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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니체와 철학"(1962), 제1장 참담. - 다시 올림

작성자마실가|작성시간19.04.17|조회수832 목록 댓글 0

  다시 올림

 

니체와 철학(Nietzsche et la philosophie, 1962)

질 들뢰즈이경신민음사, 2001, P. 356(원 232).

1장 참담 15 (Le tragique, 참담비참, 1)

 

번역어를 고정 시킬 필요가 있다. - le tragique 참담, 비참 la tragédie 비극

 

*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 A E I O 판단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공시태는 논리학적이고 분류적이며 위계적이다. 시간에 대한 설명을 없는 셈이다.

A-E 사이에는 대립관계이다. A의 부정은 다수의 E가 있을 수 있다.

A-I 사이에는 전체와 부분이다. 개별화의 오류, 역은 일반화의 오류가 있다.

A-O 사이에는 모순관계이다. A1(단위)이고, O는 무(nihil)이다.

 O-A 사이에는 0(제로, 무제한, 아페이론)에서 유일 단위(하나)가 있다.

 O-I 사이에는 사건들(상태들)의 대립이다. 요소들(I)은 무(전체 무한)과는 대립된다.

 O-E 사이에는 온사건(존재)와 무 여러 등급이 있다. 대소사이 사넌

E-O 사이에는 무(허무)와 생성의 관계이다. (O)는 아니지만 부정적 생성들(E)이 있다.

니체에서 A판단에서도 O판단에서도, 즉 모순관계에서도 아닌 부정성(E)의 판단이 있다. 이 판단은 수적으로 다수(plural)이다. 일이 아닌 모든 단위는 다수이다. (52OLE)

 

** 니체는 그리스 비극의 기원뿐만 아니라 그리스 철학의 기원에도 저술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들뢰즈의 설명을 보면 철학사에 대한 니체 자신의 뚜렷한 견해가 있다. 즉 상층이 아니라 심층으로 보는 새로운 형이상학이 있다. 그런데 형이상학의 기원으로써 권능을 파악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나 벩송과 다른 방식으로 권능을 잘 이해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 들뢰즈가 벩송을 읽소서 흄과 니체를 읽었느냐는 문제인데, 경험론으로 또는 신체를 통한 유물론으로서 니체를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52OL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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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참담 15 (Le tragique, 참담, 비참, 1)

§1 계보학의 개념 15 (le concept de généalogie, 1)

- 가치와 평가(Valeur et évaluation, 1) / 비판과 창조(Critique et création, 2) / 계보학이란 단어의 의미(Sens du mot généalogie, 2)

§1.1 가치와 평가 15 (Valeur et évaluation, 1)

니체의 가장 일반적인 기획은 철학에 의미(le sens)와 가치(la valeur)의 개념을 도입하는 데 있다. 분명 현대 철학은 대부분 니체 덕으로 살아왔고, 여전히 니체 덕으로 살아가고 있다. (1, 15)

하지만 니체를 다룰 때, 우리는 그와 반대로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즉 그가 시작하고 구상하는 것처럼, 가치들의 철학이란 참된 비판의 실현이며, 전면적인 비판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식, 다시 말하자면 철학을 망치질(coups de marteau)로 만드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치의 개념은 비판적 전복(un renversement critique)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가치는 원리로서 나타나거나 이해된다. .. 다른 한편, 보다 깊이 다루자면, 가치야말로 평가들(des évaluations), 평가들의 가치 자체가 파생하는 평가의 관점(point de vue d’appréciation)들을 전제[가정]한다. 비판적 문제는 가치들의 가치, 가치가 진행하는 평가(l’évaluation), 따라서 그것[가치]들의 창조(leur création)의 문제이다. (1, 16)

, 본질적인 것, 높음과 낮음(le haut et le bas), 고귀함과 비열함(le noble et le vil)은 가치들이 아니라, 가치들 자체의 가치가 파생하는 미분적(différnciel) 요소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2, 16)

§1.2. 비판과 창조(Critique et création, 2)

비판 철학에는 분리할 수 없는 두 움직임들이 있다. 모든 사물을, 그리고 어떤 가치의 모든 기원을, 가치들에게 연결시키는 것이다. 또한 그 가치들을, 그것들의 기원으로 보이며 그 가치들을 결정하는 어떤 것에게 연결시킨다.

사람들은 니체의 이중적 투쟁을 알린다. .. 현행 가치들의 목록을 만들거나 기존의 가치라는 이름 아래서 상황들을 비판하는 데 만족하는 자들, 칸트와 쇼펜하우어과 같은 철학 노동자들(les ouvriers de la philosophie)”에 반대한다. .. 객관적 사실들로부터 가치를 이끌어내면서 가치를 비판하거나 존중하는 자들, 즉 공리주의자들, “과학자들(les savants)”에도 반대한다. (2, 17)

니체는 가치가 그것의 기원에 무관심하도록 방치하는 토대라는 고상한 개념에 반대하며, 가치에 무관심한 기원을 상정하는 단순한 인과적 파생이나 평범한 시작의 개념에 반대한다. 니체는 계보학(généalogie)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다. 철학자는 계보학자이지 칸트식의 법정의 재판관도, 공리주의자식의 기계론자도 아니다. 철학자는 헤시오도스이다. .. [보편성 원리로부터 거리감] “이 거리감의 고상함으로부터 가치를 창조하거나 그것을 결정하는 권리를 키운다. 실리(l’utilité, 공리, 실용)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랴?” (2, 18)

§1.1 보학이란 단어의 의미 18 (Sens du mot généalogie, 2)

계보학은 기원의 가치임과 동시에, 가치들의 기원을 의미한다. (2, 18)

그러나 이렇게 이해한다면, 비판은 동시에 가장 적극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비판을 결코 반작용(une réaction)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작용(une action)으로 간주한다. 니체는 비판의 활동을 복수, 앙심, 원한에 대립시킨다. 짜라투스트라는 책의 전편을 통하여 <원숭이>, <광대>, <악마>에게 뒤쫓긴다. .. 짜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원숭이와 혼동되는 것을 그에게 뻗치는 불쾌한 시도들 중 하나로 느낀다. 비판은 원한(le ressentiment)이란 반작용이 아니라 현존의 능동적 양태의 능동적 표현이며, 복수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자연적 공격성(l‘agressivité naturelle)이며, 신적인 짓궂음(la méchanceté divine)인데 이 신적 짖궂음없이는 완전을 상상할 수 없으리라. (3, 19-20)

계보학의 개념작업으로부터 니체는. 많은 것들 - 과학들의 새로운 조직화, 철학의 새로운 조직화, 미래적 가치들의 규정 을 기대한다. (3, 20)
§2 의미 20 Le sens 3

- 의미와 힘(Sens et force) / 다수주의(Le pluralisme) / 의미와 해석(Sens et interprétation) / <우월한 단계들만이 중요하다(Seuls les degrés supérieurs importent> .

§2.1. 의미와 힘 20 (Sens et force, 3)

만일 우리가 사물(la chose)을 소유하는 힘, 그것을 이용하는 힘, 그것을 독점하는 힘, 또는 그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힘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사물(인간 현상, 생물학적 현상, 심지어는 물리학적 현상도)의미를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현상이란 외관(une apparence, 겉모습)도 아니며, 출현(une apparition)도 아니며, 그러나 실제적인 힘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기호(un signe)이며, 징후(un symptôme)이다. 모든 철학은 징후학(une symptomatologie)이자 기호학(une séméiologie)이다. 과학들은 징후학적이고 기호학적인 체계이다. (3, 20)

심지어 지각조차도 다양한 측면에서 보자면, 자연을 전유되어 있다는 힘들의 표현이다. 이런 뜻에서 자연 자체는 역사를 지닌다. 일반적으로 한 사물의 역사는 힘들의 연속이며 힘들의 공존이다. ... 역사는 의미의 변주(la variation, 변이), 다시 말하면 “[현상들 간에] 다소 폭력적이고, 또 서로 간에 다소 독립적으로 예속화한 현상들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의미는 복합 용어(une notion complexe)이다. (4, 21)

§2.2. 다수주의 21 (Le pluralisme, 4)

니체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본질적인 다수주의(son pluralisme essentiel)를 고려해야 한다. (4, 21)

신들은 죽었다. 하지만 자기만이 유일하다고 말하는 어떤 신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웃다 죽었다. “신들이 존재하건, 단 하나의 유일신도 존재하건 않건, 정확히 그것이 신성(la divinité)이 아닌가?” 자신만이 유일하다고 말했던 그 신의 죽음 자체는 [수적으로] 다수(plurielle)이다. 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건이고, 이 사건의 의미는 다양하다(multiple). 그래서 니체는 소란스런 위대한 사건들을 믿지 않고, 각 사건의 의미들의 조용한 다수성을 믿는다. (4. 21)

니체가 인용하길 즐기는 한 예를 살펴본다면, 종교는 하나의 의미(un sens unique)를 갖지 않는데, 왜냐하면 차례차례로 다자의 힘들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와 최대한의 친근성(affinité)을 가진 그 힘은 어떤 것인가? 그 힘 자체가 종교를 지배하거나, 종교가 그 힘을 지배할 때, 사람들은 더 이상 누가 지배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그 힘이 어떤 것인가? “H를 찾으세요 (5, 22)

§2.3. 의미와 해석 23 (Sens et interprétation, 5)

해석(l’interprétation)이 자기의 복잡성을 드러내는데, 처음에 어떤 새로운 힘은 한 대상을 이미 점령한 앞선 힘들의 가면을 쓸 때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또 그 대상을 제 것으로 삼을 수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할 때이다. 가면(le masque)이나 속임수(la ruse)는 자연의 법칙이다. (5, 23)

기원 안에서(dans) 차이는, 아마도 특별히 훈련된 눈, 멀리보는 눈, 노인의 눈이나 계보학자의 눈을 제외하고는, 그 기원에서부터(dès) 나타나지 않는다. (6, 24)

모든 것에서, 우월한 단계들만이(seuls les degrés supérieurs important) 중요하다 문제가 기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계보학으로 이해된 기원이 우월한 단계와 관련해서만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6, 24) [O-E에서 E들이 문제emfdl

§2.4. <우월한 단계들만이 중요하다(Seuls les degrés supérieurs importent>

그리스인들이 동양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를 자문하지 않아야 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6, 24) [벩송도 마찬가지로 동방에 묻지 않는다. 어제 또는 기원에 관한 물음은 인류의 생성과정을 물어야한다. 기록이나 신앙에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편집증환자이다.]

철학은 그리스적이다. 필로소포스(philosophos)는 현자가 아니라, 지혜의 벗을 말하고자 한다. 그런데 어떤 낯선 방식으로 (친구)”를 해석해야하는가. 짜라투스트라가 말하길, 벗은 항상 나(je)와 자아(moi) 사이에 제3(un tiers)이다. 3자는 살아가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나를 극복하게 하고, 극복되었던 자이다. (6, 24)

겸손, 가난, 순결과 같은 지혜롭고 금욕적인 덕목들이 새로운 힘으로써 철학에 의해 다시 파악될 때, 그 덕목들이 갖는 의미를 짐작해[알아맞추어]보자.

