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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토 발제문

[전후 유럽] 2권 19장 발제

작성자jstory|작성시간26.06.22|조회수36 목록 댓글 0

 

<전후 유럽>(2권)

    - 토니 주트 

 

 

19장 구질서의 종말

 

- 공산주의 몰락에 관한 이야기는 폴란드에서 시작한다. 1978년 10월 크라쿠프의 추기경 카롤 보이티와는 폴란드인으로서는 최초로 교황에 선출되어 요한 바오로 2세가 되었다. 선임자들의 조심스러운 ‘동방 정책’을 포기한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6월 2일 바르샤바에 도착한다. 교황은 엄청난 군중의 경배를 받았다. 교황의 존재는 폴란드에서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강화시켰다.

 

주교들이 때로 불편하게 생각했지만 교황은 폴란드와 동유럽 전역의 가톨릭교도들에게 마르크스주의와 타협하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설득했으며, 교회를 침묵의 성소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권의의 대안으로 제시했다.

 

가톨릭교회는 타협에서 저항으로 태도를 바꿈으로써 지역의 안정을 해쳤으며 당의 권력 독점에 공개적으로 도전했다. 1983년 6월 교황이 폴란드로 되돌아와 바르샤바의 성 요한 성당에서 ‘동포들’에게 그들의 실망과 굴욕, 고통과 자유의 상실을 이야기 했을 때, 공산당 지도자들은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이었는데도 가만히 서서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언젠가 스탈린이 말했듯이, 교황에겐 군대가 없다. 그러나 신은 언제나 군대 편만 들지는 않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병력의 부족을 극적인 장소와 시기를 선택함으로써 보충했다. 1978년 폴란드는 이미 사회적 격동의 위기에 있었다. 식품 가격 급등으로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이래, 제1서기 기에레크는 국내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애썼다. 그 방법은 대체로 외국으로부터 많은 자금을 차입하거나 차관을 이용하여 식품과 다른 소비재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전략은 실패하고 있었다.

 

지식인 반대파와 노동자 지도자들은 야체크 쿠론의 노동자보호 위원회 덕에 과거보다 더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었다. 위원회의 지도자들은 수많은 공업 도시와 해안 도시에서 조심스럽게 등장했던 ‘자유’(즉 불법) 노조에 답하여 1979년 12월에 노동자 권리 헌장 초안을 마련했다. 헌장의 요구사항에는 자율적인 비정당 노조 결성권과 파업권이 포함되었다. 당국이 지식인 활동가들을 체포하고 성가신 노동자들을 해고했던 것은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준비밀 단체였던 노동자 권리 운동이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노동자 권리 운동의 대변인들은 교황의 방문에 힘을 얻었고, 또 국제적인 비난을 두려워하는 정권이 폭력적으로 반격하지는 못하리라는 판단으로 확실히 용기를 얻었다. 공산당이 1981년 7월 1일 최근 10년 사이 3번째로 육류 가격의 즉시 인상을 발표함으로써 경제적 난제의 해결을 시도하자 대중은 운동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보호위원회는 ‘파업 정보 기구’임을 선언했다. 이후 3주 동안 주요 공업 도시에 항의 파업이 확산되었다. 이 노동조합을 이끈 바웬사는 1980년 8월 14일 조선소의 벽을 넘어 전국적인 파업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주모자들을 체포하고 파업 참가자들을 고립시키는 본능적 대응이 실패로 돌아가자, 정권은 분노를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억류되었던 자들을 모두 석방했으며, 폴란드 국가평의회는 파업자들의 주된 요구 사항인 자유 노조의 결성과 등록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파업을 위한 임시 노조의 비공식적 연락망은 8주 만에 폴란드 전역을 종횡으로 관통하여 당국이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단일조직으로 연합했다. 1980년 11월 10일 솔리다르노시치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등록된 최초 독립 노동조합이 되었다. 조합원은 추정치로 약 1천 만 명이었다. 이듬해 9월 전국 창립 대회에서 바웬사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 모스크바는 바르샤바 당국보다 더 근심스럽게 이러한 사태 전개를 주시하고 있었다. 사태는 인접 국가들에 나쁜 선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신중한 지도자들이 최선을 다했지만 솔리다르노시치는 부다페스트와 프라하의 유령을 잠에서 깨울 운명에 처했다.

