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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니체와 철학"(1962), 제2장 적극적인 것과 반응적인 것

작성자마실가|작성시간19.05.13|조회수669 목록 댓글 0


니체와 철학(Nietzsche et la philosophie, 1962)

질 들뢰즈, 이경신, 민음사, 2001, P. 356.

 

[active 능동적, positif 적극적, affirmatif 긍정적]

* 오늘부터 심층의 철학자에 니체를 포함해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설명에서 니체는 표면 안감에서 상층으로 전복하려는 도덕론에 대한 방향의 전환으로 설명해 왔었다. 그런데 먼저 이런 느낌으로, §2.11.1. 속에 두 문단에서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니체의 연관을 설명하면서, 니체에게 심층으로 파토스가 있음을 알리고, 권능의지가 파토라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 책을 한번 훑어보았을 때, 니체에게 철학사를 보는 다른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NP. 󰡔그리스 비극 시대에서 철학의 탄생(Die Philosophie im tragischen Zeitalter der Griechen. 1873) fr. La naissance de la philosophie à l’époque de la tragédie grecque)󰡕 fr.tr. 1938.>󰡔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 aus dem Geiste der Musik. 1872)󰡕 다음으로 쓰였다. 일반적으로 그리스 사상의 명랑함, 또는 지중해 지역의 명랑함과 북방의 음울함 또는 비참함을 대비한다. 그런데 니체는 그리스 비극을 분석하고 그리스 철학사를 분석했다는 것이다. 비극에는 소크라테스의 합리성[나로서는 영혼의 비합리성도 있다고 말하지만]이 비극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홍규의 강의를 보면 그리스의 비극과 민주주의는 전쟁과정(20년 펠로포네소스 전쟁)에서 생겨난 산물이다. 그러면 그 이전의 그리스는? 문학사적으로 희극 시인들이 먼저이고 다음으로 전쟁기간에 비극시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점에서 벩송이 희극을 다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철학의 탄생(1873)>에 대한 들뢰즈의 참고 본문들의 제시가 흥미롭다. 게다가 일년전에 쓴 피타고라스 학파의 내용이 든 󰡔우리 교양수립의 미래에 관하여(Die Zukunft unserer Bildungsanstalten: Sur l’avenir de nos établissements d’enseignement, 1872)󰡕(1895출판)을 포함해서 보면 더욱 흥미롭다. 이 두 작품을 쓴 것으로 보아, 니체는 그리스철학에 대한 문헌학적 통찰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이미 그리스철학의 갈래, 존재(상층)로 향하는 누스(로고스)의 길과 실재(심층)으로 전향하는 파토스의 길을 알았을 것이다. 순수사유와 실재성. 소크라테스를 순수사유로 보는 듯한 니체를 들뢰즈는 플라톤주의자라고 규정하겠지만 말이다. 니체는 아낙시만드로스(파르메니데스)의 선들과 헤라클레이토스의 선(§10.2-2)의 차히를 알았다. 후자에서 권능의지를 찾는다.

다른 하나, 나로서는 왜 계보학으로 번역되었을까? 생장학(généologie)이 아닌가? 존재론(ontologie)와 대비는 생장학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의 genese on 을 구별하듯이, 그러면 상층과 심층이 더 잘 보일 것이다. 이런 관점은, 박홍규의 자연 I, II”(1991) <phyomai(자라다, 성장하다)>를 분석하는 내용에서도 자연은 존재가 아니다.

또 다른 하나 중동의 전설따라 삼천리에서, 유태인의 전승에는 모세5이라 부르는 것 중에서 창세기기가 있다. 이 용어가 genese 아닌가? 왜 생장, 발생, 생성을 창세기”, 즉 창조, 조작, 기안, 도안과 같은 의미로 번역이 되었을까? 상층의 누스와 로고스가 주류적 사유가 되는 것은 한 복음서에서 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 서양 사상사를 지배해왔다는 증거이지 않을까? 그런데 왜 생성, 생장의 사유는 19세기 후반, 그것도 벩송에 의해 새로이 정립되었을까? 아마도 생명의 시초에 대한 무지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무지하다고 하고 그 근원(arche)에 대한 질문을 하였을 것이다. 그 당시는 실증적으로, 경험적으로, 생명보다 영혼에 대한 근원을 물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불교에서 나가르주나 금강경소나 구마라습의 금강경번역도, 사변적으로 영혼이 문제를 넘어서고자 했을 것이다. 시기적으로 비슷한 플로티노스도 누스가 아닌 영혼의 방향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대의 반영적 또는 투사적 사고에 머물렀으리라.

스피노자의 사유가 데카르트적 사고의 대립으로 보면, 데카르트가 운동량의 일정량 불변의 원리 위에서 영혼과 신체를 대응적으로 보려한 것이라면, 스피노자는 자연의 생성을 제시하였다. 마찬가지로, 칸트가 존재의 질량불변의 법칙을 기준으로 사고하고 이를 논리적(변증법적)으로 풀어서 설명하였으며, 이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검증과 증거를 제시하려는 후기칸트주의자(신칸트 인식론자)들의 사고의 편협함에 대해, 도덕론적으로 니체가 권능의지 같은 파토스를 제시하며, 사유의 방향을 바꾸려 하였던 것이다. 들뢰즈는 니체에게서 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 사유에는 생성, 생장의 사유가 있어왔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니체는 용어에서 계보학보다 생성학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박홍규에 의하면, 벩송도 우주론이 아니라 우주발생론을 다루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 비극이라는 연극 용어가 아니라 비참이라는 명사에 주목해야 하는가? 니체는 칸트의 한계 내 사고, 그 사고의 전개로서 변증법이라는 이름으로 절대지를 찾는 과정, 그리고 이 두 학자가 사라진 뒤에,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신칸트주의의 성행, 그 다음으로 논리학적으로 등장하는 논리실증주의가 퍼지는 참담한 세상이라는 점이다. 아마도 니체가 식민지에서 태어났다면 야만과 폭력 세상이라고 한탄 했을 것이다. 깊이를 사유하는 학문은, 한계내에서(peras) 사고하고, 그 사고의 완전성과 절대성으로 타자 또는 타인에게 유용성, 공공성을 설득하고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거짓이고 환상이라는 것이며, 또한 이 절대성을 굳게 믿고 실행하는 것이, 흄의 표현으로, 망상과 착란이며, 착각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니체에서 비극의 연극을 다루는 것은, 그리스에서 명랑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왜 비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주사위 놀이처럼 디오니소스 삶이어야 함에도, 아등바등 거리며 도토리 키재기 하는 위계질서와 허망의 왕관을 차지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재현하는 세상이 극장일 때, 비극의 재현(반복)이며 그 세상은 비참하고, 식민지 지배에서는 야만의 땅이 되는 것이다. (52PKG)