§3 의지 철학 25 (Philosophie de la volonté 7).

- 힘과 힘의 관계: 의지(rapport de la force avec la force: la volonté) / 기원과 서열(Origine et hiérarchie)

§3.1. 힘과 힘의 관계: 의지 25 (rapport de la force avec la force: la volonté, 7)

계보학은 해석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도 한다. 그러나 대상들 자체는 힘이고 한 힘의 표현이다. .. 그 이유는 대상이란 그 자체로 외관이 아니라 어떤 힘의 출현(l‘apparition)이다. (7, 25)

여러 힘은 거리를 두고 영향을 주고받는데, 거리(distance)는 각각의 힘 속에 포함되어 있는 미분적 요소이며, 그 요소에 의해서 각각의 힘이 다른 힘과 관계를 갖는다. 즉 니체에서 자연철학의 원리는 그와 같다. (7, 25) [뉴턴의 중력, 라이프니츠의 에너지와 달리 힘은 인간관계 속에서 행동하는 작용이다. 일반적 권력있는 자가 힘이 미치는 범위가 넓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과학의 발명자의 힘의 넓이가 크다. 버너스리, 빌게이츠, 잡스 등을 생각해보라 또한 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을 상상해보라. -원자론의 톨보다 파동론자의 결이 더 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맑스가 원자론을 해석하면서, “원자들은 그것들 자신에 있어서 유일한 대상이며 오직 자기 자신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따름이다.”라고 언급 한다.

따라서 니체에게서 힘의 개념은 다른 힘과 관계맺고 있는 어떤 힘의 개념이다. 즉 이런 측면에서 힘은 의지(la volonté)로 불린다. 의지(권능의 의지)는 힘의 미분적 요소이다. 이런 결과로 의지의 철학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가 나온다. (7, 26-27)

니체와 쇼펜하우어 사이의 단절이 있는 지점은 간략하다. 즉 바로 의지가 하나(une)인지 다수(multiple)인지 아는 것과 관계되기 때문이다.(8, 28)

연민 속에서, 도덕 속에서, 금욕주의 속에서 의지로 하여금 자신을 부정하고 자멸하도록 인도하는 것은, 의지의 모든 표출들 안에서 의지의 동일성에대한 의식이다. 니체는 자기가 보기에 소위 말하는 소펜하우어적인 신비화와 같은 것을 발견한다. , 사람들이 의지의 통일성(단위), 동일성(정체성)을 제기할 때,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의지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8, 28) [하나의 부처를 주장하는 한, 그 부처는 우상 또는 팔루스가 된다. 왜냐하면 그 부처는 추상으로써 현존하는 것도 존재자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3.2. 기원과 서열 28 (Origine et hiérarchie, 8)

니체는 영혼, 자아, 이기주의를 원자론의 마지막 은신처들이라고 고발한다. 심리학적 원자론은 물리학보다 더 나을 게 없다. “모든 의지에서 다수의 영혼으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집단적 구조 안에서 명령하고 복종하는 것만이 문제이다.” 니체가 이기주의를 찬양할 때는, 항상 공격적이고 논쟁적인 방식을 통해서이다. 즉 덕에 반대하여, 무사심(désinteréssement)의 덕목에 반대하여 말이다. (8, 28)

그러나 사실상 원자론이 힘의 그릇된 해석인 것처럼, 이기주의도 의지의 그릇된 해석이다. 이기주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또한 자아(ego)가 존재해야 할 것이다.

기원이란 기원 속에서 차이이고, 기원 속에서 차이는 서열(l’hiérarche), 다시 말하면 지배하는 힘과 지배받는 힘의 관계이며, 복종시키는 의지와 복종하는 의지의 관계이다. 계보학과 분리할 수 없는 서열, 그것은 바로 니체가 우리의 문제라고 부르는 바의 것이다. 서열은 기원적 사실이고, 차이의 동일성[정체성]이자 기원의 동일성이다. (8-9, 28-29)

§4 변증법에 반대하여 29 Contre la dialectique)

- 차이와 모순(Différence et contradiction) / 노예가 변증법에 미치는 영향(Influence de l’esclave sur la dialectique)

§4.1 차이와 모순 29 (Différence et contradiction, 9)

니체는 변증법주의자인가? 양자 사이에 본질적 관계 자체가 변증법을 형성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이 관계 속에서 부정적인 것(le négatif)의 역할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9, 29)

사람들은, 자신의 적을 잘 알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니체가 헤겔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 대신 우리는 헤겔적인 운동, 헤겔의 상이한 경향들이 그에게는 익숙했다고 믿는다. 그런데 맑스처럼 그도 거기에서 웃음거리(têtes de turc)로 취급됐다. .. 그런데 누구에 반대해서?”라는 의문 그 자체는 여러 답변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답변들 중 특히 중요한 하나는 초인(surhomme, 아제인간)이 인간의 변증법적인 입장에 반대하고, 가치전환(transvaluation)은 전유(l’appropriation)의 변증법에도 그리고 소외 제거(la suppression de l’aliénation)의 변증법에도 반대하는 것이다. (9, 30)

니체의 저작 속에서, 한 힘과 다른 힘의 본질적 관계는 결코 본질 속의 부정적인 요소로 간주되지 않는다. 다른 힘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복종하는 힘은 다른 힘이나 자신이 아니 바의 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고유한 차이를 긍정하고 이 차이를 향유한다(jouir, 즐긴다). (9, 30)

부정적인 것, .. 그것은 이(자신의) 활동으로부터, 적극적인 힘의 현존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의 차이의 긍정으로부터 나온다. (10, 30) [차이의 긍정은 별종의 특성이다. 같잖은 생각을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부정적인 개념(다시 말하면 개념으로써 부정la negation)에 관해 말하자면, “이것은 삶과 열정이 배어든, 근본적인 개념과의 비교 속에서 뒤늦게 탄생한 희미한 대비(un pâle contraste)일 뿐이다.” 니체는 부정, 대립, 모순의 사변적 요소를, 긍정의 대상이자 향유의 대상인 차이라는 실천적 요소로 대체한다. (10, 30) [들뢰즈의 실행론(실천론) 강조와 같은 길이다.]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기쁨(le plaisir)”, 즉 차이의 향유(la jouissance). 바로 거기서 경험주의는 변증법의 무거운 용어()들 대신에, 특히 변증법주의자가 말하듯이 부정의 노동(le travail) 대신에 공격적이며 경쾌한 새로운 개념적 요소를 대체한다. 변증법은 노동이고, 경험주의는 향유이라는 것, 이것은 이 둘을 충분히 특징지어준다. (10, 31) [변증법이 노동이라는 것은 사변적으로 체계를 건설처럼 구축하는 작업이라는 점이다.]

차이의 경험적 감정, 간단히 말해 서열은 모순의 모든 사유보다 더 효과적이고 더 깊이있는 개념의 본질적 동력이다. (10, 32)

§4.2 노예가 변증법에 미치는 영향 32 (Influence de l’esclave sur la dialectique, 10)

게다가 우리는 [거꾸로] 다음 질문을 해야만 한다. 즉 변증법주의자 자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 [그는]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 부정을 자신의 고유한 본질과 자신의 현존의 원리로 만든다. “귀족의 도덕이 자기 자신의 성공적인 긍정에서 생겨나는 반면, 노예들의 도덕은 처음부터 자신의 도덕에 속하지 않는 것에, 자기도덕과는 다른 것에, 그 도덕의 비-자아인 것[자기도덕이 아닌 것]에 대한 아뇨(non)이다. 그러한 아뇨는 그 도덕의 창조적 작동이다(son acte création).” (10-11, 32) [현존의 원리는 A판단이 되고, 모든 것은 A 판단으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항들(des notions) 관계로 만든다. 노예들은 스스로 같잖은 것을 알고 존중하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변증법을 평민(la plèbe)의 사변으로써, 노예의 사고하는 방식으로써 소개한다. (14, 32) [사변이든 사고든, 고상한자를 모방하는 것은 노예 본유의 작동하는 창조가 아니다.]

[주인과 노예에서] 누가 변증법주의자인가, 누가 관계를 변증법화하는가? 그것은 노예이고, 노예의 관점이며, 노예의 관점에서 사고이다. 주인과 노예 관계의 그 유명한 변증법적인 측면은 사실상 다음과 같은 점에 의존하고 있다. 권능(la puissance)이 거기서는 권능의 의지로서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권능의 표상으로서, 우월성의 표상으로서, “어떤 이에 대한 다른 이의 우월성에 대한 재인식[인정]으로 이해된다는 점이다. (11, 32-33)

헤겔이 우리에게 제안한 주인의 초상이 처음부터 노예에 의해서 만들어진 초상, 적어도 노예가 스스로 꿈꾸는 것과 같은 노예들 표현하는 초상, 기껏해야 출세한 노예라는 이유에서이다. 주인의 헤겔적 이미지 아래서 구멍을 뚫고 나오는(percer) 것은 여전히 노예이다. (11, 33) [안에서(깊이에서) 실천적 작동으로 나오는 것은 권능인데, 이것의 반영물이 주인이다. 즉 노예의 활동성의 투사가 주인이다.]

§5 비극의 문제 33 (Le problème de la tragédie, 12)

- 비참의 변증법적 개념작업과 <비극의 기원>(Conception dialectique du tragique et “Origine de la tragédie”) / 비극의 기원에 대한 세 주장(Les trois thèses de l’origine de la tragédie)

§5.1 비참의 변증법적 개념작업과 <비극의 기원> 33 (Conception dialectique du tragique et “Origine de la tragédie”, 12)

니체의 주석가는 어떤 구실로든 니체의 사유를 변증법화 하는것을 원칙적으로 피해야 한다. (12, 33) [니체는 변증법론자가 아니라 확장론자, 또는 생성론자이다.]

