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와 담론: 담론 공역역에서 서사 공영역으로 (2025)
- 한길석, 시대와 철학, 2025, 겨울호 제36권 4(통권 113호), 157-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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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the discursive) 공영역 과 서사(the narrative) 공영역의 이중화된 현실 상황은 여전히 진리와 선이 먼저 있다고 여기면서 생각하는 경우이다. 그런 평면에서 사고방식은 현상론 또는 우주론에 속한다. 발생론 즉 우주발생론에서는 윤리적 최고선 또는 논리적 최고류는, 유명론의 이름과 같아서 허구이고, 수학에서 상징과 같으며, 구조주의자에서 언어의 기표와 같다.
이런 부류의 상층의 대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칸트가 보았듯이 이상성(우리나라 번역은 관념성)일 뿐이다. 그 이상성을 실현하였다고 하면 파라독사에 빠질 것이다. 이런 대상들로부터 추론하는 연역주의자들은 최고 항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알아도 말할 수 없고 전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대상이 실재한다고 믿는다. 이런 이상성에 대한 반대 담론은 퀴니코스-스토아학자들의 실천에 있었고, 이런 이상성에 대한 대립담론은 에피쿠로스학파가 창안했을 것이다. 이 창안자들은 원자를 생각해 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논리주의자들은 이런 반대와 대립에서 모순을 찾아냈을까? 삶의 현실에서 모순은 삶 과 죽음 사이에서만 있을 뿐이다. 대상들과 사실들의 논리에서는 모순이 함께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삶과 죽음을 동시에 놓을 수 없지만, 말로서는 같은 사고공간에 두기에 모순이라 불렀을 것이다. 퀴니코스 학파와 퀴레네 학파는 죽음 이후를 알지도 못하기도 하지만, 또한 죽음이 무엇(이것이 아니라)이라고 안다고 말하는 자들을 사기꾼 또는 허풍장이로 여긴다. 이런 논의는 플라톤주의에 반대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였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죽음의 경험을 그리고 죽음 이후를 세계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59PMH, Q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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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적인 공유면에서 일어나는 재현과 현상이 담론으로서 이야기 되는 경우에 마치 비트겐슈타인이 세상을 그림 보듯이 서술하는 것과 같다. 논리실증주의는 세상을 원자들같은 대상들 또는 수들로 표현되는 평면 그림처럼 인식한다고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세계를 설명하면서 그림이론이라 했다. 사진이 그 정답일 것이다. 사실은 사진처럼 평면화할 수 있고, 컴퓨터의 화면처럼 점들(화소)의 집합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할 것이다. - 이런 평면의 배치가 현상이고 그 현상을 접었다 펴면서 그 평면을 구성 또는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를 화소(畫素)로 배치하고 배열함에 따라 인식이 구성되고 구축된다고 여긴 이가 칸트가 아닐까? 논리실증주의를 칸트의 인식론의 계승자라고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같은 마을 풍경이라도, 한번 둘러본 여러 사람들이 서술하는 경우에는 각각은 관심에 따라 달리 서술한다. 이런 서술을 다 모아보아도 마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을에 오래 살아본 토박이는 안다. 그 토박이에게는, 구경꾼의 화소들이 대상화된 것이지, 그 동네의 추억들과 심정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 서술자는 이방인이며, 마을은 이방인의 그림이 아니라, 토박이 삶의 터전이다.
각각의 서술에 따라 마을을 조합해보면, 마치 여러 지도를 모아서 만든 대동여지도처럼,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과는 다른 모습이 그려진다. 두 사람이 각각 묘사한 그 그림 같은 이야기가 비슷하여 동일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동네를 모르는 사람이다. 동네를 아는 이는 누가 토박이인지 구경꾼인지를 안다. 꺼베기는 가라는 시인의 목소리에 심정이 담겨있다.
정치적 평면에서 유시민이가 하는 요즘 이야기는 이런 토박이의 진솔한 이야기와 구경꾼이 자기 이익(관심)에 맞게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이재명이 당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다는 아는 구경꾼이 교묘하게 묘사하면서, 그들이 배치한 화소들 같은 당의 모습을 이재명의 보는 관점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이 인민 대중 속에 살지도 않으면서 대중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전달한다고 한다. 공론장이 있다고 한다. 칸트가 인식론을 말하면서 사물을 둘러보고 판단한다고 하였다. 사물 속에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었던 시대, 원자 속에 전자들과 원자핵의 연관들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었던 시기이었듯이, 생물의 세포 속에 세포질과 세포핵 그리고 미토콘드리아와 소포체 등등이 있는 내부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었듯이, 겉으로 돌아보면서 이야기를 서사로 그림처럼 서술한다고 한들, 그 속에 사는 원주민의 삶이라 할 수 있을까?
