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엡 2:1-10)
할렐루야!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집에 나오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며, 축복합니다.
“새 사람을 입으러”
2013년도 교회 표어입니다.
“새 사람”이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 그것이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봤을 때, “아, 교회 다니는 사람이구나”라고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구원받으셨습니까? 언제 받으셨습니까? 어떻게 받으셨습니까? 구원받은 날을 기억하십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조심해야 합니다. 구원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오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오늘부터, 에베소서 2장을 공부하게 되는데, 이 에베소서 2장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이라는 대드라마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아야 하는 인간이 도대체 누구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사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아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모든 비극은, 자기를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착각하는 데서부터, 비롯됩니다. 주제 파악이 안 되면, 엉뚱한 주장과 결론으로 빠지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듣지 않고서는, 인간은 인간을 결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도대체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성경은 한 마디로 선언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아멘.
여러분!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성경은 한마디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허물과 죄”는 결국 다 죄라는 말인데, 구태여 구분한다면, “허물”은 소극적인 죄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고, “죄”는 적극적인 의미로서,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말은,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기보다는, 영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 겉으로는, 살아 움직이는 것 같으나, 실상 그 영혼은,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성경의 정의입니다.
성경은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을,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아멘.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은, 첫째, 이 세상 풍속을 따라다니는 사람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은 이 세상의 방법, 즉 세상의 풍속,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모든 문화를 사랑하게 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따라, 살아갑니다.
로마서 12:2절에서,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을 멀리 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 허물과 죄로 죽어서, 영적으로 죽어버린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이 세상을 사랑합니다. 이 세상에, 자신의 모든 것을 겁니다. 이 세상에, 자기의 소망과 삶의 전부를 내맡깁니다. 성공과 실패도, 이 세상에 달려 있습니다.
요한복음 15:18절을 보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게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세상은 너를 싫어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세상에서 배척당한다. 어떤 면에서는, 버림받는, 고독하고, 외로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풍속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미움을 받고, 배척을 받게 됩니다.
“교회 사람들보다 새상 사람들이 나를 더 좋아하고,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더 좋다”라고 생각한다면, 한 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둘째,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은 사탄의 종노릇 하는 자와 같습니다.
2절 후반부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사탄 그 자체입니다. 죄인들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방법을 사랑하고, 사탄의 종노릇하기를, 즐긴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8:44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본래 사탄의 자식이었다는 선언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사탄은 살인자요, 진리가 없는 자요, 그 입술에 거짓이 있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은 세상의 권력을 가지고,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악한 영인 것입니다. 그런데 허물과 죄로 죽은 많은 인간들이, 스스로 그 사탄에 종노릇하기를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사탄의 영에 얽매인 사람들은, 살인적이고, 파괴적이고, 오만하여, 핏대를 세우면서, 분노하고, 반항적이고, 폭력적인 인간으로 둔갑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장본인입니다.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뭔가 잡아 당기는 것 같았어”
이것이 사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는 사람들은, 이것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사탄의 종노릇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은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행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아멘.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은, 죄의 욕심, 육체의 욕심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가인은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죄가 그를 다스리겠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에게 반항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을 때, 죄가 그를 지배하게 되고, 죄가 그를 지배하게 되니까, 인간의 마음과 생각이, 욕심과 정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것마다, 악하고, 계획하는 것마다, 섬뜩하며, 생각하는 것마다,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탐욕, 정욕, 재물욕, 권력욕, 명예욕” 등을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은, 이 세상 풍속을 따라갑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은, 불순종 가운데 역사하는 악한 영인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갑니다. 사탄을 따라갑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합니다. 이렇게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을, 세 가지로 설명하면서, 성경은 인간에 대해,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3절 하반절에서,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참모습이었습니다. 겉모습은 살아 있으나, 그 정신과 영혼은, 완전히 파괴되고, 죽어버렸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는 것일까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살려주셨을까요? 무슨 이유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까요?
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아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전체 문맥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한글성경에는, 이 구절에서 중요한 단어가 하나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but)”라는 단어입니다.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비록 인간이 허물과 죄로 인해 죽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고, 세상과 사탄과 욕심 속에 빠져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지만, “그러나”(but)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살려 주셨을까요? 무엇 때문에 구원해 주셨을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주신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함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 속에, 아무리 쏟아부어도 쏟아부어도 바닥나지 않는 풍성한 긍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하나님에게 이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없다면, 그리고 용서와 사랑을 포함하는 이 긍휼이, 하나님에게 없다면, 어찌 우리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인간의 행동을 보십시오. 그렇게 배신하기를 좋아하고, 그렇게 변덕이 심하고, 그렇게 간사하고, 그렇게 교활하고, 그렇게 욕심이 많고, 그렇게 못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드라마를 보면서, “막장 드라마”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면서 한 마디 하신다면, “막장인생”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웃으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에게 긍휼이 없다면, 어찌할 뻔 했을까요? 우리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의 긍휼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이 넘치시기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잃어버리면, 기독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결코 바닥나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죄보다, 하나님의 긍휼이 더 크십니다. 더 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못되고, 더러운 우리가, 살아 숨쉴 수 있고, 저주받은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풍성하신 긍휼 덕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이 풍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주신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여기서 “큰”이라는 단어에, 강조를 주고 있습니다. “그 큰 사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랑은 물론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만약에 사랑”입니다.