그러나 니체가 비참([le] tragique)”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그는 비극적 세계관을 두 가지 다른 관점들에 대립시킨다. 즉 변증법적인 관점[국가, 제국]과 크리스트교적 관점[종교, 편집증]. (12, 34)

오히려 잘 고려해 보면, 비극은 세 가지 죽는다(moirir)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비극은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에 의해 죽는다. 그것은 유리피데스적죽음이다. 둘째로 크리스트교에 의해 죽는다. 셋째로 근대의 변증법과 바그너의 화신으로 변화된 타격으로부터 죽는다. (12, 34)

독일 철학과 변증법이 근본적으로 크리스트교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크리스트교와 변증법은 비극을 살아가[체험하]고 이해하며 사유함에 있어서 태생적인 무능(l’incapacité)이다. “비참(le tragique)을 발견한 것은 바로 나(니체)”이며, 그리스인들조차 그것을 잘 몰랐다. (12, 34) - [비참과 비극을 구별할 것이다. 비극은 공연에 올려지는 것이고 비참은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5.2 비극의 기원에 대한 세 주장들 34 (Les trois thèses de l’origine de la tragédie, 12) ... 󰡔비극의 기원󰡕을 고려할 때, 니체는 거기서 변증법주의자라기보다, 오히려 쇼펜하우어의 생도임을 분명히 이해하게 된다. 또한 쇼펜하우어 자신도 변증법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았음을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12, 34)

더 나중에 니체가 󰡔비극의 기원󰡕에 대해 말하도록 허락한 것, 그것은 “‘비극의 기원은 아주 위험스런(scabreuse 외설스런) 방식으로 헤겔주의가 느껴진다.” (12, 35)

우리는 니체가 더 뒤에서 새로운 비극관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그 어려운 책의 진행을 뒤따라가야만 한다. (13, 35) [아래 세 가지 주장]

1) 󰡔비극의 기원󰡕에서, 모순(la contradiction)은 원초적 통일과 개별화의 모순이고, 의욕과 외관[겉모습]의 모순이며, (la vie)과 고뇌(la souffrance)의 모순이다. (13, 35)

2) 모순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대립(l’opposition) 속에 드러난다. ...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은 모순의 항들로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순을 해소하는(résoudre) 반테제적인 두 방식으로서 서로 대립한다. (13, 36-37)

3) 비극(la tragédie)은 그런 화해이고, 디오니소스에 의해서 지배되는 경탄할 만하고 덧없는 동맹(cette alliance)이다. 왜냐하면 비극 속에서 디오니소스는 비극의 기초(le fond, 깊이)이기 때문이다. 비극의 유일한 인물은 디오니소스, .. 또 비극의 유일한 관객은 합창단인데, 그 까닭은 그 합창단이 디오니소스적이며, 디오니소스를 자신의 권위자, 주인으로 간주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아폴론적 토대(l’apport, 공헌)는 비극 속에 있고, 바로 아폴론이야말로 비극을 드라마(en drame) 발전시키고, 비극을 드라마 속에서 표현한다. (13-14, 37-38)

§6 니체의 전화 38 (L’évolution de Nietzsche 14)

- 비극의 기원 속에서의 새로운 요소들(Eléments nouveaux dans l’origine de la tragédie) / 긍정(L’affirmation) / 소크라테스(Socrate) / 기독교(le christianisme)

§6.1 비극의 기원 속에서의 새로운 요소들(Eléments nouveaux dans l’origine de la tragédie)

따라서 󰡔비극의 기원󰡕에서 비극은 전체적인 방식으로 원초적 모순, 그것의 디오니소스적 해결과 이 해결에서 극적(dramatique) 표현으로 정의 된다. 모순을 재생산하고 해소하는(résoudre) , ... 이것은 비극적 문화의 특징이자, 칸트, 쇼펜하우어, 바그너와 같은 근대의 대표자들의 특징이다. “그것[비극적 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것이 우주의 구조에 동요 없는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자기 자신의 고통(sa propre douleur)을 애정 어린 동정심을 가지고 재인식하는 곳, 즉 거기서[우주의 구조 위에서] 영원한 고통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어떤 지혜로 과학을 대체하는 것이다.” (14, 38)

우선 디오니소스는 긍정적인 , 긍정하는 신으로 끈기 있게 제시되고 있다. .. 그래서 디오니소스 자신은 원초적 존재로 귀착되거나 원초적 기초 속에서 다수를 소멸시키기보다 다수의 긍정으로 스스로 변신한다(se métamorphose). 그는 개별화(l’individuation)의 고통(les souffrances)을 재생산하기보다 성장(la croissance)의 고통(les douleurs)을 긍정한다(14, 39).

§6.2. 긍정 40 (L’affirmation 15)

니체가 저작활동의 마지막 무렵에서 󰡔비극의 기원󰡕에 대해서 탐구할 때, 그는 거기서 반쯤은 변증법적이고 반쯤은 쇼펜하우어적인 배경을 넘어서는 본질적으로 혁신적인 두 가지를 깨닫는다. 하나는 바로 디오니소스의 긍정적 성격으로, .. 다른 한편, 니체는 더 나중에 완전히 벌어져야만 하는 어떤 대립(une opposition)을 발견했다고 만족한다. 그 이유는 󰡔비극의 기원󰡕의 처음부터 참된 대립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간의 너무나도 변증법적인 대립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 간의 보다 심각한 대립이라는 것이다. .. 비극이 죽는 것도 아폴로니 아니라 소크라테스이다. 또 소크라테스는 디오니소스적이지도 아폴론적이지도 않다. (15, 40)

생산적인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충동은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힘이고, 의식은 비평적이고 부정적인 힘인 반면, 소크라테스에게서 충동은 비판적인 것이 되고 의식은 창조적인 것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퇴락(décadence)의 최초의 천재(le génie)이다. (40)

즉 소크라테스는 이론적 인간이고, 비극적인 인간의 단 하나의 참된 대립자(le conraire)이다. (15, 41) [우리가 보기에 니체가 소크라테스에 대해 독일식으로 이해한 것이 아닌가 한다. 소크라테스는 지행(智行)합일자가 아니라 행지(行智)합일자이라야 할 것이다.]

§6.3. 소크라테스 41 (Socrate)

여기서 여전히 어떤 것이 이 둘째 주장이 자유롭게 전개되는 것을 막는다. (15, 41)

전형적인 영웅으로서 소크라테스에 만족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너무도 그리스인인데, 처음에는 자신의 분명성에 의해서 다소 아폴론적이다가, 결국에 음악을 연구하는 소크라테스로서 약간은 디오니소스적이기 때문이다. (16, 41) [소크라테스와 음악이라 .. 이는 잘 알려진 것이 아닌데, 벩송과 음악이라면 당연하다 하겠다.]

고통을 해서하기 위해서 화해하는 신들인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반테제는 보다 신비로운 디오니소와 아리아드네의 보완성으로 대체된다. 그 까닭은 삶을 긍정하는 것이 문제일 때 한명의 여인, 약혼녀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16, 41) [“철학이란 무엇인가약혼녀에 대해 언급이 있다.]

[§6.3.2 기독교 42 (le christianisme, 16) - (본문에 단락 구성이 없다)]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의 대립은 참된 대립으로 대체된다. “사람이 나를 이해했을까? - 십자가에 못박힌 자 대 디오니소스 니체는 󰡔비극의 기원󰡕이 기독교에 대해 침묵했고, 기독교를 정체화화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16, 42) [1872년에 깊이까지 눈치채지 못했다가, 1888년에는 눈치를 챘다고 해야 하나.]

§7. 디오니소스와 크리스트 42 (Dionysos et le Christ, 16)

- 삶을 위해서 또는 반대해서(Pour ou contre la vie) / 변증법적 사고의 기독교적 특징(Caractère chrétien de la pensée dialectique) / 변증법적 사고와 디오니소스적 사고의 대립(Opposition de la pensée dialectique et de la pensée dionysiaqur)

§7.1 삶을 위해서 또는 반대해서 42 (Pour ou contre la vie, 16)

디오니소스와 크리스트에서, 순교(le martyre, 수난)도 동일자(le même)이며, 정념도 동일자이다. 그것은 동일한 현상이며, 그러나 반대되는 두 방향이다. 한편으로 고뇌를 정당화하는 삶, .. 다른 한편으로 삶을 고발하게 하는 삶, .. (16, 42)

§7.2 변증법적 사고의 기독교적 특징 42 (Caractère chrétien de la pensée dialectique, 16)

우선 크리스트교에 있어서, 삶 속에 고통이 있음은 삶을 정의롭지 않고 그것은 본질에 있어서조차 부정의한 것이며, 고통에 의해서 본질적인 부정의를 갚아나가야 함을 의미한다. .. 그러고 나서 그러한 것이 의미하는 것은, 삶이 정당화되어야만 하고,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부정의를 속죄하거나, 좀 전에 삶을 고발했던 그 동일한 고통에 의하여 구원을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16-17, 43-44) [죄지어 부채 있고 그러고 나서 속죄하여 구원으로..]

크리스트교의 이 두 측면은 니체가 양심의 가책(la mauvaise conscience)또는 고통의 내재화(l’interiorisation de la doulerur)라고 불렀던 것을 구성한다. 이 두 측면은 소위 크리스트교적 허무주의, 다시 말하면 크리스트교가 삶을 부정하는 방식을 정의한다. 한편으로 죄의식을 제작하는 기계이며, .. 다른 한편으로 고통을 배가하는 기계 .. 구역질 나는 공장(l’immonde usine)이다. (17, 43)

고통은 내재화되고, 신에게 그런 식으로 제공되어, 그런식으로 신 안에 놓인다. “십자가에 매달린 신의 역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마지막 잔인성의 불가사의(mystère)”. 바로 여기에 소위말하는 크리스트교적 광기, 이미 완전히 변증법적인 광기가 있다. (17, 44)

§7.2 변증법적 사고와 디오니소스적 사고의 대립 44 (Opposition de la pensée dialectique et de la pensée dionysiaque, 17)

이런 측면이 참된 디오니소스에게 얼마나 낯설게(étranger) 되었는지! 󰡔비극의 기원󰡕의 디오니소스는 계속해서 고통(la douleur)해소해왔다(résolvait)”. .. 그에게 있어서 삶은 본질적으로 정의로운 그런 신이다. 게다가 바로 삶은 스스로 자신을 정당화할 책임이 있고, “그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고뇌(la plus âpre souffrance)조차 긍정한다.” (17-18, 44)

디오니소스적 광기(la mania)는 기독교적 광기와 대립되고, 디오니소스적 취기는 기독교적 취기와, 디오니소스의 사지가 찢기는 죽음(la lacération)은 십자가에 못박힘(la crucifixion), 디오니소스 부활은 크리스트교적 부활, 디오니소스적 가치전환(la transvaluation)은 크리스트교적 화체설(la transsubstantiation)과 대립된다. (18, 45)

[크리스트교에서] 구원자(un sauver)의 관점에서, “삶은 성스러움으로 인도하는 길이어야 한다.” 그리고 디오니소스의 관점에서 현존은 더욱이 엄청난 고통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할 만큼 그자체로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18, 45) [디오니소스와 헤라클레스적 해소(해결)에 대립되는 자는 플라톤주의자와 에피쿠로스주의자 일 것이다. 이 후자들은 상층으로 가거나 안존에 치중한다. 소크라테스는 헤라클레스적이고, 니체 당대의 낭만주의는 에피쿠로스적이다.]