프랑스 철학에서 19세기 말이 사회학과 심리학의 정립되는 시기라 하는데, 그 사회학에서 뒤르껭이 실증이라고 한 것은 지성(이성)의 인식이라면, 레비-브륄은 토착민의 삶의 실증을 이성을 통한 감각과 정동 아니라, 심정(빠스깔의 심장)을 통한 심성으로 역사와 기억의 일반성을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앵글로 색슨은 제국주의 속에 토착민을 이성 없는 바바리안(야만인) 취급하여 착취와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루소의 자연주의에서 포틀레치와 레비-브륄의 심성의 일반성에 대한 논의를 우리나라에서 들어보지 못했다. 공론의 영역은 구경꾼의 풍경일까? 삶의 터전의 역사와 기억이 내밀하게 밀고 나오는 영토의 이야기일까.
어쩌면 사람의 수가 많을 경우에, 그림을 잘 이해하는 사람의 말을 믿는 경우에, 마을의 이야기는 그 마을과 동일한 모습을 띨 것 같다. 그런데 토박이에게 관심의 이질성은 크고 작은 부분들의 차히를 갖는다. 이런 차히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객관성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심정에서 심성의 일반화가 있다는 것은 19세기 후반의 이야기였다. 이런 이야기에 레비-브륄이 있다. 일반성은 역사와 기억을 포함한다.
이제 누리소통에 의한 마을의 모습은 문제제기와 합의방식(평결)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조금씩 달라진 마을을 만들고 산다. 객관적 그림이야, 사진을 찍던지 화가의 그림 속에 그려질 수 있다. 사진이든 그림이든 단면이지만, 심정에서 오랜 과정에서 나온 “마을의 일반성”은 개념, 관념, 감각, 지각만큼이나 인식에서 중요하다. 일반성에서 과정이란, 그 사람의 삶의 과정 전체를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라는 용어는 그 용어를 아는 사람마다 일반성이 다르다. 내포가 다르다고 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삶의 과정에는 지속이 있고, 그 과정을 일반화의 표현이 명사로서 ‘소크라테스’일 것이다. 그 사람을 대신하는 것이 인식의 대상, 개념, 관념일 것이며 단면의 표상(재현)일 것인데 비해, 심정에서는 그에 대한 기억과 역사를 포함하는 만큼이나 일반성이 심성의 지속이 될 것이다. 일반성의 공유와 공감에는 계속적인 학습이 필요하다.
이런 이야기는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의 삼분할의 분류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랜 세월 거쳐서 19세기에 자연의 조직화(physiologie) 와 사회의 조직화(sociologie)를 이야기하는 시기가 되어야 나온 것이다. 지성(오성, 이성), 감성(감각, 감정), 심성(지각, 기억)의 영역으로 발생적 과정에서 나누게 되면서, 다양체(다곱성, 다승체)의 공간을 지닌 생명체[생리학]와 사회체[사회학]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다”는 표현처럼, 사회의 역동적 활동이 논리의 대상으로 머물 지도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범주의 사실(표상)로서 개념도 아닌, 다양체로서 사건을 다루어야 할 시대가 (59QKC, KF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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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기준이 있거나, 기준을 요청하듯이 선전제로서 받아들이는 이성(논리)의 공론장이 있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런 사고는, 마치 유클리트 기하학처럼, 원리와 공리가 먼저 있다고 여긴다. 이에 비해 여러 견해들의 합의와 평결을 추구하는 사유는 시대와 제도 속에서 조화(중심, 가우스의 종모양)과 우선성(제도에서 업무의 선후)을 찾아야 한다고 한다.
정의론에서 제기되고 있었지만 전자의 사고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처럼 비례중항을 찾는다면, 후자의 사유에서는 퓌타고라스의 발전적 수학을 받아들인 플라톤이 공화국편에서 조화중항을 찾는다. 게다가 철학적 사색의 배경도 다른다. 전자에서는 우주론과 그에 상응하는 현상론을 중요시한다면, 후자에서는 우주발생론과 이로부터 창안과 창발에 무게 중심을 둔다.
서양철학사에서 이상하게도 기원후에, 종교적 믿음의 개입으로 자연 탐구가 사실의 진리보다 논리의 진리로 돌아간 이유를 모르겠다. 기원전에 그리스와 알렉산드리아서 천문학, 수학, 의학, 음악 등에서 실증적인 분야들이 왜 종교가 개입하면서 사변적 또는 맹목적 독단으로 흘러갔는지 말이다. 특히 알렉산드리아 천문학은 지구의 둘레도 잴 수 있을 정도였고, 지구 반대편을 생각할 수 있었다고 단편들의 기록이 있는데도, 왜 지구가 평면처럼 가만히 있고 태양이 돌고 있다는 신화적 사고가 되돌아가 점성술 같은 사고에 지배하게 되었을까하는 것이다.