“만약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하겠다.”는 사랑입니다.
“네가 나한테 잘 해 주면, 나도 너한테 잘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네가 나한테 하는 것을 보고, 너한테 잘해줄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때문에 사랑”입니다.
“너가 예쁘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하겠다.”는 조건적 사랑입니다.
“너에게 재물이 있기 때문에, 너에게 권력이 있기 때문에, 너를 사랑하겠다. 너를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지, 없으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권력이 있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지 권력이 없으면 따를 필요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입니다. 이것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하겠다. 네가 예쁘지 않아도, 재물이 없어도, 학벌이 없어도, 집안이 안 좋아도, 권력이 없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하겠다.”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은, 어떤 사랑입니까? “만약에 사랑”도 아니요, “때문에 사랑”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건없이 사랑하시는 그 큰 사랑”입니다. 그 큰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신 것,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준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5절 후반부를 보면, 괄호 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아멘.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날마다 은혜와 감격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십자가에서 살려 주셨던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 주신 것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를, 현재 이 순간에, 일으켜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약속받았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삶, 즉 “이전 것은 지났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강하게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은 거듭난 자로서, 의로워진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능력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순간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에서 끝난다면, 지금 현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능력이, 여러분의 현재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라는 것을 매일매일 느끼고, 체험하고, 감사하고, 감격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에베소서 1:20절 말씀입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안에서 역사하사,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보좌 오른쪽에 예수를 앉게 하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만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실까요? 예수 믿는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오늘 에베소서 2:5-6절을 보면,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는 중요한 동사가 3개 나옵니다.
첫째는, 5절의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에 나오는 동사입니다. “살리셨고”
둘째는, 6절의 “일으키사”라는 동사입니다.
셋째는, 6절 하반절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에서 “앉히시니”라는 동사입니다.
“살리셨고”, “일으키사”, “앉히시니”라는, 이 세 단어는, 구원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이 세 단어를 가지고 구원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과 함께, 우리의 허물과 죄에서부터 우리를 “살려 주셨고”, 살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일으켜 주셨고”, 일으켜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영광의 보좌에, 우리를 “앉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살리셨다”는 말은, 십자가에서부터 우리를 살려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일으키셨다”는 말은 부활했다는 뜻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성령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주님께서 우리를 영광의 보좌에 앉혀 주시는데, 이것은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의 영광 속에 들림 받고, 승천하게 될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풍성하신 긍휼과 큰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과 죄로 죽었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 주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게 해 주실 것입니다.
골로새서 3: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땅에 살지만, 땅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했습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과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해서, 오늘날의 이 역사 속에, 현실 속에, 내 생활 속에,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감격과 기쁨 속에서 날마다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주실 것입니다.
장차 우리들이 되어질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앉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하늘의 영광을 맛보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을 생각하면, 현재의 어떤 고난이나, 어떤 슬픔도, 참을 수가 있습니다.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환하게 웃으며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성도들로서, 들림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저주스러웠으나, 예수 믿고 나서는, 자꾸 하늘을 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언젠가 주님께서 구름 타고 임할 것을 생각하면 하늘을 볼 때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절망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육신을 생각하면, 병든 걸 생각하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생각하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위의 것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이 구름 타고 다시 오실 것을 믿으십시오.
신약의 많은 구절들이,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얼마나 많이 기록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영광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우리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실 것입니다.
찬송가 180장 1절 가사입니다.
“하나님의 나팔소리 천지진동할 때에 예수 영광중에 구름 타시고 천사들을 세계 만국 모든 곳에 보내어 구원받은 성도들을 모으리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부를 때에 잔치 참여 하겠네”
여러분! 그 영광의 모습, 하늘 보좌에 주님과 함께 거할 그 모습을 소망하면서,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으셨습니까?”
구원은 어떻게 우리에게 이루어집니까? 이 구원 문제에 대한 많은 오해들이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파”라는 이단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구원이 인간의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선물이냐?”
