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다시 쓴다: 있음과 없음에서 함과 됨까지
윤구병 글, 보리, 2013.02.12, P. 416.
형이상학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이는 이 책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46RMI).
한철연에서 하는 출판기념 강연을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프랑스어 공부해야 하느라... 마치고 뒷풀이 갔었다. 50여명은 온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의 밥값 술값을 윤구병 선배가 냈다. / 뒷 풀이에서 형님의 한마디. 현 상황에서 이 집단은 두 가지를 거의 완벽하게 장악했다. 하나는 제도로서 국정원, 군대, 검찰, 경찰이고,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로서 신문, 방송, 정보 통신이다. 아직 그들에게 잡히지 않는 부분이 유일하게 문화이다. 문화의 창달에 힘쓸 때이다. .. 낸시랭이 잘하고 있지... (46NKI)
3월 10일 박홍규 선생논문집 발간을 위한 발표에서, 나는 창조적 진화를 발표했는데 구병형은 배중율의 지배를 받지 않은 영역이 있다. 둘 다를 포함하고 나갈 수 있는 변증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라고 했다. / 이 날 최정식이 이태수를 소은선생의 적자이고 윤구병을 서자라고 했지... / 내가 보기에 이태수의 아페이론 발표는 박홍규 선생의 설명을 잘 따라 간 것일 수 있지만, 박선생님의 고민을 잘 따라간 윤구병이 이미 쓴 글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였다. (46nna)
인간이란 누구인가라는 주체적 물음이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존재적 물음을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내 생각이지만 인간은 다른 물질과 마찬가지로 물질로 되어 있다는 것을 잊으면, 무엇인가를 묻지 않고 누구인가? 라고 물을 것 같다. 무엇인가? 라는 점에서 여기 지금 있어야 할 것인지 없어야 할지를 물을 수 있다. 그런데 있어야 또는 없어야 하는 기준은 존재론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미학적, 도덕적, 종교적, 인식적, 그리고 형이상학적 문제가 엉켜있다는 것이다. 문제거리를 정화하게 보고 따져 들어가는 것은 여러 갈래라고 하더라고 엉켜있음은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자료는 이미 엉켜있다. 이것을 갈래로 재단하는 것은 이미 어떤 관심과 연관을 부여한 것이다. 자르는데, 무엇을 부여했는가? 잘 살아보자는 점이다.
여기서 잘 살아보다는 즐겁게 살아보자는 것이고, 그리 재단의 방식을 훌륭하게하는 것이 다음이고 그것을 타인과 더불어 활용하는 것은 그 다음이라고 한다면, 도덕론, 인식론 그리고 행동론이다. 그러면 형이상학은 무엇인가? 이 세 가지를 성립시키는 기반, 즉 조건들이다. 말하자면 현존의 생활양식(modus vivendi)가 아닐까? 1부 ‘좋음’과 ‘나쁨’, 2부 ‘있음’과 ‘없음’, 3부 ‘함’과 ‘됨’이다. 좋고 훌륭하면서도(공기와 빛(불)처럼), 있어야 하고(땅과 물), 만들어가고 행하는 것(생명)이 아닐까? 이 세 가지가 잘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공간이 아니라 기억을 포함하는 시간이라는 점이다. 지금 여기 무엇을 할 것인가? 윤구병의 메시지는 상황과 체제에 맞서서 “우리는 생명의 시간을 인공의 시간으로 바꿔치기하려는 모든 통제에 대해서 의심하는 눈길을 거두지 말아야 합니다. /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 말고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물읍시다.”(377; 마지막 두 문장)이다. (46NNA)
제1부, 인류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에 대해 좋다 나쁘다는 미래적 사건과 관련있다. “있을 것은 있고 없을 것은 없다”가 좋다. 그래서 “있을”이라는 미래적인 것을 철학은 선악이라는 도덕적인 당위로 있어야할 것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닌가? “있을 것도 있고 없을 것도 있지”라면 그것은 세상사이다. 다른 한편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고 하면 맞고 틀린 이야기처럼 들린다. 당연히 삶에서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은 없지, 없은 것이 있다고 하면 안되지” 세상은 맞다 틀리다를 따진다. 따진다는 것은 “긴 것 기고 아닌 것 아니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즉 ‘이것과 저것은 다르다’이다. 여기서 진위명제와 존재론을 다루는 것이 달라진다. 이것은 뭐고, 저것은 뭐냐?(ti esti, 시심마). 이것과 저것이 다르다(차이)와 이것은 이것이지. “이다(기고)와 아니다”는 맞다 틀리다, 이다와 다르다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다와 다르다”가 한 대상이 시간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이다인 경우와 다르다는 경우가 있다. 이로부터 삶과 존재에서 삶과 행위로 나아간다. 존재론에서 실천론으로 나아간다. 도덕론에서 존재론으로 그리고 실천론으로 서술하고자 한 것이 이 책에서 저자 윤구병의 의도일 것이다. (46QMA)
제2부는 윤구병이 이야기하는 고대 철학사의 관점이다. 파르메니데스를 달리 이어가는 ‘있음’의 철학으로서 플라톤, 현실의 문제를 풀기 위해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게 하는 부동의 원동자’ 상위에 놓는 아리스토텔레스, 운동의 측면을 더욱 강조하는 플로티누스로 이어지는 형이상학에 대한 관점이다. 박홍규 선생의 고민을 제자인 윤구병이 철학사의 흐름으로 풀어 놓았다. 그 중에서 운동을 다루면서 유물론으로 나가는 방향을 설명한 것은 내가 들은 박홍규에서 거의 없었던 이야기이다. 공간의 측면에서도 운동이란 문제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찾는 것으로 보인다. 윤구병의 관심은 존재보다 현존이었던 것이다.
제3부에서 운동과 변화를 공간의 관점에서 시간의 관점으로 옮기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아페이론을 운동의 관점에서보아, 행동들에는 여러 결들이 있다. 그래서 있을 것과 없을 것을 구별하는 성찰이 필요하다. 현대 도시라는 사회는 식인사회란다. 이 사회의 결들을 구별하는 것은 있는 놈과 없는 놈이라며, 있음과 없음의 구별이 가진 자(자본가)와 없는자(노동자) 사이의 경계를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행동(실천)이 나온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제 세계는 금융독점 자본주의로서 국가간의 경계는 없어졌다. 그래서 분명하게 있음과 없음은 구별된다는 것이다. 삼차세계대전은 아프카니스탄 전쟁으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있는 자와 자주적이고 자율적 자치를 행하려는 자들 사이의 내전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위계사회를 고착시키려는 공간화 사유과 평등사회과 만들려는 생명활동 사이에 됨화 함이라는 구별을 잘 생각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주지주의적 관점인 공간의 관점에서 행동(실천)에는 생명적인 것이 없어서 삶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생명의 시간 속에서 인간이 오만하지 않게 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끝까지 물어보고 따지고 행동하는 것이 철학이다. 외디푸스 신화의 교훈은 권력이 중간에 덮자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비판을 통해 파괴 해체 무화는 쉽다. 행동하고 실천하여 새롭게 만드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리스 영웅은 노력하는 자였다. 이제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노력하는 자, 지금도 생명체로서 노력하는 자에게 영광을!
