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와이트 무디의 생애
여러분들은 무디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향한 무디의 열정과 감동을 맛보게 되기를 원한다. 아울러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했던 인물로서, 바울의 고백과 같이 빚진 자로서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D. L. 무디는 평신도 훈련을 위하여 최초로 성경 연구원을 설립하였고, 북미 최초의 복음 서적 기관인 기독교 서적 보급협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무디의 전도 방법은 매우 다양하여서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전도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였다. D. L. 무디는 육십 이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최후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임종하던 날 밤, 새벽 세시까지 그의 사위인 피트(A. P. Fitt)가 곁을 지키고 있었고, 이어서 그의 아들 윌 무디가 교대하여 간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디는 약 한시간 동안 잠을 잔 후 깨어나 작은 목소리로 “이 땅은 물러가고 하늘나라가 내 앞에 열리고 있구나.”라고 말했다. 옆에서 간호하고 있던 아들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고 잠을 깨우려 하였다. 그러자 “윌아 이것은 꿈이 아니란다. 참으로 아름답고 황홀하구나. 이것이 죽음이라면 죽음이란 달콤한 것이야, 이곳에는 골짜기가 없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계신다. 나는 가야만 해.” 무디는 계속하여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마치 다른 세계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것 같았다. 그의 일생은 참으로 값진 삶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삶에 함께 하셨으며, 그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이 짧은 지면을 통하여 그의 육십 년이나 되는 일대기를 기록하여 발표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부분만을 拔萃(발췌)하여 여러 학우들에게 보고하기로 한다. 많은 도움되었으면 좋겠다.
D. L. 무디의 어린 시절
무디는 1837년 2월 5일 에드윈 무디와 벳시 홀톤 사이에서 7남매 중 여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1841년 5월 28일 어린 무디가 학교에 다닐 때였다. 그의 부친 에드윈 무디는 일터에 나갔다가 옆구리의 통증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후 1시경에 비틀거리면서 침대로 다가갔으나 몇 분 안되어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무디가 기억하는 최초의 큰 사건이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래서 과부가 된 무디의 어머니는 자연히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자녀들을 더욱 강하고 훌륭하게 키우는 역할을 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남편이 죽은 후 한 달 후에 쌍둥이를 낳았다. 게다가 남편이 파산한 상태에서 죽었으므로 생계를 꾸려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를 보고 측은히 여긴 이웃에 사는 여인이 자녀들을 고아원과 같은 수용시설로 보내라고 말하였지만 그녀는 “이 두 손이 멀쩡하게 있는 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인은 “한 여인이 일곱 명의 아이들을 양육시키려고 한다면, 이 아이들 모두는 아마도 감옥 신세를 지든지 아니면 교수형을 당할 수도 있지요.”라고 말하였다. 무디의 어머니는 열심히 일하였으며 그래서 그의 자녀들 중 어느 하나도 감옥에 들어간 사람은 없었다. 무디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만일 모든 사람이 나의 어머니와 같다면 더 이상 감옥이 필요 없게 될 것이다.”고 말하였다.
홀어머니가 그 많은 자녀들을 돌보아야 했기 때문에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은 오늘날 가정에서처럼 그다지 철저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먼저 하나님과 그 의를 구하는 내면적이고 진실한 신앙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주었다. 모친의 신앙교육으로 인해 활달한 친구들 그 누구보다도 ‘순전한 신앙 안에 세워져 있었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흠없는 자’였다. 이 영리하고 고집 센 시골 청년은 정말 누구보다도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졌다. “하나님을 신뢰하라” 무디의 모친은 소박한 신앙을 담은 이 간결한 문장을 신조로 삼았다. 그래서 모친은 어린 자녀들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며 고아와 과부의 힘이 되신 그분께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무디의 어린 시절은 뉴잉글랜드의 다른 소년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학교에 다니면서 읽기, 쓰기, 등 기초 교육과 대수학(代數學)을 배웠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으므로 일을 하면서 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무디가 다니던 학교에는 학생들을 매로 가르쳐야 한다는 선생들과 매 없이 사랑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선생님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학급에 미모의 여선생이 부임해 왔다. 그녀는 매 없이 사랑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그룹의 선생이었다. 그녀가 하나님께 사랑으로 가르칠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할 때면 학생들은 감명을 받곤 하였다. 학교 수업이 수주일 계속되었지만 학생들은 매를 구경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언제나 모든 일에 주동자였던 무디가 규칙을 위반한 최초의 학생이 되었다. 학생들은 다시 매가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다정하게 “나는 만일 내가 학생들을 사랑으로 다스릴 수 없다면 교사를 그만 두기로 결심했단다. 그러니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규칙을 지켜주지 않으련?”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선생님의 사랑으로 무디는 그녀를 열심히 따르는 학생이 되었다.
무디가 여덟 살이 되던 몹시 추웠던 11월 어느 날이었다. 형들이 집으로 찾아와 나를 위한 일터가 마련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무디는 그곳에 가기를 매우 싫어하였다. 그러나 형들 사이에 논의가 있은 후라서, “너는 가야만 한다”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무디는 그린필드를 향하여 출발했다. 그는 언덕에 올라가 정들었던 집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무디는 그때 두려움을 느꼈고, 그래서 “나 내일 아침 동이 틀 때에 출발하겠어.” 라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있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다. 무디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 갑자기 형이 “드와이드야, 네게 1센트를 줄 사람이 오고 있구나.” 그때 무디는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하고 물었다. “저 분은 이 도시에 처음 온 소년에게는 누구에게나 1센트를 주시는 분이지.” 나는 그분이 뒤뚱거리면서 걸어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다가와 내 모자를 벗기고 머리 위에 손을 얹은 후에 형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이 도시에 처음 온 것 같은데?” “예 그렇습니다. 오늘 방금 왔는걸요.”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에게 독생자가 있었는데 그를 세상에 보내 주셨지,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단다. 그가 죽은 것은 우리들의 죄를 사하기 위함이었지…”그렇게 단 5분 정도 말하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1센트 짜리 동전을 꺼내어 내게 주었다. 나는 그 때 만큼 부자가 된 기분을 가진 적이 없었다. 나는 내 머리를 만져주던 그 노인의 손길을 평생 잊지 않고 있으며, 그의 음성은 내 귓전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고 있다.
무디의 집에 있던 유일한 서적은 성경 한 권과 경건 서적 몇 권이었다. 무디 여사는 매일 아침마다 그 자녀들에게 그 책들을 읽어 주었다. 그녀가 다닌 교회의 에베렛 목사는 과부가 된 무디 여사가 시련을 당하는 동안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드와이드는 목사의 집에 거처하면서 일을 도와주곤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주일날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지루한 일이었다. 더우기 설교의 내용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일저녁이 되면 마치 감옥에서 탈출한 사람처럼 밖으로 뛰쳐나와 환호를 울리고 모자를 벗어 던지곤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무디에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도록 충고하였다. 그러나 무디는 “기도를 해 보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아요” 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런데 그가 여섯 살쯤 되었을 때, 한번은 담장이 무너져 밑에 깔리게 되었다. 그때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위급한 상황 중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고 그 즉시로 담을 밀쳐낼 수 있었다. 그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위급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드와이드 무디의 회심
드와이드 무디는 성숙하여 가면서 어떤 변화를 갈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처해 있는 환경은 항상 제한되어 있었다. 비로소 그는 교육의 가치를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려 하였다. 1854년의 어느 날 그는 나무를 잘라서 운반하는 일을 하면서 같이 일하고 있던 그의 형 에드윈에게 “나는 이 일에 진력이 나 버렸어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아,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도록 하겠어.” 무디에게는 보스톤에서 양화점을 경영하는 두 명의 삼촌이 있었으므로 그들로부터 일자리를 구하려 했으나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다른 형이 일하던 매사추세츠의 클링톤(Clinton)으로 향하게 되었다. 거기는 책과 문구류 등을 파는 상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도 만족할 수가 없어 다시 보스톤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향수병을 앓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일자리를 구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다시 삼촌들에게로 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삼촌은 드와이트에게 “만일 네가 지정된 장소에서 기숙하면서 마운트 베르논(Mount Vernon) 교회와 그 주일 학교에 다니며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지 않기로 약속하면 내가 경영하는 가게로 데려오겠다”고 말하였다. 드와이트 무디는 그 조건을 수락하여 이 가게의 점원 일을 맡았다. 당시에 그가 가진 꿈은 십만 달러를 벌어서 성공적인 상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부적인 사업에 친숙해져 가고 있었다. 비록 도시의 생활 방식과 예절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으나 품위나 외모에 있어서 부족한 점을 천성적인 위트와 기지로 보완하여, 낮은 위치에서 판매원으로서의 가장 높은 지위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보스톤에 머물고 있는 동안 최초로 중요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즉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처음에 교회와 주일 학교를 그의 삼촌과의 계약으로 인한 의무감에서 형식적으로 다니고 있었다. 보스톤에 있는 베르논 교회는 에드워드 커크 박사의 열변과 거룩한 열정, 그리고 불타는 정열을 살리기 위하여 특별히 부흥 교회로 조직되었는데 이 같은 방식은 커크 박사의 진지하고 교양 있는 설교도 젊은 무디를 감동시키지는 못했다. 무디는 예배당에서 강단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좌석을 선택했으며 한 주간의 고된 업무에 지쳐서 주일예배 중 대부분의 시간을 졸면서 보냈다. 무디는 주일 학교에서 에드워드 킴볼이 가르치고 있던 반에 배치되어 공부하고 있었다 . 킴볼은 무디에게 성경을 전해주면서 그날 배울 곳이 요한복음이라고 말했다. 무디는 그 성경책을 받은 다음 요한복음을 찾기 위하여 구약 전체를 더듬거려야 했다. 이때 다른 학생들은 무디가 성경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서로의 팔꿈치를 찌르면서 비웃었다 당시의 상황을 무디는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계속해서 그 부분에 엄지손가락을 끼고 있었다. 만일 내가 그 곤경을 벗어나게 된다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될 것이다 고 말했습니다.” 이 사건은 무디가 성경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했었는지에 대한 사실을 보여 주었다. 이 일을 통하여 그는 성경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얼마 후 킴볼은 무디에게 영적인 문제를 말해주기로 작정하고 힐톤에 있는 구두 가게로 무디를 만나러 왔다. 킴볼은 무디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무디는 그때 영적인 빛이 비취었고 그 빛은 그 이후로 결코 어두워지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부터 무디의 삶은 완전히 변했다. 도덕적인 규범에 얽매여 고통스러워하던, 그저 수동적이기만 하던 수동적인 신앙생활이 한 순간 기쁨을 갖고 봉사하는 삶으로 변했다. 이제까지는 그저 의무적으로, 억지로 교회에 출석했지만 그 이후로 약 오십 년 동안 그는 자신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이 일에 관해서 그가 즐겨 쓰던 말이 있다. “제가 회심하기 전에는 십자가를 향해 가려고 애를 썼지만 회심한 후로는 십자가로부터 전진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때는 구원받으려고 매진했지만 이제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매진합니다.”