짜라투스트라는 모든 화해보다 더 고귀한 어떤 것 ... “나는 짜라투스트라를 축복하는 나의 긍정을 모든 균열(les gouffres, 구렁텅이) 속에 옮긴다. .. 그러나 여기서 한번 더 말하자면, 그것은 디오니소스(라는)의 관념자체이다.” (18-19, 46)

디오니소스에 대한 니체 해석에 대해 가장 멀리까지 간 것은, 오토(Rudolf Otto. 18691937)가 나중에 제시한 해석이다: [니체는] 헤겔적인 디오니소스, 변증법적인 디오니소스, 변증법주의자인 디오니소스![이다] (.19, 46) [오토는 루터파 신학자이다]

§8 비참의 본질 46 (L’essence du tragique 19)

- 비참과 기쁨(Le tragique et la joie) / 드라마에서 영웅까지(Du drame au héros) / 현존의 의미와 정의(Sens de l’existence et justice)

§8.1. 비참과 기쁨 46 (Le tragique et la joie, 19)

디오니소스는 나타나는 모든 것, “가장 모진 고통(la plus âpre souffrance)조차긍정하고, 긍정된 모든 것 속에 나타난다. 다수의(multiple) 긍정이자 복수적(pluraliste) 극정은 바로 비참의 본질(l’essence, du tragique)이다. 만약 사람들이 모든 것을 긍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어려움을 생각한다면, 그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19, 46)

모든 것이 긍정의 대상, 말하자면 기쁨(la joie, 환희)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각각의 사물에서, 각각이 긍정되고 부정적이길 중단하는 특별한(particuliers, 개별적인) 수단들을 발견해야만 한다. (19, 46-47)

비참은 다자의 기쁨이며, 복수적 기쁨[환희]이다. .. 비참이란 기쁨[환희]의 미적[감성적]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지, 의학적인 처방을 가리키는 것도, 고통, 공포, 연민의 도덕적 해결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비극적인 것은 기쁨(la joie)이다. (19-20, 47)

비극(la tragédie)의 부활은 예술적인 청자(l’auditeur artiste)의 부활을 야기한다. 지금까지 연극에서 그 예술적인 청자의 자리는 이상한 오해가, 반쯤은 도덕적이고 반쯤은 현학적인 야망을 가진 비평가가 차지하고 있었다.” (20, 47)

다수의 긍정의 논리학, 따라서 순수 긍정의 논리학, 또 그것에 상응하는 기쁨의 윤리학은 니체의 모든 철학을 관통하는 반()변증법적이고 반()종교적인 꿈과 같다. .. 비극은 기쁨과 다수, 긍정적인 것과 다수, 긍정과 다수의 본질적 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영웅은 명랑하다(gai). 바로 그 점이 지금까지 비극의 저자들이 회피해 왔던 것이다.” 비극, 그 신선하고 역동적인 명랑성(la gaieté). (20, 48)

§8.2. 드라마에서 영웅까지 48 (Du drame au héros, 20)

그래서 니체는 󰡔비극의 기원󰡕에서 그가 주장했던 드라마의 개념작업(la conception du drame)을 포기한다. 비극은 또한 하나의 파토스인데, 모순의 기독교적 파토스이다. .. [바그너를 비판하면서] “나는 그것이 더 이상 디오니소스의 플롯이 아니라, 퇴락의 음악이라는 점에서 고통스럽다.” (20, 48)

니체는 영웅적 표현의 권리를 주장한다. 즉 명랑한 영웅, 경쾌한 영웅, 춤추는 영웅, 놀이하는 영웅. 우리를 경쾌하게 만들고, 우리에게 춤을 가르치고, 우리에게 놀이의 본능(l’instant de jeu)을 부여하는 것은 디오니소스의 임무이다. 니체적 주제에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한 역사가조차 디오니소스의 모든 특별한 측면으로서 기쁨, 대기의 가벼움, 운동성과 편재성을 인정한다. (20, 48)

디오니소스는 아리아드네를 하늘로 인도한다. 아리아드네의 왕관의 보석들은 별이다. 바로 그것이 아리아드네의 비밀인가? 그 유명한 주사위 던지기(le fameux coup de dès)에서 솟아나는 성좌(星座)인가? 주사위를 던지는 자는 바로 디오니소스이다. 바로 그는 춤추고. 변신하고, “폴리게츠(Polygethes)즉 무수한 기쁨들의 신이라 불린다. (20, 48-49)

§8.3. 현존의 의미와 정의 49 (Sens de l’existence et justice, 21)

일반적으로 변증법은 비극적 세계관(vision tragique)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비극(la tragédie)의 죽음이고,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이론적인 개념작업에 의한, 더욱이 (헤겔과 더불어) 기독교적인 개념작업에 의한 비극적 견해의 대체이다. (21, 49)

옛날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현존의 의미(sens de l’existence)를 추구할 때는 항상 현존을 그릇되거나 유죄인 것으로, 정당화되어야만 하는 불의(부정의)인 것으로[허상, 또는 아페이론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현존을 해석하기 위해서 어떤 신이 필요했다. (21, 49)

헤겔 .. 그리고 쇼펜하우어도 .. 삶의 부정 속에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수단을 찾았다[플라톤주의의 잔재]. “철학자로서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독일에서 가졌던 최초의 유연하고 확신에 찬 무신론자(le athée)였다. 그것이 그의 헤겔에 대한 적대성의 비밀이다. 현존은 신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주어진 진리이고 논의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것이다. .. 크리스트교적 해석을 그처럼 밀어붙이자마자, ‘현존이 도대체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쇼펜하우어의 질문이 잔인하게도 우리 앞에 다시 제기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질문은 그것의 깊이 감추어진 곳에서 철저히 바로 이해될 수 있기 까지 수세기를 필요로 할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그 질문에 응했던 대답 자체는, 사람들이 나를 용서하듯이, 설익은 것이었다. 그것은 미숙한 것이고, 익지 않은 과일이며, 순수 타협이다. 크리스트교의 금욕적 진실인 도덕적 관점의 올가미(les rêts) 속에 사로잡혀, 그리고 사람들은, 올가미와 꼭 마찬가지로, 신도 더 이상 믿고자 원하지 않는다고 의미했었던 그 올가미 속에 사로잡힌, [쇼펜]는 성급하게 멈추었다.” (21-22, 50)

§9 현존의 문제 51 (Le problème de l’existence, 22)

- 죄지은[범죄적] 현존과 그리스인들(L’existence criminelle et les Grecs) /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e) / 과실 있는 현존과 기독교(L’existence fautive et le christianisme)/ 무책임성의 가치(Valeur de l’irresponsabilité)

§9.1. 죄지은[범죄적] 현존과 그리스인들 51 (L’existence criminelle et les Grecs, 22)

현존의 의미의 역사는 기나긴 역사이다. 그 역사는 크리스트교 이전의 그리스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현존의 불의(l’injustice)를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동시에 우월하고 신성한 정당화(une justification)를 발견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고뇌(la souffrance)를 이용했다. (22, 51) [상층의 정당화 심층의 불의(비도덕)으로 보는 것은 플라톤주의자들의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9.1-2. 아낙시만드로스 52 (Anaximandre, 23)

니체에 따르면, 아낙시만드로스는 현존의 이런 개념화작업을 완벽하게 표현해낸 철학자이다. 그는 존재자들(les êtres)은 시간의 질서에 따라서 자신들의 부정의의 고통(la peine)과 사죄(la réparation)를 서로서로 지불한다.”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1) 생성(le devenir)은 부정의/불의(adikia)이고, 현존에 도래하는 사물들의 다수성이며, 부정의들의 총합이다. [인생의 더하기와 빼기는 항상 일정하다]

2) 사물들은 서로 투쟁하고 자신들의 부정의를 프토라(phtora)에 의해서 서로 속죄한다.

3) 그것들 모두는 원초적 존재(아페이론, apeiron)에서 파생하고, 자신들을 파괴하면서, 영원히 자신들의 불의를 속죄하는 유죄인 생성, 유죄인 다수성, 유죄인 생산 속으로 전락한다(󰡔테오디세󰡕). (23, 52-53)

§9.2. 과실 있는 현존과 기독교 53 (L’existence fautive et le christianisme, 23)

쇼펜하우어는 일종의 현대의 아낙시만드로스이다. 이런 저런 작가들에게서 니체에게 그렇게 마음에 든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비극의 기원󰡕에서 그들의 해석에 일반적으로 충실하다는 것을 무엇이 설명해 주는가? (23, 53)

󰡔비극의 기원󰡕에서부터 니체는 거인족과 프로메테우스의 죄를 원죄에 대립시킨다. 그러나 그가 모호하게 상징적인 말로 그렇게 하고 있는 이유는, 아리아드네의 불가사의(mystère)가 그의 긍정적 비밀이듯이, 이런 대립은 부정적 비밀이라는 점이다. ..“원죄, 호기심, 겉치례, 유혹, 탐욕 속에서, 예컨대 일련의 여성적 단점들이 악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 그래서 아리아인들(그리스인들)에게서 죄(le crime)는 남성적이고, 셈족들에게서 과오(la fuate) 여성적이다.” 니체적 여성 비하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리아드네는 니체의 최초 비밀이고 여성의 최초 권능이며, 영혼이고 디오니소스적 긍정에서 분리될 수 없는 약혼녀(la fiancée)이기 때문이다. (23-24, 53-54)

어머니들과 자매들, 이 여성의 둘째 권능은 우리를 비난하게 하고 우리에게 책임을 묻는 것을 기능으로 삼는다.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네 잘못(ta faute)이다. .. 잘못과 책임의 전가, 가시 돋힌 힐난, 영원한 비난, 원한(ressentiment), 바로 그것이 현존에 대한 경건한 해석이다. (24, 54)

니체는 새로운 이상, 새로운 해석, 다른 사유 방식이란 임무를 자신에게 부여한다. 무책임성에 그것의 긍정적인 의미를 제공하는 것, 나는 완전한 무책임성을 쟁취하길 원했고, 칭찬과 비난, 현재와 과거에서 나를 독립시키길 원했다.” 무책임성은 니체의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비밀이다. (24-25, 55)

§9.3. 무책임성의 가치 55 (Valeur de l’irresponsabilité, 25)

크리스트교와 연관하여, 그리스인들은 어린아이들이다. 그들이 현존을 비하하는 방식, 그들의 허무주의는 크리트트교의 완전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25, 55) - [그리스인들은 아페이론에서 생성되는 같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크리스트교는 아페이론이 아니라 무에서 창조를 하기에 같지 않은 것들은 무시 또는 원죄이다.]

