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1-6)
할렐루야! 오늘은 대림절 첫째주일입니다. 대림절이란 주님 오시는 날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12월 25일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성큼 우리 곁에 다가왔습니다. 한 해의 마무리를 잘 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 안에서,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잘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자되신 주님만을 잘 따름으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뛰어넘어, “내 잔이 차고 넘칩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23:6절 말씀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아멘.
우리가 외국을 여행할 때에, 처음 가는 길인데다, 언어도 서투르고, 지형도 잘 알지 못하는 그런 여행을 할 때는, 굉장히 피곤하고, 쉽게 지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지역의 여러 가지 여건을 잘 아는 사람이, 안내자가 되어 줄 때에는, 모든 것을 즐기면서,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좋은 가이드를 만나면 재미있고 즐겁게 여행을 즐길 수 있는데, 잘 못 만나면, 재미 있어야 할 여행이, 짜증으로 가득한 여행으로 끝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안내자가 되어 주시고, 나의 목자, 나의 보호자가 되어 주실 때에는, 비록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산다 할지라도, 그 인생길은 즐겁고, 행복하며, 노래하면서,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시편 139:2-3절을 보면,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21편에서는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키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시편 27:1절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고 말씀합니다.
내가 가는 길이, 불안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그런 삶을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의 빛이 되시고,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면서,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고, 내 인생 길에 안내자가 되어 주시고, 나의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그렇게 불안하거나, 고통스러운 인생이 아닙니다. 즐겁고, 행복하게, 건강하게, 내일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무디 목사님이 어느 날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섯 살 짜리 아들이, 서재로 들어왔습니다. 무디는 자신의 글쓰는 일이 방해될까봐, 아이에게 “왜 들어왔니, 무얼 원하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아이가 “아무 것도 원치 않아요. 그냥 아빠랑 함께 있고 싶어서 왔을 뿐이에요.” 그리고는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아빠 서재에서 노는 것입니다. 무디는 자기 서재에서 조용히 놀고 있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나가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무디 목사님은 가슴 속으로 조용한 감동이 일어남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 되신다고 고백하는, 하나님을 목자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의 구조가, 어떤 것인가를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빠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기에, 아빠와 함께 지내려고 하는 그 마음이,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쫓아내는 법이 없습니다. 죄가 많은 아빠도, 자식을 쫓아내지 않는데, 하물며 당신의 아들까지 내어 주시고, 우리를 사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가라. 너는 필요 없다. 너는 내게 귀찮은 존재다.”라고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인정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분이 나를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십니다. 필요할 때는 나를 쉬게 하셔서, 쉴 만한 물가에서 지나온 세월들을 반추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내 인생 길에, 날마다 새롭게 힘을 주시고, 마침내 의의 길에 도달할 수 있도록,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나를 이끄십니다. 필요할 때는 나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데리고 가셔서, 나를 훈련 하시고, 연단하시고, 정결케 하십니다. 어떤 때는 원수 앞에 나를 세우십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원수 앞에서 내게 잔치상을 배설해 주시고, 기름을 부어주심으로, 나를 보호해 주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기뻐하며 환대한다”는 의미로, 내 인생의 잔에, 계속해서 음료를 따라 주셔서, 잔이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시인은 마지막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떠나지 않을 것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혹시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나의 형편을 감찰해 주신다면, 내 형편이 나아질텐데...” 그러나 시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혹시, 만약에”가 아니라, “정녕코, 결단코, 반드시”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고, 다윗은 고백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떤 사람은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사람은 칭찬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사십니까?
“앤소니 드 맬로”가 쓴 “개구리의 기도”라고 하는 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미국 사람이, 일본에 골프 관광을 갔습니다. 골프장에 갔더니, 경험 많은 골프 캐디들은 모두 그린으로 나가고 그 골프장에 처음 들어와서 그 골프장의 코스도 잘 모르고, 골프 규정도 잘 모르는 열 대여섯 살 먹은 소녀 한 명이 남아 있었습니다. 불만이었지만, 이 소녀를 캐디로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미국인은 일본에 머무는 동안, 그 소녀를 내내 캐디로 썼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소녀는 그가 골프공을 칠 때마다, 결과하고는 상관없이, 날아가는 공을 향해, 발을 구르면서, 감격에 찬 목소리로 “Dammed good shot!!”(와! 드럽게 잘 치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소녀가 알고 있는 영어라고는 유일하게 이 한 문장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살리는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5:45) 사람을 격려하고, 지지하며, 세워줌으로, 자존감을 갖게 하고, 우리 삶을 넉넉하게 살아 갈 수 있도록 세워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공포의 하나님으로 이해합니다.