# 차례

1장 참담 15 (Le tragique, 참담, 비참, 1)

2장 적극적인 것과 반응적인 것 ...85 (Actif et réactif 44)

3장 비판 ...139 La critique

4장 원한에서 가책까지 ...201 Du ressentiment à la mauvaise conscience

5장 초인: 변증법에 반대해서 ...259 Le surhomme: contre la dialectique

 

* 니체가 보기에 인간은 또는 인간의 삶은 처참하다. [니체로서는 누가 뭐래도 비참하다, 숙명적이다. 루소는 인간이 자연이다고 말하는데는 지구가 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처참하다는 것을 넘어설 수 있는 권능()이 있다. 그 힘을 쓸 노력을 하려고 하지 않은 인간들이 많다. 내가(니체)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노력을 하는 인간을 소개하마, 즉 짜라투스트라이다.

그는 남들과 다른 행동(차히 행동)을 하는데, 그 자신도 그 노력이 드러날지(기호 또는 징후)를 잘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미세한 차히(차이가 아니라)의 노력을 지속적으로 한다.

그 미세한 노력이 표출되었다는 것을 누가 아는가? 누구라고 물어보는 것이 불경스럽다. 그 생성 창조는 (자연에서) 항상 일어나온 일(사건, 실재성)이다. 저항, 항거, 항쟁, 혁명은 죽 있어온 것이다. 이런 단절이 구체적인 환경으로 드라는 것이 탈영토화이다.

들뢰즈의 니체는 참담함에서 이를 벗어나려 노력하는 자들 짜라투스트라라고 했고, 그 참담을 벗어나는 노력이 인류의 역사가 아닌가! 자유의 실현이라는 헤겔은 천상으로 가고자 했다면, 니체는 현존에서 자유를 실현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안중근은 총을 쏘았다.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을 적어놓았다.

참담함을 느끼고 짜라투스트라을 불러들이기 까지는 쇼펜하우어나 바그너가 그런 면을 부각시켰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그 실존을 떠나있었다는 것을 니체는 알아챘다. 교육은 강압적이고 음악은 인민을 마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권능의 발현으로 이르는 길, 짜라투스트라를 통해서 다음을 향한 행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길, 이 길은 니체의 사유가 전개되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를 등장시킨 시기를 경계로 보면 니체는 헤겔을 넘어서는 시기에, 즉 국가주의를 넘어서는 것으로 생각했다가, 헤겔 자체가 크리스트교를 바탕으로 깔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니체는 이 크리스트를 넘어서려 하다. 그런데 시대는 이미 신은 죽었다그래서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전령과 같은 디오디소를 다시 불러온다. 그러면서 안티외디푸스이 사람을 보라를 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겁회귀 속에서 짜라투스트라가 길을 여는 것은 디오니소스의 삶을 반복(이질적 반복)을 하는 것으로 본다. 그 삶은 하늘에 주사위가 던져져 있는 것과 같으며 일회성이자 환원할 수 없는 운수이다. 이 운수가 숙명애이다.

니체의 안티크리스트보다 근원적으로 그리고 탈영토화의 방식으로 들뢰즈는 안티외디푸스를 썼던 것 같다. 두 제목에서 같은 점은 안티이지만 내용상으로 팔루스 신앙에 대한 반대이며, 정주적 국가의 권력에 대한 반대이다. 들뢰즈는 니체의 계열에 서 있게 된다.

다시 참담에서 짜라투스트라의 등장까지는, 혁명 실패로 인민의 권능이 땅 밑으로 짖밟힌 시절에, 앵글로색슨의 사고가 아직도 망상 또는 착란과 닮은 크리스트교 신앙에 머문 것에 대한 비판이다. 부정에서 긍정을 찾지 말고, 자기의 미분적 차이와 세분적 차히를 발현하는 긍정의 권능을 실행하라는 것이다. 이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와 바이마르 공국의 부르주아에게 자신들의 관점을 성찰해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52O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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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적극적인 것과 반응적인 것 85 (Actif et réactif, 44)

[능동적인 것 대 반작용적인 것, 내부적인 것 대 외부의 영향인 것 사이에서 외부의 영향인 것에 대한 반응의 강도는 신체의 활동성(생명성, 권능)과 내재성(기억, 지속성)에 따라 다르다. 이 차히는 신체라는 개체간의 차이와는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몸피크고 키가 크다고 마라톤 잘하는 것이 아니다. 몸의 총체적 역량(권능)2시간의 지속을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 자전거 경기에서 대학생부는 100킬로미터 인데, 일반부는 300킬로미터 경주를 한다. 신체가 건장하다고 300킬로에서 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잘(bon)의 대립은 설익은(mauvais) 정도일 것이다. (52PKF) ]

§2.1. 신체 85 (Le corps 44)

-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Qu’est-ce que peut un corps?) / 의식보다 신체의 우월성(Supériorité du corps sur la conscience) / 신체를 구성하는 적극적 힘들과 반응적 힘들(Force actives et réatives, constitutives du corps)

§2.1.1.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85 (Qu’est-ce que peut un corps? 44)

[신체가 ()영혼의 담지자이며 활동성이다. 신체는 두뇌보다 강도가 있다.]

