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유럽 1945~2005 2권
20장 분열하기 쉬운 대륙
우리나라는 운이 없었다. 이 마르크스주의 실험이 우리에게 맡겨졌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이 사상을 위한 장소는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마르크스주의는 그저 이 세계의 문명국들이 나아간 길 밖으로 우리를 밀어냈을 뿐이다.
<보리스 옐친(1991년)>
공산주의에서 해방된 동유럽은 한층 더 현저한 두 번째 변화를 겪었다. 1990년대가 지나면서 네 개의 기존 국가가 유럽 대륙의 지도에서 사라졌으며, 열네 개 나라가 탄생하거나 부활했다. 소련의 서쪽 끝에 있던 여섯 개 공화국, 즉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몰도바는 러시아와 더불어 독립국이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슬로바키아 공화국과 체코 공화국으로 분할되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는 구성 단위로 쪼개져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가 되었다.
제국 붕괴의 논리만으로 공유럽의 제도적 재편이 촉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거에 흔히 그랬듯이, 그 지역의 운명은 독일에서 벌어진 사건이 결정했다.
독일의 분할은 제2차 세계 대전 승전국들의 작품이었고, 1990년의 재통일은 그 나라들의 격려나 동의가 없었다면 결단코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왜 그토록 독일의 통일을 허용했는가? 수십 년 동안 소련의 주된 전략 목표는 중부 유럽에서 영토상의 현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영국과 프랑스, 미국처럼 독일의 분할에 만족했으며 서독 정부를 서방 동맹으로부터 이탈시키려는 스탈린의 전후 목적을 오래전에 포기했다. 그리고 소련 지도부는 프랑스와 영국과는 달리 여전히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통일 과정을 방해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독일 민주 공화국 국민은 그 괴로운 역사에 관여하기보다는 잊으라는 권고를 받았다. 1950년대 서독의 망각의 시절이 얄궂게 되풀이되었다. 그리고 연방 공화국 초기에 그랬듯이, 1989년 이후에도 해답은 번영이었다. 독일은 역사로부터 벗어나는 탈출구를 구매하게 된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한 공화국으로 보냈던 그 역사의 대부분 동안 내부 식민지로 취급되었다. 천연자원은 착취되었고, 주민은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그리고 1930년대에는 거의 종족 학살에 가까운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우크라이나의 산물은, 특히 식량과 철금속은 과도한 보조금이 지급된 가격으로 연방의 다른 지역으로 선적되었다.
러시아는 소련 인구의 절반과 국민 총 생산의 5분의3, 영토의4분의 3을 차지했다. 어떤 점에서는(러시아)라는 나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수백 년 동안 사실로든 열망 속에서든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11개 시간대에 걸쳐 있으며 12개의 서로 다른 민족을 포괄하는 (러시아)는 단일한 정체성이나 공통의 목적의식으로 환원되기에는 언제나 너무 컸다.
1991년 12월31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은 사라졌다.
소련의 소멸은 현대사에서 유례가 없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외국과 전쟁을 하지도 않았으며 유혈 혁명도 천재지변도 없었다 거대한 산업국가요 군사 대국이었던 나라가 정말로 붕괴되었다. 그 권력은 서서히 쇠진되었고, 그 제도는 증발했다. 리투아니아와 캅카스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소련의 해체에 폭력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몇몇 독립 공화국들에서는 이후 더 많은 분쟁이 발생한다. 그렇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이 나라는 대체로 저항 없이 무대에서 사라졌다.
미국 정부는 공산주의 체제를 (파괴) 하지 않았다. 공산주의 체제는 저절로 무너졌다. 한편 우크라이나의 청중이 한 달 뒤 부시의 조언을 무시하고 연방에서 영원히 아탈하는 데 압도적으로 찬성했다면, 이는 애국적 열정의 갑작스러운 폭발 때문이 아니었다. 우크라이나 몰도바, 심지어 그루지야에서도 독립은 민족자결이 아니라 자기보존에 관한 문제였다.
