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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토 발제문

[전후 유럽 1945~2005] 2권, 14~16장

작성자마루|작성시간26.06.10|조회수74 목록 댓글 0

[전후 유럽 1945~2005 2권] 14~16장

 

3부. 퇴장 송가 1971~1989

 

14장. 줄어든 기대

 

-      유사이래 가장 번영했던 10년이 끝나고 3년이 지나지 않아 전후 경제의 호황은 끝났다. 서유럽의 <영광의 30년>은 대량 실업과 사회적 불만이 동반된 인플레이션과 성장률 하락의 시기에 길을 내주었다. 1971년 8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고정환율제도를 포기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 브레턴우즈 협정 이래로 국제금융 체제의 보루였던 미국 달러의 타 통화 대비 가격은 이때 이후로 변동했다. 이 배경에는 베트남 전쟁의 막대한 군비 부담과 미국 연방 예산 적자 폭의 확대. 달러의 두차례 연속적인 평가 절하로 인플레이션 유발. 1971년에서 1973년 사이 비연료 상품의 국제 가격은 70%, 곡물가격은 100% 상승하고 이어 1970년대 두차례의 석유 파동중 첫번째가 국제 경제를 강타. 1961년에서 1969년 사이 비공산권 유럽의 연간 인플레이션 비율은 3.1%. 1969~1973 에는 6.4%. 1973~1979 11.9%

-      서유럽은 이제 <스태그플레이션> 임금과 가격의 상승과 경제 침체가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을 경험. 경기 하락이 초래한 즉각적인 결과중 하나로 <외국인> 노동자를 향한 태도가 차가워짐. 1970년대 중반 유고슬라비아 국외 이민자 중의 3분의1이 발칸반도로 되돌아 감. 구조적 실업과 석유 수입 가격의 등귀, 인플레이션, 수출 하락이 결합되어 서유럽 전역에서 재정 적자와 국제수지 위기가 초래됨. 그에 더불어 서유럽의 유서 깊은 제조업 경제가 소멸. 70년대 불황기에는 사실상 모든 전통산업에서 빠른 속도로 일자리가 사라짐. 그러나 복지국가 제도 덕에 그리고 짐작컨데 그 시대의 정치적 열정이 감소한 덕에 저항은 자제되었다.

-      미국이 돌연 뒤집어엎은 브레턴우즈 체제를 대신하여 통화와 환율을 조절할 일종의 협약이 필요. 유럽경제 공동체의 창설 회원인 여섯나라는 1972년 <스네이크 체제snake in the tunnel>를 수립하기로 합의. 스네이크 체제는 공인된 환율에서 상하 2.5%까지만 변동을 허용함으로써 그들 통화 사이에 준고정 환율을 유지하자는 협약. 이 협약은 고작 2년동안 지속. 각국별 자국 통화 가치 하락에 대한 국내 압력에 저항할 수 없었음.

-      어쨌거나 현대 복지국가의 가장 큰 수혜자는 중간 계급. 1970년대 전후 체제가 해체되기 시작했을 때 중간계급은 위협적인 상황에 처했다기보다는 사기를 당했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인플레이션, 사양사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공공사업의 축소와 폐지 등. 높은 과세로 악화된 인플레이션 재분배 효과는 중간층이 가장 뼈져리게 느낌. <통제 불능> 문제로 가장 큰 불편을 겪은 자들도 중간계급. 1970년에는 유럽의 민주주의 체제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통제할 수 없다는 공포감이 널리 퍼짐.

-      에타ETA(바스크인의 조국과 자유)는 1958년에 창설되어 독재자 프랑코가 지배하는 스페인에서의 바스크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이끔. 해외 유사 단체들과 연대. 독일의 바더-마인호프 그룹,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프랑스의 비밀군사조직OAS 등. 이들은 에타에 자금과 무기, 피난처 등을 제공하고 훈련과 선전활동을 도움.