“책망하시는 분, 나의 허물을 지적하시는 분, 심판하시는 분”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 대하여, 무식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책망하고, 질책해서, 세워질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은 책망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내가 몰라서 못합니까? 아닙니다. 알지만, 삶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부족합니다. 지지해 주고, 격려해 주고, 나를 밀어 주는 사람이 없기에, 우리는 무능력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을 때, 힘을 얻는 영적 존재입니다. 돈이 없어, 불행한 게 아닙니다. 건강이 약해서, 내 삶이 절망스러운 게 아닙니다. 나를 지지해 주고, 격려해 주고, 내 초라한 모습이라도, 넉넉한 미소를 지으면서, 바로 보아주시는 그 눈길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힘든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번에 수능시험을 본 고 3학생이 엄마를 살해하고, 안방에 8개월 동안 방치한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전국 4,000등 정도의 성적을 받은 모의고사 성적표를 62등으로 위조한 사실이, 어머니에게 들통나, 심한 벌을 받게 될까 두려워,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습니다.
A군의 어머니 B씨는, 범행 전날에도 전국 62등으로 위조한 성적표를 보고서, “더 잘하라”는 잔소리와 함께, A군을 엎드려 뻗치게 한 후, 야구방망이와 골프채로, 10시간에 걸쳐, 체벌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B씨는 평소 A군에게, “서울대 법대에 가라면 가라. 모두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다”, “전국 1등을 해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 했고, 아들의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밥을 안 주거나, 잠을 못 자게 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전국 4,000등 정도의 실력이라면, 엄청 잘 하는 학생입니다. 엄마가 아들에게 “잘 한다”고 칭찬만 해 주었더라도,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우리 하나님은,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 인생의 꼬인 문제들까지도, 어떻게 해서든지, 잘 풀어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혹 내가 미약하고 실수해서, 저지른 범죄라 할지라도, 주를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것들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0:9-10절을 보면,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꼴을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만 주신 것이 아니라,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비록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 할지라도, 그분이 나의 아버지요, 나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내가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0:14-15절을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선한 목자인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했습니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지지해 주시고, 격려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 제물로 받으시고, 허물 많고 실수 많고, 오점투성이인 내 인생을 용납하시고, 오늘까지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시인의 고백입니다.
“하나님 한번도 나를”이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믿을만한 하나님이십니다. 끝까지 우리를 기다리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이런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동일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하나님의 집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겠다고 하는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건축하게 하시고, 그 성막에서 하나님을 모실 수 있도록 제사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모든 건축이 완성되었을 때, 하나님은 땅에 찾아오셔서, 이스라엘 장막 한 가운데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는,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게 하시고, 그 여호와의 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뵙게 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롭고 힘들 때, 성전을 찾아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하셨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찾아갈 수 없는 무서운 분, 심판과 공의로 나를 처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생의 한 가운데 찾아 오셔서, 나를 만나 주시고, 나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모시고 온 중요한 구속사의 중심점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독생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계시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승천하신 다음에는, 성령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 오셔서 내 몸, 내 인격, 내 삶 속에 하나님의 거처를 두셨습니다. 내가 성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은 나를 성전 삼아 주셨습니다. 성령님과의 교통으로, 내 몸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모시고, 늘 그 임재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새 시대를 여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성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목자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목자라고 하는 사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찾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박대하거나 모독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어른으로 모시지 않습니다. 오늘 믿는 사람 가운데,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면서도, 내가 성전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결단합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으시다. 그분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은 한 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결단한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 것이며, 하나님과 동행할 것이다. 내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의 거처로 사용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을 위해 나를 드릴 것이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성전을 중심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레위지파 사람들과 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은 성전에 있을 때에나, 밖에 있을 때에나, 늘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일생에 많은 축복을 누렸던 왕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더불어 살았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의도하셨던 많은 일들을 완성케 함으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가 이제 하나님 앞에 한 가지 소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다윗은 한 나라의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제사장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65:4절을 보면,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많은 것으로 만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부요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축복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 가운데, 가장 깊은 소원은, 여호와의 집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제사장적인 삶이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구한 기도 제목만은 아니었습니다.
