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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1961)

작성자마실가|작성시간14.07.23|조회수368 목록 댓글 2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관한 시론(Totalité et Infini: Essai sur l'exteriorité, 1961)

- Catherine Chalier et Jacques Rolland, in Les Oeuvres II, Dictionnaire, PUF, 1992, p. 3476(P.4616)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 프랑스 철학자.

카뜨린 샬리에(Catherine Chalier, s.d.) 프랑스 철학자, 번역자. 레비나스 전공자이다. 1981년 카플란(Francis Kaplan, 1927-)지도로 󰡔종교적 현존: 유대주의와 타자성(Essai sur l'existence religieuse, judaïsme et altérité)󰡕으로 박사 학위를 했다. 카톨릭 교육을 받았으나 유대교로 개종했다. 파리 10대학(Nanterre)의 교수.

쟈끄 롤랑(Jacques Rolland s.d.): 󰡔노에시스(Noesis)󰡕지 3호(2000년) 특집 󰡔엠마뉘에 레비나스의 형이상학(La métaphysique d'Emmanuel Levinas)󰡕에서는, 쟈니꼬(Dominique Janicaud)가 소개 글을 쓰고 마떼이(Jean-François Mattéi), 바농(David Banon), 롤랑(Jacques Rolland), 방쉬상(Gérard Bensussan), 올리비에(Paul Olivier), 아르망고(Françoise Armengaud), 샤를(Daniel Charles)이 논문을 썼다. 롤랑은 「자기 부정성으로서 죽음(La mort en sa négativité)」(2000)을 썼다.

 

이 책은 주제성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는가? 허참 당연하지 않는가! ?

# 내용 *** ** **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관한 시론(Totalité et Infini: Essai sur l'exteriorité, 1961)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

이 책은 “주관성의 옹호[방어]로서 소개되어 있다”. 이 방어란 전체성의 확고한 폭력에 대해서도, 그리고 아름답다고 간주되는 미래의 이름으로 현재에 처한 각자의 단일성(l'unicité)으로부터 전체성이 요구하는 희생에 대해서도, 이기주의적 항의로서 이해해야할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매우 자주 잔인한 역사의 - 그 역사가 각자의 삶의 의미를 오해해서 - 평결[심판]과 죽음 앞에서 고뇌로서도 이해해야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존재와 전체성이라는 개념들에 의해 지배되는 철학에, 즉 “존재가 전쟁[투쟁]으로서 계시[폭로]된다‘는 관념에, 윤리적 현존을 그리고 말씀에 다시 말하면 평화에 속하는 인간들의 소질을 대립시킨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요구(cette exigence 요청)를 가능하게 하는 망각된 경험을 정당하게 [활용] 할 수 있는 것처럼, 주관성을 사유하는데 참여하고, 이것[주관성]을 구체화하고, 이것[주관성]을 존재론과 정치가(le politique로 표기되어 있는데 la politique(정치학)아닐까?]의 심판관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망각된 경험으로 읽어도 될 것이다.]

이 [망각된] 경험은 “무한 관념의 경의로움(la merveille)”에, 유한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특별한 능력에 근거했으리라. 특별한 능력이란 이 그러한[무한] 관념을 자기 속에 수집(모을) 할 수 있고, 근본적으로 문제거리가 되고 또 그 때문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기의 순수한 자발성을 느끼고 아는 능력이다. 그러나 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관념을 만나는가? 왜냐하면 또한 마찬가지로 인간이 - 데카르트가 이미 그렇게 제시했는데 - 자기 자신에게 그 관념을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주관성이 불가능한 요청을 - “포함하는 것이 가능한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고 불가능한 요청을 - 실현한다고 생각하는가?

레비나스는 이런 수수께끼에 대답을 찾는데 초대하면서, 탁월하게 겪은 경험처럼, 즉 무한관념의 만남과 도래처럼, 타인의 얼굴의 출현(L'épiphanie)의 경험을 서술한다. “왜재성과 초월의 섬광(l'éclat)이 인간의 주관성을 방문하러 오는 순간처럼, 주관성에게는 신적 차원이 열려진다.