 

국방장관이던 야루젤스키 장군은 실각한 기에레크를 대신해 1981년 2월 수상으로 승진했고, 10월에는 당 서기가 되었다. 야루젤스키는 군 지지를 확보한데다 소련 지도부가 강력한 조치를 통해 폴란드를 통제할 수 없는 표류 상태에서 끌어내라고 권고했기에 1981년 12월 13일 폴란드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표면상으로는 소련의 개입을 미리 막기 위한 조치였다. 솔리다르노시치 지도자들과 조언자들은 모조리 투옥되었다. 노조는 이듬해에 가서야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그때부터 지하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 1989년 이후를 되돌아보면, 솔리다르노시치의 등장은 공산주의에 맞선 최후의 투쟁에서 단초 역할을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980년에서 1981년 사이에 일어난 폴란드 ‘혁명’은 1970년대에 당의 억압적이고 무능한 경제 관리를 겨냥하여 시작된 노동자 항의가 점점 강해져 최종 국면에 도달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

 

- 1979년 12월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대대적으로 침공하면서 동서 관계는 악화 일로에 있었다. 핵무기는 무기와 창과는 달리 가만히 있을 때에는 확실히 쓸모가 있었지만 전쟁 수단으로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럼에도 핵무기는 전쟁을 억제하는 장치로서 유용했다.

 

- 2차 냉전과 미국의 공공연한 호전성이 기능 장애를 겪으며 삐걱거리던 공산주의 체제에 부담을 가중시켰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소련의 군사력은 히틀러를 물리쳤고 40년 동안 유럽의 절반을 점령했으며 무기에서 서방에 필적했으나 끔찍한 대가를 치렀다.

 

최고치를 기록했을 때는 소련 재원의 30~40%가량이 군비 지출에 전용되었다. 이는 미국이 군사비에 지출한 비율의 4~5배에 해당했다. 소련의 많은 전문가들은 자국이 그러한 부담을 무한정 버텨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결국 수세대에 걸친 군비 증강의 경제적 계산서를 지불할 때가 도래하게 될 터였다.

 

-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에게 대재앙이었다. 징집된 병사들이 입은 엄청난 충격은 나중에야 드러나게 된다. 정치국원 예고르 리가초프가 훗날 미국인 기자에게 인정했듯이,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에 동유럽에서 무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더는 가능하지 않았다.

 

크게 실패하기는 했지만 단 1차례의 신식민주의적 모험의 충격에 그토록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은 소련이 근본적으로 얼마나 취약한 상태였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겪은 재앙은 80년대 초의 가속화된 군비 경쟁 비용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체제의 붕괴를 유발하지는 않았다.

 

브레주네프의 ‘침체의 시절’은 두려움과 무기력, 체제를 관리했던 옛 인사들의 이기심 때문에 무한정 지속되었을 수도 있었다. 체제를 붕괴시킬 만한 대항적 권위나 반체제 운동은 소련에서도 그 종속 국가들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공산당 정권만이 체제를 몰락시킬 수 있었고, 실제로 체제를 몰락시킨 것도 공산당 정권이었다.

 

- 공산주의 기획의 기본적인 전제는 역사 법칙과 집단의 이익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 2가지가 언제나 개인의 동기와 행위를 말해 주었다. 따라서 그 계획의 운명이 인간의 운명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역설적이지만 적절했다.

 

1982년 브레주네프 76세에 사망, 후계자 안드로포트(68세)도 1년 만에 사망, 연이어 72세의 체르넨코도 13개월 만에 사망. 체르넨코의 후계자는 1985년 소련공산당 총서기로 승진한 고르바초프(1931년생, 54세에 총서기). 고르바초프는 개혁가이기는 했지만 급진주의자는 전혀 아니었다. 그는 철저한 당원이었다.