시편 84:1-4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9-11절을 보면,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궁전에 거하는 즐거움을 아는 시인들의 노래입니다.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더 많은 쾌락과 더 편안한 삶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고 싶어하는 갈망을, 자신의 소원으로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질서 안에 살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마치 여호와의 전에서, 밤이나 낮이나 수고하며, 하나님을 경배했던 제사장들의 삶, 레위 지파의 봉사의 직무를 흠모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많은 것을 경험했고, 하나님이 내게 많은 축복을 주셨지만, 그것들로 나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나로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축복을 경험하게 하소서. 내가 주의 궁전을 사모하나이다. 참새도 자기 집이 있고, 제비도 깃들일 곳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모시면서 사는 것이, 내게 축복입니다. 악인의 궁궐에서 천 날을 사는 것보다, 주의 장막에서 한 날을 사는 것이 나의 행복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진정한 행복입니까? 무엇이 진정한 축복입니까? 시편 23편의 노래가, 내 인생의 간증이요, 고백이라고 시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버린 적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모든 길과 내가 살아왔던 모든 여정들을, 하나님은 주관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너의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나로 여호와의 집에서 주님과 더불어 살기를 갈망합니다. 제사장처럼, 레위사람들처럼,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며 살겠습니다.”라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경험한 사람들, 그분이 내 인생의 인도자와 보호자가 되시고, 나에게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고, 나를 옹호해 주시며, 나의 방패와 피난처가 되심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마지막 고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푸른 풀밭으로, 쉴 만한 물가로, 의의 길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심지어 원수 앞에서까지 나를 세우셨던 그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마지막 종착역이 어디입니까?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제사장적인 삶을 말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목자로 만난 사람들의 마지막 기도 제목은 “주님! 제사장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내가 돈을 벌어도 주를 위해 벌 것이요, 내가 명예를 얻는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주의 장막에 거하는 제사장들처럼, 나의 앉고 일어섬이 모두 주님을 위한 제사장 적인 사역이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목자로 경험한 사람들의 마지막 소원, 궁극적 기도제목입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갖고 싶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또 우리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의 제목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소원, 이 모든 기도 제목 너머에, 내가 이 땅을 떠나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잃어버려서는 안될 한 가지 결단, 한 가지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것이 목자되신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셔서 인도하기를 원하시는 마지막 목적지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경험했지만, 마지막 그의 생애 속에서 이런 제사장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실패로 끝난 삶입니다.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권력을 가졌든지 못 가졌든지, 명예를 얻었든지 못 얻었든지, 하나님을 목자로 만난 사람의 마지막 결단, 마지막 소원은, “하나님! 나를 제사장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영원히 살기를 갈망하나이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드릴 수 있는 궁극적 기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한다고 하는 말씀은 이생에서의 역사만이 아닌 영원한 내세의 삶으로의 연결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존 하워드 페인은 고향을 떠나서 파리에서 오랫동안 공부를 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때에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행복하게 귀가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불현듯 파리의 자기의 하숙집이 매우 쓸쓸하고 적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자기 고향 롱 아일랜드의 조그마한 마을이 떠올랐습니다. 거기서 지낸 어린 시절의 풍취와 추억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젊은 시절 많은 방황과 여행으로, 인생의 경험을 많이 가졌지만, 그의 가슴속에 아련하게 떠오르는 추억을 생각 하면서, 우리가 잘 아는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즐거운 나의 집”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내 벗 나의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입니다. 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노래입니다. 세상의 많은 즐거움은, 우리를 오라고 손짓합니다. 긴긴 방황의 세월을 지났습니다. 욕심을 가지고, 이것저것에 탐닉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의 목적인가 하고, 이곳저곳을 방황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나온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마지막 드리는 나의 기도는 “내가 돌아갈 영원한 나의 집이 있는가?”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는 고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경 쇠약에 걸려서 불면증으로 괴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섭고 고통스러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거에 저지른 허물과 죄들로 인해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내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기력과 나약함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기 때문입니다. 원수가 나를 해칠까봐 두려워하십니까?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부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추구할 것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주께서 나를 오라 하실 때, 영원한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미국의 제 2대 대통령을 지냈던 죤 아담스가, 나이가 많아 지팡이를 의지하고 공원을 산책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를 잘 아는 사람이 그를 향해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해 왔습니다.