자연적 사실의 체계화보다 제도의 체계화가 더 공고했다고 할 수 있을까? 달리 말하면 담론 공역역(체계 공론장)이거나 서사 공영역(교육 공론장)이 서로가 서로를 닮아갔던 것, 즉 다시 말하면 제도의 정합성을 사실들의 대응성에 맞물려 하나의 통일체를 구축하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런 제도와 체제의 구축이 지식과 인식의 구성을 지배하면서 사고틀이 고정시킨 것이 아닐까? 이 고정성에는 이상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동양에서도 제도가 구축되었고 인식과 이론이 성립하였을 때, 서양처럼 유일신으로부터 체계를 갖는 체제와 제도에 맞는 이론 틀과 공론장이 아니라, 여러 다른 공론장을 구성하며 떠는 체제 변화를 맞이하고 수정하며 살아왔을까? 어쩌면 동양은 음양이라는 이원성을 이기고 지는 쪽으로 사고하기보다, 교대, 교환, 순환, 상보와 같은 것으로 보는 자연관에서 온 것이 아닐까. (59PNA)
(3:14, 59QKE) (3:26, 59QKF)
# 이야기와 담론: 담론 공역역에서 서사 공영역으로 (2025)
목차 -
* 초록 157-158
1 들어가며 159
2. 담론의 이론적 민주주의 이론 162
3. 한계 165
4. 담론에서 이야기하기로 171
5. 나가며 179
* 참고문헌 182-183
* From the Discursive to the Narrative, Public Sphere: Rethinking Political Communication Beyond Habermas 18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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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중에서 ****이야기와 담론: 담론 공역역에서 서사 공영역으로. (2025)
* 초록 157-158
하버마스는 담론 이론을 바탕으로 현대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작동 원리를 규명한 토의 민주주의를 제시하였다. (157)
아렌트는 정치적 공역역에서의 말하기와 행위가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드러내고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녀는 이 과정을 이야기하는 또는 서사라는 개념을 통하여 접근하였다. (158) - [하버마스건 아렌트건 표면 위의 현상들 사이의 토의건 현상들의 배치에 따른 서사일 것이다. 심층의 발현과 창발에 대한 견해가 독일사상에서 드문 이유가 무엇일까? 현상학 때문(?).]
1 들어가며 159
1990년대 까지만 해도 이러한 현상은 예상되지 않았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지속적 발전을 자신하는 분위기였다. 하버마스의 사실성과 타당성(1992)은 이러한 자신감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저서이다. (159) - [유럽 사상의 변화는 1968년일 것이다. 프랑스는 구조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발생론 또는 입말의 표출(용출선)으로 나가고 있었다. 독일은 동독과 통합에서 합의(토론)가 중요했을 것이다. 그 토론은 칸트의 선험성과 이성에 맞추어서 통일국가를 만들어갔을 것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다양체(곱셈, 다곱체)로 향하고 있었다.]
이 글은 하버마스의 담론적 정치(discoursive politics)에 대한 비판과 그것에 대한 보완으로서 아렌트의 서사적 정치(narrative politics)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161) -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kratie)와 민주주의의 담론이론(“Diskurstheorie der Demokratie”)이 동의어처럼 쓰였다면, 조건과 원리요청 아래서 숙의와 담론(방법서설)은 상층 형이상학에 기대고 있는 논리전개일 것이다. 서사는 선험담론을 경험에 적용하여 서술하는 논리 메카니즘에 가깝다. 인민, 대중, 민중은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고 창조하는데, 이를 공동체에서 다루는 방식이 마치 자기장(상반된 힘의 공존)과 열역학(평준화와 엔트로피)과 닮은 영역론이 있지 않을까? 전자기극에서 마이너스극와 플러스극은 적대적 모순일까? 교대의 의해 교류전기와 같은 흐름을 생산하지 못할까? (59QKD) ]
현대 정치적 의사소통은 공적 이성을 중심으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사적 감정의 집단화를 통해 양극적 정치화의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이해관계라는 일반화라는 보편 지향적인 공적 이성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적 감정의 공유를 통한 상실감의 만회와 주권자적 자존감의 회복을 겨냥하고 있다. (161) - [이원론의 사고에서 이성과 감성은, 고대 그리스에서 로고스 – 파토스 –에토스의 삼원성에 벗어난 사유이며, 또한 이성의 논리화와 감정의 일반화가 둘 다 보편성을 지향한다는 생각이 상층 형이상학의 우선성의 인정일 것이다. 하버마스에게 심층 형이상학의 견해가 보이지 않는 것은 인민의 발현과 용출선이 없는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공화국과 혁명의 인민의 지도를 독재로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 요즘 민주당이 1인1표제 당원 중심제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인민의 합의(평결)에 의한 결정이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었다. 이런 방식은 13세기 이탈리아 카톨릭에서 주임신부와 평신도 선거에서 뽑았던 실험이 있었다고 한다. 실증주의의 인민의 의사결정의 평결장이다. - 우리나라에서 헌법재판소에서 윤석열을 내란죄로 규정한 것도 평결이었다..]