-      아일랜드 공화국 임시 정부군은 북아일랜드를 통치가 불가능한 지역으로 만듦으로써 영국인을 내쫓고 북부 6개주를 아일랜드와 통합하려 함.(아일랜드,얼스터(북아일랜드),영국과의 복잡한 관계와 종교적 갈등 설명)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군사 행동은 아일랜드를 통합하지 못했고 얼스터에서 영국인을 쫓아내지도 못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분쟁>은 이미 음울했던 영국의 공적생활을 더욱 어둡게 했으며 1960년대의 태평한 낙관론을 종식시켰을뿐만 아니라 당시 거론되던 <통제 불능>론에도 기여했다. 1970년에서 1981년 사이 이탈리아에서는 붉은 여단등에 의해 단 한해도 살인과 수족 절단, 납치 습격 그밖의 잡다한 공개적 폭력 행위없이 지나가지 않았다. 10년 동안 정치인 세명, 행정관 아홉명, 경찰 예순다섯명, 그리고 약 300명의 사람들이 암살에 희생되었다.

-      이 시기 서유럽 좌파 테러리즘이 거둔 단 한가지 부정할 수 없는 업적은 지역의 정치 단체들에 남아 있던 혁명적 환상을 철저하게 지워 버린 것이다. 좌파의 모든 주류 정치 조직들은 특히 공산당은 어떤 성격의 것이든 폭력에서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노동조합원들과 기타 전통적 노동 운동 대표자들은 지하 조직의 주된 표적이었다. 서유럽 심장부에서 혁명적 전복으로 이어질수도 있었던 시절에 테러리스트들이 계획하고 기대했듯이 사회를 양극화시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온갖 정파의 정치인들을 중도의 안전지대에 결집하도록 몰아 댔다.

-      정신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1970년대는 20세기에서 가장 절망적인 시절이었다. 대다수 젊은이들은 세상을 바꾸기 보다 일자리를 얻는데 더 관심이 많았다. 집단적 목표에 이끌렸던 시절은 떠나갔고 사욕을 채우겠다는 집착만이 존재했다. 험악한 사회에서는 자기 이익의 확보가 공통의 대의 추구에 우선했다. 1970년대의 문화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을 향했다. 1960년대에 인류학이 철학을 대신하여 근본 학문의 자리를 차지했듯이 이제는 심리학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 서유럽에서는 북아메리카에서 그랬듯이 해방 이론가들이 전면에 부상했다. 그들의 목적은 인간 주체를 사회적으로 강요된 속박이 아니라 스스로 원했던 환상들로부터 해방하는 것이었다.

-      독일 철학이 파리의 사회사상을 거쳐 영국의 문화 비평으로 건너갔을 즈음이면 원래 난해했던 그 어휘들은 새로운 세대의 학생과 교사에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것으로 판명된 의미 있는 난해함의 수준을 획득했다. <난해함>은 지적 진지함의 척도가 되었다. <60년대 사상가들이 거둔 가장 큰 업적은 이해할 수 없음이 위대함의 징표라는 점을 청중에게 납득시킨 것이다>

 

 

15장. 새로운 정치

 

-      1970년대에 서유럽의 정치 지형은 두개 정치적 <파벌> 즉 좌파와 우파로 나뉘었고 각각은 내부적으로 <온건파>와 <과격파>로 분열했다. 대부분의 장소에서 선택은 세대를 초월하여 지속된 투표 관행으로서 당의 정책보다는 유권자들의 계급이나 종교, 지역이 결정했다. 사람들은 어디에 살고 어디에서 일하며 얼마를 버는가에 따라 부모들이 하던대로 투표했다.

-      그러나 표면의 연속성 아래에서는 유럽 유권자의 정치 사회학에 구조적인 변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1.전후 몇십년동안 이루어진 사회 이동과 지리적 이동 탓에 고정된 사회적 범주들은 거의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다. 사람들은 부모와 같은 곳에서 살지 않았고 부모와 다른 직업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2.1960년대와 1970년대 초의 번영과 사회 개혁으로 전통적 정당들의 정책과 미래상은 사실상 남김없이 소진되었다. 좌파와 우파의 온건파 정치인들의 성공과 자유주의적 개혁의 분출로 국가의 제도 자체는 논쟁점이 아니고 남은 것은 노사 관계의 미세 조정, 주거와 고용에서 차별 금지, 교육시설의 확충 등 이러한 일들은 중요한 공적 업무였으나 커다란 정치적 논쟁의 소재는 될수 없었다. 3.정치적 충성을 바칠 대안의 존재. 소수 민족의 정치 4.과거의 정치 문화에서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관심사들을 공적 토론의 장으로 끌어냄. 여성과 동성애자, 투표 연령이 18세로 낮아짐에 따른 젊은이들의 열정 등