 

- 새 지도자는 70년대에 서유럽을 여행하며 목격한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에 처음부터 빈사 상태의 소련 경제 전반과 머리만 과도하게 큰 조직들의 상호 연관된 비효율과 부패를 정비하는 노력을 집중하려 했다.

 

소련의 주요 수출품인 석유 국제 가격은 70년대 말에 정점에 달한 후 하락하면서 외채가 급증했다. 1986년에 307억 달러였던 채무는 1989년에 540억 달러가 되었다. 1970년대에 거의 성장하지 못한 경제는 이제 사실상 축소되고 있었다. 질적으로 언제나 뒤떨어졌던 소련 생산품은 이제 양적으로도 불충분했다. 그러한 비효율적 체제에서 개혁의 출발점은 가격 결정과 의사 결정 과정을 분산시키는 것. 그러나 이는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장애였다.

 

경제 개혁가가 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라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경제 개혁이 의사 결정의 분산이나 지역 사업의 자율성 부여, 외부 지시의 포기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시장도 없는 상황에서 생산자나 관리자, 기업가는 어떻게 활동할 수 있겠는가?

 

개혁의 본능은 절중하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 관료적 병폐에서 해방되고 원료와 숙련 노동력의 확실한 공급을 보장받은 소수의 인기 있는 사업을 실험적으로 만들어 내야 했다. 그러면 이러한 사업이 다른 유사한 사업에 성공적 모델의 기능을, 나아가 이윤을 내는 모델의 기능을 수행해야 될 터였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법은 그 작동의 전제 때문에, 다시 말해 당국이 행정상의 허가를 통해 효율적인 사업을 설립해야 했기 때문에 실패가 예견되었다.

 

개혁은 해결하려는 문제를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방금 말했듯이 통제력의 상실을 뜻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통제에 의존했다. 공산주의는 실로 통제 그 자체였다. 경제의 통제였으며 지식의 통제였고 운동과 여론과 인간의 통제였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경제와 씨름하면서 두 발로 서기위해서는 소련의 경제적 난제만 따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경제적 난제는 더 큰 문제의 증상에 불과했다. 소련은 중앙 통제 경제의 정치적, 제도적 기득권을 지닌 자들이 운영했다. 당이 경제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 자체를 개혁해야 했다.

 

- 고르바초프는 변화와 쇄신의 필요성에 공감했지만 자신이 성장했던 체제의 핵심 교리를 공격하는 데는 주저했다. 고르바초프는 동세대 사람들처럼 유일하게 가능한 개선 방법은 레니주의의 ‘원칙’으로 되돌아가는 데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레닌주의 기획 자체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은 아주 최근까지도 소련의 지도자에겐 생소했다.

 

고르바초프는, 그리고 그가 통제한 혁명은 결국 스스로 초래한 모순의 크기 때문에 실패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전 과정을 내가 의도한 틀 내에서 관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의도와 틀은 양립할 수 없었다. 검열과 통제와 억압이라는 버팀목이 제거되자, 소련 체제의 모든 결과물(계획 경제, 공적 수사, 당의 독점)은 그대로 붕괴되었다.

 

고르바초프는 기능부전을 제거하여 효율적으로 바뀐 개혁된 공산주의라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의 성과는 인상적이었다. 소련 체제는 언제나 내부로부터 그리고 위에서 주도하여 조금씩 변화했을 따름이었다. 그는 한 가지 변화의 요소에 또 하나의 요소를 차례로 도입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자신이 성정해 온 체제 자체를 침식시켰다. 당 총서기의 막대한 권력을 이용해 내부로부터 당 독재의 창자를 뽑아 버렸다.