2. 담론의 이론적 민주주의 이론162
그에 따르면 현대 민주주의 체제의 정당성은 정치적 의결이 필수적으로 만족시켜야 하는 두 가지 조건 – 포용과 담론적 의견 형성 – 에 의해 – 종교적 혹은 도덕 형이상학적 토대 없이 – 자체적으로 부여(selbsternmächtkgung) 된다. (162) - [인민의 의사표시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촛불시위와 눈 오는 날 키세스 시위의 창발이 민주주의일 것이다. 혁명 전야에 수많은 인민의 입말의 등장이 민주주의의 기본일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에서도, 1848년 공산당 선언문에도, 1968년 세계사적 담론들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것을 체계 내외부 간의 상호 입출력을 통해 정치적 의사소통의 흐름이 유지되는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전체 흐름도(flow chart)로 해명하고 있다. (164) - [유시민의 A(C)B론은 가치와 이익을 대비한다고 했지만 어느 쪽이 여론과 실천의 중심이어야 하는지로 읽으면 하버마스와 같지 않을까? 상층론자들은 A(C)B의 숙의를 하는 것이 미국(일본)에 있다고 여기는데 비해, 심층론자는 ZACBDE.. 등을 생산하는 공동체를 살아온 인민의 오랜 심층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입말로 표현하고 문자화한지 120여년 정도인데도 인민의 함성을 표출하는 것은 공화국을 스스로 만들 힘이 인민에게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3. 한계165
[아마도 하버마스의 한계는 담론형성 또는 미디어 저널리즘에 머룰렀을 것이다. 일화인데 프랑스학생이 독일학생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제국에 의해 분단당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저항없이 살았다는 것이다. 프랑스인은 타국이 분단을 했다면 비밀히 저항하며 서로 오가며 입말로 서로 소통하고 살았을 것이라 한다. 플랫폼은 정해진 곳에 또는 정거장(포스트)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셋 이상 만나는 다곱체(다양체), 3승 4승 5승 6승의 연관을 분석과 논리로서 설명도 해석도 안 되는 다양체의 플랫폼이 있다고 여기는 쪽이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이라 한다. 소통과 정거장은 조건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형성된(누리소통의 중간참) 기호작용(signification)이다. 이 속에서 이를 이해하고 활동하지, 바깥은 다른 플랫폼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AI도 해결 못하는 부분일 것이다. AI에게 5명 대 5명의 경기를 시켜보면 5승 곱하기 5승을 계산하여 움직인다고 해도 답이 없을 것이다. AI는 빠른 답이 아니라 관계를 설정하면 그 관계가 바로 변한다는 것을 알아챌 것이다. AI가 지금은 산수체인데 다곱체를 다룰 때는 다른 세상이 될 것이다. (59QKD)]
하버마스는 디지털 기술에 의해 매개된 현재의 정치적 공영역이 질적으로 여과된 의견의 형성을 보장하는 담론 절차에 따라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민주주의 체계를 손상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167) - [함께 사는 방식을 우선으로, 소유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과 조화로운 삶을 우선으로 사유를 전개하면 달리 살게 될 것이다. 사익, 수탈과 착취가 없는 사회를 AI가 사유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풍자, 조롱, 정서적 호소와 같은 비담론적 표현 방식을 활용하여 권력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와 민주적 감수성의 갱신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비담론적 실천은 공영역을 오로지 합리적 의사소통의 장으로 한정하는 하버마스적인 틀을 넘어선다. (169) - [하버마스는 무슨 한계과 조건, 그리고 범위의 경계가 있는 것처럼 사유하는 것 같다. 다곱체는 그렇지 않다. 일정하고 일반화와 제도를 만든 것은 함께 행복하고 즐겁게 살자는 것이지, 누군가가 지배하고 사적 소유를 확대하자고 제도와 일반화를 넘어서 보편화를 주장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신들의 세계, 천사와 부활이 사기꾼의 이야기라는 것이 이미 중세 보편논쟁에서 알려진 것이 아닌가? - 이런 담론 속에서 자기만은 예외적으로 천국에 있다고 생각하고 타인을 조롱하는 것일까? 자기 예외의 논리가 파라독사의 기원이라는 것도 그 주장들 중의 하나인 러셀이 말했지 않는가. ]
오히려 랑시에르(Rancière, 1940-)가 말한 ‘감각적인 것의 나눔(le partage du sensible)을 구성하는 정치적 행위로 작용할 있다. 즉 비담론적 정치적 표현들은 기존의 정치 담론에서 다루어졌던 정보, 의견, 감성들을 새롭게 배열함으로써 기존 민주주의를 구성하고 있던 정치적인 것들에 대한 이해와 감각을 갱신할 수 있다. (169) -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의 구분이 있듯이, 지성(이성), 심성, 감정이 있다(이성과 감성으로 구분되는 것은 칸트와 신칸트학파가 스콜라철학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서 심정(le mental)은 삶의 원초적 활동에서 갖는 직관이 기본이다. 중국 사유에서 심기(深機)이며, 중국의 병법에서 그 깊이를 아는 기안(機眼)이 있고, 유학의 인과 덕성과 달리, 기안을 가진 자가 평천하한다고 한다. 그 기(機)를 공감하고 공명하는 것이 19세기말 프랑스 심리학이 영국 용어를 받아들여 심정이라고 하였다.]