-      번영의 시대였기에 사람들의 관심은 생산에서 소비로, 생필품에서 삶의 질로 옮겨갔다. 1970년대에는 정책이 전면에 부상했다. <단일 문제> 정당들과 운동 출현. 영국의 <진짜 맥주를 위한 운동CAMRA> 노르웨이 <세금과 요금, 정부 개입의 급격한 축소를 위한 안데르스 랑에 당> 세금 감면을 목적으로 한 덴마크의 글리스트루프 정당은 1973년 총선에서 15.9% 획득. 새로운 정치 집단들 중에 여성 운동, 환경 운동, 평화 운동이 규모와 영향 면에서 특별히 중요했다.

-      영국에서 낙태는 1967년에 범죄의 틀에서 벗어났다. 이탈리아에서 낙태는 5년 징역형을 선고. 1971년 4월 프랑스에서 낙태 경험 있는 유명인 343명 서명으로 형법 개정을 요구하는 청원서. 시몬드 보부아르, 프랑수와즈 사강, 카트린 드뇌브 등. 그 전해에 300명 이상의 여성이 낙태로 유죄 판결. 낙태가 가능해 짐에 따라 여성들의 개인적 환경이 크게 개선되었으나 신생아 수는 꾸준히 감소. 혼외 출산이 아니라면 출산율은 훨씬 더 저하되었을 것. 1980년대 말 혼외 출산이 연간 전체 출산율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영국 28% 스웨덴 52%

-      1973년 프랑스와 영국의 선거에 처음으로 <생태> 후보들이 나섰다. 서독의 환경운동은 제1차 석유파동으로 추동력을 얻어 순식간에 주류 정치에 합류. 녹색당은 1979년 독일의 주 의회 두곳에 대표를 내보낼 정도로 성장. 4년 후인 1983년 실시된 연방선거에서 총투표의 5.6% 획득하여 처음으로 의회 26석을 얻음. 이런 독일 녹색당의 성공은 다소 예외적.

-      단일 문제 정당들과 그 정책이 활성화되고 꾸준히 주류 공적 생활 영역으로 흡수되면서 특히 좌파의 전통적 조직들이 희생되었다. 서유럽 공산당이 가장 취약했다. 소련에 종속되는 것은 모든 공산당의 제일 중요한 인식표였다. 서유럽 공산당은 소련이 소멸하는 순간까지 속박을 받았다. 소련의 지도자들은 현금과 물자로 계속해서 서유럽 공산당들을 지원했으면서도 그들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서유럽 공산당들은 정치적 영향력이 작았으며 가까운 미래에 권력을 장악할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      1969년 빌리 브란트가 이끄는 서독 사민당은 연방 의회 선거에서 연방 공화국 창설이후 처음으로 보수적인 기독교 민주당을 야당으로 내몰고 자유민주당과 연립 정부를 수립. 이후 서독 정부는 독일 민족의 근본적인 통합을 계속 확언한다. 그러나 동독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성을 인정해야만 했다. <독일 민족은 하나지만 독일 국가는 둘이다> 1973년 9월 국제 연합은 동독과 서독을 주권 국가로 인정하고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1년도 지나지 않아 미국을 포함하여 80개국이 독일 민주 공화국을 외교적으로 승인. 1963년 이후 동독은 돈을 받고 서독 정부에 정치범들을 <팔아> 넘겼고 액수는 대상자의 <가치>와 자격으로 결정되었다. 동독이 3만4천명의 수감자를 석방하고 2천명의 아이들을 부모와 재결합시키고 25만건의 가족 재결합 대가로 서독 정부로부터 뽑아낸 금액은 1989년까지 30억 도이치마르크. 독일의 정치 일정에서 <통일>이 사실상 소멸. 50년대와 60년대 여론조사에서 서독 주민중 통일이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느낀 사람은 최대 45%. 그러나 70년대 중반부터는 1% 수준.