소련의 역사에서 소련 탈퇴만큼 소련에 잘 어울리는 것도 없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붕괴, 즉 1993년1월1일 평화롭고 원만하게 완결된 슬로바키아와 체코 사이의 (벨멧 이혼)도 거의 마찬가지다. 언뜻 보면, 벨벳 이혼은 민족적 정서가 공산주의 체제가 남긴 공백 속으로 자연스럽게 돌진해 들어간 교과서적인 사례처럼 보일 수 있다. 민족의 부활이라는 형태로(역사의 귀환)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역사의 귀환은 지역의 많은 지도자들이 이혼을 선전하는 데 썼더 방법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분열으 우연과 상황의 상황의 산물이었다. 또한 인간의 작품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통제력을 장악했다면, 다시 말해서 1990년과 1992년의 선거 결과가 실제와 달랐다면, 이야기는 동일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염도 작은 역할을 했다. 중부 유럽의 한 작은 국가가 두 개의(민족 공화국)으로 분열되는 것은 다른 상황이었다면 불합리하고 용납할 수 없는 일처럼 보였겠지만, 소련의 사례와 발칸 지역에서 전개되 사건들 덕에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1) 개요
냉전 종식 이후 유럽이 직면한 새로운 현실을 다룬다. 1989년 동유럽 혁명과 소련의 붕괴는 유럽의 분단을 끝내는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갈등과 불안정을 초래했다. 저자는 냉전 체제가 사라진 뒤 유럽이 곧바로 통합과 평화의 시대로 진입한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의 부활, 국가 해체, 경제적 격차 확대 등으로 인해 오히려 분열 가능성이 커졌다고 분석한다.
2. 내용
(1) 냉전 종식과 새로운 유럽의 탄생
1989년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들이 잇달아 붕괴하면서 유럽은 냉전 체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가 유지해 온 정치적 질서가 무너지면서 국가들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새롭게 구축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2) 민족주의의 귀환
냉전 시기에는 이념 대립이 주요 갈등 요인이었지만, 냉전 종식 이후에는 민족·종교·역사적 정체성이 중요한 정치적 변수로 등장했다. 특히 동유럽과 발칸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민족주의가 다시 표출되면서 국가 간·민족 간 갈등이 심화되었다.
(3) 유고슬라비아의 해체와 전쟁
유고슬라비아는 냉전 이후 가장 극적인 분열 사례였다. 연방체제가 붕괴되면서 여러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했고, 그 과정에서 보스니아 전쟁과 코소보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는 냉전 이후 유럽에서도 대규모 무력 충돌과 인종 청소가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4) 독일 통일과 유럽의 재편
독일 통일은 냉전 종식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동독과 서독의 경제력 차이는 막대한 통일 비용을 발생시켰고, 통일 독일의 부상은 유럽 정치 질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유럽 국가들은 독일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는 동시에 유럽 통합을 강화하려 했다.
(5) 유럽 통합의 진전과 한계
유럽연합(EU)은 정치·경제 통합을 확대하며 새로운 유럽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 하지만 동유럽 국가들의 가입 과정에서 경제적 격차와 사회적 불균형 문제가 드러났다. 따라서 유럽은 통합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분열의 위험을 안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3. 핵심 주장
저자는 냉전 종식이 곧 유럽의 완전한 통합을 의미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냉전이 억눌러 왔던 민족주의와 지역 갈등이 다시 등장하면서 유럽은 새로운 형태의 분열에 직면하였다. 따라서 유럽의 안정은 단순한 체제 전환이 아니라 민주주의, 경제 발전, 초국가적 협력을 통해 지속적으로 관리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4. 질문
냉전 종식은 유럽 통합을 촉진한 사건인가, 아니면 새로운 분열을 초래한 사건인가?
독일 통일은 유럽 전체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는가?