(46RMI)
*** 내용
철학을 다시 쓴다: 있음과 없음에서 함과 됨까지
- 윤구병 글, 보리 출판사, 2013.02.12, P. 416)
* 책머리에 7-11
따라서 우리 말이 우리 글보다 앞섭니다.(10)
* 책을 읽기 전에 12-13
“없는 것이 있다”는 이론도 밝혀냈습니다. (13) [우리말에서 ‘없는 것이 있다’는 행위에서는 지금 여기 없는 것이 다른 차원에서는 있다는 의미일 수 있다. 즉 지금 시대 없는 것이 다음시대에 있다는 의미도 되지요. 의미를 따지면 그 구분을 하는 방식, 자르는 방식이 문제일 것입니다. (46NNA) ]
차례 15-17
일러두기 18
1부 ‘좋음’과 ‘나쁨’, 19
primum vivere, deinde philosophari ‘프리뭄 비베레, 데인데 필로소파리’ - “생이 먼저이고 철학은 나중이다”(21) [인간, 생명체는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죽어서 또는 죽고 나서 영화와 행복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삶이 먼저고 다음이 학문이다. (46RMI)]
*공동체의 형성 과정 32
공동체는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 그러니까 농경사회, 유목사회, 도시사회처럼 말이죠.(32)
‘반편’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왜 반편이나구요? 생물학적 증거가 있습니다. ... 수컷은 말을 주고 받을 때 왼쪽 뇌만 작용합니다. 그쪽에만 불이 들어와요. 하지만 암컷은 왼 뇌 오른 뇌 두 쪽 다 언어중추가 갖추어져 있습니다.(36)
* 농경공동체 지혜의 함수: 시간
[시간을 농경사회의 기본으로 삼은 것이 구병형님의 장점이다.] [침팬지는 제인 구달, 고릴라는 다이앤 포시, 오랑우탄은 비루테 갈디카스가 연구했다]
* 농경공동체 지혜의 함수: 시간 39
* 유목 공동체 지혜의 함수: 공간 45
* 농경공동체와 유목공동체의 비교 55
* 신화해석의 중요성: 우리 사회의 지식형성 과정 61
* 도시의 형성과정 67
* 도시사회에서 의사 소통 수단의 변화 76
* 의사 소통 수단으로 발전한 문자 81
2부 ‘있음’과 ‘없음’, 85
[나로서는 놀랍다. 내가 구상하고 있는 설명방식과 닮은 그림을 윤구병은 그려놓았다. 윤구병이 동심원으로 그린 그림을 오늘 처음 본다. 나도 동심원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맞다고 여러 번 철학아카데미 강의에서 주장한 바 있는데,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박홍규선생을 넘어서려면 이것보다 더 위상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같다. (46NNA)]
* 참말과 거짓말 87
그래서 선불교에서 스님들이 ‘입만 벙긋하면 틀린다’는 말을 합니다. 개구즉착(開口 卽 錯), 입만 벌리면 거짓말을 한다는 뜻이죠. (87)
* 있음과 없음의 구분 94
[있다에 앞서서 없다는 것을 먼저 규정해야 다르다가 나오기 때문에 없다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존재는 있다(존재)와 구별되는 다른 존재이다. 논리상으로 다르다는 것은 있음(존재)와 없음(존재) 사이에 구별하는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준은 있음(존재, 페라스)의 다른 부분들(없음 존재라기보다 이름 부를 수 없는 존재, 아페이론이다. 아페이론이 사실상 없음이니, 권리상 없음이 먼저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46RKA)]
없는 것도 있고 있는 것도 있다고 하면 둘이 확보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이 세상은 구제 받을 길이 열리는 겁니다. 같고, 다르고, 이고, 아니고 하는 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겁니다. 없다는 것이 존재지 않으면, 없는 것을 빼놓고는 아니다라는 부정사를 쓸 수 없죠? 그리고 다르다는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100)
어떤 것이 끝나는 지점, 이를 테면 선분[une ligne]의 두 끝을 그리스 사람들은 페라스(peras)라고 합니다. ..그러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은 뭐라고 하느냐?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합니다. ... 그러면 없는 것 하나, 있는 것 하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윤구병은 이것에는 하나를 붙이지 않았다], 이 세 가지가 나왔죠? 어떤 원시인들 가운데 수를 셀 때 하나, 둘, 많다 그렇게 표현하는 부족들이 있다고 하죠? 그게 실은 아주 정확한 겁니다. 하나 둘 그다음에 많다입니다. (101)
* 있음과 없음의 연속성 103
파르메니데스는 '있다, 없는 것은 없다. 있는 것은 굳이 형상화하자면 하나로 있고, 뭉쳐 있고, 구(球, 공) 형태, 스파이로에이데스(sphairoeides)로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103)
아까 ‘있는 것은 있는 것이다’라고 했죠? 그것이 참말이라고 그랬죠. 그렇죠? .. 아까[보다 앞서서] 있는 것은 둘로 있을 수 없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지금 있는 것이 둘로 나뉘어 멀쩡하게 저마다 자리 하나씩 차지하고 있잖아요. 그게 말이 되느냐고요. 말이 안되죠. 이것 거짓말이죠. 참말임을 보장해주는 가장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근거라고 생각했던 게 거짓말이 돼 버리네요. (104-105)
여러분 가운데 수학을 잘 하시는 분 계시죠? 뭘 기준으로 해서 하나라고 하죠? 피타고라스는 하나를 뭘로 봤습니까? 바로 점[point]입니다. 하나 하면 한계가 하나인 것이죠. 한계가 하나인 것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 보여요 / 연장성이 없는 것도 보입니까? / 아, 아뇨. 안보여요. 점.. 한계가 둘인 것은 선분[line], ... 한계가 셋인 것은 면(plane)입니다. 한계점이 네 개인 것은 입체 (105-106)
*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 빠진 ‘있다’ ‘없다’인가? 108
“... 제논은 네아르코스의 독재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지하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쩌다 들통이 나서 제논은 동료들과 같이 붙들리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네아르코스의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다른 동료들이 전부 자백을 했는데도 제논은 끝까지 동료들을 팔지 않고 버텼대요. 그리고 제논을 죽이기 전에 네아르코스가 직접 고문을 하면서 이제 그만 털어놓으라고 하자 네아르코스에게 ‘아직도 나는 내 혀의 주인이다’라고 마지막 한다미들 남기고는 자기 이빨로 제 혀를 끊어서 네아르코스의 얼굴에 내뱉었다고 합니다.” (122) [그는 네아르코스(le tyran Néarque)의 귀를 물어뜯어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는 자기이로 자기 혀를 잘라서, 독재자의 얼굴에 뱉었다. - 디오게네스 라에르스((Diogène Laërce, Vies des philosophes illustres, IX, 26-27) (46RKB)]
책 속으로: <크기 안에 있음과 없음이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는 이 교탁에 모순이 있다는 말이고, 이 말을 넓히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모순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이 세상에 있는 모순을 반영해서 있는 것도 파악하고 없는 것도 파악하여 ‘있다’, ‘없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 pp.124~125>
‘서로 맞닿아 있다’는 말을 수학에서는 탄젠트(tangent), 곧 접선이라는 낱말을 써서 나타냅니다. 이 탄젠트라는 말은 탄게레(tangere)에서 유래한 말인데, ‘닿는다’ ‘만진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어의 콘텍트(contact)도 어원이 같습니다. 함께(con)+닿아 있는 것(tactus)이 콘텍트 이지요.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로 영어에 컨틴젠시(contingency)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 꽁땅장스(contingence)이지요. ‘우연’ ‘우연성’ ‘우발성’이 이 낱말의 뜻입니다. (129) [contingo, contingere to touche, to infect to affect, to border on, to reache / tango, tangere, tetigi, tactum: 물리적으로 to touch /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1권191 에서 “우발적으로”(par accident, kata sumbebēkos)이라 쓰고, 2권 4장 195에서 “행운과 우연”(he tukhē kai to automaton)이란 개념을 쓴다. (46RMA)]
책 속으로: <세상에! 철학 선생이라는 자가, 그것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다니면서 그것으로 밥을 벌어먹는 서양 고대 철학 선생이라는 자가 이렇게 제 쪽박 깨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으니, 앞으로 하는 이야기가 씨알이 안 먹히면 그야말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어 마땅한 노릇이겠지요. - p.144.>
* 있음과 없음에 연관된 악과 죄의 근원 151
“..먼저 좋은 두목 밑에 나쁜 졸개가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부터 살펴봅시다. 이 문제는 중세 기독교인 사이에 대천사장 미카엘이 악마로 둔갑해서 하느님 몰래 이브를 타락시켰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두고 벌어졌던 논쟁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흥미를 끄는 문제입니다... ” (168)
소크라테스의 모름은 앎이 없는 것, 지혜의 결핍이기 때문입니다. .. 다시 말해 억압= 자유가 없는 것, 착취=고른 분배가 없는 것, 증오=사랑이 없는 것, 탐욕=욕망의 절제가 없는 것, 고통=즐거움이 없는 것 ... 이 되는 거지요. (170) [내가보기에, 자유, 평등, 사랑, 욕망, 즐거움 등인데, 욕망을 욕망의 절제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욕망을 자유나 사랑에도 책임과 광기조절과 같은 속사가 없듯이 욕망에도 속사가 없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욕망을 자유와 평등처럼 그 자체 자기 고유성이 발현되고 스스로 퍼져나감으로 보아야 소크라테스의 지혜의 욕망(désir)와 같은 의미로 될 것이다.(46RKB)]