그리스인들이 죄를 지은 현존, “지나친(hybrique, 방종하는)” 현존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신들이 인간들을 미치광이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즉 현존은 죄인이지만, 그들에게 잘못의 책임성을 지게 한 것은 바로 신들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죄(le crime)의 그리스적 해석과 죄악(le péché)의 크리스트교적 해석 사이의 큰 차이이다. (25, 55) [그리스인에게서 책임성은 신들에게, 크리스트교에서 책임성은 개인(인격)에게.. ]

범죄가 범인의 책임성을 포함하고 있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니체는 󰡔비극의 기원󰡕에서 여전히 현존의 범죄적 특성을 믿는다는 것이다.광기, 이성 상실, 두뇌 속의 약간의 혼란, 바로 많은 난처하고, 운명적인 상황들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가장 정열적이고 용맹을 떨친 시기의 그리스인들이 인정했던 바가 그것이다. 광기(la folie)이지 좌악(le péché)이 아니다. [당신은] 내말 이해하겠어요? ... 고개를 끄떡이며, 신이 그를 눈멀게 했어야 했다고 스스로 말한다. ... 바로 그런 식으로 어느 정도까지 인간들을 정당화하는데 신들을 이용한다. 그들의 잘못된 행동에서조차, 신들은 악의 원인을 해석하는데 이용된다. 그 때, 신들은 인간들에게 벌을 주지는 않지만, 보다 더 고귀한 것, 즉 잘못을 준다.”

사실상 혐의있는 현존이 책임질 수 있는지 없는지?가 의문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이 혐이 있는지 .. 결백한지? 이다. 그 때 디오니소스는 자신의 다양한 진리(sa verité multiple)를 발견했다: [] 결백, 다수성의 결백, 생성의 결백, 있는 바 모든 것의 결백[을 발견했다]. (26, 56)

§10 현존과 결백 56 (Existence et innocence, 26)

- 결백과 다수주의(Innocence et pluralisme) / 헤라클레이토스(Héraclite) / 생성과 생성의 존재, 다수와 다수의 하나(Le devenir et l’être du devenir, le multiple et l’un du multiple) / 영원회귀 또는 놀이(L’éternel retour ou le jeu)

§10.1 결백과 다수주의(Innocence et pluralisme, 26)

결백(une innocence)”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니체가 책임 있는 자들을 비난하면서, 우리 밖에서 또는 우리 속에서까지 그들을 찾고 있는 우리의 통탄스러운 광기를 고발할 때, 그는 다섯 가지 이유에서 자신의 비판의 근거를 제시한다. 그 첫째 이유는 전체 밖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깊은 마지막 이유는 전체가 존재하지 않는다[전부란 없다].” 우주를 산산조각을 내면서 전체에 대한 존경을 상실해야 한다.” 결백은 다자의 진리이다. (26, 56-57)

다른 해석들 가운데 하나가 붕괴되었지만 그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해석으로 생각되는 만큼, 현존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고, 모든 것이 헛된 것 같다.” 아 슬프게도 우리는 놀이에 서투른 자들(mauvais joueurs)이다. 결백은 현존, , 의지의 놀이이다. 긍정되고, 높이 평가된 현존, 분리되지 않는 힘, 들로 나뉘지 않은 의지가 바로 결백이 최초의 근사치이다. (26-27, 57-58)

§10.2 헤라클레이토스 58 (Héraclite, 27)

헤라클레이토스는 참담한 사상가이다. 정의의 문제가 그의 저서를 가로지른다. 그에게서 삶은 근본적으로 결백하고 정의롭다. 그는 놀이의 본능(un instinct de jeu)으로부터 현존을 이해하고, 현존을 도덕적 또는 종교적 현상이 아니라, 미적 현상(un phénomène esthétique)으로 만든다. 그래서 니체는 자신을 쇼펜하우어에 대립시키듯이, [헤라클레이토스]를 하나하나씩[점대 점으로] 아낙시만드로스에 대립시킨다.

§10.2-2 생성과 생성의 존재, 다양과 다양의 하나(Le devenir et l’être du devenir, le multiple et l’un du multiple)

헤라클레이토스는 숫자들[암호들]처럼, 두 가지 사유를 지닌다. 하나는 존재란 없으며, 모든 것은 생성 속에 있다. 또 하나는 존재는 있는 그대로의 생성의 존재이다. .. 두 가지 사유는 분리될 수 없고, 불과 디케처럼, 그리고 피시스와 로고스처럼 하나의 동일한 요소에 대한 사유이다.927, 5859)

다자(le multiple)은 분리될 수 없는 표현이고, 본질적인 변신이며, [심층의]유일한 것의 항상적 징후이다. 다자는 일자(l’un)의 긍정이고 생성이며 존재의 긍정이다. 생성의 긍정 그 자체는 존재이고 다자의 긍정 그 자체가 일자이다. 다양한 긍정은 일자가 긍정되는 방식이다. “일자, 그것은 다자이다” (59)

헤라클레이토스가 단 하나의 유일한 요소만을 인식할 때, 그것은 파르메니데스(또는 아낙시만드로스)의 그것과 정반대의 방향 속에 있다. .... 유일한 것은 탄생과 파괴 속에서 긍정되어야만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깊이 들여다보았다. 즉 그는 다자의 어떤 처벌도, 생성의 어떠한 속죄도 현존(l’existence)의 어떠한 죄의식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성 속에서 부정적인 어떤 것도 보지 못했다. 그는 정반대(le contraire)를 보았는데, 생성의 긍정과 생성 존재의 긍정, 즉 이중의 긍정, 간단히 말하면, 존재(l’être)의 정당화이다. (27-28, 59) [존재(l’être)의 정당화가 아니라, 현존(l’existence)의 정당화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

되돌아온다는 생성되고 있는 것의 존재(l’être)이다. ‘되돌아온다는 생성 그자체의 존재(l’être)이고, 생성 속에서 긍정되는 존재이다. 영원회귀는 생성의 법칙처럼, 정의처럼, 존재처럼[있다]. (28, 59) [생성법칙, 정의, 그리고 현존들의 총합으로 일자(존재)란 영원회귀와 같다. - 이렇게 읽어야 하는가?]

§10.3. 영원회귀 또는 놀이(L’éternel retour ou le jeu)

[영원회귀는 순환이 아니다. 판을 넓히는 놀이(승부놀이)이며, 서로 배우은 놀이이다]

이로써 현존이 책임질 것도 유죄인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헤라클레스는 다음처럼 소리치기까지 간다. 즉 존재들간의 셀 수 없는 투쟁은 단지 순수한 정의이다! 게다가 일자가 다자이다.” 다자와 일자의 상관관계, 생성과 존재의 상관관계는 하나의 놀이(un jeu)를 형성한다. (28, 60)

생성을 긍정하는 것과 생성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놀이의 두 시간이고, 이 두 시간은 셋째항과 더불어 구성된다. 이 셋째항은 놀이꾼, 예술가, 아이이다. ...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기를 아이온(Aion, 영원)은 놀이하는 아이이고, 고리 던지기하는 아이이다. 생성의 존재, 즉 영원회귀는 놀이의 둘째 시간이며, 또한 .. 왜냐하면 영원회귀는 가는 것과 구분되는 회귀이고, 행동과 구별되는 관조이며, 가는 것 자체의 회귀이고 행동의 회귀, 즉 시간의 순간임과 동시에 순환이기 때문이다. (28, 60)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의 해석의 비밀(l’interprétation)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는 히브리스(l’hybris)를 놀이의 본능에 대립시킨다. “그것[놀이]은 유죄의 오만이 아니고, 그것은 끊임없이 각성 시키는 놀이 본능이며, 새로운 세계들을 백일하에 불러내는 것이다.” 테오디세(théodicée)가 아니라 코스모디세(cosmodicée)이다. (28-29, 60-61)

§11 주사위 던지기 61 (Le coup de dés, 29)

- 두 시간(les deux temps) / 우연과 필연: 이중의 긍정(Hasard et nécessité: la double affirmation) / 주사위 던지기와 기회 계산 간의 대립(Opposition du coup de dés et du calcul des chances)

§11.1. 두 시간 61 (les deux temps, 29)

놀이는 두 순간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주사위 놀이의 순간들이다. 즉 사람들이 던지는 주사위들과 떨어지는 주사위들. 니체는 주사위 던지를 대지와 하늘이란 두 가지 구별되는 탁자위에서 놀이하는 것처럼 묘사하기에 이른다. .. “대지 ..“하늘 (29, 61)

하나의 동일한 세계의 두 순간, 정오와 자정, 주사위를 던지는 시간과 주사위가 떨어지는 시간이다. 니체는 삶의 두 탁자를 강조하는데, 이것들은 또한 놀이꾼 또는 예술가의 두 시간이다. (29, 62) [놀이꾼, 예술가, 어린이는 두 시간을 가지고 논다?]

§11.2. 우연과 필연: 이중의 긍정 62 (Hasard et nécessité: la double affirmation, 29)

주사위 여러번 던짐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여러 번의 수(leur nombre) 때문에, 그 던짐들은 동일한 조합을 재생산하기에 이르렀으리라. 그와 정반대이다. 주사위의 한번 던짐이 중요하다. (29, 62)

사람들이 한번 던지는 주사위들은 우연(le hasard)의 긍정이고, 그것들이 떨어지면서 형성하는 조합은 필연(la nécessité)의 긍정이다. (29, 62)

니체는 우연으로 긍정을 만든다. 하늘 자체는 우연한 하늘, “결백한 하늘로 불린다. 짜라투스트라의 지배[영역]위대한 우연으로 불린다.

니체가 필연(nécessité, 운명destin)이라 부르는 것은 결코 파괴가 아니며 우연 그 자체의 조합이다. 필연은 우연이 그 자체로 긍정되는 한에서 우연에 의해서 긍정된다. (30, 63)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확률들(des probabilités)을 따르는 많은 수가 있지만, 정오가 자정의 모든 분산된 부분들을 집합시키듯이 우연의 모든 조각들을 결합시키는 것은 숙명적인(fatal) 유일한 수, 우연 그 자체의 유일한 수이다. 그래서 놀이꾼이 주사위 던지기를 한 번 더 하게 하는 수를 낳기 위해서는 일단 우연을 긍정하는 것으로 족하다. (30, 63)

§11.3. 주사위 던지기와 기회 계산 간의 대립 63 (Opposition du coup de dés et du calcul des chances, 30)

우연을 긍정할 줄 아는 것은 놀이를 할 줄 아는 것이다. (30, 63) [우연: 놀이에서 승패는 병가지상사(勝敗 兵家之常事). 그래도 놀이는 계속된다. 이것이 긍정이다.