스피노자는 과학과 철학에 새로운 출로를 마련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의식과 정신에 대해 언급하고 이 모든 것에 관해 떠들고 있지만,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힘들이 그것에 속하는지, 그것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44, 85)

의식(la conscience)이란 무엇인가? 프로이트처럼 니체도 의식은 외부세계로부터 감화를 받는 자아(moi)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44, 86)

§2.1.1.1. 의식보다 신체의 우월성 (Supériorité du corps sur la conscience)

하지만 의식은 실재적인 것의 면에서 외재성에 연관보다, 가치들의 면에서 우월성에 연관하여 정의되었다. (44, 86) [정신의 외재성, 의식(양심)의 내재성]

§2.1.2. 신체를 구성하는 적극적 힘들과 반응적 힘들 87 (Force actives et réatives, constitutives du corps, 45)

신체란 무엇인가?(45, 87)

그래서 신체는 항상 니체적 의미에서 우연의(du hasard) 열매이고, 가장 놀라운(la chose), 진실로 의식과 정신보다 훨씬 더 놀라운 사물로 보인다. (45, 87) [신체없이 영혼을 논할 수 없지만, 인공정보 분야에서 외장 하드(정보창고)처럼 정신은 신체를 논하려고 한다. 후자는 인식론 또는 논리실증주의 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힘들의 양에 따라서 질적으로 된 힘들의 적극적인 힘들과 반응적인 힘들의 - 차이를 위계(hiérarchie, 서열)라고 [나중에] 부를 것이다. (45, 88) [나중에, §2.10.에서]

§2.2 힘들의 구분 88 (La distinction des forces 46)

- 반작용(La réation) / 유기체에 대한 반응적 입장들(Les conceptions réactives de l’organisme) / 능동적이고 조형적인 힘(Force active plastique)

[적극적(능동적)인 힘은 의식적 작동을 더하여 무의식적 작동이 보태어지고, 온생명의 기억이 덧붙여지기에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체에 내재하는 힘은 물체에 내재하는 중력과 다르고 곤충에 내재하는 힘(본능)과도 다르다. (52OMI) - 신체의 조형적힘과 영혼의 비조형적 힘(52PKF)] [active 능동적, positif 적극적, affirmatif 긍정적]

§2.2.1. 반작용 88 (La réation, 46)

복종하는 열등한 힘들은 명령하는 힘들과 구분되지만 계속해서 힘으로 존재한다. ... “... 복종하고 명령하는 것은 한 화폐의 두 모습이다.” (46, 88)

§2.2.2. 유기체에 대한 반응적 입장들 89 (Les conceptions réactives de l’organisme, 46)

틀림없이 그 적극적 힘들의 특징을 진술하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본성상 그것[적힘]들은 의식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중요한 위대한 활동성은 무의식적이다 (46, 89)

§2.2.3. 능동적이고 조형적인 힘(Force active plastique)

무엇이 능동적인가? [] 권능으로 지향하는 것.”

니체는 다윈을 비판한다. .. 그는 라마르크에게 찬사를 보낸다. 왜냐하면 그는 적응과 관련해서 최초로, 참으로 적극적(능동적)인 하나의 조형적 힘(une force plastique)의 현존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48, 91) [다윈은 진화에서 우연(hasard)을 작용의 반작용정도로 생각한대 비해, 라마르크는 변형하는(se transformer) 조형성이 우연(hasard)라 하더라도 밀고 나가는 힘이 내부에 있다. - 다윈의 우연(hasard)이 아니라 우연(contigence)에 가깝다.]

§2.3. 양과 질 92 (Quantité et qualité 48)

- 힘의 양과 질(Quantité et qualité de la force) / 질 그리고 양의 차이(Qualité et différence de quantité)

[양을 질로 환원할 수 없고, 논리적 동일성, 수학의 동등성(= l’égalité), 물리학의 평형성(대칭성)은 추상으로 정의한 것이지, 이 셋에는 실재성이 없다.]

§2.3.1. 힘의 양과 질 92 (Quantité et qualité de la force, 48)

힘들은 양이지만, 그것들은 또한 양적 차이에 상응하는 질을 가지고 있다. [신체 가 지닌] 힘들의 성질들은 능동적이고 반응적이다. (48, 92) [양이 다르다는 질적 차이가 있다. 약의 효과에 대해 생각해보라. 게다가 방사능 원소의 폭발력에 대해 생각해보라.]

“... 모든 질을 양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것은 광기(folie)이다.”

§2.3.2. 질 그리고 양의 차이 (Qualité et différence de quantité)

양적 차이가 힘의 본질이며, 힘과 힘의 연관이다. .. 그의 주된 관심은 양 그 자체의 관점에서 양적 차이를 균등성(l’égalité)으로 환원할 수 없음이다. (49, 93) [윤리적 측면에서 신체의 활동에 관하여: 수학적 추상화의 추론이 불가능하다.

[§2.3.3. 우연(le hasard)과 모든 힘들 각각 사이의 연관은 긍정적이다 (50, 94)]

우연(le hasard)은 연속체(un continuum)의 반대이다. (94, 50)

§2.4. 니체와 과학 95 (Nietzsche et science 50)

- 양에 대한 니체의 입장(Conception nietzschéenne de la quantité) / 영원회귀와 과학(L’éternel retour et la science) / 영원회귀와 차이(L’éternel retour et la différence)

[과학의 성립은 연속체의 성립 즉 반복이 이루어져야 하며, 그래야 법칙이 나온다.]