왜냐하면, 얼굴인 한에서 타자(l'autre)와 관계, 정면으로 마주하는 대담의 탁월한 공명정대, 공명정대가 가정한 대화로 입장 등은 “나의 힘들의 연약함”에도 맞서지 못하는 만큼이나 타인의 얼굴 앞에서 “나의 힘의 힘”, 그것의 높이[고귀함]도 그것의 본질적 허약함도 나에게 “초월자의 개방에 대해서 벌거벗음”을 드러내기 때문에, 무한은, 그 무한이 나에게 저항하는 순간에 나를 초대하여, 나에게 “너는 살인을 범하지 말아라”는 고대의 말투(parole)을 듣게 한다. 한 번 더, 그것의 현전[현재 나타남]은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닌 나에게 호소한다. 내가 그의 기근과 궁핍을 인정하도록, 나의 자아 그 자체로부터 나온 근심보다 그 기근과 궁핍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또 그 근심과 궁핍이 세계를 소유하는 나의 즐거운 장악 운동을 멈추게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내가 존재 속에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하여 나에게 호소한다. 이 타인에 대한 주의, “의식의 잉여[과잉]”는 나의 자연적 이기주의에 대한 이웃의 특권을 나에게 가르쳐준다. 이 [주의와 잉여]둘은 잘 정돈된 정의가 타인에 의해 시작한다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준다.

그러면 타인은 주관성에 대해 무엇일까? 저자는 어떻게 타인에게 접근하면서 만이 내가 나 자신에게 참석하는 것인지를 보여 준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 임무에 나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자아이다.” 선택된 것이 아니라 부과되는 것인 책임성, 즉 타인을 향한 무한한 나의 책임성의 호소는, 이웃의 봉사를 위하여, 가장 높은자(Très-Haut)의 흔적 속으로 자기에게 계시되는 자의 봉사를 위하여, 나의 선별(élection, 선출)을 사유하고 살아가는데 나에게 참여하게 한다. 이렇게 행하면서 “타자를 위하여 나의 존재”를 완성하기에 나를 참여하게 한다. 만일 “자아로 있다는 것” 그것이 “모욕당한 자의 모욕을 즉 얼굴을 볼 수 있는 것” 이라면, 윤리학의 유일한 걱정, 다른 인간을 위한 경계(vigilance, 눈뜨고 지키기), 존재 속에서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 경고 등은 인간적인 주관성의 정당한 척도를 제공한다. (47QLF)

* [책 제목은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관한 시론(Totalité et Infini: Essai sur l'exteriorité, 1961)󰡕이다. 전체성으로서 신(높은자)는 무한이고 왜재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두 해설가는 “외재성”이란 용어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왜재성이 타인의 얼굴이라는 측면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 레비나스의 얼굴에는 표면으로 껍데기인 것 같다. 타인의 얼굴에는 피부 살 뼈가 들어있다. 단지 얼굴의 표면만이 그 인간의 삶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가식이 많은 자들이, 새나라당인들 같은 이과 이상한 목사들들이 가식으로 밥먹고 사는지를 이시대가 보여주지 않는가! 인간이 산다는 것은 얼굴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택리지에 서울의 인간들을 보고 경중미인(鏡中美人)이라 불렀겠는가... 해설가들이 주관성에 대해 말하면서 “자아 자체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까지는 동의하지만, 그 자아인 것이 높은 자의 모습이 들어있어야 하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 그림자가 너울 거린다. / 왜 프랑스 철학계에서 레비나스를 묻어벼렸는지 느낌이 온다. 그가 유태인으로 유태의 종교를 열심히 한 것으로 살아가는 것도 프랑스에서 자유이다. 그런데 인민 속에서 인민의 모습과 인민의 자유를 드러내지 못했기에 다음으로 연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47QLF)]

 

** 참조

에피파니(L'Épiphanie) 크리스트교의 축제. 메시아가 세계에 구현되어 나타나다. 세 사람의 동방현자의 방문을 받은 것을 축하하는 축제. [점성술에서는 시리우스 별(삼태성이 수평선에 있는 별에 줄 서 있는 모습이라 한다] 그리스어 에피파니아(Ἐπιφάνια, lat. par apparitio)는 출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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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천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2.29 Théorie de l’intuition dans la phénoménologie de Husserl , 1930,
    De l'existence à l'existant , Paris, Fontaine, 1947
    En découvrant l'existence avec Husserl et Heidegger, [1949]
    이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을까? 10여년간, 들뢰즈는 이 시기에 8년을 구멍파고 있었다고 하는데... 하늘을 뚫었을까?
    Totalité et Infini : Essai sur l’extériorité, 1961
  • 작성자천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2.29 최근에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벩송의 견해를 본 것 중에서

    altérité: 플라톤의 아페이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알테리테라고 하길래, 변질성이란 의미도 있구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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