아리리스 영(Iris Young, 1949–2006)은 토의 민주주의의 모델이 전제하는 문화적 중립성과 보편주의적 이성 개념이 실제로는 특정한 사회적ㆍ문화적 맥락에 깊이 뿌리내려 있음을 지적했다. (170) - [세계의 대상화에서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처럼, 인식에서 지성(오성, 이성)[논리], 현상의 감각적 사실의 감성[생리학적], 삶의 터전의 역사와 기억에서 심정(le mental)이 있다. 이 삼원성이 해답이 아니라, 이원성의 구별에 대한 다른 이야기일 뿐이다. 삶은 3원성, 4원성, 등등을 넘어서 다곱체이다. ]
4. 담론에서 이야기하기로 171
인간은 ‘무엇임(whatness)’이 아니라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존재(Diser –und –neidmand – anders –Sein)’가 지닌 고유성을 드러낸다. 아렌트는 이것을 누구임(das Wer –einer –ist/whoness)을 공적 공간에서 서로에게 드러내는 활동으로 기술했다. (171-172) - [중세 유명론에서 승리한 프란체스코파가 heccéité [이것임]과 quiddité. [무엇임]을 구별했다. 류와 종이라는 논리의 상위에 ‘무엇임’(최상 류)이 있고, 류와 종을 생성하게 하는 심층에 ‘이것임’이 있다. 이것을 들뢰즈가 특이성이라 했다. 스콜라철학을 넘어서 무엇임을 상징 기호 다루듯이 하고, 구조주의가 상징계-상상계-실재계라는 삼원성으로 상위류-류-종을 다루듯이 다루는데 비해, 후기 구조주의는 이것임을 실재계로 삼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표면의 이중성이 있고, 그리고 추상화에서 개념이 성립한다고 보았다. - 유일신앙자들이 착각하는 천국과 부활이 있는한 생성의 이것임은 덧없음, 가상, 허상 또는 악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런 담론자들과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유일신 옆에 크리스트가 앉았듯이, 권력 옆에 앉아서 하늘나라에서는 맹자가 공자의 할배라는 이야기를 만들 듯이 만드는 자들이 조롱, 풍자, 해학이라면서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겠다. - 겸손과 학습이 공감과 공명을 이루는 조화중항을 만들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하버마스의 공영역은 아렌트가 말한 정치적 행위의 계시적 차원, 즉 인간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누구로서 출현’과 고유한 존재들 간의 공존의 계기를 충분히 보장하지 못한다. (172) - [상층에서 표면의 논리이든 표면에서 상층으로 지향하는 이야기든 상층에 속한다. 인민의 생성은 다른 것이다.]
담론은 합의를 지향하지만 이야기는 상호이해를 지향한다. (175) - [입말과 누리 소통은 상부상조, 순환, 교대, 대체를 이해할 때 서로 공감과 공명이 있다. 인민의 입말로부터 공감과 조화중항을 찾아 문자화하면서 담론의 방법과 방향이 성립한다. 데카르트의 방법은 관념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논리주의자는 관념 또는 최고류 개념으로부터, 칸트 주의자는 범주의 개념이 있어서 사유할 수 있다고 여긴다. 누리소통은 다곱체라는 시간이 필요하고 공유하였던 경험이 필요하다. 이 기억에 대한 인식으로서 지각작용이 공감을 이루게 할 것이다. 어린애는 할배가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서 시원하다는 지각작용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삶의 터전에 함께 살아가면서 경험의 축적에서 기억이 지각작용을 불러오는 나이에는 ‘어 시원하다’고 입말을 할 것이다. 물의 온도를 측정하지 않을 것이고, 삶의 두께가 ‘시원하다’의 일반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에토스의 인식, 심성의 인식이 중요하다. 통일의 기안처럼, 기억을 공유하는 심안이 있다, 제국주의와 제국에 찌들려 공유지각을 감각작용에 빼았기었을 뿐이다. (59QKD)]
예를 들어 강정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바위에 부여하는 전통적 믿음과 규범적 관념은 그들의 공동체적 정체성과 직결되지만, 대도시 거주자들에게 이것은 사소하거나 비합리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 (167) - [지성의 판단과 심성의 판단은 삶에서 다른 차원이다. 들뢰즈가 도곤족의 신화를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도곤 족의 심성을 서양의 지성(이성)의 판단으로 잴 수 있는 가치기준은 없다.]