“ ‘.. 동그라미의 이데아도 하나고, 세모꼴의 이데아도 하나이니까, 하나라는 점에서는 같다. 동그라미의 이데아도 있는 것이고, 세모꼴의 이데아도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믿게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그라미의 이데아와 세모꼴의 이데아는 같다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어거지로 플라톤을 두둔해 주려고 하다가는 저마저 거들나기 십상인 판국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미련이 없지는 않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을 받아서 플라톤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로 했습니다. ..”(172) [소크라테스가 파르메니데스에 한수 밟히는 것, 플라톤의 논리 전개의 약점은 이데아들이 있음과 하나의 있음을 동일하게 취급한 것이다. 동일성이라는 것은 단위 성립의 근거(순수공간)에서만 있는 것이다. 있음은 이데아처럼 대상의 것이 아니라, 토대로서 있음이다. 이 있음을 부동으로 보았던 것이 파르메니데스인데 비해서 이 있음이 움직임으로 보았던 것이 베르그송이다. (46RKB)]
책 속으로: <어거지로 플라톤을 두둔해 주려고 하다가는 저마저 거덜나기 십상인 판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련이 없지는 않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을 받아서 플라톤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로 했습니다. p.172>
“..이 점에서 플라톤은 자기가 파르메니데스의 하나로 있는, 그래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실들을 모두 헛것으로 돌려 버리는, 있는 것이라는 괴물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품 안에서 벗어나는 순간 자기의 이론이 모순을 끌어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몰랐던 듯합니다...”(175)
책속으로 <플라톤은, 앞에서 이야기했다시피 우리가 무엇, 어떤 것이라고 이름 지어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다시 말해서 공간 속에서 반복되고, 시간 속에서 지속되어, 하나로 우리에게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는 없는 것이 없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나 이성을 통해서나 파악할 수 있는 사물들의 모든 성질들이 하나도 뒤엉켜 있지 않고, 저마다 분명한 한계를 드러낸 채 따로따로 떨어져 다 갖추어져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플라톤은 자기가 파르메니데스의 하나로 있는, 그래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실들을 모두 헛것으로 돌려 버리는, 있는 것이라는 괴물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품 안에서 벗어나는 순간 자기의 이론이 모순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몰랐던 듯합니다. - p.175>
*사람이 ‘동물’이 되는 자리와 ‘짐승’이 되는 자리 176-197
[동물과 짐승, 공간과 자리, 분석과 분해, 현상(phenomene)과 겉보기(apparence), 무와 존재, 모순과 운동, ...(46RKD)]
책속으로: <있다, 없다는 말이 우리 사고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낱말이라는 사실은 철학자들이 나타나기에 훨씬 더 앞서서 우리 인류가 가장 큰 하나인 있는 것에서부터 가장 작은 하나인 없는 것에 맞닿아 있는 것에 이르기까지 머릿속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철학하는 사람의 과제는 바로 이 가장 큰 하나인 있는 것과 가장 작은 하나인 그 무엇을 양 극단에 두고 이 두 끝, 한계 사이에 우주 전체의 삼라만상이 어떻게 배열되는지, 차례로 하나하나를 겹쳐서 우주의 전체 구조와 그 구조에 따르는 기능을 밝혀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하려는 일도 이 작업의 한 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p.185~186>
“...모든 이론적 분석은 이론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데,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이론공간은 무한히 다양합니다. ... 나중에 따로 다루려고 생각합니다만 이론과 실천의 문제에서 어떤 이론이 번번이 실천에 이어지지 못하고 공리공론으로 그치고 마는 것은 이 이론공간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제대로 매기지 못해서 생겨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197)
*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다? 198-228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제11장, 참조]
책속으로: <여러 학생들은 그동안 학문 동네 사투리가 귀에 익어 내가 일상용어로 지껄이는 말을 주의 깊게 귀담아듣지 않으려고 할지 모릅니다. 이제까지 한 이야기도 학문 사투리를 섞어 ‘오류 판단의 존재론적 근거’가 어쩌고 ‘실천상 오류의 존재론적 분석’이 저쩌고 하고 떠들어 댔다면 여러분 중에는 ‘와, 굉장하다. 이런 존재론 강의는 전무후무한 명강의라 할 만하다’고 감탄할 사람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마을 공동체의 자연스러운 삶 속에서 빚어진 사투리와 학문 사투리는 다릅니다. 그냥 사투리는 진솔하지만 학문 사투리에는 뻐김과 잘난 체함이 깃들어 있어요. 머리만 굴려서 먹고 사는 사람, 이른바 정신 노동자가 손발을 부지런히 놀려서 먹고 사는 사람, 이른바 육체 노동자를 속이고 겁주어서 그 사람들 몫을 가로채려고 해 온 ‘정보 소통의 인위적 난관 조성’(어때요? 그럴듯해 보이지요?)의 음모가 학문 사투리에서는 물씬 풍깁니다. 그러니까 정신 노동자라는 특권 계급이 자기들끼리 정보를 독점하려고 일부러 어려운 말을 써서 보통 사람들을 따돌리는 야바위 노름의 속임수가 학문 용어에는 많이 섞여 있다는 뜻입니다. 학문하는 사람들이 이 버릇을 고치지 못하면 끝내는 보통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우스갯거리가 될 날이 멀지 않다고 나는 굳게 믿습니다. - p.218>
여기에서 쓰이는 말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것’ 이 추상공간에 함께 사는 낱말 가족은 이 다섯밖에 없습니다. (221)
“... 우리는 끝이 하나인 것을 무엇이라고 규정했지요?” / “점. 수학자들이 흔히 크기는 없고 자리만 있다고 하는 질점(質點)입니다.”(224)
다만 동일률과 연관해서 이 자리에서 미리 밝혀둘 것이 있는데, 그것은 추상 공간에서든 물리 공간에서든 둘 이상이 관계 맺으면 관계 속에 들어간 것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성격이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있는 것은 독립된 점(point)이 그렇듯이 관계 속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예 없는 것도 없기 때문에 관계 맺을 실마리조차 없습니다. 관계 속에서 한편으로는 저됨을 잃으면서 그 나름으로 저됨을 지켜 나갈 수 있는 것은 크기를 가진 것처럼 없다는 규정 아닌 규정을 받는 어떤 것, 곧 없는 것(존재화한 무)밖에 없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나는 논리 공간에서 동일률을 보장해주는 가장 기본이 되는 문장(명제)은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라고 발표했는데, 그 발표가 이루어진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이해한 사람이 없으리라는 느낌을 가졌습니다.”(227-228) [수리공간(절대공간)의 기본은 ”있는 것은 있다“는 존재 규정일 것이다. 그런데 논리 공간, 또는 언어논리(형식논리)에서는 최상위로 올라간 추상에서 없는 것을 전제로 상정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없는 것은 수학적 있는 것의 대립이 아니다. 수학적 없는 것(0, zero)은 있는 것의 다른 양태이다. 그 영이 없으면 하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독립된 점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있기 때문이다. 점은 있는 것이 아니라 있다는 양태의 첫 신호(signe)이다. 형식공간에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추상의 최고는 보편명사로서 존재가 아니다. 다른 어떤 것이다. 하나 존재조차 추상하지 못하라는 법이 없지 않는가? 그러면 없는 것은 모든 것을 추상한 것이다. 그것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무이다. 그래서 말놀이 하는 중동의 전설따라 삼천리는 무에서부터 유(존재)가 나온다는 뻥을 쳤다. 여기서 “개구즉착‘이다. 또한 유머의 시작이다. 이 유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자들이 아니러니에 빠지고, 무에서부터 어느 하나(가설, 원리)를 잡는 순간 아포리즘(난제)에 빠진다. 파르메니데스는 이 난제를 벗어나고자 무는 없는 것이라 그래서 존재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삼았다. 소크라테스의 난제는 둘을 같이 놓을 수 없다는 점에서, 제논의 귀류법은 하나를 여럿으로 만들려는 자들에게 파라독스에 빠진다는 것을 논제로 던졌다. (46RLA)
* 있는 것만 있는 게 아니고 없는 것도 있다. 229
학문 가운데 가장 엄밀한 학문이라는 수학을 예로 들어 봅시다. 수학에서 1이라는 숫자는 절대적입니다. 우리는 1과 0, 이 둘만 가지고도 수학에서 연산을 할 수 있지만 1이 빠지면 수학체계는 무너지고 맙니다. (229) [산술체계와 기하체계는 다른 것이다. 기하체계는 최소 단위가 점이다. 산술체계는 둘로서 성립한다. 기하체계는 자와 콤파스로 성립한다. 콤파스의 세계는 2분법이 아니다. ]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감각을 기준으로 삼을 때 ‘고유명사의 세계’입니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하나와 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세계에는 하나가 없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하나를 정할 수 있겠습니까? (250) [다 다른 것에서는 하나가 없다. 즉 다른 것들만이 있지 하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들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엉켜 있어서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 구별을 하는 기준이 하나이다. 그런데 하나가 없다. 질적 다양체가 생성의 기본작용(fondation)이다. / 기준이 없는 세계, 탈 코드의 세계(decodage), 즉 흐름과 생성의 세계이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어르렁거리는 세계이다. 이 두려움의 정서(une émotoin)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인류의 사유 역사이다. 여기에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이 있다. 이 두려움을 숙명 안고 사는 양식을 만들려고 노력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이고 이를 극단으로 밀고간 학파가 퀴니코스와 스토아학파이다. (46SKG)] ,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가장 크기가 작은 물질을 티끌(微塵, 미진)로 보았던 듯합니다. 부처님 말씀 가운데 ‘티끌 하나 속에 우주가 들어 있다’(一微塵中 含十方 일미진중 함시방)는 구절이 있습니다. 손톱만한 크기 운동에 책 몇백만권 분량이 되는 정보가 들어가는 기억소자(memory chip)가 곧 상품으로 나올 것이라 하니, 그런 뜻이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제 마음의 눈 앞에 홀연히 떠오르는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231) [구병형은 1962년 스무살에 여름 방학에 수덕사로 갔었다. 그러나 내려왔다. 그리고 1976년 서른 네 살 송광사에 행자로 들어갔을 때, 전국에 노승들이 탐을 냈다는 것은 전설처럼 회자되었다고 한다. / 다른 좌석에서 누군가가 그때 거기에 있었으면 불교가 바뀌었을 것인데 ..... (46RLB)]