§2.4.1. 양에 대한 니체의 입장 95 (Conception nietzschéenne de la quantité 50)

니체와 과학의 연관에 대한 문제는 잘 못 제기되었다. .. 니체가 과학에 별로 소질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50-51, 95)

니체가 과학에서 고발하고자 한 것은 보완물을 찾는 과학적 광기(la manie), 소위 과학적 공리주의(l’utilitarisme)균등주의(l’égalitarisme)이다. 그래서 그의 모든 비판은 세 가지 측면 위에서, 즉 논리적 동일성(l’identité)에 반대하여, 수학적 균등성(l’égalité)에 반대하여, 물리적 균형(l’équilibre)에 반대하여 이루어진다. (51, 95-96)

... 니체는 .. 물리학의 균등이라는 것이 <아디아포리(adiaphorie)[차이없음]>라고 비판한다..(96)

§2.4.2. 영원회귀와 과학 97 (L’éternel retour et la science, 52)

따라서 열역학이 영원회귀의 현존을 부인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계론도 그것을 주장할 수 없다. 둘 다 빗나간 채 미분화된 것 속으로 추락하고, 다시 동일자 속으로 추락한다. (52, 97)

§2.4.3. 영원회귀와 차이 97 (L’éternel retour et la différence, 52)

영원회귀에서 되돌아오는 것은 동일자(le meme)도 하나(l’un)도 아니며, 회귀 그 자체가 하나(l’un)이며, 그 하나는 차별자(le divers)이며 차이 있는 것(ce qui diffère)이라는 의미이다. (53, 98)

§2.5. 영원회귀의 첫째 측면: 우주론 그리고 물리 이론으로서 98 (Premier aspect de l’éternel retour: comme doctrine cosmologique et physique, 53)

- 최종상태의 비판(Critique de l’état terminal) / 생성(Le devenir) / 생성과 영원회귀의 종합(Synthèse du devenir et éternel retour)

§2.5.1. 최종상태의 비판 98 (Critique de l’état terminal, 53)

니체가 그것을[영원회귀] 이해하고 있는 바대로, 영원회귀에 대한 진술은 최종상태나 균형상태에 대한 비판을 가정한다. (53, 98)

니체가 주를 달기를 ... 왜냐하면 어떻게 생성이 시작될 수 있었는지, 왜 그것이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는지를 고집스럽게 질문할 때, 방자함(l’hybris), , 벌을 내세우는 고대의 철학자들은 엉터리 비극작가이다. 헤라클레이코스를 제외한 그들은 순수 생성의 사유, 그 사유의 기회를, 대면하지 못했었다. (54, 99)

§2.5.2. 생성 100 (Le devenir, 54)

어떻게 순수생성의 사유가 영원회귀의 기초가 되는가? 생성과 구별되고, 생성과 대립되는 존재에 대한 생각을 중단하기 위해서는 그(순수생성) 사유로 충분하다. (54, 100)

§2.5.3. 생성과 영원회귀의 종합(Synthèse du devenir et éternel retour)

왜 기계론은 영원회귀에 대한 그토록 그릇된 해석의 하나인가? (101)

차별자(le divers)와 차별자의 재생산의 이유라는, 차이와 차이의 반복의 이유라는 원리(un principe) .. 니체는 이 원리를 자기 철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물들 중의 하나로 소개한다. 그에게 그것의 이름은 권능의 의지(la volonté de puissance)이다. (55, 102)

§2.6. 권능의지는 무엇인가? 102 (Qu’est-ce que la volonté de puissance? 56)

[권능의지는, - 영혼의 자기 생성과정이며 -, 욕망이며 그 현실태는 생성이다. (52OLG)]

- 힘의(계보학적이고) 미분적 요소로서의 권력의지(La volonté de puissance comme différentiel(généalogique) de la force) / 권능의지와 힘들(Volonté de puissance et forces) / 영원회귀와 종합(Eternel retour et synthèse) / 칸트에 관련된 니체의 위치(Position de Nietzsche par rapport à Kant)

§2.6.1. 힘의(계보학적이고) 미분적 요소로서의 권력의지 102 (La volonté de puissance comme différentiel(généalogique) de la force, 56) [계보학적 -> 생성론적]

권력의 의지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니체가 쓴 가장 중요한 원문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그 덕분에 우리 물리학자들이 신과 우주를 창조한 개념, 즉 힘이라는 승리의(vitorieux) 개념은 하나의 보완(complément, 보어)을 필요로 한다. 그것에 내개 권능의지라고 부를 하나의 내적인 의욕(un volonte interne)결부시킨다(attribuer).”(56, 102)

§2.6.2. 권능의지와 힘들 104 (Volonté de puissance et forces 57)

분리할 수 없음이 동일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의지는 형이상학적 추상성 속으로 떨어지지 않고서는 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57, 104)

뿐만 아니라 그것은 아직도 권능의 의지(dy)이다. 이 의지는 하나의 힘이 하나의 연관 속에서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힘이 복종하는 것은 바로 권능의지에 의해서이다. (58, 105)

§2.6.3. 영원회귀와 종합(Eternel retour et synthèse)

우리는 어떤 식으로 영원회귀와 권능의지의 연관을 만났지만, 그것을 해멸할 수도 분석할 수도 없었다. 권능의지는 힘의 생성적(génétique) 요소임과 동시에 힘들의 종합의 원리이다. (105)

§2.6.3.1. 칸트에 관련된 니체의 위치(Position de Nietzsche par rapport à Kant)

니체는 그 종합을[칸트와 후기 칸트주의자의 종합, 물리학적 종합] 힘들의 종합으로 만들었다. .. 그는 힘들의 종합을[내재성의 의미, 본성, 내용 등을] 영원회귀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종합의 중심에서 다른 것(le divers, [차별자])의 재생산을 발견했다. (59, 106)

칸트 철학의 근본적 변형, .. 비판의 재발견, .. 비판적 계획의 재파악, [세가지]이것이 니체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 같다 (영원회귀권능의지속에서 발견했던 것 같다). (59, 107) [니체가 칸트의 비판에 대한 새로운 비판을 정립했다고 할 때, 칸트가 뉴튼 물리학의 성립을 확립했다면, 니체는 열역학과 확률론에 기반한 새로운 비판을 정립하려 했다는 것은 그럴듯하다.]

§2.7. 니체의 용어 107 (Le terminologie de Niezsche, 59)

- 작용과 반작용, 긍정과 부정(Action et réaction, affirmation et négation.)

§2.7.1 작용과 반작용, 긍정과 부정(Action et réaction, affirmation et négation.)

해야할 것이 남아있는 분석들을 예견한다고 할지라도, 니체의 용어론에 몇 가지를 고정할 때이다.