5. 결론
냉전 이후 유럽이 통합의 시대를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분열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 민족주의와 지역 갈등이 재등장했고, 경제적 불균형 역시 새로운 문제로 부상하였다. 따라서 현대 유럽의 역사는 ‘통합’과 ‘분열’이라는 두 흐름이 동시에 전개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핵심적으로 저자는 유럽의 평화와 통합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정치적 노력과 협력을 통해 유지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21장 청산
유럽에서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한다면, 전쟁은 발칸 지역의 일부 저주받을 어리석은 인간들이 만들어 낼 것이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체코슬로바키아의 평화로운 분열은 같은 해 유고슬로비아를 덥친 파국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1991년에서 1999년 사이에 수십만 명의 보스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알바니아인이 동료 시민들의 손에 살해되거나 강간당하고 고문을 당했다. 그 밖에 수백만 명이 집에서 쫒겨나 추방되었다.
유고슬로비아의 해체는 운명이 아니라 인간의 작품이었으며, 이 점에서 다른 공산 국가들의 해체와 유사했다. 유고슬라비아의 비극의 압도적 책임은 독일이나 다른 외국의 정부가 아니라 베오그라드의 정치인들에게 있었다.
공산주의에서 벗어난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계급)이라는 카드는 내버려졌고, 내부에 이용해 먹을 만한 상이한 민족 집단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새로운 공적 범주들, 즉 (민영화)나 (시민사회), (민주화)가 또는 이 셋을 전부 포괄했던 유럽이)새로운 정치 영역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발트 국가들이나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에서 공산주의 체제 이후의 정치인들은 소수 민족들의 존재를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 없이 공산주의라는 과거를 벗어던지고 민족 독립에 호소하면서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민주주의를 즉시 건설할 수 있었다.
서방이 소심하다는 증거에 용기를 얻은 세르비아계 군대는 7월 11일 믈라디치의 지휘를 받아 뻔뻔스럽게도 이른바 국제 연합의(안전지대)인 보스니아 동부의 스레브레니차에 진입했다. 당시 겁에 질린 무슬림 난민으로 넘쳐나던 스레브레니차는 무장한 네델란드 병사로 구성된 400명의 평화유지군 파견대의 공식적인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믈라디치의 부하들이 도착했을 때 네덜란드 대대는 무기를 내려놓았고 세르비아계 군대가 무슬림 사회를 뒤져 남자들과 소년들을 체계적으로 골라냈을 때에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다음날, 물라디치가 남자들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이라고(장교의 명예를 걸고) 얘기한 뒤에, 그의 부하들은 겨우 열세 살밖에 안 된 소년들이 포함된 무슬림 남자들을 거의 전부(7,400명) 죽임을 당했다. 네덜란드 병사들은 안전하게 고국으로 돌아갔다.
스레브레니차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최악의 대량 학살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최악의 경우였지만, 공산주의 이후의 체제는 어디서나 어려움을 겪었다.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에서 권위주의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이행 과정은 후진적 농업 경제의 급속한 현대화를 동반했다.
공산주의 체제가 떠넘긴 많은 유산 중 경제적 유산이 가장 거치적거렸다. 슬로바키아나 트란실바니아, 실레지아(실롱스크)의 노후한 산업 설비는 경제적 기능 장애와 환경에 대한 무책임을 결합했다.
공산주의 체제 이후의 정부들은 기본적으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보조금을 지급받던 사회주의 경제에서 시장 주도의 자본주의로 하룻밤 새에 단번에 전환하는(빅뱅) 방식이었다. 다른 하나는(계획 경제) 중에서도 기능이 터무니없이 엉터리인 부문을 조심스럽게 골라 매각하는 동시에 주민에게 가장 중요한 측면들, 즉 저렴한 임대료와 직업의 보장, 무료 사회 복지를 최대한 보존하는 방법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통화 태환성과 무역 자유화, 민영화가 추가로 강조되었는데, 모두 클라우스가 공연한(대처리즘)에 보조를 맞추기 위한 조치였다.