언젠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내가 회심을 했던 그날 아침 나는 밖으로 나가서 만물을 사랑스런 모습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이전에 결코 지상을 비추는 밝은 태양을 그토록 사랑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을 때에도 내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디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하나님을 새 주인으로 섬기려고 노력하였다. 킴볼은 그가 금요일 저녁마다 열리는 정기 기도회를 인도할 때 그 곳에 참석했던 무디는 몇 차례를 제외하고는 잡담하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킴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가 담당하고 있던 주일 학교 학급에 무디가 들어왔을 때, 영적인 면에서 심령이 그처럼 어두운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분명하고 명확하게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더 나아가 보다 광범위한 공적인 지위에서 유용한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크리스천 사역의 시작
회심한 청년 무디는 사업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동일한 열심과 야망을 품게 되었다. 일부 교회 어른들은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심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 첫 기쁨에 잠겨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자기의 열심과 몫을 해낼 수 있는 길들을 찾고 싶었다. 커크 박사와 교회의 직분자들은 무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 놀라운 진보를 나타낸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 후 무디는 시카고에 도착한 후 위스월의 구두 가게에 취직하게 되었다. 판매원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거친 고객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으며 그 같은 사람들을 다루는 데에 특별한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무디가 매우 즐거이 소개하던 것으로서 자신에 관한 한가지 웃음거리가 그 시기에 생겨나게 되었다.
무디는 시카고에서 맞이한 첫 주일에 제일침례교회의 주일 학교 아침 반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학생들 중에는 장차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이 십대의 소녀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주일 오후에는 시카고 거리와 웰스가의 모퉁이에 있는 주일 학교에서 작은 일을 맡아 봉사했으며, 곧 한 반을 맡고 싶다고 교장 선생님께 제안했다. 교사가 확보되어 있으나 학생은 불과 십육명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만일 무디 스스로 한 학급을 만들 수 있다면 교사로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다음 주일날 무디는 거리에서 거칠고 불순한 열 여덟 명의 건달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구원을 받아야 할 학생들이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그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의 집에서 봉사할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을 포함한 신입생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한 가지 재능을 하나님을 위하여 온전하게 사용하였다.
1858년 가을 무디는 웰스가 사역이 성공한 것이 보다 큰 사역으로의 부르심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그 도시의 다른 지역에서 보다 큰 규모의 주일학교 사역을 새롭게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무디는 자신이 이끄는 주일 학교를 빈 술집에서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얼마 되지 않아 참석하는 학생들을 다 수용하기 위해서는 더 넓은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시장이 그 도시의 하류층에 사는 어린이들을 구원시키고자 하는 무디의 의도를 이해하여 노스 마켓홀(North Marker hall)을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 건물은 시카고의 거대한 시장 지역들 가운데 한 곳에 세워진 공공 회관이었다. 무디 선생은 거기서 친구들과 연합하여 주일학교 사역을 시작했다. 이 주일학교가 후에 일리노이가(街) 교회로 발전했고 그 후로는 무디 선생 자신이 만년에 교인으로 있던 시카고 애버뉴 교회로 발전했다.
무디가 우선적으로 채택했던 원칙 중 하나는 어떤 학생의 행실이 점점 나빠진다고 해서 그를 추방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적이라는 것은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디는 자신의 학교를 사랑했으며 학생들 또한 그를 사랑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불붙은 나무와 같았고 열정적이었고, 각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침으로 인해 무디와 결속되어 있었다. 한 학생이 그 도시의 다른 지역으로 이사해 갔는데 그 어린 학생은 비록 등교 길이 길고 지루했지만 빠지지 않고 수업에 참석했다. 어떤 사람이 그 학생에게 왜 집 근처에도 좋은 학교들이 많이 있는데 그토록 먼길을 걸어오느냐고 물었을 때, 그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학교들이 다를 학생들에게는 우리 학교처럼 좋게 보일지 모르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왜 그렇지?” “그것은 우리 학교가 먼 곳에 사는 한 사람까지도 사랑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일 오후 주일학교 외에도 소년들을 위한 주일 저녁 예배를 인도하곤 했다. 그는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고백하며 체험을 간증하고 실제적인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무디는 한 주간의 생활 중에서 학생들의 가정을 방문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처음에는 아이들만 대상으로 사역을 하다가 나중에는 부모들에게로 이어졌다. 이렇게 노스 마켈 홀 사역이 ‘부랑아’들의 주일학교에서 더 발전해 감에 따라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 젊은 순회 판매원은 더 이상 사업을 계속하기가 힘들었다, 전에는 술집으로 사용하던 방에서 주중에 복음집회가 열렸고 나중에 이 장소는 선교 회관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연습하고 훈련한 설교가 후에 무디에게는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그가 조금씩 즉흥 연설 능력을 키운 것을 볼 때 이런 훈련의 시간이 그에게는 도움이 되었던 같다.
YMCA 사역
1857년에서 1858년 사이에 일어난 부흥의 결과로 시카고에서 YMCA가 조직되었다. “저는 기독교 청년회를 충심으로 신뢰합니다. 어느 다른 단체보다도 저는 YMCA를 통해 기독교사역에 대해서 많은 걸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뤄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YMCA의 영향력에 대한 무디 선생의 증언이라 하겠다. 그는 이 YMCA 사역을 하면서 수많은 친구들과 후원자들을 얻었다.
무디 선생은 사업을 포기하고 기독교 사역에 헌신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카고에 있는 YMCA사역에 무척이나 열심을 냈다. 그는 그 당시 형성된 기독교 위원회와 YMCA의 사역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하는 동안 이 일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 협회의 서기관으로, 또 사오년 간은 회장으로 있으면서 협회 내의 모든 분야들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성심껏 일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사역의 영적인 필요들이었다.
대부흥 운동의 결과로 정오 기도회가 하루도 빠짐없이 지속되었는데 무디 선생은 이 모임에 가장 애정을 갖고 있었다. 아직 젊은 나이였지만 그는 얼마 안되어 그 모임의 인도자가 되었으며 자기가 하고 있던 선교 사역과 더불어 이 YMCA 사역을 확장시키는 일에도 지속적으로 힘을 썼다.
YMCA 초기 사역의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방법은 단연코 ‘야외’설교였다. 여름마다 무디 선생은 날씨만 가능하다면 매일 저녁 법원 광장에 나왔다. 무디에게는 법원 건물 앞 계단이 강단이었으며, 함께 한 여섯 명의 남녀 젊은이들이 성가대였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 이 예배에 끌려 모여드는 만큼이, 아니 그 행인들 전부가 회중이었다. 그리고 보통은 법원 안 긴 복도 여기저기에 갇혀 있는 죄수들이 건물 밖에서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만한 곳에다가 집회장소를 잡았기 때문에 창살에 다닥다닥 붙어서 경청하는 죄수들도 중요한 회중이었다.