우리는 놀이할 줄 모른다: “, 자신의 도약에서 실수한 호랑이처럼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러워하고, 서투른 우월한 인간들이여, 그래서 나는 당신들이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것을 종종 보았다. 당신들은 주사위 던지기를 실수하진 않았다. 그러나 당신들 주사위 놀이꾼들에게 있어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당신들은 놀이를 제대로 할 줄도 제대로 비웃을 줄도 몰랐다.” 놀이에 서투른 자들은 여러 번 주사위 던지기, 무수히 주사위 던지기를 기대한다. ( 30-31, 64)

나는 보편의 거미와 싸운다.” ... 이런[인과와 목적 주장자들] 것이 바로 놀이에 서투른 자(mauvais joueur)의 모든 놀이 조작들(les opérations)이다. 이 조작들은 이성 속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면 그 이성의 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복수심(l’esprit de vengence)이다. 복수심 즉 거미(l’araignée)일 따름이다! (31, 65)

우주는 목적이 없다는 것, 즉 인식할 원인이 없듯이 소원할 목적도 없다는 것이 바로 제대로 된 놀이를 하기 위한 확신이다. (31, 65)

즉 니체는 인과성-목적성, 확률성-목적성의 쌍을, 이항들 대립과 종합을, 이항들의 거미줄을, 우연-필연의 디오니소스적 상관관계(la corrélation), 우연-운명의 쌍(le couple)[이중성]으로 대체한다. (31, 65)

여러 번 되풀이 되는 확률이 아니라 단 한번으로 된 우연이며, 욕망된 최종 종합이 아니라 치명적 조합 즉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이며, 주사위 던지기 횟수에 의한 조합의 회귀가 아니라 치명적으로(fatalement) 획득된 수의 본성에 의한 주사위 던지기의 반복이다. (31, 65-66)

§12 영원회귀를 위한 귀결들 66 (Conséquence pour l’éternel retour, 32)

- 우연의 가열(Cuisson du hasard) / 혼돈과 순환적 운동(Chaos et mouvement circulaire),

[영원회귀는 시간성의 문제에서 영원(Aion)의 이중에 대한 성찰이다. 영원은 한편 천체의 운행에서 다른 한편 기억의 잔존에서. 들뢰즈는 니체의 두측면을 3장에서 구별해서 설명할 것이다.]

[§3.5. 영원회귀의 첫째 측면: 우주론 그리고 물리 이론으로서 98 Premier aspect de l’éternel retour: comme doctrine cosmologique et physique

[§3.14. 영원회귀의 둘째 측면: 윤리적이고 선택적인 사유로서 Deuxième aspect de l’éternel retour: comme penée éthique et sélective

§12.1 우연의 가열 66 (Cuisson du hasard, 32)

던져진 주사위들이 일단 우연을 긍정할 때, 다시 떨어지는 주사위들은 필연적으로 주사위 전지기를 한 번 더하게 하는 수나 운명을 긍정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놀이의 둘째 시간은 두 가지 시간의 일체(집합)이거나 또는 그 일체를 가치있게 하는 놀이꾼이다. 영원회귀는 둘째시간이기도 하며, 주사위 놀이의 결과이며, .. 또한 영권 회귀는 첫째 시간의 회귀이도 하며, 주사위 던지기의 반복이며 ... (32, 66)

나는 나의 솥 안에서 우연이라는 모든 것을 끓게 한다(brouiller). 여러 우연들이 주인으로써 나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나의 의지는 우연에게 여전히 명령하듯 말하고, 우연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내게 간청했다. 우연은 자기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따뜻한 대접을 해달라고 나에게 간청했으며, 나에게 아양을 떨 듯이 말했다: 보시오, [] 짜라투스트라, 친구 집이라고 갈 만한 친구는 단 한명만 있다오.” .. 단순한 확률이 된 우연의 조각들은 주인처럼 말하고 싶어 하는 노예들이다. (32, 67) [확률계산하는 이성주의자 = 노예]

그때[우연을 긍정해야만 하는 그때] 우연은 친구[1]이며, 자신의 친구[2; 우연]를 보러오는 자이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2]는 친구[1]를 다시 오게 하는 자이다. 우연은 운명의 친구[1의 기호]이며, 운명의 친구로서 운명 자체는 있는 그대로로써 영원회귀를 보증해 준다. (32, 67)

§12.2. 혼돈과 순환적 운동 67 (Chaos et mouvement circulaire, 33),

역사적 의미로 가득 찬, 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텍스트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최후의 성격을 띤 모든 활동을 배제하는 보편적인 혼돈은 순환의 관념과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관념은 단지 비합리적 필연성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33, 68) [여기서 보편적 혼돈은 생성과정의 덩이로서 혼돈이다. 이것을 순환이라고 하는 것은 영겁회귀의 이질반복과 같은 뜻이다.]

[여기서 니체는,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아페이론에 대한 강제성]와 헤라클레이토스의 고유법칙(아페이론의 덩이 자체의 놀이 또는 투쟁)을 대비시켰다. 그런데 원주가 흥미롭다.]

처음에 혼돈은 없었다. .. 언젠가 힘들의 혼돈이 존재했다면, 혼돈이 영원했고, 모든 순환 속에서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원환적 운동(le mouvement circulaire)을 생성되지 않았지만 기원적 법칙이듯이, 마찬가지로 힘의 덩어리(la mass de force)도 예외 없이, 위배 없이 기원적 법칙이다. 모든 생성은 순환(cycle)의 내부에서 그리고 힘의 덩어리 내부에서 일어난다.” (33, 68)

아마도 헤라클레이토스를 제외하고 그들은 생성 속의 법칙의 현전과 필연 속의 놀이의 현전(la presence)”을 보지 못했다. (33, 69)

§13 니체의 상징주의 69 (Symbolisme de Nietzsche, 69)

- 대지, , (Terre, feu, étoile) / 경구와 시의 중요성(Importance de l’aphorisme et du poème)

§13.1 대지, , 69 (Terre, feu, étoile, 34)

주사위가 대지의 탁자 위에 던져졌을 때, 대지의 탁자는 요동치고 갈라진다.” .. 모든 우연은 단 한번이다. .. 다자를 단 한번으로 긍정하는 권능은 불과 같은 것이다. 그 이유는 불이 놀이하는 요소이자, 반대자(contraire)를 가지고 있지 않은 변신의 요소라는 데 있다. 그러므로 주사위들을 아래에서 갈라지는 대지는 화염의 강들을 뱉어낸다. .. 솥 안에서 비등(l‘ébullition)은 마치 놀이꾼의 손 안에서 주사위들의 부딪힘과 같고, 다자와 우연을 긍정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35, 69)

수는 존재처럼 우연 속에 있고, 법칙은 생성 속에 있다. (34, 70) [이데아가 우연이고 생성(경험)에서 법칙을 찾아야 한다.]

니체가 자신이 짜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을 선택하게 된 이유들에 질문을 받을 때, 매우 다양하면서도 동등하지 않은 가치를 지닌 세 가지 이유를 발견할 것이다. 첫째 이유는 영원회귀의 예언자로서 짜라투스트라이다. ... 둘째 이유는 논쟁적이다. .. 이는 신비화를 고발하기 위해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누가 크리스트보다 더 잘 짜라투스트라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적합한가?). 셋째 이유는 우연이라는 훌륭한 이유이다. “오늘 나는 우연히 짜라투스트라가 의미했던 것을, 즉 황금의 별이라는 것을 배웠다. 이 우연은 나를 매혹시켰다.” (71)

혼돈--성좌(chaos-feu-constellation)의 이미지들의 놀이는 디오니소스 신화의 모든 요소들을 집결시키고 있다. 또는 이 이미지들이 오히려 디오니소스적 놀이를 형성한다. 어린 아이인 디오니소스의 장난감들, 다양한 긍정과 찢겨진 디오니소스의 사지들 또는 조각들. 디오니소스의 가열(cuisson) 또는 다자를 스스로 긍정하는 일자.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에 의해서 하늘에 춤추는 별로서 놓여진 성좌. 디오니소스의 회귀, “영원회귀로의 주인인 디오니소스. (35, 71)

이제부터 분명한 것은 니체가 증기기관과는 완전히 다른 화력기관(machine à feu)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그 기계는 우연을 긍정하고, 우연을 익히고, 주사위 던지기를 한 번 더 하게 하는 수를 구성하는 기계, 다수의 외부의 작은 힘들 아래서 하나의 엄청난 힘을 발생기킬 기계, 별들과 놀이하는 기계. 요컨대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을 가진 기계이다. (35, 71)

§13.2 경구와 시의 중요성 35 (Importance de l’aphorisme et du poème, 71)

그러나 니체에서, 이미지의 놀이는 결코 보다 심오한 놀이, 철학적 개념들과 사유의 놀이를 대신하지 못한다. 시나 경구는 니체의 이미지화된 된 두 가지 표현들이지만, 그러나 그 표현들은 철학과 더불어 규정될 관계 속에 있다. (35, 71)

경구만이 의미를 말 수 있고, 경구는 해석과 해석의 기술이다. 마찬가지로 시는 가치들을 말하고 있기에 평가와 평가의 기술이다. 그러나 분명히 가치와 의미는 너무나 복잡한 개념들이라서, 자체는 평가되어야만 하고 경구는 해석되어야만 한다. (36, 72)

철학이 그 요소[가치를 파생시키는 미분적 요소]를 발전시키고 그 속에서 발전하면서, 철학은 완전한 해석과 완전한 평가를 구성한다. 되새김질과 영원회귀: 이 두 개의 위()는 사유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친 것은 아니다. 해석의 차원 또는 평가의 차원 두 차원이 있다. ... 그러므로 모든 경구는 두 번 읽혀져야만 한다.(36, 72-73) [철학은 시와 경구되새길질 하면서 영원회귀로 가야 한다.]

§14 니체와 말라르메 73 (Nietzsche et Mallarmé 36)

- 닮은 점들(Les ressemblances) / 대립: 폐기 또는 우연의 긍정?(L’oppostion: abolition ou affirmation du hasard?)

§14.1 닮은 점들 73 (Les ressemblances, 36)

사람들은 니체와 말라르메 사이의 초기의 유사점들에 대해 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주요한 네 가지 점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미지의 모든 장치를 이용한다.