제1진 탈공산주의 국가들은 1990년대 초 경제적 절망의 구렁텅이를 빠져나온 뒤에 더 안전한 토대 위에 재등장했다. 이 나라들은 서방의 투자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고, 종국에는 개선을 이루어 유럽연합에 가입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폴란드와 체코, 에스토니아, 슬로베니아, 헝가리 같은 더(선전적인)탈공산주의 국가들은 빈곤층과 노년층을 희생의 대가로 치르면서도 몇 년 동안 불편을 감내하면서 국가 사회주의에서 시장자본주의에 이르는 간극을 메울 수 있었다고 결론짓고 싶다.
진짜 문제는 재원의 처분 방법이었다. 공산 국가의 경제는 왜곡되거나 비효율적으로 운영되었겠지만 에너지와 광물, 무기, 부동산, 통신매체, 교통망 등 잠재적으로 이익이 될 만한 많은 자원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탈공산주의 사회에서 실험실이나 농장, 공장을 관리할 줄 아는 사람들(그래서 국제 무역을 해 봤거나 거대한 조직을 운영한 경험이 있는 자들)과 일이 되도록 만드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은 당내 인사들, 즉 지식인과 관료, 노멘클라투라뿐이었다.
※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는 공산당위원회로부터 국가, 정당, 노동조합 등에서의 결원에 대해 후보로 선출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 용어는 스탈린 집권 이후 특권적 지배 계층을 지칭하기도 하며, 라틴어에서 유래한 러시아어입니다.
동유럽의 많은 사람들, 특히 마흔 살을 넘긴 사람들은 물질적 보장과 저렴한 숙식비, 역시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했던 서비스의 소멸에 큰 불만을 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꼭 공산주의 체제의 회복을 열망했다고는 할 수 없다.
개방 사회로 나아갈 준비가 가장 덜 된 자는 노인이었다. 젊은 새대는 외국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쉽게 얻을수 있었다. 이 나라들의 젊은 유권자들은 세계주의적 시각을 얻고 심지어 영악해졌지만, 이는 부모와 조부모 세대의 불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슬로바키아가 독립한 지 10년이 지난 후 실시한 조사를 보면 청년들은 세대 차이를 분명하게 느꼈다. 젊은이들은 1989년 이전의 과거와 완전히 절연되었고 당연히 그 시기에 관해 아는 바도 없었다. 그들은 탈공산주의 슬로바키아라는 멋진 신세계에서 자신들의 부모가 빈둥거리기만 하며 무능하다고 불평했다. 부모 세대는 자녀에게 도움도 조언도 줄 수 없었다.
이러한 세대 차이는 어디서나 정치적 귀결을 낳았다. 나이 들고 가난한 유권자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제공하거나 신자유주의적 합의에 대해 극우 민주주의적 대안을 제시하는 정당들의 호소를 민감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소련의 해체는 나이 든 러시아인들에게는 깊은 수치의 근원이었다. 그들 상당수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가 러시아의 (근서near West)를 흡수하고 자국이 이를 막지 못한 데 대한 소련 군부의 분노를 공유했다.
지식인이 몰락한 한 가지 이유는 이렇다. 그들은 반공주의의 윤리학, 즉 개인과 국가 사이의 아노미적 공간을 메우기 위해 도덕적으로 깨어 있는 시민 사회를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는 시장 경제 구축이라는 실질적인 용건에 밀려났다. 중부 유럽에서 (시민 사회)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소수의 외국인 사회학자들이나 관심을 가질 낡은 개념이 되어 버렸다.
정화법은 체코 사회에(벨벳 혁명)이 전개된 방식에 관하여 냉소주의가 널리 퍼지는 데 일조했다. 체코 공화국에서 (정화)는 지난 과거를 공정하게 다루기보다는 새로 등장한 엘리트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보였다.