‘하나인 있는 것과 아예 없는 것은 크기를 가지 여럿과 운동의 두 끝을 이루면서 시간과 공간의 규정을 받는 현상세계를 초월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들과 연관해 비유를 써서 하나[일자, 一者] 또는 하나님[유일신, 有一神)]이라든가,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남을 움직이는 것[kinoun akineton]이라든가, 큰 끝(太極, 태극)이라든가, 검고 또 검은 것(玄之又玄 현지우현)이라든가, 검은 어둠(黑暗 흑암)이라든가, 끝도 없음(無極 무극)이라든가 하는 여러 가지 말로 나타내려고 애쓰지만 그 둘[들의 오타]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 의식 속에 들어오지 않는다“(232)
감각에 주어진 것을 기초로 삼을 수 밖에 없는 모든 일반화는 추상의 모든 단계에서 우리 의식을 모순에 빠뜨립니다. 우리가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현상 세계만을 두고 말한다면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의 잣대’라고 한 프로타고라스의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233) [감각에 주어진 것, 이것은 의식에 주어진 것의 기본 자료(data)가 아닌가? 전부다가 아니라 현상일 뿐이다. 의식에 무매개적으로 주어진 것은 현존에서 현상이전의 것, 선험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기본 자료를 자료이게 하는 것이 먼저 있다. 신체이다. 신체라는 이미지는 이미지작용(l'imagenation)을 한다. 이 이미지는 감각자료보다 먼저 있다. 먼저 있다는 것은 과거로서 이미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감각은 타자와 관계에서 만들어 지는 것들이다. (46RLB) ]
지금부터 현상세계를 구제하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플로티누스의 전략을, 저 나름으로 엉성하게나마 재구성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34)
[아버지(1대) 아리씨- 조부(2대) 플씨 - 증조부(3대) 소씨 - 고조부(4대) 파씨와 제씨 - (현조부, 5대 고조부의 아버지)]
“자, 파르메니데스가 이야기한 하나로 있는 것은 우리가 사고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헤겔이 논리학에서 이야기한 대로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234) [대 논리학 (Wissenchaft der Logik, Grande Logique 1812-1816)]
[파씨의 하나가 문제이다. 다음 대인 소씨는 현상세계에서 하나를 찾으려 했다. 플씨는 현상세계의 소나무 하나, 사람 하나 등이 형상세계에 자리잡게 한다. 아리씨는 하나를 바꾸지 않는 신적인 것으로 삼았다. 그것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남을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놓았다. 아예 없는 것에 맞닿아 있는 것을 순수한 질료라 부른다. 아씨에게 있어서 있는 것, 하나, 형상, 현실태는 같은 울타리에서 사는 같은 식구이고, 없는 것, 여럿, 질료, 가능태는 다른 울타리에서 사는 다른 식구이다. 이 두 울타리에 사는 식구들이 저마다 짝을 지어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한몸, 하나와 여럿이 한몸, 형상과 질료가 한몸, 현실태와 가능태가 한 몸이 되어 산다. (235-236) [1은 스스로는 정지해 있으면서 운동의 원인(kinou akuneton, 부동의 원동자)으로 작용하지요. (257) ]
이 현상세계를 보는 관점은 둘이다. 없는 것, 여럿, 질료, 가능태 쪽으로 시선을 집중하면 감각과 연관된 고유명사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 하나, 형상, 현실태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이성과 연관된 일반명사의 세계가 열린다.(236-237)
저는 고조부 파르메니데스 옹으로부터 하나님[일자, 一者]이 있다는 것을 배웠고, 박수무당인 소크라테스 옹으로부터 이 거룩한 존재를 찾아가는 길을 배웠고, 할아버지인 플라톤 옹으로부터 이 하나님이 좋은 분이자 빈틈이 하나도 없는 꽉 찬 분으로서 이 세상 울타리 밖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옹으로부터는 이분이 이 세상 울타리 밖에 계시지만 이 세상이 좋은 세상이 되도록 끊임없이 이 세상을 위해서 여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238)
그림 18 동심원 [플로티누스 견해]
1 중심점 하나(있음, 있는 것, hen)
2 작은 원 생각(정신 nus)
3 좀 큰원 생명(영혼 psyche)
4 더 큰원 자연(생성, physis)
5 마지막 원 질료(없는 것= 비존재, hyle)
6 원 바깥 아예 없음 허무(ouk)
그림 19 동심원 [플라톤 견해]
1 중심점 없는 것(아예 없는 것은 아닌 것) (다른 것 heteron)
2 작은 원 흔적(ikne)만 있는 것 (없는 것= 비존재, hyle)
3 좀 큰원 몸(soma) (생성, physis)
4 더 큰원 생명(psyche) (영혼 psyche)
5 마지막 원 정신(nus) (정신 nus)
6 원 바깥 있는 것: 형상 제작자 idea (같은 것 tauton)
데미우르고스가 한편으로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제해서 생성(gignomenon)을 버무려 우주의 몸(soma)을 만들고, 몸 속에 생명(psyche)을 집어넣고, 그 다음에 정신(nus)을 집어넣어 이 우주를 살아있는 것, 이성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말이야.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 말에 따르면 이 우주 속에 있는 생명과 정신 작용의 근원은 데미우르고스가 아니겠느냐? (243)
제 아버지[아리씨]가 신을 생각의 생각이라고 규정하셨을 때, 앞 생각(noesis)과 뒷생각(noeseos)은 같은 것이겠습니니까, 다른 것이겠습니까? 저더러 말하라 하면 저는 다른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앞 생각과 뒷 생각 사이에는 틈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대체 이 틈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입니까? (249) [베르그송은 질료들이 늘여지고 압축되는 과정에서 ‘사이’가 있고 여기에 생명이 개입된다고 한다. 이것은 플로티누스의 견해에서 생명의 자발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46RLC)]
‘태초에 있는 것 밖에 없는 것도 있었다. / 없은 것은 하나인 있는 것을 둘러싸고 있었다.’ / ‘하나의 힘이 넘쳐흘러 없는 것을 밀어내고 둘레에 생각의 고리를 만들었는데 이 생각의 고리는 하나와 맞닿아 있어서 늘 하나를 지향한다. 이 하나이자 여럿인 생각의 고리에서 최초의 운동 가능성이 나타났다.’ (252)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태초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보았다. 파씨가 존재(하나)에서 출발하고, 중동의 전설따라 삼천리에서 요한은 태초에 말씀(logos, 논리의 하나)이 있었다고 했고, 그리고 파우스트는 운동이 있었다고 하고, 그리고 윤구병은 존재이외에 무도 있었다. 아마도 윤은 존재와 무(있는 것 과 없는 것)의 혼합이 현상세계라고 할 것 같다. / 나도 그렇다. 현상은 두 가지 다른 운동의 타협물(modus vivedi)이다. 하나가 될려는 힘과 하나가 빠질려는(빠진 것 steresis) 힘의 관계이다. 하나가 될려는 힘은 빠질려는 힘의 근원이 아니라 저됨을 만들려는 것이다. 그 저됨은 하나가 빠져도 저되지 않은 상태로도 있다. 그러나 저 됨의 모습은 매우 단편적이고 껍질 적인 것이다. 한 개인의 저됨의 과정을 보면 살아가는 동안에 내내 저 됨의 모습을 만들려고 했지만, 그냥 만들다가 어느날 딸끄닥 마치는 것이다. 그 마침이 저됨이라 해도 한 순간일 뿐이다. (46RLC)] /
책속으로: <우리가 나날의 삶에서, 또 그 삶을 반영하는 감각이나 사유 속에서 없는 것을 몰아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없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삶과 생각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추운데 난로에 온기가 없습니다. 있는 것 하나밖에 없으면 생각도 없습니다. 구체적인 생활에서나 감각에서나 생각에서나 어디에서나 드러나는 이 없음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비어 있음이라고요? 결핍이라고요? 이미 있었던 것의 사라짐이라고요? …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천하장사라 해도 이 세상에는 감각의 세계와 사유의 세계로부터 이 없음을 몰아낼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얼버무리지 말고 솔직히 인정합시다. - p.252> [감각의 현상에서 없음은 모자람 또는 여기 없음이라 할 수 있지만, 사유 속에서 없음의 정도가 있다? 사유의 추론상, 존재에서 순수없음은 없음으로서 없고(파르메니데스) 순수없음은 없음이란 기표 있거나(헤겔) 이며, 현존에서 없음을 말로 하는 것은 있었던 것의 없음(다른 있음)이거나 의식에서 찾지 못하고 있는 어떤 것(혼재된 것)이 아닌가? (46RMI)]
책속으로: <제가 이렇듯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간단히 줄이고 플로티노스의 이론을 저 나름으로 해석하여 장황하게 늘어놓는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닙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모자 속에 감추어 놓고 끝까지 보여 주려 들지 않았던 것의 실체가 플로티노스의 이론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 p.253>
[현상세계 구제의 전략에서, 플라톤은 산중의 선승의 입장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물건을 제작자로서 대승의 입장이다. 플로티누스는 세상을 구제하려는 걸승의 입장이다. 왜 걸승이냐고, 인격은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지, 생각이 만드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46RLC)]