“구원을 위한 인간의 어떤 노력도 전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질문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심리적으로, 공짜를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몹시 기분 나빠하기 때문입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실 정도로, 굉장히 좋아하면서도, 기분 나빠합니다. 자존심 상해합니다. “내가 언제 공짜 좋아했어” 그게 인간입니다.
그러한 심리가 구원에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은혜로 값없이 준 것이 좋기는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기분 나쁩니다. “그러면 뭐냐? 내가 한 게 아무 것도 없지 않느냐! 그럼 나는 바보냐” 싶은 것입니다. 이런 심리나 생각이, 구원에 대한 여러 문제들을, 계속해서 야기시켰습니다. 그 해답이 8절에 나타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아멘.
성경은 이러한 갈등과 질문이 있는 것을 아시고 “구원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으면, 구원이 필요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면, 인간에게 무슨 구원이 필요합니까?
도를 닦고 수양을 하면, 그래서 구원받을 수가 있다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깊은 산 속에 들어가, 도를 닦아야겠지요.
다른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고 그래서 자기 공로를 쌓을 때,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열심히 공로를 쌓아야겠지요.
그런데 성경은 “구원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공짜라는 것입니다. 받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공짜니까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구원은 아무 대가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은 값없는 하나님의 선물인데,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주시는 선물을 손을 내밀어 받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선물을 주시는데, 그 선물을 받지 않으면, 결코 내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받아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것이 됩니다.
내가 믿게 된 것도, 주님을 찾게 된 것도, 말씀을 읽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것도,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도, 또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것도, 내 안의 “나”가 한 것 같지만, 믿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믿음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내가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8-9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아멘.
여러분! 이 구절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으로, 구원이 내게 왔다”는 말입니다.
내가 교회 나오게 된 것, 기도하게 된 것, 주님을 찾는 갈급한 심령을 갖게 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하셨다고 고백하는 것, 순종과 신뢰입니다. 믿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할 일입니다.
이런 너무 단순하고 간단한 것도 하지 않으면서, 구원을 위하여, 더 좋은 세상을 가기 위해서 뭔가 내 힘으로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만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단순한 원리도 깨닫지 못하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주여, 믿습니다.”
단순하게 믿으십시오. 의심하고, 따져보고, 계산해 보고, 그러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으면 내가 손해 보는 것 아닌가?”
하나님께서 구원의 선물을 주실 때, “고맙습니다”라고 손 내밀어 받는 것, 그런 단순함이 믿음의 기초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이 살아온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10절 말씀은 구원받은 자의 결론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 줍니다. 10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한 마디로, 인간은 창조자가 아니라, 피조물이라고, 본문은 다시 한번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만들어졌다는 것은, 만든 분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관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창조자가 아니라 피조물입니다. 성경은 인간은 선을 위해서 지음 받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뒤가 바뀌면 큰 일 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선을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에게 선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몇 번씩 강조합니다. 인간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이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물었을 때, “네가 어찌하여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마 19:16-17)
인간에게는 정말 선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이 필요합니다. 구원받은 자 안에, 선하신 분이 한분 계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 선을 위해서 산다는 말은,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선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원리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태어나서, 평생 폐만 끼치고 살다가,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 남의 신세만 지다가, 심지어는 감옥 신세까지 지고는,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에게 선한 일,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항상 누구한테 도움만 받고, 폐만 끼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살라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선을 위해, 살라고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라고, 보내 주셨습니다. 남을 도우면서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을 베풀면서, 가난한 자들도 보살피며,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기 위해서,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십니까?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자신을 위해 사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십니까?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자인데, 그는 선을 위해서, 지음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며 사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남에게 은혜를 나누고,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면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주님 앞에 가게 됩니다.
여러분! 구원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선물을 받으셨지요.
여러분은 구원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구원의 능력을 소유하고, 부활의 증인으로서 살고 계십니까? 그리고 앞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면서, 꿈 많은 소녀, 소년처럼, 영광 속에서, 그 신비스러운 구원의 비밀을 느끼며, 살아가십니까? 그런 삶이 여러분에게 있길 바랍니다.
눈을 들어 믿음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을 다시 한 번 사모하십시오. 주님은 무덤에 갇히신 분이 아니라, 부활하신 분임을 믿으십시오. 이 모든 것이, 은혜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교회로 불러주신 것은, 선한 일을 위해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은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과 사랑 때문에, 우리는 지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태양보다 더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하신 그 뜨거운 사랑을, 지금도 변함없이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은, 우리의 행위와 공로 덕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항상 기억하며, 항상 감사하며,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십자가에서 구원해 살려주셨습니다.
일으켜 주셔서, 부활의 기쁨을 맛보게 하시고, 훗날 하늘 보좌 우편에 앉게 되는 하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늘 감격하며,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