※ 정화법 : 모든 공직자와 장래에 공직자가 되려는 자들이 옛 정보기관과 연루되어 있는지 조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벨벳 혁명(체코어: sametová revoluce, 슬로바키아어: nežná revolúcia)은 1989년 11월 17일부터 11월 28일까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비폭력적 권력 이양입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1948년부터 공산당 일당 체제가 유지되었으며, 계획 경제와 정치적 억압이 지속되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 소련의 개혁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가 동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치면서 민주화 요구가 확산되었다.
1. 개요
냉전 종식 이후 유럽 사회가 20세기의 폭력적 과거와 어떻게 마주했는지를 다룬다.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파시즘, 공산주의 독재 등 유럽이 경험한 비극적 역사에 대한 기억과 평가가 이 시기 중요한 정치·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저자는 냉전이 끝난 뒤 비로소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본격적으로 재검토하고, 역사적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2. 내용
(1) 과거사 문제의 재등장
냉전 시기에는 동서 진영 대립이 우선시되면서 과거사 문제에 대한 논의가 제한적이었다.
서유럽에서는 전후 재건과 경제성장이 우선 과제였다.
동유럽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공식적인 역사 해석을 독점하였다.
따라서 전쟁 범죄, 협력 행위, 정치적 탄압 등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냉전이 끝나자 그동안 억눌려 있던 역사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2) 홀로코스트 기억의 확대
1990년대 이후 홀로코스트는 유럽의 집단 기억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연구와 교육이 확대되었다.
각국은 박물관과 추모시설을 건립하였다.
과거 나치 정권에 협력했던 개인과 기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저자는 홀로코스트 기억이 유럽의 새로운 도덕적 기준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3)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평가
동유럽 국가들은 공산주의 독재의 유산을 정리해야 했다.
주요 과제는 다음과 같았다.
비밀경찰 문서 공개
정치범 문제 조사
공산당 지도자 책임 규명
피해자 명예 회복
그러나 국가마다 접근 방식은 달랐다.
일부 국가는 적극적으로 과거를 조사했다.
일부 국가는 정치적 갈등 때문에 청산 작업이 제한되었다.
(4) 기억의 정치
역사 기억은 단순한 학문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였다.
각 국가는 자신들의 역사적 경험을 다르게 해석했다.
예시
서유럽은 파시즘과 홀로코스트를 중심으로 기억했다.
동유럽은 공산주의 억압과 소련 지배의 경험을 강조했다.
이 때문에 유럽 내부에서도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발생했다.
(5) 유럽 정체성과 역사
저자는 현대 유럽이 공통의 기억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려 했다고 본다.
특히 인권, 민주주의, 관용, 법치주의 등의 가치가 과거의 비극을 반성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모든 국가가 동일한 기억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므로 완전한 역사적 합의는 쉽지 않다고 지적한다.
3. 주장
저자는 냉전 종식 이후 유럽이 직면한 중요한 과제는 경제 발전이나 정치 통합만이 아니라 과거와의 대면이었다고 주장한다.
유럽은 나치즘, 홀로코스트, 전쟁 범죄,공산주의 독재 등의 경험을 기억하고 평가하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유럽적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과거 청산은 단순히 역사 문제를 해결하는 작업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과정이었다.
4. 질문
냉전 종식 이후 과거사 청산이 중요해진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 기억은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과거사 청산이 민주주의 발전에 반드시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가?
유럽연합은 다양한 역사 경험을 가진 국가들 사이에서 공통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가?
5. 결론
제21장 「청산」은 냉전 이후 유럽이 과거의 폭력과 독재, 학살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했는지를 분석한다. 저자는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성찰하는 과정이 현대 유럽 민주주의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고 강조한다. 또한 역사적 기억은 국가마다 다르게 형성되며, 유럽 통합 역시 이러한 다양한 기억과 해석을 조정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