1) 사유는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이다. 우연으로부터 단 한번 주사위들을 던지는 것은 필연을 긍정하고 어떤 다른 수일 수 없는 유일한 수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 단번에 성공적인 조합만이 언어의 회귀를 보장할 수 있다. 주사위 던지기는 바다와 파도들과 같다. (하지만 니체는 대지와 불과 같다고 말할 것이다.) (36-37, 74)

2) 인간은 놀이를 할 줄 모른다. 우월한 인간조차 주사위들을 던지는 데는 무능하다. .. 말라르메는 인간이 아니라 엘로힘(Les Elohim), 즉 순수했고, 존재를 위해서 그리고 필연성에 도달하면서 그것[존재]의 관념 자체만을 남겨두기 위해서 절대로부터 순수성을 빼앗았던 종족인 자신의 조상들을 내세우는 아이 이지튀르(Igiture)를 소개한다. (37, 75)

3) 주사위를 던지는 것이 이치를 벗어나고,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하며 초인간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것은 비극적 시도 특히 비극적 사유를 구성한다. (37, 75)

4) 수와 성좌는 세계의 종말과 그것의 정당화로서 책, 예술 작품이거나 그것일 수 있다. (니체는 현존의 미적 정당화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즉 사람들은 예술가에게서 어떻게 필연과 놀이, 투쟁과 조화가 예술작품을 낳기 위해서 서로 결합하는지를 관찰한다.) ... 그런데 별에서 나오는 운명적인 수는 주사위 던지기를 한 번 더 하게 하므로, 책은 유일함과 동시에 유동적이다. .. 책은 순환이며, 생성 속에 있는 법칙이다. (37, 75)

§14.2 대립: 폐기 또는 우연의 긍정? 75 (L’oppostion: abolition ou affirmation du hasard? 38)

그런 유사점들이 아무리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피상적인 채로 있다. 왜냐하면 말라르메는 항상 필연을 우연의 소멸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38, 75-76)

그래서 주사위 던지기로부터 나온 수는 여전히 우연이다. 사람들은 종종 말라르메의 시가 세계의 이원성이라는 낡은 형이상학적 사유에 위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38, 76)

이지튀르 종족은 초인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등장이다. 아담한 키(la stature)는 행복한 섬의 어린이들의 키가 아니라 말라르메가 다른 곳에 될 수 없는 잠재적인 지배자라고 부르는 암초로 고통스러워하는 왕자인 햄릿(Hemlet)의 키이다. 헤로디아(Hérodiade)는 아리아드네가 아니지만, 원한과 가책의 냉혹한 피조물이고, 자신의 누리스(Nourrice, 유모)에 대한 비난 속에서 몰락한, 삶을 부정하는 정신이다. 말라르메에게서 예술 작품은 정의롭지만그의 정의는 현존의 그것이 아니라 여전히 삶을 부인하고 그것의 실패와 무능을 전제하는 비난하는 정의이다. (38, 76-77) [여기서도 말라르메에 관한 들뢰즈의 서술은 수수께끼 같다.]

말라르메는 주사위 던지기이다. 하지만 그것은 허무주의에 의해서 다시 파악되고, 가책과 원한의 관점들 속에서 해석된다. .. 사람들이 거기서[주사위 던지기에서] 우연과 필연을 대립(oppoer)시킨다면, 주사위 던지기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39, 77)

§15 비참한 사유 77 (La pensée tragique, 39)

- 허무주의를 반대하는 비참(Le tragique contre le nihilisme) / 긍정, 기쁨 그리고 창조(Affirmation, joie et création)

§15.1. 허무주의를 반대하는 비참 77 (Le tragique contre le nihilisme, 39)

그것은 단지 심리학적 차이일 뿐인가? 기분이나 음색(어조)의 차이인가? .. 니체는 삶을 부정하고 현존을 비하하려는 시도를 허무주의(le nihilisme) 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는 허무주의의 주요 형태들, 즉 원한, 가책, 금욕적 이상을 분석하고, 허무주의와 그것의 주요 형태들 전부를 복수심(esprit de vengeance)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허무주의와 그것의 형태들은 전혀 심리학적 성향들로도 환원되지 않으며, 역사적 사건들이나 이데올로기의 흐름으로도 더더욱 환원되지 않고,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구조로도 결코 환원되지 않는다. (39, 77)

이 복수심은 생물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역사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복수심은 하나의 유형이고, 그것은 니체 철학의 주된 부분인 유형학(une typologie)과 분리되지 않는다. ... 그리고 니체가 형이상학을 비판할 때, 허무주의를 모든 형이상학의 전제로 삼지, 어떤 특별한 형이상학의 표현으로 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초감각적인 세계의 미명아래서 현존을 심판하고 비하하지 않는 형이상학은 없기 때문이다.(39-40, 78)

그러므로 허무주의와 복수심에 반대하는 니체의 투쟁은 형이상학의 전복, 인간사로서 역사의 끝, 과학들의 변화를 의미할 것이다. .. 원한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그것보다 심리학, 역사, 형이상학을 넘어서는 더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참되 차이이거나, 선험적인(transcndantale, 초월적인) 유형학-계보학적이고 서열적 차이이다. (40, 79)

§15.2. 긍정, 기쁨 그리고 창조 79 (Affirmation, joie et création, 40)

니체는 자기 철학의 목적을 허무주의와 그것의 형태들로부터 사유를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그것은 새로운 사유 방식, 사유가 의존하고 있는 원리 속에서 전복, 계보학적 원리자체의 재건, “전환(transmutation)을 함축한다. (40, 79).

의지의 본질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때, 자기 자신의 발견으로 신음하지 않는 철학이 없으며, 두려움에 떠는 점쟁이로서 미래에 대한 흉조와 동시에 과거 속에서 악의 원천을 보지 못하는 철학도 없다. 쇼펜하우어는 이 낡은 입장을 극단적인 결과들로까지 밀고 나갔다. 그는 의지도형장과 익시옹(Ixion)의 바퀴를 말한다.

현존은 유죄로 간주되지 않으며, 의지 자체도 현존의 죄가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즉 그것은 니체가 즐거운 소식(joyeux messag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의지, 그것은 해방된 자(le libérateur)와 환희의 소식전달자(le messager de joie)가 자신을 일컫는 바이다.” 즐거운 소식은 비참한 사유(la pensée tragique)이다. .. 사람들은 니체에 따르면 비참이 무엇이었는지를 - 비참=즐거움 -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의욕하다=창조하다라는 위대한 등식을 놓는 다른 방식이다. 사람들은 비참이 다양하고 순수한 긍정, 역동적 명랑성(la gaieté dynamique)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41, 80-81) [저승보다 이승의 개똥밭의 명랑성?]

§16 시금석 81 (La pierre de touche, 41)

- 니체와 다른 비극 철학자들 간의 차이(Différence entre Nietzsche et d’autres philosophes tragique) / 파스칼의 내기(Le pari de Pascal) / 허무주의와 원한의 문제의 중요성(Importance du problème du nihilisme et du ressentiment)

§16.1. 니체와 다른 비극 철학자들 간의 차이(Différence entre Nietzsche et d’autres philosophes tragique)

니체를, “비참한 철학자들이라 불리거나 그렇게 불리는 다른 저자들(파스칼, 키에르케골, 체스톱Chestov, 1866-1938))과 비교하고 싶은 욕구가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는 비극(la tradédie)이라는 단어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니체의 최후의 의지를 고려해야 만한다. (41-42, 81) [니체의 이해에는 그리스 비극이나 인간의 비참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권능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말이겠지.]

파스칼, 키에르케골, 체스톱은 보통 사람들이 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비판할 수 있는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도덕을 중지시키고 이성을 전복시켰다. 그러나 원한의 올가미에 사롭잡힌 그들은 그들의 힘을 여전히 금욕적 이상 속에서 길어올렸다. (42, 81)

철학하기 위하여, 이들[삼인]은 모든 원천과 내재성의 실[거미], 즉 불안, 신음, 죄의식, 모든 형태의 불만족이 필요하다. .. 파스칼에서 키에르케골까지, 사람들은 내기하고 뛰어넘는다. 그러나 그것은 디오니소스의 훈련들도 차라투스트라의 훈련들도 아니다. 뛰어넘기는 춤추기가 아니며, 내기하기는 높이하기가 아니다. .. 내가하는 자는 놀이에 서투른 자이며, 뛰어넘자는 특히 광대고, ... (42, 82) [니체의 글에서 저항자, 투사, 전사, 열사, 의사가 되라고 하네.]

§16.2. 파스칼의 내기 82 (Le pari de Pascal, 42) / 허무주의와 원한의 문제의 중요성(Importance du problème du nihilisme et du ressentiment)

만약 우리가 파스칼의 내기를 내세운다면, 결국 그것과 주사위 던지기가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는 것을 결론짓기 위해서이다. (42, 82-83)

왜냐하면 파스칼의 내기는 신의 현존이나 비현존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43, 83) [시금석은 주사위던지기, 삶의 일회성과 불가역성이라는 비참함을 살고 견디라는 것이다. 그 비참함과 같은 삶을 즐거이 긍정하여 받아들이고 아제에도 새로이 살아가자는 것이다.]

니체가 파스칼의 내기에 자신의 놀이를 대립시키는 것은 옳다. “파스칼은 크리스트교적 믿음 없이, 당신이 마치 자연이나 역사처럼 당신 스스로에게 괴물이며 혼돈이라고 생각했다. 즉 우리는 이 예언을 실현했다.” 니체는 .. 혼돈을 부정할 어떤 대상으로 삼는 대신, 긍정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니체에게 본질적인 것, 즉 사유 방식을 제외한 비교까지만 가치 있다. 니체가 우주 속에서 진단한 작은 세균인 복수심을 제외하고서, 니체는 히브리스(hybris)란 모든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의 시금석이다. 바로 거기서 그가 자신의 스승을 이해했는지 또는 오해했는지를 드러내 보일 수 있다라고 말한다. 원한 가책 금욕주의 이상, 허무주의는 모든 니체주의자의 시금석이다. 바로 거기서 비참(le tragique)의 참된 의미를 이했는지 또는 오해했는지를 드러내보일 수 있다. (43, 83-84) [, 비참 속에서 자기 생성이며 자기 전개이며, 자기 발전이다. 이것의 긍정은 권능의 의지이다. 그리스 비극(la tragédie)은 관념론을 통해 비참을 합리화하는 점에서 말 그대로 비극의 연극이다. 디오니소스의 진정한 의미가 없다. / 내가 읽은 디오니소스 축제에 관한 이야기에서, 디오니소스 축제는 아테네 성곽 밑까지 도달했다가 성안의 아고라의 광장에 진입하지 못하고 후퇴했다고 한다. 니체도 그리스의 비극의 약점 즉 히브리스이지, 진솔한 놀이로 대하지 못했다고 보는 듯하다. / 다른 하나 펠로포네소스 전쟁 20년의 비참을 아테네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합리로서 도시국가를 세우려 했다는 점을 니체가 비판하고 있는 것일까? - 고난의 행군보다 제국의 마름의 길을 택하는 것이 합리론자 또는 논리실증주의가 아닌가! 아타나토스(불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놀이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들뢰즈가 니체를 읽은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제국의 마름 즉 예속(굴종), 스피노자가 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예속의 길을 가려고 하느냐고 하지 않았던가. (52OLJ)]

(26:11, 52OLJ)

 

# 1장 인명록 *************************

85?경 호메로스(Homère, Ὅμηρος /Hómêros, «otage» ou «celui qui est obligé de suivre», av. J.-C. 9세기) 그 시인(le Poète, ὁ Ποιητής/ho Poiêtếs)이라 불린다. 이오니아인으로 추정하며 맹인일 것이다.일리아드(Iliade Ἰλιάς/Iliás,)오딧세이(Odyssée Ὀδύσσεια/Odússeia)

80?헤시오도스(Hesiode. gr. Ἠσίοδος / Hēsiodos, lat. Hesiodus, VIIIe siècle av. J.-C., environ vers -700). 고대 그리스의 시인으로 '이오니아파'의 호메로스와 대조적으로 종교적, 교훈적, 실용적인 특징의 '보이오티아파' 서사시를 대표한다. 농경기술과 노동의 신성함을 서술한 󰡔노동과 나날(Les Travaux et les Jours, Ἔργα καὶ Ἡμέραι / Erga kaì Hêmérai)󰡕은 설화성(說話性)과 목가적 서술이 뛰어나다. 󰡔신통기((La Théogonie, Θεογονία, Theogoniā 神統記 )󰡕도 있다.

