 깊이를 획득하고, 체적을 갖는 입체적 연장성(une etendue volumineuse ou cubique)을 만들어 내며, 깊이 묘사(la perspective, [원근법])를 조직화하고, 요철이나 음영, 빛이나 색을 사용하는 광학적 공간이 어떻게 두각을 나타내는가를 밝히고 있다. (618, 943)
어쨌든 모든 것은 제국에서 도시 또는 진화된 제국으로 나아가는 홈 파기의 공간에서 일어난다. 리글(Riegl, 1858-1905)이 유목민이나 야만족 예술에 고유한 요인을 제거하는 경향을 보이고, 또 보링거(Worringer, 1881-1965)가 가장 넓은 의미에서 고딕 예술이라는 관념을 도입하면서도 한편으로 이것을 북방의 게르만 족이나 켈트 족의 대이동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방의 제국과 연결시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618, 943-944)
고트 족은 자체가 살무트(les Sarmats) 족이나 훈 족과 함께 스텝 유목민들로서 동방과 북방의 교통의 핵심적인 벡터였지만 이 두 차원 어느 쪽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요인이었다. 한편으로 이집트 제국에는 이미 힉소스 족이, 소아시아에는 힛타이트 족이, 중국에는 투르크-몽골 족이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히브리인은 하비루 족, 게르만 인은 켈트 족, 로마인은 고트족, 아랍인은 베두인 족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유목민의 특수성이 있지만 사람들은 이를 넘 성급하게 이들이 초래한 결과로 환원시켜 버렸다. 즉 유목민들은 제국 또는 이주민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어 이 둘 중 어느 한쪽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었으며, 유목민에게 고유한 예술 “의지”는 부정되었다. 게다가 이들은 그러한 역할을 “의지하다(원하다, vouloir)”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되기일 뿐으로 이들은 “예술가-되기(un devenir-artiste)”를 발명해냈다. (618-619, 944-945) [노마드 인은 원해서라기보다(즉 합목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라기보다), 삶에서 터득한 대로 스스로 되기(장인, 행동인, 헤라클레스)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퀴니코스는 헤라클레스-되기가 아니었을까 한다. (50UMH)]
우리가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이원성(une dualité primordiale)을 환기시키는 것은 “촉지적인 것-광학적인 것”, “근거리(proche) 파악-원거리(lointaine) 파악”이라는 차이 자체도 이러한 구분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 이것은 빛을 해방시키고 색을 변조시키며 또 평면들이 서로 간섭하는 제한되지 않은 장소를 구성하는 일종의 대기적인 촉지적 공간을 복원함으로써 매끈한 것을 다시 줄 수도 있다. 요컨대 먼저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을 그 자체로 규정해야 한다. 촉지적인 것과 광학적인 것, 가까운 것과 먼 것의 상대적 구분은 바로 여기서 파생되는 것이다. (619, 945)
여기서 셋째 쌍이, 즉 (“촉지적-광학적”과 “가깝다-멀다(proche-éloigné)”라는 쌍에 덧붙여) “추상적인 선(ligne abstraire)-구체적인 선(ligne concret)"이 개입한다. 보링거는 추상적인 선이라는 관념에 근본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데, 바로 이 선이 예술이 시작 자체이며 또는 예술 의지의 최초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619, 945)
즉 보링거에게서 추상적인 선은 무엇보다 기하학적 또는 결정적(cristalline) 형태로, 즉 가능한 한 직선적인 이집트 제국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이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이 추상적인 선은 특별한 변신을 거쳐 아주 넓은 의미에서의 “고딕적 또는 북방적 선”을 구성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와 반대로 추상적인 선은 우선 “고딕적” 또는 오히려 유목적인 것이지 직선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추상적인 선이 갖는 미학적 동기를 동일한 방식으로도 이해하지 않고, 또한 예술의 시작과 추상적인 선이 동일성이라고도 이해하지 않는다. (619-620, 946) [추상에 대해: 제15장 추상적인 기계들.. 참조]
“예술 의지”를 결여하고 있는 선사적인 것, 야만적인 것, 유아기적인 것은 여전히 이러한 모방에 의존하고 있지만, 이와 반대로 완전히 선사적인 예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직선이 아니라 추상적인 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원시 예술은 추상적인 것 또는 전-구상(前-具象)적인 것에서 시작된다. (....) 예술은 처음부터 추상적이며 그 기원에서부터 추상적인 것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었다.” 실제로 문자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경우, 즉 아직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존재한다고 해도 외부나 변두리에나 존재하는 경우 선은 그만큼 더 추상적이다. 여러 제국에서 그랬듯이 문자가 추상작용을 담당하게 되면 이미 지위를 강등 당한 선은 필연적으로 구체적인, 심지어 구상적인 것으로 되는 경향이 있다. (620, 946-947)
바로 이 때문에 익히 알려져 있는 제국적 선(ligne)의 상이한 주요 유형들, 즉 이집트의 직선적인 선, 아시리아(또는 그리스)의 유기적 선, 중국의 초-현상적인 포괄적 선 등은 이미 추상적인 선을 변질시키고, 이것을 매끈한 공간에서 떼 내어 그것에 구체적인 가치를 부여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러한 제국적 선들은 추상적인 선과 동시에 등장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620, 947)
따라서 추상적인 선은 정주민 예술의 제국적인 선과 상호 작용, 영향력 행사, 투쟁을 계속하면서도 결코 다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유목민 예술의 독자성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621, 948)