1) 니체는 임의 계보학적(발생론적) 요소를 권능의지라 부른다. (59, 107)

2) 계보학적(발생론적) 요소로서 권능의지로부터, 연관들에서 힘들의 양적 차이와 그 힘들 3) 힘들의 성질은 권능의지 속에서 힘들의 원리를 갖는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누가 해석하는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권능의지라고 대답한다. (59, 107)

4) 이 모든 이유 때문에 니체는 권능의지는 해석하는 것일 뿐아니라, 평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망치의 철학이 향로의 흔들림이 되는 것; 논쟁성과 공격성이 .. 가치의 개가 되는 것; 계보학(발생학)이 노예의 손에 장악되는 것; 성질들의 망각이 기원들의 망각이 되는 것. (더 오래 살았더라면 가치들의 철학의 창조자 니체가 보았을 텐데) (62, 111)

§2.8. 기원과 전복된 이미지 112 (Origine et image renversée 63)

- 반작용과 부정의 결합(Combinaison de la réation et de la négation.) / 어떻게 그로부터 차이의 전복된 이미지가 나오는가?(Comment en sort une image renversée de la différence.) / 어떻게 적극적 힘이 반응적이 되는가? (Comment une force active devient réactve.)

§2.8.1. 반작용과 부정의 결합 112 (Combinaison de la réation et de la négation. 63)

기원에서, 적극적인 힘들과 반응적(반작용적) 힘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63, 112)

자신의 긍정적인 바는 타인의 부정이 된다. 그것은 니체가 평가자의 관찰력의 전복이라고 부르는 바이다. 적극적인 힘들은 귀족적이지만, 그것들은 반응적인 힘들에 의해서 반사된(réfléchie) 평민의 이미지 앞에 있다. (63, 112)

영국적이거나 독일적인 진화론은 계보학의 반응적 이미지이다. (112)

§2.8.2. 어떻게 그로부터 차이의 전복된 이미지가 나오는가?(Comment en sort une image renversée de la différence.) [en = de la réation et de la négation. ou origin]

한발 더 내딛는다면, 내외적으로 유리한 상황들의 도움으로, 반응적인 힘들이 적극적인 힘을 이기고, 중립화시킨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기원에서 나왔다. 왜냐하면 더 이상 전복된 이미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이미지의 발전, 가치들 자체의 전복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64, 113)

§2.8.2.1. 어떻게 적극적 힘이 반응적이 되는가? (Comment une force active devient réactve.)

우리는 반작용의 개념이 기원에서부터, 또 발전하면서 의미를 바꾸는 것을 예감한다. (처음의 의미에서) 반응적 힘들이 적극적 힘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킬 때, 적극적 힘은 (새로운 의미에서) 반응적이 된다. (64, 114)

따라서 니체는 천박한”, “상스러운”, “노예와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그 단어들은, 주인을 노예이길 그만 두지 않는 노예로 대체하면서, 위를 차지하고 적극적인 힘을 함정 속으로 유인하는, 반응적 힘들의 상태를 가리킨다. (65, 115) [노예는 소극적 노예가 아니라, 기원에서 권능을 지닌 반응적 힘들의 상태, 즉 살아 움직이는 괴물같은 힘의 상태, 즉 권능의 의지로 의미가 변한다.]

§2.9. 힘들 측정의 문제 115 (Le problème de la mesure des forces 65)

- “항상 약자로부터 강자를 방어해야 만 한다” (“On a toujours à défendre les forts contre les faibles.”) / 소크라테스의 오해들(Les faibles différents sens de mots actif et réatif.)

[[힘들에 대한 측정문제: 강자와 약자의 구분이 문제거리이다. / 앞의 전복에서 약자는 약자가 아니라 권능을 지닌 자가 된다? (52PKF)]]

§2.9.1. “항상 약자들로부터 강자들을 방어해야만 한다.” 115 (“On a toujours à défendre les forts contre les faibles.” 65)

그래서 ... “항상 강자들을 약자들로부터 방어해야만 한다.”(“On a toujours à défendre les forts contre les faibles.”) [이 말에는, 약자가 계속적으로 힘을 쓰면 강자들이 당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약자들은 그렇게 계속하지 않기에 약자로 또는 노예로 남는다. 그러면 강자의 편에서는 (노예의)예속이란 계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으면 된다. 그 환경조성이 닫힌도덕의 목적론과 닫힌 종교의 구원(저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 기만(사기)를 조장하는 것은 당대의 (표상, 재현의)과학이다. 연역과학은 이미지의 재현으로 실증이라 하는데, 실증이라기보다 재실험이다. (52PKA)]

§2.9.2. 소크라테스의 오해들 (Les faibles différents sens de mots actif et réatif.)

그 문제[힘들의 측정문제] 칼리클레스와 소크라테스 사이의 유명한 논쟁을 상기시킨다. .. 칼리클레스는 자연과 법을 구별하려고 애쓴다. (66, 116) [힘들의 측정의 문제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에도 있다.]

사람들은 소피스트와 변증법주의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즉 성실성은 어느편에 속하는지 추론의 엄밀성 또한 어느 편에 속하는지를 - 주목할 것이다. 칼리클레스는 공격적이지만 원한은 없다. 그는 말하는 것을 포기하는 편을 선호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고, 둘째로 다른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67, 117)

§2.10. 위계(서열) 118 (La hiérarchie 67)

- 자유로운 사유자와 자유로운 정신(Le libre penseur et l’esprit libre.) / 서열(La hiérarchie.) / 적극적인 말들과 반응적인 말들의 상이한 의미(Les différents sens des mots actif et réactif.)

[위계(La hiérarchie 67)는 몸체(corps)의 힘의 속성으로보자(§2.1) 그러면 중력과 다른 강도가 있는 힘의 작동(acte)이며 기억을 지닌 실재성이다. 이렇게 보아야 §2.14.에서 위계가 선택(séléction)이라는 공식이 가능하다. 들뢰즈가 니체를 매우 잘 해석(더불어 평가)해준 것이다. 영겁회귀는 아자르(hasard)에서 경우의 수 모두에 대한 긍정으로, 이승의 개똥밭이 낫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게다가 디오니소스의 삶이 그러하다. 짜라투스트라는 디오니소스를 영접해야 할 것이다. (52PKA)]

§2.10.1 자유로운 사상가와 자유로운 정신 118 (Le libre penseur et l’esprit libre, 67.)