토의 민주주의는 다양한 규범적 관점을 포용하려는 의도와 달리, 특정 집단에 배제를 정당화는 역설에 직면한다. 이러한 역설이 반복적으로 경험될 때, 주류 담론에의해 배제된 시민들은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환멸과 원한을 축적하게 된다. (176) -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와 플라톤 작품에서 귀결점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 대화편들, 선승들의 선문답에서 양면성에 대해 불이, 등은 파라독사에 속한다. 개념을 보편성으로 착각하여 모든 것에 적용되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경우에 파라독사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독사에 반대가 에피스테메가 아니듯이 파라독사의 반대도 에피스테메가 아니다. 양면성을 생성의 관점에서는 이중화 현상에 속한다.]
5. 나가며 179
하버마스의 토의 민주주의 정치 이론은 의사소통적 이성에 기초한 담론 규범을 중심으로 개념화되었다. .. 그럼으로써, 감정과 정동이 작용하는 정치적 의사소통의 현실을 주의 깊게 포착하지 못한다. (179)
[이성과 감성으로 이중화를 다루는 것은 근대 형이상학이 신학의 가면 뒤로 감추고 전면에서 이성이 감성에 우월하고, 윤리적이고, 진리라고 선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이 배경에서 뒷배를 봐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대에서는 극우들이 일상인을 비하하는 것도 이와 같은 논리에 젖어있다. ‘내가 맞고 당신은 틀렸어’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 자체를 그들은 반론이 열등하고, 거짓이고, 악의 축이라고 한다. 무엇이 열등하고 거짓이고 악의 축인지를 물으면 이들은 무엇(quiddité)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들은 ‘이것(heccéité)이 덤벼들어, 사악하다’고 거짓 사이버 협조자들을 동원 하여 조작한다. 이들에게 맹목적 독단이 있다. 오랜 유일신앙의 순환논증의 오류이다. ]
내가 보기에 공적 의사소통은 서사의 상호 교환을 통한 참여자들 간의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과정이다. (179-180) - [음과 양, 공과 색은 기원에서 다발, 즉 다양체였다.]
이성적 논박 이전에 대립하는 정치적 감정에 대한 상호이해를 매개로 한 이야기의 교환이 이루어질 때, 민주적 정치의 새로운 활력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180-181) - [건과 곤의 이중화가 만들어낸 현상에서 유시민의 A(C)B이론처럼 평면화가 대립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숙의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 A에는 공공이익을 B에는 사적이익을 가치로 두고 설명한다. 발생론적으로 심층에서 여러 가지들이 솟아나는 것들이 우월이 있기보다, 현실에서 합의와 평결을 찾아야 할 것이다.(59PMG)]
* 참고문헌 182-183
* From the Discursive to the Narrative, Public Sphere: Rethinking Political Communication Beyond Habermas 184-185.
(59QK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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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한길석(韓佶錫, 1973-), 한양대, 중부대학 조교수, 하버마스 연구. <미기록, 2013, 한양대, 유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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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유대계 독일 출신의 홀로코스트 생존자, 작가, 정치 이론가. On Revolution 1963.(fr. Essai sur la révolution: 혁명론(홍원표, 한길사, 2004)
- 인간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영어로): Vita Activa oder vom tätigen Leben, 1960(8. Aufl.), Kohlhammer, Stuttgart 1960(독어로) / Distinction between vita activa and vita contemplativa (praxis as the highest level of the vita activa)
- Zeitgeist (2015). Vita Activa: The Spirit of Hannah Arendt(Documentary) (Film) (in German, English, and Hebrew).
1929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 독일 철학자,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막내. 1962년 출판된 교수 자격 논문인 〈공론장의 구조 변동〉이 1989년 영역되면서 ‘공론장과 민주주의’논의를 촉발시켰다. 대표작인 《커뮤니케이션 행위 이론》
- 의사소통 행위 이론(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1941). Band 1: Handlungsrationalität und gesellschaftliche Rationalisierung. Band 2: Zur Kritik der funktionalistischen Vernunft. Suhrkamp, Frankfurt am Main 1981, 의사소통이론 I(장춘익, 나남출판, 2021).
