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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과 현재(옮겨온 글)

작성자202|작성시간22.10.09|조회수35 목록 댓글 0

대상과 현재


위빠사나 수행은 반드시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야 한다. 이때의 대상이 법이고 이 법이 사물의 이치를 아는 진리다. 알아차릴 대상은 반드시 현재에 있어야 하고 현재에 있는 것은 오직 몸과 마음이다. 인간이 해결해야할 가장 큰 숙제인 즐거움도 현재에 있고 괴로움도 현재에 있다. 현재가 아니면 모두 가상이라서 상상의 세계에 속한다. 

상상의 세계는 관념이라서 실재가 아니기 때문에 존재의 성품을 아는 통찰지혜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존재의 성품을 꿰뚫어서 아는 지혜가 없으면 영원히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해 깊은 암흑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현재를 인식하고 있는 몸과 마음의 감각기관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살고 있는 것은 감각기관이 있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인식하는 모든 문은 몸과 마음에 있는 감각기관이다. 모든 정보가 들어오는 감각기관의 문을 지키지 못하면 온갖 사악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이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항상 지금 여기에 있는 현실에 있다. 그 현실이 근거하고 있는 바탕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몸과 마음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몸과 마음보다 더 진실한 대상은 없다. 

누구나 몸과 마음이 없으면 즐거울 일도 괴로울 일도 없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의 기원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있다.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그 행복은 오직 몸과 마음의 감각기관에서 일어나고 마음이 일어난 것을 인식해서 안다. 그러므로 즐거움의 진원지도 몸과 마음이고 괴로움의 진원지도 몸과 마음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항상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밖에서 원하는 것을 구했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혜의 현장이 몸과 마음인데도 이것을 알지 못해서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다. 이처럼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면 현재 드러나 있는 실재하는 현상과 만난다. 나에게 괴로움이 있다면 즉시 지금 현재 몸과 마음에 있는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이렇게 할 때만이 현재 처한 문제와 맞닥뜨려서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다. 현재 나타난 대상을 알아차리면 알아차리는 마음이 이 순간을 지배해서 괴로움은 잠시 자리를 비켜야 한다. 그래서 알아차린 뒤에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집중을 하면 그만큼 괴로움이 물러나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이렇게 해서 집중하는 시간이 자꾸 늘어나면 나중에 지혜가 나서 괴로움을 물리치는 힘이 생긴다.

내가 가진 문제는 항상 현재에 있다. 그러나 현재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문제를 해결하는 출구를 찾지 못한다. 젊었을 때는 젊음에 취해 알아차리지 못해서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한다. 늙으면 무지가 굳어져 알아차리지 못해서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한다. 병이 들면 화를 내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해서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한다. 죽을 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해서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젊을 때는 혈기가 충천해서 욕망이 가득한 것이 알아차릴 대상이다. 늙으면 잘못된 경험도 진실로 알고 있는 무지의 고정관념이 알아차릴 대상이다. 병이 들었을 때는 병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알아차릴 대상이다. 죽을 때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알아차릴 대상이다. 이런 모든 대상은 언제나 현재 자신이 직면하는 순간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대상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현재 나타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이것을 피하고 다른 것을 구하면 당면한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수행이 안 될 때는 수행이 안 되는 것이 알아차릴 대상이다. 수행이 잘 되어 집중이 잘 될 때는 집중이 잘 되는 것이 알아차릴 대상이다. 망상을 할 때는 망상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망상하는 것이 알아차릴 대상이다. 졸릴 때는 졸음과 싸우지 말고 졸리는 것이 알아차릴 대상이다. 언제나 현재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만이 가장 적절하게 대상을 상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도의 길이며 아무런 걸림이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이다. 

그렇다고 현재 드러난 문제를 알아차렸다고 해서 반드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괴로움에 당했을 때는 괴로움에 당한 것을 알아차리면 괴로움은 순간적으로 소멸한다. 그러나 잠시 뒤에 알아차리는 것을 잊어버리면 다시 괴로움이 더 크게 엄습한다. 이때 더 커진 것은 잠시 억누른 반발력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았다가 오히려 문제가 더 커지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수행을 하면서 작용에 대한 반작용으로 불가피 겪을 수밖에 없는 괴로움이다. 

이처럼 알아차림이 있을 때는 괴로움이 순간적으로 소멸하지만 알아차림이 없을 때도 괴로움이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하려면 분명한 앎이라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분명한 앎이라는 지혜의 단계에 따라 괴로움이 순간적 소멸에서 일시적 소멸로 바뀌고 나중에는 완전한 소멸로 가게 된다. 분명한 앎은 용의주도하게 분별하고 이해하는 앎으로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인데 네 가지가 있다. 앎은 아는 마음이다. 

네 가지 분명한 앎은 첫째, 목적에 대한 앎으로 이익이 있는지 여부를 아는 것이다. 둘째, 적합성에 대한 앎으로 시기와 상황이 맞는지를 아는 것이다. 셋째, 수행의 대상에 대한 앎으로 올바른 대상을 선택하고 있는지에 대한 앎이다. 넷째, 실재에 대한 앎으로 어리석음이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이상의 분명한 앎이 충분히 성숙되어 지속되면 알아차림을 보완하여 괴로움이 더 완전하게 소멸한다. 분명한 앎의 지혜가 성숙되면 실천해서 행하는 알아차림에서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알아차림이 되어 지혜가 더 견고해진다. 

일반적으로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는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로 나눌 때도 있다. 또 크게는 무상, 고, 무아라는 통찰지혜로 나눌 때도 있다. 그리고 경전에서 알아차림과 집중과 분명한 앎이라고 했을 때는 세 가지를 합쳐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한다. 이때 끝에 있는 분명한 앎이 없고 알아차림과 집중만 있으면 선정수행이다. 그리고 알아차림과 집중과 함께 분명한 앎이 있으면 위빠사나 수행으로 분류한다. 

출처: 한국 명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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