무디선생은 교도소에도 자주 방문했으며 시카고에서는 일명 ‘감화원’이라고 불리는 곳에 가서 수용자들과 얘기도 하고 책도 읽어 주고 기도도 했다. 그는 죄인들의 진정한 친구였다. 이런 사역을 하면서 축적된 자질들, 가령 위급한 일이 벌어졌을 때 신속하게 대처하는 능력, 반대하는 사람들을 막아내는 데 필요한 용기, 회심의 사역과 자기 의무를 꾸준히 해가면서 얻은 인격의 성숙, 이런 모든 것들이 더 큰 영역에서의 사역을 위한 도구들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보상의 원칙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에 불과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마15:23)
헨리 무어하우스의 영향
헨리 무어하우스와의 만남은 무디 선생이 신앙생활과 설교에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무디는 처음으로 영국을 방문해 있는 동안 더블린에서 무어하우스를 만났는데 그 만남은 그저 그 순간뿐인 것 같았다. 무디 선생은 무어하우스를 만났던 자리에 대해서 설명하다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무어 하우스는 제게 와서 자신을 소개하더니만 시카고에 와서 설교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직 수염도 나지 않은 소년이었으며 일 일곱도 안되어 보였어요 저는 속으로 ‘이 소년은 설교할 수 없어’라고 말했죠”
그후 무디가 시카고로 돌아온 다음에 무어하우스는 그곳에 와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다른 일 때문에 무디는 그의 설교를 듣지 못했다. 무디가 그의 부인에게 물었다 ‘설교가 어떻습디까?’ ‘그러니까 , 그는 하나님께서 가장 추악한 죄인들도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전했어요.’ ‘그렇다면 그 사람 옳지가 않구만.’ 그러나 무어하우스의 설교를 들은 무디의 마음은 달라졌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그 놀라운 말씀을 가지고 자신의 일곱 번 째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설교의 마지막 부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 자매들이여, 저는 일주일 내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말하려고 애써왔지만 이 서투르고 우둔한 입술을 가지고는 다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만일 일곱의 사다리를 빌려서 천상에 올라가 전능자 하나님의 존전에 서 있는 가브리엘 천사장을 만나 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얼마만큼 사랑하시는지를 물어본다 해도, 그도 이 말밖에는 할 수 없을 겁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여 하심이니라.” 무어하우스 씨는 뭉뚝한 칼자루로 전쟁을 하던 무디 선생에게 칼을 끝까지 뽑아서 칼자루는 던져 버리고 날선 칼만을 가지고 전쟁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서로가 가진 성격의 강점들을 알고 난 뒤부터 더욱 기쁜 마음으로 서로에게 다가가 친밀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무어하우스 씨가 가진 정감 어린 성품과 주님에 대한 헌신의 마음, 그리고 무디 선생이 가진 뛰어난 상식의 힘과 끝없이 확장되는 영향력이 서로 잘 조화되어 이 두 사람을 복음 사역에 있어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만들어 주었다.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보스톤 가게에서의 첫날밤 이후에 결코 그 분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수년 동안 내 자신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없다고 믿어왔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어떤 일을 해 보라고 제안한 적이 없었다. 시카고에 갔을 때 나는 교회에서 네 개의 의자를 빌린 후 거리로 나가 젊은이들을 데려와서 거기에 앉도록 권했다. 나는 숫자를 채우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학생들을 모으는 일을 하게 되었다. 참석자가 천 명 미만일 때에는 고민이 되기도 했으나, 천이백명 이상으로 늘었을 때에는 의기양양해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도 개심을 하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 나의 눈을 열어 주셨다. 그 때 학교에는 지금까지 만난 여학생들 중 가장 질이 나쁜 학생들로 이루어진 한 반이 있었다. 그 반의 담임 교사가 병이 나서, 내가 그 반을 맡게 되었다. 그 주간에 그 반의 담임 교사가 나를 찾아왔다. 얼굴은 창백했으며 고통스러운 모습이었다. “어디가 편찮으신가요?” 하고 물었다. “의사는 내가 이곳에서 살 수 없으니, 공기 좋은 곳으로 옮기라고 말합니다. 저는 제가 담당하는 학생들 중 한 사람도 그리스도께 인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녀처럼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잠시 후 나는 그녀에게 “학생들에게 지금의 심정을 말해 주면 어떨까요?”라고 말하자. 그는 나의 제의를 승낙하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함께 여행을 출발하게 되었다. 그 여행은 내가 지상에서 가졌던 가장 귀한 여행 중 하나이었다. 우리는 한 소녀의 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소녀를 앞에 두고 그에게 영생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때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 여교사는 생명의 길에 대하여 말한 다음 기도를 제의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이렇게 열흘간을 다니는 동안 마지막 학생까지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헌신하기로 결단하였다. 그녀가 떠나기 전날 밤에 반 학생들을 모아 기도회를 열었다. 하나님은 그 모임을 통해서 내 영혼 속에 꺼지지 않는 성령의 불을 붙여 주셨다. 병으로 죽어가던 그 여교사는 학생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는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 주님을 송축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반 학생 중 한 사람이 그녀를 위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하자 모든 학생이 함께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다음날 저녁 그 교사는 손가락을 위로 가리키면서 천국에서 만날 것을 암시하며 플랫폼에 올랐다. 기차가 멀리 떠나갈 때까지 우리들은 손을 흔들고 그녀를 환송하였다.
무디의 성품에 관하여
무디를 처음 보는 사람이 느끼게 되는 가장 두드러진 성격은 열정이었다. 사도 바울처럼 무디도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1:21)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결국 이 세상에서의 사역을 마감하면서 그러한 삶에 대한 상급을 받았다. “오직 이 한 가지 일을 나는 한다”는 말이 무디가 보여 준 섬기는 삶의 비결이었다.
무디가 주님을 위하여 활동할 무렵에 지나친 비평만을 일삼던 한사람이 있었다. 그가 무디의 설교에 대하여 “당신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면 안됩니다. 문법이 틀리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라고 하며 무디의 설교에 결점이 있음을 지적한 적이 있었다. 이 말을 들은 후 “저는 제 자신이 실수가 많은 자임을 잘 알고 있지요. 그러나 제가 받은 재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께서는 충분한 문법 실력을 가지고 과연 주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습니까?" 라고 물었다. 또 한번은 어떤 집회의 몇몇 강사들 중 한사람으로 선정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무디의 뒤를 이어 나온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무디의 설교가 신문에서 발췌한 기사들로 이루어졌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가 자리를 앉았을 때 무디는 자신은 학식이 부족하다는 사실과 훌륭한 설교를 할 만한 능력이 부족하다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 목사에게 자신의 약점을 지적해 준 데에 대하여 감사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좀더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왜 하나님이 무디를 사용하셨는가?
무디는 19세기의 마지막 기간에 사망했다. 그의 가장 친한 동료이자 친구는 아마 R.A. 토레이 박사였을 것이다, 토레이는 무디 성경 학원의 초대 학장이었고 성경 학원의 커리큘럼을 확립해 그와 동일한 목적으로 세워진 다른 학원들을 위한 하나의 모델로 자리했다. 무디가 사망했을 때, 토레이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 그리고 미국 모든 도시에서 일어난 운동들을 이끄는 세계적인 주도권을 행사했다. 1923년 토레이 박사는 요청을 받아 커다란 추도 행사에서 이 놀랍고도 당대에 가장 위대한 인물에 대해 “왜 하나님이 무디를 사용하셨는가?”라는 제목으로 뛰어난 연설을 행하였다.
“무디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그렇게 경이적으로 자신의 삶에서 나타낼 수 있었을 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광범위하게 사용하신 데는 일곱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첫째, 그는 완전히 주님께 무릎꿇은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그는 기도의 사람으로 가장 깊고 의미 있는 감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셋째,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깊이 있고 실제적인 연구가였습니다. 넷째,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섯째, 그는 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했습니다. 여섯째, 그는 잃어버린 자와 구원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일곱째, 그는 높은 데서 모든 권능을 다루는 아주 명확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아주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
무디의 설교 준비법
무디는 지칠 줄 모르는 성경연구가였다. 여름이 되면 보통 새벽에 일어나서 하루의 일과로 마음이 분산되기 전, 머리가 맑을 때에 하나님과 또 그분의 말씀과 더불어 조용한 시간을 가졌다. 무디의 개인 서재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잘 정리된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무디는 좋은 생각을 얻을 수 있다면 만 리라도 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무디는 다른 설교자들이 설교할 대면 좋은 생각이나 예화가 있는지 아주 세심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좋은 내용을 들었을 때 뒷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수첩을 꺼내는 얼굴이 얼마나 환하게 빛났는지 모른다. 무디는 이런 방법을 통해 날마다 성경을 보다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책을 읽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다가 좋은 내용이 있으면 적어 두는 습관을 가지라고 권했다. 무디가 설교를 준비하는 방법은 크게 변한 적이 없었다.
