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하다, (추리하다, 감각하다), 지각하다.
2026 05 08 – 26 06 06
뜨거운 된장국을 떠먹으며 ‘어 시원하다’고 하거나, 뜨거운 목욕탕에 들어가면서 시원하다고 할 때, 오관의 감각작용이 받아들이기 뜨거움과 달리, 몸 전체(얼 또는 혼)가 확 열리는 것 같은 지각작용이 있다.
이런 공감의 인식은 지성, 감성과 달리 심성(le mental, 심정)의 역량이라 부를 수 있다. 세상을 세는 방식과 세상을 헤아리는 방식은 다르듯이, 감성에서 감각의 뜨거움과 심성에서 지각의 시원함은 동일한 대상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몸이 소통하는 방식과 심성이 지각하는 것과 다를 것이다. 뜨겁다는 피부가 대처하는 방식에 있다면, 시원하다는 몸이 통째로 관통하는 방식일 것인데 이를 심성의 소통이라 불러보자.
이런 심정의 역할이 인간에게 내재해 있음을 학문적으로 처음 표면으로 올린 이는 빠스깔에서도 루소에서도 표현되었다. 이를 체계화시켜 보려고 했던 이는 레비-브릴(1857-1939)이다. 사라져 버린 인류의 과거인 원시 시대 인간은 무엇을 기호(대상)으로 삼아 소통했을까? 그는 원시인들도, 미국 수학자 코난트(1857–1916)의 연구 영향으로, 세다와 헤아리다를 구별할 줄 알았다고 보았다.
*
철학사적으로 이런 문제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를 거쳐서 뉴턴으로 가는 기하학적 분석학의 논리로, 통일성을 전제로 두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는 나눌 수 없는 또는 나무어질 수 없는 몫이 있다는 관점을 제시하였다. 라이프니츠도 라그랑쥬도 나누어서 생각할 수 없는 부분으로서 무한소가 있다고 보았고, 마찬가지로 무한으로 진행에서 무한대를 사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했다. 이 둘 다 단위(l’unité, monade) 또는 통일성(l’unité du tout)이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기하학적 분석에 이의를 제기했던 영국 경험론의 홉스의 코나투스(노력)에서부터 라이프니츠의 무한소의 인식으로부터 나온, 무한이 이데아들(관념 영역)이라기보다 이상성(이상 영격)이라고 보았다. 논리의 귀결로서 관념의 대상화를 추상화, 상상작용의 이상화를 현실성으로 보면, 물질은 현실성에 연결되어 있고, 이상 영역에서 인식의 방식에는 다른 방법 또는 동력학(합리 역학)이 있다고 보았다. 동력학에는 감각작용보다 깊은, 사물에 내재하는 지각작용을 포함한다.
감각작용보다 근원적이고 실재적인 소통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열역학에서 제기될 것이고 생명의 지속적 발생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수학적 양식도 아니고 추론의 관념의 직관도 아닌, 내재적 미세 지각(기억)에 의한 총합적(적분적)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얼과 혼의 이런 소통방식이 19세기 후반에 심리학이 성립하는 시기에 마치 지각작용에 의해 알려진다고 보았다.
무한소의 적분적 방식에서, 무한대에서도 만들어지는 무한히 작은 것을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은, 분석기하학에서 무한대의 접선에서 무한히 큰 유율(인력과 측력의 비례)을 인식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무한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전자에서 무한은 한계의 극한이 제로0처럼 없는 것 같으면서도 최소 지각 단위로서 있는데 비해, 후자의 무한은 단위를 설정할 수 없는 극한으로서 무한∞이 있다고 한다. 두 사유에서 극한의 크기(양)은 전혀 다른 것임에도 무한(l’infini)라고 한다. 정의 할 수 없는 단위로서 무한정(indefini, 무정의)과 극한을 따라갈 수 없는 무규정(l’indéterminé)은 다를 것이다. 무한소의 무한과 무한대의 무한은 전혀 다른 용어일 것이다. (59PNA)
*
지각하다가 감각하다와 다른 것은, 감각에서 부분으로 통과와 달리, 지각에서 얼 또는 혼의 한꺼번에 단번에 관통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무매개적으로. 그런데 이성(지성, 오성)의 추리가 기하하의 선분을 무한히 그을 수 있듯이 단번에 선분, 면적, 체적을 관통할 수 있다고 여긴다.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산술학에서 529 + 316의 답을 계산해야 하듯이, 기하학에서도 선분의 도형화를 순서와 지도규칙에 맞게 땅에든 머리에든 그려야 한다. 물론 삼각형의 2직각은 그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알고 있듯이, 2+3=5라는 것도 손가락을 세거나 주판을 튕기지 않아도 된다고 여긴다. 지각하다는 감각하다와 추리하다와 다르다.