- [공론장 논문] 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 Untersuchungen zu einer Kategorie der bürgerlichen Gesellschaft. Luchterhand, Neuwied am Rhein 1962 bis 1987 (17. Auflage), / Vorwort zur Neuauflage 1990. In: 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 Untersuchungen zu einer Kategorie der bürgerlichen Gesellschaft. Suhrkamp, Frankfurt am Main 1991, S. 11–50; / tr. fr. Jürgen Habermas, L'Espace public : archéologie de la publicité comme dimension constitutive de la société bourgeoise, Payot, Paris, 1997.
- 사실성과 타당성(Faktizität und Geltung, 1992)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kratie)에 관한 책. “Diskurstheorie der Demokratie” (민주주의 담론 이론)
-"Ach, Europa. Kleine Politische Schriften XI" ist ein 2008 im Suhrkamp Verlag erschienener Essayband des deutschen Philosophen und Soziologen Jürgen Habermas. [윤형식, “아, 유럽: 정치저작집 제11권” 나남, 2011.
1940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1940-), 1968년 프랑스 학생운동을 기점으로 루이 알튀세와 결별했다. 결별의 이유는 맑시즘의 엄격한 과학성과 결정론적 사상에 충실했던 알튀세와 실천 중심의 마오이즘(Maoism)에 경도되어 있던 랑시에르의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프롤레타리아의 밤(La nuit des prolétaires, 1981), 무지한 스승(Le maitre ignorant, 1987), 불화(La mésentente, 1995)
1943 무프(Chantal Mouffe, 1943-) 벨기에 정치 철학자. 루방 카톨릭대학 출신, 후기 맑스주의 정치이론가. 그녀는 급진 민주주의 관념, 다수 민주주의와 경합적 다원주의의 관념을 주로 다룬다. [논문 9쪽 주1), 10쪽 주2)에 언급.]
- Hégémonie et stratégie socialiste, [1985], Ernesto Laclau et Chantal Mouffe, FCE, Buenos Aires, 2004. - [영.위키에는 그람시를 거쳐서, 롤즈, 하버마스를 비판적으로 다루며, 슈미트(Schmitt)의 작품을 이용하기도 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르봉(Gustave Le Bon) 또는 따르드(Gabriel Tarde)의 영향을 볼 수 있다고 한다.] - [프.위키에서는, 우선 후기구조주의자들, 데리다, 라깡, 푸코의 탐색이 있었고, 헤메모니에는 그람시 영향을 받았다. (상업)자유주의에 반대에는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에 정식화된 비판과 연합한다. 그리고 토론민주주의 주장자들 롤스와 하버마스를 비판하기도 하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르봉(Gustave Le Bon) 또는 따르드(Gabriel Tarde)에 이른다.]
- Agonistics: thinking the world politically. London: Verso, 2013; (경합들, 서정연, 난장, 2020.)
1947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1947-) 미국 여성주의 철학자. Le féminisme en mouvements(trad. d'Estelle Ferrarese, La Découverte, 2012). Fortunes of feminism: from state-managed capitalism to neoliberal crisis. 2013
1949 아이리스 매리언 영(Iris Marion Young, 1949–2006), 시키고 대학 정치학 교수. 정의와 사회적 차이의 본질에 초점을 맞춘 미국의 정치 이론가이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 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 (1990),
- 포용과 민주주의(Inclusion and democracy, 2000)
- “De-centering Deliberative Democracy”, in Democracy and Difference: Contesting the Boudaries of the Political, edited by Seyla Benhabib,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107-119.
1978 바이스풀루크(Maike Weißpflug, 1978-), 독일 정치과학자.
Weiβpflug, M., Erzählen[storytelling] und Urteilen. Narrative politische Theorie nach Hannah Arendt, In W. Hofmann, J. Renner, & Narrative Formen der Politik (2014)
Erzählen und Urteilen. Narrative politische Theorie nach Hannah Arendt
?-? 힐(Melvyn A. Hill, ?-?), 미국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 [1940??]
- “The fictions of mankind and the stories”, in: Hannah Arendt: The Recovery of the Public World, (Ed.) New York: Martin's Press, 1979, p.
--Hill, M. A. Introduction.
--Young-Bruehl, E. From the pariah's point of view: reflections on Hannah Arendt's life and work.
--Crick, B. On rereading The origins totalitarianism.
--Bakan, M. Hannah Arendt's concepts of labor and work.
--Parekh, B. Hannah Arendt's critique of Marx.
--Frampton, K. The status of man and the status of his object: a reading of The human condition.
--Major, R. W. A reading of Hannah Arendt's "unusual" distinction between labor and work.
--Fuss, P. Hannah Arendt's conception of political community.
--Miller, J. The pathos of novelty: Hannah Arendt's image of freedom in the modern world.
--Draenos, S. S. Thinking without a ground: Hannah Arendt and the contemporary situation of understanding.