무디의 설교 준비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어떤 주제나 본문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기로 결정한 후에는 우선적으로 커다란 봉투를 가져다가 그 위에 다음과 같은 제목이나 참고 문구를 적어 놓는다. ‘하나님 나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 ‘구도자 상담법’ 등이다. 무디는 봉투 속에 설교와 주석을 복사한 발췌물들과 신문에서 오려낸 자료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이나 제안들을 메모해 놓은 것이나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일화나 예화 등 고려 중에 있는 주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모든 종류의 스크랩을 모아두었다. 그는 어떤 주제에 대하여 설교하려고 할 때면 언제나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해 두고 발췌물들을 모아놓은 봉투를 살펴본 후 자신이 인용하기를 원하는 요점과 일화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 재료들을 정리해서 설교의 윤곽을 잡은 다음 메모지에 적고 꼭 필요한 낱말들을 적어서 성경에 고무 밴드로 고정시켜 놓았다. 다음으로 제기 될 수 있는 이의들에 대하여 첫 번째 이의, “나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등 무디는 이 같은 이의에 대하여 성경문구를 찾아 인용함으로 대처하도록 하였다. 무디가 택했던 이 설교 준비법은 그에게 즉흥적인 영감을 얻어낼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무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나는 설교를 여러 번 반복할 경우가 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설교 원고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다시 사용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했다.
무디는 참으로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무디의 신학 사상
무디는 1873년부터 1899년까지 19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북미와 영국을 누비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감화력 있는 부흥사”로 소개된다. 무디의 설교는 알미니안 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선포된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스펄젼과 플리모드 형제에게 계몽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알려진다.
세계적인 부흥사를 배출한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의 미국 안에는 조직된 기독교에 사상체계와, 사회적 프로그램에 관한 두 가지 도전이 일어난다.
1. 무디 신학 발생의 사회적 배경
미국은 산업화에 의한 젊은이들의 도시로의 몰입과 그에 의한 농부들의 타격은 1867년 일종의 농민운동인 그랜지 운동을 발생케 한다. 1870년 미국달러의 평가절하 반대를 주창하는 그린백이승주의의 농민 동맹운동의 간헐적인 폭동이 발생한다. 미국사회는 노동자의 폭동과 경제적 곤란으로 공항과 파산상태가 벌어졌고 이는 노동자의 폭동과 경제적 곤란이라는 악순환 속에서 실업자수와 무료배급을 받는 빈민의 수 증가로 가정의 파괴되고 거리는 부랑자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미국역사상 가장 어두운 해인 1877년 철도파업사건은 노동자와 경찰의 충돌을 일으키고 1890-1894년까지 파업으로 노동자와 형사 군대들과의 전투상황을 방불케하는 반복되는 파업과 진압의 대치국면들이 있었다. 이런 사회적인 경제불안은 규범이 없는 혼란 속에서 상대적으로 느끼는 박탈감과 열등감, 기존 가치체계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들이 어우러지는 사회적인 아노미현상을 초래했다.
2. 미국 개신교의 사회적 사상의 배경
진화론의 출현으로 생물학적 진화의 개념이 나타났으며 이는 인간과 다른 동물사이의 경계선을 지워 버리고 창조하는 신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역사와 종교 발전의 진화론적 견해는 하나님께서 특수 계시에 대하여 이 종교를 주셨다는 관념과 함께 성경에 제시된 역사의 계획에 대하여 의문을 제시한다. 이 시대에 나타난 성경의 고등비평설 역시 근본적으로 진화론적인 방법을 성경에 적용한 결과이다.
미국 개신교의 사상의 3조류는 첫째 전통적 전통으로 초자연주의적이며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가진 주의다. 둘째는 낭만적 자유주의 또는 복음의 직접적인 직관적 인식을 강조하여 낭만적 자유주의자들은 과학적 입증의 영역 즉 비평으로부터 종교를 추출하는 진보적 종교주의 경향이다. 이들은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모든 역사 속에 계시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여 진화를 하나님께서 역사 안에서 일하시는 방법으로 조화시켰다. 셋째 과학적 현대주의 경향으로 진리를 현대과학의 방법을 사용하여 탐구하려는 사조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아노미 현상과 전통적인 강령과 사상에 대한 도전과 변화의 맥락 안에서 무디는 그 시대의 갈등과 도전의 양상들을 담고 그의 신앙의 핵심과 메시지를 25년 이상을 전도하면서 선포한다.
3. 무디에 있어서 신학의 역할
일반적으로 부흥사들은 신학적으로 예리하지 못하다는 평판을 갖는다. 조직적인 면에서 볼 때 무디도 이런 부류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이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체계화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신학을 가질 것인가? 갖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을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교리는 승인하고 다른 교리들은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신학자이다. 그의 신학은 그가 믿는 진리에 대하여 그가 선언한 것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미국복음주의는 영혼 구원에 관한 실제적인 면과 개인의 주관적인 종교 경험의 특성에 중점을 둔다. 이런 경건주의 적이고 부흥 지향적인 관심은 미국 독립 운동시대부터 각 교파와 전통적인 교회 및 신학에 결합시켜 교리적인 내용이 없지는 않지만 뚜렷한 조목으로 표출하는 경향이 없었으며 1857 -1858년 각성 운동에 의해 교리적 차이의 중요성을 누그러뜨리자는 태도 속에 복음의 단순성이 강조되고 신조보다 동정이 강조되어 분열을 줄여야한다는 것이 전반적인 경향이었다.
이때 복음주의 영향을 받고 개종한 무디에게 있어 신학은 실제로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 무디는 복음을 전하는 것을 그의 선교적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논쟁을 일으키기 쉬운 ‘이런 교리’ ‘저런 교리’를 설교할 것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그가 신학에 대하여 무관심하다거나 신학을 반대한다는 해석이 나오게 되었다.
4. 무디의 신학적 위치
무디에게 있어서 신학은 무관심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교파들을 적대감을 갖은 진영들로 분열시키는 당파심을 경멸하는 반면에 그들의 신학적 관심의 타당성을 인정하였으며 그 자신의 복음화 사업의 견지에서 복음에 대한 복음주의적 이해를 주장했다.
파멸, 피에 의한 구원, 성령에의 중생으로 인간의 필요와 하나님의 예배에 대한 무디의 이해는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개인구원관과 잘 일치되고 있다. 죄는 인간의 멸망이요 구원은 형별의 대신과 속죄의 견지에서 이해해야하며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개혁할 수 없는 죄인이므로 성령에 의한 중생을 필요로 하고 있다.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종말론에서는 그것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간에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완전해 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나타내 보인다.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적 신앙에 있어 인간의 도리에 대한 그의 호소는 알마니안적이며 다른 강조들은 칼빈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무디 신학의 보수주의적 경향성인 속죄관에는 예수를 하나님과 사람으로 보는 기독론이 함축되어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삼위일체론을 이론적으로나 추상적으로 논의하지 않았지만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긍정은 그의 속죄관에 함축되어 있다.
성경의 보존과 성경, 권위에 대해서는 성경을 아무런 수정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성경은 유일하고 충분한 권위이며 비평적 도움 없이도 성경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성경의 문자적 해석원리를 충실히 따르므로 전천년설을 받아들였다. 무디에게 성경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문자적으로 영감 되어야만 했다. 그에게 있어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본래 의도된 성경의 의미를 따라 성경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성경의 영감을 옹호한 것은 ‘성경을 읽어라’ 즉 어린 개종자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성경을 읽는 것이므로 성경을 사랑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연구법’이라는 설교에서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거하기 위하여 삽으로 돌을 캐내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면서 성경보다 현명하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당신은 사탄의 미혹을 받고 있다’고 선포했다. “고등비평에 대해” 무디는 교회 안에 이러한 분열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것은 부흥사업을 망치는 것이요 교회를 텅텅 비게 만들고 있는 것이니 우리는 비평적 논쟁을 중단하고 주님의 일을 함께 할 수 없는가! 라고 외쳤다.