상상하다와 추리하다도 다르지만, 대상화에서 적용과 응용이 비슷하다. 추리하다는 상상의 대상을 연결하고 배치와 배열에 있다. 추리하다가 사물을 인식하고 제도를 인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추리하여 인식하는 것은 사물의 내부와 제도 안에서 활동하는 운동의 흐름을 지각하는 것다르다. 어쩌면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선거후 백서를 내려고 자료들을 수집하여 배열하는 하는 방식에 따라 백서는 오일러가 수학의 한 문제를 푸는 방식이 50가지가 넘는다고 하였듯이, 백서는 50가지가 넘을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히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말, 몸짓, 표정, 기호표시 등이 있을 수 있다. 그 중에서 입말은 언뜻 보기에 상상을 드러낸다고 여긴다. 아픔을 표시하는 면에서 감각을 드러내고, ‘시원하다’처럼 혼의 관통을 표시할 수도 있고, 교육과 대화를 위하여 용어와 개념을 사용한 진술과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단위로서 혼은 입말의 발설하고, 그 소통의 구강성은 신체의 특별한 도구이다. 상상과도 감각과도 다른 지각작용이 몸을 통하여 그리고 각별하게 구강을 통해서도 발성된다는 것이다. 내부에서부터 이러한 입말의 통과(소통)를 라이프니츠는, 사유 추론의 직관과 다름에도 직관이라 불렀다. 각 모나드는 자기 전체를 직관하고, 혼은 얼을 반영한다고 한다. 그의 이런 소통과 발언이 이데아의 직관과 다르기 때문에, 스피노자주의자들과 대립하였다. 이런 문제를 칸트는 직관이 같은 것으로 여겨 경험에서 통일 될 것이라고 시도했으나 결국 다르다는 것으로 “순비”에서 결론 맺는다.
몸이 발언하는 것으로 여겼던 프로이트주의자들은 내재성의 발현을 초자아에 연결시키려 하였으나, 이 내재성과 상징성 사이에 매개체로서 상상계를 존속시켰다. 인간 각각의 활동은 사상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상상계에서보다 상징계에서 단위가 먼저 있다고 여겨서 목소리의 발현이 상징계의 지도편달을 받는 것으로 착각했었다. 그러나 이 목소리 발언에서도 혼의 발현처럼, 말로 표현할 수 없고, 게다가 라이프니츠 용어로 분간불가능하고 분할불가능한 단위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무한소처럼, 그리고 망각에 가까운 지각처럼 의식에 내재해 있다. 그러면 각 모나드들은 그 지각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으며, 이를 기억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라이프니츠와 버클리가 생각했던 ‘지각하다’에서, 설정할 수도 있었을 단위가, 사고하는 단위인 용어, 개념, 관념에 밀려나버린 것이 철학사에서 한 쪽 방향이었다. 그 한쪽 방향은 사고의 체계를 진위로 구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수학과 논리학 그리고 현상학은 이 쪽 방향을 택했다. 사회 또는 공동체는 ‘세다’와 ‘헤아리다’가 서로 다른 길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달리 도식화 또는 제도화(정식화)하려고 했지만, 수학과 논리학의 정식화가 제기했던 선문답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런 밀려남, 배제의 논리를 주장한 이들이 백색, 유일신, 진리론의 세 패거리를 연결하여 19세기에 제국주의의 길을 열었을 것이다. (59PKE)
*
서양 철학사에서 3원성을 다루는 방식은 우리나라 입말에서 천지인과 다른 방식일 것인데, 그 차히가 무엇인지를 아직도 추적중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성찰하자는데 있다. 현재 경중미인이라는 서울식 사고에서 이원적 사고가 당연히 앵글로색슨에서 온 것일 것이고, 이번 지방자치단체장의 선거에서 이원성이 표출되었다. 서양사상의 흐름은 이원성이 중심이었던가?