--Gray, J. G. The abyss of freedom—and Hannah Arendt.
--Denneny, M. The privilege of ourselves: Hannah Arendt on judgment.
--Hill, M. A. The fictions of mankind and the stories of men.
--Arendt, H. On Hannah Arendt.
--Young-Bruehl, E. A chronological bibliography of the work of Hannah Arendt, 1906-1975 (p. 341-354)
- Symbolic Authority in the Postmodern World: A Psychoanalyst's Response · Melvyn Hill · Social Research 52 (1985) (pp. 403-410)
?-? 코르스텐 브뢰크(Timo Korstenbroek, ?-?)[1970??],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브리지 대학 강의(Vrije Universiteit) - “Rethinking the public sphere in an age of radical-right populism: A case for building an empathetic public sphere”, in Communication Theory, 2022 3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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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iberative Demokratie(델리버라티베 데모크라티), , 숙의 또는 토의 민주주의
Öffentlichkeit (외펜틀리히카이트), 공론장, 공공성, 공적 영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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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지(emoji, 絵え文も字じ 에모지), 일본어로 그림을 뜻하는 絵(에)와 문자를 뜻하는 文字 (모지)에서 유래했다는 전자 메시지와 웹 페이지에서 사용되는 문자에 포함된 그림문자, 표어문자, 표의문자 또는 스마일리이다. 즉 감정, 사물, 상황 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그림문자를 뜻한다.
영어 whatness 와 프랑스어 heccéité는 같은 뜻인가? 전혀 다른 뜻
heccéité [이것임] / eccéité : (Date à préciser) Du latin ecce (« ceci ») et -ité. Les variantes hæccéité, heccéité dérivant de haec. Voir aussi hiccéité et quiddité.
영어로 "thisness(이것임)"
- 프란체스코파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6경-1308)의 용어이다.
quiddité. [무엇임] Du latin scolastique quidditas, de quid, « quoi ».
1. (Rare) (Philosophie scolastique) Ce qu’une chose est en elle-même.-
whatness = quiddité. ‘이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
cf. Heccéité 개별성/이것임. 어떤 대상이 다른 것과 구분되는 고유한 개별성을 뜻하며, ‘이것이 왜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 존재인가’에 대한 답.
*참조1*
<이리하여 칸트가 17세기 데카르트 철학에 반대하여 이미 묘사했던 반작용의 운동이 완성되었다. 데카르트주의자들에게서 수학은 정신성을 함축했었다.반대로 꽁트는 특수성 위에, 즉 다양한 과학적 분과학들의 불가환원성 위에, 새로운 정신주의를 세울 것이다. “진실한 철학자는, 계산에 의해서 기하학 또는 역학을 흡수하는 현실 수학자들의 통속적 경향성 속에서도 유물론을 인정한다. 그리고 수학의 일체가 물리학에 대해, 또는 물리학이 화학에 대해, 특히 화학이 생물학해 대해 보다 많이 발언했던 침탈 속에서도, 그리고 결국에는 사회 과학을 마치 생물학자들의 재량권의 단순한 부속물 또는 첨가물처럼 생각하는 가장 탁월한 생물학자들의 변함없는 재량권 속에서도 유물론을 인정한다.특히 그것은 동일한 근본적 악습이며, 연역적 논리학의 남용(l’aubs)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일한 필연적 결과, 하등한 연구들의 맹목적 지배 하에서 상위 연구들의 절박한 조직파괴이다.” - 브륑슈비크(1869-1944), “수학 철학의 여러 단계들(1912)”, p. 301.
- [꽁트가 보기에, 철학자는 학문의 발달이 유물론을 통해 생물학, 사회학, (심리학)을 지배하는 것이 연역적 논리학의 사용처럼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정신성의 발달로 보았다. 이 정신성은 칸트의 이성과 달리 학문의 영역에 따라 달리 실증적으로 다루는 지성에 가깝다. 각 분과 과학은 자기 토대와 자기 논리를 갖는다. 19세기 100년 동안에 화학, 생물학, 사회학, 심리학의 각 학문이 성립한다. - 공론의 장은 축구장, 농구장, 바둑판, 장기판 등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라톤경기장, 요트 세계일주장, 만년설 등반장 등 다양한 장에서 유물론적으로 인간의 신체와 더불어 설명할 수 있지만, 꽁트는 각 영역에서 연관된 사건들(날씨, 고도, 호흡 등등)을 잘 조직화하여 가장 열심히 잘 노력한 자들이 승리(완수)의 기쁨을 맛보며, 많은 이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다고 보았다. 사회학의 실증적 성립는 경험과 인간의 정신성의 승리로 보려고 하였다. (59QKB)]
(11:05, 59QKE) (11:14, 59QK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