무디의 선포는 단순히 알미니안화된 미국 복음주의 산물이 아니다. 그는 복음주의적 방법론의 개혁자였다, 무디는 학구적 신학자가 아니었으므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주권의 성가신 문제를 피하려했고 부흥사로서 자연히 전자를 강조했으나 후자를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 안에서 일하게 만들고 새로운 개종자들을 교회에 보내고 다양한 신학적 전통들을 하나로 연합하여 서로 협조하도록 하여 교회를 굳건히 세우려 애썼다. 그는 복음의 복음주의적인 이해에 기초한 초교파 주의 정신과 실천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전천년설을 받아들였으나 전천년설의 종말론을 상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전통적 교리에 대한 다양한 지적 도전들을 한데 묶어서 모두 ‘불신심’으로 처리함으로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했지만 저들의 현대사상에의 적응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자들을 받아들이는 정신적인 자유가 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여러분들은 무디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향한 무디의 열정과 감동을 맛보게 되기를 원한다. 아울러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했던 인물로서, 바울의 고백과 같이 빚진 자로서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D. L. 무디는 평신도 훈련을 위하여 최초로 성경 연구원을 설립하였고, 북미 최초의 복음 서적 기관인 기독교 서적 보급협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무디의 전도 방법은 매우 다양하여서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전도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였다. D. L. 무디는 육십 이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최후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임종하던 날 밤, 새벽 세시까지 그의 사위인 피트(A. P. Fitt)가 곁을 지키고 있었고, 이어서 그의 아들 윌 무디가 교대하여 간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디는 약 한시간 동안 잠을 잔 후 깨어나 작은 목소리로 “이 땅은 물러가고 하늘나라가 내 앞에 열리고 있구나.”라고 말했다. 옆에서 간호하고 있던 아들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고 잠을 깨우려 하였다. 그러자 “윌아 이것은 꿈이 아니란다. 참으로 아름답고 황홀하구나. 이것이 죽음이라면 죽음이란 달콤한 것이야, 이곳에는 골짜기가 없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계신다. 나는 가야만 해.” 무디는 계속하여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마치 다른 세계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것 같았다. 그의 일생은 참으로 값진 삶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삶에 함께 하셨으며, 그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이 짧은 지면을 통하여 그의 육십 년이나 되는 일대기를 기록하여 발표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부분만을 拔萃(발췌)하여 여러 학우들에게 보고하기로 한다. 많은 도움되었으면 좋겠다.
D. L. 무디의 어린 시절
무디는 1837년 2월 5일 에드윈 무디와 벳시 홀톤 사이에서 7남매 중 여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1841년 5월 28일 어린 무디가 학교에 다닐 때였다. 그의 부친 에드윈 무디는 일터에 나갔다가 옆구리의 통증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후 1시경에 비틀거리면서 침대로 다가갔으나 몇 분 안되어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무디가 기억하는 최초의 큰 사건이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래서 과부가 된 무디의 어머니는 자연히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자녀들을 더욱 강하고 훌륭하게 키우는 역할을 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남편이 죽은 후 한 달 후에 쌍둥이를 낳았다. 게다가 남편이 파산한 상태에서 죽었으므로 생계를 꾸려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를 보고 측은히 여긴 이웃에 사는 여인이 자녀들을 고아원과 같은 수용시설로 보내라고 말하였지만 그녀는 “이 두 손이 멀쩡하게 있는 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인은 “한 여인이 일곱 명의 아이들을 양육시키려고 한다면, 이 아이들 모두는 아마도 감옥 신세를 지든지 아니면 교수형을 당할 수도 있지요.”라고 말하였다. 무디의 어머니는 열심히 일하였으며 그래서 그의 자녀들 중 어느 하나도 감옥에 들어간 사람은 없었다. 무디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만일 모든 사람이 나의 어머니와 같다면 더 이상 감옥이 필요 없게 될 것이다.”고 말하였다.
홀어머니가 그 많은 자녀들을 돌보아야 했기 때문에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은 오늘날 가정에서처럼 그다지 철저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먼저 하나님과 그 의를 구하는 내면적이고 진실한 신앙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주었다. 모친의 신앙교육으로 인해 활달한 친구들 그 누구보다도 ‘순전한 신앙 안에 세워져 있었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흠없는 자’였다. 이 영리하고 고집 센 시골 청년은 정말 누구보다도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졌다. “하나님을 신뢰하라” 무디의 모친은 소박한 신앙을 담은 이 간결한 문장을 신조로 삼았다. 그래서 모친은 어린 자녀들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며 고아와 과부의 힘이 되신 그분께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무디의 어린 시절은 뉴잉글랜드의 다른 소년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학교에 다니면서 읽기, 쓰기, 등 기초 교육과 대수학(代數學)을 배웠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으므로 일을 하면서 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무디가 다니던 학교에는 학생들을 매로 가르쳐야 한다는 선생들과 매 없이 사랑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선생님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학급에 미모의 여선생이 부임해 왔다. 그녀는 매 없이 사랑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그룹의 선생이었다. 그녀가 하나님께 사랑으로 가르칠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할 때면 학생들은 감명을 받곤 하였다. 학교 수업이 수주일 계속되었지만 학생들은 매를 구경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언제나 모든 일에 주동자였던 무디가 규칙을 위반한 최초의 학생이 되었다. 학생들은 다시 매가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다정하게 “나는 만일 내가 학생들을 사랑으로 다스릴 수 없다면 교사를 그만 두기로 결심했단다. 그러니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규칙을 지켜주지 않으련?”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선생님의 사랑으로 무디는 그녀를 열심히 따르는 학생이 되었다.
무디가 여덟 살이 되던 몹시 추웠던 11월 어느 날이었다. 형들이 집으로 찾아와 나를 위한 일터가 마련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무디는 그곳에 가기를 매우 싫어하였다. 그러나 형들 사이에 논의가 있은 후라서, “너는 가야만 한다”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무디는 그린필드를 향하여 출발했다. 그는 언덕에 올라가 정들었던 집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무디는 그때 두려움을 느꼈고, 그래서 “나 내일 아침 동이 틀 때에 출발하겠어.” 라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있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다. 무디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 갑자기 형이 “드와이드야, 네게 1센트를 줄 사람이 오고 있구나.” 그때 무디는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하고 물었다. “저 분은 이 도시에 처음 온 소년에게는 누구에게나 1센트를 주시는 분이지.” 나는 그분이 뒤뚱거리면서 걸어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다가와 내 모자를 벗기고 머리 위에 손을 얹은 후에 형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이 도시에 처음 온 것 같은데?” “예 그렇습니다. 오늘 방금 왔는걸요.”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에게 독생자가 있었는데 그를 세상에 보내 주셨지,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단다. 그가 죽은 것은 우리들의 죄를 사하기 위함이었지…”그렇게 단 5분 정도 말하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1센트 짜리 동전을 꺼내어 내게 주었다. 나는 그 때 만큼 부자가 된 기분을 가진 적이 없었다. 나는 내 머리를 만져주던 그 노인의 손길을 평생 잊지 않고 있으며, 그의 음성은 내 귓전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고 있다.
무디의 집에 있던 유일한 서적은 성경 한 권과 경건 서적 몇 권이었다. 무디 여사는 매일 아침마다 그 자녀들에게 그 책들을 읽어 주었다. 그녀가 다닌 교회의 에베렛 목사는 과부가 된 무디 여사가 시련을 당하는 동안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드와이드는 목사의 집에 거처하면서 일을 도와주곤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주일날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지루한 일이었다. 더우기 설교의 내용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일저녁이 되면 마치 감옥에서 탈출한 사람처럼 밖으로 뛰쳐나와 환호를 울리고 모자를 벗어 던지곤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무디에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도록 충고하였다. 그러나 무디는 “기도를 해 보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아요” 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런데 그가 여섯 살쯤 되었을 때, 한번은 담장이 무너져 밑에 깔리게 되었다. 그때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위급한 상황 중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고 그 즉시로 담을 밀쳐낼 수 있었다. 그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위급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드와이드 무디의 회심
드와이드 무디는 성숙하여 가면서 어떤 변화를 갈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처해 있는 환경은 항상 제한되어 있었다. 비로소 그는 교육의 가치를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려 하였다. 1854년의 어느 날 그는 나무를 잘라서 운반하는 일을 하면서 같이 일하고 있던 그의 형 에드윈에게 “나는 이 일에 진력이 나 버렸어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아,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도록 하겠어.” 무디에게는 보스톤에서 양화점을 경영하는 두 명의 삼촌이 있었으므로 그들로부터 일자리를 구하려 했으나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다른 형이 일하던 매사추세츠의 클링톤(Clinton)으로 향하게 되었다. 거기는 책과 문구류 등을 파는 상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도 만족할 수가 없어 다시 보스톤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향수병을 앓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일자리를 구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다시 삼촌들에게로 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삼촌은 드와이트에게 “만일 네가 지정된 장소에서 기숙하면서 마운트 베르논(Mount Vernon) 교회와 그 주일 학교에 다니며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지 않기로 약속하면 내가 경영하는 가게로 데려오겠다”고 말하였다. 드와이트 무디는 그 조건을 수락하여 이 가게의 점원 일을 맡았다. 당시에 그가 가진 꿈은 십만 달러를 벌어서 성공적인 상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부적인 사업에 친숙해져 가고 있었다. 비록 도시의 생활 방식과 예절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으나 품위나 외모에 있어서 부족한 점을 천성적인 위트와 기지로 보완하여, 낮은 위치에서 판매원으로서의 가장 높은 지위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보스톤에 머물고 있는 동안 최초로 중요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즉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처음에 교회와 주일 학교를 그의 삼촌과의 계약으로 인한 의무감에서 형식적으로 다니고 있었다. 보스톤에 있는 베르논 교회는 에드워드 커크 박사의 열변과 거룩한 열정, 그리고 불타는 정열을 살리기 위하여 특별히 부흥 교회로 조직되었는데 이 같은 방식은 커크 박사의 진지하고 교양 있는 설교도 젊은 무디를 감동시키지는 못했다. 무디는 예배당에서 강단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좌석을 선택했으며 한 주간의 고된 업무에 지쳐서 주일예배 중 대부분의 시간을 졸면서 보냈다. 무디는 주일 학교에서 에드워드 킴볼이 가르치고 있던 반에 배치되어 공부하고 있었다 . 킴볼은 무디에게 성경을 전해주면서 그날 배울 곳이 요한복음이라고 말했다. 무디는 그 성경책을 받은 다음 요한복음을 찾기 위하여 구약 전체를 더듬거려야 했다. 이때 다른 학생들은 무디가 성경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서로의 팔꿈치를 찌르면서 비웃었다 당시의 상황을 무디는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계속해서 그 부분에 엄지손가락을 끼고 있었다. 만일 내가 그 곤경을 벗어나게 된다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될 것이다 고 말했습니다.” 이 사건은 무디가 성경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했었는지에 대한 사실을 보여 주었다. 이 일을 통하여 그는 성경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얼마 후 킴볼은 무디에게 영적인 문제를 말해주기로 작정하고 힐톤에 있는 구두 가게로 무디를 만나러 왔다. 킴볼은 무디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무디는 그때 영적인 빛이 비취었고 그 빛은 그 이후로 결코 어두워지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부터 무디의 삶은 완전히 변했다. 도덕적인 규범에 얽매여 고통스러워하던, 그저 수동적이기만 하던 수동적인 신앙생활이 한 순간 기쁨을 갖고 봉사하는 삶으로 변했다. 이제까지는 그저 의무적으로, 억지로 교회에 출석했지만 그 이후로 약 오십 년 동안 그는 자신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이 일에 관해서 그가 즐겨 쓰던 말이 있다. “제가 회심하기 전에는 십자가를 향해 가려고 애를 썼지만 회심한 후로는 십자가로부터 전진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때는 구원받으려고 매진했지만 이제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매진합니다.”