책속으로: <‘없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은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나란히 놓고 판단할 때 한층 더 강화됩니다. 만일에 이 두 문장을 놓고 볼 때 그 가운데 어느 하나는 분명히 참인데 다른 하나는 거짓임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면 사태는 더 심각해집니다. 모순율이 깨지면서 동시에 배중률도 공리로서 구실을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 이 사태는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 논리학이 설 자리를 잃는 것으로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 논리학이 무너지면 파르메니데스가 주춧돌을 놓고 플라톤이 그 위에 기둥을 세운 그리스 존재론의 전통이 한꺼번에 와르르 주저앉을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 pp.254~255>
‘없는 것이(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은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나란히 놓고 판단할 때 한층 더 강화됩니다. 만일에 이 두 문장을 놓고 볼 때 그 가운데 어느 하나는 분명히 참인데 다른 하나는 거짓임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면 사태는 더 심각해집니다. 모순률이 깨지면서 동시에 배중률도 공리로서 구실을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255) [모순률은 파씨, 플씨, 아리씨의 이론을 있을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연속성을 사유했던 플로티누스에게는 모순이 아니라 함유(섞임)의 차이이다. 현존은 두 극한적 규정(0과 1)의 종합방식에서 차이들을 드러낸다. (43RLC)]
* 아페이론(apeiron):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 256-274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있는 것인데 잘 모르겠다는 것은 아직 규정할 방편(peras)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없는 것은 없다. 규정(원리, 법칙, 규준)이 없다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 있기는 한대 아직 모른 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규정이 전혀 없는 것이 무엇인가? 항상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의식은 흐름이다. 흐름, 운동은 아직 규정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있는 것이다. 의식만이 아니다 물질의 실재성도 흐름이고 운동이다. 그것은 규정되지 않았을 경우에라도 있는 것이다. 진동하고 변화하고 움직이는(주어 형용사 동사) 실재성이 있다(46RLC)]
257-11의 문제, “일자(一者)”라고도 하고 하나님이라고도 하는 이 문제를 아주 말끔하게 처리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하지요. 기독교의 하나님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 작품이에요. (257)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 안에 이데아들을 끌어들입니다. 순수형상이라는 에이도스는 1입니다. 1은 정지해 있으면서 운동의 원인(kinoun akineton)으로 작용하지요.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신입니다. ‘하나’님입니다. (교부철학은 플로티노스를 거쳐서 변형된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을 신학의 근거로 삼아요.) .. 0은 순수질료라고 규정하지요. 0과 1에 끌려서 상향운동을 해요. 무론 0도 1과 마찬가지로 부동의 원동자(kinoun akineton)예요. 나중에 헤겔이 순수 유(reine Sein)와 순수 무(reine Nichts)는 같은 거다. 그걸로 운동 설명 못한다. 자인(Sein)을 있음으로, 니히츠(Nichts)를 없음으로 보지말고, 자인은 임이고 니히츠를 아님이라는 측면에서 보자. 그러면 긍정, 부정, 부정의 부정이라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운동을 설명해 낼 수 있다. (257-258)
반면에 맑스는 이거 아니라고, 물질이 의식을 결정한다고, 형이상학을 때려치우라고 하면서 헤겔을 뒤집지만, 결국은 헤겔 아류이자 속류 헤겔론자로 볼 수 있어요. (258) 베르그송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이론을 비판하는데는 까닭이 있어요. 제마음대로 재구성한 베르그송의 생각을 잠깐 들어보지요. / “흐르는 물을 물방울로 해체시키나고 해서 어는 순간 그 물이 멈추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라. 지속(durée)과 계기(sucession)는 다르다. 계기는 문자 판에 고정시킨 시간이고, 공간화된 시간이고, 사람의 의식이 인위적으록 금을 그어 놓은 페라스일 뿐이다. 지속은, 순간 순간 아페이론을 그 안에 안고 있는 페라스를 넘는 도약이다. 제논이 아무리 ‘날으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 ‘한시간은 반시간이고 두시간이다’ ‘바보같은 짓 걷어치우고 파르메니데스로 돌아가자’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현상계를 구제할 수 없다고 해서 플라톤이 나섰다. 플라톤이 이데아와 데미우르고스의 역할을 갈라놓았는데, 그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데미우르고스를 1로 놓고 모든 운동을 그 정지 모델로 공간화했는데 그거 문제 있다. 나 베르그송은 그거 뛰어넘겠다. 생명이라는 게 운동인데, 그 운동 멈추면 죽는데, 우주 전체가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운동해야 하는데.. 살아남으려는 이 몸부림을 뛰어넘기로 보자. 그게 삶의 도약(élan vital)이고 궁극으로는 사랑의 도약(élan d'amour)이다. (259-260) [윤구병도 박홍규처럼 한 가지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있다. 1과 0에서 0은 없는 것 또는 아님이라는 전제이다. 내가 보기에, 베르그송은 운동만 있다. 운동하는 질료만있다. 그리고 그다음 움직이지 않은 무와 같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베르그송은 1이 거의 희박한 것으로 무와 같은 것이지만 거의 움직이지 않은 그대로 있는 것이고 0은 있음 즉 무한정임이다. 0은 무도 아니다. 윤구병이 나에게 한 질문에서 0가 절대온도 상황일 경우라면, 그것은 움직임없은 무가 아니냐고 한 것인데, 절대온도의 무가 완전자들의 움직이 아닌 1이고 가정상이지만 블랙홀과 같은 모든 것을 녹이는 지점이 0로서 불덩이이외 아무것도 아닌 것이 가정될 수있다. 즉 1의 완전은 희박화의 끝으로 얼어붙은 세계인데 비해 0에는 불덩이 세계라 해야 할 것이다. / 질료의 성질에서 느슨해짐(이완)과 당김(긴장)이 있다. 생명은 긴장이고 물체는 이완이다. 이질적이라도 당김에는 부서질수 없음(분할 할 수 없음)이며, 동질적이라도 이완은 부서질 수 있음(분할할 수 있음)이다. 그래서 생명과 의식은 긴장이며 물체는 분할가능하다. 이 두 상반되는 운동을 하나는 하향 다른 하나는 상향이라 부르며, 생명있는 존재는 이것을 현실적으로 작용(l'acte)하게한다. / 또하나 윤구병은 두점 사이에 극한을 페라스라 보았는데, 나로서는 점과 원주 사이에 페라스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심에 있는 0도(점도 아닌 것이 점이기도 하고) 단위이며, 원주도 하나 단위, 즉 1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과학은 1에서 출발하는데 비해, 벩송은 0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0이 무규정자이고 1은 여러 원들의 중첩으로 다수의 규정자가 된다. 그 다수는 딱 하나의 원리 파이라는 규정이다. 어느 원도 파이라는 규정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게 플라톤의 다자의 공존이다. 이 공존 세계는 자연히 위계질서 일 수 밖에 없다. / 벩송은 0에서 빗살처럼 퍼져나가는 다양한 계열의 공존이다. 어떤 원주까지 나가든 그 나가는 방향이 생명체에 따라 다 다르다. 그 다양성은 이질성의 다양성이다. 퍼져 나가는 것 만큼 그 존재자(각 생명체, 각 종)은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 이것은 그의 진화론과 맞닿아 있다. (46RMA)]
물론 베르그송은 2원론자 이기 때문에 질료의 측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힐레(hyle)를 무시하지 않아요. 늘 두 개를 나란히 놓아요. “물질과 기억”에서처럼 1과 0을 나란히 놓아요. 0의 해체 기능을 잘 알고 있어요. 아마 베르그송 철학의 밑바닥에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상상력이 깔려 있을지 몰라요. (260) [내가 벩송을 일원론자로 하는 것은 0이 자기 변화를 계속하는 것이고 아직 1을 만들어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질료0이라는 운동이 완전자1(부동의 영원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못 만들면 0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 0에 자연을 대입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 플라톤에서 부동의 영원성은 천문학의 별들의 영원성 그리고 그 원운동처럼 다시 돌아오고 또 예견가능한 것이다. 이에 비해 생명은 예견불가능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 그럼에도 벩송의 낙관은 내적 지속이란 개념으로 생명(의식, 기억)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서 지속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원할지 안할지도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긴 시간의 과정을 보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지속이 만든 것이 다음에 만드는 것과 동일성이 없다는 것은 진화론에서 알 수 있듯이 다음에 만드는 것은 알 수 없지만 그대로 지금과 다른 것을 만들 것이다. 이 달리 만드는 노력이 엘랑비딸이다. / 이것을 사회에 적용하면 새로운 공동체이다. (46RMA)] [나로서는 심층형이상학적으로 일원론이다. (46NNA) ] /
박홍규 선생님한테 들은 말인데, 한때 교황청에서 베르그송철학으로 신학이론을 바꿔치기 했다고 해요 (261) [이것은 오해일 것이다. 교황청 대사를 지낸 쟈끄 마리땅 같은 제자가 얼마나 베르그송을 비판했던가. (46NNA)]
아페이론을 다룰 때 빼놓을 수 없는 주제 하나는 우연과 필연, 거기에서 파생되는 자유의지 문제예요. ... [원자론자의 경우에] 원자들의 결합을 설명하기 위해서 끌어들인 게 원자의 경사운동[klinamen]인데, 이거 느닷없는 때에 느닷없는 곳에서 우연히 일어난다고 하는거예요. (261) [경사운동, 또는 우발이 자유의 기원이라고 보는 것은 약간 문제가 있다. 필연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46RMA)]