니체는 또한 자신의 소크라테스들을 만난다. 그들은 자유로운 사상가들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당신은 무엇을 불평하고 있는가? 약자들 자신이 우월한 힘을 형성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는가?” “실현된 사실에 승복하자. 현대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그렇다. (67, 118) [승복하자는 순간에 상층이 정합성이 진리가 된다. 전복하면 정합성은 예외일 뿐이다.]

§2.10.2. 위계(서열) 119 (La hiérarchie. 68)

니체에게서 서열이란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선 그것은 적극적이고 반응적인 힘들의 차이, 적극적 힘들의 반응적 힘들에 대한 우월성을 의미한다. .. 서열 문제 자체는 자유로운 정신들의 문제이다. (68, 119-120)

법과 덕의 군림. 둘째 의미에서 도덕과 종교는 또 위계의 이론이다. 둘째 의미는 첫째의 이면과 동일함을 알게 된다. 우리는 교회, 도덕, 국가를 주인들 또는 모든 위계의 담지자로 만든다. (68, 120)

§2.10.3. 적극적인 말들과 반응적인 말들의 상이한 의미 120 (Les différents sens des mots actif et réactif. 69)

니체는 가장 강하지 못한 자가 아니라, 그의 힘이 어떻건 그가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된 자를 약자 또는 노예라고 부른다. 가장 강하지 못한 자도 그가 끝까지 간다면 강자만큼 강하다. (69, 120)

약자가 승리하는 것은 또한 하나의 사실이다 .그것은 사실의 본질이기조차 하다. 사람들은 먼저 그것들의 적극적이거나 또는 반응적인 성질들을 고려하고, 둘째로 긍정적이고거나 부정적인 권능의지가 상응하는 양극과 그 성질의 유사성을 고려하며, 셋째로 그것의 유사성과 관련해서 그것의 이러저러한 발전의 순간에 힘이 드러내는 성질의 의미를 고려할 때 만이 사람들이 힘들에 대해 판단할 수 있다. (69, 120-121)

반응적 힘 1) 2) 3) 분리된 힘.. 적극적 힘 1) 2) 3) 차이를 향유와 긍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힘이다. (69, 121)

§2.11. 권능의지와 권능감정 121 (Volonté de puissance et sentiment de puissance. 69).

- 권력의지와 감수성(파토스)(Volonté de puissance et sensibilité (pathos). / 힘들의 생성(Le devenir des forces.)

[[권능의지에서 권능이란 심층의 무의식(잠세력)과 같다. 이는 상층과 비례연관상으로 파토스라고 할 때 상층은 로고스이다. 그런데 상층의 존재가 누스(정신)라고 할 때, 심층의 현존은 의식(영혼)이라 대비된다. 의식은 흐름이라는 의미에서 아페이론이고 누스는 정지라는 정의(규정, 한계상)에서 페라스가 된다. (52PKA)]]

§2.11.1. 권력의지와 감수성(파토스) 121 (Volonté de puissance et sensibilité (pathos). 69)

우리는 권능의지가 무엇인 안다: 힘과 힘의 연관을 규정하며, 힘의 성질을 생산하는, 미분적 요소, 즉 생성적[계보적] 요소이다. (69, 121)

첫째로 권능의지는 감화 받을 수 있는 능력처럼, 감화받는 힘 자체의 규정된 능력처럼 표명된다. 여기서 니체에게서 스피노자의 영감을 부정하기 어렵다. 스피노자는 극히 난해한 이론 속에서 힘의 모든 양에 감화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상응함을 주장했다. (70, 122)

[둘째로] 니체에게서도 마찬가지다: 감화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은 필연적으로 수동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감화성(affectivité), 감성(sensibilité), 감각(sensation)이다. .. 권능의 의지를 말하기 전에 권능감정(sentiment de puissance)에 관해 말했다. (70, 122-123)

그러나 그가 권능의지란 완전한 개념을 구상하게 되었을 때, 그 최초의 특징은 사라지지 않고, 권능의지의 표명이 되었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권능의지가 원초적 감화형식(la forme affective primitive)”라고, 다른 모든 감정들이 파생하는 형식이라고 그치지 않고 말한다. 말하자면, “권능의지는 존재(un être)도 생성(un devenir)도 아니며, 그것은 파토스(pathos)이다.”라고 한다.

§2.11.2. 힘들의 생성 125 (Le devenir des forces. 72)

모든 감성은 힘들의 생성(un devenir)일 따름이다. (72, 125) [감각은 생성이고 감화로부터 표면으로 과정은 생장(genese)이다. 그래서 생장은 흐름이며 비인격적인데 비해, 생성은 인격적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 추억들은 감각과 연결되고, 기억은 총체적 과정이듯이. (52PKG)]

§2.12 힘들의 반응적 생성 125 (Le devenir-réactif des forces 72)

- 반응적 생성(Devenir-réactif.) / 인간의 혐오(Le dégoût de l’homme) / 난처한 사고로서의 영원회귀(L’éternel retour comme pensée désolante)

[§2.13. 마지막 문장에서 능동적 생성은 긍정자이며 긍정적이고, 이는 마치 반작용 생성이 부정자이며 허무자인 것과 같다.”(77, 132) ]

§2.12.1 반응적 생성(Devenir-réactif.)

그러나 힘들의 역동론[동력학]은 우리를 난처한 결론으로 이끌고 간다. 반응적 힘이 적극적 힘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킬 때, 후자는 자기 차례가 되어 반응적이 된다. 적극적 힘들은 반응적이 된다. (72, 125)

반응적 생성은 인간[개체성]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원한, 가책, 허무주의는 심리적 특징들이 아니라, 인간 속의 인간성의 토대와 같다. 이것들은 인간존재 그 자체의 원리이다. (73, 126) [원한, 가책, 허무주의가 원리라고 하는 것은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으로 바탕에서 솟아오르려고 하는 것이다. 유태교의 원한, 크리스트교의 가책, 19세기 과학의 허무주의 등을 넘어서 새로운 인간, 아제 인간을 인민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52PKG)]

§2.12.1.1 인간의 혐오 (Le dégoût de l’homme)

[이것들은] 인간, 대지의 피부병”, 대지의 반작용‥…. 그점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인간의 큰 경멸큰 혐오에 대해서 말한다. 다른 감성, 다른 생성은 여전히 인간에 속할 것이인가? (73, 126-127) [그래, 진솔한 실재성으로 기억은 여전히 흐르고 결로 퍼지며 확장하고 있지, 인민은 그것을 표출하고 있지..]