추상(absrait)과 구상(figuratif)이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구상적인 것(le figuratif) 자체는 결코 하나의 “예술 의지”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예술에서 구상적인 선을 그렇지 않은 선과 대립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구상적인 것 또는 모방, 재현(la représentation)은 하나의 결과, 즉 선이 특정한 형태를 취할 때 갖게 되는 몇 가지 특징에서 유래하는 귀결이다. (621, 948)
실제로 직선체계는 대칭성을 통해서 반복을 제한하며, 그리하여 무한의 진전을 막고, 굴절된 또는 별 모양의 형상의 경우에서처럼 중심점과 방사선들에 의한 유기적 지배(la domination organique)를 유지한다. 그러나 그 효과를 증식시켜 무한한 운동을 계속하는 기계적 힘(une force machinque)인 반복 역량을 풀어놓는 것은 빗나감(décalage), 탈중심화(décentrement) 또는 적어도 주변적 운동을 통해 실행되는 자유로운 행동의 고유함이다. 대칭적 반(反)-명제(antithétisme)가 아니라 빗나간 다(多)명제(polythétisme). 따라서 매끈한 공간을 그리고 흐름-물질(une matière-flux) 에 연결 접속되는 표현의 특질들과, 공간을 변질시켜 물질을 바둑판 모양으로 배열하고 조직하는 표현의 형식(une forme d’expression)으로 만들어버리는 홈들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621-622, 949)
보링거의 글 중에서 가장 빼어난 부분은 추상적인 것과 유기적인을 접목시키는 대목이다. 유기적인 것은 재현된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재현의 형식이며 나아가 재현을 주체에 결합시켜주는 감정(감정이입Einfühlung) “예술 작품 안에서 인간 안의 유기적인 자연적인 경향에 대응하는 형식적 과정들이 전개된다.” 그러나 직선적인 것과 기하학적인 것을 유기적인 것과 이러한 의미에서 대립시킬 수는 없다. 입체나 공간성에 종속되어 있는 그리스의 유기적 선은 입체나 공간성을 평면으로 환원시키는 이집트의 기하학적 선을 계승한 것이다. (622, 949-950)[인간의 모습을 띠지 않는 예술작품은 없다.....]
전체가 살아있다면 모든 것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은, 모든 것이 유기적이고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유기체란 삶의 전도(détournement, 노선변경)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비유기적이며 배아 상태인 강렬한 삶, 기관없는 강력한 삶, 기관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더 생명력 있는 “몸체”(un Corps vivant) - 유기체들 사이(entre)로 지나가는 모든 것(“일단 유기적 활동의 자연스러운 테두리가 무너지면 한계는 사라진다 ..”) 종종 사람들은 유목민 예술에서 장식적인 추상적인 선과 동물적인 모티브들 간에 일종의 이원성을, 좀더 미묘한 표현을 빌리자면 선이 표현의 특질들을 통합하고 빼앗아 가는 속도와 이렇게 횡단된 동물적 질료의 느림과 응고간의 이원성을, 또는 시작도 끝도 없는 도주선과 거의 부동인 자기 선회 간의 이원성을, 확인해내려고 해왔다. 하지만 결국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의지, 동일한 되기가 중요하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물론 추상적인 것이 우연히 또는 연상에 의해 유기적 모티브들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니다. (623, 950-951)
“추상작용”에 고유한 이러한 생명력이 바로 매끈한 공간을 그린다. 유기적인 재현이 홈이 패인 공간을 주재하는 감정이듯이 추상적인 선은 매끈한 공간의 변용태이다. 이리하여 촉지적-광학적, 가까운-먼이라는 구분은 추상적인 선과 유기적인 선이라는 구분에 종속시켜 {두 유형의} 공간들의 일반적 대립 속에서 구분의 원리를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추상적인 선은 기하학적인 것과 직선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 그렇다면 현대 예술에서 추상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어떠한 윤곽도 그리지 않고, 어떠한 형태도 제한하지 않고 계속 방향을 바꾸는 선... (623-624, 951-952) [질료적 움직임 또는 흐름이 추상(abstrait)인 것 같다. 즉 선도 면도 아니면서 다양체로서 점(기관없는 신체)이 움직이고 작동하고 활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델을 늘리지 말라. 하지만 다른 많은 모델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1) 놀이 모델(un modèle ludique)에서는 공간의 유형에 따라 서로 다른 놀이들이 서로 대치하며, 놀이 이론들이 같은 원리를 가지 않게 된다. 가령 바둑의 매끈한 공간과 장기의 홈이 패인 공간이 그렇다. 2) 또는 사유학적 모델(un modèle noologique)에서는 사유의 내용(이데올로기)이 아니라 사유에 대한 일반이론 즉 사유에 대한 사유의 이론이라는 관점에서 사유가 그리는 정신적 공간에 따라 사유의 형식, 방식, 양태, 기능을 다룬다. (624, 952)
가장 철저하게 홈이 패인 도시조차도 매끈한 공간을 출현시킨다. 도시에서도 유목민 또는 혈거민으로 거주할 수 있는 것이다. 빠르건 느리건 운동만으로도 종종 다시 매끈한 공간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 물론 매끈한 공간 자체가 해방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매끈한 공간에서 투쟁(la lutte)은 변화하고 이동하며, 삶은 새로운 장애물에 직면해서 삶의 도박(ses enjeux, 내기)을 재구축하고, 새로운 거동(nouvelles allures)을 발명하고 적들(les advertaires)을 변화시킨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의 매끈한 공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결코 믿지 말아라. (624-625, 953) [매끈한 공간만이 답이 아니다 라기 보다, 여러 매끈한 공간이 답이라고 말하고 싶은가? 매끈한 공간과 홈 패인 공간의 혼합인가? (50VKB)]
(7:40, 예전노트 40NKJ) (25:16, 50V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