맑스는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2원론자예요. 그런 점에서 베르그송보다 앞서요. 의식과 물질 다 인정해요. 다만 물질에 있는 힘을 더 크게 보아요. (271)
있음이 파이(π)라면, 무한소수의 바깥 테두리라면, 없음은 보이지 않는 점입니다. 소수(prime number)는 1과0 사이에 무한히 흩어져 있습니다. ..) (272) [원주의 종류가 많은 것 만큼이나 페라스가 많다고 했으면 훨씬 좋았을 것인데, (46RMA)]
3부 ‘함’과 ‘됨’ 275
* ‘함’과 ‘됨’: ‘능동’과 ‘수동’의 힘 277 [A원] [B원]
“그것이 바로 둘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특성이자 하나와 다른 점이지요. 모든 하나는 어떤 하나이든 크기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간의 규정을 벗어납니다.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형상(idea)의 세계에는 모든 형상이 하나 하나 다 고립되어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에 공간이 없습니다. ... 그러나 어찌어찌해서 어떤 하나[A원]가 다른 하나[B원]와 관계를 맺어 둘을 이루면, 이 둘 사이에는 이 하나도 아니고 저 하나도 아닌 것[접점]이 나타나는데, 점의 형상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듯이 두 개의 하나가[[A원과 B원의 만나는 접점 하나가]] 저마다[두개의 원에서 보면 저마다] 크기가 없는 것, 끝, 한계이므로 이 하나도 저 하나도 아닌 것[접점]은 크기가 없는 것이 아닌 것, 끝이 아닌 것,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둘이 없으면[이 접점을 통해 둘을 갈라놓지 않으면] 크기도 없고 공간도 없습니다. 둘은 이 하나와 저 하나의 만남의 다른 이름[우연]이고, ‘실체’의 이름이 아니라 관계의 이름입니다. 여럿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279-280) [벩송이(DI, 제2장)은 모든 수는 하나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자연도 하나다 그 하나는 수와 다른 하나다. (EC). 나로서 의식, 욕망도, 삶도 하나다라고 할 때 하나는 자연의 하나이다. 이는 지속의 하나이지 공간의 하나가 아니다. 사람들은 시간의 하나를 공간의 하나와 구별하기 위해 시간의 하나는 아페이론이라고 하고 공간의 하나는 페라스라 하는 것이다 (46RMG)]
“그런데 위에서 우리는 ‘점은 끝(한계, peras)이 하나인 어떤 것을 말한다, 그리고 끝에는 크기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하나는 어떤 하나든 크기가 없고 따라서 운동하지 않는다(정지해 있다’는 말도 했지요” / “예, 파르메니데스가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고 봅니다. (282)
“먼저 원둘레의 모든 점은 한정된 것(peprasmenon)이므로 이 한정된 것의 집합도 역시 한정된 어떤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원주율을 측정하려는 현대 수학은 아직까지도 한정된 측정치를 내놓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반복되는 수의 계열조차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주율에는 한정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283)
“앞에서도 잠깐 비쳤지만 그걸 이른바 둘이 가지는 모순, 둘에서 생기는 원시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선 모순의 측면을 적극적인 것으로 원시 우연의 측면을 소극적인 것으로 나누어 놓고 생각해 봅시다 ..” (284) [모순은 있다와 없다이고, 원시우연은 이 항이 만나면서 생기는 것이다. 사실 1와0 사이에서 소수들은 원시우연들의 총집합인 셈이다. 이 소수들의 무한이 자연수의 무한 보다 크다는 것이다. / 1과 0사이 소수로 된 세계는 원주의 점들의 총합(무한이지만 유한한 집합이다)과 또다른 무한이다. 즉 파이집합과 0과 1 사이 소수의 집합은 각각 다른 무한이라고 한다. 초월수이다. / 그럼에도 사유 속에 있는 것이지 사유밖에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라면 무어라고 해야 할까? / 무한의 다양성을 사유하는 것이 정신이고 영혼은 구체성으로서 무한을 내재화 현실화(l'scte)가 아닐까? 즉 자아는 초월수의 무한을 내재화하고 있다. 그것이 시간(지속)이다. / 그러면 세상이 영하 272도, 절대온도로 얼어붙는다면, 구체성으로서 무한의 정지 즉 시간의 정지이다. 시간의 정지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은 논리상 공간만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런 운동없는 우주는 없다가 답일 것이다. 정신의 착각이라 해야 할까? (46RMG)]
책속으로: <나 윤구병은 윤구병으로서는 있는 것이지만 나 밖의 다른 모든 사람으로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윤구병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그물코에 얽혀 있는 관계의 산물이라는 뜻이지요. 다른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p.286>
불교 경전의 하나인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불교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든 것이 모든 것과 관계를 맺어 순간순간 바뀌는 이 연기(緣起)의 세계에서 ‘늘 머무는 것’(상주 常住)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덧없이(무상 無常) 생겨났다가 없어졌다(생멸 生滅)하겠지요. (290)
책속으로: <제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음울하고 불길한 경고의 소리가 울려 왔습니다. / ‘너는 지금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려 하고 있다. 사유와 추론이 이루어지는 의식 공간에 한 발짝만 들어서도 의식의 칼날 아래 토막 나고 산산이 저며져서 형체조차 찾을 길 없는 것을 제물로 삼아 네 이론을 정당화하려고 하고 있다니, 바로 이런 오만을 경계하여 옛날 불가에서 한 말이 있지 않더냐. 개구즉착(開口卽錯). 입만 벙긋해도 틀린다. 차라리 입을 다물려무나.’ - p. 296>
“자 지금 우리는 시간 축 속에서 토막 난 운동의 시체들을 보고 있습니다. 이 여섯토막 난 시체, 그야말로 육시처참한 시체의 부위들을 하나하나 들어 볼까요? 이것은 있었던 것, 이것은 그 짝이 되는 없었던 것, 또 이놈은 있는 것, 그 짝인 이놈은 없는 것, 그리고 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뭉개져 버린 것은 있을 것, 이 흉측하게 생긴 놈은 없을 것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한배에서 태어난 놈들인데, 그리고 본디 하나였던 몸인데, 이렇게 의식이라는 백정이 토막을 내 놓으니까 저마다 다른 놈인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297) [어제, 이제, 아제, 각각에는 모순이 함께 있다. 게다가 연속적 세 과정도 나누어져 있다. / 모순을 나누는 도구와 세 과정을 나누는 도구는 마찬가지로 점(한계, 끝)일까? (46RMG)]
실체화의 오류 (290, 298)
한걸음 더 나아가 이야기하자면, 있음과 없음도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있는 것은 이 둘의 관계이고, 우리의 의식이 분석 최종 단계에서 이 두 항을 실체화하는데, 여기에 따르는 위험이 너무 커서 서구 존재론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함정에서 벗어난 철학자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겁니다. 그러니 어찌 나라고 해서 이 함정에서 쉽사리 비켜서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어요? (298-299)
책속으로: <있음과 없음도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있는 것은 이 둘의 관계이고, 우리의 의식이 분석 최종 단계에서 이 두 항을 실체화하는데, 여기에 따르는 위험이 너무 커서 서구 존재론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함정에서 벗어난 철학자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겁니다. 그러니 어찌 나라고 해서 이 함정에서 쉽사리 비켜서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어요? - pp. 298~299>
과거[기억 의식]는 추억과 반성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되어 어쩔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로 스스로 움직여서 현재와 미래의 모습까지도 바꾸어 낼 힘을 지닌 살아 생동하는 그 무엇입니다. .. 과거는 있음과 없음이라고 실체화되어 고정된 그 어느 것도 아니라 그 나름으로 현실을 구성하는 함과 됨의 영역입니다. (299) [과거를 실체화하는 것이 추억과 반성의 영역이다. 실체화는 꼬리부치기이다. 기억은 역동적이며 실재하는 유동성으로, 과거 전체를 달고 현재에 와있고 미래로 나가는 힘이며 동시에 현재의 움직임으로 되어 있다. 자아이다. (46RMG)]
죽어 없어진 저 하늘의 별은 몇억 광년을 가로질러 이 하늘에서 저렇게 찬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그럴 것입니다. 땅속에서 뿜어 나온 과거의 불[마그마, 용암]은 현재 저렇게 큰 바위로 웅크리고 앉아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언젠가 부스러져 바닷속으로 흘러가서 밑에 깔렸다가 압력이 점점 커지면 다시 한번 불길로 뿜어 오를지도 모릅니다. (300) [들뢰즈가 저 밑바닥에 눌려서 으르렁거리는 욕망은 언젠가는 솟아오를 것이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46RMG)
* 가치판단이 사실판단에 앞선다. 301
‘있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는 없는 것이 있어서 이 있는 것과 저 있는 것을 갈라 놓는데, 없는 것을 있다고 하면 논리에 모순이 생기므로 없는 것은 없다고 하고 논의를 진행시키자’고 강변하는 것입니다. / 이 야바위 노름이 서양철학과 과학에서 어찌나 오랫동안 사람들을 세뇌시켜 왔던지, 지금 철학자와 과학자들 대부분이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못하거나 이 엉터리 없는 일면적인 의식의 법칙을 자연의 불변하는 법칙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306)
이미 없는 것 관점 12개 (307-308)
지금 있는 것 관점 12개 (310-311)
아직 없는 것 관점 12개 (313-314) [36계의 양태가 있다. 3의 배수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천문의 수이다. (46RMI)]
이 판단들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우리가 앞으로 다루게 될 의식에 주어진 것과 감각에 주어진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직관에 주어진 것까지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요긴한 길잡이가 되리라 여기고, ... (317)