§2.12.2. 난처한 사고로서의 영원회귀 127 (L’éternel retour comme pensée désolante, 72) .

인간의 이런 조건은 영원회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의 사유를 불가사의하고 비밀스러운 것으로 소개할 뿐아니라, 역겹고 견디기 어려운 것처럼 소개 한다. (73, 127)

그는 [이미] 변형되었고, 후광에 싸인 체 있었고, 그는 [반과거] 웃곤 한다! 인간은 마치 그가 [현재] 웃고 있는 것처럼, [대과거 시제] 여지껏 땅위에서 웃어본 적이 없었다.다른 생성, 다른 감성: 바로 아제인간(surhomme)이다. (74, 128) [웃곤 한다: 탈영토화, 웃는다: 인간의 자연의 손아귀에 벗어나 스스로 제도를 만들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공화국, 빨강이 나라, 공산사회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크리스트교의 환상이나 망상이 아니라, 인민이 권능의 의지로 각각 자기에 맞는 코나투스를 활용하여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지속이 승리한다. ]

§2.13. 의미와 가치들의 양면성 128 (Ambivalence du sens et des valeurs 74)

- 반작용의 양면성(Ambivalence de la réaction) / 반응적 힘들의 다양성(Diversité des forces réactives) / 반작용과 부정(Réation et négation)

[양면성을 파악하는 자는 새로운 성직자이며, 의사인데, 이들은 통시적으로 상층과 심층의 이중적 방향(의미)를 해석할 줄 아는 계보학자일 경우에 그러하다. 새로운 성직자란 탐색하고 지배하고 강해지는 아제인간을 뜻한다.]

§2.13.1. 반작용의 양면성 128 (Ambivalence de la réaction, 74)

우리가 알고 있는 생성과는 다른 생성이 있다. 힘들의 적극적 생성(devenir-actif)이다. (74, 128)

§2.13.2. 반응적 힘들의 다양성 129 (Diversité des forces réactives, 75)

반응적 힘이 상이한 관점에서 다루어질 수 있음은 분명하다. 예를 들면 질병은 나를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킨다. (75, 129)

병든 인간 뿐만아니라, 종교적 인간 조차도 이런 이중 측면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반응적 인간, 또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권능의 인간. ... 니체가 소크라테스, 크리스트, 유대교, 크리스트교에 대해 즉 퇴락과 퇴행의 형식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사물들의, 존재들의, 힘들의 이러한 동일한 양면성(cette même ambivalence)을 발견할 것이다. (75, 129-130) [양면성=이중성, 이것은 동력학이다. 다양체는 열전자학과 전자기학에서, 또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 가능하다.]

§2.13.3. 반작용과 부정 131 (Réation et négation, 77)

그러나, 의미[방향]와 가치들의 양면성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반응적 힘이, 그 힘이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가면서 적극적(능동적)이 된다고 결론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끝까지 가는 것”, “최종 귀결에까지 가는 것은 두 가지 의미(deux sens)가 있기 때문인데, 사람들이 긍정하거나 부인함에 따라서, 또 사람들이 자신의 차이를 긍정하거나 부인함에 따라서. (77, 131)

§2.14. 영원회귀의 둘째 측면: 윤리적이고 선택적인 사유로서 132 (Deuxième aspect de l’éternel retour: comme penée éthique et sélective 77)

- 위안적 사고로서의 영원회귀(L’éternel retour comme pensée consolante) / 첫째 선택: 중간 의욕의 제거(Première sélection: élimination des demi-vouloirs) / 둘째 선택: 허무주의의 완성, 부정의 전환(Seconde sélection: achèvement du nihilisme, transmutation du négatif) / 반응적 힘들은 되돌아오지 않는다(Les forces réactives ne reviennent pas).

[§2.5. 영원회귀의 첫째 측면: 우주론 그리고 물리 이론으로서 98 (Premier aspect de l’éternel retour: comme doctrine cosmologique et physique, 53)]

§2.14.1. 위안적 사고로서의 영원회귀 132 (L’éternel retour comme pensée consolante, 77)

[위로하는 사고는 지상에서 천상으로 천상에서 지상으로 원처럼 순환하는 것이다. 그 순환에서 천국과 저세상의 개념이 발생하고, 이 개념을 통해 민중들에게 우화적인 것처럼 이야기 한다.]

감각되지도 인식되지도 않는 반응적 생성은 선택(une séléction)의 생산물로서만 사유될 수 있다. (77, 132) [벩송: 기억은 선택에서 선을 형성한다.]

윤리적 사유로서 영원회귀는 실천적 종합의 새로운 형식화(la fornulation)이다. 네가 원하는 것, 그것을 네가 영원회귀를 원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원하라. (77, 132)

여기서 영원회귀가 어떻게 선택하는지 더 살펴보자. 선택하는 것은 바로 영원회귀의 사유이다. 그 사유가 원하다로서 전체라는 어떤 것으로 만든다. 그 영원회귀의 사유는 원하다로부터 영원회귀 바깥으로 떨어지는 모든 것을 제거한다. 그 사유는 원하다로 창조를 만들고, ‘원하다’=‘창조하다라는 등식을 실현한다. (78, 133)

§2.14.2. 첫째 선택: 중간 의욕의 제거(Première sélection: élimination des demi-vouloirs)

§2.14.3. 둘째 선택: 허무주의의 완성, 부정의 전환 (Seconde sélection: achèvement du nihilisme, transmutation du négatif)

그와 같은[첫째] 선택[제거하는 선택]은 짜라투스트라의 야망보다 열등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선택은 가장 덜 발달된 것들 가운데서 몇몇 반응적 상태들, 즉 반응적 힘들의 몇몇 상태들을 제거하는데 만족한다. (78, 133)

그러나 둘째 선택은 니체 철학의 가장 모호한 부분들을 문제 삼고, 영원회귀 학설 속에서 거의 입문적인 요소를 형성한다. .. 우리는 그 주제들을 검토해보자. (79, 134)

1) 왜 영원회귀는 소위 허무주의의 과도한 형태(la forme outrancière)인가?” ... 영원회귀만이 허무주의적 의지를 완전하고 전체인 의지로 만든다. (78-79, 134)

2)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연구한 바처럼, 무의 의지(la volonte de neant)가 우리에게 항상 반응적 힘들과의 동맹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79, 134)

3) 4)

§2.14.4. 반응적 힘들은 되돌아오지 않는다(Les forces réactives ne reviennent pas).