 

 

16장. 이행기

-      <유럽은 단지 물질적 성과가 아니라 정신에 관한 것이다. 유럽은 마음의 상태이다> 자크 들로르(1925~2023)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유럽연합(EU)을 만든 현대 유럽의 설계자

-      북유럽의 국가들 내부 변화와 국제적인 변화는 시종일관 강대국들의 거래와 대륙의 동서 분할이라는 상수를 배경으로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지중해 유럽에서는 현지의 문제가 두드러졌다.(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남부 스페인과 포르투갈과 그리스의 대부분 지역에서 생활수준은 동유럽이나 개발도상국 지역과 비슷했다. 1970년대 초 세 나라는 서유럽보다 라틴 아메리카에 더 흔한 권위주의적 통치자들이 다스렸다. 포르투갈-안토니우 살라자르 1932~1970 스페인-프랑코 장군 1936~1975 그리스-1967년 군사정권

-      (그리스) 그리스는 <트루먼 독트린> 선언 이후 마셜 플랜으로 미국의 원조를 가장 많이 받은 수혜자. 1952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 가입. 그리스 군대는 운 좋게도 풍족하게 실질적인 지원을 받음. 군대의 역할은 과연 결정적이었음이 입증된다. 그리스 군대는 8년간 전쟁을 거치며 비타협적인 반공주의, 군주주의, 반민주주의 성격을 띠었으며 자국의 정치 제도나 법보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미국 동료들에 훨씬 더 충성.

-      그리스의 의회 정부는 전혀 작동하지 않음. 보수파와 군 장교들은 나라 전체에 <공산당>의 영향력이 증대하고 있다고 경고. 1967년 4월 파파도풀로스 대령이 이끄는 장교단은 전차와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유명 인사들을 체포하고 주요 거점들을 장악. 이후 7년간 군사 독재. 신문 검열, 파업 금지, 미니스커트와 현대 음악 추방, 사회학과 러시아어, 불가리아어에 대한 연구 금지.

-      모든 농민의 채무를 말소해 농촌 지역에서 초기에 폭넓은 지지. 자급자족 경제를 추구한 대령들은 도시 중간 계급과 대립. 1969년 12월 유럽의회는 그리스를 축출하고 유럽경제 공동체는 군사 정부와 모든 협상을 중단. 1974년 7월 키프로스를 침공한 터키 군대를 막을 수 없는 군부에 대한 반감으로 몰락. 1981년 그리스는 유럽 공동체의 정회국이 됨

-      (포르투갈) 포르투갈은 그리스와 달리 근래에 민주주의라고는 작은 흔적초차 경험하지 못했다. 살라자르 시대 포르투갈의 전반적인 생활 수준은 유럽이 아니라 당대 아프리카와 비슷한 정도. 1960년 연평균 일인당 소득 160달러(터키 219달러, 미국 1,453달러) 유아 사망률은 유럽에서 제일 높았으며 주민의 32% 문맹. 광적인 중상주의자였던 살라자르는 유달리 많은 금 보유고를 유지하며 이를 투자나 수입에 사용하지 않음. 1969년까지 성인의 18%만이 피선거권.

-      국내에 반대파가 없는 상황에서 유일한 저항 세력은 군부. 1961년 아프리카 앙골라 식민지에서 무장 폭동. 1970년대 초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전쟁으로 연간 방위비의 절반 허비. 군 복무 연령대의 포르투갈 남자 넷중 하나는 아프리카에서 근무. 의무 복무기간도 4년으로 확대. 1973년 1만1천명이 아프리카에서 사망. 인구 대비 사망률은 베트남전 미군 사망률보다 높음

-      1974년 4월 군대 운동MFA의 장교들과 참여자들은 살라자르가 선정한 후계자인 카에타누를 내쫓고 임시 정부를 선포. 목적은 민주화와 식민지 해방, 경제 개혁. 1년 안에 모든 식민지가 독립. 1976년 2월 군부는 공식적으로 민정에 권력을 이양. 포르투갈 헌법은 <노동 계급이 민주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의 창출을 통해 사회주의를 이행>할 의무를 지움.

-      (스페인) 프랑코는 진정으로 반동적인 완고한 독재자였으나 이웃나라의 살라자르와는 달리 경제적으로는 현실주의자. 1959년 스페인은 지난 20년간의 자급 정책을 포기했고 일단의 오푸스데이Opus Dei 회 성직자들의 부추김을 받아 국가 안정화 계획을 채택. 스페인은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관세무역일반협정에 가입했고 경제협력개발기금OECD에 준회원으로 가입. 1971년 스페인 국민 다섯명중 한명만 농업에 종사.