우리가 지속과 변화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현상계의 법칙과 의식의 법칙을 문제삼는 것은 그러한 문제들이 모두 살기 좋은 세상 만들기와 잇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317)
책속으로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사회는 그대로 온전히 지속되어야 합니다. … 있을 것이 많이 있고 없을 것이 많이 없는 사회는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지속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지속이 주요 변수라면 변화는 종속변수가 됩니다.) … 그러나 있을 것이 없고 없을 것만 있는 사회는 전체가 변화해야 합니다. … 없을 것이 많이 있고, 있을 것이 많이 없는 사회는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변화에 더 힘써야 합니다.(변화가 주요 변수가 되고 지속은 종속 변수가 됩니다. - p.319~320> [‘없을 것이 없는’는 사회적 관심이고, ‘없는 것이 없는’ 사물에 대한 관심이며, ‘있을 것이 없는’에서 ‘없는’은 여기(아직) 없는 자아의 관ㅅ미이다. ‘없는’이 각각 다른 영역으로 드러나는 것은 말이 개념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말이 갖는 영역 또는 위상이 이미 말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6NNA)]
“우리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 있을 것이 무엇이고, 없을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 있으면 얼마나 있고, 없으면 얼마나 없느냐를 꼼꼼히 살피지 않고 보수주의가 좋으니 진보주의가 좋으니, 수구니, 개량이니, 혁신이니, 혁명이니 하고 말로만 내세우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지요.” (320쪽)
변화의 필요는 있을 것이 없고(거나) 없을 것이 있는 상황에서 생겨납니다. 더 이야기를 지행하기 전에 왜 때매김이 미래로 되어 있는 있을 것이라는(또 없을 것이라는) 말이 있어야 할 것(없어야 할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지 간단하게나마 밝혀 놓는 게 좋을 듯하군요, 지금 있는 것, 곧 현재는 그 자체만으로 볼 때는 텅 비어 있습니다. 지금 있는 것은 하나의 특성을 지니고 있고 이 하나는 모든 관계에서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크기가 없는 것, 따라서 지속[계속]도 변화도 보장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322-323) [지속이 맞고, 계속이 아니다]
이런 말을 하면 지나치다고 나무랄지 모르지만 사실 판단이 가치판단에 앞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모두 하나님이나 부처님 경지에 있거나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멍청이들이에요. (325) [사실판단으로 중립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과거에서 추억들을 비교해 보아도 그런 것은 없다... 현재를 실행할 미래에는 더군다나 없다. 행동하려고 하면 이미 선택지는 중립이 아니다. (46RMH)]
어느 시대에 누가 맨 먼저 그 말을 썼는지 모르겠으되,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울리더군요. (326)
* ‘함’과 ‘됨’의 차이: 운동의 두 가지 형태 327-332
우리말: ‘뭐 하지?’ / 독일어: Was tun?(바스 툰?) / 불어: Que faire?(끄 페르?) / 영어: What do?(왓 두?) (327)
함과 됨은 둘 다 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 우리는 어떤 때 ‘한다’하고 어떤 때 ‘된다’고 하지요? 함과 됨이 운동의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라는 것은 분명하죠. (328)
아리스토텔레스 질의 물리학인데... ‘현상계를 이루는 중요한 것들에는 저마다 제자리가 있다. 불은 위로 올라가는 상승운동을 하고, 돌[물]이나 흙은 밑으로 떨어지는 하강운동을 한다. 그 이유는 그 운동체의 본성상 그렇게 되어 있다.’고 ‘질’을 중심으로 설명 합니다. 그런데 갈릴레오가 실험한 뒤로 그게 다 사라져 버립니다. / 말하자면 등질적 운동이 나타나면서 이른바 고전물리학이 자리 잡게 됩니다. 뉴턴(Newton)이 앞장섰고, 라플라스(Laplace)가 철학이론으로 뒷받침하죠. (329)
* ‘함과 됨’: 운동의 난제 333-337
서양에서 히스토리(history)라는 말의 어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이 말은 그리스어로 히스토르(histor)라는 말에서 온 것인데 히스토르라는 말은 증인이라는 뜻입니다. (333)
화학에서 난제는 ‘불“ ... / 생물학에서 난제는 자연발생설 .. / 물리학에서 가장 큰 난제는 운동... (333-334)
에너지 보존의 법칙 ..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없는 것에서 무언가 새로 생겨나지도 않고, 있는 것이 없어지지도 않는다’ 이거죠? 안그렇습니까? 어떤 면에서 동어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335)
열열학 제2법칙은 뭡니까?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 무질서해진다는 것은 무규정성이 늘어난다는 거고, 그리스 사람들 이야기로 따르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늘어난다’ ‘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것이 늘어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 늘어난다’ 하는 거고 (335)
시골 사람들은 손이 닮아가는데, 도시 사람들은 생각이 닮아 갑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생각을 통일 시키려고 듭니까? 왜 모두 이렇게 단순한 걸로 환원시키려고 들까요? (337) * ‘함과 됨’: ‘있음과 없음’의 연관성 338-355
아토마(atoma) .. 템네인(temnein)이라는 그리스가 있는 그것은 가른다, 쪼갠다는 말입니다. (338)
우리가 대상이라고 부를 때, 프랑스어로 옵제(objet), 영어로 오브젝트(object), 독일어로 게겐슈탄트(Gegenstand)라고 그러는데, 옵제, 오브젝트라는 말은 ‘옵’(ob) ‘이케레’(icere)라는 라틴어에서 왔습니다. ‘가로막고 있다’는 뜻입니다. ‘게겐슈탄트’라는 독일 말은 라틴어 어원인 불어와 영어의 독일식 직역입니다. ‘맞서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339)
모든 물질은 저항하는 임계점이 있습니다. (340)
가르고 쪼갠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안에 숨어 있는 새로운 겉을 드러낸다는 것이지요? 자꾸 쪼개서 표면적을 늘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삼차원의 세계를 전부 환원할 수 있다면, 모든 결이 자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내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40-341)
원자론자들이 열린 우주, 개방된 공간을 그렸다면 플라톤은 닫힌 우주, 폐쇄된 공간을 그립니다. 이것이 현대물리학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바뀌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두 가지 거대이론(Grand Theory)입니다. .. / ..후자에는 유클리드 기하학, 전자에는 로바쳅스키와 리만의 경우이다. (341)
‘있음과 없음이 접촉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다. 있음과 없음이 접촉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 그래서 원자론이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왜 있음과 없음이, 원자와 공간이 우주를 설명하는 기본 개념으로 설정되느냐, 동시에 공존하게 되느냐 물었을 때, 그 대답은 우연이다, 필연이다. 어쩔 수 없다, 설명할 수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헛돌고 말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344) [윤은 우연이라 하고 필연이라고 동격으로 놓았다. 무규정성은 현실에서 필연이다. 존재와 연관에서 우연이지만, 존재자에게는 필연성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46RMH)]
그런데 이 접촉이란 게 묘한 겁니다. 접촉은 대단히 특이해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붙은 것도 아닌, 이중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이 접촉의 성격이 뭐냐면 바로 무규정성[무한성, apeiron]입니다. (345)
공간 됨, 수동성... 원자 함 능동성... 있는 것(원자)의 능동성 없는 것(공간)의 수동성 ... (346)
원자는 수에서 무한하고 우주공간은 외연에서 무한하니까, 우주는 무한 우주가 됩니다. 이와는 달리 플라톤은 폐쇄된 우주를 상정하죠. 플라톤 뒤로 로바체프스키가 됐든, 리만이 됐든, 아인슈타인이 됐든, 현대물리학자나 기하학자들은 거의 모두 하나로 되어 있는 폐쇄된 우주를 상정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이론이 다 깨져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347)
접촉면을 매개하고 있는 ‘점’이라는 것은 빨간 당구알에도 속해 있지 않고, 하얀 당구알에도 속해 있지 않고, 늘 왔다갔다 요동치고 진동한다(vibration)고 했습니다. 이 바이브레이션(vibration)이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베르그송한테도 중요한 개념이고 들뢰즈도 마찬가지입니다. (351)
플라톤에게는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가 셋입니다. 데미우르고스(demiourgos)라고 하는 우주을 빚어내는 신 .. 이데아(idea), 형상이라는 ... 그 다음은 기그노메논(gignomenon)입니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힐레(hyle) 질료라고 그럽니다만. 이 기그노메논이라는 말은 된다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재해석하면 데미우르고스는 순수형상,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게 하는 것(kinoun akineton], 원동자, 이렇게 재정리 됩니다. 힐레는 그리스에서 목재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351)
이렇게 물으면 지렁이나 풀잎의 입에서는 어떤 말이 나올까요? (355) [입이 없지만, 머리로 사냐 몸으로 살지라고 할 것 같은 데요... 즉 사는 것이 먼저요 철학하는 것은 다음이라고... (46RMH)]
* 인간의 행동 양태와 습관 356-362
[행동양태=행실, 도덕적 관심으로 행동양태=품행.]