5) 그러므로 영원회귀 안에서 둘째 선택은 영원회귀가 적극적으로 생성을 낳는다는 데 있다. 반응적 힘들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의 의지와 영원회귀를 비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80, 136) [무의 의지는 존재론적이며 존재와 마찬가지로 불모성이다. 권능의 의지는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것으로서 무를 정복한 것으로 여긴다.]

더 이상 선택적 사유가 문제가 아니라 선택적 존재[권능, 실재성]이 분제이다. 왜냐하면 영원회귀는 존재[권능]이고, 존재는 선택이기 때문이다(선택(séléction)=위계(La hiérarchie) §2.1. 45 참조) (80, 137, 마지막 구절) [스토아적인 무작위의 생성은 어제의 기억을 포함하고 있어서 새로운 여러 생성들은 선택을 지니고 있다. 그 선택이 개인(인격)들의 차히를 창발한다. 위계를 가진다는 것은 차히에 의한 계열(살의 선들)이 달리 가지치기 하는 것이다(벩송의 사실의 선들 참조).]

§2.15. 영원회귀의 문제 137 (Le problème de l’Eternel Retour 81)

- 적극적 생성(Devenir-actif) / 전체와 계기(Le tout et le moment)

§2.15.1. 적극적 생성 137 (Devenir-actif, 81)

.. 가치들의 변환(transmutation) 또는 가치 전환(transvaluation)은 부정대신 긍정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긍정의 힘으로 변화된 부정, 디오니소스적인 탁월한 변신을 의미한다. (81 137)

§2.15.2. 전체와 계기 137 (Le tout et le moment, 81)

.. 영원회귀는 생성의 존재이다. 그러나 생성은 이중적이다. (81, 137) [극한에서 이중적이나 실재성으로 다양체이다.]

영원회귀는 이중적인 측면이 있다. .. 되돌아온다(retour)는 전체이지만, 그 전체는 유일한 순간으로 긍정된다. (81, 138) [인도의 사유일까? 꾸르노(Antoine Augustin Cournot, 1801-1877)를 읽었을까? (0)의 제로승도 무한()의 제로승도 1(관념상, 권리상)이다. 이 일(1)은 유크리트 기하학의 점과 같다. 절대적 공간에서만 성립한다. (현존이 아닌) 존재도 (다양체가 아닌) 선의 이데아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52PKA)]

[§1.11. 주사위 던지기에서 우연(hasard)§2.15.에서 영원회귀의 전체와 순간(계기)’의 이중성 안에서 일어나는 우연이다. 이 우연은 비유클리트 기하학의 다양체와 닮았다.]

(lu, 5:29, 52PKA) (14:09, 52PKG)

 

****

610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e, Ἀναξίμανδρος/Anaxímandros 기원전 610-546): 무규정(l'indétermine, apeiron, [아페이론])

544 헤라클레이토스(Héraclite, Ἠράκλειτος, 기원전 544-480) 이오니아 에페소스 출신, (le feu), 투쟁의 변증법. fr.Wiki, 544/541 Éphèse 480Éphèse.

469 그리스 아테네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 Σωκράτης 기원전 469-399)(70)

427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ès, 기원전 427-347)(80),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우주론을 이데아, 데미우르고스, 플라노메네 아이티아, 세 위상으로 전개한다. (소크라테스 나이 42살이었고) [그리고 18년 후에 배울 수 있을 있었다면, 소크라테스 나이 60살이었으며 10여년을 따라다니며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현재로는 폴란드보다 더 동쪽에 있는 쾨니히스베르그 출신의 프러시아 공화국의 철학자이다. 인간의 표상적 인식의 조건을 규정하고, 도덕적 이성의 신에게 종속을 요청하고, 미적으로 신의 작업의 숭고함에 경건하게 기도하는 듯이 긍정한 프로테스탄트 철학을 구성하였다.

1744 라마르크(Jean-Baptiste-Pierre Antoine de Monet, Cheval‎ier de Lamarck, 1744-1829), 동물철학, 1809

1770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프랑스 혁명에서 인민의 자유를 너머 멀리서 바라보면서 인간의 정신이 신의 인격에 이를 것으로 만든 또 하나의 토마스 주의자로 철학을 하였다. 그는 프러시아 통일의 영광을 만들기 위하여 루터파 교리에 맞추어 신의 절대성을 강조한 근대판 교부 철학자이다.

1809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 영국의 생물학자, 지질학자

1844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독일의 문헌학자, 철학자. 서구의 오랜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에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이 있다.

1856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유태인 출신으로 의사이며 정신분석학을 창설하였다. 니체가 죽는 해(신의 죽음에 대한 발언이 종언을 고한 시기에) 자아의 내부의 목소리를 듣는, 무의식의 욕망의 솟아남을 느끼는 꿈의 해석(1900)을 출판되다.

뽈랑(Raymond Polin 1910-2001) 프랑스 철학자. 󰡔Nietzsche und der Staat oder Die Politik eines Einsamen, 1974.󰡕 그의 아들 (Claude Polin, 1937-2018) 정치철학자. 들뢰즈의 인용은 전자일 것이다.

(15:05, 52PKG)


첨부파일 책들뢰1962니체19제2장.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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