언젠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내가 회심을 했던 그날 아침 나는 밖으로 나가서 만물을 사랑스런 모습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이전에 결코 지상을 비추는 밝은 태양을 그토록 사랑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을 때에도 내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디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하나님을 새 주인으로 섬기려고 노력하였다. 킴볼은 그가 금요일 저녁마다 열리는 정기 기도회를 인도할 때 그 곳에 참석했던 무디는 몇 차례를 제외하고는 잡담하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킴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가 담당하고 있던 주일 학교 학급에 무디가 들어왔을 때, 영적인 면에서 심령이 그처럼 어두운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분명하고 명확하게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더 나아가 보다 광범위한 공적인 지위에서 유용한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크리스천 사역의 시작
회심한 청년 무디는 사업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동일한 열심과 야망을 품게 되었다. 일부 교회 어른들은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심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 첫 기쁨에 잠겨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자기의 열심과 몫을 해낼 수 있는 길들을 찾고 싶었다. 커크 박사와 교회의 직분자들은 무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 놀라운 진보를 나타낸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 후 무디는 시카고에 도착한 후 위스월의 구두 가게에 취직하게 되었다. 판매원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거친 고객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으며 그 같은 사람들을 다루는 데에 특별한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무디가 매우 즐거이 소개하던 것으로서 자신에 관한 한가지 웃음거리가 그 시기에 생겨나게 되었다.
무디는 시카고에서 맞이한 첫 주일에 제일침례교회의 주일 학교 아침 반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학생들 중에는 장차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이 십대의 소녀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주일 오후에는 시카고 거리와 웰스가의 모퉁이에 있는 주일 학교에서 작은 일을 맡아 봉사했으며, 곧 한 반을 맡고 싶다고 교장 선생님께 제안했다. 교사가 확보되어 있으나 학생은 불과 십육명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만일 무디 스스로 한 학급을 만들 수 있다면 교사로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다음 주일날 무디는 거리에서 거칠고 불순한 열 여덟 명의 건달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구원을 받아야 할 학생들이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그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의 집에서 봉사할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을 포함한 신입생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한 가지 재능을 하나님을 위하여 온전하게 사용하였다.
1858년 가을 무디는 웰스가 사역이 성공한 것이 보다 큰 사역으로의 부르심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그 도시의 다른 지역에서 보다 큰 규모의 주일학교 사역을 새롭게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무디는 자신이 이끄는 주일 학교를 빈 술집에서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얼마 되지 않아 참석하는 학생들을 다 수용하기 위해서는 더 넓은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시장이 그 도시의 하류층에 사는 어린이들을 구원시키고자 하는 무디의 의도를 이해하여 노스 마켓홀(North Marker hall)을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 건물은 시카고의 거대한 시장 지역들 가운데 한 곳에 세워진 공공 회관이었다. 무디 선생은 거기서 친구들과 연합하여 주일학교 사역을 시작했다. 이 주일학교가 후에 일리노이가(街) 교회로 발전했고 그 후로는 무디 선생 자신이 만년에 교인으로 있던 시카고 애버뉴 교회로 발전했다.
무디가 우선적으로 채택했던 원칙 중 하나는 어떤 학생의 행실이 점점 나빠진다고 해서 그를 추방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적이라는 것은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디는 자신의 학교를 사랑했으며 학생들 또한 그를 사랑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불붙은 나무와 같았고 열정적이었고, 각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침으로 인해 무디와 결속되어 있었다. 한 학생이 그 도시의 다른 지역으로 이사해 갔는데 그 어린 학생은 비록 등교 길이 길고 지루했지만 빠지지 않고 수업에 참석했다. 어떤 사람이 그 학생에게 왜 집 근처에도 좋은 학교들이 많이 있는데 그토록 먼길을 걸어오느냐고 물었을 때, 그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학교들이 다를 학생들에게는 우리 학교처럼 좋게 보일지 모르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왜 그렇지?” “그것은 우리 학교가 먼 곳에 사는 한 사람까지도 사랑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일 오후 주일학교 외에도 소년들을 위한 주일 저녁 예배를 인도하곤 했다. 그는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고백하며 체험을 간증하고 실제적인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무디는 한 주간의 생활 중에서 학생들의 가정을 방문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처음에는 아이들만 대상으로 사역을 하다가 나중에는 부모들에게로 이어졌다. 이렇게 노스 마켈 홀 사역이 ‘부랑아’들의 주일학교에서 더 발전해 감에 따라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 젊은 순회 판매원은 더 이상 사업을 계속하기가 힘들었다, 전에는 술집으로 사용하던 방에서 주중에 복음집회가 열렸고 나중에 이 장소는 선교 회관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연습하고 훈련한 설교가 후에 무디에게는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그가 조금씩 즉흥 연설 능력을 키운 것을 볼 때 이런 훈련의 시간이 그에게는 도움이 되었던 같다.
YMCA 사역
1857년에서 1858년 사이에 일어난 부흥의 결과로 시카고에서 YMCA가 조직되었다. “저는 기독교 청년회를 충심으로 신뢰합니다. 어느 다른 단체보다도 저는 YMCA를 통해 기독교사역에 대해서 많은 걸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뤄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YMCA의 영향력에 대한 무디 선생의 증언이라 하겠다. 그는 이 YMCA 사역을 하면서 수많은 친구들과 후원자들을 얻었다.
무디 선생은 사업을 포기하고 기독교 사역에 헌신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카고에 있는 YMCA사역에 무척이나 열심을 냈다. 그는 그 당시 형성된 기독교 위원회와 YMCA의 사역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하는 동안 이 일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 협회의 서기관으로, 또 사오년 간은 회장으로 있으면서 협회 내의 모든 분야들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성심껏 일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사역의 영적인 필요들이었다.
대부흥 운동의 결과로 정오 기도회가 하루도 빠짐없이 지속되었는데 무디 선생은 이 모임에 가장 애정을 갖고 있었다. 아직 젊은 나이였지만 그는 얼마 안되어 그 모임의 인도자가 되었으며 자기가 하고 있던 선교 사역과 더불어 이 YMCA 사역을 확장시키는 일에도 지속적으로 힘을 썼다.
YMCA 초기 사역의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방법은 단연코 ‘야외’설교였다. 여름마다 무디 선생은 날씨만 가능하다면 매일 저녁 법원 광장에 나왔다. 무디에게는 법원 건물 앞 계단이 강단이었으며, 함께 한 여섯 명의 남녀 젊은이들이 성가대였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 이 예배에 끌려 모여드는 만큼이, 아니 그 행인들 전부가 회중이었다. 그리고 보통은 법원 안 긴 복도 여기저기에 갇혀 있는 죄수들이 건물 밖에서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만한 곳에다가 집회장소를 잡았기 때문에 창살에 다닥다닥 붙어서 경청하는 죄수들도 중요한 회중이었다.