 

- 공산주의는 1989년에 왜 그렇게 급격하게 붕괴했을까? 공산주의 체제가 그 내재적 모순 탓에 몰락하게 되어 있었다고 해도, 누구도 몰락의 시기와 방식을 예견하지 못했다. 공산당 권력에 대한 환상이 그토록 쉽게 깨졌다는 사실은 분명 그 체제들이 예상보다 훨씬 허약했음을 드러냈고, 그럼으로써 그 체제들의 초기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환상이든 아니든 공산주의 체제는 오랫동안 존재했다. 왜 더 오래 존속하지 못했는가?

 

한 가지 답변은 일종의 ‘도미노 이론’이다. 한 곳에서 공산당 지도자들이 몰락하자, 다른 곳의 정통성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공산주의 체제의 신용은 부분적으로는 필연성의 구현이라는 주장에 다시 말해 역사 발전의 논리적 귀결로서 정치 생활의 엄정한 사실이자 근대의 풍경에 필연적인 존재라는 주장에 있었다. 이러한 주장이 솔리다르노시치가 확실하게 역사를 역전시킨 폴란드에서 명백히 진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계속해서 그 주장을 믿겠는가?

 

- 한 가지 새로운 요인은 통신 수단의 역할이었다. 특히 헝가리인, 체코슬로바키아인, 독일인은 매일 저녁 자신들의 혁명을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볼 수 있었다. 프라하 주민들에게 거듭해서 보여 준 텔레비전 재방송은 일종의 즉석 정치 교육으로 이중의 메시지를 주입시켰다. 그들은 무력하다, 우리는 해냈다. 그 결과, 공산주의 체제의 중대한 자산이었던 정보에 대한 통제권과 독점권이 소실되었다.

1989년 혁명들의 2번째 현저한 특징은 그 평화로운 성격이었다. 루마니아는 당연히 예외였지만, 차우셰스쿠 정권의 본질을 생각할 때 이는 예견될 일이었다.

 

- 이러한 고려 사항들이 확실히 중국의 공산당 당국을 막지는 못했다. 중국 공산당은 그해 6월 4일 천안문 광장에 모인 수백 명의 평화시위자들을 사살했다. 차우셰스쿠는 할 수만 있었다면 베이징을 주저 없이 모방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호네커가 적어도 그와 유사한 조치를 계획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멸하는 권위주의 체제는 모두 결정적인 순간에 억압과 타협 사이에서 동요한다.

 

- 공산주의 체제에서 살았던 대다수 사람들에게 해방은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는 경제적 경쟁에 대한 갈망은 결코 아니었으며, 무료 사회 복지와 고용 보장, 저렴한 임대료, 그 밖에 공산주의 체제에 부수되는 혜택의 상실은 더욱 아니었다. 동유럽이 상상한 ‘유럽’의 한 가지 매력은 유럽이 풍요와 안전이 함께하고 자유와 보호가 함께하는 전망을 제공했다는 데에 있었다.

 

- 고르바초프는 단지 식민지를 해방시키는 데 그치지 않았다. 개입하지 않겠다는 표시를 함으로써 위성 국가의 지도자들이 획득할 수 있었던 정치적 정통성의 유일한 실질적 원천을, 다시 말하자면 모스크바의 군사 개입이라는 약속을 결정적으로 파괴했다. 지역의 정권들은 그러한 위협이 없으면 정치적으로 벌거숭이였다.

 

고르바초프는 러시아의 공산주의를 구하기 위해 동유럽 공산주의가 몰락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전술적으로 보면 고르바초프는 크게 오판했다. 동유럽의 교훈은 두 해가 가기 전에 그 지역을 해방시킨 자의 영토에서 그 해방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볼 때 고르바초프는 전례 없이 막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역사상 그 어떤 지역 제국도 그토록 급속하게, 자진하여, 그토록 적은 피를 흘리고 영토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고르바초프는 그 일을 계획하지 않았으며 다만 그 장기적인 의미를 흐릿하게 이해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허용하는 원인이자 촉진하는 원인이었다. 1989년의 혁명은 고르바초프의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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