이렇게 새로운 사태에 직면해 있을 때만 주의(attention)가 집중됩니다. 우리 몸 동작을 어떻게 해야 이 새로운 상황에 제대로 대처해 나갈 수 있을지 숙고를 하게 되고, 그 때문에 그때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자기 내면에서 솟아오르게 됩니다. (357)
앞에서 이야기 했던 대로 농경사회에서는 어른들이 자연과 맺은 관계 속에서 경험을 얻고 그것은 내면화해서 하나의 관습으로, 윤리관이나 가치관, 도덕률로 굳히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유목사회에서도 그 위험은 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도시사회는 어떻게 보면 흡혈귀들이 대낮에도 설치는 식인 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델리카트슨 사람들>이라는 영화를 본적 있습니까? (359)
제가 아프카니스탄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삼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고 어디에 썼는데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 삼차세계대전은 진행중입니다. 여러분도 믿지 않죠? 제일차 세계대전과 제이차세계대전이 국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식민지를 빼앗으려고 싸운 전쟁이라는 고정관념이 그대로 우리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에, 삼차 세계대전도 국가들 사이에 땅뺏기로 나타날 것이라고 하겠지만 이제는 성격이 달라졌습니다. 더블유티오(WTO) 체제도 세계대전의 한 형태인데, 완성된 금융 독점 자본에게 국경은 의미가 없습니다. 미국은 아직까지 오사마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들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전쟁 책임을 돌리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 제가 보기에 제삼차 대전 형태는 내란입니다. 저는 전쟁이 내란 형태로 전개되는 것이 인류를 위해서 큰 다행이라고 봅니다. (361)
[* 농경이 면의 전쟁이면, 유목은 선의 전쟁이리라, 도시에는 전선이 없는 내전이라... 정글의 내전은 생태전쟁인데, 도시의 내전은 기계전쟁이라... 기계의 전쟁에서 살아가는 것에는 “있어야 할 것”(능동)에 성찰해야지 “없어야 할 것”(수동)에 관계하는 순간 잘못(faute, 착오)의 상황에 빠진다. 그 순간에서부터 그것을, 즉 ‘있는 것 중에서 없어야 할 것’을 관계를 맺지 않으면 빠지게 되는데, 관계를 맺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은 도시이다. 도시 말고도, 아니 그것과 관계 맺지 않는 다른 삶도 있다 - 뻬르베르이다. 그런데 관계를 맺으면서 고친다고 하는(변형과 변신론자)들이 있다 - 파라노이아이다. 이에 비해 관계 속에서 차이를 드러내는 별난 일을 해보고자 하는 특이자(예술가)들이 있다 - 스키조이다. 스키조가 삶의 터전이 필요한데 그 터전이 땅이지, 도시라는 건물과 기계들과의 관계가 아니다. 다. (46RMI)]
세계 제이차대전이 벌어지게 될 때 사해동포주의를 부르짖고 국제 연대를 주장했던 사람들이 결국엔 애국심에 불타서 동료들 가슴에다 총을 겨누었죠. 이제는 적어도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국내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를 노예화시키고 착취해야 살 수 있는 계급이 누구고, 자기가 연대해야 할 계급이 누구냐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전선을 넓혀 갈 수 있습니다. / 그 모범을 9.11테러가 보여줬는데도 이 사람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맞장을 뜨자고 하는데, 그건 뻔하죠. 석유 욕심 때문에 그러는 거죠. 제가 이런 말을 하면 곧 잡혀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쨌든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361-362) [윤구병의 의식 속에도 ‘곧 잡혀갈 것 같다’는 것이 들어 있나 봅니다. 나는 형님의 활동에서 이런 의식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다치지 않게.. 라는 의식과 함께.. (46RMI)]
* 상황에 따른 인간의 의식과 행동변화 363-366
비판은 쉽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때려 부수는 일은 삽시간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안을 제시하는 것, 이렇게 때려 부수고 나서 여기다 무엇을 쌓아올릴 것이냐를 의논하고 실행을 옮기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 아주 애 터지고 지루하고 힘든 건설과정이 요구됩니다. (363)
지난 수십만년 동안 인류는 생명에너지와 생체에너지로 살아가는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200년이 지나지 않은 짧은 기간에 인류는 삶의 양식이 급격히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물질 에너지에 기대지 않으면 너도나도 살길이 없는 세상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366)
* 삶과 생명체 367-370
책속으로: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미래가 없는 도시 문명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대로, 그야말로 되는 대로, ‘될 대로 되라’고 살아갈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지속 가능한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제부터라도 떨쳐 일어서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냐 입니다. - p.367>
도시에서 봉기한 혁명이 성공한 예는 역사상 한 번도 없습니다. ... 지금까지 인류 혁명의 거점은 늘 농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산과 혁명의 거점이었던 농촌이 다 무너져 버리고 있습니다. (367)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생산력이라는 건 없어요. 그것은 신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맑스 시대가 낳은 신화죠. 씨를 하나 뿌리면 수천수만 알을 얻을 수 있는 유기물 세계에서도 무한이라는 건 없어요. .. 곡식은 2년만 묵혀 버려도 발아율이 현저히 떨어져서 곡식 구실을 거의 못합니다. 유기물은 오래두면 썩어버리니까 싫든 좋든 나눠야 해요. (369)
그런데 ‘생산력의 무한한 발전’과 ‘생산물의 무한한 축적’에는 썩는다는 개념이 없어요. 무한 축적이 가능한 것도 무기물 밖에 없는데 그것은 전부 부동이나 동산으로, 화폐나 유가증권 같은 것으로 되면서 종이 쪽지 하나에 수억, 수십억까지 자산 축적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어요. (369)
* 주체성과 자율성 371
자유에는 여러 결이 있습니다. (371)
스탠포드 엑스페리먼트(Stanford Experiment)(327-328)
측정가능한 것, 수치화된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도시사회에서 삶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도시사회에서는 저마다 살아가는 삶을 인간끼리 통제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통제하는 세계에서는 맨 밑바닥에서 맨 위까지 위계질서가 반드시 성립해야 합니다. (375)
그리스 사람들이 가장 경계했던 말이 히브리스(hybris), 오만이란 뜻입니다. ..시, 분, 초 단위로 끊어 낸 인간의 시간, 공간화된 시간은 인간의 오만이 극대화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75)
우리는 생명의 시간을 인공의 시간으로 바꿔치기하려는 모든 통제에 대해서 의심하는 눈길을 거두지 말아야 합니다. /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 말고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물읍시다. (377; 마지막 두 문장)
* 추천의 글: 있을 건 있고 없을 건 없는 사회를 향해 - 이정우 379
저자는 ‘파르메니데스 극복’이라는 그리스철학의 큰 문제에서 실마리를 잡아 헤겔, 마르크스, 베르그송 같은 현대 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서구 존재론사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논의 말미에 다시 구체적 삶의 맥락으로 돌아와 ‘좋은 세상’에 대한 실천의 가닥을 잡고 있습니다. ... 본 저작은 소피스트에서 볼 수 있는 사유의 왕복운동 - 아나바시스(상승운동)과 카타바시스(하강운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이러한 사유 방식은 곧 소은 박홍규 선생의 가르침이기도 하며, 이 점에서 이 글은 ‘소은철학’이라는 20세기 한국 철학의 위대한 수확이 ‘윤구병 철학’이라는 21세기의 새로운 수확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379-380).
* 윤구병이 걸어온 길 382-393
[본인 쓴 것이라 하지 않았고, 보리 출판사 편집부가 정리했다고 한다.]
1943 2 24 전남 함평 밤골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950년(여덟 살) 청파 초등학교 2학년 다닐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서울역 인민위원장을 하던 큰형은 9.28수복때 북으로 가다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둘째형, 셋째형도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죽었다.
1960년(열 여덟 살)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을 읽고 나서 자살하고 싶은 열망을 접었다.
1961년(열 아홉 살) 방학때 무전여행을 했다.
1962년(스무 살) 2학년 여름 방학대 출가할까 싶어 수덕사에 머물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64년(스물두 살) <대학신문>(1964년 1월 1일)에 <오뚜기>가 소설부문 당선작으로 뽑혔다. 그러나 그 뒤 황석영이 쓴 소설 <객지>를 보고 나서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꿈을 접었다.
1965년(스물세 살) 윤구병보다 여섯 살 위였던 일곱째 형이 자살했다.
1973년(서른한 살) 4월 28일 김미혜(스물다섯 살)와 혼인했다.
1976년(서른네 살) 둘째 아이를 가진 아내를 놔두고 송광사에서 잠깐동안 행자 생활을 했다.
1981년(서른아홉 살) 3월에 충북대 철학과 교수 공채 시험을 봐서 합격했다.
1982년(마흔 살) 지도교수였던 박홍규 선생의 만류로 교수직을 그만두지 못했다.
1983년(마흔한 살) 이오덕 선생님의 권유로 대학 선생으로는 처음으로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회원이 되었다.
1988년(마흔다섯 살) 어린이에게 줄 좋은 책을 출판하려고 ‘보리기획’을 만들었다.
1989년(마흔일곱 살) 진보적인 소장철학자들과 함께 “한국철학사상연구회”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공동대표를 맡았고, 나중에는 이사장을 맡게 되었다.
1995년(쉰세 살) 서울대 교환교수 .. 강의 하나만 맡은 덕분에 태안반도와 변산반도를 둘러보면서 산살림, 갯살림, 들살림이 두루 가능한 자리를 알아 볼 수 있었다.
1996년(쉰네 살) 충북대학교 교수를 그만두고 완전한 농사꾼으로 살기 시작했다.
2003년(예순한 살) 책 <있음과 없음>(보리출판사)을 펴냈다. 회갑기념으로 보리출판사에서 이 책을 냈는데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노발대발했다.
2007년(예순다섯 살) 재단법인 ‘민족의학연구원’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2008년(예순여섯 살) 기획과 감수를 맡아 7년 넘게 공을 들인 <보리국어사전>(보리출판사)이 출간됐다. / 변산공동체학교를 비롯한 많은 일들을 다른 이에게 넘기고 자연인 윤구병으로 돌아가 외딴섬에서 홀로 지냈다.
2009년(예순일곱 살) 억지 춘향으로 등 떠밀려 보리출판사 대표 살림꾼이 되었다.
2013년(일흔한 살) 아직도 안 죽었다. 징그럽다. 하지만 살아온 세월이 행복하고 고마웠다고 돌아보고 있다. / 이제는 잘 죽을 준비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 394 / * 찾아보기 404
(20:39, 13R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