무디선생은 교도소에도 자주 방문했으며 시카고에서는 일명 ‘감화원’이라고 불리는 곳에 가서 수용자들과 얘기도 하고 책도 읽어 주고 기도도 했다. 그는 죄인들의 진정한 친구였다. 이런 사역을 하면서 축적된 자질들, 가령 위급한 일이 벌어졌을 때 신속하게 대처하는 능력, 반대하는 사람들을 막아내는 데 필요한 용기, 회심의 사역과 자기 의무를 꾸준히 해가면서 얻은 인격의 성숙, 이런 모든 것들이 더 큰 영역에서의 사역을 위한 도구들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보상의 원칙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에 불과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마15:23)
헨리 무어하우스의 영향
헨리 무어하우스와의 만남은 무디 선생이 신앙생활과 설교에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무디는 처음으로 영국을 방문해 있는 동안 더블린에서 무어하우스를 만났는데 그 만남은 그저 그 순간뿐인 것 같았다. 무디 선생은 무어하우스를 만났던 자리에 대해서 설명하다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무어 하우스는 제게 와서 자신을 소개하더니만 시카고에 와서 설교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직 수염도 나지 않은 소년이었으며 일 일곱도 안되어 보였어요 저는 속으로 ‘이 소년은 설교할 수 없어’라고 말했죠”
그후 무디가 시카고로 돌아온 다음에 무어하우스는 그곳에 와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다른 일 때문에 무디는 그의 설교를 듣지 못했다. 무디가 그의 부인에게 물었다 ‘설교가 어떻습디까?’ ‘그러니까 , 그는 하나님께서 가장 추악한 죄인들도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전했어요.’ ‘그렇다면 그 사람 옳지가 않구만.’ 그러나 무어하우스의 설교를 들은 무디의 마음은 달라졌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그 놀라운 말씀을 가지고 자신의 일곱 번 째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설교의 마지막 부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 자매들이여, 저는 일주일 내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말하려고 애써왔지만 이 서투르고 우둔한 입술을 가지고는 다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만일 일곱의 사다리를 빌려서 천상에 올라가 전능자 하나님의 존전에 서 있는 가브리엘 천사장을 만나 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얼마만큼 사랑하시는지를 물어본다 해도, 그도 이 말밖에는 할 수 없을 겁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여 하심이니라.” 무어하우스 씨는 뭉뚝한 칼자루로 전쟁을 하던 무디 선생에게 칼을 끝까지 뽑아서 칼자루는 던져 버리고 날선 칼만을 가지고 전쟁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서로가 가진 성격의 강점들을 알고 난 뒤부터 더욱 기쁜 마음으로 서로에게 다가가 친밀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무어하우스 씨가 가진 정감 어린 성품과 주님에 대한 헌신의 마음, 그리고 무디 선생이 가진 뛰어난 상식의 힘과 끝없이 확장되는 영향력이 서로 잘 조화되어 이 두 사람을 복음 사역에 있어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만들어 주었다.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보스톤 가게에서의 첫날밤 이후에 결코 그 분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수년 동안 내 자신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없다고 믿어왔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어떤 일을 해 보라고 제안한 적이 없었다. 시카고에 갔을 때 나는 교회에서 네 개의 의자를 빌린 후 거리로 나가 젊은이들을 데려와서 거기에 앉도록 권했다. 나는 숫자를 채우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학생들을 모으는 일을 하게 되었다. 참석자가 천 명 미만일 때에는 고민이 되기도 했으나, 천이백명 이상으로 늘었을 때에는 의기양양해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도 개심을 하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 나의 눈을 열어 주셨다. 그 때 학교에는 지금까지 만난 여학생들 중 가장 질이 나쁜 학생들로 이루어진 한 반이 있었다. 그 반의 담임 교사가 병이 나서, 내가 그 반을 맡게 되었다. 그 주간에 그 반의 담임 교사가 나를 찾아왔다. 얼굴은 창백했으며 고통스러운 모습이었다. “어디가 편찮으신가요?” 하고 물었다. “의사는 내가 이곳에서 살 수 없으니, 공기 좋은 곳으로 옮기라고 말합니다. 저는 제가 담당하는 학생들 중 한 사람도 그리스도께 인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녀처럼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잠시 후 나는 그녀에게 “학생들에게 지금의 심정을 말해 주면 어떨까요?”라고 말하자. 그는 나의 제의를 승낙하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함께 여행을 출발하게 되었다. 그 여행은 내가 지상에서 가졌던 가장 귀한 여행 중 하나이었다. 우리는 한 소녀의 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소녀를 앞에 두고 그에게 영생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때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 여교사는 생명의 길에 대하여 말한 다음 기도를 제의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이렇게 열흘간을 다니는 동안 마지막 학생까지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헌신하기로 결단하였다. 그녀가 떠나기 전날 밤에 반 학생들을 모아 기도회를 열었다. 하나님은 그 모임을 통해서 내 영혼 속에 꺼지지 않는 성령의 불을 붙여 주셨다. 병으로 죽어가던 그 여교사는 학생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는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 주님을 송축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반 학생 중 한 사람이 그녀를 위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하자 모든 학생이 함께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다음날 저녁 그 교사는 손가락을 위로 가리키면서 천국에서 만날 것을 암시하며 플랫폼에 올랐다. 기차가 멀리 떠나갈 때까지 우리들은 손을 흔들고 그녀를 환송하였다.
무디의 성품에 관하여
무디를 처음 보는 사람이 느끼게 되는 가장 두드러진 성격은 열정이었다. 사도 바울처럼 무디도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1:21)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결국 이 세상에서의 사역을 마감하면서 그러한 삶에 대한 상급을 받았다. “오직 이 한 가지 일을 나는 한다”는 말이 무디가 보여 준 섬기는 삶의 비결이었다.
무디가 주님을 위하여 활동할 무렵에 지나친 비평만을 일삼던 한사람이 있었다. 그가 무디의 설교에 대하여 “당신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면 안됩니다. 문법이 틀리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라고 하며 무디의 설교에 결점이 있음을 지적한 적이 있었다. 이 말을 들은 후 “저는 제 자신이 실수가 많은 자임을 잘 알고 있지요. 그러나 제가 받은 재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께서는 충분한 문법 실력을 가지고 과연 주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습니까?" 라고 물었다. 또 한번은 어떤 집회의 몇몇 강사들 중 한사람으로 선정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무디의 뒤를 이어 나온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무디의 설교가 신문에서 발췌한 기사들로 이루어졌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가 자리를 앉았을 때 무디는 자신은 학식이 부족하다는 사실과 훌륭한 설교를 할 만한 능력이 부족하다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 목사에게 자신의 약점을 지적해 준 데에 대하여 감사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좀더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왜 하나님이 무디를 사용하셨는가?
무디는 19세기의 마지막 기간에 사망했다. 그의 가장 친한 동료이자 친구는 아마 R.A. 토레이 박사였을 것이다, 토레이는 무디 성경 학원의 초대 학장이었고 성경 학원의 커리큘럼을 확립해 그와 동일한 목적으로 세워진 다른 학원들을 위한 하나의 모델로 자리했다. 무디가 사망했을 때, 토레이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 그리고 미국 모든 도시에서 일어난 운동들을 이끄는 세계적인 주도권을 행사했다. 1923년 토레이 박사는 요청을 받아 커다란 추도 행사에서 이 놀랍고도 당대에 가장 위대한 인물에 대해 “왜 하나님이 무디를 사용하셨는가?”라는 제목으로 뛰어난 연설을 행하였다.
“무디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그렇게 경이적으로 자신의 삶에서 나타낼 수 있었을 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광범위하게 사용하신 데는 일곱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첫째, 그는 완전히 주님께 무릎꿇은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그는 기도의 사람으로 가장 깊고 의미 있는 감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셋째,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깊이 있고 실제적인 연구가였습니다. 넷째,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섯째, 그는 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했습니다. 여섯째, 그는 잃어버린 자와 구원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일곱째, 그는 높은 데서 모든 권능을 다루는 아주 명확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아주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
무디의 설교 준비법
무디는 지칠 줄 모르는 성경연구가였다. 여름이 되면 보통 새벽에 일어나서 하루의 일과로 마음이 분산되기 전, 머리가 맑을 때에 하나님과 또 그분의 말씀과 더불어 조용한 시간을 가졌다. 무디의 개인 서재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잘 정리된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무디는 좋은 생각을 얻을 수 있다면 만 리라도 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무디는 다른 설교자들이 설교할 대면 좋은 생각이나 예화가 있는지 아주 세심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좋은 내용을 들었을 때 뒷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수첩을 꺼내는 얼굴이 얼마나 환하게 빛났는지 모른다. 무디는 이런 방법을 통해 날마다 성경을 보다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책을 읽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다가 좋은 내용이 있으면 적어 두는 습관을 가지라고 권했다. 무디가 설교를 준비하는 방법은 크게 변한 적이 없었다.