-      60년대에 스페인으로 유입된 외환은 대부분 스페인 이민 노동자의 송금이거나 북유럽인들이 휴가차 내려와 쓴 돈. 스페인 경제의 근대화는 주로 다른 나라들의 번영에 따른 부산물. 1973년이 되어도 스페인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아일랜드보다 훨씬 낮았고 유럽경제 공동체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침

-      모든 온당한 정치적 견해는 표현되지 못했고 독립적인 정당은 금지. 1967년까지 스페인에는 헌법조차 없었음. 1968년 프랑코는 처음으로 종교의 자유라는 원칙을 인정. 1975년 프랑코 사망이후 민주주의 이행은 프랑코의 각료들과 그가 임명한 자들이 관리.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사회노동당)의 귀국이 허가되고 노동조합도 합법이 되었으며 스페인 공산당도 합법화 됨. 4년이 지나지 않아 스페인은 17개의 자치 지역으로 나뉘었고 각각은 고유의 깃발과 수도를 지니게 되었다.

-      1970년에서 1976년 사이 프랑코 시대의 정부들은 공공지출과 공공 부문 고용을 늘렸지만 장기적인 조건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음. 1977년 인플레이션은 연간 26%이었고 국가재정은 고갈되었으며 1973년에서 1982년 사이에 스페인은 약 180개의 일자리를 잃었다.

-      1977년 10월 몽클로아 협약을 통해 정치인들과 노동계 지도자들, 고용주들의 협상을 통해 통화의 평가절하, 소득정책, 정부지출 통제, 비경제적인 거대 공공 부문의 구조개혁등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하기로 했으나 이후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국제수지 위기는 더욱 악화됨. 이후 스페인 정치는 다른 서유럽 국가들의 유형처럼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를 중심으로 재편됨.

-      몇 년 전만해도 은밀하게 활동하며 반자본주의적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세 나라의 사회당이 이제는 지배적인 정치세력이 되어 사실상 중앙에서 통치했다. 지중해 유럽 사회는 그토록 후진적이었지만 이제 동등한 조건으로 합류하기를 열망했던 세계에 이미 속해 있있으며 권위주의적 통치에서 벗어나는 이행을 촉진시킨 요인은 무엇보다 이행의 기회였다.

 

-      1972년 유럽공동체는 영국과 아일랜드, 덴마크, 노르웨이의 가입을 공식적으로 승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유럽공동체에 가입하기까지는 9년.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스의 추가로 5800만명의 인구를 유럽공동체에 들여왔으며 그들 대부분은 가난했기에 브뤼셀의 자금으로 운영되는 다양한 정책과 보조금의 대상이 됨. 유럽공동체는 커지면 커질수록 관리하기가 힘들어졌다. 정부 간 각료이사회에 요구된 만장일치의 합의는 끝없는 논쟁을 예고했다.

-      적극적인 정치적 행위를 요구하는 중대한 기준에 합의하는 것보다 소극적인 경제적 통합으로써(관세와 무역 장벽을 제거하고 불리한 지역과 부문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 전진하는 것이 더 쉬웠다. 반면 유럽의 통합이나 협력이라는 방향에서 취해진 정치적 조치는 국가의 자율성을 위협했고 국내의 정치적 주도권을 제한했다. 유력한 국가들의 강력한 지도자들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협력해야 할 자신만의 이유를 찾을 때만 변화는 일어날 수 있었다.

-      첫번째 통화 협력 제도 <스네이크 체제>를 시작한 인물들은 빌리 브란트와 조르주 퐁피두. 헬무트 슈미트와 지스카르 데스탱은 이를 유럽통화제도EMS로 발전시켰고 헬무트 콜과 프랑수아 미테랑은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을 지휘하여 유럽 연합을 탄생시킨다. 1982년 유럽공동체의 평균 소득을 100으로 잡았을 때 가장 부유한 회원국인 덴마크의 평균 소득은 126 그리스의 경우는 44.(미국은 부유한 주와 가난한 주의 간극이 3분의 2) 이러한 수치는 국가 평균으로 지역적 불균형은 훨씬 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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