우리는 서양사상에서 4분할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 했었다. 그 사분할은 그리스 학문의 기원 또는 원인성을 탐구하는 방식에서 나왔다고 한다. 분할에서 비례중항을 구하는 경우와 터전에서 조화중항을 탐색하는 것이 전혀 다른 영역 또는 차원임을 보여준 것은 브룅슈비끄의 수학사에 대한 설명에서였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통일(하나로가 아니라 다양체로서)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기, 달리 생각하기, 달리 살아가기로서 다곱체(다양체, 다승체)에 대한 미흡하지만 문제제기는 “비례중항 대 조화중항”이란 글을 참조 할 수 있다.
https://cafe.daum.net/milletune/REM0/148
벩송의 사유를 따라가면 철학사는 상층(밖에서)에서 표면으로 그리고 심층(안으로)으로 전개되었다고 한다. 표면에서 한쪽에서는 이중화(가지치기)의 생성을 또는 다른 한쪽에서는 이원성(상층을 기준으로 삼던지, 심층에 기대든지)을 도식화 한다. 꽁트는 흥미있게도 상층(신학)에서 표면(인식론의 형이상학) 다음으로 실증철학이 도래했음을 알렸을 때, 그 당시의 수학자들(라그랑쥬, 뿌와소 등, 그리고 로바체프스키, 카르노 등)이 다루는 방식은 칸트의 이상성과 도식화와 다른 방식을 물질의 운동들을 다루었다는 것이고, 이로서 자연의 조직화와 사회의 조직화를 신학과 형이상학의 시대와 달리 다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 이런 관점의 전개 방식은, “칸트의 수학적 철학”을 참조할 수 있다.
https://cafe.daum.net/milletune/S7Vq/24
어째거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래도 조화를 생각하는 쪽은 삼원성으로 다루기를 좋아하고, 대결에서 승부를 가리는 방식으로 2분법에서 4분할로 가는 분석의 사유가 정확하고 또한 사물들을 잘 다루고 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에서 둘 그리고 넷으로 분할하는 사유도 필요하다. 이런 사고방식이 반쯤이고 하나에서 둘 그리고 합하여 셋으로 다루는 사유방식도 반쯤이 되어 있엇다. 이 셋의 사유에서 중심은 그래도 삶이다. 삶은 생명이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과 연관이 크냐는 점에서 우선 토지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런데 그 토지의 생산성은 하늘의 운행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쯤에 집단의 터전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서양철학사에서 사람들이 삶의 영역상에서 보아 생각의 대상들로서 세 부류의 영역들이 있다고 여겼다. 이를 그리스는 로고스 국면, 에토스 국면, 파토스 국면, 3국면이라고들 한다. 말하자면 삶의 도구/무기의 제작과 활용은 당연히 로소스 국면의 주제일 것이고, 삶에서 이미 제도와 체제를 이룬 곳에서 관습과 도덕을 확립하고 공유하는 덕목과 희망(이상)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런 도구의 사용이든 제도의 유지든 삶에서 고통을 벗어나 행복과 즐거움(종교적 환희)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한 추구에서 개인의 삶은 항상 행복하거나 즐거운 것이 아니고, 자연의 주기성과 변화, 도구의 소유와 박탈, 제도에서 통제와 배제 등이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여 감각적, 감정적 조절과 안정을 이루기 어려운 시기들이 있다.
서양철학사는 3국면에서 에토스가 우선한다. 그 국면을 잘 이루기 위해, 그리고 도덕 윤리를 정당하고 합법적으로 실행하기 위하여, 로고스 국면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지식이 우선하는 방식으로 제도가 정립되고 고정되면서 논리와 진리가 통제와 지배의 수단이 되었다. 그럼에도 이런 제도 속에서 불평등과 억압에 대한 저항과 자주는 표출되기도 하지만, 제도 우선에 묻혀 지냈다.
(2:27, 59QKF) (4:07, 59QK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