무디의 설교 준비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어떤 주제나 본문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기로 결정한 후에는 우선적으로 커다란 봉투를 가져다가 그 위에 다음과 같은 제목이나 참고 문구를 적어 놓는다. ‘하나님 나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 ‘구도자 상담법’ 등이다. 무디는 봉투 속에 설교와 주석을 복사한 발췌물들과 신문에서 오려낸 자료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이나 제안들을 메모해 놓은 것이나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일화나 예화 등 고려 중에 있는 주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모든 종류의 스크랩을 모아두었다. 그는 어떤 주제에 대하여 설교하려고 할 때면 언제나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해 두고 발췌물들을 모아놓은 봉투를 살펴본 후 자신이 인용하기를 원하는 요점과 일화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 재료들을 정리해서 설교의 윤곽을 잡은 다음 메모지에 적고 꼭 필요한 낱말들을 적어서 성경에 고무 밴드로 고정시켜 놓았다. 다음으로 제기 될 수 있는 이의들에 대하여 첫 번째 이의, “나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등 무디는 이 같은 이의에 대하여 성경문구를 찾아 인용함으로 대처하도록 하였다. 무디가 택했던 이 설교 준비법은 그에게 즉흥적인 영감을 얻어낼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무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나는 설교를 여러 번 반복할 경우가 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설교 원고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다시 사용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했다.
무디는 참으로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무디의 신학 사상
무디는 1873년부터 1899년까지 19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북미와 영국을 누비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감화력 있는 부흥사”로 소개된다. 무디의 설교는 알미니안 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선포된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스펄젼과 플리모드 형제에게 계몽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알려진다.
세계적인 부흥사를 배출한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의 미국 안에는 조직된 기독교에 사상체계와, 사회적 프로그램에 관한 두 가지 도전이 일어난다.
1. 무디 신학 발생의 사회적 배경
미국은 산업화에 의한 젊은이들의 도시로의 몰입과 그에 의한 농부들의 타격은 1867년 일종의 농민운동인 그랜지 운동을 발생케 한다. 1870년 미국달러의 평가절하 반대를 주창하는 그린백이승주의의 농민 동맹운동의 간헐적인 폭동이 발생한다. 미국사회는 노동자의 폭동과 경제적 곤란으로 공항과 파산상태가 벌어졌고 이는 노동자의 폭동과 경제적 곤란이라는 악순환 속에서 실업자수와 무료배급을 받는 빈민의 수 증가로 가정의 파괴되고 거리는 부랑자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미국역사상 가장 어두운 해인 1877년 철도파업사건은 노동자와 경찰의 충돌을 일으키고 1890-1894년까지 파업으로 노동자와 형사 군대들과의 전투상황을 방불케하는 반복되는 파업과 진압의 대치국면들이 있었다. 이런 사회적인 경제불안은 규범이 없는 혼란 속에서 상대적으로 느끼는 박탈감과 열등감, 기존 가치체계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들이 어우러지는 사회적인 아노미현상을 초래했다.
2. 미국 개신교의 사회적 사상의 배경
진화론의 출현으로 생물학적 진화의 개념이 나타났으며 이는 인간과 다른 동물사이의 경계선을 지워 버리고 창조하는 신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역사와 종교 발전의 진화론적 견해는 하나님께서 특수 계시에 대하여 이 종교를 주셨다는 관념과 함께 성경에 제시된 역사의 계획에 대하여 의문을 제시한다. 이 시대에 나타난 성경의 고등비평설 역시 근본적으로 진화론적인 방법을 성경에 적용한 결과이다.
미국 개신교의 사상의 3조류는 첫째 전통적 전통으로 초자연주의적이며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가진 주의다. 둘째는 낭만적 자유주의 또는 복음의 직접적인 직관적 인식을 강조하여 낭만적 자유주의자들은 과학적 입증의 영역 즉 비평으로부터 종교를 추출하는 진보적 종교주의 경향이다. 이들은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모든 역사 속에 계시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여 진화를 하나님께서 역사 안에서 일하시는 방법으로 조화시켰다. 셋째 과학적 현대주의 경향으로 진리를 현대과학의 방법을 사용하여 탐구하려는 사조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아노미 현상과 전통적인 강령과 사상에 대한 도전과 변화의 맥락 안에서 무디는 그 시대의 갈등과 도전의 양상들을 담고 그의 신앙의 핵심과 메시지를 25년 이상을 전도하면서 선포한다.
3. 무디에 있어서 신학의 역할
일반적으로 부흥사들은 신학적으로 예리하지 못하다는 평판을 갖는다. 조직적인 면에서 볼 때 무디도 이런 부류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이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체계화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신학을 가질 것인가? 갖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을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교리는 승인하고 다른 교리들은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신학자이다. 그의 신학은 그가 믿는 진리에 대하여 그가 선언한 것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미국복음주의는 영혼 구원에 관한 실제적인 면과 개인의 주관적인 종교 경험의 특성에 중점을 둔다. 이런 경건주의 적이고 부흥 지향적인 관심은 미국 독립 운동시대부터 각 교파와 전통적인 교회 및 신학에 결합시켜 교리적인 내용이 없지는 않지만 뚜렷한 조목으로 표출하는 경향이 없었으며 1857 -1858년 각성 운동에 의해 교리적 차이의 중요성을 누그러뜨리자는 태도 속에 복음의 단순성이 강조되고 신조보다 동정이 강조되어 분열을 줄여야한다는 것이 전반적인 경향이었다.
이때 복음주의 영향을 받고 개종한 무디에게 있어 신학은 실제로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 무디는 복음을 전하는 것을 그의 선교적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논쟁을 일으키기 쉬운 ‘이런 교리’ ‘저런 교리’를 설교할 것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그가 신학에 대하여 무관심하다거나 신학을 반대한다는 해석이 나오게 되었다.
4. 무디의 신학적 위치
무디에게 있어서 신학은 무관심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교파들을 적대감을 갖은 진영들로 분열시키는 당파심을 경멸하는 반면에 그들의 신학적 관심의 타당성을 인정하였으며 그 자신의 복음화 사업의 견지에서 복음에 대한 복음주의적 이해를 주장했다.
파멸, 피에 의한 구원, 성령에의 중생으로 인간의 필요와 하나님의 예배에 대한 무디의 이해는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개인구원관과 잘 일치되고 있다. 죄는 인간의 멸망이요 구원은 형별의 대신과 속죄의 견지에서 이해해야하며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개혁할 수 없는 죄인이므로 성령에 의한 중생을 필요로 하고 있다.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종말론에서는 그것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간에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완전해 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나타내 보인다.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적 신앙에 있어 인간의 도리에 대한 그의 호소는 알마니안적이며 다른 강조들은 칼빈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무디 신학의 보수주의적 경향성인 속죄관에는 예수를 하나님과 사람으로 보는 기독론이 함축되어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삼위일체론을 이론적으로나 추상적으로 논의하지 않았지만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긍정은 그의 속죄관에 함축되어 있다.
성경의 보존과 성경, 권위에 대해서는 성경을 아무런 수정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성경은 유일하고 충분한 권위이며 비평적 도움 없이도 성경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성경의 문자적 해석원리를 충실히 따르므로 전천년설을 받아들였다. 무디에게 성경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문자적으로 영감 되어야만 했다. 그에게 있어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본래 의도된 성경의 의미를 따라 성경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성경의 영감을 옹호한 것은 ‘성경을 읽어라’ 즉 어린 개종자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성경을 읽는 것이므로 성경을 사랑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연구법’이라는 설교에서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거하기 위하여 삽으로 돌을 캐내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면서 성경보다 현명하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당신은 사탄의 미혹을 받고 있다’고 선포했다. “고등비평에 대해” 무디는 교회 안에 이러한 분열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것은 부흥사업을 망치는 것이요 교회를 텅텅 비게 만들고 있는 것이니 우리는 비평적 논쟁을 중단하고 주님의 일을 함께 할 수 없는가! 라고 외쳤다.
무디의 선포는 단순히 알미니안화된 미국 복음주의 산물이 아니다. 그는 복음주의적 방법론의 개혁자였다, 무디는 학구적 신학자가 아니었으므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주권의 성가신 문제를 피하려했고 부흥사로서 자연히 전자를 강조했으나 후자를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 안에서 일하게 만들고 새로운 개종자들을 교회에 보내고 다양한 신학적 전통들을 하나로 연합하여 서로 협조하도록 하여 교회를 굳건히 세우려 애썼다. 그는 복음의 복음주의적인 이해에 기초한 초교파 주의 정신과 실천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전천년설을 받아들였으나 전천년설의 종말론을 상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전통적 교리에 대한 다양한 지적 도전들을 한데 묶어서 모두 ‘불신심’으로 처리함으로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했지만 저들의 현대사상에의 적응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자들을 받아들이는 정신적인 자유가 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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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와 예화나라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