610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e, Ἀναξίμανδρος/Anaxímandros 기원전 610-546): 무규정자(l'indétermine, apeiron, [아페이론])

544 헤라클레이토스(Héraclite, Ἠράκλειτος, 기원전 544-480) 이오니아 에페소스 출신, (le feu), 투쟁의 변증법. fr.Wiki, 544/541 Éphèse 480Éphèse.

헤로디아(Hérodia, 헤로다아드(Hérodiade 15년경-39년 이후 사망) 예수 시대 헤로데 괴뢰정권의 유대인 공주이다. 삼촌인 헤로데 2(헤로데 빌립보1)와 결혼해서 딸 살로메를 낳았다. 23년경 그녀는 이혼하고, 또 다른 삼촌인 분봉왕 헤로데 안티파스와 결혼했다. / 헤로데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의 처형을 주저하자 헤로디아는 딸로 하여금 헤로데 안티파스 앞에서 춤을 추게 하고, 이에 반한 안티파스는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준다고 맹세한다. 헤로디아의 딸은 어머니의 사주를 받아 요한의 목을 요구하고 결국 안티파스는 요한을 처형했다고 한다(마태복음 14, 마가복음 6). // <헤로디아(Hérodiade ou Hérodias 30년경) 그녀가 재혼한 헤롯 왕에게 자기 딸 살로메를 시켜서, 재혼을 비판한 세례 요한의 목을 베게 딸이 왕에게 청했다. 살로메의 청을 받아들여 헤롯 왕은 요한의 목을 베었다. 부정한 왕에 저항한 요한이 인민의 소리를 전달하였으나, 로마와 결탁한 헤롯 왕은 요한을 제거한다. 아무리 부정적 표현이라 하더라도, 헤로디아를 아리아드네에게 비유하는 것은 말이 안 될 것 같은데... (NPh, 38) / 기원 32년에 자기 딸 살로메를 통해 침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청하여 받은, 헤롯 안티파스의 아내. (6:22-28) 헤로디아의 아버지 아리스토불루스는 헤롯 대왕이 둘째 아내 마리암네 1세를 통해 얻은 아들이었으며, 헤로디아의 어머니와는 사촌 간이었다. 헤로디아의 오라비는, 요한의 형제인 사도 야고보를 없애 버린 헤롯 아그리파 1세였다.12:1, 2.

루이 11(Louis XI, 1423-1483, 재위 1461-1483), 샤를7세와 앙주의 마리 사이의 아들, 중앙집권의 왕정의 등장

샤를르(Charles, le Téméraire, 1433-1477), 선한 필립의 아들. 루이 11세에 대항했던 공익선 연맹의 대표자.

1623 파스칼 (Blaise Pascal, 1623-1662) 프랑스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이다. 그는 공기의 기압을 실험하기도 하였다. 쟝세니스트로서 크리스트 신비주의에 빠졌다. 이상하게도 그의 글은 다른 철학자들의 글과 마찬가지로 로마 교황청의 금서목록에 계속 올랐었다.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현재로는 폴란드보다 더 동쪽에 있는 쾨니히스베르그 출신의 프러시아 공화국의 철학자이다. 인간의 표상적 인식의 조건을 규정하고, 도덕적 이성의 신에게 종속을 요청하고, 미적으로 신의 작업의 숭고함에 경건하게 기도하는 듯이 긍정한 프로테스탄트 철학을 구성하였다.

1770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프랑스 혁명에서 인민의 자유를 너머 멀리서 바라보면서 인간의 정신이 신의 인격에 이를 것으로 만든 또 하나의 토마스 주의자로 철학을 하였다. 그는 프러시아 통일의 영광을 만들기 위하여 루터파 교리에 맞추어 신의 절대성을 강조한 근대판 교부 철학자이다.

1788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1788-1860) 독일 철학자이다. 그는 현상을 힌두이즘의 마야와 같은 환상으로 여겼다. 세계는 불합리할 뿐만 아니라 비극이고 고통이라고 보면서, 맹목적 삶의 의지를 표현하는 욕망은 비극이다. 이 욕망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예술이라고 한다.

1813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는 영향력 있는 독일의 피아노 연주자 겸 작곡가이자 지휘자, 음악 이론가, 그리고 수필가이다.

1813 키에르케골(Søren Kierkegaard, 1813-1855)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살았던 고독한 철학자이다. 아버지의 엄격한 프로테스탄트 윤리 때문에 그는 (내적 강도성을 지닌) 비극적인 소양을 지닌다. 오직 혼자서 신과 직접 대면하는 인간의 상황을 그린다.

1818 맑스(Karl Marx, 1818-1883) 유태인 출신으로 독일인이다. 인간의 자의식이 자유의 절대성을 확립하기 보다, 사회라는 공시태가 전개해 나가는 과정이 역사적으로 자유를 점점 더 실현한다고 보았다. 이 공시태를 노동과 생산을 중심으로 생산양식이라고 한다. 이 양식의 최종은 공산주의 양식이다. 인간 본성자체가 이런 변화와 발전을 담당할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 루소 다음으로 낙관적이다. 신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자연주의 전통에 선)인간론이다.

1842 말라르메(Étienne Mallarmé, dit Stéphane Mallarmé, 1842-1898), 프랑스 예술비평가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 1848-1907)󰡔거꾸로(À rebours, 1884)󰡕에 언급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 1869년부터 Igitur를 쓰기 시작했고, 1925년 출간되었으며, 이 속에 Le Coup de Dés”의 시가 있다. / 목신의 오후(L'Après-midi d'un faune, 1876)를 출간한 후, 1876년부터 화요일마다 자신의 아파트에서 젊은 상징주의 시인들의 모임을 주관하였다. 산문집 󰡔헛소리(Divagations, 1897)󰡕,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우연을 결코 파괴하지 못할 것이다(Un coup de dés jamais n'abolira le hasard, 1897)󰡔코스모폴리탄󰡕에 실렸다.

베를렌(Verlain)은 랭보, 코르비에르, 말라르메를 저주받은 시인이라 부기도 했다. 배척받은 시인이라는 점에 분노한 말라르메는 미완성의 작품인 (Livre)”을 기획하였다. “한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우연을 결코 파괴하지 못할 것이다(1914, 유고집).

1844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독일의 문헌학자, 철학자. 서구의 오랜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에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이 있다.

1801 꾸르노(Antoine Augustin Cournot, 1801-1877) 󰡔Exposition de la théorie des chances et des probabilités, 1843)󰡕, 󰡔Considérations sur la marche des idées et des événements dans les temps modernes (1872)󰡕 . .

1854 페테르 가스트(Heinrich Köselitz, le pseudonyme de Peter Gast, 1854-1918) 독일 작곡가. 니체와 우정을 나눈 자로 유명하다.

1866 체스토프(Léon Issaakovitch Chestov, 1866-1938) 러시아 태생 파리에서 죽었다. 변호사, 작가, 러시아 철학자. 󰡔L'Idée de bien chez Tolstoï et Nietzsche (Philosophie et Prédication) 1900󰡕, 󰡔La Philosophie de la tragédie, Dostoïevski et Nietzsche, 1926󰡕, 󰡔Athènes et Jérusalem, essai de philosophie religieuse, 1938󰡕

1869 오토(Rudolf Otto. 18691937) 독일 국적의 루터파 신학자. 비교종교학 교수. 󰡔신성(Das Heilige: Über das Irrationale in der Idee des Göttlichen und sein Verhältnis zum Rationalen. 1917)󰡕(Le Sacré, fr. 1995) [니체 단행본은 없는 것 같다.]

띠보데(Albert Thibaudet, 1874-1936) 프랑스 문학비평가.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La poésie de Stéphane Mallarmé, 1912)󰡕, 󰡔베르그송 주의(Le Bergsonisme, 1924)󰡕

쟝메르(Henri Jeanmaire, 1884-1960), 프랑스 문헌학자, 역사가. 󰡔디오니소스(Dionysos. Histoire du culte de Bacchus, 1951)󰡕(1972)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독일 철학자. 나치에 협력자이며 반유태주의자였다.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이뽈리트(Jean Hyppolite, 1907-1968) 프랑스 철학자. 꼴레쥬 드 프랑스 교수. ENS, 교수자격 1등 보봐르, 2등 사르트르, 3등 이뽈리드 4등 뽈 니잔. / Le coup de dés de Stéphane mallarmé et le message, Les Etudes Philosophiques 13 (4):463 - 468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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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드네(Ariadne, Ἀριάδνη) 크레타 섬의 공주, 그녀는 실꾸리(μίτο της Αριάδνης 'Ariadne's thread')를 주어 테세우스를 도왔다가 버림받는다. 다른 버전에서 그녀는 버려진 섬에서 디오니소스의 아내가 된다.

익시온(Ixion)은 라피타이의 왕으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탄탈로스와 마찬가지로 신들의 연회에 초대받아 간 사람이었다. 거기서 익시온은 헤라의 미모에 반해 헤라에게 흑심을 품었다. 제우스가 그를 떠보려고 구름으로 헤라의 형상을 만들어 가까이 가게 했더니 익시온은 그 구름을 헤라로 착각하여 헤라를 덮쳤다. 그 구름과 익시온 사이에서 켄타우로스가 태어났는데 이에 대노한 제우스는 익시온을 바로 지옥에 떨어뜨리고 영원히 멈추지 않는 수레바퀴에 매달아버렸다.

햄릿(Hamlet) 13세기 덴마크 전설의 왕자 /덴마크 왕자 햄릿의 비극(The Tragedy of Hamlet, Prince of Denmark), 흔히 줄여서 햄릿1599년에서 1601년 사이에 쓰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이다. 덴마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햄릿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클라우디우스에게 복수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보여준다. / 13세기 덴마크의 역사가 삭소 그람마티쿠스는 이러한 많은 초기 전설들이 엮여 있는 게스타 다노룸(Gesta Danorum, 덴마크 연대기)을 저술하였다. 라틴어로 쓰인 이 책에 수록된 비타 암레티(Vita Amlethi, 암레트의 덕)는 고전적인 로마의 관점에 부합하는 영웅의 업적과 덕을 칭송하고 있다. 암레트 왕자는 어머니와 결혼한 왕위 찬탈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미친척하며 비밀 정탐꾼을 죽이고 왕의 가신을 살해하는 등 햄릿과 많은 부분이 유사하다. 세익스피어 당대에 이책의 이야기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5]

(29:15, 52OMA)

 


첨부파일 책들뢰1962니체19제1장.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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