“예! 안녕합니다. 그런데 집이 다 낡아서 지붕은 파손되고, 벽은 떨어지고, 바람에 흔들려서 받침대까지 세웠습니다. 집이 낡아, 곧 이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듣던 사람이, 가만 생각해 보니까, 이분은 대통령을 지낸 분이고, 연금이 충분하게 나오는데, 집이 헐어서 이사를 가야 한다니,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각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집이 낡아 이사를 가야 하다니요?”
아담스는 “허 이 사람, 뭘 잘 모르는구먼.”하면서 모자를 벗었더니, 다 벗겨진 머리가 보였습니다. “이것 보라고, 내 지붕이 다 낡았지 않소?” 가슴을 열어 늑골, 가슴뼈를 보이면서, “바람벽도 다 낡아서 이제 바람이 새게 생겼소.” 또 지팡이를 가리키면서, “이 집이 흔들흔들해서 버팀목을 세웠소.”하며 웃더랩니다.
이 세상을 떠나지 않을 사람이 있습니까? 한때는 건강을 자랑하고, 젊음을 자랑하고, 패기만만하게 생을 살았던 사람도, 때가 되면, 다 떠나게 됩니다. 한 사람도 이 땅을 떠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가야 할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유명한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팬 하우어가, 어느 날 공원 의자에 앉아서, 해가 졌는데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해는 뉘엿뉘엿 기울고, 공원은 텅 비었습니다. 공원을 지키는 공원지기가,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신사 양반, 도대체 당신은 어디서 왔는데, 해가 져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소?”
이 퉁명스러운 질문에 쇼팬 하우어가 대답을 합니다.
“바로 그것이요,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만 있다면 문제가 없겠소. 내가 지금 그것을 고민하고 있는 중이요.”라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여러분! 세상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갈 때는 다 두고 떠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두고, 사랑했던 것, 그리웠던 것, 놓을 수 없다고 연연해했던 것들까지도, 다 놓고 떠납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갈 곳이 준비되어 있느냐?”
“영원한 아버지의 집에 나의 미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존경받는 신앙의 선배 가운데 김정준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결핵으로 마산 요양소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으셨고, 한국신학대학교 학장으로도 계셨습니다. 또 교수로서 훌륭한 일을 많이 하시다가, 81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분이 떠나시기 전, 생전에 이런 유언을 하셨습니다.
“내가 죽는 날 ‘저 좋은 낙원 이르니’라는 찬송을 불러 주시오. 그리고 요한계시록 20장과 21장을 끝까지 읽어 주시오. 그리고 나의 묘비에는 ‘임마누엘’이라는 단어 한마디만 새겨 주시오.”
그분이 임종 직전에, 떠날 준비를 하면서, 지어 놓은 시가 있습니다. “내가 죽는 날”이라는 시입니다.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다.
그것은 내 모든 이 세상 시름을 없이하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내 길을 준비함이기 때문에.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치어도 좋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안에 안긴, 그 얼굴의 광채를 보여줌이라.
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다.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저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이어라.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다만 주님의 뜻이라면, 이 순간에라도 닥쳐오기를, 번개와 같이 닥쳐와 번개와 함께 사라지기를.
그 다음은 내게 묻지 말아다오.
내가 옮겨진 그 나라에서만, 내 소식 알 수 있을 터이니.
내 얼굴 볼 수 있을 터이니.”
기도합니다.
우리가 방황의 세월을 보내며, 하나님 없이 외롭고 슬픈 시간을 지낼 때에도, 내 곁에 오셔서, 가장 좋은 길로 나를 이끄셨던 하나님 아버지!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서, 이제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심을 고백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나로 평생에 가장 귀한 기도를 주 앞에 올리고 싶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 시인의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되게 하시고 , 이 시인의 소원이 나의 갈망이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